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3강

아빠와 함께 2013. 12. 1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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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 100701요한계시록 3강

제 3강a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말씀을 생각할수 있는 여건과 환경과 시간을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떡이 없어 모자라서 죽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없어 죽는 이러한 이 시대에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는 확답할 수 있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요한계시록 오늘 이시간에는  7교회에 대하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7교회가 처음 등장하는 것이 요한계시록1장11절에 보면
가로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그렇게 되었죠
7교회가 실제로 있는 교회 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사도요한이 사람입니까 로보트입니까 묻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사도요한이 소설책의 인물이 아니고 홍길동이 아니고 실제로 실제로 있는 사람이라면 7교회도 실제로 7교회가 있습니다 지명도 나와 있습니다.
터어키 남쪽 밧모섬 앞에 이쪽에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라오디게아 이렇게 교회가 있어요.

그럼 한번 물어봅시다. 사도요한이 실제 인물입니까 가상 인물입니까 7교회도 실제로 있는 교회 입니까
가상교회입니까 실제로 있는 교회라면 그렇다면 7촛대가 실제로 있는 겁니까 가상입니까
네 그게 문제죠. 성경을 잘라가지고 가시적인 것만 실제로 봐버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한 세계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외면해버립니다.
제가 좀전에 우리 목사와 집사와 식사하면서 사당동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인파들을 봤어요.퇴근시간이라 차가 비잡고 엄청 사람이 위에서 올라가고 내려가고 합니다.
실제로  생생하게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메섹(엠마오)에서 두 제자들을 만난 것처럼 사람들이 실제로 생생하게 있는 거보다 실제로 더 생생하게 살아계신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에요.

다메섹에서 두 제자와 내려갈 때에 그들은 생생하게 자기가 본 것을 생각하면서 실망스러움 속에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근데 생생하게 생긴 아저씨가 게 아저씨가 붙어가지고 동행합니다.  그러나 생생한 그분이 예수님인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식사하면서 눈을 열리게 하니까 예수님이었습니다. 열리는 순간 획하고 그분이  사라졌어요. 그럼 그분이 획하고 사라졌으면 그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아니죠? 우리 눈에 왜 예수님이 꼭 보여야 된다는 것은 너무 심한 욕심이고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있음을 믿어야 그게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그렇게 구분될 거 아니겠습니까?

안 믿는 사람도 눈치 채는 식으로  일해 버리면  안 믿는다는 티가 안나잖아요.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의 티를 내야지 항상 생생하게 사람만 중요하지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 같은 것은  안 중요해라는 사고방식들이 주위에  이렇게 많이 들끓어져야 아~~ 이 세상이 정말 불신의 세계구나.  성경 말씀대로 맞네. 하고 신앙인들은 확인해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불신자들의 말이  “너도 나처럼 믿는다고 착각하지 말고 네 눈이 너도 사당동에서 사람들 보이지? 이세상은 사람뿐이야 하늘 달  별 나무 바퀴벌레 그 뿐이야 그뿐이라고 왜 자꾸 성경 속에만 나오는 세종대왕도 사라졌고 이순신장군도 사라졌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하는 그도 다 없어졌는데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없는거야 라는 압박감을 우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늘 압박감을 받고 있습니다.  불신의 세계에서...

그런데 불신의 세계가 이미 신학교와 교회까지 다 점령했단 사실 아닙니까.  이미 신학교와 교회까지 예수님의 이 불신의 세계가 다 점령해 가지고 예수님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윤리적 도덕적으로 지키면 이미 하나님 뜻이라고 가르치는 그런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 제사 날 다 됐는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셔도 그 분의 교훈은 남아 있으니 우리 자손들 도리로서 지켜야지 이거하고, 이거하고  할아버지 제사 지내고 있는데 할아버지 나타나셔서 어이 다 치워 이거 뭐야 이거 무슨짓이야  제사 지냅니다. 누가 죽었는데 제사드려? 이거 영 얘기가 다르죠? 이거  다른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 눈에 보입니다 분명히 보입니다 빨간옷 파란옷 하얀옷 보입니다 요즘 하얀옷 많이 보입니다. 분명히 있어요. 거기 예수님 섞여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변화산에서 하나님 말씀에 “

너희는 딴 걱정 말고 저의 말만 듣고 살아라” 쓸데없이 환경 문제 북한 핵문제 신경쓰지 말고 너희는 예수의 말만 듣고 살아라 그렇게 살았던 엘리야 모세 천국에 가 있습니다.
구원 받는 것 어떻게 보면 간단합니다. 예수님 안 죽고  지금 우리들 함께 섞여 있기에 사람들 기대하는 말,  시선 그것보다 더 엄중하고 진지하게  생생하게 살아계신 예수님 말씀을 우위로 느끼면 그게 구원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1장 11절에 보면  7교회 분명히 있다 했습니다. 동의했습니다. 제가 또 동의를 받아내야 할 곳은 12절입니다.
12절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금촛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여기 왜 이렇게 힘이 없는 표정이에요? 왜 그래요?   분명히 금촛대 있죠?
또 묻습니다  7교회가 하나교회 근처에 있다고 합시다. 7교회가 터어키에 있지 않고 두아디라 사대....교회가 하나교회를 포위하고 있다면 그러면 하나교회는 어느 교회를 보아야 합니까? 7교회를 봐야 합니까?  주님 안의 7촛대를  봐야 합니까?
하나교회 어디를 봐야 해요?  7촛대 거하는 주님을 봐야 되죠. 하나교회 주위의 7교회가 욕합니다. 하나교회만 교회고 우리는 이단이냐 이렇게 불평불만하고 공격해댑니다.   많이 들었습니다.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엄청나게 들을겁니다.

교회가 교회하고 교인이 교회하고 대화할 때 눈에 보이는 것(불신자의 안목)만 이야기하자 라는 안목을 넘어서서  범위를 넓혀서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는 안목을 가지고 서로 그런 안목을 가지고 이야기가 되야 그것이 말씀대로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다고 그거 뚝 잘라버리고 보이는 것만 이야기 하자 하면   신앙이 다르네요 뭐 같은 질이 아니네요.  하면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어느 집사님, 어느 교인이 교회 찾아왔는데 “목사님   이 교회 그만 나올랍니다. 왜?  저 집사님이 나하고 식사할 때 먹는데 줄줄 흘리고 먹는다고 저보고 뭐라 하니 삐지고 나올 때 사랑 많은 교회인줄 알았는데 목사님 하는 말이 ”사람보고 나옵니까 주님 보고 나오죠“. 자꾸 이야기 하죠. 주님이 보여야 믿지. 그렇다면 그분이 삐진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교회 올 때 이미 사람만 보겠어.  다짐에 다짐을 하고 교회에 온 거에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어떻게 이용할까를 예상하고 온 거에요. 그런 사람을 목사님이 붙들 때 내 그 집사님 주의하고 공개사과 할게요.  앞으로는 더욱더 집사님, 성도님 도와드리겠습니다. 필요하면 집사님 심방가고 어려우면 도와주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붙잡은들 뭐합니까 노림수가 눈에 보이는데 붙잡아도 곤란하죠.

오늘 주제가 그거에요.

붙잡지 말아야 할 것을 붙잡아서 이제 7교회가 문제가 된 겁니다 7교회 문제 간단하죠? 되게 간단해요.  사도요한의 생각과 기존의 목회자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천년만년 7교회가 등장한겁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안 된다는 구절이 뭐냐하면 둘 중에 하나만 하라는 겁니다.   교회 하든지 말씀하든지

왜냐하면 교회 추종하던지 말씀추종 하던지 둘 중에 하나만 하라는 겁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어디서 나왔다고요? 
7촛대가 원래 교회 원본입니다. 7촛대는 7별이 관리합니다. 7별은 뭐냐? 교회 천사(사자)들입니다. 교회 천사들은 고집이 세 가지고 교회에 대해서 봐주는 것 없어요. 기존의 있는 교회는 교인들 포섭하느라 바빠서 “아이고 말씀은 천천히 나중에 하시면 되고 우선 오세요” 사랑 원하면 사랑주시고 붙잡아놓고 애쓰는 반면에 정작 7촛대를 관장하고 있는   
7별은 융통성이란  손톱만큼도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7교회가 복사본인데  원본 7촛대도 있습니다.

11절에 7교회 나오죠 12절에 7촛대 나오죠. 7촛대 사이를 누가 돌아다니고 계시죠? 7촛대에 그 사이를 예수님이 돌아다니고 계십니다. 왜 돌아다니는 겁니까? 왜? 왜? 가만히 앉아있지 왜 돌아다니는 겁니까? 
원본하고 복사본이 안 맞아요. 원본하고 복사본이 안 맞아요.

교회 문제는 목회자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문제는 7교회를 지장 없이 잘 관장하는 주님 문제지. 너희들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존의 이땅에 있는 눈에 보이는 교회들이 할 일의 전부입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7촛대가 결국은 한 촛대로  모이게 되 있어요 .

이걸 에베소서에서는 머리도 하나 요 몸도 하나 요 주도 하나요  여러분 포크 봤죠?   포크가 2개 3개로 갈라지잖아요. 포크 가지가 4개하고 포크를 4개라 하지 안잖아요. 하나에요. 
한 몸이 7개로  갈라지잖아요 왜 7이냐? 시범 케이스에요.
왜 시범 케이스냐? 그때 사도요한이 볼수 있는 관장할 수 있는 교회가 7교회에요. 필리핀 알라스카까지 갈 필요 없어요.  사도요한이 볼 수 있는 관장할 수 있는 교회가 7교회에요.
이것만 채택하면 되는데 모델하우스에요.

7교회 내용 들어보니 쉽죠?
7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죠. 교회는 교회문제에요. 교회를 잊어버려야 해요. 교회 잊으라하니까 그렇다고 말씀은 잊으면 안 되고 ....
교회는 잊는 대신에 말씀을 생각하면 계1장 11절 12절 보니 말씀 생각하니 교회가 숨어있더라 어디? 보이지 않는 형태로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 다시 묻습니다.
사도요한이 실제 인물입니까? 아닙니까? 실제인물이죠 로보트 아니죠? 차두리 아니죠? 실제 인물이죠.
그러면 사도요한이 편지하라고 했던 7교회가 실제교회 입니까? 아닙니까? 실제 교회죠. 그러면 다시 묻습니다. 7교회 편지하라고 보낸  7촛대가 실제교회죠? 교회가 실제죠. 교회가 두군데 있으면 안되겠죠. 교회가 한군데로 모아졌죠. 하늘나라 교회 있잖아요. 하나로 모아졌잖아요. 그런데  왜  교회 신경 써요. 

진짜 원래의 교회에서  원래 우리보고  무슨 말씀을 주고 있는가  말씀을 주고 있는 곳이 진짜 교회에서 흘러온 말씀이라 생각하면 그게 바로 진짜 교회와 연결고리가 유지되고 있는 그러한 7교회가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 속한 지체들입니다.

강의 끝났어요. 할 것이 없어요. 할 게 없어요. 그러면 7교회 생성 누가 책임지는가
목사 목사님들은 교인 핑계대고 교인들은 목사님 핑계대고, 목사님들은 교인들이 평소에  말씀을 들으라 하니까 교인들이 평소에 세상에 사당동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남들은 부자인데 나는 왜 가난하냐  남들은 건강한데 왜 나는 몸이 아프냐 그러니까 좋은 사랑의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며 그렇다면 왜 내 애로사항을 들어줘야지 하고 우리 조상들이 절에 가듯이 온 거에요. 산으로 가려면 멀잖아요.
그래서 가까운 절 교회에 온 거에요. 지성으로 감천  빌면 복 준다고 해서 소문나서 왔다는 겁니다.
목회자가 말씀 전해도 가버리니 말씀 없이 간증 집회를 해버리니까 오게 되더란 말이에요.
말씀 말고 간증하니 어떤 사람은 이렇게 행해서 복 받았다고 하니 우르르 소문 듣고 오더란 말이죠.
목사가 신학교에서 복음 배우고 다 했지만 그것 같고는 목회가 안되고 고객이 원해야 점포가 되잖아요
손님이 왕이잖아요. 손님이 왕!  물은 셀프지만...ㅋㅋ 딴거 말고 말씀이죠.
손님이 와야 목사님들은 교인핑계 대는거죠.
그러니 교인이 무슨 핑계를 대느냐 하면 우리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거에요.

여러분 손발 가졌죠? 예 손발 가지고 뭘 해야 되지 않습니까?  행하라고만 했다는 거에요.
교회 오기 전에 알았던 사상이나 교회 와서 안 사상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
교회 안와도 나쁜 짓 하면 벌 받고, 착한 일하면 복 받고, 교회와도 나쁜 일 하면 벌 받고
이거 뭐 똑 같으니까 다만 차이가 난다면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면 30배 60배 100배로 복 준다는 그거 하나 새로 안 것 밖에 아무것도 새로운게 없잖아요.
성경을 보실 때에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부터 이 사상이 그만큼 어둡다는 것을 감안해서 1장부터 철저하게 깨부수고 들어갑니다.

“알파요 오메가 시작이요 나중이라” 하나님은 시작이요 나중이라.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시작이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이 끝장 날이 있다는 말이죠. 현대 철학자들은
시작한 것이 없기 때문에 끝도 없는데, 종교 교회 지도자들이 사기 쳐서 사람들에게 돈을 빼먹는다고.. 그래서 절대로 종교 단체에 가면 안된다.
시작이 없다면 끝도 없는데 왜 자꾸 사람들은 왜 끝을 얘기하느냐
성경은 시작이 있거든

그러면 시작이 있으면 시작이 어떻게 시작되느냐
왜 그들이 그렇게 시비를 거느냐하면
시작된 것이 그대로 끝에 가면 그들이 할 말이 없는데 중간에 인간의 행함으로 문제가 틀어져 버리면 시작은 이렇게 좋게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솜씨가 없어서 일이 엉망진장이 되가지고 엉망진창 된 것을 중간에 들어온 인간들이 자기 운명을 지가 알아서 착하고 선하게 힘들게 열심히 살면 자기 운명을 괜찮은 운명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식인지 
애초부터 시작부터 결정된 채 나오는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이야기 하라고 철학자들은 신학자에게 공격을 해댑니다.

시작은 괜찮은데 나중에 되는 것은 인간하기 나름입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철학자들은 승리했어요. 그러니까 그게 우리가 아는 신이야
신은 아무리 뭘 해도 자기 운명 결정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 하기 나름이야 그게 바로 철학자들이 주장 한거야  인간이 나서야 데모도 하고 이 사회는 손발 놓고 묶고 있으면 사회 돌아가지 않아 우리가 나서야 촛불집회도 하고  교회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 줘야 신의 뜻이야 라고 이야기 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니까 신학자들이 할 말이 없는 거에요.
가만히 보니까 신학자 주장한 거 보다 철학자들이 더 많이 알고 더 심도 있게 신의 아들처럼 살아가고 있거든요.
신의 아들 하니까   “사람의 아들” 소설 쓴 이문열 ‘ 빈민촌에 가서 어려운 사람 돌보는 것이 더 멋지게 보인단 말이죠.

뭡니까? 계명대학교 이사 김 진홍 목사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복 받습니다.라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성경을 다시 보게 되면 처음부터 결정됐어요.
그러면 성경에서 다시 보게 되면 인간 들어갈 틈이 없어요.
성경이 처음부터 결정됐다는 사실이 그들 눈에 왜 안보이죠? 참 이상하죠 정말 이상해요. 정말 이상합니다.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창세 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했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됐다.
라는 그것이 왜 그들 귀에는 들리지 않을까요??....
이것은  믿을만한 것을 따로 챙겨놓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믿을 만한것을 보이는 것을 따로 챙겨놓고 그 다음에 성경을 보니까 성경은 자기가 확립한 사고방식과
사상과 인생관을 그냥 손도 박수 쳐 주는 호응해주는 용도로 잡아 땡기는 거에요.
그러면 따지고 들어가는 거에요. 당신이 성경을 보기 전에 당신 나름대로 확립한 철학과 사상은 누구 중심이죠?
내가 일생동안 느꼈던 내 중심이죠.

그러면 성경은 두 가지죠.
첫 번째는 그게 성경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죄라고 규정했으며 그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두 번째 단순히 죄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 죄로 인하여 메시야가 밀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해도 그 생각한 것을 구원 받지 못하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지 못하죠.

자 봅시다. 오늘 들어가기 전에요 들어가기 전에 봅시다.
불교하고 복음하고 차이가 뭐냐면
불교는 자기가 자기를 늘 연구하고 탐색하는 거에요.  중심이 누구 중심입니까? 중심이 나 중심입니다.
부처가 있으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 중을 죽이고
중요한 것은 내가 부처고 부처가 모델케이스가 되는 거에요  모든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중심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현실이 뭐가 생생합니까? 자기중심이 되는 거에요.
내가 여기 있음 이것이 생생함이에요.  이들에게 7촛대 있습니까?  하늘에 있는 7촛대가 없는 거에요.
불교 신자 중한테 7 촛대 하고 무슨 상관이냐? 안다고 행복해집니까? 7촛대 알면 내가 행복해집니까? 하고 묻는 거에요. 당신은 행복해 질 자격이 없어. 저주 받아야 마땅해. 누가 나보고 저주 받으라고 해  누구야? 예수님이 그렇게 하더라.  하나님이 그래.
누가 그래? 예수 나와 보라 그래. 내가 손 좀 봐야지. 그러니까 또 예수님이 미움 받고 십자가에 죽는 일이 벌어지는 거에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수난 받는 그곳이 어떤 장소든지 십자가 주님이 못 박힌 장소가 되는 거에요. 그것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옛날 구약에는 애굽이 여기 있고 애굽과 광야와 약속의 땅 사이에 무슨 바다가 있어요? 홍해바다가 있죠. 그럼 애굽은  홍해바다 건너기 전에 애굽은 애굽이에요

홍해바다 건너 광야 지나 가나안 약속의 땅에 와야 이 지점에 와야 약속의 땅이 되요. 애굽은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신약에 보면 애굽이 약속의 땅이 되고 말아요.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2장에 나와요. 내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호세아에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애굽에서 피신한 것을 가지고 뭐를 인용합니까?“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공간이 애굽이 되는 거에요.
신약에 오면 땅의 개념이 이상해버려요.
요한계시록에 오면 여기도 애굽 여기도 애굽이요 이 세상에 애굽 아닌 곳이 없어요.
오호선 대장이 어디 올라갔습니까? 아세요? 오호선 대장을 아십니까?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갔잖아요. 거기가 애굽이에요.

그리고 골로세서 3장에 보면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다른 땅으로 이전해야 될 그런 신분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당동에서 내려오는 그 수많은 인파들 생생하게 눈에 보는 인파들 그것만 쳐다보고 있으면... 사당동이 어디 있어요?   대구가면 중앙동, 동숭동 따로 있지. 모든  이런 것은 공간적인 혼선으로 반칙에 해당되는 겁니다. 공간적인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성경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디가도 애굽이고 어디가도 십자가 죽는 장소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십 여년 전에 대구 어느 교회에 있었는데 누가 물어요. 목사님은 성지순례 안갑니까? 젊은 사람이 투박스럽게 물었습니다. 지금은 말씨가 좋아졌습니다만...
지금 여기가 성지인데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왜 여기가 성지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 바로 예수님 계신 곳이 성지인데 지금 거기 가면 예수님 아니고 거기는 예수님 기념만하지..사람들은 오해하게 되요. 예수님이 없다더니 역시 없구나.
화장실 가서 2층에 가서 아! 여기 예수님 여기 계시구나. 이렇게 느껴져야 하는데
화장실은 원래 귀신만 있고 몽달귀신만 있고 적어도 예수님 만나보려면 갈릴리 가야돼 그래서 갔더니만 평상시 예수님 없다더니 역시 없는 거야. 자기 믿음 없는 것은 정당화 할 수 있는 것이 농후한 거에요. 돈 들여 가지고 여행사에      교회한테 차비 얻어 내가지고



요한계시록에 들어가면서 바로 이러한 개념의 확산을 알아야 해요. 개념의 확산!!
개념의 확산이 어떻게 퍼지는가를 봐야 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왕하5장 지난 수요일에 한 겁니다.  왕하 5장에 나아만 장군님이 문둥병 걸렸습니다. 낫고 싶어가지고 엘리사  찾아왔습니다. 아직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생한 인간 엘리사 선지자 만나야  문둥병 내 몸이 생생하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말씀만 주었어요. 말씀만!!  요단강 7번 들어가라는 거에요. 그래서 삐져가지고 그냥 가려고 했습니다.
주위에서 말려서 그냥 7번 요단강에 들어가서 몸이 나았어요.
문제는 게하시가 문제였어요. 그걸 보고 게하시는
어이 나아만 장군 그거 그냥 갖고 가면 어떻해. 염치가 있어야지.  당신은 우리 엘리사 선생님이 말씀 줘서 나았잖아. 라고 해석해서 우리 엘리사 선지자 편에 뭔가 나은 값을 해야지. 그냥 그렇게 안줘도 됩니다한다고 그냥 넙죽 가져가면 어떻해. 내 놔. 그래서 줘 버렸단 말이죠. 주니까 자기는 선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뭐를 줬는고 하면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게하시가 문둥병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정작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내가 순종해서 문둥병  요단강 7번 왔다 갔다 한 것이 전혀 병 낫는데 아무런 보탬이 안 되었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본인이 압니다.
그 옆에 사람은 순종해서 요단강 왔다 갔다 하였기에 나았다고 그 댓가로 얻어 먹었다고  오해를 한 겁니다.  여러분 웃기지 않습니까

나아만 장군은 물에 7번 왔다 갔다 한 것과 상관없이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서 이 병을 그냥 낫게 한거에요
그래서 엘리사가 안 만난겁니다.


말씀이 온 것은 그 말씀을 통해서 너의 순종이 너에게 어떤  보탬과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에요. 우리에게 말씀을 준 것은 너는 낫게 되었기에 낫게 된 거에요. 언제부터?? 창세전부터...
창세전부터  문둥병 걸리게 되어 있고 낫게 되어 있는 거에요. 
그게 알파와 오메가에요. 이미 시작할 때부터 중간에 틀어지는 것이 없어요.
이미 누구는 천국가게 되어 있고 누구는 지옥 가게 되어 있고 가룟 유다는 자살해야 되고 전부 다 들어 있어요.
이게 뭡니까?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 입을 자에게   긍휼을 주는 그런 방법으로만 구원되는 겁니다 . 그런데 은혜와 자비를 이 중간에 있는 무엇이 끼어드는가 하면 내 행위로 얻어내는 어떤 은혜, 내 행위로 바쳐서 받는 보상 그런 식으로
다 뒤바꾸는 거에요.

그 뒤바뀜의  현장에서 주님이 십자가 못 박힌 몸으로 등장하시는 겁니다.
인간아 이 같은 죄 우습게 봐서 내가 죽었고  니가 순종해서 구원 받는다고??...
내가 너같은 인간 때문에   피 흘려서 죽는다 근데 이 사실을 신약에 와도 사람들이 모르고
예수님 믿어서 구원 받는줄 알고 있어요. 예수님 믿어서 구원 받는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예수님 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이미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 하는 것은 우리 믿음 없이도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에요. 십자가에서

그담에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나 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에서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아~~ 내 행함이 아니구나. 오직 주님의 피의 공로로 피 공로로만 구원 받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나에게서 나오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이미 완료된 믿음 그러니까 제 값을 하는 믿음, 효용이 충분히 나타나는 믿음은 수입을 해야 합니다.  그냥 공짜로 수입해서 온 믿음으로 봐 보니까  내가 믿어서 예수 믿는 믿음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거에요..

그때부터 자기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피를 증거하는 거에요.
이걸 사람들이 몰라요. 몰라요.  하여튼 7교회 요한 계시록의 7교회 2장 3장  신학교나 교회에서
7교회에서 우리도 바른 교회 되자고 해요  바른교회 돼서 구원 받는 사람  한사람도 없어요. 바른 교회는 우리 소관 아니에요. 바른 교회 될 필요 없습니다.

바른 교회는 이미 있어요. 그걸 믿으면 되어요. 바른 교회는 교회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아! 우리 교회는 옳은  교회 아니구나 그걸 믿으면 바른 교회에요. 교회에서 복음이 나오고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복음 믿고 나오는 겁니다. 교회에 기대해서 나오는 거 아닙니다.
 
교회 사랑받기 위해 오면 안 됩니다. 요한 계시록 2장 3장 설교하는 것, 주석해놓은 것 보면  기가 차요. 기본적인 감을 전혀 못 잡고 있어요.
이겁니다. 요한 계시록 2장 3장에서 책망 받는 일이 있거든 우리보고 책망하란 말이 아니라 책망 받는 일이 나타나야 한다는  거에요.

아! 이거 참 무슨 뜻인지 내가 해놓고도 진짜 어려운 말을 했는데...
아버지가 장사 안하고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힘들게 일해서 자식 키우느라 애쓰는데 아버지는 놀음판에 가서 놀음만 하고 있는 거에요.
그걸 목사님이 보고  김 집사 남편이 노름판에서 노름하고 있습니다..라고 얘기 한것은
남편은 죽 노름하란 말이에요. 노름하는 남편 개과천선해서 교회 오란 말이 아니고 노름하란 말에요. 그리고 당신 힘으로 힘들게 일해서 자식 키우라는 말이에요.
왜들 그래요 표정들이.....ㅋㅋㅋ 

그래야 하나님 말씀대로 다들 된 거에요.  그걸 노름판에서 와 버리면 그건 목사 말이 틀린게 돼버려요.
당신 남편 노름 좋아 하니까 계속 좋아하게 두고 자꾸 고칠라 하니까 행함이 들어가는 거에요.

에베소 교회 첫 사랑 잊어버렸다. 그냥 잊어버려요.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왜 담당교회는 원본 따로 있기 때문에 사본은 어째도 괜찮아요.
아~~ 그래서 교회가 아니구나. 그걸 알면 얼마나 속이 시원합니까?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 우리교회 정신 차립시다. 정신 차릴 것 없어요. 주님만 있으면 족해요 .뭘 기대합니까?
좋은 교회 나와 보라 해요. 화평교회? 아이고 참!!  녹매교회? 녹차 매실교회?  우리교회? 허... 우리 교회가 좋은 점은 뭐냐면 우리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교회 교인들이 다 안다는 사실이 좋은 점이에요.
우리교회 교인이 예수 믿고 나오지 교회 믿고 나온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정말 좋아요. 그래서 소통이 돼요.

하루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객소리 많이 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월세가 많이 나가고 재정이 적자 나고 목사 월급 주기도 참 부담되고 이럴 때에  여러분들이 얼마씩 돈 내가지고 목돈 내가지고 교회 하자 이러지 마시고, 평소에  여러분 사는 집을 개방해서 우리 집은 20평인데 교인들 대충 앉게 하겠습니다.  ‘우리 집을 개방 하겠습니다 하고  여러분 집을 개방하고 돈 내지 말고...여러분 집을 개방해야 집 따로 있고 교회 따로 있고 하는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다들 집 갖고 계시죠?  교회가 교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여기 폭격 맞으면 집으로 모여라 하면 됩니다.


말씀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두세 사람 있는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빠져 버리면 뭐가 교회겠습니까.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주는데 여러분 정신을 엉뚱한 교회에 신경 써 버리면  주님조차 쫒겨 나는데  그 동네에서 주님도 배제당해요.
 
목사님들 교회 신경 쓰는 것 하나 밖에 없어요.  그건 생존 문제에요. 자기 점포에요. 점포 
생계 때문에 그래요. 청춘 다 바쳤지. 이젠 기술도 없고 생계 때문이고 노후 대책도 그것밖에 안되고 그 외 이유가 없어요. 사진관 하다가 다 때려 치고 사진관 안 되니까  목사 되면 성공한다는 그런 것을 기도원을 통해서 큰 목회하는 선배들한테 말 많이 들었거든요.

근데 그런 식으로 후배 선배들한테 약 올리듯이 다 때려 치고 목사 성공했다는 말을 할 때
맞아요.  사도요한 살아있죠,7교회 살아있죠. 기도원 살아있죠. 그것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뭐냐면 예수님의 말씀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비교하여 보라는 거에요. 기도원 가서 생생하게 그런 간증 들으시고

아!! 그것보다 주의 말씀이 십자가 죽으심이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여서 그 피로 우리를  교회되게 하셨다는 사실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게 될 때 비로소 그런 이단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요.

시작이요 나중에 이런  온갖 것들이 들끓는 이유는 사람이 자기 믿음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 신념으로 이 어두운 세상의 유혹을 극복할 수 없었던  죄인인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안하고와 관계없이 이미 결정된 사항을 나중에 차후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통고해 준 겁니다. 마~ 땡 잡았어요. 믿을 때에? 아니  창세 전에...
창세전에 없었는데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은혜고 자비지.그러니까  니가 니 의견 받아서 내가 구원하진 않잖아.
구원해주이소~ 이래야 구원 안하잖아요. 여러분 설계도 먼저 보고 로봇 만들잖아요. 로봇만들어놓고 의견 듣고 수정하진 안잖아요. 여러분 설계도대로 하지 이미 짜여진 대로 다 했을 뿐이에요. 너는 이렇게 죄인으로 살다가 공짜로 구원 받는 거야.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피 앞에서는 죄인밖에 없다는 거여요. 죄인밖에 없다는 말은 이 생생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 질서, 그 계념, 그 언어적인 그 의미, 이런 것과는 별개의 질서와 언어와 개념이 통하는 딴 동네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자~ 김 집사님 여기가 어딘지 알아 맞춰 보세요. 수건으로 눈에 안보이게 가리고 어느 장소에 가서
간호사 여기  환자 빨리하고.... 그러면  눈 감고 그 동네가 어딘지 앎니까? 아 병원이구나.
또 그 사람을 데리고 안보이게 하고
피고는 반드시 했습니까?  ....변호사 .... 어디 온겁니까?    법원에 온것이죠?

그러니까 그 환경에서 통하는 용어들이 그 용어를 보고 그 공간의 성격이 결정되는 겁니다.
바로 성경이라 하는 것은 영적 용어들이 인간들이 불신자들이 통할 수 있는 그런 용어들이아니에요.  그들이 사용할 수 없는 용어와 개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이걸 미셀 쿠프가 당론. 디스커스   당론에서는 인간의 명제와 문장을 뛰어넘는 음표가 나온다는 유명한 말 했는데......
몰라도 돼요.

왜 이런 소리를 갑자기 하는고하면 개혁주의 신학 논문할 때 문법적으로 
명제와 문법을 뛰어넘는 그 어두운 세계 통하는 질서 단어 따로 있고
영의 세계 통하는 단어와 개념이 따로 있어요.
그걸  역사적 해석 가지고는 해석이 되지를 않습니다.

나아만 장군 같은 그러한 이야기가 도저히 해석이 안돼요.
또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했거든요.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맺힐 때가 안됐는데도 예수님께서 저주했죠? 그걸 세상적인 철학적으로 설명을 해보세요. 열매가 맺힐 때가 되었는데도 맺히지 못하면 나쁜 나무가 되잖아요.
열매를 맺힐 때가 안됐는데 열매 없다고 저주하셨어요.. 제자들 보란듯이...
제자들은 예수님과 생각이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발언을 할 때 그 음표,  그 단어를 할 때는 도대체  예수님의 세계와 자기들의 세계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왜 무화과나무를 닦달하느냐? 무화과나무 저주 하는 것은 마치 그 옆에 서 있는 자기들을 저주하는 것과 같았어요. 잘해 보려고 하는데,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아직 열매 때가 안돼서  열매가 없는데 착한 억울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
그러면 성경 전체 해석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간단하죠.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저주 할 자에게 저주하는 소관은 누구한테 있다?
나 예수에게 있다는 것을 그걸 니가 믿느냐?

베드로 하는 말이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꼴좋다. 버리지 않는다고? 내가 너를 모든 환경(어두움)이 베드로 너로 하여금 철저한 네 힘으로 예수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줄게. 해서  베드로로 하여금 저주하도록  이것이 매일같이 일상생활처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어날 때 그 일어나는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생생한 사람들 사당동에서 내려오는 인파들, 그 사람들이 보고 있는 신문, 그 신문에 있는 프로야구부터 정치권 세종 시 문제, 생생한 병원에서 환자가 죽어나가는 병원장이 닦달 내는 그  생생한 현실,  거리에서는 사람이 교통사고 나서 경찰이 조치하는 생생한 현실, 학교에서는 애 공부 못한다는 자율학습하는 현실...
그 모든 현실 그것에 평생 그 안에서 몸담고 그것뿐이고 그게 전부고 그것에 죽고 살고 그래서 바빠서 오늘 이 자리에도 참석 못했고...
그런 식으로 그럭저럭 살아가서 그 세계에 푹 빠질 수 밖에 없는 우리라는 것을 교회 다니면서 말씀 보면서 확인하시고 확인해 주세요. 내 힘으로는 구원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 안 되는 나를 도대체 왜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주님께서 “피” 어린양의 피“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때부터는 자기를 위해 살려고 하지 않고 나를 위해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죠. 되려고 하죠.

될려고 하면, 그로부터 내가 하고자하는 그것과 주님께서 주의 증인되게 하시는 간격, 차이를 날마다 확인케 하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주의 증인되려고 하는 옛날에 받았던 은혜로 몇일 버터 보려는 시도와 그것마저 죄로 규정하고 새롭게 주신 자비와 용서가 네 노력과 어느 것이 더 생생한 현실인지 어느 것이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더 확실히 느끼는 것인지 날이 갈수록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정 없으면 여러분 집에다 모셔야 되는데 문제는 또 모실 때 문제에요. 만약에 모실 때 식구들이 다 환영하고 건강하면 좋은데 치매 걸린 똥오줌 싸고 벽에 바르는 시어머니 계시면 냄새 맡고 예배드려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그 치매 걸린 시어머니라는 생생한 현실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집까지 찾아와서 교회라고 인정해주시는 교인들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생생하게 살아계심  그 가운데서 날아가 버린 것은 우리의 영광과 자존심입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 (IP:112.♡.81.204) 11-01-13 23:41 
하나교회 100701요한계시록 3강b(서울하나교회, 이 근호목사)
제 3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지난 시간에 7촛대에서 말씀이 나온다 했습니다. 그러면 7촛대에서 말씀이 나온다는 것은 말씀을 주시는 그 주체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성령으로 되어 있어요. 성령, 성령께서 주십니다.

여기서 참고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성부와 성자께서 이루십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그걸 적용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십니다. 성령이 적용할 때는 반드시 적용받아야 될 이 성자께서 일의 완성. 언약 완성의 수용할 사람들을 감안할 활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말씀을 교회에게 주죠. 그러면 교회가 몇 군데입니까? 7군데죠. 여기에 성령은 지상에 활동하는 영이라고 했죠.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그 1장 4절에 보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영이 몇 개죠? 7영이 나오죠. 성령이 7개라는 말이 아니고 성령의 기능에 촛점을 맞춰서 성령을 묘사한 겁니다. 이 말은 성령이 아니 가는 곳이 없다. 어느 교회는 성령이 안가고 이쪽 교회는 가고 하는 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갈 때 성령은 교회에서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님의 다 이루었던 언약의 완성을 가지고 성령께 들이대는거죠. 언약의 완성의 모습이 요한계시록 1장13~15절까지 쭉 나와 있습니다. 그 모습이 아주 영화롭죠? 그렇죠? 

13~16: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이게 누구 몸이죠? 예수님의 몸이죠.  예수님의 몸은 이미 어떤 몸이냐 하면 언약을 완성한 상태에서 누리는 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지상에 있는 인간의 몸하고 대조가 되는 거예요. 대조가 되니까 이 몸이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잖아요. 초라한 몸이잖아요. 이 초라한 몸이 영광스러운 몸이 되었던 그 경로에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렇게 영광스러운 몸을 입었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겨냥한 거예요. 영광스러운 몸이 되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지상의 몸에게 뭐를 주시냐 하면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런 말씀을 주시는데 말씀이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예수님의 행하심에서 나오는 말씀을 주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몇 가지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7별을 붙잡고 7촛대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되어있죠? 여기에 오른손에 7별을 붙잡고 7 금 촛대를 붙잡고 다니신다는 말은 이것은 13절에 인자 같은 이가 다니시는 이가 예수님이 맞죠? 뭐를 하시냐 하면  알고 계신다. 모든 내막을 알고 계신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면서 살피시는 주님으로 내가 살피니까 내가 다 아는거야 라는 식으로 그 담당으로 예수님의 기능의 일부를 주신 겁니다.

그담에 2장 8절에 보면 서머나 교회에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났죠? 예 예수님의 영광스런 몸은 어떤 몸이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나신 몸이란 말이죠. 이 몸을 우리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말씀 주기를 “나도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러니까 죽도록 충성하라” 그 담당은 어느 담당이냐 하면 그 담당은 서머나 담당이에요. 서머나 교회 담당할 것은 죽도록 충성해서 죽어야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서머나 담당은 죽도록 충성하다 죽어야 하는  기능이에요. 옆의 교회 부러워하지도  좋아하지 말고 아~ 내 담당은 이런 담당이구나. 그러한 담당을 통해서 내 담당 괜찮다 하지 말고 주님도 이런 분이구나 예수님도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구나 우리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로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하는 사태들을 어느 교회에? 서머나 교회에 발생시키는 겁니다.

그담에 12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검을 들고 계신이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계신이가 누구죠? 1장 15절에 보니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임무는 날선 검이니까  검으로 싸우는 거에요. 2장 17절에 보면 네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라 했으니 싸우라는 거에요.  버가모 교회 해야 될 주님의 말씀 담당은 뭐냐? 싸워야 될 적들을 유발시켜 놓고 적들에게 양보하지 말고 싸우라 이 말입니다  참 쉽죠? 잉~

그담에 봅시다. 2장 18절 두아디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장 15절의 나오는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거죠? 2장 23절에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기능 살피는 기능 살피는 기능이에요. 싸우는 기능이 아니고 살피는 기능이에요 그 기능을 어느 교회가??두아디라 교회가 함으로 말미암아 두아디아 교회가 주님과 7촛대와 연관이 있는 교회, 그러니까 살피기 위해서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계속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그런 사람들이 계속 몰려와야 되는 겁니다. 말이 참 재밌죠? 두아디라 교회에 어떤 사람이 몰려 와야 된다고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몰려와야 해요.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 목회자가 “여러분 우리는 우상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교회 됩니다.”하면 곤란하죠?

그냥 두아디라 교회 목회자는 이렇게 하면 되요. “주께서 빛난 주석같이 살피십니다. 그런 이야기만 계속 하면 되는 거예요. 교인이 듣던지 말던지 상관없이 어차피 안 될 사항인데 그 교회는  계속 우상 섬기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거에요. 들어오던 말던  그러면 당회장은 주께서는 살피십니다 라고 계속  물론 당회장은 그러다가 쫓겨나겠죠. 쫒겨나면 2장 8절의 서머나 교회에 가겠죠. 그러면 거기에서 삽니까? 거기서는  아예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여 버리죠. 왜 죽도록 충성하다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죽는 사람  안 나타나면 성경이 아니란 말이죠. 죽는 사람  안 나타나면 성경이 아니란 말이죠.

교회라 하는 것은 뭐냐면 막,  막인데, 이 막 앞에는 세상이 어두운 세상이  있고 뒤에는 빛의 주님이 계셔가지고  어두운 세계에서는 자꾸 어두운 세력을 가지고 교회는 주님은 없다. 주님은 의미 없다. 생생한 것은 눈의 현실밖에 없다고 이렇게 막을 밀고  저쪽에서는  “죽도록 충성하라하는 말씀은 있고 결국은  교회라 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고 두 세력이 버틸 때 버티는 경계선이 자동적으로 나타날 때 그게 교회입니다. 서로 버틸 때 그래서 말씀이 없는 교회는 버티는 경계선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죠. 그냥  몽땅 세상이 되죠. 그런데 한 명이라도 버티는 거에요.   여러분 죽도록 충성하면 버티면 집중적으로 혼자 놀고 있네. 그러면서 공격하면 그 사람 죽으면 그것이 십자가가 되는 거에요.

두 세력이 버티는 것 이것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시범 케이스로 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과 비언약이 서로 버티는 거에요. 일부러 이스라엘을 세상 이방나라에 둘러치게 해서  얼마나 사람들이 말씀 말씀하지만 이방나라가 살아가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나 인간답고 인간성이 존엄성이 존대 받는 그런 세계가 이방세계에요.

대표적인 것이 불교죠. 뭐  불교라는 말해서 불교지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 불교 신자라 하면 되요.불교 신자는 뭐가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세상에 뭐가 없다. 행복도 나를 위해서 가족도 나를 위해서 뭐든지 다 나를 위해서 불교 신자는 나 좋아라 있는 것 살아가는 것이 부처고 오늘 갑자기  설법???  

불교를 공부 할 때 뭘 공부해야 하느냐 하면 왜 힌두교가 불교를 지금 배척하느냐를 알아야 해요. 힌두교 알죠? 인도에서는 불교가 별 세력이 없어요. 불교 나타날 때 힌두교에서는 이단으로 간주했어요.

힌두교는 신을 인정해요. 신은 현재 고생하는 것을 멈추고 죽어서 좋은데 가자. 그런데 불교는 가봐야 별거 없다. 살아 있을 때부터 천국 되자. 이게 불교입니다. 되게 간단하죠. 그러니까 불교하고 힌두교 하고 그렇게 다투는 거에요. 한국은 둘다 이방 것으로 뒤집어 썼어요. 뒤집어 썼어요.

이방인들은 이겁니다. 이방인들은 간단해요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는 것이 이방인이에요. 여러분 붉은 악마 안산 누굽니까? 간단해요 붉은 악마는 붉은 티 입고 돌아다니면 붉은 악마잖아요.간단해요. 그냥 티 하나 안 걸쳤다 뿐입니다.

인간이라면 인간대로 산다는 것은 그냥 그것이 성경에서는 이방이지만 사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게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고 형제고 삼촌이고 시누이고 드라마고 그래요. 드라마에 언약이 안 나와요  막장밖에 안 나와요. 아무것도 안 나와요.

언약을 받은 나라가 희한한 나라에요. 이런 나라가  이게 희한하다니까요. 모세 혼자 하나님 만나 독대해가지고 얼굴도 보지 못하고 그냥 수그리 하여 지나가니 돌 바위 있더라. ....이게 황당 무개하죠. 이게 독선적이고  폐쇄적이고 그렇지. 그냥 그것 없이 아까 힌두교 했죠? 신은 계시다 죽어서 신은 반기겠지.  사실  우리가 평소에 어려워도 고생했다고 보상해 주시겠지. 이게 힌두교다 이거죠.

그저 부자 안 되도 죽으면 좋은데 가겠지. 이게 힌두교다 이거죠. 인간은 날 때부터 농부로, 어떤 사람은 성직자로 어떤 사람은 장사꾼으로 다 정해져 있다. ..... 이게 카스트 제도 아닙니까?  4가지 계급에 의해서  지상의 모든 질서가 하늘의 질서를 그냥 반영한다고 본겁니다..

그런데 언약은 그게 아니에요. 지상의 질서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세계라는 그런 악마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사람이 남자가 죽어야 언약이에요. 그냥 좋게 얘기하는 것은 언약이 아닙니다.

어린양을 그냥 삶아 버리면 이건 백숙이지. 백숙이다 백숙... 닭 잡을 때 허허... 살점을 강조하는 것은 언약이 아니에요..살점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피가 중요하다니까요. 피  우리는 피는 버리고 살점 먹잖아요.  피는 먹지 말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먹지 말아야 할 그 짐승을 니가 잡는 이유를 아느냐???  이 말입니다. 니가 니한테 양식도 안 되는 피가 중요해서 피를 끄집어내는  그런  짐승 잡기를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면 어떻게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허허...미쳤어요. 지금 피 믿는 사람 미쳤어요. 그러니 하나교회들 밖에 없어요. 딴 교회가면 두아디라 서머나 교회....없어요. 그렇게 다 사람 좋아라 있는 교회지.내 속에서 죄 끄집어 내고  피 고백하는 피를  끄집어 내는 교회 없어요.

제가 언젠가 주일날 설교하면서 큰 교회 출입구를 예를 들었죠, 큰 교회 출입구를 마치 항문처럼 보인다 했어요. 항문처럼.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안에서 똥이 나오는. 아니  더러운 변이 나오는 거에요 ..너무 빨리 나오면 설사된다 했어요.피가 쏟아져서 피를 전파해야 할 사람들이 인간의 욕심 황금을 좋아하는 덩어리가 나오니까 아무리 큰 교회라도 항문처럼 똥이 나오니 전부 똥 덩어리 같은 세상이 또 되는 거에요. 큰 교회 예배당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는데 걱정하거 없어요. 저를 초빙했다가 설교 한번 하면 두 번 다시 거기  안 나옵니다. 교회 텅텅 빕니다....ㅎㅎㅎ  반주자 도망가고 성가대 다 끊어져요. 교회 세울 필요 없어요.. 교회 복음 전하지 않으니까 다 모여든 거에요. 힌두교 신자 불교신자들이  모여든 겁니다. 산에 갈라 하니까 너무 머니까 ... 절이나 다 똑같은데요. 뭐  성경 배워서 윤리 도덕적으로 제자훈련 하고 천당 가려고  힌두교 에요.

뭘 증거 해야 돼요. 뭘 증거 해야 하느냐?? 예수님은 이런 코스를 밟았기에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 도착했다는 것을 증거 하는데 그 증거 하는 주님의 속성을 바로 성령께서는 놓치지 않고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보여주는데 그것을 멘트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줄기차게 세상에서  세상의 유혹과 퍼부어 대는 겁니다. 맞서서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바로 야곱과 에서의 대결 이스마엘과 이삭의 대결 이방과의 대결 북쪽과 남쪽의 대결  더 나아가서는 왕과 제사장의 대결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나라는 망해야 한다는 안 망해야 된다는 대결  세상은 이미 끝났다고 보는 것과 희망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살기 좋은 나라 될거야. 희망 걸고 있는  희망 걸고 있는  쓸데없는 희망

우리 성도는 예수님 이 세상을 떠났다고  것을 알면 예수님 이 땅을 이 세상에 희망을 갖지 말아야 돼요. 희망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사랑하는 대상자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주님이 오시기를 사랑하는 분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겁니다. 그게 재림을 기다리는 거예요.

그럼 이 땅에서는 왜 살아야 되는가? 살아야 되는 것은 바로 막을 형성하는 거죠. 이땅에 교회를 생성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시험 드는 일이 있는 거예요.

살아가야 될 일도 있고 살핀다는 주님을 의식하는 일도 있고 그담에 뭡니까? 주께서 모든 걸 아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일도 있고 죽도록 충성하다 죽는 것이 그게 바로 사는 입구로 통한다고 깨닫는 그런 일도 있고 벌어져야 돼요. 우리가 일부러 만들어 내면 안됩니다. 뭐 재산 바치고  교회 바치고 뭐 그런 교회는 없지만 하여튼 스스로 기도하고 우리가 연기하라는 말이 아니고 연기는 저 탈렌트에게 맡기고 평시에 우리의 신분을 드러내는 거예요.

3장 1절에 ‘사대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7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이것은 7영을 받았다는 말은 그담에 3장 3절에 그러므로 너가 어떻게 받았으며... 그러니까 교회에 7영을 주신다는 말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일방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주는 거예요. 우리가 받으려고 할 때 오는 게 아니고 성령을 통해 그냥 준 거예요. 네가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 그 받은걸 생각해 보라 말 이예요.

그담에 3장 7절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열쇠는 닫힌 문을 여는 역할을 하죠. 그래서 3장 8절에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열린 문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 교회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에요. 빌라델비아 교회가 보여 줄 할 주님의 역할은 뭐냐 주님 혼자 열쇠를 갖고 있다. 열쇠를 갖고 있다 말은 우리를 향하여 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걸 보고 어떠한 인내도 견디고 가는 겁니다.

그담에 3장 14절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니까  라오디게아 해야 될 역할은 뭐냐? 19절에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 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열심을 내는 것 누구처럼? 예수님처럼.충성하고 열심을 내는 겁니다. 충성하고 열심을 낸다는 것은 교회가 충성되고 열심을 내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면 고린도전서 4장1절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 이니라’

그래 다시 말해서  회사에서나 직장에서 니가 이래도 예수 믿을래? 라고 들어온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니가 비밀을 모르지? 멱살 잡고 싸우지 마시고... 니가 비밀을 알까?? 약만 올리면 됩니다.  니가 비밀을 모르니까.. 니는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지. 우리는 비밀을 알거든.  비밀이 어딨는데? 알려줘? 성경에 있어!! 나도 주일학교 다녀서 봤어. 성경에 뭐 있던데???

그때부터 성경부터 시작해서 이사야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을 전했던 빌립처럼 성경 전체를 하나로 모으는 겁니다. 왜냐면 모든 말씀을 일점일획 다 이루신 그 결과가 뭐예요? 뭐가 빠졌습니까? 그렇게 해서 십자가로 빠져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잖아요. 길이 하나 밖에 없어요.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니...... 길이 가는 길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 가신 그 길 그 경로 결과 절차 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약에 놓쳐 버리면 교회 커야 천당 가는지, 헌금 많이 해서 천당 가는지 여러 소리들이 많아요. 숱한 인간들 소리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자꾸 거기에 현혹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살다가 어떻게 천국으로 빠졌는가. 그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은 없어요. 이근호가 길 되면  안 되죠. 그리되면 곤란하죠. 한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 길은 여러분들에게 성령께서 알려줍니다. 알려주면 내가 곧 길이 아니구나~  내가 곧 진리가 아니었구나~~  그리고 내 목숨이 하~~~생명이 아니었네.... 내 목숨이 생명이 아니었네.  이 말은 내 생명이 따로 있고 내 진리 따로 있고 내가 비밀히 지켜야 될 길은 따로 있다는 것이 따로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증거 되는 거예요. 주위에 아무도 없더라도 증거 되는 거예요.  혼자 싱글 벙글 웃고 있는 거예요. 저쪽에는 8강 떨어졌다고 울고 있는데, 혼자 싱글 벙글 웃고 있는 거예요. 8강이 길이 아니거든 월드컵 8강이 길이 생명이 아니거든

부산에 보세요. 부산의 은행도요 롯데 이기면 이자율 높아요. 이기면 쓰레기통 지고,  ‘부산 갈매기’~~~~노래 부르면서~~♪♫  하는걸 보면  완전히 종굡니다. 종교.

교회는 다시 말해서 교회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만들어 낼 필요 없이 자연적으로 형성되게 됩니다. 왜냐면 저쪽 세력(어두운 세계)만 있으면 형성이 안돼요. 한쪽이 이미 점령이 했으니까.그런데 그것이 넘어지지 않도록 막아서는 또 다른 성령을 통한 말씀의 힘이 있기 때문에 그걸 맞서다 보니까 얇은 막이 생겨버리는 겁니다. 두부나 또는 묵 같은 것 오래 놔두면 나중에 표면에 막 생기죠? 우뭇가사리 이런 것 막 생기죠? 어렸을 때 보면 막이 생겨요.막이 생겼다고 야~ 우리교회 바른 교회다 하고 좋아하면 하나님이 구멍을 뻥~뻥 내버립니다. 뻥 뻥 구멍 다 내버려요. 돈 되는 교인 왔다 가버리고 돈 안 되는 교인 나쁜 사람만 오고....  뻥~뻥~ 구멍이 다 생겨요. 그러면 주여 목회 하란 말입니까? 뭐 하지 말란 말입니까? ‘당돌한 아내’라는 드라마 대사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나보고 죽으란 말인가 살란 말인가’라는 대사가 나와요. 거의 잘 안 보는데 가다 보니까...ㅋ 도대체 나보고 죽으란 말인가? 살란 말인가?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막 자체에 신경 쓰게 만들다가 이걸 낙담하게 만들어요. 갑자기 여기서 권력, 악의 권력 바깥의 악의 권력과 하나님의 권력이 맞서버리면 이것에서저항이 생기는데 그 저항을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주체라고 해요. 주체. 주체. 사람이 그냥 집에 갈 때는 딴 생각해요. 딴 생각. 직장 생각하고 앞에 가는 사람. 누가 와서  “욱” 하면 갑자기 “와이카노” 하고 갑자기 자기가 느껴집니다.

인간이란 외부에서 자기를 공략하는 것이 느껴질 때 비로소 타인의 존재로 말미암아 자아 존재가 짧은 순간에 다시 발생됩니다. 그 순간 지나버리면 또 딴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남잔지 여잔지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런데 갑자기 내부의 압력에서 배가 꼬르륵 하면 아 배고프구나.  누가? 내가 배고프구나. 그러면 밥 먹으러 가요. 인간은 누가 건드려주어야 자아가 생성됩니다. 누가 건드려줘야.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너무 몰두하는 거 다른 사람이 보면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대체로 보면, 무직 상태나 백수 상태나....허~~~   아~ 너무 심하다  너무 노골적인데... 주로 교회 열심인 사람은 직업이 없다거나 취업 준비한 지 벌써 10년 넘은 사람.. 교회 좋~죠.~~ 이용해 먹으니...  평소에 이런 사람이 성도예요. 평소에 자기를 생각 안해야 될 시간에도 자기가 생각날 정도로 주변의 주께서 자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늘 느껴지는 사람. 남들 같으면  신경 안 써도 되는 자아에 대해서 신경 쓰는 그런 것으로 자기 주변을 해석하는 사람들이예요. 그러니까 밤하늘에 남들은 그냥 이렇게 하면서 툭 툭 치면서 이거 하고 있는데,,,,

다리에 앉아서 별을 보면서 주여~ 별을 보오니  만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다. 생각나는 사람이 느껴지는 것. 남들은 별을 봐도 안드로메다 밖에 생각 안 나고 은하철도 999나 생각나는데...  자기는 성경 말씀이 겸하여서 그걸 계기로 성경 말씀이 자꾸 엉켜 들어오는 것. 평소에 읽었던 말씀이 평소에 생각 안 나다가 그런 환경에 요동치는 변화를 통해서 성경 말씀이 떠오는 것. 부자 집에 멋진 촛대 보면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구나’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 평소에 그것이 없는 사람은 부자구나. 복 받았구나. 교회 열심히 해서 복 받아야지. 말씀과 관련 없는 간증 집회와 관련 되어서 자꾸만 엮이면 신자가 아닙니다.. 말씀과 자꾸 엮여져야 해요.

그게 바로 성도라 하는 것은  비밀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가 뭐냐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이스라엘이 뭣 때문에 망했습니까?  말씀 때문에 망했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다행스럽죠. 말 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 잡혀갔죠? 나중에.  포로 잡혀간 것이 무엇 때문에 포로 잡혀 갔습니까?  말씀 되어서 포로 잡혀 간 거예요. 그러니까 포로 잡혀간 사람은 얼마나 다행스럽죠. 안 잡혀 갔으면 무엇이 생각 안 난다? 주의 말씀이 약속대로 안 되는 줄 알았겠죠. 이스라엘은 그래도 땅이 아직도 유용한 역사적인 지평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냥 땅 잃어버리면 버림받은 줄 알지만 신약 시대에는 땅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없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 생각나면, 그것이 포로 잡힌 것이 되고, 끌려 간 것이 되고, 거기서도 성도 된 것이 되고 십자가 생각 안 나면  아무리 부자라도 저주 받은 것이고 이방나라고 그런 겁니다. 땅 개념이 구약하고 달라요. 신약에서는 십자가 중심이고 십자가에서 새로운 개념들이 십자가에서 신구약 개념들이 전부다 새롭게 전달되기 때문에 구약같이 실제로 땅  흙, 이런 개념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까 했죠? 오늘 죽어도 어디서 죽어도 성도의 죽음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되요. 십자가에 죽는다고 갈릴리 가지 말고 오늘 죽어도 화장실에서 죽어도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돼요.

자 그러면 말씀대로 살아서는 어떤 혜택이 있는가?

요한계시록 2장7절에 보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이 그담에  뭡니까? 교회입니까? 교회들입니까? 교회들이죠? 이게 에베소 교회라 하면서 교회라 해야 하는데 교회들에게...  이것은 모든 교회들에게 다 하시는 말이죠.

“이기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렇게 돼있죠? 자 봅시다. 어떤 자에게는? 이기는 자죠? 이기는 자.  그러면 이긴다는 말은 현재 이스라엘 자체가 애굽 출애굽 할 때부터 군대였습니다. 군대.  군대하는 일이 뭡니까?  싸움이죠? 싸우려면 대상이 있어야 하죠. 그러면 구약 때는 대상이 비 언약이었습니다.  언약을 받지 않은 민족은 싸움의 대상입니다. 같은 이스라엘이라도 언약을 모르면 누구의 적이냐? 나의 적이 아니고 언약의 적 이예요. 언약의 적.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했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같은 혈육인데..내가 내 몸에서 아파서 낳은 자식인데, 왜 원수가 되는 거예요? 육에서 낳은 자식은 내 자식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식은 못됩니다. 언약이 아닌 내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아닌 나와 언약이 아닌 남편이 낳았기 때문 이예요.

여기 목사님 자제분 이예요? 예. 그래요?  언약이 아닌 목사님하고 언약이 아닌 사모님하고 언약이 아닌 자식을 낳은 거예요. 그러면 이 자식이 (나 욕하는 것 아닙니다)하나님의 자식이 되려면 언약에서 뭐가 와야 합니까? 언약에서 새로운 영이 와야 되죠. 그 영은 무엇을 앞장세우고 온다? 말씀을 통해서 앞장세우고 옵니다. 말씀을 앞장 세워서 오면  육적인 자식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성령은 반드시 말씀을 앞장세워 온다. 이유는 성령은 자체가 언약의 주인공이 아니고,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하신 그 공로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성령은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을 해서 오는 거예요. 오게 되면 목사님 자녀분은 그냥 받는 것이 아니고 뒤에서 뭐가 받쳐 줘야 해요? 목사님 자녀분이 육이라면 육은 모든 파도의 물방울 아닙니까? 육 된 세계의 일부, 육이라는 전체 집합 가운데 육은 하나의 개별자 부분집합. 하나의 귀속된 것이고 하나의 원소로서.

괜히 집합 말해서 골치 아프네요. 여러분 국민은 국가에 속합니까? 안 속합니까? 국가가 국민보다 크죠? 국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국가가 어느 동네 삽니까? 국가 서울 어느 아파트 몇 동에 살아요? 없죠? 보세요. 이상하잖아요. 대학교란 없어요. 대학교 건물 있고 교정 있고 교수 있고 학생 있는데 대학교 없어요. 국가 없어요.

이게 권력이 만들어 내는 거예요. 권력이 추상적으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자기가 육은 이것은 계속해서 확장을 시도하는 거예요. 육은 앞잡이예요. 우리는 우리 맘대로 하고 싶어도 맘대로 못해요. 전에 얘기 했죠? 50만원 들고 50만 원 짜리 옷을 입겠다고 백화점에 가 보세요. 백화점에 쇼 윈도우에 50만 원 짜리만  있으면 50만 원 짜리 사고 옵니다. 그런데  50만 원 짜리 사려다 그 옆에 100만 원 짜리 있으면 비교해 보세요. 50만원 카드 더 끊어서 100만 원 짜리 삽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은 내 맘대로 안 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래요. 차타고 가는데 누가 깜짝 놀라게 해 보세요. come down come down come down 아무리 해도 소용  없어요. 욕을 하고 싶어요. 마음속으로 미워 에라 가다가 교통사고 일어나라 해서 교통사고 나면 양심의 가책을 받겠어요. 내가 저주 퍼 부어 죽었다. 마음속으로 미워하면 무슨 죄다? 살인 죄. 이건 내 맘대로 안 돼요.

육은 내 것이 아닙니다. 육의 주인은 따로 있어요. 육의 주인은 따로 있어요. 가인이 제사 드렸잖아요? 안 받았잖아요? 안 받으면 그만이지... 제사 안 받는다고 해서 동생을 왜 죽입니까? 그 뒤의 사건을 우리가 모른다고 해 봅시다. 성경을 모른다고 해 봅시다. 가인이 제사를 지냈는데 동생을 죽였대. 듣는 사람이 황당할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왜 왜 왜 그랬는데, 왜 동생을 왜 죽였는데....  동생이 제사 드렸다는 것은 우리는 항상 빠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동생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살아 있었어? 하는 일의 경우에만 동생을 제사를 받는 거예요. 인간에게 생생한 건 누구밖에 없다? 인간 밖에 없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들이 왜? 아벨은 제사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지워 버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현실은 없다. 아벨은 제사 받았다는 것 자체가 아예 머리에 염두에 두고 싶지 않은 거예요. 뭐만 있냐 하면 가인은 제사 드렸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조상에게 제사 드리듯이 예배드린다. 내가 제사 드렸어. 누구에게? 신에게. 얼마나 착해? 이것만 우리는 가져가고 싶지. 그래서 인간이 지옥 간다는  생각을 애당초에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고 예배 드려도 교회 나와도 지옥 갔더라. 그런 이야기를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누구만 갔더라? 예수님만 갔더라. 제사 드리는 모든 사람이 지옥 갔더라.  그런 이야기를 성경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화가 나 가지고 우리는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겁니다. 예수님만 그런 말을 최초로 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한 적이 없으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예수님만이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사람을 죽이고 싶은 거예요.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아벨만 죽여 버리면 신도 없고 동생도 없고 남는 것은  내가 했다는 행위만 남을게 아닙니까? 그것이 성화론 이잖아요.

성화론 모든 해석은 내가 했다는 그것만 남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야 내 존재의 가치가 있으니까. 이 교회도 내가 해서 이렇게 됐다. 그것만 남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걸  비난하니까 오용익 목사님이 이걸 잡혀 가지고 끌려 나왔죠. 남의 장사 하는데 저 점포에서 방해하니까... 이집 삼겹살 맛없다 해가지고.....ㅎ

사람은 성경을 보면서 임의로 다 잘라 버려요. 다 잘라 버려요. 하나님 하신일은 다 잘라 버리고 인간이 했다는 것만 다 남겨 두기를 원해요. 그러면 적이 누구 적이 됩니까? 나를 시비 걸고 나의 의로움과 정당성을 시비 걸면 다 누구 적이 되겠어요? 나의 존재 가치에 도전하는 나의 적이 되겠죠.  그게 뭐냐면, 바로 교회 속에 소위 발람, 아세벨, 니골라당, 이런 이단의 특징이 뭐냐면, 내부에 권력이 있어요.

권력이. 무슨 권력이냐?  옛날 이스라엘이 싸웠던 비언약적인 권력이,  마치 예수님의 영(포크)이 7개로 벌어진 것처럼. 이쪽에 교회 6교회, 빌라델비아 빼놓고 6개의 교회가 악마가 자기의 새로운 색깔의 각가지 권력의 집결체를 교회에다 쏴대는 겁니다. 목사님 자제분 이렇게 됩니다. 그 육은 개별적인 육이 아니라 내가 다룰 수 있는 육이 아니라 뒤에서 밀어내는 육입니다. 너는 이렇게 살아라고  어쩔 수 없어. 어쩔수 없어요. 친구 핑계 대고 환경 핑계 대는데, 알 수 없는 세력이 육적인 인간으로 살도록 그렇게 부추깁니다. 매일같이 우~~ 사자같이  택한 자라도 안 봐줍니다. 매일같이 잊어라 생생한 것은 사당동의 밀려오는 인파들 밖에 없다. 그들한테  말 들어야 장사된다. 정신 차려라. 언제 적 복음이고, 다 복음 전하는 교회 봤냐? 없잖아. 복음 전하는데 이 지하실이 무슨 꼴이냐. 쳐라. 이게 가족들에게 밀려오죠. 목사 나한테 밀려와요 내가 무슨 짓이야 . 목사 됐다고 마귀 떠난 줄 압니까?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귀신이요.

주님 감사한다고요? 손가락 아파 보세요. 감사되는가. 자식 공부 못해 보세요. 정신없습니다. 정신없어요. 예배 시간에 설교 하나도 안 들어옵니다. 자식 아프면. 인간의 육은 주인이 따로 습니다. 나의 주인은.  나의 주인 따로 있었고, 그 주인 되시는 주인장을 묶어 놓고 주님께서 또 우리의 주인이 되어 오셔서 내 몸은 난장판입니다. 누구와 누구의 싸움?? 성령과 마귀와 싸우는 난장판입니다. 난장판. 오늘은 마귀가 짓밟고 지나가다가 성령이 와서 용서로 짓밟고 지나가고 마귀가 지나가고 또 성령이 지나가고,   교회도 마찬가지...

한 2년간 안 나오던 교인이 한 번 나왔다고 그것도 예배시간 10분 늦어서 나오니까 힘없이 설교하다가 목사가 갑자기 신이 나가지고 “주께서 보내셨구나“  와 가지고 이렇게 나오니 형제여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최 집사님 전화 번호 몰라가지고  왔습니다.... ㅋ

어쨌던 저쨌던 간에 설교 신나게 하신 것은 주님이십니다. 착각을 하던 오해를 하던 간에 신나게 하고 .. 인간은 환상만을 선택한다. 왜냐면 인간의 뒤에서 마귀가 밀어내기 때문에. 환상만을  환상은 주변에서 키워줍니다. 주변에서 내가 되고 싶은 것과 되기 싫은 것이 누가 결정하냐? 내가 곧 기준이고 내가 곧 성경이고 내가 곧 계십니다.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싸우지 않아요. 여기서 싸우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든 육적 요소와 싸우게 되어 있고. 싸우라 하는 것은 이기게 돼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긴 것이 이스라엘이 나서서 이기게 된 것이 아닌 것처럼 무슨 전쟁이냐 하면, 그냥 이스라엘 싸움은 붙여 주는 전쟁 이예요. 그냥 멍청하게 등 떠밀다 보니까 앞에서 몇 사람 죽은 겁니다. 나 전쟁 안 해 하기 싫어요. 그랬는데 밟혀서 몇 사람 죽은 거예요...허

이사야 37장 36절에 보면, 앗수르 군대가 몇 명 죽었느냐 하면,  18만 5천명 죽었습니다. 18만 5천명이 죽었다는 사실, 이 사실을 성경을 안 믿고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는 그런 신학을 하는 사람 입장에 보면 이 젊은 사람 한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아까운 인물입니까?  빵 굽다가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용병하다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축구하다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라가 부름에 권력의 힘에 전부 다 불려 와서 18만 5천명 와서 그냥 예루살렘 성 공격한다고 그렇게 생각해 가지고 우루룩 하면 무너질 줄 알았죠. 밤중에 천사가 와서 18만 5천명 죽을 때 그때 그들이 판사나 목사나 그거 묻지 않고 그냥 동일 시 해서 다 똑같이 죽어요.

이것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동일시, 다른 말로 하면 등질 화. 이것은 질이 동일하다. 모든것을 동질화 시킵니다. 하나님의 전쟁 앞에서는 직업, 직분 고려치 않습니다. 직업, 직분 고려치 않아요. 너는 언약 가지고 싸울 거냐. 비 언약 가지고 싸울 거냐. 그것만 보는 거예요.  학교 어디 나왔느냐 환자냐 백수냐 묻지 않아요. 그냥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면 왜 언약이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언약이 왜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상에 전하게 하십니다. 어떤 직업과 남녀노소 관계없어요.  이기는 자에게 무엇을 줍니까? 하늘나라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준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나무 과실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 따먹을 수 있습니까? 결국 우리의 등에서 떠미는 육의 하수인 격으로 굴었는데 주어진 것은  생명나무가 주어진 거예요.

우리가  그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 진거예요. 무슨 역할? 하나님의 언약의 힘과 비 언약의 힘이 대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마귀의 역할. 이걸 무엇을 간직했다? 비밀을 간직했다. 비밀을 간직하는 것도 그것도 힘듭니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걸 말을 할까 말까 하는 요것은 힘들겠죠. 근데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것을 아는 것은 힘듭니까? 안듭니까?  힘 안 들죠. 우리 자제분 본인이 남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어요? ㅋ 힘 안 들죠. 하나님의 비밀이 나한테 찾아왔다는 것이  내가 안다는 것이 힘이 뭐가 힘들어요? 힘이 안 들어요. 하나님의 전쟁은 힘이 들다 안 들다? 힘이 안 드는 거예요.

이 안에 있는 비밀 때문에 공짜로 하늘나라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주는 겁니다. 우리 행함으로 주는 것이 아니고 비밀 때문에 우리는 비밀을 간직한 것뿐인데 그 댓가로 우리에게 생명나무를 주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네가 이겼구나~ 죽도록 충성 했구나~ 이리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막이라니까. 막이라는 것은 양쪽, 이쪽저쪽 세력에 의해 훌치고 이리 흔들면 이리 흔들리고, 여러분 태극기가 바람에 날리는 것이 태극기 자기 힘이 아니잖아요? 자기가 흔들리고 싶어 흔들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바람 부는 대로 오잖아요? 성령은 뭐라고 했습니까? 김범룡 아닙니까? 바람이잖아요.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

성령은 바람같이 자기의 말씀을 이루고야 마는 거예요. 성령께서는,  우리의 원본은 예수님이 원본이고 우리는 지체고. 그담에 2장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귀는...  우리는 귀가 어떤 종류의 귀가 있느냐 하면, 성령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말은 아까 제가 말했는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귀를 말해요. 이어폰도 없고 스피커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서 못 알아들어요.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귀 있는 자는 듣죠.

귀 있는 자에게 뭐라 하는가 하면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고, 있는 자는 더 받으리라 했거든요. 없는 자가 있어야 빼앗기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하신 말씀은 내 말을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더 받게 되고, 뭘 받느냐 ? 이번에 무슨 선물 이예요? 11절에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 야~~ 생명나무도 받고, 이것은 예수님이 가신 코스,  예수님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둘째 사망이 있다는 말은 둘째사망이 첫째 사망을 지배 한다?지배하지 안한다?  지배한다 말이죠.

여기에 밥이 있는데 밥을 뚜껑으로 덮었습니다. 그럼 뚜껑은 무엇을 지배하죠? 밥을 지배하죠. 그런데 여기다 보자기를 덮어 씌웠어요. 그러면 이 보자기가 무엇을 지배해요? 그러면 보자기가 밥도 지배하고 뚜껑도 지배하죠. 인간의 육은 누가 지배한다? 악마가 지배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사망할 수밖에 없죠.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이것을 둘째 사망이신 분이 보자기로 덮어버리면 악마도 누구 뜻에 의해서 다루어진다?  예수님에 의해 다루어 버리시니까 육도 악마도 다루어지니까 둘째 사망의 해(어떤 짓을 해도)를 받지 않으므로 영생을 받는다 말입니다.

지가 뚜껑을 벗기려 해도 우리는 죽어도 못 벗깁니다. 우리는 몸이 있는 이상은 이 몸은 우리 모든 감정과 우리 뜻대로 이성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좋아해도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나를 어디로 몰고 다니는지 몰라요. 정말입니다. 교회에서 은혜 받았습니다. 하다가도  아기가 아프다 소리 들으면 예배고 뭐고 가고 싶고, 용감한 사람은 그냥 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용감한 사람은... ㅋ

이처럼 둘째 사망이란 보자기로 주어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육에 대한 내 행위에 대한 미련을 뚝 끊으세요. 내가 더 나아지려는 생각은 그것은 평소에 지가 좋게 한 것도 의지에 의해서 더 나아진다는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지가 잘한 것만 기억하거든요. 지가 못한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고도 기억을 하지 않아요. 난데없이 와서 “당신 왜 그래 당신 뭐랬어? 몇 년 전에 이랬잖아. 사람은 지가 잘한 것만 기억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는 겁니다. 남이 뀐 방귀는 공해가 되고 지가 뀐 방귀는 건강에 좋다.ㅎ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그담에 봅시다. 2장 1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이니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외에는 ... 또 비밀을...또  비밀을 맡은 자 받는 자 외에는 알 수 없다.

자~ 처음 강의 시작할 때 물은 것 다시 묻습니다. 사도요한이 실제 인물입니까? 실제입니다. 7교회가 실제 교회 입니까? 아닙니까? 실제 교회죠. 17절에 나오는 돌 위에 새 이름도 실제 입니까? 받는 자가 있다는 말이 실제 입니까?  받는 자가 실제로 있죠? 자연스럽게 믿습니다. 해도 믿지 마요. 비밀인데요. 요런 게 바로 세상이 모르는 비밀, 세상 사람이 공부해서 서울 대학교 나와도 모르는 비밀들이 있어야 성도 값을 하는 겁니다. 아무리 연구해도 모르고 보고 해도  신학 박사도 모르는 그 뭐 있어야 해요. 그 비밀 때문에  왠 은혠지...  말씀이 이렇게 출렁~ 출렁~ 말씀이 들어 있으면 뛰어야 해요. 말씀이 출렁 출렁 뛰어야 해요.

교회라 하는 것은 결국 뭐냐면,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중간에 시련이 있고 그담에 싸움이 있고 이기는 자는 약속된 결과를 받는다. 이 코스를 누가 먼저 갔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시련을 겪어서 싸워 이겨서 갔잖아요. 그 싸운 분이 자신의 영 성령을 주면서 하늘의 담겨진 비밀을 우리에게 주면, 그 사람은 언약이 그 사람 속에 들어와서 마치 비 언약, 악마가 죄(육)를 지배하는 것처럼 여전히 지배하는 것처럼, 그 죄를 지배하는 덮개 위를 하나님의 용서와 의가 지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는 잘했어가 아니라 그러니까 용서 받는 거야. 이렇게 용서 받는 것을 하나님의 의라 합니다. 용서 받는 자를 ‘하나님의 의’ 라 하고.

통일되는 개념 자체가 다르죠? 인간의 행함으로 용서 받는 그것은  저쪽 세계고  비밀이 없는 언약이 없는 세계고 있는 세계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담에 2장 26절  이기는 자는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이 말은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를 통해서 두아디라 교회는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권세를 깨뜨리는 역할을 하죠. 그렇다면, 이세벨, 발람, 니골라, 전부다 배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어머나 무서워라, 좋아라, 하는 권력의 집결체죠. 이세벨 같은 경우는 열왕기상 21장에 라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여 가지고 갈취하죠. 그 권력이 그렇게 부러운 거예요. 이세벨이 그렇게 부러운 거예요. 그게 이세벨 당이고, 발람 당이고 니골라 당인 겁니다.

그냥 언약 없이 사는 것, 하늘의 비밀 없이 살고, 보통 사당동 동네에 있는 그런 사람처럼 그냥 보통~~ 그렇게 사는 것이 부러운 거예요. 그런데 사실 그들이 무엇을 추구한다? 그냥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권력의 냄새를 맡고 권력이 있는 곳에 가는 겁니다. 그 권력이 있는 냄새가 그런 권력이 어디까지 펴졌다? 권력의 냄새가 어디까지 퍼졌습니까?  7교회. 그것도 허용하신 겁니다. 허용해 놓고 막을 만들어서 이런 것이 권력이 들어왔으니까 너희는 주님의 권력이 더 세다는 것을 맞서서 싸워라. 왜 맞서 싸울 곳이 그것이 막이니까  구멍을 뚫어주면 주님의 용서로 구멍을 메꿔 주고, 또 뚫리면 또 용서로 메꿔 주고 땜질하고 또 뚫리면 또 자비와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 알게 하고 그 생활이 우리의 평생가는 우리의 생활 이예요.

3장5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누가 한다고요?  누가? 예수님이 그렇게 해 주시는 거예요.  이 자체가 비밀에 포함 되어 있어요. 여러분 보험 계약할 때 보험 내세요. 하고 끝 이예요?  보험금 내면 이게 끝입니까?  내면 이런 혜택이 있다고 하죠. 보험금 내라고 하는 자체가 혜택을 받게 되는 날까지 연관되어 있잖아요. 바로 그 혜택, 그 비밀을 간직한 자가 누구다? 바로 교회고 성도다 이 말이죠. 세상에 와서 구멍을 뚫어주면 세상 유혹에 넘어지면 또 용서로 땜질 하면서 의인되게 하시고 또 뚫리면 의인되게 하시고,

그담에 3장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요한 계시록의 모든 이야기는 2장과 3장 이후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깁니까?  약속과 약속 사이의 무슨 이야기 입니까? 시련 이야기죠. 시련.  어떤 종류의 시련들이 마귀에게서 제공되는가. 그 이야깁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3장 19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 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1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게 전부 다 처음에 말씀이 들어오고 우리는 하나의 막이고 이 말씀이 오는 것은 우리가 뭘 받고 있다? 지금 세상의 권력에 의해서 시달리고 있다는 전제로 해서 그 막과 막의 버티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다루어서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서 약속대로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곧 알파요. 시작하신 분이 만대까지 변동이 없이, 변동이 없어요. 확정된 사실로 거대하게 높이 되는 겁니다. 잠재되어 있던 것이 안에 있는 뿌리가, 씨앗이 잠재되어 있는 큰 나무의 모든 요소가 살아가면서 만개하면서 열매를 맺히는 것처럼, 이런 말씀 들어왔다는 비밀 자체가 우리가 미처 모르는 시련 가운데서 열매를 맺히는 것처럼  얇은 막의 역할이 7교회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참 위험한 세계인데 그 위험한 세계를 우리는 정말 너무 좋아하고 너무 탐내고 교회보다 말씀보다 세상의 권력을 더 탐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익히 아시고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비밀로 주셔서 이 비밀의 위력이 우리의 탐심보다 더 크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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