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보편성과 특수성

아빠와 함께 2023. 6. 29. 19:25

안양20230615a말3장8절(보편성과 특수성)-이 근호 목사

환경이 우선이고, 그 환경됨을 위하여 배치물들이 여기에 발생된다. 또는 생겨난다. 환경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하고 협의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환경을 조성해 버려요. 그런데 그 환경은 하나님의 절차, 하나님의 약속과 그 완성의 절차 속에서 환경이 필요할 때마다 그 때마다 환경이 변천을 해요. 환경이. 점점 더 다른 모습을 띄고 있는 거예요.

그 네피림이라는 게 등장하게 된 것은 천사와 인간이 관계에서 발생된 자식입니다. 혼종이지요. 천사와 인간의 혼종이에요. 제가 이야기한 게(6.14일 수요설교<죽음초과>) 그게 창세기6장1절~4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자식을 낳았다. “천사가 어떻게 자식을 낳습니까?” 하는 것은 과학적 발상이고, “도대체 그런 환경이 어떤 환경입니까?” 묻는 것은 약속 복음적 질문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께 당부합니다. “과학적으로 어떻게 해명합니까?” 묻지 마시고,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이 어떤 환경입니까?” 라고 질문을 해야 돼요. 환경을 하기 위해서 배치물이 그 앞에 발생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환경을 위하여. 그 환경은 창세기6장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나님의 신이 인간과 함께 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의 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이 인간과 함께하지 않은 거예요. 다른 것은 다 함께해요. 인간과 함께 하지 않아요.

창세기1장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창세 때 천지 창조 때 이미 하나님의 신이 흑암 가운데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요. 하나님은 약속대로 진행되고요. 그 약속대로 진행되는데 맹탕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고 그 속에 배치물들을 발생시키면서 약속은 앞으로 죽죽죽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 않을 때에 이것은 뭐냐 하면 개판돼요. 개판입니다. 왜 이 엉망진창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홍수. 홍수 심판에서 모조리 다 이 인간들을 물속에 잠김으로 말미암아 환경이 더 나은 앞으로 가는 환경으로 이게 전환되는 계기가 돼요.

하나님의 신이 인간과 함께 하지 않는 환경을 A라고 한다면, 그 다음 후에 노아 이후를 환경B라고 합시다. 환경 A → 환경 B로 가면서 주께서 여기에 집어넣는 것은 뭐냐 하면 노아 홍수 심판. 노아 홍수 심판을 집어넣어서 환경B로 당겨버려요. 진척을 한다고요.

그리고 천국은 뭐냐, 최종 언약. 새언약. 예수님의 살과 피를 집어넣어서 환경B가 새로운 새하늘과 새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머리가 더 뛰어나게 되면 예수님의 새하늘과 새땅,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투입된 것은 바로 언약이었다. 그렇다면 언약을 집어넣으면 환경이 바뀐다. 인간은 배치물이니까 인간은 신경 쓰지 맙시다. 나, 어떻게 구원받아요? 그런 거 신경 쓰면 안돼요. 환경이 중요하니까.

그렇다면 환경에서, “언약과 환경의 관계에 있어서 환경이 새로운 환경이 됐다면 그러한 사례가 예가 구약 때 뭐가 있습니까?” 이리 물어보면 돼요. 거꾸로 질문을 하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환경이 A → B 로 바뀌면 B 환경에서 A를 설명할 수 있는 발상이 없어요. 다 죽었으니까.

환경 B에서 우리가 생활하는 방식이 환경A는 적용이 안 됩니다. 진화론은 이걸 몰라요. 환경A가 기본인 줄 알아요. 기본이 아닙니다. 기본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본이에요. 진화론이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어요. 예수의 살과 피가 어떻게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까. 그들은 모호하지요. 그게 말이 되냐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떻게 물위를 걸어? 말이 안돼요. 왜냐, 그건 기존의 자기가 살던 환경의 법칙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새하늘과 새땅에서는요, 예수님의 피로 의로움을 받아요. 그러나 새언약 이전의 모든 것은 뭐냐, 본인이 선한 행동을 해야 돼요. 본인이 선한 행동을 하게 되면 구원을 받지도 못할뿐더러 나름대로의 스스로 위로를 할 수 있지요. 나 그래도 착하잖아. 의롭잖아. 이게 선악구조가 그대로 유지하는 한 이런 환경에서는 예수님의 살과 피는 그들과 완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겁니다. 적대 관계에 있어요.

주님이 새하늘과 새땅 만드시고 예수님의 살과 피로 할 때, 이쪽의 환경에 있는 사람 다 죽여 버려요. 다 죽인다는 말은 다 심판해버린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잖아. 천국에 못 온다. 이러면 그대로 지옥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신이 언약을 따라서 같이 이동하면서 환경 조성에 나서게 되면서 왜 노아홍수 때 모든 인간입니다. 심지어 노아까지 포함해서 모든 인간을 다 죽여버리지요. 여기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개입한 거예요.

개입해서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배제대상이 된다. 모든 인간은. 그러면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이 따로 뽑아놓은 노선이 있나? 있지요. 에녹의 동행이었습니다. 그럼 에녹만 동행이고 노아는? 노아도 동행이었어요. 창세기6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동행했어요. 동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지 않는 자들과의 극단적인 차이점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심판이 와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자체가 저주고 심판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삶의 특징은 뭐냐, 그들이 바로 네피림 거인이에요. 강한 자지요. 그럼 이 강한 자는 노아 홍수 때 몰살됐으니까 더는 강한 자, 거인족이 없었느냐, 아닙니다. 언약은 언약의 새로운 환경에 필요한 요소를 옛날 환경에서 끄집어내요. 그래서 이 가인족. 가인은 죽었는데 가인족, 네피림족, 약속의 땅에 그 원주민들로 다 살아있어요. 왜냐, 새로운 필요한 배치물들을 계속해서 이전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전례로 삼기 위해서 그들을 창조해내기 때문에, 배치물로 생성시키는 거예요. 언약을 위해서.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새언약, 새시대에는 더 이상 천사들은 시집, 장가가지 않는다는 말은 그 시집가지 않는다는 그 말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도 천사와 동일하게 됐다. 예수님의 새언약 환경에서는 천사나 우리나 성도나 전부 다 시집 결혼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식을 놓을 필요가 없게 된 그런 세대다.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성경 전체를 그런 식으로 배치한 겁니다. 질문 됐지요. 오늘 본문 들어가도 되지요.

자, 이제부터 오늘 본문 이야기하겠습니다. 말라기3장5절,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죄의 리스트가 나오지요. 아까 한 거 지우고요.

아까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뭘 준비해야 됩니까, 라는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지금 이 둘러싼 환경이 주께서 어떤 식으로 했기에 환경이 바뀌어졌느냐, 새로운 환경이 오느냐가 중요하니까요.

같은 취지의 입장에 3장5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죄의 리스트의 항목을 해보겠어요. 제일 먼저 나온 게 마술이지요. 마술, 간음, 거짓 맹세, 횡령, 갈취, 우상숭배 이런 것들이에요. 자, 여기서 이것이 죄라고 이야기했어요.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술하는 게 이게 죄거든요. 이게 전부 다 죄 맞습니다. 죄인데, 이 죄 아닌 게 뭐냐, 마술 안하기, 마술 안하기가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이게 죄가 돼요. 간음 안하기. 이게 죄가 돼요. 갈취 안하기. 이게 죄가 됩니다. 횡령 안하기. 이게 죄가 돼요.

그러면 죄 아닌 게 뭐냐, 그냥 주기! 타인에게 그냥 넘겨주기! 희생이지요. 사랑. 신약에서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이 말라기3장5절을 보게 되면 본색이 탁 나와 버려요. ‘야~~ 구약 때 이스라엘이 이런 죄를 지었구나! 그렇다면 와! 요 항목 나오네. 요거 죄니까 요거 안하면 되겠네.’ 이게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은 구약의 정통적인 사람들이에요. 바리새인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느냐, 이렇게 보면 돼요. 우리민족이 왜 망했느냐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 왜 망했느냐 하면 우상숭배하고 안식일 제대로 안 지키고 여러 가지의 간음이나 살인이나 이런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사회적 벌을 했기 때문에 망했다. 그 다음 그들 생각은 무슨 생각이에요? 바리새인은 성령을 안 받은 겁니다. 악령 받은 사람입니다.

악마가 그들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그들이에요. 악마가 통제할 때 그들의 나오는 아이디어가 뭐겠습니까? 어떻게 죄를 안 지으느냐가 이게 그 도착지점이 아니고 어떻게 내가 속해 있는 환경과 나를 내가 어떻게 계속 유지하느냐 그게 목적이에요. 이스라엘을 우리 손으로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느냐가 목적이에요. 내 나라, 내 겨레. 갑자기 노래가 막 튀어나오려고 하는데. 송창식 노래거든요.

내 나라, 내 겨레를 어떻게 후손에게 물려주느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나 하나 희생하면 좋다. 하지만 내 국가는 손대지 말라. 이게 여러분들이 결혼을 해서 알겠지만, 가정을 지킨다고 할 때 부모의 심정이 그 심정이에요. 나 하나? 까짓 거 자식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지. 그러나 뭐는 손대지 말라? 내 자식은 손대지 말라. 가정에 험담하지 마라. 나한테 욕해도 좋은데 내 가정에는 욕하지 마! 우리 뼈대 있는 가문에 대해서는. 글쎄 그 뼈대는 무슨 사골인가? 무슨 사골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뼈대 있는 우리 집안 욕하지 마라. 나한테 욕하는 걸로 됐다. 이리 되거든요.

전통에 인간은 그만큼 강렬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죽었다 말이에요. 손에 죽었잖아요. 바리새인과 하나 들어가요. 사두개인과 하나 더 들어가요. 장로들. 특히 국회의원들한테 죽었어요. 국회의원들이 71명이지요. 하나 더 추가해서 대제사장 포함해서 72명 돼요. 일종의 상원의원이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들의 손에 죽어야만 했습니까? 그것도 정식으로 재판 받아가면서 죽은 이유가 뭐예요? 재판을 했다는 말은 법적으로 공식적으로 우리는 선언한다. 너는 이단이야. 너는 귀신 들렸어. 그걸 공식화 시켰다 말이지요. 개인적인 감정 안 들어갔다 말입니다. 감정 빼고 이성적으로 봤을 때 예수님은 이성을 갖고 있는 정상적인 고상하고 교양 있고 합리적 사고방식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 눈에 보기에 예수님은 뭐였다? 완전히 사기꾼이었다.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이 예수님 믿는다 하니까 아우, 저 사람은 저렇게 대단해. 왜 예수님 믿습니까? 합리적으로 따져볼 때..., 합리적으로 따져서 믿는 건 바리새인보다 더 뛰어나지를 못해요. 양심적으로 볼때에...,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무슨 일을 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살해 당했느냐 말이지요. 이 전체 체제를 다 무너뜨렸기 때문에, 허물어트렸기 때문에. 이 전체 체제를.

율법의 완성은 내가(예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거예요. 지금 들어도 예수님께서 엄청나게 도발적인, 사람을 믿으란 말인지, 믿지 말라는 말인지, 엄청난 발언을 해버린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이 이야기하면 더 엄청난 걸 알 거예요.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왜? 죄가 사람을 매개로 해서 죄를 짓는 거예요. 이 이야기 한 거예요. 이 이야기를. 이건 인간을 개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게 아니에요. 요건 죄, 요건 나쁜 것. 나쁜 것은 안하고 착한 것은 할게. 이게 인간이잖아요. 이게 짐승이 아니고 인간들의 상식 있는 인간들 모습 아닙니까. 할 수 있는 모습.

사도바울도 역시 비난받을 만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율법이 옴으로 어떤 죄가 생겨났다. 지금 이 이야기를 로마서7장에서 하고 있다고요. “너, 착해?” “착해.” “그럼 율법 줄까?” “그럼 더 착해지지.” “아니. 율법을 주는 순간 너는 이제부터 착한 것은 무효였어.” 그럼 상대방이 “어째 그런 일이?” “너는 잠복된 죄에 대리자니까.” 잠복된, 잠재되어 있는 죄의 대리자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은 죄를 모른다는 거예요. 죄를 모르면서 죄를 안 지으려하는 그 자체가 그게 자기 의를 유지하려는, 만들어내려는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내려는 하는 그 작품이 죄에요. 자기 의. 그 의가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죄의 앞잡이가 되거든요. 이걸 어려운 말로 인간은 죄의 매개자라 하는 거예요. 앞잡이가 되어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건드리지요. 점치는 자들, 마술이지요. 점치는 자들, 점치는 자에게 내가 너희에게 임한다. 임할 때에, 주께서 임할 때에 무시무시하게 임하는데. 3장2절에 보면, 그 임할 때에 누가 당하리요, 임한다는 말은 참혹한, 처절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저주는 죄 있는 자에게 다 퍼붓는다고 단언하면서 그 죄에 대해서 점치는 자라고 나왔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배후에 죄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매개자 입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점을 안치면 되지. 점을 안치면 될 게 아니냐. 주께서 “기껏 그게 반응이야? 그 정도밖에 다른 반응은 못 보여? 못 보이느냐 이 말이야?” 말씀에 이게 죄라 하니까 죄를 안 짓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서 거룩하게 영광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죄를 안 짓겠다는데 이게 뭐가 나쁘냐, 이렇게 대들지요.

아까 질문과 관련해서 지금 그렇게 대드는 인간들은 뭐냐 하면, 자기 환경을 따로 만들려고 해요. 환경 속에 자기가 놓여있다는 생각은 못하고 자기가 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일단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보편성을 이루는 보편성 속의 일개 구성원이에요. 인간은.

그런데 인간은 이 보편성을 생각 안하고 뭐냐 하면, 본인을 특수성으로 이해합니다. “내가 내 돈 주고 내가 사는데 니가 왜?” 이걸 특수성이라 해요. 애가 좀 크면 지가 방에 문 잠그고 게임한다고 밥 먹으라고 하면, 게임 다하고 할게. 이게 무슨 뜻이에요? 특수성이에요. 엄마는 가정이라는 보편성을 생각하는데 키워놓으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특수성으로 가는 겁니다. 이 특수성 안에 뭐냐, 나만 바르게 살면 되지. 나만 바르게 살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보편성의 원천이 인간의 특수성은 주께서는 인정을 안 해요. 보편성을 이루는 원천은 언약, 예수님에 의한 보편성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뭐가 되느냐 하면, 유일한 특수성이 됩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세례요한이 그걸 발견했어요. 세례요한이 알게 되었어요. 요단강에 세례 받을 때 특수성이 나왔어요. 유일한 특수성이에요. 보라, 그 다음이 뭡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이리 되어있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사람이 두 사람입니까? 세 사람입니까? 몇 명입니까? 단 한 명이지요. 특수성이지요. 단 한 명이지요. 다른 사람은 세상 죄를 지고 갈 수 없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은 뭐냐, 세상 죄의 구성원이지요. 세상 죄의 구성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렇게 충격적인 발언을 한 거예요. 세례요한도 그런 이야기했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은 너그들 잘하나 못하나 상관없이 이미 다 죽었어! 그런 뜻이에요.

너희들은 이미 죄의 일부에요. 죄의 일부. 그래서 구호를, 구호를 제가 만들었지만, 구호를 외치는데 구호를 빨간 걸로 외쳐야 또 폼 날 거 아니겠습니까.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 이 말은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는 아예 만나지 마라가 아니라 사람한테 요만큼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왜? 그들은 특수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나를 해꼬지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러한 안목과 태도가 있어 줘야 세상 죄에서 나온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사람을 아예 상대를 안 하지요. 가게에서 하루에 손님이 수백명 오지요. 수백명 오잖아요. 수백명 상대해줘도 사실은 단 한 명도 상대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한 명도. 그럼 우리는 누구하고 상대하나, 사람하고 상대하나? 누구하고 하나? 우리는 예수님과 상대해야 돼요. 왜?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보편성에, 특수성과 관련성이 있는 사람이에요.

심판은 확정된 거예요. 말라기3장2절에.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심판의 날에 너희들이 알아서 잘하면 내가 안 오고, 잘못하면 올게. 이게 아니고 이미 결정 났어요. 그냥 들이닥치는 거예요. 그냥 닥치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 생각할 것은 뭐냐, 왜 이 세상을 심판해야 되고, 저주해야 되느냐, 그 당위성, 그 당위성에 필요한 배치물들만 이 땅에서 계속해서 생산해내면 그게 무슨 일이다? 그게 주의 일이고, 그게 무슨 일이다? 주의 의가 되는 거예요.

“내가 바로 심판받을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그게 주의 의가 돼요. 이게. 주께서 하지 않으면 그게 주의 일이 오지 않으면 그런 고백이 나오지를 않아요. 성도가 아니면 그런 고백이 안 나와요. 그게 누가복음18장이잖아요. 예수님께서 누가 의인이 있는가 하고 있는데 바리새인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했습니다. 십일조 했습니다. 하니까 세리는 고개를 못 들겠습니다. 순회 재판하잖아요. 죽 돌아다니면서. 그걸 수시모집이라 해요. 미리 하는. 너, 합격이야! 내 심판의 취지에 부합되는 생산물이에요.

예수님은 뭐가 부합되느냐 하면 예수님은 자기 빼놓고 심판해야 부합돼요. 육으로 났기 때문에. 성도 안 죽이는 게 아니라 성도도 죽이고, 성도도 심판하고 저주해요. 성도를 저주할 때, 심판으로 저주할 때는 십자가 사건의 취지로 말씀으로 심판해버리고 십자가로 심판해 버리고. 저쪽은 뭐냐 하면 십자가 외곽으로 심판해 버리지요. 그걸 행함이라 합니다.

이쪽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때려버리지요. 죽여버리지요. 지렁이가 꾸물꾸물하니까 모기가 바들바들하니까 쳐버려요. 쳐버리는 이게 사랑이에요. 나의 이름을 칠 때, 이 치는 손바닥이 뭐가 적히느냐, 주의 이름이 새겨지는 거예요. 이제는 니 이름보다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게 하는 거예요.

주의 손바닥으로 치면 그러면 피 흘리고 모기가 거기에 붙어있겠지요. 요 모기가 성도에요. 모기는 자기를 특수성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손바닥이라는 보편성 속에 하나의 주님이 만든 보편성에 주님만이 특수성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 옆에 붙어있지요. 온통 피투성이로 피 터져가지고 달랑 붙어있지요. 이걸 주의 증인이라 합니다.

어제 수요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찾으라 하면 바로 핍박받는 자를 자기 백성으로 삼는다는 거예요. 그 대목이에요.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자기 백성으로 삼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치고 하나님을 핍박 안한 사람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게 바로 제사장으로서의 희생자로서의 왕이에요. 백성이 없으면 왕이 안 되잖아요. 왕이 왕 되려면 백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 백성은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핍박자를 백성으로 모집해서 예수님이 왕이 되어버립니다. 그 핍박받는 대상이 될 때 예수님은 희생물, 제사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자, 그러면 좀 더 진도 나가봅시다. 예를 들어서 횡령 같은 경우 봅시다. 착취 횡령. 착취 안하는 것이 의로우냐, 아니에요. 횡령 안하는 것이 의가 아니고, 횡령을 통해서 상대방이 달라할 때 줄 수밖에 없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거예요. 산상설교에 나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속옷을 주어라. 횡령을 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요, 그건 선악체제고. 복음체제에서는 상대방이 달라할 때 그냥 줘버리는 거예요. 줘버리면 어떤 의미에서 누가 누구를 횡령한 거예요? 상대방이 내 것을 횡령한 셈이 되지요. 그럼 나는 피해자가 되지요. 횡령이라는 그 횡령하지 말라는 그 말씀은 횡령이라는 말씀 때문에 피해자가 되는 거예요. 가해자가 피해자로 전락되는 겁니다.

달라 할 때 주라. 이게 산상설교 말씀이잖아요. 좀 더 여기서 몇 말을 더 붙일 필요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달라할 때 줘야 하느냐, “나 같은 자에게는 전혀 줄 필요가 없습니다.” 또는 “나 같은 자는 가질 필요 없습니다.” “나 같은 자는 더 살 권한이 없습니다.” 하는 자가 할 때 줘 버리라.

그럼 아까 보세요. 달라할 때 주라 해놓고는, 방금 이 말 나같은 자는 살 권리 없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한테 달라고 하겠어요? 달라 하지 않겠어요? 달라고 하지 않지요. 여기서 이제 깊은 게 나와요. 나는 있는데 어떤 사람이 앞에 와서, “나 같은 것은 살 가치도 없고 나는 남한테는 필요 없어요. 나는 그냥 죽을래.” 라고 할 때에 나라는 사람이 A라면, 나한테 온 사람은 B가 되겠지요. 나는 A가 되겠지요. 여기서 C가 등장해요. 누구냐 하면, 주님이 등장해요.

그래서 주님이 등장해서 어떤 사람이 여기서 나와 줄 때에 나는 이 사람에게 줄 때, 이 사람에게 준 게 아니고 주님에게 준 게 돼요. 내가 목마를 때 언제 주었습니까? 내가 배고플 때 언제 주었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 했지요. 2항에서 어디까지 간다 말입니까. 3항까지 가줘야, 세 가지 항이 있어줘야 이게 말씀의 완성이 돼요. 이 말은 뭐냐, 이런 뜻이에요.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절대로 도와주지 말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기쁘지 않습니까.

자식이 도와 달라 해도 도와주지 마세요. “나는 엄마, 아빠 나 같은 거 안 도와줘도 돼요.” 할 때 도와주세요. ‘엄마, 아빠한테 애를 먹여가지고 엄마 아빠한테 도와 달라할 염치도 없고 나 같은 것은 굶어죽어도 괜찮아. 라고 하면 엄마가 도와주겠지.’ 이런 자식은 도와주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도와줄 사람이 드물어요. 거의 없어요. “니만 잘사나, 같이 살자.” 이런 것은 도와주는 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니는 옷도 잘입고 나는 추리닝 하나밖에 없다.” 이리 나올 때 아프리카 가면 추리닝 입으면 중산층이에요. 이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에서 나와요.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나와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러분이 그 이야기 다 아시지요.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세 사람이 지나갔잖아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 도와줬다. 왜 이렇게 이야기가 되지 않고, 앞에 제사장 그냥 패스했지요. 레위지파, 요새로 하면 집사지요. 목사 지나가고 집사 그냥 지나갔어요. 이 이야기를 거기다가 왜 배치를 하느냐 이 말이에요. 그 이야기가 왜 배치를 하느냐 하면 지금 사마리아사람.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주제넘게 자기가 끼어들 자리도 아닌데 끼어버린 거예요. 끼일 자도 아닌데.

그래서 “사마리아사람처럼 우리가 남을 도와주세.” 라는 교훈은 거기에서 나오면 안 돼요. 어려운 사람 도와주자. 어려운 사람이 이렇게 했으니 너도 자비를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주의 말씀 듣고 자비를 베풀 자를 찾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 자체가 그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줄 때에 내가 자비를 베풀 사람이 아님을 본인이 알기 때문에 도와준 거예요. 내가 자비를 베풀 그런 잽이 못 되고,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도와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과 자기를 동격화시키는 거예요. 강도 맞은 거예요. 법적으로 하면 강도 잡아라! 되잖아요. 그러나 그 이후에 강도가 나타나지 않아요. 희한하게. 나쁜 강도가 나타나지 않아요. 피해 입은 사람과 피해 입지 않은 사람만 있을 뿐이에요.

자,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해서 세상은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있잖아요. 주님은 이 2항을 뭘로 바꾸느냐 하면, 피해 입은 자피해 입은 자를 도와주는 자로 이 구조를 이렇게 바꿔버려요. 그러면 선한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해 입은 자를 도와주는 자만 존재해요. 그러면 피해 입은 자를 도와주는 이게 예수님께서는 자비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비는 무엇이 먼저 등장해야 자비가 등장해요? 피해 입은 자가 등장해야 자비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나 모든 인간은 본인이 피해자이고 싶지를 않아요. 피해자 되고 싶지를 않습니다. 내가 뭐가 못나서 이렇게 지질이 못난 피해자 노릇을 해? 나 그렇게 어리벙벙한 인간 되기 싫어. 이게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 땅에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말씀이 왜 등장했느냐 하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이 등장하면서 그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율법을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이웃을 두지를 않습니다. 지 이용물이지. 이웃이 없어요. 자기가 특수자인데 무슨 이웃이 있습니까. 자기가 특수자인데. 그 이야기는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처럼 될 사람은 있다? 없다? 없다. 그게 예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

말씀을 던져놓고 나처럼 지킬 사람 아무도 없다. 그래서 너희들은 전부 다 저주받아 마땅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너희 배후에는 죄가 있고, 너는 죄의 매개자일 뿐이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여기에 나옵니다. 5절에 보면,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아까 그 말씀대로 하면 억울하게 하며, 억울한 것. 아~ 사람의 심정에서 아무리 참아도 진짜 참을 수 없는 게 딱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억울한 거예요. 이건 분노가 안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어요.

주께서 우리의 분노를 끄집어내려면 간단해요. 억울한 일을 당해버리면 분노가 확 튀어나옵니다. 거기 있었나? 분노! 확 나오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 땅에서 억울한 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억울한 자가 없느냐 하면 모조리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복수를 노리기 때문에 복수자만 많이 퍼져있지 진짜 억울한 자는 없습니다. 억울한 자는 주님 밖에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일본말로. 요시. ‘두고 보자. 복수할 거야. 니가 나한테 그렇게 해놓고 니는 니가 멀쩡하게 살 것 같애? 내 다 기억해 놨어.’ 이리 되잖아요.

여기 고아와 과부가 억울하다는 것은 인간나라에는 이런 게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도 마찬가지에요. 사기당한자도 마찬가지에요. 50만원 빌리고 7억 갚아야 될 사람도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억울한 사람 아니에요. 진짜 억울한 사람은 복수할 잽이 못 된다. 복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진짜 억울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 어디 있어요? 없어요.

지금까지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계속 없다는 이야기했거든요. 없다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강조하느냐,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출애굽기4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장자로 보는데 아닙니다. 장자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말라기에서 장자가 되려면 반드시 레위지파의 언약을 준수해야 아들이 돼요. 장자가 돼요. 레위지파의. 그런데 말라기에서 언급한 자체가 레위언약이 깨어졌음을 알려기 위해서 한 거거든요. 이제 이야기가 십일조로 들어가요. 이렇게 해놓고 십일조로 들어가야 돼요. 십일조.

제가 강의 전에 미리 읽어보시라 했지요. 십일조를 남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여러분이 해보라 했지요. 십일조가 뭐냐, 십일조가 어려울 때는 결론부터 답부터 먼저 보시면 좋아요. 수학 문제 안 풀릴 때는 수학정석 뒤에 답이 있잖아요. 답보고 슬슬 이제 거꾸로 추적해 나가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 시간이 절약되니까. 십일조는 아들입니다. 아들. 십일조는 성도도 아니고 아들이에요. 그냥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아들. 여자의 후손이지요. 아들이에요. 이게 십일조에요.

무슨 논리가 비약적으로 이렇게 갑자기 등장하느냐, 그동안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돈으로 봤거든요. 십일조를 돈으로 본 거예요. 수입의 십분의 일로 본 거예요. 수입의 십일조가 십분의 일이라고 간주한 이유는 본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스스로 그렇게 간주했어요. 본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십일조 하라는 레위언약을 아직도 유효하게 우리가 그 언약 속에 있을 만한 자격이 된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들의 그 허구. 말도 안 되는 망상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십일조를 언급해 버린 겁니다. 말라기 하나님께서.

십일조가 유지된다는 것은 레위언약이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왜 나라가 망했지요? 왜 제사장 나라가 망했느냐 말이지요. 제사장 나라는 레위언약이 살아있을 때 제사장 나라에요. 지금 사단이 어디서 났느냐 하면, 내가 이스라엘인가에 대해서 본인이 스스로 의심하거나 묻지도 않았던 게 문제에요.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과 율법가지고 주고 받을 그러한 잽인지 그러한 대상자인지를 스스로 하루에 몇 번 물어봤습니까? 물어보지를 않는 거예요. 왜 물어보지를 않았느냐 하면 다른 민족과 비교해서 그런 거예요. 다른 민족에게는 율법이 없다. 우리는 율법이 있다. 다른 사람은 성경도 없는데 우리는 안다. 우리는 성경을 안다. 그들은 성경을 모른다. 따라서 우리만큼은 특수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아들 장자다. 이렇게 그냥 밀어붙인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우습게 본 거죠.

3장 보기 전에 호세아를 한 번 봅시다. 호세아 선지서에 나올 때에 하나님의 전략이 뭔지를 우리가 미리 간파합시다. 하나님의 작전이 뭐냐, 그 호세아 1장에 보면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등장하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지만 설명 들어갑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담은 대리인입니다.

이 호세아가 결혼을 해요. 누구와 결혼을 하느냐 하면 간음한 여인과 고멜과 결혼을 합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네피림 민족이 그대로 살아있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의도적으로 살려낸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간음한 여인을 아내와 혼인해서 하긴 하는데 이유가 있어요. 뜻이 있어요. 자식을 놓는 거예요. 자식을 낳는데 아들 둘, 딸 하나 놓지요.

첫째 아들 이름은 이스르엘, 둘 째는 딸을 낳는데요. 6절에 고멜도 임신하여 딸을 낳는데 이름을 로루하마라 했지요. 로루하마라는 뜻은 긍휼을 입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셋째 아들을 낳는데 로암미로 되어있어요. 로는 아니야. 영어로 not이라는 뜻이에요. 부정적 어구지요. 내 백성이 아니다.

자, 하나님의 전략을 보세요. 지금 이스라엘은 자기가 이스라엘로 보고 있어요. 정통적으로 율법 지키고 여호와 믿으니까 곧 죽어도 이스라엘로 알고 있어요. 자기들이. 왜? 어디를 봐도 자기 민족 같은 이스라엘이 없으니까. 자기가 이스라엘 유일하니까요. 아까 배웠던 용어는 특수적. 이스라엘이 특수성을 지금 쥐고 있는 거예요.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다.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략은 뭐냐, 간음한 여인과 혼인을 시켜버려요. 그러면 그 정통적인 아브라함의 혈육에서 율법의 위반요소가 들어오지요. 율법으로 유지되는 나라에 율법 위반요소가 들어와서 거기서 그냥 결혼만 하는 게 아니고 자식을 낳아버려요. 그럼 자식을 낳으면 그 이스라엘은 자식 이후의 남은 이스라엘은 호세아가 선지자니까, 이스라엘을 대표하니까, 이스라엘 대표한 자의 난 자식이 이스라엘이 아니다가 되어버려요.

자, 이스라엘이 아닌 상태에서 레위언약은 과연 온전하게 성취될 수 있느냐, 수행될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당연히 안 되지요. 안되는데 그들은 뭐라고 우깁니까. 우리는 여전히 레위인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율법이 있고, 우리는 이스라엘이라고 우기게 된 거죠. 그 우김.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거예요. 착각해 가지고.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본인이 이스라엘이 아닌 자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을 그걸 지키려고 했을 때 나오는 현상과, 장차 진짜 이스라엘 되시는 예수님이 율법 지키실 때에 그 때 나오는 현상, 또는 성도, 성령 받은 성도가 율법대로 완성될 때 나오는 그 현상의 격차를 주께서 구약을 끝내면서 신약을 맞이하면서 그 격차를 크게 벌리시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율법 지켰다는 인간들. 문제는 뭐냐 하면 니가 누군지를 니가 알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어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렇다면 말라기는 왜 줬는가, 소급해서 줘요.

말라기에서는 니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 혹독하게 주님께서 말라기를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일날 설교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내가 나의 끝물이다.” 화투에 이런 게 있잖아요. 첫끝발이 개끝발이다. 라는 말이 있잖아요. 내가 나의 끝끝발. 나를 망치는 것은 누구다? 내가 나를 망치고, 내가 나를 최후로 망하게 하는 장본인이 바로 나다.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2장20절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나에서 나온 말과 어떤 행위에 대해서 더 이상 내가 거기서 신경 쓰면 안돼요. 그래서 제가 아까 그랬잖아요.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고 했지요. 여기에 급진적으로 나갑시다. 나는 누구와 상대하면 안 된다? 나하고 상대하지 말라. 나는 나하고 상대하면 안돼요. 니 말 왜 그리했어? 니 행동 왜 그리했어? 신경 쓰지 마!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나한테 신경 쓰면 안돼요.

나는 주님과 먼저 관련되어야 돼요. 그게 뭐냐, 3항이에요. 3항. 저 사람 도와줄까요? 말까요? 그건 내 소관 아니에요. 왜? 내가 내 돈도 아니고 나하고 상관할 문제가 아니니까.

그 사람 도와준다고 도와주면 안돼요. 덜렁 돈 주고 하면 안돼요. 줄 돈도 없지만. 하면 안 되지요. 왜 건방지게 내가 나한테 지시 받습니까? 내가 뭔데 나를 지시해요. 내가 이미 내게 아닌데. 나는 배치물이거든요. 새로운 환경의 배치물이 왜 내가 왜 특수성을 지가 특수부대도 아닌 게 지가 왜 특수성을 발휘합니까.

우리는 일개 보편성 중의 하나인데요. 더 하면 안 되겠지요. 10분 쉬고 합시다.

 

 

안양20230615b말3장8절(보편성과 특수성)-이 근호 목사

십일조가 아들입니다. 십일조가 아들인데, 십일조가 아들이라는 말이 무슨 뜻으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태어날 때부터 십일조인 자와 태어날 때부터 십일조 아닌 자로 구분돼요. 율법이 율법대로 되려면 그 율법을 지키는 자가 있어야 돼요. 존재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율법 주시고 받는 자가 율법을 지켜야 되는데, 이스라엘은 날아가 버렸어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육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이에요. 호세아에 의해서. 내 백성 아닌 거예요. 내 백성이 아니고 그 다음에 로루하마 긍휼을 입지를 못해요. 이스르엘 사방으로 흩어져야 될 씨 뿌려지듯이 흔적도 없이 모으지를 못하고 규합되지를 못하고 뿔뿔이 다 흩어져서 전체 이방민족 우상의 그 보편성 안에 일부로 전부 다 산포된다. 분산되고 다 뿌려져버린 거예요. 씨앗 뿌리듯이 뿌려져 버리는 거예요. 재를 뿌리듯이.

그렇다면 지킬 사람 없고 뭐만 남았어요? 십일조 하라는 율법만 덜렁 남은 거예요. 그러면 십일조 할 사람을 또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십일조 할 사람을 또 만들어 봤자 또 마찬가지에요. 십일조 자체가 인격이 되면 돼요. 인격. 하나의 인물이 돼요. 십일조라는 인물이 등장하면 됩니다. 그래서 초반에 그랬잖아요. 십일조를 뭐라고 했습니까? 십일조는 아들이다. 아들. 딸도 아니고 아들이에요.

왜 이런 논리가 나왔느냐 하면, 창세기14장 때문에 나옵니다. 창세기14장. 창세기14장이라면 레위기보다 훨씬 전인데 역사가 창세기를 지나서 레위기해서 이제는 신약에 들어가야 되는데 왜 거꾸로 가느냐,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원천은 처음부터 원천적인 것이 있어줘야 돼요.

14장17절~20절 보게 되면,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이리 나오지요.

여기에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십일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승리하고 뭐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승리케 되도록 의도적으로 적들을 만들어놓고 거기 맞은편에 아브라함으로 전쟁을 하도록 조카를 사로잡히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전쟁은 하나님에 의해서 1항 2항이 아니고 제3항 세 번째 항으로서 하나님이 전쟁에 붙여서 전쟁에 승리케 한 거예요.

그 전쟁 왜 승리케 했는지, 하나님이니까 승리케 해야지. 그렇게 하면 안되고요. 왜 승리하게 했는가, 십일조를 생산하기 위해서 승리하게 한 거예요. 그렇게 승리하니까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 아브라함이 얻은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채워줘서 얻은 것. 이렇게 풀이하면 맞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줬다 뺏는 것,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내부의 정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표현이 더 풍성해지고 더 많아지고 더 추가된 요소가 아브라함을 경유하면서 발생된 것. 이렇게 보시면 되겠지요. 이건 아브라함 자리에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 만들어서 이미 이루었다 하심이 내용이 그 이루었다는 내용이 얼마나 풍성하고 얼마나 대단하고 넓은지를 못난 우리를 통해서 경유했다가 줬다가 뺏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십일조지, 우리는 십일조가 아닙니다. 우리는 십일조의 명목으로 몽땅 빼앗기는 것. 우리가 빼앗기는 거예요.

그게 아까 처음에 했던 강의 다시 해봅시다. 죄는 점치는 것, 간음하는 것, 횡령하는 것, 착취하는 것, 여기서 발생된 자 억울한 자가 등장하는데 그럼 죄가 아닌 것. 그럼 죄 아닌 것은 무엇이냐,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드릴 줄 모르잖아요. 그럼 방법은 뭐냐, 빼앗기면 되지요.

빼앗길 때에 남들 보기에 우리는 뭐가 되느냐 억울한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당사자는 억울한 게 없어요. 왜? 나를 빼앗도록 하는 이 환경 속에 주께서 줬다가 빼앗는 주께서 붙여주시는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그냥 우리는 작업인으로 참여한 거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령이에요. 유령. 우리는 유령 같은 존재에요. 이걸 고상하게 말하면 일회용 용역.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인생은 일회용 용역입니다. 이걸 사자성어로 말하면 대일밴드. 붙였다가 효과 떨어지면 떼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대일밴드로 할까. 대일밴드 같은 존재. 얼마나 영광스러운 대일밴드입니까. 정말 감사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동안 이건 내 거다. 내가 지켜야지. 한다고 얼마나 울었어요.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울고, 애통해했고, 억울하다고 가슴 쳤고, 하나님, 저한테 왜 그래요? 이런 식으로. 무슨 억하심정으로 저를 이렇게 괴롭힙니까. 라고 가슴치면서 엉엉 울면서 부르는 것.

오늘 첫째 시간 강의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절대로 타인에게 동정하면 안 돼요. 어디 시건방지게 동정을 받으려고 해. 남을 동정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동정받을 처지도 아니고. 동정해줄 것도 없고. 우리는 사람을 상대하지 말아야 되고, 심지어 나와 상대하면 안돼요. 거대한 주님의 특수성에 우리가 휘말려 간 거예요. 주님의 특수성에 우리가 휘말려 간 거예요. 주님의 특수성에.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8장2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뭐가 된다? 맏아들이 된다. 맏아들은 누구밖에 없느냐,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맏물, 맏, 그걸 가지고 십일조라 합니다. 십일조. 십일조라 하는 것은 최초의 생산물. 최초의 생산물이니까 이 땅에는 없던 존재였는데 나타났다는 겁니다. 없던 존재였는데 나타났다.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성경 구약 전체에서 토대가 되는 원리입니다. 그게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은 없는 땅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땅은 인간들이 개간하겠다고 개발하기 나름이라고 이렇게 본 거예요. 인간이 손대면 개발이 되고 손 안대면 그냥 낙후되고 그냥 천박한 땅이 된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땅은 사람이 손댄 사람의 노동이나 손을 대기 여부에 따라서 땅의 성격이 결정된다. 이게 이 대지를 사는 인간들의 이구동성 같은 생각이에요.

인간이 손대지 않았는데 인간이 개발하지도 않았는데 인간이 손댈 수도 없고 개발할 수 없는 땅이 등장한다. 그건 말도 안 돼! 그건 거짓말이야! 라고 한 거죠. 그런데 이런 주장하는 인간 자체가 거짓말인 것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을 만들어버렸어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느냐,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하나님을 믿는다. 지금 그 문제를 생각할 필요조차도 없어요. 땅 가운데 낯선 땅이 등장하면 그걸로 게임 오버 끝났어요. 땅 가운데 낯선 땅. 땅 가운데 땅. 약속의 땅. 그런데 이 땅이 저 땅과의 차이점이 뭐냐, 이건 약속의 땅이에요. 인간들 있는데 여기에 이삭.

자, 이삭의 특징은 뭡니까? 약속으로 태어난 자. 나머지는 부모의 육신으로 태어난 자. 이삭은 부모의 육신이 끊어졌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 땅. 자식이지요. 부모가 못 낳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그 내용이 함유된 인물 이삭입니다. 그러니 인간 가운데서 이삭이라는 게 아주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능가해서 출몰하지요.

출몰한 것이 인간세계에서는 뭐냐, 위기가 되지요. 위기. 이삭 너 뭐야? 너는 왜 우리와 같이 아니하지? 그렇게 낯설면 안 돼! 우리는 다 친숙해야 돼. 니가 낯설어버리면 우리가 뭐가 돼? 그럼 우리의 뿌리부터 다시 조사해야 되잖아 그럼 너 때문에. 니가 만약에 부모의 혈육적인 요소 없이 그냥 약속으로 와버리면 졸지에 우리가 뭐가 돼요. 자칫하면 뭐야? 살아도 소용없는 가짜가 되어버린다고요. 거짓된 인간이 되어버린다고요. 거짓된 인간.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이유를 이젠 아시겠지요. 서서히 밝혀졌지요. 그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다른 사람은 동조하고, 제자들은 도망치고. 겁먹고 도망치고. 이제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사람 같은데 사람 아닌 사람 같은 사람. 그래서 이름하여 인자. 그러면서도 더욱 더 강조하는 것은 인자. 진정 사람은 나다. 나만이 사람이고 나 외에는 사람 아니다.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너 뭐야?” “너 어떤 인간이야?” “나 인간 아니야.” “뭔데?” “소리야.” “무슨 소리?” “그 분 오시는 발자국 소리.” 그 분 아직 등장하지 않았는데 발자국 소리가 저벅! 저벅! 저벅! 소리.

썰매를 같이 타고 있어요. 루돌프 썰매를 같이 타고 있는데. 저 뒤에 오실 메시아, 차이 나봤자 6개월밖에 안나는데, 내 뒤에 오실 예수님의 썰매를 같이 타고 있어요. 여기에 눈으로 목격되는 세례요한.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면서 회개하라 하지요. 회개하라.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 지금이 끝날이야. 그런 뜻이에요. 세상 끝났다. 세상 끝났어. 그 분 오신데.

그런데 그 분이 안보이지요. 그 분이 안보이는데 오신다는 소식. 소리만 들리는 거예요. 외치다가 목 잘라가지고 목 댕강해가지고 날아가가지고 죽었잖아요. 이 이질성. 이 세상에 이질성을 집어넣는 거예요. 복음에 무슨 착하고 거룩하고 나쁜 게 어디 있어요? 끼일 수가 없어요. 자체가 기쁜 소식이지 듣고 바르게 사는 게 기쁜 소식이 아니에요. 복음 자체가 기쁜 소식이라서 너무 기뻐서 내가 착하고 악하고 그런 걸 내가 나한테 그러한 평가를 내릴 자격이 나한테 없기 때문에 나는 나와 사귀면 안 된다니까요.

나 때문에 내가 실의에 빠지면 안 돼요. 나 때문에 나한테 내 말에 주눅 들면 안 돼요. 나와 상관없이 내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오실 분과. 이게 특수성이거든요. 그쯤하고 제가 아까 물었던 거 말라기3장 11절 이야기하면서 여러분이 무슨 생각 하겠습니까? 보통 세상 사람이라면 이 십일조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하겠어요? 참, 하나님 어지간히도 욕심 많다. 그래 그 푼돈까지 갈취하나? 야~~ 갈취하지 말라 하면서 하나님 본인이 갈취하고 있네! 참,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 이런 거. 막 손들고 질문하고 싶은 거예요.

세금 빼고 십일조입니까? 다 합해서 십일조입니까? 질문하고 싶은 거예요. 가게 하나 놓고 전세 놨는데 전세금 총액수의 십일조 해야 됩니까? 아니면 세금 이런 거 다 빼고 십일조해야 됩니까? 막 질문하고 싶은 거예요. 십일조 가지고 거래하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돈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맏물이라는 것은 사태에요. 사건의 결실입니다. 사건의 결실이기 때문에 맏물 자체가 완료가 되어버려요. 거래 대상이 안돼요. 좀 깎읍시다. 이게 안돼요. 맏물이라 하는 것은 먼저 나온 거거든요. 주께서 먼저 나오신 분. 그 먼저 나오신 분을 뭐로 보느냐, 십일조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라는 배치물을 통해서 이 땅에서 장자가 출현 된다는 사실을 창세기부터 이미 아브라함에게 넌지시 알리고 암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십일조 해당되는 분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일을 완성시킨다. 그러면 십일조는 언제 등장하는데 창세기14장에 보면 십일조는 전쟁할 때 왔습니까? 전쟁 끝나고 승리했을 때 줬습니까? 승리했을 때.

이 십일조라는 분이 등장하면 전쟁은 끝났습니다. 이미 승리는 마감이 되었어요. 다 이루었다. 깃발 올라갔습니다. 깃발 올라갔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 토끼하고 거북이하고 시합을 할 때에 토끼가 몰랐던 점은 뭐냐 하면 내가 가다가 졸 수 있다는 생각을 토끼가 할 수가 없었어요. 왜? 지금껏 경기하면서 졸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토끼가 뭘 모르느냐 하면, 환경을 몰라요. 산에 250m올라가면서 산에 254m갈 때 하나님께서 습기 촉촉이 해가지고 잠이 오도록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토끼가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거북이는 낮잠 안 잤기 때문에 올라갔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토끼 안에 이미 토끼가 패배 될 수밖에 없는 요소가 토끼 안에 장착되어 있는 상태에서 거북이하고 시합을 붙인 거예요. 배틀을 붙인 겁니다. 이건 뭐 시합 하나마나에요. 성도하고 성도 아닌 사람하고 시합 하나마나에요.

문제는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과의 시합인데 문제는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교회 다닌 사람하고 교회 안 다닌 사람하고 시합을 해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둘 다 성도 아닌데. 그런 구조는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 다니는 게 뭔데요? 교회가 십일조나 농락당하거나 빼앗기지 뭐 있어요. 없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 안다니는 사람 차이가 아니고, 성도하고 비성도하고 이미 배틀은 게임은 이미 끝나버렸어요. 비성도, 성도 아닌 사람은 매일 자기를 닦달냅니다. 채찍들고 자기가 자기 몸 쳐요. 똑바로 말씀대로 살으란 말이야. 맨날 쳐요. 믿음 꼬라지 하고는 매일 쳐요. 성도 아닌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때리는 거예요. 뭘 얻겠다고. 비성도가 성도보고 “너는 왜 너를 닦달하지 않아. 니는 니를 스스로 책망하지 않느냐.” “게임 끝났는데. 게임 끝났어. 게임비 내가 낼게. 미안하니까 게임값 내가 낼게. 게임 끝났어.” 깃발 흔들고 있는 거예요. 다이루었다는 깃발. 산위에서 깃발에 바람에 휘날리고 있지요.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19장30절. 깃발 들고 있어요. 마치 모세가 지팡이 들은 것처럼.

모세가 지팡이 들은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수아가 벌이고 있는 전쟁의 군사력이냐, 아니면 지팡이 어느 쪽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했는가, 그걸 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지팡이 가지고 계속 애굽에서 계속 나왔잖아요. 지팡이 담긴 뜻을 더 깊이 하기 위해서 아말렉으로 하여금 쳐들어왔고 그 쳐들어온 전쟁이 무슨 전쟁이냐 신명기에서 자주 나오는 뭐냐, 붙이시는 전쟁이에요.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자를 이미 구원이 된 사람에게 자꾸 치대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조금은 귀찮지요. 귀찮지만 그럴수록 성도로 하여금 자기하고의 상대하는 것을 끊고 내가 나와의 상대를 끊고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새록 새록 그 구원의 기쁨을 더 크게 키우는 그런 취지가 있기 때문에 그 불신자를 가지고 자꾸 귀찮게 하는 거예요. 하여튼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자, 그러면 여기서 히브리서7장을 보겠습니다. 1절에,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그 다음에 뭡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지요. 분명히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에요. 예루살렘의 왕이에요. 왕인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왕인데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왕이 될 수가 없어요. 기존의 나라에서는. 기존의 나라에서는 아무리 제사장이라도 뭐 밑에 있느냐 하면, 왕 밑에 있어요.

제사장은 왕이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희생 제사 왕이 잘되어야 나라가 잘되니까 우리 왕 영원하소서. 그렇게 해주는 게 제사장 할 역할이에요. 얼마 전에 영국의 여왕 죽었잖아요. 영국의 국가에 우리나라 같으면 애국가에 제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에요. 헨델이 작곡했는가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런데 그 가사가 바뀌었어요. 그냥 왕을 보소하소서. 여왕이 아니에요. 여왕이 죽었으니까. 그러니 종교라 하는 것은 왕 하나의 체제. 왕 하나의 체제에서 복속되고 하위계급이 제사장입니다. 왜냐하면 왕 자체가 이미 최고의 특수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오직 유일자에요. 하나밖에 없어요. 갑자기 유일자가 생각나네.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살렘왕이 제사장이 되어버려요. 멜기세덱의 뜻은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멜기세덱 때문에 그래요. 멜기세덱은 왕이면서도 제사장이잖아요. 이 중간에 뭐가 들어가야 되느냐, 왕과 제사장 또는 제사장과 왕을 통해서 왕이 되기 위해서 제사장, 제사장이 되는 것은 왕이 되기 위함이에요. 이 과정속에서 멜기세덱의 품고 있는 이 절차를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라 온 분이 이루어져야 돼요.

멜기세덱이 여기서 투입되어 나와야 된다 말이지요. 멜기세덱의 뜻이 의에 왕이에요. 의의 왕.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인간세계에서 선악체계에서는 의가 나오지 않고요, 의가 되기 위해서는 왕이고 제사장이신 분이 왕과 제사장에서 왕되기 위해서 들어가야 될 또는 왕이 제사장으로 가서 제사장이 왕되기 위해서 그 절차에 모든 임무가 완성이 될 때 의가 비로소 의가 발생이 되는 거예요. 이 의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럼 멜기세덱이 왜 등장하는가, 그러면 예수님만 오시면 되지, 왜 멜기세덱이 등장하는가, 예수님이 족보를 따라야 되거든요. 족보. 그럼 예수님의 합당한 족보는 이 땅에 없어요. 그럼 멜기세덱의 족보는 뭐냐, 그게 히브리서7장3절에 나옵니다. 크게 읽어볼까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없음이 몇 개 들어가요? 아버지 없고, 어머니 없고, 족보 없고, 시작한 날 없고, 생명의 끝 없고. 없음이 5개지요. 5개 없음이 들어갑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은 없음을 모르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거예요. 더 쉽게 이야기해서 여러분들이 성도입니까?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성도는 없다. 성도로서의 나는 없다를 인식해야 성도가 된다는 뜻이에요. 성도의 토대가 내가 되면 안된다 이 말입니다. 왜? 나는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잖아요. 족보도 있잖아요. 시작은 태어난 날이 있고, 죽는 날이 있잖아요. 그 있음이 성도되는 조건에 위배된다는 겁니다. 이게 어렵지 않아요. 믿는 자에게는.

문제는 이걸 남한테 설명할 길이 없다는 거예요. 5가지 없음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남들에게 예수님이 들었던 욕설을 듣게 되지요. “네가 미쳤구나!” 사도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요. “네가 미쳤구나!” 그 당시 왕한테. “네가 미쳤구나!”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미쳤어도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했거든요. 내게 미치게 한 건 주님의 사랑이 와서 미치게 했는데, 미쳐도 영광이다. 이 말이에요.

여기서 없음이 죽 있는데, 여기서 뭐도 포함되느냐 하면 신학도 없고, 교회도 없고, “느그 애비, 어미도 없나?” 그래, 말 잘했네. 우리 애비, 어미도 없어요. 다만 나 말고 성도로서의 나는 애비, 어미도 없어요. 이 땅에서. 자식도 물론 없고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이걸 설명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없는데 기능이 왔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없는데 역할만 주어진 거예요. 어제 수요설교에서 이야기했지만.

없는데, 역할만 주어진 거예요. 역할만. 이 역할은 있는 내가 붙잡을 수 없어요. 이 역할은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가운데서 없는데서 출현됐기 때문에 “아이구, 그 역할 너무 좋은 거 같아요. 내가 갖고 싶어요.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요? 십일조하면 되겠어요?” 이래가지고는 이걸 잡을 수가 없어요. 다시 한 번 말라기 십일조 생각합니다. 십일조에서 주께서 뭐를 없애려고 해요? 십일조 할 수 있는 인간이 이 땅에 없는데 그들은 지금 자기가 레위언약을 유지하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십일조를 지금 그들은 하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극단적인 표현을 하지요. 니그들이 도둑질했다. 도둑질. 내가 갑자기 말을 더듬네. 송강호가 “니 말이야.” 표현을 한 번 보세요. 표현이 어 다르고 아 다르거든요. “왜 십일조를 안내?” 이거하고 “너, 왜 십일조를 훔쳐가?” 지금 이거 하고 말이..., 여러분, 이게 같은 말입니까? 이게. 같은 말 될 수가 없지요.

어느 교회에서 십일조를 따로 딱 모아가지고 금고에 넣어놨는데 도둑놈이 와서 십일조를 가져갔을 때는 도둑놈을 잡았습니다. 잡고 난 뒤에 “너, 왜 십일조를 안 내?” 이렇게 합니까? “너, 왜 십일조 가져갔어.” 그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주께서 왜 십일조 안내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너는 왜 내 십일조를 가져갔느냐고 +가 아니고 –로 닦달내시는 거예요. “너, 내 거 왜 가져가?” “왜 안내?” 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니, 왜 맏물을 건드렸어?” “왜 맏물을 건드렸어?” “십일조 드리면 될 게 아니야.” “그건 맏물이 아니지. 맏물이 아니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 인간의 노동이 아니고, 인간의 애씀이 아니라 율법 자체에서 생성된 십일조를 니가 왜 훔쳐 가? 선악과 훔쳐가더니만 이것까지 훔쳐 가? 이런 뜻이겠지요. 신약적으로 이야기하면 “너, 왜 예수님을 모독해? 왜 십자가 피를 모독해? 십자가 피를 왜 가려버려?” 같은 취지에요.

그런데 우리가 말라기 보면서 십일조 대목에서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안낸다고 닦달내는 줄 알고 생각하는 거예요. 안 낸다고. 주님의 위치가요, 십일조 내라는 게 아니라, 이미 십일조가 완성돼있는데 그걸 훔쳐갔다고 보는 거예요. 도둑질 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말라기 십일조는 뭐냐, 십일조는 환경이에요. 왜 환경에 맞지 않는 도둑질을 하느냐, 하나님 건데 왜 너라는 것이 갑자기 생각나서 나한테 무슨 이익이 올까를 왜 생각하느냐, 이 말입니다.

십일조는 너무 과하고 형편에. 초등학교 애들이 용돈 만원할 때 천원 십일조해요. 초등학교 애들이. 그 애가 커서 나이 50이 넘었다 합시다. 20억 벌었는데 2억합니까? 안하지요. 천원은 얼마 안되니까요. 10억은 보통 아니지요. 말라기를 보면서 누구나 하나님 창고를 안찼다고 닦달낸다고 생각하는데,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 너가 아는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니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니는 십일조 낼 자격조차 박탈이야! 십일조 내는 순간 박탈되는 겁니다.

십일조는 응집입니다. 한 곳에 집중하는 곳이에요. 자, 십일조 모인 곳이 뭐냐 하면 백성들은 누구한테 낸다? 레위지파한테 십일조를 내고, 레위지파는 제사장한테 내고, 제사장은 십일조를 어디에 내느냐, 하나님의 제단에 있지요. 제단에. 제단이 운영되기 위해서 백성들은 십일조를 한 거예요. 그런데 백성들이 낸 돈이 아닙니다. 제단에서 이미 복을 줬어요. 무슨 땅이기 때문에? 그냥 땅이 아니에요. 그냥 땅 같으면 인간이 노동해서 십일조 십분의 일을 드리면 세금 내면 되는데, 이 땅은 약속의 땅이라고요.

이미 백을 준 거예요. 백을. 백을 줬기 때문에 이 백성이 지가 노동해서 백을 얻은 줄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되면 하나님의 십일조 사람이 안되기 때문에, 십일조의 혜택의 사람이 안되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림으로서 모든 혜택이 진짜 십일조의 혜택 속에 이런 환경 속에 하나의 우리가 보편자로서의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라고 한 거예요. 레위지파한테.

십일조에 대한 질문들이 오랫동안 십자가마을, 우리교회에 많이 있었어요. 그럴 때 내가 늘 개인적으로 그런 것을 질문하는 사람, 공식적으로 십일조를 이렇게 설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해요. “누구한테 냅니까? 도대체 십일조 받는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누가 십일조를 받아 챙깁니까?” “뭐, 제사장 레위지파가 받지요.” “제사장 레위지파가 누굽니까?” 묻거든요. “그건 목사님이지요.” “목사가 아니라 당신이 레위지파요, 당신이 바로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베드로전서에 나오잖아요. 본인이 본인한테 주면 되지요.” 본인이. 유명한 사람 있잖아요. 본인이. 본인이 본인한테 십일조 주면 되잖아요. “어떻게 냅니까?” “지금 본인이 까먹고 잡숩고 있으면서 왜 그래요.” 본인이 본인을 위해서 쓰고 있잖아요.

십일조는 주님이 십일조인데, 십일조의 혜택은 누가 받고 있다? 성도가 이미 받고 있는 거예요. 이미 십일조 구조 안에 교류되고 있는 겁니다. 주님한테. 주님은 맏물이고 우리는 뭐다? 우리는 맏물 아니에요. 아들 아니에요. 양자지 아들 아닙니다. 이게 아까 로마서8장28절, 29절, 우리는 아들 자격도 없고, 될 수도 없고, 맏아들은 따로 있어요. 우리는 그 동생들이에요.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같이 구원받는 겁니다.

맏이만이 상속할 수 있는 그 천국의 상속을 우리가 덤으로 맏이를 맞이했다는 그 인증으로 하늘나라를 그 영광된 천국을 우리가 상속받는 거예요. 우리가 잘나서 천국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 천국 갔으면 우리도 천국 가는 겁니다. 누구 따라가는 거예요. 그냥. 좀 염치없지만. 좀 개깁시다. 그냥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는 거예요. 개뿔도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자 한 분 믿고 가잖아요. 그러니까 한 분 믿음이 믿음이에요. 선물로 준 믿음이거든요. 절대로 나는 믿으면 안 되지요. 나는 믿을 자격도 안 되고.

그 분이 멜기세덱의 족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있어요. 부모님 살아계시고, 돌아가신 분도 있지만. 우리는 뭔가 있는 게 그리 많아요. 5개 6개 더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없는 게 5가지, 6가지나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믿어지느냐 말이지요.

이 세상의 땅은 개간하기 나름이에요. 인간이 개간할 수 없는 거부당한 땅은 인간이 용납 안 합니다. 모든 땅은 인간의 개발 대상이에요. 그런데 약속의 땅을 인간들이 더러운 노동으로 손댈때에 약속의 땅 자체가 사라져버렸어요. 공중으로. 어떻게 사라졌느냐, 성전이 사라졌으니까 사라진 거예요. 성전이 없는데 약속의 땅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성전을 침범하니까 하나님께서 성전을 알아서 자폭하듯이 불 질러 버린 거예요. 성전 없다! 이제부터 온리하스가문 마카비전쟁 BC174년 그 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만들었어요. 유사나라를 만들었어요. 왕을 마카비왕 왕을 만들었어요. 거기에 제사장으로서 바리새파들이 그 때 생기게 된 거예요. 바리새파, 사두개인들이 그 때 생기게 된 겁니다. 그 나라가 무슨 나라냐, 그게 유다나라에요. 가짜지요. 간음한 족속들이지요. 주님께서 그 나라에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십일조는 십일조 자체의 완성으로 인하여 맏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맏물을 맏물 되게 인정하는 동생들을 거기서 패밀리를 가족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 십일조 완성하면 거기서 같이 생기게 되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의입니다. 십일조에서 뭐가 생긴다고 했어요? 방금. 십일조에서 완성되면 의가 생기는 거예요. 의와 신과 인이 생기는 거예요. 마태복음23장에 나오지요. 니가 십일조를 하면서도 의와 신과 인을 놓치고 있다고. 이게 무슨 말이냐, 예수님 나를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왔잖아요. 그들이 십일조 할 때 누구한테 드립니까? 바리새인들이 십일조했다고 누가복음18장에 나오지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했다고. 십일조할 때 내가 묻고 싶은 거예요. “십일조 누구한테 했는데?” “여호와” “여호와가 어디 있는데?” “하늘에 계시겠지.” “아니, 여호와가 여기에 계셔.” 그렇게 묻는 분이 여호와잖아요. 시편110편 봅시다. 여러분이 어렵다고 하지 마시고 늘 정리하는 마음으로 들으시면 됩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내 옆에 붙어있으라는 거예요. 내 오른 편에. 내 옆에. 내가 능력을 행세하는 자리가 오른편이에요. 하나님은 왼편은 없고 오른편만 있어요.

심판할 때는 오른편이 등장하면 비로소 나타나는 게 그 때사 왼편이 등장하는 거예요. 왼쪽에 있는 염소, 오른편에는 양들. 이건 오른편이 능력을 발휘해서 오른편의 의인을 드러내야 왼편의 적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전에는 인간들이 선악체계로 지옥과 천국을 율법가지고 유포시켰지요. 나쁘게 살면 지옥 가고, 바르게 살면 천국 간다. 문제는 바르게 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본인이 지옥 가는 사람인 줄 모른다는 점에서 바르지 않아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본인도 그 주장이 바르지 못한 이유는 지옥 갈 인간이 그 논리를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예수님 빼놓고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 빼놓고는 다 지옥 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지옥의 맛을 봐야 지옥을 알겠습니다. 천국을 가봐야 천국을 알고, 지옥의 맛을 봐야 지옥을 내가 인정하겠습니다.” 이리 하는데. 본인이 본인한테 지옥이에요. 사는 꼬라지 보니까 지옥 아닙니까. 공포와 두려움에서 평생을 살아가는데요. 어제 수요일 예배에서 다크써클에 다 늘어져가지고 눈밑이 시커머가지고. 세상이 지옥 아닙니까. 사는 게 지옥 아닙니까. 사는 게.

십일조로 태어난 사람은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태어난 게 이 땅에 나타난 거죠. 이 세상없는 이쪽 세상에 없다고 여기는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없음이 되는 거예요.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하는 것은 예수님 아버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사는 이 범주 내에서 아예 없는 존재다 말이죠. 멜기세덱의 족보와 그 족보와 따른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예수님 멜기세덱에 해당 되는 말은 오늘날 성도한테도 해당되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성도 된 것은 누가 가르쳐줬어요? 누가 어디 능력을 줬습니까? 없어요. 성령의 능력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공부해서 공부는 지식이지요. 진리가 아니고, 지식은 진리를 가리기 위해서 얻는 거예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딱 그 딜레마에 빠져버리지요. 성경공부는? 성경공부하는 이유가 없음을 없음이 주는 그 은혜와 자비에 감격하라고 공부하는 거죠. 없음이 주는.

그럼 없음이 있는 건 뭐냐, 주께서 내 주만 있지요. 투톱.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영원한 창세 전에 만들기 전에 먼저 있었던 2항 구조. 아버지와 아들. 그 두 분 사이에 언약이에요. 언약에는 성령이 안 들어가요. 계약 상대자는 아버지와 아들뿐이에요. 성령은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삼위일체에서 그런 것은 빠트리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엘리야 선지자가 있는데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지요. 열왕기상17장6절에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엘리야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6절에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말랐다.

자, 물이 있어야 될 강이 강물이 없지요. 그러면 거기에 있는 약속의 땅은 백성들은 지금 죽을 판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도 너도 예외가 되느냐 선지자도 예외가 아니지요. 선지자는 왜 비가 오지 않고 사람들이 죽을 이유가 되느냐, 이유는 알고 있어야 되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선지자에게 까마귀들이 아침에 떡과 고기,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없음에서 엘리야를 도와주고 있는 거예요. 까마귀가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없음의 세계에요.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의 입장을 뭐로 보느냐 엘리야와 같은 입장으로 보는 거예요. 아침에 팔보채, 저녁에는 한우갈비, 까마귀가 물고 오기는 과한 느낌이고, 다음날에는 아주 고급 벤츠 자동차까지 제공하고, 그래도 뭐 없음이지요. “이 차 내 차다.” 그거 하면 안되지요. 그거 탈락!

모든 있는 것이 없음에서 제공된 거예요. 없음에서. 왜? 우리는 없음의 나라를 대변자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임해서 구원받았다는 말은 우리의 육의 의도와 내 희망으로 구원된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일조의 재현이지요. 십일조의 재현이에요.

자, 첫째시간, 둘째시간 종합해보겠습니다. 첫째시간에 죄를 언급한다는 것은 의를 내다보는 거죠. 의를. 의가 뭐냐, 그냥 바치는 거예요. 바치는 것, 드리는 것, 희생하는 것. 죄를 안 짓는 게 아니고 그냥 바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사랑에 바치기. 사랑에 바치는 거예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 안에 내가 다, 사랑이 있으면 그 사례가 내가 바친 자리가 나의 자리가 함몰해가도록 사랑이 오는 거예요. 사랑이 나의 모든 것을 함몰해버리고 다 거두어가지요. 사랑에 다 빼앗기는 거죠.

주께서 주신 그 성령의 은사를 에베소서4장8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뭐를 줬다? 선물을 주었다. 사로잡힌 것이 없으면 우리에게 올 선물도 없었잖아요. 우리를 사로잡고 주님의 백성으로서 예수님의 신부로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은사로. 그러니 항상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우리를 구원했다는 거예요. 없는 것이 우리를 구원했어요.

반대로 시편110편 반대에요. 원수들이 내 발판에 했는데, 그 원수들이 뭐냐, 이제 이야기했으니까 알겠지요. 자, 성도는 기반이 뭐다? 하늘에 있지만, 이 땅에 없는 거죠. 성령 자체가 오순절날 오셔야 돼요. 성령 자체가 계신 게 아니에요. 예수님도 계신 게 아니고 예수님도 오셨다가 가셨잖아요. 성도는 없음이지요.

그러면 원수는 뭡니까? 하나님의 원수는 반대는 뭐예요? 죽자고 필사적으로 있음을 붙드는 거예요. 있음을 그냥 붙드는 거예요. 내 새끼 왜 죽이느냐? 붙드는 거예요. 내 강아지 왜 죽이느냐? 내 고양이 왜 죽이느냐? 그건 약속의 땅의 자격이 안 돼요. 약속의 땅 자체가 없는 거예요. 약속의 땅 자체가 없는 거예요. 약속의 땅 자체가. 약속 때문에 온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니가 진짜 어느 편인지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없는 자식을 죽이라 하지요. 없는 자식이 누구였지요? 이삭을 도로 없애버려라, 라고 이야기하지요. 없으니까. 처음부터 없다가 있으니까. 없음으로 돌려보내라. 고향이니까.

잡습니다. 그런데 그 이삭 자리에 어린양이 대체하지요. 그 다음부터는 자식을 잡는 일은 없어요. 뭘 잡아야 되는가, 어린양만 반복해서 잡지요. 그것은 내가 나를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잡는다는 겁니다. 나에게서 빼앗아 가시는 이유가 이제는 내가 나한테 짐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일조를 통해서 어떻게 주님이 완성했는가를 보았습니다. 없는 분의 동생이 되고, 없는 분의 신부가 되고, 없는 분의 자녀가 되는 것,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은혜 이 사랑에 우리 전부를 다 톡 털어 넣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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