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타는 냄새

아빠와 함께 2023. 9. 28. 10:12

안양20230914a말3장17절(타는 냄새)-이 근호 목사

말라기3장13절부터 보겠습니다. 말라기3장13~15절, “13절,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절,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절,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그 대목을 봅시다. 인간들이 이런 말을 하는데, 우리는 자꾸 하나님 편에 서서 우리 자신을 보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내 입장, 내 생각 말고 너 입장을 솔직하게 내 앞에 털어놓으면 그 다음에 나머지 모든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속생각을 몰래 감추고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쪽에 서려는 무리수를 쓰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제 설교에도 그게 나왔습니다만, 항상 시작을 뭐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이거부터 시작해야 돼요. 미움.

미움은 어디서 오는가, 상실에서 미움이 되는 거예요. 나한테 빠져있는 거, 모자라는 거, 허겁지겁 아무리 메워도 메울 수 없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신혼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장담하기를 “내가 돈은 벌테니 니는 집에서 살림만 해라.” 라고 신혼을 시작을 했는데 남편이 직장에서 일이 너무 힘들고 고객 상대하기 힘들어서 우울증 걸렸어요. 그래서 사표를 낼 처지에 있을 때에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는 아내는 없어요.

무엇에 나서는가 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생계를 위하여 일자리 찾아 나선다. 일하는 이유가 생계. 생계가 안 되니까. 남편이 우울증 걸려 아프니까 사표를 낼 지경에 있으니까 살기위해서 생계를 위해서 일자리 나선다. 굉장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요.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그 미움이 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돼요. 미움이.

미움의 대상은 누군지를 모르겠는데. 어쨌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어쨌든 간에. 너 때문에 밉다는 규정할 수 없는데. 어쨌든 이 세상이 내 맘에 들지를 않아요. 그러면 어떤 특정 대상에게 미운 것도 없는데, 왜 나로 하여금 생계 걱정을 해야 되고, 나로 하여금 일자리 찾아 나서도록 왜 나를 이렇게 일한다는 것은. 여러분, 일한다는 것은 이거에요. 일한다는 것은 내가 기계가 되는 거고, 기계가 되려면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나의 자아성은 압류되어야 돼요.

직장 내에서는 내 자아성이 압류가 되어야 돼요. 직장에서는 나라는 걸 언급하면 안돼요. 그럼 직장생활 못해요.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돈을 얻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 하면 나의 나다움인데. 그걸 상대에게 넘겨주고 나는 돈을 얻는 거예요.

지금 시작을 미움부터 시작을 했거든요. 미움부터 시작할 때, “아, 목사님. 저는 뭐 누구 특정한 미운 사람 없습니다.” 이리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런데 생계를 위해서 일자리를 찾아 나설 때 이게 미움을 바탕으로 벌어진 일이에요. 이게 미움을 바탕으로.

일을 하면서 틱틱 거리는 거예요. 왜 갑자기 내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는 겁니다. 내 팔자가. 그러면 우리가 미울 때는 미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누구를 공격해야 되는데 뚜렷한 대상도 없어요. 미운 대상도 없어요. 그냥 사는 게 미워. 내가 그냥 이 땅에 사는 자체가 미워. 밉다고요.

여기서 여러분 중요한 것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뭐냐 하면 내가 밉고, 내가 이 세상을 힘들 게 살아갈 때에, 내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확인해 줄, 이것을 증명해 줄, 그 누구를 인간은 찾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힘들게 인생을 꾸역꾸역 힘들게 살아간다는 이 대단한 일을 그걸 누가 인정해주고 호응해줄 어떤 분을 찾아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 뭐든지 해주면 안돼요. 하나님은 어느 선에서 머물러야 되느냐 하면, 내가 화를 낼 때, 화 낼만해서 화를 낸다. 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 선까지만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어야 돼요. 내가 누굴 미워할 때 또는 세상을 미워할 때, “그래 미워할만해서 미워했다. 잘했다. 잘 미워했어.” 라고 그것을 보증해 줄 수 있는 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 미움을 모독하면 안돼요. 아이 중요하니까 써야겠다. ‘하나님은 나에게서 나오는 미움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드라마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시어머니가 재벌이에요. 재벌이고 그 앞에 가련한 며느리. 그 며느리는 그 시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행동 조심해합니다. 드라마 보면 그런 게 가끔 나와요. 시어머니가 이가 좀 아프다. 라고 재벌집 모인데서 식사시간에 하니까. 보통 재벌집은 어떻게 식사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식사하는데 메이드가 서있고 밥 들어가겠는가 몰라. 옆에 보는 사람 시중드는 사람 있고 하잖아요. 여자집사도 있고요.

“이상하게 나이가 많은지 이가 아프다.” 그럴 때 며느리가 아부를 떨지요. 잘 보여야 되니까. “제가 잘 아는 치과가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시어머니가 “그 소리 하지 마! 응 이 나이가 치과도 분간 못하는 그런 나이 치매 걸린 나이인 줄 알아?” 하고 티박을 줘버려요. 다 있는데 티박을 준다고요.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이가 아프고 이가 아픔으로 말미암아 내가 곳곳에 미운 사람에게 내가 내 미움을 공격하고, 화살을 보내고, 공격하는 이 미움은 내가 이가 아프기 때문에 미워할만해서 미워한다는 정당성이 살아있기 위한 그게 나의 세계인데, 거기에 며느리가 만약에 치과 소개해가지고 이가 안 아프면 내 미워하는 것이 이것은 나쁜 짓이 되잖아요. 지금 머리 나쁜 사람은 이 말 이해 못한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모든 걸 가지고 그 집안의 권력자인 내가, 내가 미우면 그걸 찬양을 해야 되지. “아이구, 어머님, 그러면 미워요. 안 밉게...” 내가 미우면 미워야 돼요. 그게 안 미우면 안돼요. 그러면 시어머니가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어이, 며느리! 내가 누구 미워하니까 세상 누구 이빨 아프고 하니까 니가 왜 잘됐다 이거야? 그런 마음이야? 응? 내가 미우면 예, 잘 미워했습니다. 이리 나와야 될 거 아니냐” 이 말이에요. 이게 재벌집 시어머니만 그럴까요? 못사는 모든 일반인들이 다 그럴까요? 어떻습니까? 모든 인간이 다 똑같아요.

내 성질날 때, “역시 성질 내!” 라고 성질내는 것조차 나한테 찬종할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해서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제넘게 너무 관여하면 안돼요. 내가 세상을 미워할 때 그 미움은 나의 고유한 나의 미움이에요. 그 미움이 있음으로서 참으로 나는 나다워요. 그런데 미움이 없어져버리면 나는 바보 등신이 되어버려요.

이제 말라기 3장 13절, 14절, 15절,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소리 하는지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니가 뭐든지 하나님 섬기는 것이 헛되다.” 라고 하나님이 지금 이 3장14절에서 지적하시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그래 잘못됐습니다. 회개합니다. 하나님, 다시 이러지 않겠습니다.” 이리 나올 게 아니고 인간은. “내가 하나님 보고 헛되면 헛된 거지 하나님 쪽에서 거기에 대해서 왜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까?” 라는 것이 인간이 자기가 어떻게 자기가 걷잡을 수 없는, 자기가 손댈 수 없는, 자기가 그걸 변경할 수 없는, 진짜 덩어리 나. 진짜 나가 하나님 앞에 들통 난 거예요. 발각된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같은 인간들하고 상대해요. 같은 인간들. 왜? 만만하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이 끼어들었다. A라는 인간은 뭘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끼어들면 생각해요. 뭘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완전한 분. 하나님은 어떤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그 지시와 명령에 따르기를 요구하는 분. 이렇게 하지요.

그러면 일단 자기보다 하나님이 세니까 하나님을 믿기는 믿습니다. 믿기는 믿지만 나의 나다움을 그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파괴되는 것을 누가 싫어요? 내가 싫어요. 내가 싫어해요. 나는 나의 개성이 있으면서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을 해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밀당 해온 관계로서 유지해왔었는데 하나님 쪽에서 어떻게 일하느냐,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뻔히 아시잖아요. 아시니까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화를 더 돋아버려요. 화를. 적당한 선에서 하나님께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고, 지킬 건 지키고, 적당한 선에서 이렇게 좋은 관계 유지하고자 하는 내 이 성질 더러운 것을 안 들키려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아양을 하는 식으로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 쪽에서 가만히 두지를 않고 성질을 더 건드려버려요.

성질을 건드리니까 인간들이 참다 참다 인간들이 뭐라고 해요? 13절, 14절, 15절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내가 남 미워하고 하나님 좀 미워하면 안 됩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등장함으로서 우리가 감출 수 없는 우리의 본색이 그대로 노출되는 거예요. 그대로. 하나님이 끝까지 시비걸어요. 끝까지.

인간은 남을 미워하는 게 나쁘다는 것을 인간이 알아요? 몰라요? 알지요. 그 나쁜 것을 인간은 빼기가 싫어요. 왜? 나쁜 거, 남을 미워하는 것을 빼버리면 진정 나다움이 없어요. 나다움이 없어져 버려요. 뻥뚫려가지고 이건 뭐 등신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살 재미도 없고 일상을 보낼 이유도 없고요. 미운 사람 밉다고 이야기하고. 이쁜 것은 이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러한 권한조차 이게 박탈당했을 때, 우리는 무슨 재미로 삽니까. 우리는 무슨 재미로 살아요? 아무 사는 재미가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모자라는 것을 하나님이 채우지 마소서.” 이거에요. 내가 모자라는 것을. 내가 모자라는 것을 채워버리면 졸지에 나는 나다움이 날아가버리고 나는 철저하게 누구의 종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잖아요. 그럼 내가 주인이 아니잖아요. 내가. 내가 나한테 주인이 안된다고요. 하나의 기계가 되지요. 기계가 되면 개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지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 하나가 우리를 상대로 심판하려고 주신 말씀이에요. 우리를 심판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심판하는 말씀을 가지고 적당하게 좋은 관계 유지하는 하나의 매개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거 한 번 적어볼게요. 미움을 통하여 하나님을 끌어당기고, 그 미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한다. 어떻게? 내가 나의 미움에는 나의 이유가 다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정당성을 확립하는, 확실히 확립하고자 하나님을 참관인으로 내 인생의 끝까지 가는 거예요. “평소에 내가 화를 내고 평소에 성질내더라도 우리 하나님만큼은 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화낼 만했다. 성질낼 만했다. 그러니까 나는 너에게 그렇게 우호적이다. 니 무슨 죄 있나? 내가 다 용서해줄게.” 바로 인간은 은근히 그런 하나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 성질을 성질대로 다 유지하고 있고, 죄는 죄 용서대로 받는, 이렇게 되어버리면 나는 움직이는 자고, 주님은 그냥 관찰자가 되어버리지요. 뭘 도와드리겠습니다. 까페에서 그것도 고급까페지요. 진짜 커피 한 잔에 삼만원씩 오만원씩 하는 거기는 서빙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서빙하는 사람의 자세를 한 번 카메라 있으니까 한 번 보여드릴게요. 동네 식당에서의 서빙은 이리합니다. 뭐 더 드시고 싶은 거 있습니까? 반찬 더 드릴까요? 식탁 위에 양손을 얹고. 그런데 돈 많이 내는 고급까페에서는 손 한 쪽을 등 뒤로 돌려요. 공손히 손을 돌리고 뭐를 더 드릴까요? 리필해 드릴까요? 이리 돼요. 손을 돌리는 거예요. 호텔에서는 손을 뒤로 돌린다니까요. 나는 당신 일에 함부로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돈 준 값이에요. 돈을 오만원 준 값이에요. 그게 많은 돈을 준 값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하고 하나님께 충성할 때, 그 값을 우리는 돌려받기를 원해요. 내 쪽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했으니까 “하나님! 내가 성질부리고 이렇게 하더라도..,” “그래, 뭐 성질부렸어? 그럼 성질 안 나게 내가 좀 도와줄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내 일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관여하기를 우리가 원하는 거예요.

부를 때 오라는 거예요. 부를 때. 함부로 들락날락하지 말고. 부를 때 오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부를 때 오라는 말이지요. 들쑥 들어오지 말고. 내 인생에. 내 귀한 내 세계에 침투하지 말고.

자, 여기서 우리가 이 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질문을 하나 할게요.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심판하려 하시는가, 무엇을 심판하려 하시는가, 지금 우리가 말라기3장 끝을 보면서 굳이 하나님께서 3장 13절, 14절, 15절, 너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나님 말씀대로 나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되더라.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성경에 담아서 우리에게 제시할 때 그 무엇을 도대체 심판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느냐 말이에요. 도대체 우리한테 무슨 억하심정있어가지고. 뭐가 기분 나빠서 우리를 심판하려고 하느냐 말이죠.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모자라냐, 무엇이 빠져있느냐 하면, 붉은 것으로 써야 돼요. 이게 너무 충격적이라서. 우리에게 심판이 모자라는 거예요. 심판의 심판이 충분치 않아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준 심판이 있잖아요. 저주 있지요.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받은 저주 심판이 아직 우리한테는 충분치 않아요. 우리는 뺀질이 같아. 우리는 살 궁리만 하고 있고. 내빼기만 바빠요. 전기차가 좋다고 해서 샀는데 전기차가 갑자기 급발진해서 본의 아니게 가로수를 들이박아가지고 차가 박살났다. 그러면 전기차 운전자가 “오, 신이시여.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데 이렇게 돈 날리고 급발진해가지고 사고 나게 합니까?”

거기에 대한 준비된 답변은 뭡니까? 이거에요. “니가 급발진해서 사고나서 니도 죽을 뻔 했어? 그것으로서 나의 심판이 충분히 담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그 죄. 심판이 무서워서. 그래 죄 지으면 안돼. 주여, 죄 지은 게 있거든 용서해 달라. 할 때, 그 죄. 그 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얄팍한 죄라는 것은 뭐냐, 우리는 죄를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나의 실수로 이해해요. 나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 실수해서 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실수했다는 거예요.

자, 주님이 아까 심판하는 그 심판의 목표와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방어하면서 주님 앞에 다가서면서 우리는 무슨 소리합니까. 주여, 죄인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바꾸면, “저, 실수 많지요? 그치요.” 실수가 많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말하는 실수란, ‘타인의 환상을 내가 이용하는 것.’ 그저 이용한 거예요.

자, 강의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미움이 있어요. 그리고 그 미움이 지워지는 것을 원치 않아요. 성질 날 때 성질 부리고 싶어요. 그런 만만한 사람이 내 주위에 있으면 좋겠어요. 이것도 저것도 없으면 강아지라도 키워가지고 발로 차고 싶어요. 하여튼간에 내 속에서 미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내 미움에 의해서 화풀이가 충분하게 되는 그런 대상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심판하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성질나는 내 성질을 풀 수 있는 내 심판의 대상이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 있기를 우리가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뭐라고 욕해도 괜찮고 내가 누구라도 패도 괜찮고, 뭐라도 돈이라도 뺏어도 아무소리 안하는 그러한 등신같은 인간들이 내 곁에 있어가지고 내 성질 다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옛날 우리나라에 옛날 농사짓는 시대 때에 손이 많잖아요. 그러면 여자가 시집간다는 것은 농사집에 시집가는 거예요. 그 농사꾼은 여자가 온다는 것은 바로 농사꾼 하나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그 농사꾼의 두목이 누구냐, 시어머니죠. 시어머니가 농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 며느리를 구박하고 타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을 합해야 밥 풀칠할 수 있잖아요. 농사라는 기술을 빨리 습득해가지고 이제 시어머니는 나이 많아서 생산량이 적고, 젊은 며느리가 와야 내가 했던 일을 떠맡길 수가 있어요. 밥 먹여주는 게 공짜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며느리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아들을 낳아가지고 제사지내고 대를 이어야 될 그 책임도 짊어지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젊은 사람들은 이걸 모르지요. 젊은 사람 입장에서는 시어머니 시키는 대로 해야 내가 사랑 받는다는 그런 생각이지만, 시어머니한테는 이미 자기 세계가 구축되어있어요. 농사 지어야 된다는 자기 세계. 자기 세계에 새로운 며느리가 얼마나 쓸모짝이 있는가만 계산하는 거예요. 얼마나 쓸모짝이 있는가. 군기 잡아야 되지요. 군기 잡아야 돼요. 혹독하게 잡아야 돼요. 마치 자기의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훈련시켰듯이. 이왕 어려운 거 계속 할 수밖에 없어요.

양육과 훈육과 교육이라는 것은 인간이 터잡고 있는 기반.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에요. 터(기반)을 확고히 하는 거예요. 기반이 뭐냐 하면 가족이에요. 국가입니다. 그리고 사회에요. 심지어 교회까지. 인간은 뿌리를 박아야 살 수 있어요. 뿌리를 박아야. 붕뜨는 것은 인간에게는. 아까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일자리에 나가야 되지요. 그 기반. 내가 살 수 있는 가족, 나. 그리고 국가. 이 모든 곳에 철근을 넣어야 돼요. 철근이 없으면 안돼요. 뿌리 깊게 철근을 넣어야 돼요. 이것에 대해서는 양보없습니다. 봐주는 거 없어요. 그럼 이걸 뿌리 박으면서 타인들에게 뭐한다? 지시와 명령을 하지요. 지시와 명령을 할 때 곱게 하겠습니까? 미운 마음으로 하겠습니까? 어떤 마음이에요? 미움이지요. 왜냐하면 본인이 그 선배한테 당한 게 있기 때문에.

사람은 공짜 없습니다. 당하면 그 당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해야 약간 속이 풀려요. 내가 시어머니한테 당했으면 나중에 내 아들 장가갈 때 보자. 이게 응어리 뭉쳐있어요. 인간의 내부에. 인간의 기억속에. 미움이 대물림한다니까요. 미움이. 그래서 행동을 말을 좋게하든, 웃으면서 미소를 띠어도, 그 미소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상처가 들어있고, 상처는 미움에 담겨서 나오게 되어있어요. 곱게 이야기하고, 어설프도 또 곱게. 한 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 참고, 네 번째 확 폭팔하고. 내가 니한테 준 거 다 내놔라. 잊어버리지 않았던 거예요.

내 미움의 화풀이에 상대가 그걸 차단하게 되면, 한 번 참고, 두 번 참지만, 내 미움은 제거될 수 없고 상대는 막혀있으니까 나중에 그 네 배의 에너지를 가지고 폭발해버립니다. 네 배의 에너지. 전에 했잖아요. 직업이 교사인 사람. 하루 일과에서 학생 만날 때. 그 전날에 부부싸움 했는지 안했는지 차이가 나요. 만약에 부부싸움하고 그 다음날 학교에서 교사일을 한다. 그 반애들 다 죽었어. 다 죽었어.

그러니까 인간 대 인간도 화풀이가 되는데 인간이 거기다가 하나님 앞에 나섰다. 하나님도 뭐의 대상입니까? 화풀이 대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유도했지요. 여기 말라기3장 13절, 14절, 15절, 요거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 이야기입니다. 딱 걸렸어! 너희들! 딱 걸렸어.

우리는 13, 14, 15절 이 말씀, 이 말씀을 안들키기 위해서 꼬깃 꼬깃 안들키기 위해서 얼마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에 위장과 모든 변신과 변신을 다 동원해가지고 안들키려고 애를 쓰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다 들추어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을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심판합니까? 우리의 삶의 터전을 공격합니다. 이 말은 우리보고 제발 꺼져줄래. 좀 없어줄래. 그 없어진다는 말이 어디 있느냐 하면, 16절 나옵니다. 16절 이야기하기 위해서 13, 14, 15를 필히 알아야 돼요. 하고 16절,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여호와 앞에 무슨 책을 기념한다? 기념책에 기록했지요.

17절은 조금 있다가 하고, 18절 봅시다. 18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자, 분별하는 이 소관 누구한테 달렸습니까? 우리가 여기에 끼어들 수 있습니까? 이 분류작업에 우리가 끼어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왜? 우리는 죽어마땅하기 때문에.

여호와 이름을 기념하는 기념책에 우리가 관여 못합니다. 욕심내면 안돼요. 우리는 어디까지냐 하면, 13, 14, 15절까지가 우리에요. 우리는 우리의 미움을 내 손으로 내 미움을 낙지 끄집어내듯이 손가락 넣어서 못 끄냅니다. 멍게 끄내듯이 못 끄냅니다. 끄낼 수가 없어요. 우리는 상실한 존재구요. 상실에 합당한 결과는 뭐냐, 타인에 대한 미움이에요. 그 미움이 없으면 나가 없는 거예요.

진짜 나다운 것은 누구 걸리기만 해봐라. 이것만큼 나다운 모습이 없어요. 이게 최고입니다. 이게. 최고에요!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전부 다 내 미움이 원천이 되어서 거기다가 하나님, 예수님까지 끌어당기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잠깐 하나님 뵙고, 돌아서서 사람하고 상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제가 성질나는 것은 나쁘다는 것은 너무 잘 압니다. 하지만 성질 나는 걸 어떻겠습니까. 미안합니다. 다시 내가 세상과 상대해야 됩니다.” 그리고 방향을 돌리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면상이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여기까지 찾아와요. “뭐 우쨌다고? 뭐 어떻게 했다고? 어이! 니 나만 상대해. 사람상대하지 말고 나만 상대해.” 니가 자꾸 사람상대하니까 저 사람이 나한테 힘들게 하고, 저 사람이 나한테 똥묻은 기저귀로 쳤고, 저 사람이 연필 어떻고 저떻고. 나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고. 자꾸 세상 전체에 대해서 미움을 핑계거리를 찾으면서 평생 살아가거든요. 인간은.

다 남은 잘못됐고, 지는 조금 잘못되었고.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성질내도 할 말있고, 니는 나한테 성질 내면 안되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그거. 그 만만한 게 세상이고 인간이거든요. 타인이 좀 쉽게 나오면 이용하려고 달려들고.

2층에서 무심코 샤워하면 아래층에 노후된 빌라입니다. 뭐 우리집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위층에서 샤워를 하게 되면 아래층에 물새요. 그런데 샤워하는 사람이 그걸 알까요? 모를까요? 전혀 모릅니다. 내가 우리 집에서 샤워하는데 니가 왜?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남들을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니고 안할려고 해요. 왜냐하면 나 신경쓰기도 바쁜데 남까지 이해못합니다. 그러니까 남까지 이해하면 숨막혀서 못 살아요. 정신병 걸려요. 문제 있으면 물어줄게요.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아래층에 있는 사람이 공사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어요. 요청하니까 공사하는 사람이 와가지고 뭘 뜯어내느냐 하면 자기의 시선의 그 한계, 자기 샤워실 바닥까지만 보던 걸 바닥을 오함마로 긁어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보이겠습니까. 아래층이 보이겠지요. 주님의 심판은 바로 그렇게 진행되는 거예요. 그게 주의 일이에요. 우리는 나는 요것밖에 모르고 싶어요. 라는 그걸 바닥을 털어내게 되면 아래쪽의 우리의 모든 분노와 우리의 미움을 다 받아낸 십자가가 보이는 그 바닥이 보인다면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던 그게 진짜 어쩔 수 없어요. 우리는. 내가 누구를 하나님 밉고 사람 미운 걸 바꿀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데.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게 진리가 아니거든요. 어쩔 수 없는 그 피해 당사자가 정작 그 피해 당사자를 온몸으로 받아내신 분이 있다는 것과 만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내가 상상한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환상 중에 만난 하나님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하나님이 그게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뭐 다 아시는 이야기지요. 그 정도는 다 아시는 이야기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하나님의 이름이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상처지요. 상처.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사람은 왜 남을 미워하지요? 뭐가 있기 때문에? 상처 또는 결함, 상실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상처가 있다면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성질내겠지요. 그 성질 대상이 누구라고요? 바로 그 성질 대상이 우리 자신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발견한 사람이 착하다는 말이 아니고, 그 발견하는 사람 속에 말라기가 도착된 사람이에요. 말라기로 하나님과 말라기로 말씀을 매개로 해서 나와 말라기가 서로 연결이 성사된 사람이에요. 말씀의 사람. 그게 바로 성도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성 좋아진 사람이 성도가 아니에요. 이 말씀이 바로 나와 주님을 엮이게 만드는 그 말씀인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첫째시간 끝나기 전에 5분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숙제를 줄려고 가져왔어요. 그 하나님의 상처. 십자가 상처를 통해서 볼 때에 우리는 뭐였느냐 하면 그동안 마귀와 더불어서 야밤도주를 했다고 보시면 돼요. 혼자 도주한 게 아니라 악마의 성질, 악마와 더불어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 도망치면서 좀 미워하면 어떤데? 살다 보면 미워할 수도 있지. 라고 말을 뒤에서 막 내뱉으면서 혼자 도주하는 게 아니라, 마귀와 함께 하나님 계신 곳과 멀어졌다고 보시면 돼요. 우리가 지금 그런 형편이에요.

멀어졌는데 그걸 누가 따라갑니까? 말라기3장이 계 섰거라! 따라가가지고 테이져건으로 쏴버리는 거예요. 경찰이 범인을. 테이져건은 연결되어있어요. 총알이 아니고 꽂히게 되어있다고요. 말라기3장이 테이져건으로 꽂혀 버리면 우리는 주님 앞에 완전히 생포된 거죠.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아시겠지요.

그럼 이제 숙제 나갑니다. 강남강의 때 재미를 봤더니만 또. 강남강의는 제가 그냥 음악을 틀었지만, 여러분한테는 숙제로 프린트를 드리겠습니다. 숙제가 아니고 질문을 한 번 던져보겠습니다. 다 보셨지요. 보셨으면 가사를 생각해놓고 음악을 틀을 테니까 답변을 해보세요.

첫 번째 <위대한 약속> 김종환 작사입니다. 리아킴 노래.
1절,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 집에 행복 느끼며
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때론 그대가 아플때도
약속한데로 그대곁에 남아서
끝까지 같이 살고 싶습니다

위급한 순간에 내편이 있다는 건
내겐 마음의 위안이고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끝에서 보면 알아요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세상살면서 힘이야 들겠지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자, 됐어요. 질문. 이 가사의 사상, 정신, 뭐가 문제입니까? 이게 지금 뭐가 문제입니까? 아, 복음을 그만큼 듣고 해도 막상 이런 가사 딱 들어보면 눈물이 팍 쏟아지면서 아, 그래 이렇게 살아야 돼! 라고 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은 그동안 도대체 그 사람 속에 복음이 있는지, 말씀이 있는지, 의심될 수밖에 없어요. 의심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답변하는 거 10분 쉴 동안에 숙제로 하겠습니다.

그 다음 노래. 하나 더. 여러분 쉬는 시간에 보면서. 뭐가 문제입니까? 그거 했지요. 가사를 생각하세요. 전주 말고.

두 번째, <혼자가 아닌 나> 서영은 노래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더는 슬퍼하지 않아
다신 외로움에 슬픔에 난 흔들리지 않겠어
더는 약해지지 않을게 많이 아파도 웃을거야
그런 내가 더 슬퍼보여도 날 위로하지마
가끔 나 욕심이 많아서 울어야 했는지 몰라
행복은 늘 멀리 있을 때 커 보이는 걸
힘이 들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와도 모진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나게 아픈날엔 크게 한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어떻습니까? 이 사상의 문제점은? 이게 여러분들이 지금 제가 압축해서 이렇게 했지만, 매 일상속에서 매 마주치는 것이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 김종환의 사상<위대한 약속>과 그리고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 이 사상을 끌어당기지 않았는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괴롭고, 아프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바로 이런 가사에 나오는 이런 생각으로 땜질하지는 않았는지 한 번 돌아보세요. 뭐가 문제인지 하는 것은 10분 쉬는 동안에 다음에 두 번째 할 때에 제가 나름대로의 생각한 그 해답을 제시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여러분들이 이런 노래를 듣고 이런 가사를 봤을 때, ‘뭐 이게 문제 있어?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과 더불어서, 그게 아니라면 그럼 여러분의 대안은 뭐냐 이 말이지요.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식으로는 안 살았다. 그럼 어떤 식으로 살았는데요? 그럼 이 사상, 이 생각이 세상적인 생각이 뭐가 문제인지를 파악하지 않고서 나, 복음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다 그거 헛소리 아니냐 이 말이지요.

실제 일상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너무 주께서 십자가 중심으로 만든 세상을 우리가 너무 우리가 편하게, 안일하게, 대충, 그냥 건성으로 넘기지 맙시다. 10분 쉽시다.

 

 

안양20230914b말3장17절(타는 냄새)-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던 그 모든 십자가 이야기, 복음이야기, 우리 실생활에 호환이 안 될 때, 호환이 안 된다면, 서로 소통이 안 된다면, 결국은 제가 첫째시간 끝에 노래 두 개를 왜 틀어줬는가, 결국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복음은 사실은 머리로만 멈춰있고, 실상에 우리 중심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김종환의 <위대한 약속>의 내용, <혼자가 아닌 나> 이것 들어있는 게 아닌가, 이 말입니다. 그것이 의심되어서 이 두 노래를 틀어준 거예요.

자, 그럼 제가 말 할 게 아니고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다른 분 의견 이야기해주세요. 두 노래 가운데서 뭐가 문제냐, 우리 연세 많으신 분. 인생을 많이 살았으니까. 뭐가 문제지요?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 집에서의 행복. 이게 뭐가 문제지요.

지옥은 지옥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뭐로 나타나는가, 환상으로 나타나요. 환상으로. 환상으로 나타납니다. 지옥이. 환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이게 환상의 모습과 우리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지옥의 모습과 완전히 반대가 돼요. 그저 아름다워요. 환상은. 아름답고 곱고, 진. 선. 미. 진선미가 뭐죠. 진리고,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고, 그게 어디서 뿜어져 나온 것이다? 이 바닥의 지옥에서 올라온 것이에요. 지옥에서. 그럼 인간은 요 환상을 생각하는 이유가 인간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고롭고, 괴롭고, 힘들겠습니까. 어렵겠습니까.

그럴 때,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치료하는 방법은 뭡니까. 무엇이 있어야 치료가 된다? 환상이 있어야 되겠지요. 환상. 지옥에서 올라온 환상 부분을 내가 두 개의 음악을 가지고 제가 설명을 하고자 하는 거예요. 첫 번째는 <위대한 약속>, 그 위대한 약속 내용이 뭐였지요?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 집에 행복 느끼며 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 이거 지금 뭐에요? 이게 환상이에요. 환상. 첫째 노래하고, 둘째 <혼자가 아닌 나> 노래하고 둘을 합쳐서 공통점을 대라면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위로’지요.

자기 연민, 자기를 스스로 위로하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은 지옥에 던져진 존재이면서, 자기 위로하면서 꾸역 꾸역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 위로니까 이게 이미 뭐로 고정되어있는가 하면, 삶의 이유, 삶의 의미, 삶의 목표로 이미 확정된 거예요.

내 안에 나가 들었고, 그 들어있는 나를 이 인생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내가 나를 위로하는 그걸로 모든 것이 마감되는 거예요. 마감. 자, 그럼 이 정도까지 힌트를 줬잖아요. 그럼 이 노래 문제점이 뭐냐, 아까 복음과 관련해서 문제점이 뭐냐, 첫째시간에 했던 주된 내용은 뭐였습니까? 주된 핵심은 뭐였습니까? 인간이 미움이 있다 했잖아요. 그럼 인간은 왜 남을 미워하는가, 내 위로에 방해될까봐 사전에 먼저 선방 날리는 거예요. 내가 나 위로하는데 바쁜데 훼방 놓지 말라는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마저.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너 죄 지었으니까, 너 잘못했으니까, 내가 주는 심판을 고스란히 받아야 돼! 니가 방황할 입장 안돼.” 라고 했을 때, 인간은 준비 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나는 좋은 집을 원하지 않고,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 집에서 행복을 느끼겠습니다. 됐습니까?” 이러는 거예요. 이것은 환상이라니까요.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요. 이렇게 살고 싶으면 이렇게 사는 조건하에 그런 환경 속에서 내가 내 위로하는 것에 나는 정당성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정리해 볼까요. 나는 바르게 살기 때문에, 욕심없이 살기 때문에, 내가 나 위로하는 것에 인생 목표로 삼아도 하나님이 와도 누가 와도 거기에서 티잡힐 일이 아니라는 것. 이게 인간 내부의 사정입니다.

아까 제가 질문 던졌잖아요. 도대체 하나님은 왜 심판하시는가, 했지요. 인간은 자기 단도리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존재들이에요. 그거 심판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는 이름 없는 자가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하나님도 이 땅에 올 때, 이름을 갖고 있어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냥 이름이 아니에요. 내가 아는 나를, 내가 알고 있는 나다움을 타인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타인이 내 마음과 똑같은 마음되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름이 있는 거예요.

내가 만든 이름. 물론 부모가 줬지만 내가 그걸 수용했지만, 내가 수용한 그 이름. 이름이 다른 니가 부를 때는 그냥 이름만 부르지 말고 내가 내 마음으로 나를 생각한 만큼 불러준다면 우리 사이는 친구 아인가, 이리 되는 겁니다. 우리는 좋은 관계라는 겁니다.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결혼을 한다는 것은 비로소 무엇이 결혼이 아닌가를 아는 상황 속에 들어간다 했지요. 왜냐하면 결혼하기 직전에는 결혼은 환상이거든요. 자, 계속해서 반복합시다. 이제 고개 끄덕해도 나 안 믿어. 이제.

자, 인간 속에 뭐가 들어있다 했습니까? 자기 위로. 인간의 목표가 자기 위로잖아요. 그럼 결혼은 왜 합니까? 자기 위로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서 결혼을 하겠지요. 상대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매일같이 한 집에 살면서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말은 내가 추진하고 있는 나의 위로를 더 강화시키는 용도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과 사귀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나, 당신은 선택하겠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서로가 서로의 환상을 이용한 거예요. 서로의 서로가.

그렇다면 그 이용했다. 그걸로 끝납니까. 그 다음에 뭐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첫째시간에 한 무엇이 생긴다고 했습니까. 위로가 방해받지요. 그 때 뭐가 생깁니까. 미움이 생기지요. 왜 하나님이 내 미움을 가져가면 안 되느냐 하면 내 미움을 가져가 버리면 내 위로가 파괴된 그 상실된 것을 무엇으로 보상받습니까. 보상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나한테 실컷 미움 받아야 다소 내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내 위로에 하자가 없음이 증명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자꾸 미움을 기본으로 삼느냐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새언약이 인간의 미움이 없으면 주님의 살과 피가 발생되지 않아서 그래요.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나 주님 좋아요, 이래서 발생된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흘린 피, 예수님의 찢겨진 살이 되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돼요. 그 찢겨진 살과 그 흘려진 피와 나랑 관련성이 지어져야 돼요. 테이져 건처럼. 관령성이 지어져야 돼요.

오늘 말라기3장 13, 14, 15절처럼. 이게 우리의 본 모습이에요. 하나님 믿는 이유가 하나님에게 모든 분노와 하나님 내 화풀이를 누구한테 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겁니다. 지금 이 김종환의 가사 <위대한 약속> 가사를 보게 되면 여기에 자기 철저함이 있지요. 자기 완벽함이 있지요.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함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래서 이 가사를 딱 보면서 왜 김종환은 자기가 지옥가야 마땅함의 근거가 왜 안 나오지. 라는 것이 퍼득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어. 이리 나오고 있다 말이지요.

세상에 얼마나 욕심이 없었으면 이렇게 마음 낮춰서 살 수 있느냐, 나도 니처럼 욕심 낮추면 니처럼 행복하겠지. 내가 평소에 반성하고 내가 이건 잘못됐다. 하는 것을 가사에 다 담아났어요. 평범한 게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 끝에 가보면 알아요. 알아서 뭐하는데? 알아서 뭐할건데? 알아서 뭐합니까? 역시 나는 알았다가 나는 뭐가 된다? 역시 나는 소중해. 이리 되지요. 제목도 보세요. 무슨 위대한 약속.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 믿음, 사랑도 떠나가지요. 내가 인생을 살다보니까 주제넘게 건방지면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아서 뭐할겁니까? 깨달은 내가 뭡니까? 역시 나는 훌륭해. 이게 바로 자기 위로잖아요. 그러면 내가 모를 때는 그 사람이 김정환이 놓친 게 있어요. 하나를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했을 때 자기 안에 상실이 있겠지요. 그 상실이 뭐로 드러나겠습니까?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남들을 미워했겠어요. 얼마나.

그 미움이 나오는 노래가 김정환의 제일 먼저 나왔던 노래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존재의 이유. 조금만 기다려 내가 달려갈 테니. 목표가 딱 하나에요. 니는 내 여자야. 그게 목표에요. 나 놓지 않을게. 놓지 않을 게. 이 말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그 환상 없이는 나는 지옥을 못 견디겠다는 고백이에요. 그게 무슨 이유? 무슨 의미? 존재의 의미에요. 존재의 의미. 내가 사는 이유는 환상 때문에.

믿음도 사랑도 떠나가지요. 가보면. 자, 여기서 질문 나옵니다. 답변해 보세요. 믿음도 사랑도 떠나면 되잖아요. 왜 떠나지 말아야 되지요. 답변해 보세요. 믿음도 사랑도 아내도 남편도 자식도 다 떠났다. 그래서? 그게 뭐 어때서? 떠나면 떠나는 건데 그게 떠나면 왜 안 되지요? 누구 답변해 보세요. 갑자기 조용하게 되어버렸지요. 그러니까 떠나버리면 내가 무너지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더 약을 올리고 더 들이미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들이미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대우합니까. 에라, 죽어버려라. 그래서 죽은 것이 찢겨진 살이고 흘려진 피입니다. 그 피가 우리를 살리잖아요. 그 피가. 복음을 위해서 주께서는 못 돼먹은 우리가 된 거예요. 대중가요를 들어도 항상 십자가를 결부해서, 드라마를 보더라도, 영화를 보더라도, 일상생활하면서 십자가와 결부해 보세요.

그 다음에 두 번째 <혼자가 아닌 나>. 따단딴따다~~전주 나왔다 치고, 다시 울지 않겠어. 나는 슬퍼하지 않아. 여기에 보면 행복은 늘 멀리 있을 때 커 보이는 법.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그동안 쓸데없는 환상을 따랐다는 거예요. 파랑새를 따랐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부질없는 짓은 이제는 그만두겠다는 거예요. 힘이 들 때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와도 모진 바람이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내일의 해는 뜬다. 이럴 것이지요.

눈물 나게 아픈 날에, 이 가사를 보면서 내가 가사를 안 보고 음악으로 들었기 때문에 제가 약간 가사를 착각했어요. 눈물나게 예쁜날에, 인줄 알았어요. 아, 멋지다 정말. 그런데 가사를 보니까 눈물나게 예쁜 날이 아니고, 눈물 나게 아픈 날에, 였어요. 차라리 가사를 눈물나게 예쁜 날에, 크게 한 번 소리를 질러 봐! 이게 더 나은 거 같아요. 내게 오늘은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이거 뭐 우울증 걸렸나.

자, 이 두 번 째 문제는 뭐냐 하면, 모든 게 내 중심이에요. 자, 내중심이 될 때에 성경에는 뭐라고 지적하느냐 하면 이렇게 지적해요. 로마서3장 23절 봅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그 다음에 뭐로 되어있지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가 아니었었습니다. 뭐냐 하면 자기 영광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소박하게 살던지, 나쁜 집에 허름한 집에 살던지, 관심 하나도 없고 그렇게 김종환처럼 작은 집에서 김종환 집 작은 집 아닙니다. 작은 집에서 행복하게 느끼면서 살겠습니다. 그리 할 때, 하나님이 찾아와서 그거하고 나하고 나의 영광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이리 물어요.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요, 우리가 소박한 삶, 행복한 삶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광이 안 된다는 거예요. 안 그러면 무조건 지옥이에요. 그래서 지옥은 뭐냐 하면 지옥에 지옥 갈 이유가 가득 담겨있고 이 탱크에. 물탱크에. 그 위에 표면에 뭐가 담겨있습니까? 사는 게 힘드니까 꼴록 꼴록 환상을 꿈꾸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물속의 기포. 뽈록! 뽈록! 기포. 이 아파트에 20가구가 살면 전부다 수조에서 뽈록 뽈록. 퇴근하면 전부 다 자기 기포가 올라가요. 전부 다 환상이 올라가요. 오늘은 이렇게 힘들지만, 아들아! 내일은 잘하자. 이게 환상이에요. 환상. 하나님께서 니가 마음을 낮추면 니 소원을 들어준대. 전부 다 환상이라고요.

하나님의 영광하고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관계없어요. 자기는 엉덩이가 무거워요. 끔적도 안 해요. 끔적도 안하면서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합니까? 안하지요. 자기의 영광만 생각하지요. 요한복음1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영광에서 끔적도 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지 못한다고 예수님이 그 유대인보고 지적한 거예요.

그 다음 우리의 관심은 뭡니까? 그럼 영광을 어떻게 돌리느냐 하는 거죠. 로마서3장에 보면 영광 돌리는 것은 오직 하나의 루트밖에 없어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 경우, 로마서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화물제물. 뒤에 25절 나오지요.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모든 죄를 간과하심으로 모든 것을 덮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도 의로우시고, 자기를 믿는 자에게도 의롭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유일한 영광이 돼요. 영광의 장면입니다.

뭐가 삽입되어야 돼요? 바로 자기 위로가 있는 자리에 뭐가 들어와야 돼요? 의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주님의 자기의 죽으심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것만이 영광입니다. 다른 영광 없습니다. 예배당 지어서 영광 아니고, 사람 끌어 모았다고 영광 아니고, 십일조 한다고 영광 아니고, 십자가가 오는데 그 자리가 뭐냐, 내가 나 위로 못해서 환장한 자리에 십자가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오는가, 결국 꾸짖는 방법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지요. 그게 말라기3장13, 14, 15절입니다. 꾸짖는 방법이에요. “니는 이렇게 했잖아. 나를 이런 식으로 농락했잖아. 하나님 믿어도 도움 되는 거 없고, 하나님 믿어도 복 못 받았다. 이런 식으로 니가 했잖아.”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또 반발하지요. “그러면 누가 구원받습니까? 누가 천국 갑니까?” 이리 나오겠지요. 그게 16절이에요. 하나님 앞에 있는 이름. 기념책인데, 하나님 이름의 기념책인데, 왜냐 하면 여호와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긴 기념책의 명단, 리스트 이것은 인간이 본인이 우리가 관여할 수 없습니다. 일방적 분류에요. 일방적 분류.

자, 요 대목부터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하기 전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거 인간 삶이라 하는 것은 간단하게 압축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은 참 많이 양보하며 했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 아~, 참, 내가 인간성이 너무 좋았다. 내가 인간성이 너무 좋아서 내가 남을 위해서 너무 양보하며 살았다. 이것도 무엇에 포함돼요? 자기 위로에 포함되지요. 우리는 이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참, 더러운 세상, 악한 세상인데, 참 이 가정이 이만큼 건사된 거 아, 참, 내가 양보해서 이만큼 꾸려나가게 됐다. 이 터전, 기반, 이게 전부 다 내 양보야. 내가 양보한 거야. 양보를 어떻게 했는가, 양보의 구체적인 방법. ‘마주 오면 피하고, 지나가면 다시 정렬’ 운열이 맞잖아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비슷하지요. 마주 오면 피하고 지나가면 다시 정렬. 니가 쏟아낸 거 내가 다 뒤처리할게. 이게 두 자로 뭐라고요? 양보한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장렬한 이렇게 장한 나를 어떻게 내가 나를. 내가 나를 부정할 수가 있습니까? 하루 하루 이렇게 살아가는데. 내가 나로부터 위로 받을만하고 남들로부터 위로받을만한 그런 자부심으로 이 지옥 같은 세상 꾸역 꾸역 버티고 사는 거예요. 인간은.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거하고 하나님 영광하고 무슨 상관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우리의 한계에요. 여기서 더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 보통 세상 사람들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나이트클럽에서 맨날 노는 돈 갖다 바치고 춤추고 노는 이런 청년이 있다 합시다. 이런 청년이 오면 청년이 교회 와서 술 끊고 담배 끊고 교회 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야~ 이거 뭐, 다른 사람 됐네. 와~ 새사람 됐다. 이렇게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교회에 왔잖아요. 교회에서 천국으로 가야 돼요.

그러면 이 두 식에서 나이트클럽과 대비되는 것은 뭡니까. 교회에요. 교회지요. 교회오고 교회를 뚫고 나와야 돼요. 왜? 교회는 무엇을 인정해 줘요? 자기가 스스로 자기 위로해 주는 것을 옹호해 주고 축복해주는 곳이에요. 이걸 뚫고 나가야 돼요. 이걸 안 뚫어버리면 여전히 자기 위로에 갇혀 삽니다.

왜 이단들이 사기꾼들이 설칩니까. 우리가 자기 위로에 환장했기 때문에 그걸 달래주기 위해서 주위에 이단들이 들끓는 거예요. 귀신들이, 악마가 들끓는 거예요. 됐어! 그만하면 됐어! 참된 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리 하고 있다고요. 무슨 참된 교회가 구원하는데가 어디있어요. 교회를 뚫어야지요. 교회를 뚫고 나가야 돼요.

바로 유대교회를 뚫고 나갈 때, 거기에 주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방나라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고 유대,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집단에 의해서 발생된 사건이 천국의 문이거든요. 좁은 문. 교회를 오시는 것은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닌데 하나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하나의 과정. 교회 와서 교회에 문제 있다가 아니라 내게 문제 있다는 걸 교회에서 알아야 돼요. 기독교 가정도 마찬가지고. 내게 문제 있는 거예요. 내게. 그게 뭐냐 하면 이만하면 됐다는 거예요. 이만하면. 이만하면 됐다는 말은 자기 위로의 다른 표현이지요.

자, 17절 나가봅시다. 1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이리 되어있지요. 여기서 분류작업을 하십니다. 주께서 분류작업을 하시는데, 내가 오늘 몇 번 이야기하는데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분류작업에 우리가 관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여 못합니다. 일방적이에요.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저 천국가고 싶어요. 손들고 나올 자격이 아무도 없어요. 왜냐, 그것마저 자기 위로기 때문에. 자기 위로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에 나오면 안돼요.

그리고 기념책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의 기념책이라는 것은 뭐냐, 이리 보면 돼요. 예수님이 쓰시는 일기장이에요. 일기장.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일기장 쓰시는 분 없지요. 일기장은 안 쓰지만, 지금까지 여러분 마음속 일기장 안 쓴 적이 없어요. 그 속에 여러분 마음속에 기억이 여러분의 일기장입니다. 일기장이에요.

중요하지 않은 사건은, 반복되는 패턴은 그냥 잊어버리되 핵심적인 것. 아주 돌발적인 그런 것은 영원한 일기장으로 계속 남아있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2019년도 8월 6일 내 아들이 학교 돌아오다가 차량에 바쳐서 다리를 다쳤다. 애는 기브스하고 잊었지만, 엄마는 잊을 수가 없어요. 왜냐, 엄마 다치면 내 위로에 흠집이 되기 때문에. 상처가 트라우마가 돼요. 그 다음 일기장에 뭐겠어요. 2021년 8월 6일 내 아들 다친지 2년 됐다. 한 번 들어간 상처는 그걸 계속해서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잊을 수가 없어요.

아니 잊으면 내가 아니라. 왜? 사람은 내가 자기의 위로하려면 내가 하나님 앞에 대들만한 게 있고, 하나님에게 미워하고, 하나님에게 원망할 만한 것이 내가 있을 때 그게 진정 범죄한 나답기 때문에. 인간은 뭘 범죄한 사람은 빼겠지만. 그게 나답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알아서 내 인생을 꾸려나가는 이유가 다 있었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나한테 상처를 줬지만, 그 상처는 내가 품고 가야될 당사자는 나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힘들게 했지만, 힘든 당사자는 나잖아요. “하나님이 아무리 구박해도 내가 하나님 믿는 거 보세요. 이래도 하나님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이리 나오는 거예요.

자,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이 분류를 하면서 주님께서는 고린도후서2장을 한 번 봅시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모습입니다. 어떤 모습을 띄면서 분류를 하는지. 고린도후서2장14절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절,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사망에 이르는 냄새, 사망의 시체 썩는 냄새, 사망이 품어내는 냄새, 악취, 이게 뭐냐 하면 불타는 냄새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 전체가 지옥으로서 모든 구석에 불타는 냄새가 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성해 가고 있습니다.

전기충격기 있지요. 파리 잡는 거, 벌레 잡는 거. 칙칙 모기한테 치잖아요. 칠 때, 그냥 곱게 죽습니까? 냄새 피우며 죽습니까? 머리카락 타는 냄새, 담뱃재 냄새 나지요. 주님께서 말씀이 심판을 행사하는 말씀을 줘버리면 그 말씀이 전하는 그곳에서 타는 냄새가 나요. 불타는 냄새가 난다고요. 지옥의 냄새가 난다고요.

그러니까 나는 향기롭다 좋아하지 말고요. 불타는 냄새가 나야 마땅한데 왜 그 냄새가 지옥 불 냄새가 왜 나는 향기로 느껴지지. 이게 신기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주께서 이 세상을 저주한다는 것이 왜 나한테는 기쁜 소식이지. 그게 기쁜 소식이에요. 그건 뭐냐,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심판한다는 것이 나를 배제하고 벌인 일이 왜 그게 나한테 즐겁고 기쁨이고 감격스러운 일이 되는지요.

그 말은 뭐냐, 니가 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일체 안 받겠다는 것이 다른 사람은 소소하게 들리지만, 나는 야호~가 되는 거예요. 그렇지! 바로 그거지! 고마움이에요. 고마움.

그래서 주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의 일기장에 거기에 내 이름이 끼어들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건 나를 기념하는 겁니까? 주님을 기념하는 겁니까? 주님을 기념하는 거죠. 그래서 주님의 기념책이잖아요. 주님의 기념책. 하신 분은 주님이지 내가 알아서 주를 믿는 게 아니니까요. 주님의 기념이 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고린도후서를 보겠습니다. 2장 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했지요. 물어봅니다. 자, 사람은 왜 존재하지요? 냄새 때문에. 어느 냄새를 피우고 있는가, 주께서 지금도 쉬지 않고 말씀으로 작용하고 있을 때는 필히 두 가지 냄새입니다. 다른 냄새는 나지 않습니다. 하나는 향기 나든지, 아니면 악취가 나든지, 그러니까 사람의 용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냐가 아니에요.

작은 집에서 소박하게 사는 그거 악취에요. 눈물 나게 예쁜 날에 불러 봐. 백날 불러 봐도 그건 악취에요. 자기 포기 안 되니까. 기꺼이 감사하면서 즐겁게 그건 주님께서 말씀의 테이져건을 쏴서 우리는 말라기 3장 13, 14, 15절에 해당되기 때문에. 16, 17 이건 우리 소관 아니에요. 이건 하나님 소관이에요. 우리는 늘 궁지렁 궁지렁 거리는 거예요.

하려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왜 이리 안 돼서 어쩌란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속으로 궁지렁 궁지렁해요. 하나님이 “니 뭐라고 하는 거야?” “아무소리 안했습니다.” “문제는 그게 니 영광이 돼?” “그건 생각 못했습니다.” 나는 내 위로 받는데 신경에 빠져가지고 영광이 되고 안되고 그건 완전히 영광하고 완전 단절된 상태에요.

딱 두 가지에요. 시체 타는 냄새, 불에 타는 냄새, 쌀벌레 같은 거 찌찌직 하면 타요. 안 그러면 아가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향기. 흐흠 어디서 나오는 향기지. 향기. 그렇게 딱 정리하시면 말씀은 전혀 혼잡할 수가 없어요. 고린도후서2장17절.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 말씀을 뭐하게 하지 아니하고, 혼잡하지 아니하고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하노라. 딱 방금 이야기해놓고 이건 절대 혼잡할 수 없어. 딱 이거야. 인간의 용도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인간의 이익, 행복도 아니라는 것. 인간의 자기의 정당성도 아니라는 것.

오직 주의 말씀이 도달했을 때 피어나오는 지옥의 냄새와 천국의 향기 그 둘로 나눠지는 겁니다. 이 천국의 향기라 하는 것은 똑같은 일을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하는 일에 안 받아주시는 고마워하는 쪽은 모든 게 모든 일이 범사에 향기가 되고, 왜 저를 무시합니까. 이리 나온다면 그건 어떤 복을 된통 받아도 썩는 냄새에요. 타는 냄새지요. 오늘 제목을 타는 냄새로 할까. 어디 뭐 가스 불에 뭐 얹어놨어요. 김치찌개 타는 냄새, 먹을 수가 없어요. 못 먹어요. 지옥 불로 태우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있느냐, 말씀 뒤편에 있어요.

말씀을 주게 되면 지옥 불이 타는 거죠. 딱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구분해야 돼요. 횃불과 횃불 막대기. 이건 구분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횃불 막대기인데, 횃불이 커지면 막대기가 안 보여요. 안 보이는데 횃불이 막 이동해. 움직여. 왼쪽, 오른쪽으로요. 왜? 우리는 불타는 말씀이니까요.

그야말로 출애굽기3장에 나온 떨기나무입니다. 떨기나무. 모세가 바로 하나님 앞에 떨기나무처럼 쓰여 졌어요. 그것 때문에 주께서 떨기나무를 모세 앞에 보여준 거예요. 모세가 놀랬지요. 어? 불붙었는데. 왜 소모가 안 되지? 식물은 탄소화합물이지요. 불타면 이것이 재가 되어야 되는데 분명히 불은 붙었는데 타지는 않는 거예요.

그렇다면 불의 에너지는 일방적이지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일방적,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에서 나온 하나님의 열정이지요. 하나님의 열정이 모세에게 도달된 모세가 활동하는 에너지가 되는 겁니다. 에너지가. 향기 나는 냄새가 되게 하는 거예요.

17절 보게 되면 그들은 나의 특별한 그 다음에 뭐됩니까? 소유. 이사야43장 1절 설명이 필요해요. 어려워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럴 때, 이러한 대상이 있잖아요.

하나님으로부터 내 소유의 대상은 왜 불이 안타고, 왜 물에 안 빠지지요? 이유가 뭡니까? 뭐를 경유했지요. 물에 빠지는 거 물심판, 불에 타는 거 불심판, 그걸 경유했기 때문에 물에 안 빠지고, 불에 타지도 않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가 언제 물을 건넌 적 있고, 언제 불에 탄 적이 있습니까?

성도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성령, 십자가와 함께 있을 때, 주님의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모든 미움의 극치를 예수님은 혼자 다 감내하고 받아냈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저주할 그 마지막 끝까지 그 저주까지 탈탈 긁어서 예수님이 혼자 다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성령을 통해서 그 저주 속에 들어가게 돼요. 들어가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저주보다 앞당겨서 주께서 그 저주를 다 받아내신 거예요. 그 저주를.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어요. 뭐 죄가 있어야 뭐 죄를 끄집어내어 벌을 내리지. 벌 같은 게 없습니다. 저주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인간인가, 죽었다가 살아난 인간이 되어야 돼요. 내가 산 채로 안 죽고 저주 없다. 이러면 안돼요. 그런 것은 철학이지. 복음이 아니에요. 신학이라는 이름의 철학이 그래요. 모든 철학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죽을 뻔한 거예요. 안 죽었어요. 쉽게 말해서 이단입니다. 모든 신학은 이단이라고 보면 돼요. 제가 어제 수요일날 뭐라고 했던가요. 내가 이단이 아니라, 필히 이단이 되어야 돼요. 이걸 즐거워해야 됩니다. 이단이 되어야 십자가의 의미가 살아나요. 십자가의 의미가.

여기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는다 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소유로 삼았구나. 성급하게 다가서지 마시고요, 나보다 먼저 소유되신 분이 있어요. 종이라고 합니다. 종. 종 또는 돌 또는 순.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종을 많이 써요. 종. 이는 내 사랑하는 종이요. 어디에 많이 나오느냐 하면 바로 빌립집사가 이디오피아 내시 만날 때 봤던 본문. 이사야 43장입니다. 이 종이 누굽니까?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죽음으로서 사함을 얻었다는데 이 종이 누굽니까? 여호와의 종이 누굽니까?

그래서 모든 이야기는 그 종하고 이야기가 되고, 그 분하고 계약이 돼요. 그걸 새언약, 그걸 새계약, 언약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그 계약 책이 뭐냐, 예수님의 일기장이고 그 일기장이 기념책이에요. 거기에 누구 누구 명단을 위해서 내가 대신 그 애들을 위해서 내 혼자 죽은 게 아니고, 걔들 죽음까지 내가 회수해서 내가 다 받았습니다. 하는 것을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거예요. 이야기 다 끝났어요.

참, 이거 보면 생각나는 것이 옛날에 문희하고 신영균이 나오는 영화가 있었어요. 제목은 <미워도 다시 한 번>. 문희 배우 알지요. 자기가 아 키우다가 이제는 내가 안 키우고 아빠가 키운다. 아빠한테 가니까 그 애 이름이 김장훈인가, 연기 너무 잘했어요. 온 국민이 다 울었어요. 아빠한테 가면되는데 아빠 품에 안겼다가 도로 나 엄마하고 살래. 하고 올 때 온 국민이 다 울었습니다. 다 울었어요. 울 때 나오는 가사가 뭐냐, 가끔 울어야 할 지 몰라. 확 우는 거예요. 상대방의 아픔에 내가 동조했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착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억울하고 당한 사람 편에 서서 정의를 부르짓는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정의감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안보고 복음에 안 들어오고 세상의 약한 사람 편에 서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영광입니까?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에요? 아니지요. 그러니 얼마나 평소에 우리는 다시 한 번이에요. 분명히 예수님 편에 섰는데 우리는 어디에 익숙하냐 하면 세상과 더불어서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것이 그게 젖어들었어요. 그게.

어려운 사람을 보고 울고 있는 내 모습에 대견해 하는 그게 우리의 습관화 되어있어요. 습관화. 그러니 여러분들은 더 살아야 돼. 이 지옥에서 더 살아야 돼요. 하나님의 영광도 되지도 않는데 그게 자기 영광이 되거든요. 아, 내가 이만큼 착했어. 아이구, 미치겠네. 내가 왜 저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아직도 나에게 양심이 있다 말이지. 왜 이렇게 대견하지. 이러고 있다니까요.

아이구 노래 가사 괜히 해가지고 집에 가서 노래 들으면서 이거 딱 내 이야기다. 하겠다. 아무리 이게 복음이 아니라 해도 또 뭐 공부 끝나고 집에 가면 완전히 두 노래 가운데 하나에 속해져 있어.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서로 자기 격려하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다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제목을 갑자기 바꾸고 싶다. <미워도 다시 한 번> 내가 그토록 미워도 그 미운 내가 좋은데. 좋은 걸 어떡해. 내가 그렇게 못 돼먹었는데 좋은 걸 어떡해.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말라기가 구약입니다. 성령이 왔겠어요? 안 왔겠어요? 성령 안 왔지요.
우리는 예수님 만나고 다시 돌아서서 나를 만납니다. 그럼 나를 만나 나를 귀잡아 당기고 또 쑤셔가지고 다시 주님 십자가 보게 하시는 그 역할은 누가 하겠어요? 성령님이 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니는 주님의 고통을 니가 경험할 만큼 경험하고 그리고 난 뒤에 니가 천국에 가야 돼요. 빌립보서에 있는 말씀처럼. 사는 것도 내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나한테 유익입니다. 살아서 착한일 많이 하고 그거 다 지우고. 그냥 이 참에 죽는 것도 주님의 이익이 된다면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일기장 쓰세요. 쓰지 말라 해도 할 수 없어요. 인간은 본성이니까. 인간은 과거를 기억하니까. 쓰시되 성령이 와서 그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그건 정말 안 중요해. 보는 앞에서 과거를 찢어버립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게 합니다. 하면 뭐합니까. 돌아서면 또 생각나는데. 애 다친지 10주년 또 시작하기 때문에.

그런데 또 성령께서 또 십자가 보게 하고, 그래서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은 그냥 천국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완료된 시간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 속에 이미 사라진 존재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날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소환되지요.

어제 수요설교에서 한 것처럼 주님을 위해서 날마다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사라졌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우리를 소환시킵니다. 니가 뭘해도 니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소환시킨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 소유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 안에서 예수님 앞에 소유됨으로서 주의 뜻을 드러내게 되지요.

18절 봅시다. 말라기3장18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냐가 아니라 영광되도록 섬기느냐의 그 몫은 우리 몫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면 말라기3장18절을 근거로 해서 날마다 매일같이 우리에게 되풀이해서 주님 십자가 알도록 섬김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이 영광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일이 영광이 되고 나는 아예 영광에 끼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그것이 바로 영광이 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조치해 주신 것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제 알았습니다. 향기로운 냄새피우기 위해서 말도 안 되게 나만 생각하는 자를 매일같이 빠짐없이 주님의 일기장을 꼬박 꼬박 채우기 위해서 찾아와 주시는 그 주님의 기념책만 남아 있을 수 있는 그걸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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