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30713a말3장11절(율법 돔)-이 근호 목사
오늘 말라기3장11절 해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라.” 십일조를 온전히 했을 경우에 너희 이스라엘에게 제공되는 여러 가지 혜택들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메뚜기를 금하게 해서 너희 토지 소산을 먹지 않도록 해줄게, 라는 거예요. 그리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떨어지지 않게 해줄게.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십일조 율법 완성과 이스라엘의 생계문제가 결부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생계 문제와 율법이 이렇게 결부되어있으면 거기서 율법이 개입되지 않고 그냥 생계문제가 되어버리면 인간들은 자기의 목숨에 연연해요. 그런데 율법이 딱 끼어져버리면 이건 목숨이 아니고 생명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맛도 보지 못한 나무. 에덴동산의 고이 보호받게 되고 나중에 요한계시록22장에서 진짜 온 천지에 가로수처럼 피어있는 나무, 생명나무입니다. 그 생명나무 과일, 그 과일을 따먹는다. 따먹을 수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주께서 무엇을 회상시키느냐 하면, ‘내가 너희들에게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잖아.’라는 것을 자꾸 기억나게 해요.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기 때문에 정작 따먹어야 될 것을 나는 못 따먹게 막겠다. 라는 겁니다. 이게 어떤 내용이냐 하면, ‘인간 쪽에는 어떤 해답도 없다.’ 인간 쪽에서는 어떤 해답도 없어요. 왜냐하면 해답을 가질 자격이 없기 때문에. 망하면 망하는 대로 그냥 망해야 돼요. 우리는 이걸 편하게 인정합시다. 편하게. 편하게 인정 안하면 아무리 교회 다니고 말씀 들어도 소용없어요. 편하게 인정해야 돼요.
이걸 편하게 인정한다는 말은 내 운명은 주님 처분에 달렸다. 이걸 고맙게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세요. 주님의 처분에 달렸다. 이 말은 같은 말인데요. 내 운명은 내 처분에 달리지 않았다. 나의 미래, 나의 장래, 모든 내 인생 꾸려나가는 것. 내 가족 밥 먹고 사는 것 이건 내 손에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억지가 아니고, 분노하는 게 아니고, 그냥 편하게 생각을 해야 돼요. 주님의 처분에 달린 거예요.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손을 떼고,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아무것도 할 게 없게 만드시는 그 배후의 주의 일하심의 의미는 뭐냐, 그 취지가 뭐냐, 그거 알면 되겠지요. 이 말을 달리 하게 되면, ①번 죽어가는 자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②번 이미 죽은 자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이 차이점을 우리가, 내 운명을 주님의 처분에 맡긴 사람들은 이 차이점을 아시면 돼요. 죽어가는 나, 그런 인간 없습니다. 이미 죽은 자에요.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것은 병원에서 하는 거예요. 죽어 가는 자를 살리려 해도 간호사도 파업해버리면 그것도 지장이 있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미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죽은 자가 요구해서 된 게 아니에요. 죽은 자를 대표하는 분의 요구 때문에 되는 거예요. 죽은 자를 대표하는 것. 그러니까 뭐를 발견하느냐, 나를 발견하지 마시고 나를 대신한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발견해야 돼요. 그걸 에이전트라고 합니다. 에이전트. 에이전트니까 성전하면 뭐가 돼요? 메시아되지요. 나를 대체해준 사람. 그걸 요한복음14장에서는 보혜사. 우리 말로 하면 변호사. 남들이 여러분보고 뭐라고 하거든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그거 나한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변호사한테 이야기해.” 우리 주님한테 이야기해. 그런 뜻이에요. 내 변호사한테 이야기 해.
예수님 말고 다른 변호사는 없어요. 이제 예수님의 영으로 오는 것을 성령이지요. 그래서 성령을 가지고 보혜사라 하지 않고, 다른 보혜사. 내가 변호사인데 다른 변호사 내 이름으로 올 것이다. 내 이름으로. 성령이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으로. 성령께서 주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 문제, 내 운명은 어떻게 처분에 맡겼다. 내 운명은 나의 처분에 달리지 않았다. “그럼 왜 내가 나한테 굳이 할 게 없게 만듭니까?”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거든요. 내 인생인데. 내 목숨인데. 내 생계문제인데 왜 내가 손 떼라. 그럼 손 떼버리면 내가 손 떼면 나 어떡하라고?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이런 나를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런 문제 있지요.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라는 문제.
방금 제가 우리의 변호사가 있다고 했지요.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변호사를 위해서 우리가 있는 거예요. 나를 변호해 주기 위해서 변호사가 있는 게 아니고, 누군가를 변호해야 될 예수님이 변호할 자가 누군가를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누구의 변호사 되기 위해서 보혜사 되기 위해서 필요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그 말은 우리가 굳이 하나님께 떼쓰거나 이야기할 게 없다는 말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라기에서 십일조에 대해서 소홀히 할 때에 지금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들이 내 것을 도둑질했다고 그렇게 되어있지요. 십일조 할 때. 내 것을 도둑질했다. 이 말라기를 바로 선지자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백이면 백 그렇게 생각해요. “앞으로 십일조 꼬박 할테니까 내 거 뺏어가지 마세요.” 이리 나올 수 있다 말이죠. “내 창고에 채워주세요.” 이리 나오거든요. 그게 잘못된 거예요.
우리는 몽땅 다 빼앗겨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이 변호사다운 면모가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십일조하지 말아야 되고, 아이고, 갑자기 기쁜 소식이 훅 들어오네. 우리는 십일조 하지 말아야 되고, 그래가지고 온갖 저주는 저주대로 다 받아야 되고, 십일조하지 말아야 되고, 기쁜 소식이 확 들어오는데. 그래서 온갖 저주를 다 받아야 되고 그게 그만 바람이 푹 다 빠져버렸지요. “너 이제 죽었어! 이제.” “니 십일조 안해서 저주 받아야 돼!” “할게요. 할게요.” 하면 “하지 마! 하지 마! 니는 안 해야 돼!”
안해야 된다는 말은, “니는 십일조 안한 자로 되어가지고 저주 받아야 돼! 그래야 변호사 취지가 살아.” 도대체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발상들이 아닙니다. 이게. 그러면 그동안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요. 그럼 우리 이스라엘이 십일조 안했다고 닦달내는 것은 그전에 율법에서는 이렇게 닦달안냈거든요. 십일조 안냈다고 너그들 가는 길에 저주한다. 그런 구체적인 내용이 별로 없어요. 율법만 있을 뿐이지요. 그냥 포괄적으로 되어있지요. 율법대로 안 살면 니 이 땅에서 저주받는다. 그렇게 했지, 딱 꼬집어서 십일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잖아요. 그렇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그러면 진작에 십일조 열심히 하라고 진작에 좀 하지. 왜 뭐하고 난 뒤에 왜 십일조 안했어? 왜 이런 이야기합니까?” 라고 이야기하면, “원래 니는 그런 코스로 가야 된다.”는 거예요. 십일조 안해서 니가 벌 받고 망하는 쪽으로 가야 된다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이제 11절에 나옵니다. 그동안 내가 너희들 십일조 여부로 관계없이 내가 너희를 위해서 메뚜기를 금하고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떨어지지 않게 해왔다는 겁니다. 무엇과 상관없이? 너희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렇게 해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너희들의 생존과 생계를 보장했다는 겁니다. 너희들의 행위를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그냥 은혜로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은혜가 너희들의 잘못된 행위에 불구하고 은혜라 하는 것은 값 없이 주는 거거든요. 값없이 줬는데 그 값을 슬슬 이제 따질 때가 왔다는 겁니다. 언제? 이스라엘이 망할 시점에 기해서.
여러분이 집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매달 이백오십만원씩 꼬박 준다고 칩시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자꾸 입금이 되는 거예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자꾸 입금이 되는 거예요. 이름도 무기명. 또는 이름도 죄인 해가지고 익명해가지고 온다 말이지요. 한 번 오고 두 번 오고 하니까 어떻게 우리가 해석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변호사를 보호하는데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나를 보호한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다렸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을 안 버릴 거야. 십일조가지고 그렇게 뒤끝 있게 잔소리 할 분이 아니지. 왜? 십일조 안했다고 우리는 포도 안 떨어지고, 십일조 안했다고 우리는 메뚜기가 그렇게 난리 칠 때도 있지만, 늘 노상 그러지는 안았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이라고 그냥 봐주는 모양이다.’ 이리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본전 찾는 거예요. 너희를 봐준 게 아니고 너희들은 변호할 가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동안 너희에게 값없이 은혜를 줬다는 거예요. 변호할 가치도 없는 것. 크게 한 번 쓰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음으로서 용서해요.’ 이건 또 뭘 엉뚱한 희한한 이야기냐, 인간은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길 바래요. “니가 하나님을 알아?” “아이구, 모르지만 그냥 내 하는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모르면 좀 입 좀 다물고 있어.”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 주기도문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게 예수님 이야기에요.
베드로가 뭐냐 하면, 내가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됩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자체는 용서에 대해서 베드로를 비롯해서 어느 인간도 용서를 몰라요. 용서 받는 것만 좋아하지 용서가 왜 용서해야 되는지를 몰라요. 그걸 제가 지금 말라기가지고 설명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살았잖아요. 살 가치도 없는데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계속 살다보니까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주께서 우리를 지켜주고 용서함으로서 우리가 살 가치가 있는 어떤 존재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슬슬 끝장 볼 때 됐구먼. 하고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마지막에 십일조가지고 정수를 쳐버리는 거예요. 십일조가지고.
무슨 말이냐 하면, 십일조를 내지 않는 자는 이 약속의 땅에서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메뚜기한테 갈라먹어야 되고, 아무리 포도농사를 지어도 이건 십일조 안하는 자는 다 떨어져야 마땅하다. 이게 하나님의 율법이 작렬하는 약속의 땅의 본모습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너희가 만약에 십일조를 한다면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못 먹게 하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를 떨어지지 않게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 보호 아니고, 율법 보호에요. 십일조 보호에요. 어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남녀가 결혼한 게 아니고 율법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혼했다 말이죠. 특히 로마서7장1절에 보면 너희가 율법을 알잖아.부터 시작해요. 너희가 율법을 아니까 내가 말한다. 라고 시작해요. 율법 모르는 이방인한테는 해당사항도 없지요.
용서하지 않음으로서, 용서한다 이 말은 뭐냐, 용서한다, 용서한다, 하니까 자꾸 인간들이 용서 받을래. 그 용서 저한테 주세요. 이리 나오더라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용서도 모르면서 용서라는 저희들끼리 통하는 용서를 용서인줄 알고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죄인이에요. 우리 죄 많~~아요. 인간은 이리 나오지요. 죄 많은 저를 위해서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 달라는 거예요.
주께서 묻습니다. “니 죄가 뭔데?” “아이구, 죄도 모를까요. 주님께 소홀히 하고, 나만 사랑하고...” “니는 죄를 몰라.” 니가 죄를 모르기 때문에 뭐도 몰라요? 인간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용서도 몰라요. 그럼 그동안 교회는 왜 다녔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다녔지요. 그럼 나는 누굽니까? 니는 니도 몰라. 자기 모르지. 하나님 모르지. 예수님 모르지. 용서 모르지. 십자가 모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내가 키운 자식은 안다고요. 자식도 니는 몰라. 자식 마음을 니가 알아? 자식은 니 마음 알아? 모르지. 갑자기 입이 또 근질근질하다. 모르리~ 모르리~ 남진이 부른 노래 <모르리> 있어요. 인간은 모르게 사는 것. 그게 인간이 태어난 이유입니다. 개코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기 위해서 태어나게 하시고 살게 하신 거예요. 결국 우리가 이만큼 산 것은 모르고 산 거예요.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요. 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주의 뜻은 뭐냐, 몰라도 된다는 겁니다. 개코도 모르는 니가 알아서 그거 어디에 써먹으려고? 아는 거 어디에 써먹으려고? 니 자랑하려고? 안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못 지키고 십일조를 안한 것은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십일조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고,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안 한 거예요.
그러니까 십일조를 안한 것은 인간이 십일조를 할 줄 아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당연한 처사에요. 그럼 십일조 안하면 망하잖아요. 망하도록 되어있다니까요. 인간은. 인간은 망하고 그 망한 이유가 모르니까. 당연히 망해야지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이득은 뭐냐, 메시아고, 변호사지요. 아시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돋보이게 하는 거죠. 딴 거 뭐 있어요?
죽어가는 것을 어떻게 살릴 거냐, 가 아니고 이미 죽은 자를 어떻게 살릴 거냐, 하는 것은 이미 죽은 자의 몫에서 떠났습니다. 손에서 떠났어요. 요걸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용서하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인간이 용서를 구하기 때문에 용서가 막혀버린 거예요. 방해받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원하는 용서를 안 해줌으로서 제대로 막히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된 용서가 주어지도록 주께서 조치하셨습니다.
그럼 용서가 주어지게 되면 용서는 무엇과 만날 때 개념이 사느냐 하면, 용서는 무엇과 만나느냐, 죄와 만나야겠지요. 용서가 주어졌으니까 그 때부터 비로소 아는 게 뭐냐 하면 죄라는 것을 성도는 알게 되는 겁니다. 용서의 바탕, 용서의 근거, 그 취지를 모독하는 것이 바로 뭐였다? 죄였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모독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인간이 생명나무를 안 따먹었잖아요. 그럼 생명나무를 안 따먹으면요, 생명나무와 모르는 관계에요. 모르게 되면 선악과만 따먹어서는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반도 모르는 거예요. 선악과는 알고, 생명나무는 모르고. 선악과는 아니까 반은 알고. 반 아닙니다. 전혀 몰라요. 그 연계성을 모르면 전혀 모르는 게 돼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으로서는 남는 장사지요. 왜? 아무것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사람도 모르고, 모르는데 숨쉬고 지금 살고 있잖아요. 이거 뭐 횡재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15장에 10절에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용서를 해도 주님이 주신 용서고, 죄를 알게 한 것도 주께서 하게 하신 거고, 회개하는 것도 주께서 하게 했어요.
주를 기뻐하는 자에게 찾아오신 것도 주님의 뜻이었고, 그런 주의 뜻을 맞닥뜨릴 때마다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늘 감사와 고마움으로 반응을 드러냅니다. 성령이라는 변호사가 하는 일이 바로 그거에요. 우리를 건드려서 주님께 공로인 것을 날마다 눈떠서 확인하게 만드는 일. 그것을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내 인생과 내 운명을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참, 미치도록 노력하고 있구나. 이게 바로 죄였구나. 라는 사실이에요. 알게 해줘요. 우리가 백살산다고 하늘의 별 따는 거 아닙니다. 우리 인생 사는 거 자체가 아무 의미 없어요. 주님과 주님이 우리의 변호사 되신다는 의미와 연계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어떤 항공의 노동자가 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노동자가 얼마전에 일하다가 죽었어요. 어떻게 죽었느냐 하면 비행기 엔진에 빨려들어가서 죽었어요. 비행기 엔진에. 그리고 그 노동자가 있던 자리에는 노동자가 없지요. 쑥 빨려 사라졌으니까. 엔진 속에 가루가 됐으니까. 노동자가 지가 알아서 지가 걸어서 비행기 엔진 속에 들어갔어요? 십자가에 들어가라 하니까 우리가 알아서 십자가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들어갑니다. 십자가는 가만히 서있는 게 아니에요. 보잉747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어요. 그 힘이 얼마나 세냐 하면 악마의 힘보다 더 셉니다. 우리의 선과 악을 아는 우리의 양심의 힘보다 더 센 힘으로 빨아 당겨버립니다. 쭉 빨아당기지요.
그래서 그 노동자가 죽고 난 뒤에 그 다음날 그 노동자 숙소에, 그 다음부터는 신문에 난 게 아니고 제가 상상한 거예요. 그 숙소에 개인 사물함이 있겠지요. 옷 갈아입고 하는 거 있잖아요. 사람은 없는데 사물함은 그대로 있지요. 그게 흔적이에요. 흔적. 그 사람이 어제까지 근무했던 흔적. 그 사람의 옷가지. 그 사람의 휴대폰이라든지 개인용품. 그 하나 하나 흔적. 그게 뭐냐 하면 그 사람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노동자의 엄마가 와가지고 벗어놓은 옷보고 얼마나 통곡하겠습니까. 사람 없는데 옷만 붙들고 어이구, 야, 야, 빨리 돈 벌어가지고 내일 모레 결혼한다 해놓고 이게 왠 벼락이냐. 하고 붙들고 있겠지요. 이게 흔적입니다.
지금 우리 자신이 예수님께서 내 모든 것을 뺏어간 흔적으로서 우리의 육신이 있어요. 우리의 육신이. 이 육신가지고 하나의 남은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알맹이는 쏙 다 가져간 거예요. 흔적이라 했는데 흔적이라는 말이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힘드십니까? 까?하고 물은 거예요. 그럼 이걸 바꿀께요. 구멍으로.
어떤 식으로 예를 들 수 있느냐 하면, 발에 티눈있지요. 발에 티눈이 있는데 큰 티눈이 약국에 가서 바르면 툭 빠져요. 티눈 빠지고 그 빠진 분화구같은. 티눈이 쏙 빠져버려요. 그러면 그 남아있잖아요. 도토리 알맹이 빠지고 도토리 알맹이를 바치고 있는 그 받침대. 그게 눈에 보이는 육신이에요. 우리의 육신. 소위 사람들 보기에 동창생만나고 친국 만나고 하는 그거. 그게 구멍과 구멍의 만남이에요. 사라짐.
그런데 이 도토리를 봅시다. 티눈 빠지고, 도토리 알맹이 빠지고 도토리가 이렇게 점선으로 있는데, 이 자아가요, 세월이 가면 시간이 좀 지나면 이 점선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게 실선으로 바뀌어요. 내가 역사가 얼마인데. 바꿔요. 실선이 바뀌면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에요. 실선이 두께가 더 단단한 두께로 두께를 점령시켜요. 더 딱딱하게. 완전하게. 이걸 이렇게 표현하면 됩니다.
에세에 에스라는 그 화가가 그린 바벨탑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바벨탑의 내용이 뭐냐 하면, 위에 바벨탑은 공사중에 있어요. 그런데 그 밑둥치는 붕괴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아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율법, 하나님의 법이라 해요. 법을 지키려고 강화해요. 더욱 완벽하게 완전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뭐하느냐 하면, 자아의 밑둥치를 파먹고 있어요. 갉아먹고 있다고요. 갉아먹는다고요.
여러분, 헷대 압니까. 헷대. 한 단성으로 되어있는 나무막대기 같은데. 헷대. 닭이 헷대에 앉아서 울기도 하는데 그 때 쥐들이 닭을 잡아먹을 때 촌에 닭을 키우는데 쥐들이 와서 닭을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닭에 발이 몇 개입니까? 두 개지요. 한 발을 간질러요. 쥐가 와서. 막 간질이면 닭이 기분이 굉장히 좋아요. 기분이 좋아가지고 아휴, 너무 기분 좋아, 할 때 한 쪽 발을 갉아먹고 죽여버립니다.
한쪽의 쾌락이 증강하게 되면 자기 죽는 것도 몰라요. 마약 같아. 인간은 마약을 먹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마약을 찾고 있어요. 애 성적 오르는 것도 마약이고, 지 부자되는 것도 마약이고, 주식 값 오르는 것도 마약이고, 출세하는 것도 마약이고, 내가 급감에 내 미흡함에 나의 허전함을 메꿀 수 있는 그것을 쉬지 않고 계속 찾아나서요. 인간은. 끊임없이 찾아나서요.
누가 그렇게 하는가, 마귀가 그렇게 해요. 해놓고 그 할 때 동원되는게 뭐냐 하면 선악체계입니다. 선악체계. 하나님께서는 선악체계를 포기한 적이 없어요.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선악체계, 악을 멀리하고 선을 찾게 되면 이 자아의 실선이 더 뚜렷하게 안전빵있는 정말 단단한 인생, 인생 성공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는 진동하지 않는 그러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으로 출세할 것을 성공할 것을 계속 선악체계를 가지고 가동시켜요.
악을 줄이고 선을 향하면 복 받아가지고 잘될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한 번 글을 한 번 써볼게요. 이것도 중요한 건데. 여러분들이 이 그림을 생각하시고요. 교인들이 예수님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지옥가는 이유는 예수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바리새인을 무시한 거예요. 바리새인을.
바리새인은 어떤 해답을 제시해서 종교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당시에. 그리고 그 해답이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에게 친화적인 것. 누구도 부정 못하는 것. 악을 나쁜 짓을 하면 하늘이 노해서 벌받아서 불행해지고 착한 일을 하게 되면 하늘의 행운이 추가되어서 니가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이건 어린애들부터해서 어른들까지 여기에 대해서 아니요, 라고 할 사람이 없어요. 이게 선악체계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지 않아요. 어디 감히 하나님을 무시하겠습니까. 그런데 교인들이 뭘 무시하느냐 하면, 바리새인들 무시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적이 그 당시에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을 누가 죽였습니까? 바리새인이 죽였잖아요. 그 바리새인을 빼버리니까 남는 건 뭡니까? 예수님 좀 좋아하고, 존경하지. 아이고, 뭐, 그렇게 별나게 했냐.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되지 말고 예수님을 사랑하자. 그렇게 하자. 예. 이리 나온 거예요.
바리새인이 어떤 생각을 했는가를 바리새인은 딴 사람인줄 알고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은 모든 인간들의 모든 체계의 꽃봉우리에요. 활짝 핀 꽃이에요. 인간의 모든 지혜와 윤리와 도덕과 예술이 만개한 것이 바리새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걸 알았으니까 이제 반대로 나갑시다. 바리새인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리새인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바리새인에서 발 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안 죽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바리새인은 자기를 점선으로 봅니까? 실선으로 봅니까? 실선이지요. 실선. 장마가 돼서 잠이 막 오고. 그래서 내가 여기서 또 예를 드리겠습니다. 잠깨는 데는 어려운 이야기 안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침에 운동을 합니다. 비가 안 왔어요. 날씨가 좋은데 비가 안 옵니다. 비가 안 오는데 운동을 하다가 집이 요리 있는데, 집이 500m두고 길을 걷는데 여기 아스팔트에요. 빗방울의 흔적이 보입니다. 빗방울의 흔적이.
자,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이 말은 뭐냐, 내가 오기 전에 여기 뭐가 내렸다? 내가 오기 전에 비가 내린 거예요. 내가 오기 전에. 뭘 보고 압니까? 흔적 보고 알지요. 흔적 보고 아는 거예요. 이 말은 비올 때 이 운동하는 사람한테 물어봤습니까? 안 물어봤습니까? “야, 야, 니 앞에 일주일 앞에 내가 비 내릴 테니까 니가 허락하나?” 물어봤어요? 안 물어봤어요? 전혀 안 물어봤지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비가 내린 거예요. 운동하는 사람 나 같다만. 비가 내린 거예요. 이게 뭐냐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을 우리한테 물어봤어요? 안 물어봤어요? 안 물어봤지요. 그러나 십자가 사건의 흔적은 있지요.
뭐냐하면 돌아가신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셔서 부활했지만, 남아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들이 누구냐, 바리새인의 후예들이 남아있다. 바리새인의 후예들이. 주님께서 우리하고 만나기 전에 이 지점에 오기 전에 이미 인류를 대표하는 유대민족 그들의 지도자들 이미 만났어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율법 있고, 그들에게 언약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만났다 말이지요.
만나서 언약의 내용을 인간들 대표자를 만나가지고 확실하게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하고 있는 너희 인간들에게 나는 맞아죽는 하나님으로 나는 이 땅에 왔다. 바리새인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니 교인들의 문제가 예수님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을 무시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성도는 우리는? 바리새인하고 한패잖아요. 한패지내요. 그럼 바리새인하고 차이점이 뭐냐, 여기 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 비가 왔네.” 내가 오기 전에 여기 비가 왔네. 이리 되지요. 아, 정말 중요한 겁니다. “여기 비 왔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사건이 이미 터져버렸네.” 이리 되지요. 내가 오기 전에. 그럼 나랑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상관없지요. 나는 그 시대에 안 태어났으니까. 더 응용할까요. “어? 선악과는 내가 오기 전에 이미 누가 따먹었네.” 누가 이런 고백한다고요? 성도가 이런 고백을 하는 거예요. 성도가. 성도이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갈라디아서6장에 나오는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이 말이에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지 십자가 진 예수님 안 만났어요. 십자가 질 때는 강도 두 사람하고 다른 사람은 도망가 버리고 현장에 군인들하고 몇 명 없었어요. 그 현장에 가 본적 없어요. 사도바울이.
그러나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기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했지요. 사건은 흔적을 남기는 거예요. 내게 속한 소자, 그게 마태복음18장 그런 취지가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거 정리하고 진도 나가봅시다. 제가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 말라기에서 십일조 안했다고 닦달낼 때에 하게 하면, 사람들은 앞으로 잘할게요. 앞으로 십일조 꼭 낼게요. 그런 취지가 아니다 말이죠.
십일조가지고 닦달내겠다는 말은 너희 역사는 끝났어! 라는 뜻이에요. 너희들이 실선의 역사가 뭐로 된다? 점선의 역사가 되는 거예요. 나 너희들 침으로 뽑아낼거야. 아예 뽑아낼거라는 뜻이에요. 아예. 이게 말라기 끝부분에 나와요. 아예 뽑아낸다.
그러면 우리는 왜 만들어놨느냐, 우리 인생을 왜 살게 하느냐, 장차 오실 분이 행한 일을 이제 앞당기는 일이 미리 흔적이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겁니다. 율법에 의해서 어떤 인간도 율법으로 합당하게 율법을 성취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모범이 아니지만, 사례로 이스라엘을 뽑아서 그들을 기어이 망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여기 운동하기 이 지점까지 오기까지 일어났었어요. 벌써. 이게 성경이잖아요. 이스라엘 역사 망했고, 바리새인 찔렀고, 주님은 창에 찔려 받았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와서 “여기 십자가 사건 터졌네.” 라고 그걸 알아보게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우리 구원하려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께서 그렇게 예수님을 변호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렇게 그 자리 그 현장에다가 채택한 거예요. “니가 니한테만 알려줄게.” 이런 식으로.
뽑아세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결국 어디로 가느냐 하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증인 되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로마서7장4절에서 남편이 죽으면 나는 다른 남자하고 사귈 수 있고 만날 수 있다. 라는 것이 율법의 뜻이 아니고 율법의 뜻은 뭐냐 하면 남편 죽을 때 단독으로 있는 너도 같이 죽은 거예요. 남편이 죽었다. 이 말은 남편이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은 사람 편이 아니고, 율법 편인 거예요.
그 율법 편에 서 있는 그 율법에 있다는 그 취지를 인간이 계속해서 부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단독에 있을 때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돼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면 율법을 이룰 수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 내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 그러면 내 몸에서 어디로 건너가야 돼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너가야 되는데 이건 우리가 할 수 없고 주께서 이걸 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몸을 죽이신 거예요. 왜? 우리를 구원하려고? 아니. 예수님의 자신의 행한 것을 스스로 변호하기 위해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것이 율법을 이루기 위한 주가 된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다른 변호사 성령을 보내서 알게 하신 거예요. 이 비오는 지점에. 오늘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었어요. 비오는 지점에 여러 사람들이 갔을 거잖아요. 하지만, 비가 안 왔어요. 안 왔는데 요 지점에는 비가 왔다 말이죠. 그럼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벌써 일은 마무리 된 거예요. 일은. 다 이루어진 거예요. 우리는 그 결과만 확인할 뿐입니다. 동시에 내가 그 결과물이기도 하고. 결과를 확인한다는 조건하에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 결과물이 되는 거예요.
13절 봅시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제 여러분 강의 이해하십니까. 자기에 대해서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앞으로 십일조 잘하겠습니다. 말도 안한다니까요. 인간들이 뭘 잘못을 알아야 고치지 않습니까? 이리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이게 선악체계에요. 생명나무, 선악체계 둘 다 알아야 둘 다 아는게 되지, 생명나무 모르는데 선악만 안다고 선악을 안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질문이 나오도록 유도한 거죠. 제가 뭐가 잘못 됐습니까? 14절,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라는 말을 그들이 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 “니가 이런 소리 했잖아.” 라고 그들이 하는 소리를 주께서 14절, 15절 해놓은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을 믿은 거예요?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한 겁니까? 평소에.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잘 사귀어서 어떻게 해보겠다고 애쓴거죠. 하나님께 애를 쓴 거죠.
그럼 오늘 강의에 의하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모르고 있는 게 뭐가 모르고 있는 겁니까? 자기보다 앞서 있었던, 자기가 몰랐던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그들은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하나의 사건. 그 사건이 나중에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드디어 4장에 보면 나옵니다. 4장1절에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사건이 나와요.
그래서 이 말라기의 전체 내용은 전체 내용을 볼 때에 이스라엘이 이미 그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 없습니다. 없고 하나의 말씀공동체라고 그게 남아있었어요. 이 말은 나라는 없는데 끝까지 그들은 율법이 있으니까 이 율법에 기대를 걸어보자 하는 집단이 있었던 거예요. 나라는 이미 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그들의 소원대로 그들의 소망대로 율법이 그들의 소원대로 이루어집니까? 아니지요. 깔끔하게 그 어떤 경우라도 율법가지고 어떻게 해보겠다. 또는 율법에서 우리가 잘해보겠다는 모든 시도를 깔끔하게 전부 다 끝내 주십니다.
끝내주신다면 그러면 이 구약성경은 모든 게 파탄나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하실텐데 여기4장 미리 한 번 보겠습니다. 4장5절 미리 한 번 봅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그 다음에 무슨 날입니까? 크고 두려운 날.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누굴 보낸다? 선지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니까 한 번 보세요. 말라기하면서 십일조 하라는 말이야. 나를 시험해봐라. 십일조하면 창고에 넉넉하게 해줄것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십일조하는 백성을 약속했습니까? 엘리야가 온다는 것을 약속했어요? 엘리야가 온다는 것을 약속한 거예요.
십일조에 대해서는 지난번 할 때 멜기세덱과 관련시켜서 제가 설명했지요. 십일조는 맏물과 관련되어있다고 제가 언급했었습니다. 맏물. 어느 설교인가 맏물은 희생, 목부분이 희생이 날아가는 거예요. 어린양과 목숨이 교체되는 자만이 맏물이 되지. 유월절에 맏이만 다루기 때문에.
그래서 이 말라기 율법의 특징은 하나님의 예언가지고 율법이 인간을 끝까지 인간의 마지막 남아있는 남은자마저도 깨끗하게 소제해가지고 없애버리는 그 정당성을 율법안에 들어있다. 그 언급을 하면서 거기에서 그들이 멸망했을 때 하늘의 준비된 엘리야를 보낸다.
그러면 지난 수요일날 했던 스룹바벨과 똑같은 취지지요. 멸망하고 난 뒤에 그 다음 멸망의 정당성, 멸망이 확실히 했을 때 누구의 가치 영광이 두드러집니까? 엘리야. 엘리야를 기다리는 심정이 어떤 심정이냐, 우리는 망했어! 라는 마음을 가지고 엘리야를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그런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30713b말3장11절(율법 돔)-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서 인생이란 해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해답을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자꾸 해답을 가지고 해결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충돌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하철의 나름대로 해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쪽에서 해답을 갖고 있으면 되지 굳이 내가 해답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알고 있는 것을 나도 같이 알아버리면 내가 점선이 아니고 실선이 되어버려요. 실선이 되어가지고 이 실선을 더욱더 성경공부 많이 해가지고 확실히 알게 되면 그 아는 것이 나를 지켜주지 않겠느냐,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흔적이 예수님의 흔적이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 자신의 어떤 구멍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 방비한 게 되어버립니다. 이런 생각들이 이미 바리새인들이 이미 그걸 굳히고 있었던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이 말라기를 몰랐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과도할 정도로 오직 하나님 위주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구지요? 바울이지요. 바울이 말라기3장에 나오는 우리가 언제 하나님에게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는 이런 시건방진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말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라기 위반되지 않기 위해서 선배들이 잘못된 것을 우리는 반대로 해서 바르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애를 썼습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해서 열심히 했던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이 말라기를 보고 구약을 보고 바리새인을 보시면 그들이 얼마나 철저에 철저를 기했나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약간은 이해되실 겁니다. 바리새인하고 세리하고 있을 때에 바리새인이 저 세리하고 같이 아니했다고 하는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이 근원적으로 한 가지 결정적으로 모르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밟는 거예요. 밟는 것.
오늘 강의의 제목을 이걸로 한 번 정해봤어요. 밟는 것.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숲속의 길은 어떻게 길이 생기느냐 하면 누가 거기를 미리 밟아줘야 돼요. 밟고 밟은데 밟고, 또 밟고. 밟은데 또 밟고. 밟는다는 것은 창세기 3장15절에 나옵니다. 잘 아시는 말씀인데,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했지요. 여기는 밟는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요 원칙에 준해서 시편110편에 보면 밟는다는 쪽의 이야기가 시편에 많이 나와요. 예를 들어서 시편91편13절에 봅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밟는 게 나오잖아요. 보세요.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른다. 되어있지요. 이사야63장6절,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그 다음에 뭐예요? 만민을 밟을 것이며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한다. 밟는다는 것은 위치상 위에 있는 분이 아래 쪽을 밟는 거예요.
그 다음에도 시편44편5절도 나오고 죽 나오는데, 욥기40장12절도 나오고 하는데. 그거 다 생략하고요. 시편110편 봅시다. 성경을 자꾸 찾아보자고하면서 제가 좀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성경 찾아보는 게 얼마나 귀찮고 짜증날 일이겠는가. 함부로 성경을 찾읍시다 말을 안하고 싶은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시편110편1절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그 다음에 뭡니까? 네 뭐가 된다? 발판이 되기까지. 얼마나 밟았으면 발판이 돼요. 발판이 되기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있으라. 오른편에 앉아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대리통치를 말하는 거예요. 섭정이라 하지요. 대리통치를 말하는 겁니다.
옛날에 임금들을 세자할 때 오른편에 딱 둬요. 오른 팔에 있다는 말은 자기는 뭐냐 하면 여름에 시원한 천 있잖아요. 빗살무늬로 해서 대나무 발로 해놓고는 안보이지요. 실루엣만 나오고 눈에 보이는 것은 어린세자 딱 내세우고. 모든 능력은 그에게 일임하고.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은 숨어계신 하나님이지만, 나타난 하나님은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과 함께 나타난 정도가 아니에요. 주의 이름으로 동행한다. 동행. 왜 동행하느냐, 밟는 작업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동행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누굴 밟았느냐 하면, 이방민족을 밟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두 번째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말라기에서도 끝까지 이스라엘을 밟아버리는데요. 왜 이스라엘을 밟게 되었느냐, 그 내력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제가 요 한 40, 50분동안 언급을 죽 해드릴게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밟게 되었는지.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야~ 이런 이야기, 하나 하나 안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안 다치고 넘어갑니다. 주의 이름이 동행한다 했잖아요. 그럼 주의 이름이 동행할 때, 동행하는 그 구체적인 모습이 뭐냐 하면, 제사에요. 하나 하나 안 찾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안다 치고 넘어가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있는 곳에 제단이 있는 곳에 머물러요. 주의 이름이 있다, 없다, 뭐로 아느냐, 주의 제단에 있는, 제단에서 드린 하나님의 희생물을 받으시면 있는 거고, 안 받으면 없는 거예요.
모세가 성막 지을 때에 사람들이 겁이 나서 성막에 못 들어갔어요. 왜냐하면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가지고 모세와 만나기 때문에 너무 너무 무서운 거예요. 접근을 못한 겁니다. 그 정도로 무서운 거예요. 그럼 그 다음날도 영광 나타났습니까? 아닙니다. 아까 첫 번째 강의한 내용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소나기가 왔어요. 하지만, 그 때 왔을 때 소나기 왔습니까? 소나기 안 왔어요. 소나기 떨어진 흔적만 있지요. 흔적만 있지만 뭘 알수 있다? 왔구나! 모든 것이 게임 끝났구나! 십자가? 끝났네! 십자가로 다 이루었어요. 다 끝났어요.
주님이 주님되기 위해서 이 사건 일으켰네. 끝난 거예요. 그 발견하기 전까지는요, 하나님이여, 인생 의미가 뭡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나는 마지막에 구원되려 하면 어떻게 해야, 무슨 일을 해야 구원됩니까? 온갖 자기에 관해서 온갖 일이 있다가 결국 사건 터지고 나니까 니는 내 증인되면 되는 거야. 끝났어. 이미 주께서 주를 위해서 했다는, 끝났다는 사실을 증거 되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점선, 또는 흔적, 또는 나를 뽑아서 주께서 데려가고 남아있는 육신이라는 이 빈 구멍,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다 끝낸 걸 우리가 채우면 안 되지요. 갑자기 또 입이 근질 근질 하여튼 못 말려.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하나. 채우지 마! 채우지 마! 아무것도 채우지 말고 다 걷어내야 돼요. 의미 없다. 의미 없어. 의미 없어. 뭘 채워요? 그래야 나한테 의미가 있지. 너의 의미조차 빼나가야 돼! 우리의 의미 있으면 안돼요. 주님께 의미 있으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악마를 이길 재주도 없고 이긴 적도 없기 때문에.
일단 크게 써야 돼.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어제부로 여러분이 죽었다 칩시다. 세상도 갑자기 안 오던 비가 오고합니까. 혹시 이 비가 많이 오는 게 혹시 누가 돌아가셔가지고 애도의 비인가요? 그런 거 없지요. 우리 하나 죽으면 죽은 나 없어요. 장마비는 그냥 쏟아지고 있는 거예요. 죽음과 관계없이. 남 죽음과 관계없이 쏟아지는 것과 같이 내 죽음과 관계없이 쏟아져요. 우리의 사랑이 깨어져도 태양은 빛나고 있고, 파도는 파도를 칩니다. 옛날 60년대에 그런 팝송 가사가 있어요. 왜 내 사랑 깨졌는데 태양은 빛나느냐,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왜 끼어들었어요. 왜 끼어들었는지 모르겠지요. 그럼 빼면 알 수 있어요. 내가 끼어들었다가 내가 죽어 없어지면, 아! 내가 별 볼일 없는구나! 이 정도는 아니고요. 내가 빌 볼일 없는. 정말 아무 의미없이 이 땅에 와서 의미 없이 가는 겁니다. 자꾸 진리, 의미를 찾지 마세요. 진리 알아서 뭐하는데? 찾지 마세요. 괜히 고민하고 걱정, 왜 그런 쓸데없는 고민, 걱정을 왜 합니까? 내 자체가 의미가 없는데.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진리 없습니다. 진리 없는데 길을 내요. 주님은 이명박 전무에요. 새벽4시부터 해가지고 경부고속도로 뚫어요. 정주영이랑 같이 현대건설에서.
길이 없는데 뚫어버려요. 그 길을 어떻게 했느냐 밟아요. 악마를 밟으면서 길이 되는 겁니다. 마귀를 밟으면서. 주께서 율법을 준 것은 시내산에서 길을 내기 위해서 온 거예요. 길을 내면서 이명박 정부같은 그런 역할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삼았던 거예요. 그래서 이명박 전무가 앞에 나가면, “여기는 뭐 200년 동안 우리 집안의 귀한 그런 제사지내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는 길을 비켜가야 된다. 이건 500년 묵은 소나무이기 때문에 이건 우리 영험한 소나무이기 때문에 비켜가야 된다. 이명박한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냥 밀어! 그냥 쭉 밀어! 이 길이고 뭐고 그냥 쫙 밀어버려. 쫙 밀어버려. 그냥 밀어버립니다. 의미 없어요.
하나님, 주의 율법이 나한테 의미가 뭡니까? 그냥 밀어버려. 율법에는 나의 의미없어. 쫙 밀어버려요. 제사법을 통해서 주의 이름이 임했습니다. 이름이 임했어요. 피곤하시더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구약성경 다 뚫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여기에 제단이 있고요. 여기 제사장이 있고요. 절기가 마련되어있습니다. 절기는 제가 수요설교에서 했습니다. 출애굽기2장, 3장 17절 모든 남자는 1년에 3번씩 제단있는 곳에 와야 돼요. 절기 있는 곳에.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제단에 언약궤가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밟아서 길을 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누가 하느냐, 주의 이름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 이렇게 할 때 주의 이름이 누구를 앞장세우는가, 이스라엘을 앞장세워요. 그러니 이스라엘하고 누구하고 붙는가, 주의 이름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인다고요. 이스라엘도 주의 이름을 못 봐요. 보면 죽기 때문에 죽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제단에 제사법이 있는 겁니다. 1년에 대제사장만 들어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못 봐요. 그 제사장도 들어가면 하나님 못 만나요. 거기에 그냥 천사만 있고, 그냥 언약궤만 있을 뿐이에요. 희생의 소의 피만 볼 뿐이에요. 못 봐요. 제사장도.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제사장이 함부로 까불다가는 죽는다는 사실을요. 제단의 불 말고, 엉뚱한 다른 불을 해가지고 피우고, 향도 피우면 그들이 성소안에서 죽어요. 죽인다가 이게 흔적이라니까요. 주의 이름이 계신 증거가 뭐냐, 죽인다. 에요. 죽이자. 주기자 기자.
사람이 ”내 의미는 뭡니까?“ ”내 니 죽여버린다.“ 이게 의미에요. 의미를 찾으니까 죽여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의미 찾기 전에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아까 했지요.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것은 병원에서 하는 거고, 이미 죽은 자를 죽은 자로 확인하는 거예요. 죽은 자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이건 생명나무와 같이 엮이게 되어있어요. 선악과밖에 못 먹잖아요. 그런데 죽었다가 살아나야 생명이거든요. 희생제물.
희생제물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이스라엘이 승리해요. 도대체 그 에너지 어디서 나왔느냐, 그게 오른손의 에너지. 그 에너지의 기능은 마귀를 밟는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밟는 능력이 이스라엘의 엔진부위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래서 공항의 노동자가 어디에 빨려들었습니까? 엔진 부위에 빨려들어갔지요. 오늘날 성도는 십자가 엔진에 확 빨려들어간 거예요. 우리의 모든 일상의 상황은 하나님의 십자가에 빨려들어간 남겨놓은 우리의 소지품이라든지, 우리의 육신이라든지, 그런 것들. 나중에 죽으면 화장터에서 불로 태우는 그런 것들을 우리는 지금 지니고 있는 거예요. 명품가방 너무 많이 사놓지 마세요. 후손들 다 갖다 버립니다. 재수 없다고. 그렇게 엄마 사랑한다고 했다가 재수 없다고. 살아있는 엄마는 사랑한다고, 죽은 엄마는 재수 없다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실은 니 빼고 다 재수 없어. 니 빼놓고는 다 재수 없는 거예요.
이용가치가 있으면 재수있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다 재수 없는 게 돼요. 철저하게 인간은 이기주의거든요. 이 세가지 절기로 주의 이름을 하는 거예요. 절기에게 오는 겁니다. 수요일에 했잖아요. 율법을 전달해서 온 국가가 온 나라 전체가 율법의 지배하에 있는 것. 이게 뭐냐하면 제가 지어낸 말인데 ‘율법 돔’. 율법 돔.
오늘 동대구역에 오다가 하나의 공예품인가 이름을 적어놨는데 그 이름이 너무 생소해서 적어봤어요. 병에 용액을 집어넣고 생화를 넣어서 그걸 굳어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용기 안에 그릇안에 용액을 집어넣어서 생화를 집어넣으니까 늘 살아 활짝 피어있고 이렇게 이쁜 걸 파는 겁니다. 장식품이에요. 용어가 하바리움. 율법이라는 용액을 집어넣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꼼짝마라 된 거예요. 꼼짝마라. 그걸 저는 뭐라고 했어요? 율법돔이에요. 돔으로 막아놓은 거예요.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방어하는 그런 방어체제처럼 돔으로 꽉 찬 거예요. 만화영화 보면 나오잖아요. 오면 번쩍 번쩍 막 튕겨져나가는 거예요.
돔이기 때문에 여기서 마귀의 에너지가 오게 되면 여기서는 율법의 돔이 막 수비가 되지요. 뭐가 생기겠습니까? 방전이 생기지요. 방전. 비올 때 마이너스 전하와 플러스 전하 반대극이 뇌락이 치고 뇌성이 울리고 하잖아요. 벼락이 치잖아요. 음전자 양전자 부딪치면서. 율법이 갖고 있는 것과 마귀의 경계선을 유지하면서 드디어 마귀가 이스라엘을 가는 곳마다 마귀가 밟히게 되고 그 밟히는 곳이 길을 냅니다. 그 길이 어디까지냐, 그게 약속의 땅까지에요. 약속의 땅까지.
약속의 땅에 누가 계셔야 할 곳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있을 곳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있을 곳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은요,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에 간다고 하면 안돼요. 살아 남아있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해요. 왜냐하면 홍해 건너와서 심지어 모세도 못 들어갔어요. 그들이 죽었으니까. 그들이 광야에서 40년동안 내려온 사람 다 죽었잖아요. 그렇지요. 다 죽었지요. 홍해는 건너왔는데 광야에서 다 죽어버렸어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위주로 아니고 율법위주였다. 말씀 위주였다.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탈락시키겠다. 적용해버린다. 왜냐, 약속의 땅에는 무슨 세계? 율법이 완성되는 세계가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언약이 무슨 언약이겠습니까? 모세언약이었어요. 율법언약이었어요. 다윗언약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새언약없어요. 율법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는 세계입니다. 율법대로 살게 되면 이건 복을 받아서 이방민족에게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니가 나가서 싸우면 적들은 율법이 없는 적들은 물러가게 되어있다. 신명기26장에 죽 나옵니다. 율법대로 살면 얻을 수 있는 복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이 말이지요.
그리고 이런 약속이에요. 니가 약속의 땅에서 니가 잘먹고 잘살고 오래살 것이다. 이리 된 겁니다. 그게 모세언약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제시할 수 있는 게 그거에요. 약속의 땅에서 잘먹고, 오래살고, 잘 사는 것. 아까 말라기3장에 11절 다시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 이게 뭐가 작동한다? 율법돔이 작용하는 거예요. 돔 있지요. 장충체육관 같은. 야구장처럼. 지구를 덮어버리는 거예요. 완전히 덮어버리는 거예요. 완전히 덮어가지고 그 세계는 바깥에서는 완전 특수한 세계로 만들어버리는 그 계획을 하나님께서 하신 거예요.
그 계획에 통치는 주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겁니다. 마귀가 있는 이 세상에 주의 이름이 침범해가지고 주의 이름에 의해서 통치가 가능한 새로운 공간을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조건은 뭐냐, 완전한 율법으로 다 성취되는 공간. 그거였습니다.
성경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주의 이름이 했을 때, 약속의 땅이 제대로 된다 하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주의 이름으로 그 약속의 땅에 있던 토착민들 다 내보내요. 그 일의 전쟁을 누가 했느냐, 다윗이 했어요. 다윗이 해가지고 다윗이 전쟁을 하면서 느낀 것이 뭐냐 하면 다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이 했다는 것을 다 알고 이곳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이 같이 동행하는 특이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이곳에서 주의 이름을 영원히 모시겠다고 주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다윗쪽에서 제시한 인간쪽에서 제시한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연히 안 받지요. 언약은 반드시 하나님쪽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것이지 인간이 아무리 좋은 마음이라도 주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인간에게 안 받아요. 친히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도행전17장.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그럼 인간은 왜 깨지느냐, 준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깨지는 거예요. 니 안 줘서 깨지는 게 아니고, 준 것을 왜 그대로 못 가지고 있느냐고, 율법은 주는 거예요. 십일조는 하는 게 아니고 십일조가 너희 속에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십일조의 마음 자세가.
그래서 다윗이 한다고 하니까 안된다. 하고 나온 게 뭐냐, 다윗언약이 나와요. 다윗언약이 뭐냐 하면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다윗언약이란 먼저 인간부터 먼저 운을 떼게 만들어놓고 운을 뗀 인간을 거부하는 식으로 언약의 내용이 채워집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겠습니다. 다윗 쪽에서 운을 뗐지요. 기다렸다는 듯이 나 니 성전 안 받는다. 이게 언약의 내용이에요. 내용이고 그 다음 뭐냐, 니가 만들지 않고, 내 성전은 내가 친히 만든다. 가 언약 내용입니다. 친히 만든다.
만드는데 그럼 내가 안 만드니까 내 아들 솔로몬이 만들면 되지않겠습니까. 다윗이 그런 이야기를 해서 모든 필요한 건축자재를 다 다윗이 준비했어요. 솔로몬도 좀 했지만. 모든 재료는 전부 다 자금부터 해가지고 다윗이 다 했어요. 저쪽 나라를 치고 전리품이 있잖아요. 그 전리품은 율법에 의하면 누가 승리케 했습니까? 다윗이 승리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승리했기 때문에 전리품은 어디다 보관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창고에다가 보관을 해둬야 돼요. 그게 사실은 아까 한 십일조 그 이야기에요.
주님의 창고, 십일조를 내고 창고를 채우라는 것은 니가 여기에 지금 있는 게 니 덕으로 농사짓고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말라기로 끝나면서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야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조건을 걸었어요. 내 율법과 내 모든 모세 율법을 이루는 그 사람이 왕이 된다는 조건하에 내가 성전을 받아준다. 먼저 니 후손이 율법대로 온전히 지키는 자가 왕이 될 때 그게 바로 내가 너한테 거하는 성전의 구조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고 성전건물보다 더 먼저되는 조건을 보는 거예요. 율법대로 바르게 사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조건. 조건이 두 개지요. 하나는 뭐냐 하면 다윗의 혈통. 두 번째는 모든 모세율법을 다 지키는 왕. 요 두 가지 조건에 있으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이런 자의 가문 그 혈통이 하나님의 승리되는 겁니다. 사무엘하7장14절.
그런데 솔로몬 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었어요. 7년6개월동안 했어요. 정치로 한 것은 7년으로 되어있고. 7년동안 다 지었습니다. 완공은 13년 동안 짓고. 지어놓고 그 성전을 지었을 때에 하나님이 성전에 영광중에 나타났어요. 영광중에. 하나님이 성전 구조가 맘에 들어서 왔느냐, 아니에요. 뭐냐 하면 언약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걸 놓치면 안돼요. 왜 언약궤 있는 곳에 오시는가, 언약궤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 자기백성과 만나는 지점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그렇다면 언약궤 불타버리면 어떻게 된다? 안 만나지요. 언약궤가 불타면. 그러니 모세언약이 뭐냐하면 모세언약이 모세 때 준 언약이 언약궤 있으면 함께 있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언약은 언약궤에 있는 십계명, 십계명대로 다 지키는 왕이 있으면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게. 이게 다윗언약이에요.
그럼 새언약은 이제는 뭐 할게가 없어요. 너희 인간은 끝났어요. 하나님의 앞에 있는 모세언약 대로 그 말씀대로 행하실 분을 지상에서 아담의 계통이 오는 게 아니고 하늘에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이 말씀이 나를 위하여 두루마리 책에 있는 나를 위해서 내가 왔나이다. 하는 그 분이 모든 언약을 이룹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골치 아픈데. 이루면서 이스라엘에 뭘 남기느냐 하면, 선지자를 남겨요. 선지자를. 어제 설교했지요. 모든 것은 진동하나 선지자의 말은 진동할 수 없지요. 선지자를 보냅니다. 선지자를 보낸다는 말은 나라가 이제는 끝났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나라 있다고 나라 옹호하고, 율법있다고 율법 옹호하는 게 아니에요. 율법대로 제대로 사는 왕의 등장되지 아니하면 모든 것은 다 소실되는 거예요. 다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왕, 북쪽 왕, 남쪽왕들 중에서 행여 특히 남쪽 왕들 행여 바르게 사는 경우있잖아요. 율법대로. 바르게 살 때는 하나님께서 인심을, 인심아니지요. 천심이지요. 천심을 듬뿍 줘가지고 놀랍게 승리케 합니다. 저쪽에서 백만대군왔는데 이쪽은 찬송가 부르니까 이겨버리고. 이런 일이 벌어져요. 또 기도하니까 회개하니까 이기고 이런 일이 있어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원래 원하는 조건이 너희들의 생존이 아니고 생계도 아니고 거기서 하나님의 언약, 율법, 하나님의 다윗언약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겁니다. 솔로몬 이후에 예루살렘 있잖아요. 이 예루살렘에서 누구를 수입하느냐 하면, 벧니게 공주가 와요. 베니키아. 베니키아는 지중해에 해변가에 무역을 많이 해서 돈이 많은 거예요. 무역해서 이문 남았기 때문에 농사 짓는 것보다 이문이 훨씬 남는 거예요.
북한에도 달라 만지는 사람이 누굽니까? 중국의 무역하는 고위간부잖아요. 그 사람들은 골프치고 잘 살고 있는 거예요. 돈이 남으니까. 집에 피아노 들여놓고 애들이 피아노치고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 집에 혹시 애들이 피아노치거든 북한의 고위간부급이라 생각하세요.
무역하는 쪽에서 돈이 많아요. 예루살렘의 솔로몬이 이들과 거대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이들과 무역계약을 한 겁니다. 수출, 수입이 없으면 나라꼴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되지요. 투자 없으면 나라 안되지요. 농사 지어서 나라 되려고 하다가 하루 이틀에 망한 거 아시지요. 물가가170%에요. 원래 물가가 170%에요.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고. 포르투칼도 마찬가지에요. 관광이런 거 아니면 안되는 거예요. 무역해야 되고. 싱카폴 같은 나라는 우리나라 소득의 2배입니다. 무역만 해가지고. 이런 나라들과 무역관계를 해야 외국에서 수입나오고 수출할 수 있는 모든 통로가 되겠지요. 좋게, 좋게 이 나라와 하기 위해서 혼인정책을 하는 거예요. 혼인정책. 공주들을 데려오는 거예요. 공주.
그 공주가 올 때 무엇을 들고 오겠습니까. 개라도 들고 오겠지요. 개만 온 게 아니고 친정 종교가 들어온 거예요. 친정에. 자기 남편 만날 때 그냥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내가 평생동안 잘되기 위해서 믿고 있던 신을 갖고 들어와요. 이것이 베니게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아라비아 온 천지에 나라에 솔로몬이 그런 정책을 벌린 겁니다.
솔로몬의 이런 정책을 바로 왕자들이 그걸 눈여겨 봤지요. ‘아, 나라는 저리 해야 나라꼴이 되는구나!’ 자, 그런데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생명가는 길은 어떻게 된다? 밟아야 돼요. 마귀를 밟아야 돼요. 마귀를 밟아야 되는데 사람들은 마귀와 싸울 생각은 안하고 내 생존과 싸울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면서 그걸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율법의 돔도 날아가버렸어요. 근원적으로 내가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내가 사는 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솔로몬 때에 내가 안 망하게 하는 이유가 다윗과 맺은 약속이 있다는 겁니다. 다윗과 맺은 약속. 다윗과 맺은 약속은 다윗의 밑장 빼기처럼. 제가 울산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구조사. 다윗이 아니고 다윗은 유일하게 들어가야 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에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주의 이름이 어떤식으로 희생자의 모습으로 오는가를 만날 때 비로소 다윗은 다윗언약의 본내용이 채워지는 거예요.
내 잘되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니고 나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왔을 때 그게 언약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는 말은 니가 살게 하는 것은 내 살과 피고, 니가 관심두고 추구해야 되고 최종적인 관심 둬야 될 것은 니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것은 마지막은 예수님의 피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니가 인정된다면 관심있다면 이 세상에 니 인생에서 남은 고민거리는 다 날아가버린 거예요. 더 이상 고민한다는 자체가 이상해요. 주님께서 피로서 생명을 줬는데 남아있는 고민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을 리가 없지요. 인간의 모든 고민은 뭡니까? 지금보다 좀더 더, 더, 더. 이거지요.
그런데 주의 십자가는 피는 뭐냐 하면, 내가 밟을 거 다 밟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길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 밟을 때 주께서 우리도 밟아줬어요. 쑤그리 해가지고 우리를 밟아버리는 거예요. 우리를 밟으니까 내가 고뜩 섰기 때문에 보이지 않던 주님이 다 이루심이 비로소 가슴에 환하게 비출 때 구름 사이에 갑자기 햇빛이 나타나 비출 때 내가 검은 구름인 것을 벌써 발견되는 거예요. 고민거리도 아닌 걸 고민했고, 뭐 염려할 것도 아닌 걸 염려했어요. 암4기가 그게 염려됩니까. 그게. 위암말기가 그게 염려거리에요? 사채업자가 와가지고 신체각서포기 쓰라하는 게 그게 염려거리가 됩니까? 경상도 말로 이리하면 돼요. 사채업자가 오거든. 가가라. 가가 두 개에다가 뒤에 라를 붙이면 돼요. 다 가져 가버려 그런 뜻이에요. 가져 가! 가져 가! 이러면 되는 거예요.
전세사기해가지고 이천만원 모은 거 다 날렸다. 그게 고민거리가 됩니까? 나와 무슨 관계있는데? 아무 관계없는데. 이스라엘은 고민거리였던 거예요. 이스라엘은. 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거기에 바로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마귀가 이스라엘을 노린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걸 기다렸지요. 와! 와! 와! 들어와! 들어와! 악마는 이스라엘을 물려고 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먹히도록 만든 거예요. 먹히도록.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사기7장 세 번째 하는데요. 이스라엘 무기가 뭐냐 하면 항아리, 햇불, 그 다음에 나팔이지요. 햇불은 밤에 필요하지요. 항아리는 깨어져야 돼요. 항아리 깨어지고 햇불내거든요. 그러니까 이 때 깰 때 동무들이 서로 썩었던 이유가 그들이 뭐냐, 꿈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꿈속에. 꿈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 꿈이 그들속에 현실인 줄 알고 겁이 나서 동무들끼리 서로 찌른 거예요.
이 말은 이스라엘이 같은 꿈속에 사는 이스라엘이 이걸 이길 수 있는 재주는 없다는 겁니다. 꿈을 확 깨는 게 뭡니까? 빰빰빠 나팔 불어버리는 거죠. 이 세상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주의 세계라는 것을 아무 문제도 없는 이스라엘을 앞장세워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꿈에 무서운 그 꿈이 실은 주께서 꾸게 하신 진짜 현실인 것을 알려주신 전쟁. 이게 미디안전쟁이에요. 우리 자신이 깨어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먼저 깨어졌기 때문에 승리하고, 이쪽은 안 깨졌기 때문에 나중에 완전히 패배하는 겁니다. 이게 우상 섬기는 미디안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깹니다. 이스라엘이 깨지면서 당분간은 언약궤가 있는 성전은 당분간 보호하지요. 깨어지면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갈라져버립니다. 솔로몬 이후에 갈라집니다. 갈라지면서 자, 유다나라와 이스라엘 나라가 둘 다 똑같은 나라인데 유다나라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여기에 뭐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 언약궤가 있습니다.
그 유다나라가 언제 멸망합니까? 성전이 불타고, 언약궤가 불타면 유다나라 없어지는 거예요. 아직도 이스라엘 역사가 유유한 악마가 역사적으로 유다나라를 삼키는 그 때까지만 이스라엘은 버티고 있어야 돼요. 유유해야 돼요. 왜냐하면 아직까지 악마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악마는 역사의 주인공이에요. 이 세상 신입니다. 세상신이 하나로 이스라엘이고 뭐고 다 하나의 신으로 통합될 때까지 유다나라는 버텨주는 거예요. BC586년. 이스라엘은 BC722년 이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관용어처럼 쓰는 게 있어요. 그들이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았다 하는 거예요.
여로보암의 죄가 뭐냐 하면 남쪽에 성전이 있으니까 율법에 보면 모든 남자들이 1년에 3차례씩 성전에 가야되니까 자꾸 월경해서 넘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넘어오지 말고 북쪽의 벧엘에다가 당에다가 그 당시에 농경시대에 여호와의 이름의 암소 상을 만든 거예요. 여호와 이름의 암소 상. 왜? 제단에는 율법만 있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이 율법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너무나 잘 알거든요. 문자는 싫고, 뭐는 좋다? 통통하니 강호동같이 통통하니 힘센 암소.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되는 저 불국사 옆에 무슨 암이 있습니까. 석굴암. 석굴암 부처상 한 번 보세요. 얼마나 먹어놨는지 얼굴이 통통해. 그 통통한 게 덕스럽고 귀는 관상으로 귀는 길어서 덕스럽고 인격이 풍미가 있고, 우아하고, 대자대비해서 모든 것을 받아줄 거 같은 품안에 받아줄 거 같은 그런 상이 석가모니상이에요. 십자가 달린 석가 봤습니까?
여로보암의 죄. 생존. 율법보다도 내 생존에 우선이 되는 죄. 그 세계. 남쪽도 마찬가지고 북쪽도 마찬가지인데. 둘 다 왜 먼저 북쪽부터 망했는가. 그 쪽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남쪽은 성전이 불타버렸어요. 불타니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 우리가 뭐 잘못됐구나! 율법해석 다시 하자.’ 해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전이고 뭐고, 백성이 다 날아간다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데 율법 돔을 지키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지요. 에스라. 느헤미야. 나옵니다.
열심히 지키려고 했어요. 누가? 지도자급이. 에스라, 느헤미야가. 그런데 밑에 있는 백서들이 먹혔겠어요? 안 먹혔겠어요? 먹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기에는 이 육신이 갖고 있는 생계문제가 에너지가 더 세기 때문에 그래요.
자,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뜻은 길을 내는 거예요. 밟아야 길을 내지요. 밟아야 여자의 후손이에요. 밟혀야 악마고. 악마가 노리는 것이 이스라엘이었거든요. 이스라엘이 마지막 남은 말라기에서 마지막 남은 그 여진 같은 것이 뭐냐, 여진이 뭐냐 하면, 율법대로 바르게 살자고 버텨나가는 공동체 있잖아요. 그것마저 마지막으로 주께서 드론 보내가지고 말라기라는 선지자 보내가지고 제대로 했냐? 십일조 했냐? 따집니다.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벌써 말라기는 선지자 내용 안에 들어있어요. 마지막 날에 끝났어. 너희들은 아무리 지킨다고 했지만, 결국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모르고, 속마음이 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얼마나 확인 작업에 들어갔겠어요. 율법 지키면 복받는다. 신명기에도 나오잖아요. 레위기에 나오지요. 지키면 복받는다고. 그런데 지켜보니까 복 받아요? 안 받아요? 안 받지요. 못 받지요. 왜? 율법을 지킬 분은 따로 오시기 때문에.
본인들은 몰라요. 안되니까 백성들부터 시위하고 나자빠지는 거예요. 나, 율법 못 지킨다. 그러니까 십일조가 올라올 리가 없지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누구? 지도층도 나도 모르겠다. 백성들 즈그들이 안 믿는데 뭐. 율법을 거부하는데 우리가 굳이 가르칠 필요가 뭐가 있냐. 우리도 밥먹고 살자. 요령껏. 율법가지고 협박 공갈해가지고 교인들에게 헌금하도록 해서 뜯어내서 살자. 이런 식으로 된 겁니다.
말라기는요, 마지막 잔재. 이스라엘의 마지막 잔재마저 깔끔하게 주께서 다 깨끗하게 물청소해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남아 있는 건 뭐냐, 엘리야. 엘리야 오는 것은 다음에. 9월 달에. 엘리야 9월 달에 온다는 뜻은 아니고요. 끝으로 요 마디 하겠습니다. 신약에 와서 거지와 나사로 이야기 나오지요.
과연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부자의 세계냐, 아니면 거지의 세계냐, 거지 나사로의 세계냐, 부자의 세계냐, 완전히 뒤바뀌게 되지요. 율법에 의해서 저주 받는 합류하지 않으면 너희가 예수님을 모른다. 이게 신약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성경이 실은 주께서 마귀를 밟기 위한 필요한 절차였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도 필연적으로 반드시 망해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태어나서 죽는 것도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주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인 것을 이제는 편하게 반기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