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30518a말3장2절(모두 한 통속)-이 근호 목사
오늘은 말라기3장1절부터 하겠습니다. 말라기는 구약성경 맨 마지막에 있지요. 구약 성경의 마지막. 구약성경의 마지막은 추가적인 율법은 없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마지막이에요. 추가적인 율법은 없다. 그런 뜻이 들어있어요. 율법을 주신 이유는 모든 인간을 나락으로 빠트리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다면 율법이 없는 이방나라나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이나 다같이 나락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나, 안 나오나 상관없이 인간은 그냥 추락하는 중이에요. 다만 이스라엘의 좋은 점은 뭐냐, 추락한 이유를 안다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들은 추락하면서 추락하는 이유를 몰라요. 내가 왜 피곤한지, 이가 왜 아픈지, 머리가 흰지, 왜 어깨가 아픈지 이유를 몰라요. 어깨 아픈 것은 결려서 힘줄이 탄력성을 잃어서 어깨가 아프다. 그럼 젊었을 때는 왜 이만한 일을 해도 안 아프냐, 그 때는 아직 신품이거지요. 고물이 아니고. 그럼 인간은 왜 내 몸이 점점 고물이 되어가는가, 이유를 몰라요.
그 고물의 끝은 어디인가, 그냥 무너지지요. 그게 나락이에요. 그냥 무너지기 위해서 인간은 태어난 겁니다. 이 점을 이스라엘이 알고 있으면 이스라엘은 행복해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에게는 참으로 행복한 순간입니다. 꿈과 희망을 여지없이 속 시원하게 포기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곧 나에 대해서 알았고 내게 속한 세상도 알았고, 그리고 더구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던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망치는 분.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 다 안 거죠. 나락으로 빠트렸다 했지만, 이걸 다른 표현으로 하게 되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막혀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막혀있습니다. 막혀있기 때문에 인간이에요. 통과할 수 있으면 그건 신이지 인간이 아니지요. 인간은 막혀있기 때문에 인간인 겁니다. 우리는 신으로 태어난 게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막혀있는 그러한 것에 갇혀있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대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기도하면서 악을 쓰는데 힘드니까, 아프니까 인간인 거예요. 힘드니까 인간인 겁니다. 왜 주제넘게 신이 되려고 하느냐 말이지요. 천사도 아닌 게 천사되려고 하지 마! 인간이니까 무너져야 되고, 망가져야 되고, 추락해야 되고. 이게 얼마나 지당한 일입니까. 괜히 헛바람 들면 안돼요. 헛바람~, 꽃바람, 헛바람 들면 안 돼요. 주제 파악을 해야지요. 막혀있습니다. 갇혀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묻지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문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질문 중에서 중요한 질문이 몇 가지 나와요. “하나님, 불쏘시개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그 질문.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거든요. 불쏘시개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한 질문 아닙니까. 거기에 대해서 아버지는 답변을 안 하지요. 왜 답변을 안 하느냐, 오늘 강의와 관련되어있습니다.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는 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성사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세계는 문이 없다. 문이 없다를 드러내기 위한 세계에요. 문이 이쪽에 있는데 못 간다가 아니라 문이 닫혀있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문이 없어요. 아예. 아예 문이 없어요. 어떤 괴기영화에 보게 되면 입 부분이 지워져 가지고 입이 아예 없는 괴물 형상이 나와요. 물론 괴기영화니까 그렇지요. 입이 아무것도 없어요. 음식을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어디 집어넣을 데가 없어요. 입이 없으니까. 입이 매끈하게 되었어요.
아무것도 문이 없다는 것. 문이 있는 자리와 문이 없는 자리가 차이가 없는 것. 단일 지평. 평평한 지평. 지평이라는 말 알지요. 그냥 넓은 대지 같은 것. 높낮이가 있더라도 위에서 보면 똑같아요. 그냥 대패로 밀은 거 같아. 똑같아요. 고층 건물, 낮은 건물, 2층 건물 우리 인간들 보기에는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아요. 아예 너와 나 사이에 일체 높이가 없어요. 높이 자체가 없어요. 똑같아요. 꼭 필름 같아요. 판 같아요. 판. 막 같은 그러한 세상에 인간은 거기에 그려진 무늬와 같습니다. 무늬.
무늬와 같은 존재에요. 무늬 같은 존재라고 썼지만, 성경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시편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그림자 같다. 이리 되어있어요. 그림자나 무늬나 그림자가 폭이 있어요? 없어요? 폭이 없어요. 그림자는 얼룩덜룩한 무늬만 이미지만 있는 거예요. 그걸 시편에서는 그걸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은 그냥 폭이 없는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타인들과 남들과 다를 바 없다. 똑같다. 그들이 모여서 단일지평을 갖추는데 그 지평은 뭐냐 하면 인간세계는 아예 문이 없어요.
문이 없다는 말은 천국을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천국을 언급하는 자체가 이단이에요. 인간세계는 천국이 해당 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어제 수요설교에서 했지만,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처음부터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말이지요. 문이 어디 있습니까?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내가 구원받을 통로는 어디 있습니까? 그 어디 있다가 아니라 우리가 태어난 것은 없다만 용납되는 세계에요. 없다만. 눈도 없고, 구원도 없고, 하나님도 물론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없다만 있다가 그냥 없다만 있다가 이미지로 있다가 이미지 날아가버리고.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도 다른 원상 복귀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인간이 없는데 자꾸 어떤 문이 있고 천국 가는 통로가 있을 거고, 성경에 보니 진리고, 길이고, 생명이고, 성경에 자꾸 나오니까 인간이 없음으로 있으면 되는데, 자꾸 있음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을 때 이 땅에 나타난 현상이 뭐냐 하면, 이게 눈물이에요. 눈물. 우는 겁니다. 우는 것.
1948년에 나온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도 소개가 된 이태리 영화입니다. 아주 오래된 영화인데. 제목은 <자전거 도둑> 2년동안 주인공 아저씨가 2년동안 실업자로 일거리가 없어가지고 고생하다가 드디어 일거리가 생겼어요. 그런데 그 일거리가 꼭 필요한 게 자전거였어요. 일거리 생기고, 자전거 생겨서 일해서 가장으로서의 자부심이 생긴 거예요. “아들아, 여보, 이제는 내 힘으로 이 가정을 건사할 수 있는 이런 자부심이 나는 스스로 자랑스럽다.” 가정에서는 전부다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했지요. 동의 안 할 수가 있습니까. 돈을 벌어야 살지. 동의했지요. 1948년도 영화니까 얼마나 살기 힘들었을 때에요. 그런데 그 자전거를 잃어버렸어요.
그 영화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자전거를 잃어버렸어요. 자전거를 잃어버리니까 조금 전까지 가장으로서의 자부심이 충만했던 그 사람이 자전거 상실하니까 도로 완전히 몰락하지요. 무너지지요. 나락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자전거 찾아드릴께요.” 해서 열심히 자전거를 찾아다녔어요. 열심히 자전거를 찾아다녔는데, 자전거를 못 찾았어요. 찾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아들의 눈에 띄는 아버지의 모습은 뭐냐, 자기는 자전거를 잃어버렸잖아요. 아버지가 몰래 남의 자전거를 훔치는 걸 볼 때에 아들이 거기서 뭘 흘리느냐 하면, 눈물을 흘려요. 우는 겁니다. 아들이 왜 울까요? 자전거 때문이 아닙니다. 존경했던 아버지의 자존감이, 자존감이 있다에서 없다로 무너질 때 그걸 아들은 눈물로 교체하는 겁니다.
눈물이 내가 울지 않으니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아들이 아버지가 자전거 도둑이 될 때에 그 때 고였던 자부심이 무너지면서 눈물로 전환되어서 나왔을 때에 나는 욕심이 없다고 여겼는데, 아~ 욕심으로 가득 찬 것이 바로 인간이며, 그 욕심은 있음이 내용으로 채워지면서 그것이 눈물로 전환된 거예요. 그러니까 고여있던 욕심이 밖으로 나오면 눈물이 되는 겁니다. 우는 겁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 속에 욕망이랑 있었다는 것을 어린아이가 젖 달라고 울 때부터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라기3장1절에 보면 누가 온다고 했어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사자를 보낸다 했지요.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보내시는 사람. 하늘나라에서 누가 와요. 누가 오게 되면 인간은 그전까지는 하늘나라에서 누가 오기 전까지는 인간은 뭘 느끼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닫혀있다. 갇혀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벗어날 그 어떤 것도 율법을 지키면 되지, 율법을 통과할 필요는 없다고 느낀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율법을 줬잖아요. 그러면 그 율법과 더불어 살면 그게 천국이고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율법을 뚫고 나가는 것은 그것은 구약이 아니고, 신약 성경에 나오는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율법을 뚫고 그 너머에 있는 세계가 천국이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줬기 때문에 굳이 뚫고 나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법 지키면 되고, 십계명 지키면 되고, 주의 말씀을 지키면 되지, 이걸 뚫고 어디를 가는데? 이리 나온다고요.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보여주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이게 이 세상인데, 이 세상에 인간들이 있으니까 율법이 있고, 인간이 있으니까 여기는 텅텅 비어있고, 율법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이게 하나님이 원하는 이상적인 세계라 생각했는데 위에서 하늘의 사자가 뚫고 오니까 여기서 무엇이 꽉 찼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자의 이동 경로를 통해서 밝혀집니다.
삼겹살있지요. 삼겹살이 겹이 껍데기가 몇 겹입니까? 세 겹. 세 개 있지요. 뚫고 들어오지요. 첫 번째 위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권력이고, 두 번째는 욕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삼겹살 같은 그 비계덩어리를 뚫고 오면서 인간이 맞닥뜨린 게 아니고 하나님의 사자가 맞닥뜨리면서 인간은 미쳐모르는데 어떤 두꺼운 벽이 인간을 덮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서 밝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서.
인간이 하나님 쪽에서 보낸 메시지 오기 전까지는 그걸 몰랐지요. 그냥 눈에 보이는 같은 인간들끼리 마음 맞추고 서로 돕고 동정하고, 배려하고 협조하면 얼추 사람답게 사는 거라고 여겼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뚫고 들어온다는 거예요. 뚫고 들어온다. 뚫고 들어오면서 여기서 발생된 것이 뭐냐, 벽의 내용이에요. 권력과 욕망이 벽으로 삼겹살처럼 꽉 있었던 거예요. 벽으로 오면서 인간은 뭐냐, ‘인간이란 보이지 않던 벽에서 떨어져 나간 자투리들.’ 벽에서 떨어져나간 자투리들. 두꺼운 벽이 있는데 벽 자체가 생산되면서 인간의 신체에 벽이 있는 이 하나님의 사자가 그러니까 예수님으로 보시면 돼요. 예수님.
예수님이 이 세상을 뚫고 나오면서 비로소 밝혀진 벽의 내용물이 비로서 하나님의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안 보이기 때문에 그런 존재도 몰랐던 어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벽이 있는데 삼겹살로 보면 좋아요. 두꺼운 벽이 있는데 그 벽을 하나님께서 위에서 오니까 그걸 뚫고 지나올 수밖에 없지요. 벽이 있으니까. 단단한 바리게이트가 있으니까 뚫고 지나오면서 나타났던 여러 가지의 사상들, 생각들, 사고방식 체계, 선악체계입니다. 그런 체계들의 부스러기가 인간 신체와 결합되면서 인간이 된 거예요.
위벽이 헐었다 하잖아요. 위벽이 세포로 되어가지고 정치하면서도 옛날 세포는 자꾸 떨어져나가잖아요. 위벽이 떨어져나가지요. 세포도 마찬가지로 떨어져나가지요. 위벽이 있는데 자투리가 떨어져 나가잖아요. 일종의 노폐물처럼 떨어져 나가요. 그 노폐물들이 뭐냐 하면 이 지상의 인간화 된 거예요. 인간들이. 독사의 새끼들. 그냥 뱀의 새끼들이에요. 그냥 자식들이에요. 사고방식이.
그래서 어떤 도인들이나 어떤 지혜로운 사람 누구한테 물어봐도 고만 고만한 것들이에요. 고만 고만한 것들. 선악체계의 고만 고만한 것들. 악마가 세상 신을 이건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야기니까요. 고린도후서4장에 나오고. 이 세상 신이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 인간들과 잘 소통이 된 이유가 평화롭게 잘 지내는 이유가 그 벽에서 나온 정신이기 때문에 친근할 수밖에 없지요. 친밀하지요. 그 벽에 그 자식들이니까. 그 사고방식의 자식들이니까.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부도지. 이 단어 여러분들이 거의 못 들었을 거예요. 부도지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천부경. 천부경 어디서 들어본 기억 나고. 이 천부경, 부도지 이건 천부경 같은 경우는 이건 뭐냐 하면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외경 같은 거. 떠도는 이야기. 한국 고대사에서 정역사로 인정 받지 못하고 떠도는 책. 천부경. 대순진리교 같은 데는 이건 완전 떠받들지요. 이 원본이 부도지라는 원본에서 나온 거예요. 신라시대 김시습이 지었다는. 지은 게 아니고 정리했던. 김시습 당시에 신라시대에 김시습 당시에 떠도는 슬라드를 모아놓은 게 부도지고 부도지에서 천부경 나와요.
이쪽 이야기가 이겁니다. 탑이 왜 사각형이냐, 절마다 있는 탑이 왜 사각형이냐, 사각형인데, 이 사각형이 만다라에요. 만다라. 만다라라는 것은 나름대로의 뭐가 있느냐 하면 그게 있어요. 창세기가 있어요. 한국식 창세기. 한국식으로서 천지를 창조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남자가 아니고 여자에요. 그게 마고라는 어머니에요. 마고라는 어머니는 영체기 때문에 인간에게 보이지 않아요. 그 마고계통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환웅. 그 다음 계통이 나온 게 흔히 유명한 단군. 한국식 창세기가 있어요. 거기에는 홍수이야기 나오고요. 선악과 따먹는 이야기 나오고 다 나와요. 제가 그 이야기를 다 할 필요 없고, 여기에 나오는 만다라 하는 이 우주를 이렇게 볼 때 이 중간에 중앙이 있는데 이게 천부당이라 해요. 천부당.
벌써 용어 자체 보세요. 고 물건 냄새 막 나잖아요. 인사동 이런 거 아니지만. 옛날 인사동에 가면 막 나오는 그런 용어들이지어요. 이게. 천부당이 뭐냐, 단을 짓는데 하늘로부터 연결되는 단. 일종의 뭐냐 하면, 성전이에요. 성전. 이 갇혀있는 이 세상에서 선악체제가 가동이 돼요. 작동이 돼요. 그럼 인간은 선악체계가지고 뭘 하느냐 하면 자기를 시험해요. 자기를 테스트한다고요. 어떤 테스트냐 하면 내가 어디까지 완벽하게 선할 수 있느냐를 테스트.
성경에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으로 되어 있잖아요. 인간은 이걸 고추 세워버려요. 선을 저 위에 두고, 악을 저 밑에 두는 겁니다. 선, 악을 아는 지식. 중간에 누가 있다? 인간들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인간들이. 인간들이 사는 방향은 정해져 있지요. 악을 버리고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는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면 되지요. 악을 버리고 선으로. 왜? 주님 주신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선악의 밧줄이니까요. 선악의 밧줄. 불교에 나오지요. 선악의 밧줄.
여러분들이 태능선수촌에 가면 레슬링 선수들이나 유도 선수들이 훈련받을 때 어떤 훈련을 하느냐 하면, 위에서 아래까지 밧줄 하나 가지고 윗통 벗고 올라가는 거 완력을 키우기 위해서 훈련하잖아요. 아래에서부터 저 위 선한 곳으로 가는 거 이게 교회에서 나오지요. 이 이론을 무슨 이론이라 합니까? 성화론. 완전히 교인들을 국가대표선수로 만들어요.
여기에 대한 교과서 같은 책이 뭐냐, 천로역정. 악을 버리고 선을 향하는데 역경도 많고 고난도 많지만, 나중에 기어이 하게 되면 뭐할 수 있느냐, 하늘나라 천장에다가 터치를 할 수 있다. 터치. 터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부단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문이 있다는 거예요. 문. 아~ 이게 중요한 거예요. 문이 있다.
구약 성경은 율법을 줬기 때문에 율법 지키면 된다는 식으로 사람들은 구약을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위로 가는 게 아니에요.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은 위에 있는 하늘나라가 아니고, 땅의 나라에요. 율법이 있는 곳이 천국이에요. 위로 갈 것도 없어요. 율법이 있는 곳이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율법 주고 못 지킨다 되니까 완전히 꼼짝없이 위에도 가지도 못하고 이미 온 율법도 못 지키고 그냥 죄에 갇힌 거예요. 바로 그거에요. 율법 준 이유가 바로 그거라고요.
죄에 갇혀있다고 신약에 나와 있지만, 제가 아까 설명할 때는 뭐냐 하면, 권력과 욕망에 갇혀있다고 제가 나누어서 이야기했지요. 권력은 인간 바깥에 있는 악마의 권력을 권력이고, 우리 내부에 있는 내부에 있는 악마의 권력을 욕망이라 하는 거예요. 욕망. 욕망이 아까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눈물. 다 잊어버렸지요. 우는 것. 안 울고 싶다고요. 어떤 사태가 일어나보세요. 욕심이 없다고요? 욕심도 없는데 왜 울어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욕심이 없는데 왜 눈물이 나요? 욕심 없는 것이 너무 서글퍼서. 그게 욕심이에요. 내 인생 내 것이 고장 난 것이 너무 서러워서. 내 것이라는 그 자체가 주님 앞에서는 이게 균등한 지평선에서는 니것 내것이 의미가 없어요. 왜? 높이가 없으니까. 하나의 이미지고 그림자니까요.
처음에 강의한 용어를 다시 되풀이합니다. 전체적으로 정리가 되어야 되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오신 이유는 불균일한 지형을 균일한 지평으로 만드는 거예요. 이 불균일은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선과 악의 높이로 세운 거예요. 마귀가 이렇게 밧줄해가지고 국가대표선수를 양성한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5장20절에 보면 나오지요.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 그러니까 이 밧줄에서 제일 고점, 높은 점에 있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부류가 누구라고요? 바리새인. 마태복음5장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바리새인은 그 당시에 자기 자신들을 천국 가는 국가대표로 간주한 거예요. 국가대표로. 우리나라의 가수의 국가대표는 박정현. 전혀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남자 가수는 김범수. 복음하고 아무 상관없는.
균질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 밧줄들을 가지고 여기 있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천한 계열과 자기 있는 최고 단계에 의에 계열을 구분했습니다. 구분했는데, 예수님 당시 구분을 몇 단계 구분했느냐 하면, 계급을 7단계로 나눴어요. 7단계 나눈 이유가 성전의 구조와 관련되어있어요. 성전에 가까이 할 수 있는 부류와 그리고 성전에 가까이 하지 못할 부류. 성전 뜰 바깥에 있는 부류까지 7단계가 있는데 성전에 가까이 못할 부류를 가지고 이방인이다. 이방인. 이방인이고 이방인보다 조금은 낫다 하는 것이 세리와 창기, 강도. 이런 사람들.
그보다 좀 더 가까이 가게 되면 거기에 여자들. 여성의 뜰이 있어요. 성전에는. 최고 제일 핵심되는 본부까지 접근이 제일 핵심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당시에 제사장인데 그게 바로 사두개인들, 사두개인보다 약간 못미치지만 그들은 누구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다루는 사람. 율법을 해석해서 남에게 가르치는 사람. 가르칠 때는 일년에 3번씩 한 장소에 모여서 세미나들어야 돼요. 그것이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일년에 세 번씩 남자들은 자기의 몸을 특수한 공간에 나타나서 자기의 몸을 보여라. 그 특수한 공간이 뭐냐,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
그런데 지금 성전이 없잖아요. 말라기 때 성전이 불타서 없어요. 어제 수요설교에서 어려운 대목이 바로 그 대목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대목을 오늘 제가 강의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수준이 되니까. 수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전해봐야 알겠지만.
시간 안에 있는 공간이 70년을 안식하는 땅. 땅이 무슨 땅이냐, 약속의 땅이에요. 처음의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성소가 있고, 성전이 있는 곳이 약속의 땅이잖아요. 그 뒤에는 약속의 땅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70년을 쉬는 땅이 약속의 땅이 되는 거예요. 70년을 쉰다는 것은 너희들 망했어! 이런 뜻이에요. 너희들 심판받아 마땅해! 라는 사실이 작동을 하는 땅이 바로 그 약속의 땅이에요. 그래서 기간이 70년이에요. 70년. 70년은 뭐냐,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충분히 보상을 해서, 하나님이 보상을 받아가지고 됐어. 이만하면 충분해. 내 휴식에 적합해. 라는 기간이 70년이에요.
이 70년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다니엘에 보면 70이레가 되는 겁니다. 철저하게 밟아버려요. 하나님께서 만족할 때까지, 인간이 저지른 그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만족할 때까지 그 기간이 70년, 나중에 다니엘에서는 70이레. 70X7로 함으로 말미암아 70은 시간에 속한 그 표현이라면 7이레라는 것은 이레라는 것은 이제는 기존의 땅이라는 공간 말고 새로운 땅에 적용되는 시간이 7이레에요. 새로운 땅. 기존의 인간이 살던 그 땅 말고. 인간을 없애버린, 인간 같지도 않은 것을 다 내쫓아서 흡족한 하나님이 기뻐 흡족한 고 땅이 약속의 땅인데 그걸 시간으로 표현하면 그게 70이레가 되는 거예요.
70을 이레가 붙어버리면 70에 이레가 하나씩 다 붙거든요. 그러면 인간의 시간이 하나님의 제사에 의해서 희생에 의해서 하나님의 천국에 합당한 시간으로 전환되면서 이 시간에 속해 있던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에요. 제사를 통해서 영원한 천국에 살 수 있는 합당한 사람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70년이라 하는 것은 곧 이 세상을 있는 세상을 다 불로 태울 때까지 기간. 요걸 이스라엘 식으로 미리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70년. 그 70년은 하나님이 속이 시원해가지고 안식에 쉬시는, 이제 내 마음이 핀다. 아~ 골치 아팠는데. 이제는 내 분노가 다 풀려서 쉰다. 고 기간이 바로 70년 이었어요.
그 70년 지나고 성전 새로 짓자. 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은 성전 짓는데 있지 인간 구원하는데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다 드러나버렸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점점 이걸 알았으니까 깊이 나아가보겠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선악체계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시도하는데 있어서 모든 인간이 삼겹살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이 돔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다 동의했다. 다 수긍했다. 모든 인간이. 이걸 모두 다 한 통속이다. 전부 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모든 생각이 하나로 묶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가 이 율법 너머의 세계에서 오는 하나님의 사자가 온다면 이 세상의 어느 인간이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알아들을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습니다. 일체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지요.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와도 아무도 못 알아봐요. 그게 주님 오신 효과에요. 그들은 선악체계에 여기에 빠져있습니다.
자, 그러면 주님은 시험에 빠졌다. 테스트. 유혹에 빠졌다. 시험에 들었다고 하는데 시험에 든 내용이 뭐냐, 빨간 걸로 할게요. ‘자기가 의롭게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 이게 곧 시험에 빠진 거예요. 유혹에 빠진 거예요. 교회가 결국 뭐예요? 시험에 빠트리는 마귀가 기다리고 있는 공간, 마귀를 섬기는 공간이 교회가 되어버렸어요. 왜?
세상 살면서 아까 다시 봅시다. 인간 모든 세계가 동의하고 수긍하고 한 통속이고 다들 공감을 나타내는 세계다 말이죠. 이 말은 인간들은 이 땅에서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를 만든다면 그 원리는 여기서 나온 거예요. 다 동의되고 수긍하고 한 통속이고 공감한 고 내용만 그 공동체를 수립하는 원리원칙이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이 원리원칙의 밧줄. 국가대표팀이 훈련하는 밧줄이 있다면 여기 밑에 있는 천박하고 추잡하고 더러운 이쪽 부분의 어떤 사람이 쏠리느냐, 어떤 사람이 쏠리느냐 하면, 병들고, 병들어도 부자면 괜찮아요. 병들고 가난까지 해요. 병들고. 거기다가 주위에서 가족이 있어 돌보면 그것도 괜찮은데 가족도 없어. 병들고 가난하고 돌 볼 가족도 없어요. 딱 요 세 가지 조건 딱 합쳐서 하면 등장인물 있지요. 누가복음16장 누굽니까? 거지 나사로.
선악체제에 있는 사람들이 병들고 가난하고 홀로 있는 사람에 대해서 뭔가 선악체계에 있는 이쪽 사람이 해석을 내리잖아요. 이 세상에 대해서 해석을 하고, 평가를 하고, 판결을 내리는, 재판을 하잖아요. 그러면 이런 자가 있으면 뭔가 한 소리 해야 돼요. 이유가 뭔지를 이야기를 해야 돼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전부 다 같은 한 통속이니까. 다 수긍이 되는 소리를 하지요. 죄가 많아서 죄를 지었다는 거예요. 이 말이 맞았습니까? 틀렸습니까? 그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는 말이에요.
그 말이 맞아요. 간음한 여인을 뭐라고 했습니까? 돌로 치라 했지요. 신명기에 나오지요. 그 말이 틀렸습니까? 맞습니까? 맞는 말이지요. 바리새인은 맞는 말만 해요. 문제는 본인이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평가하는 본인이 균등한 균일한 지형에서는 내 모습을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진짜 숨겨진 자기의 모습을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에게 찾을 줄을 몰랐던 이게 문제인 거예요.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은 주님 보시기에 자기의 위선을 감추는 껍데기가 홀라당 벗겨진 사람이고, 바리새인 이 사람들은 마귀의 탈을 쓴 사람이에요. 가면. 페르소나. 자기의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이에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감사합니다. 누가복음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그 세리. 그 세리가 하나님의 의를 두고 베틀 경쟁 붙었지요.
바리새인은 자신만만하지요. 마치 토기하고 거북이 경쟁할 때, 뛰어보지도 않고 토끼가 자신만만하게 했어요. 자신만만하게. 거북이한테 이긴다는 거예요. 토끼가 무슨 요소를 빼먹었느냐 하면, 가다가 자기가 잠이 온다는 것을 빼먹었어요.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본인이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남하고 비교해서 그랬어요. 남하고. 꼭 잘난 자와 비교해요. 못난 자는 비교 대상도 아니고.
여기에 방금 제가 병들었다 했지요. 병든 것을 가지고 구약에서는 뭐냐 하면 문둥병자라 했어요. 문둥병자. 구약 레위기에서는. 16장. 문둥병. 열왕기하5장 나아만 장군 나오지요. 문둥병. 외로운 것은 열왕기상15장, 16장 거기에 보면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 찾아가잖아요. 과부, 외로운 사람들. 돌 볼 사람 없는 것. 옛날 농경시대기 때문에 여자 혼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너무 힘들어서. 애까지 놓고 농사 못 집니다. 남편 없으면 사회적으로 돌봐줘야 한다고 했어요. 그 정도로 여자 혼자 있으면 외로운 거예요. 살 힘이 없으니까.
나아만 장군 자기가 군대장관이잖아요. 거들 목 거릴만하지요. 나아만 장군은 뭘 모르느냐 하면 자기가 속해 있는 공간을 의심하지 못했어요. 이게 나아만 장군이 문제 있던 거예요. 이 공간이 립몬이라는 신이 지배하는 공간인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고 여호와가 지배했는데 그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아람나라한테 예속된 나라거든요.
조선보다도 일제시대 때 조선 임금들은 노예를 벌레만큼도 취급 못하는, 일본 나라의 고위직이라면 조선시대의 비리비리한 거 사람취급 하겠어요? 한껏 자긍심과 자존심으로 무장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건 문제 있어서 잘못돼서 생각을 못한 이유가 뭐냐, 다 같이 동의하고, 수긍하고, 한 통속이고, 공감한 다른 이론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이게 시험에 빠졌다는 말은 시험에 안 빠진 경우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이 세상의 악마의 권력에 푹 빠져있는데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그 때 그 때 감을 잡게 하지요. 감을. 니가 육신이 있는 한 이 동네가 어떤 동네냐, 니가 바로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동네다. 요한일서 2장 설교시간에 했지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왔다고 해서 세상 자체를 문제 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이 세상 자체를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요. 의심하지 않아요. 이 땅에서 공부 잘하고, 시험치고, 합격하고, 출세하고, 돈 벌고, 비트코인 해서 돈으로 교환해가지고 수십억 버는 그러면 그게 사람 사는 건 줄 알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뭐냐, 날이 갈수록 이 높이에 대해서 자존감과 자존심이 점점 더 높아져가요. 점점 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아가요. 저 낮은 곳이 아니고. 이것은 어디에 어긋나느냐, 빌립보서 2장에 정면으로 위반되지요. 예수의 마음을 품어라. 예수의 마음은 하나님이지만, 어디까지 낮아졌습니까? 십자가 죽기까지 낮아진 거예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사자에요.
오늘 본문 3장1절, 하나님의 사자가 이 지상을 오면서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인간들이 감히 상상도 못하는 다 같이 동의하고, 수긍하고 한 통속이고 공감했기 때문에 “그런 다른 의견은 있을 수 없어.” 라고 했는데 다른 의견이 있었던 거예요. 다른 의견.
그 다른 의견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고, 아예 문이 없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정당한 조치였던 겁니다. 합당한 조치였지요.
요한계시록3장7절 보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 자, “열면 닫을 사람 없고, 닫으면 열사람 없다.” 라는 문이 있다면 인간에게는 그 문은 없는 문이지요. 똑똑하면 열어주고, 바보면 닫고, 그런 거 없어요. 문자체가 없어요. 그런 문자체가 없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문은 내가 열면 열리고, 내가 닫으면 닫히는 문만 한 통속으로 생각한 거예요. 열어 달라 했는데 열려버리고, 닫아주세요. 하면 닫혀버리고. 사전에 기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그럼 왜 울어요? 우는 게 나오는데 왜 웁니까? 문이 닫혔기 때문에 울었던 거예요. 아예 문이 없으면 울지 않을 건데, 문이 있다가 없어지는 닫혀버렸을 때에 그 절망감은 이건 최악이지요. 최악.
지금 주께서는 우리에게 문을 주십니다. 주시는데 절대로 우리가 조정하지 못하는 문을 줘요. 우리가 열면 열리고, 우리가 닫으면 닫히는 그런 문을 주께서는 허락한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문을 발견한 사람은 뭘 아느냐, 내가 조정할 수 없다. 이건 다른 공간이다. 다른 공간이다. 오늘 제목을 다른 공간으로 할까. 전혀 내가 알던 기존에 내가 알던 선악체계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 10분 쉽시다.
안양20230518b말3장2절(모두 한 통속)-이 근호 목사
둘째시간 하겠습니다. 오늘 말라기3장2절에 보면 그가 임하시는 날은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난 때 누가 능히 서리요. 이리되어있지요. 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오는 진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해서 왜 감당하지 못하는가,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공간이.
이런 말이 있어요. ‘헤엄치는 자의 운동은 파도의 운동과 닮지 않았다.’ 헤엄치는 자기의 고집스러운 자기만의 방향이나 의도와 목적이 기존의 환경과 차이 난다. 기존의 속해 있는 환경과 차이 난다. 그러니까 여기에 기존 파도에 순응하는 것이 인간세계인데, 그게 아니고 절대로 순응할 마음이 일체 없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경우에 그러냐 하면, 기존의 이 환경의 주인공이 누구냐를 아는 분만이 가능해요.
왜 예수님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왜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취하지 않는가, 인간이 미워서가 아니라 인간이 속해 있는 이 세상 자체가 미혹적이고 유혹적이고 시험에 빠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 이 환경이 시험에 빠졌는가, 그건 창세기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아담은 과일을 하나 따먹은 걸로 여겼어요.
나라는 인간이 그 많은 과일 중에서 과일 하나 그럼 과일 여러 가지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중에 하나를 따먹는 걸로 여겼어요. 인간이 있고 나무가 이리 있다면 나무에 과일 하나를 따먹는다고 이리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 선악과 나무에 있는 이 과일이 인간이 이 전체 인간을 지배하는 전체 환경과 관련되어 있지. 인간과 관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간 쪽에서 몰랐던 겁니다.
선악과를 하나 따먹으면 전에는 선악과 없던 나가 선악과 있던 나가 되는 게 아니고 전에 있던 환경 자체에서 추방되어야 된다는 그러한 원칙이 있는 줄 몰랐던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추방되었잖아요. 추방되었을 때에 주님의 해석은 이겁니다. 선악과 따먹어서 추방된 게 아니고, 생명나무 있는 데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생명나무 요소가 없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 죽음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인간은 죽는 게 아니고 죽음이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환경에 인간이 쓱 들어가게 된 거예요.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열심히 삽니다. 송해 같은 경우에 96세까지 보였어요. 전국노래자랑~ 해가지고.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죽음은 나보다도 세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온 겁니다.
그럼 인간에 대해서 악마 쪽도 가만히 있겠어요? 가만히 있지 않죠. 인간들이 뭘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선악지식을 따먹었잖아요. 안 것은 선악지식을 알게 되었지요. 선악지식을 뭐로 사용하느냐 하면, 유약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도자기 만들 때 껄끄러운 흙 표면을 매끈하게 만드는 것은 유약을 발라가지고 불에 담그면 깨끗하게 되겠지요. 인간의 육체 + 선악지식으로 이렇게 페인트 칠을 학교서나 교회에서 하는 게 마귀가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가정에서도.
사람은 선이 뭐고 악을 알아야 그게 인간답지 그거 모르면 인간 아니야. 그럼 안다는 것은 선악을 안다는 것은 그냥 아는 게 아니고 악을 버리고 선 쪽으로 나가라. 라고 촉구하는 거예요. 그 촉구하라는 힘을 받게 되지요. 그러면 인간이 갖고 있던 욕망은 이제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보다 선한 쪽으로. 그런데 보다 선한 쪽이 뭐냐 하면, 보다 선하다. 같은 말이 보다 선하다는 같은 말이 뭐냐, 보다 외롭지 않다. 보다 건강하다. 남보다 더욱 더 잘 산다. 이걸 선악에서는 뭐냐 하면 이것을 의롭다. 거룩의 표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의롭다. 표상이다. 이걸 인간의 욕망이 그 쪽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어요.
방향 정했으니까 이것을 한마디로 추가해서 말하면 인간은 뭘 추가하느냐, 자기 의를 추가하는 거예요. 자기 의. 이 자기 의가 자기의 자존감이 되는 겁니다. 내가 비록 돈이 없고, 아프고, 외롭다 할지라도 뭐 만큼은 안 놓친다? 이래도 내가 왕년에 말이야! 왕년에 머리 안 빠졌어! 지금은 머리 빠져서 그렇지만. 왕년에는 머리 안 빠졌다고. 왕년에는. 머리 새카맺다고 왕년에는. 날 무시하지 마! 나도 하이모 썼어. 하이모 심었어.
여기에 대한 주님의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이 기존의 공간을 문제 삼고, 공간 속에 새로운 공간을 여기서 만들어 나가는 거예요. 하나의 새로운 공간을 심어버리는 겁니다. 석유 시추할 때 시추선 있지요. 기존의 땅에다가 구멍을 뚫잖아요. 뇌수술 할 때 뇌 갈라놓고 들어가지요. 임플란트도 구멍을 뚫고 하잖아요. 이 세상에 구멍을 뚫어요. 아프겠어요. 안 아프겠어요. 아파도 너무 아파요. 왜? 뭐가 뚫리니까.
자기는 온순하고, 자기는 겸손하고, 자기는 아무..., 나는 맨날 죄인이래. 만날 죄인이고, 마음을 낮췄데. 그런데 막상 일 하나 터지고 나니까 분명히 없어졌다고 여겼던 그것이 강력하게 나의 의가 어디서 나왔는지 나의 의가 출현해가지고 강력하게 저지하고 있습니다.
수요일에 했지만, 자기 아지트. 주님 오시는 건 좋은데 내 아지트 안 망가지게, 안 다치게 하는 쪽으로 우리 집에 오시옵소서. 이런 거. 나의 의가 안 다치는 조건하에 우리 집에 오시기 바랍니다. 이런 거.
그건 뭐냐 하면, 주님을 세워 놓되 나의 의. 아지트 바깥에 주님을 세워 놓는 거예요. 세워 놓고 빼꼼히 열어가지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 나의 의는 안 다치고 자기 할 도리는 다 하겠다는 거예요.
부산강의 때 이야기했습니다. 아가서 이야기했지요. 여자가 자기 솔로몬이 찾아왔을 때, 술람미 여자가 자기야, 있나? 왔을 때 문을 안 열어줬어요. 문을 안 열어 준 이유가 뭐지요? 아가서에서 사랑하는 남자가 왔는데 문을 왜 안 열어줬습니까? 내가 옷을 벗었음으로 부끄러워서 문을 안 열어준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가 문을 여니까 문을 확 닫아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손이 끼었을 때 남자가 가져온 게 있어요. 1번 감기약, 2번 판콜, 3번 파스, 뭐였습니까? 몰약이었지요. 몰약.
그것을 떨어뜨리고 가지요. 그제서야 뒤늦게 여자가 알고 동네방네 해가지고 내 남자 못 만났느냐고 친구들에게 예루살렘 밤거리를 헤매면서 찾아다니잖아요. 그게 사랑의 묘약이 아니고, 사랑의 몰약. 여자는 선악으로 남자를 대했던 거예요. 그 순간. 짧은 순간이지만.
나의 부끄럼이 들키지 않는 조건하에 우리 사귑시다. 이리 된 거예요. 그런데 그 남자는 온전한 사랑. 너와 우리 사이를 맺어준 것은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게 다윗 언약이에요. 솔로몬은 다윗 언약의 자식이니까. 자손이니까. 제가 갑자기 아가서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오는 사자가 나중에 신약에 오니까 자기 신분이 드러납니다.
성경 가운데 어려운 대목이 많은데 그 중에 어려운 대목 하나가 마태복음22장에 나오는 대목이에요. 이건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님이 질문을 했는데 그 당시 아무도 율법 박사 중에서 대답한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유일하게 인간에게 질문한 대목이에요. 거의 유일할 거예요. 다른 것도 있어요.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것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당시에 신학의 한계를 들추어내고 그들의 허점을 지적하는 유일한 질문 같아요. 마태복음22장42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이 질문이에요. 하나님의 사자로 오신 분이 이 세상에 질문을 던짐으로서 기존 공간의 한계를 들추어내려고 하는 겁니다. 질문을 던짐으로서.
기존 공간은 다시 한 번 복습하면, 기존 공간은 율법이 이미 들어와서 기존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율법을 지키면 이것이 천국이라고 자부했던 그들이니까 율법 해석에 대해서 어지간한 자신감이 없으면 그들은 안심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지요. 율법 해석에 대해서 우리보다 더 뛰어난 해석이 없다고 자부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대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는 귀신을 쫓아내고 이러지만, 바리새인한테는 율법에 관해서 질문을 던진 거예요. 그리고 시비를 걸었고.
율법 박사들아! 내 질문에 답변해 보라.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 답변하지요. 율법의 도사니까.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다. 그들은 자신만만했을 거예요. 정답을 댔으니까.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다. 바리새인들이 어디에 주목했느냐 하면 다윗과 메시아를 주목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허점이 뭐냐, 자손에 강조점을 두고 그들의 허점을 파헤칩니다.
43절,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느냐, 45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이 질문입니다. 어떻게 후손이 원조가 되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 후손이 시조가 되느냐 이 말이에요. 주께서 시비를 걸어버린 거예요. 바리새인이 등장하면 주께서 그들의 한계를 들추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거에요. 간음한 여인이 있을 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그 이야기를 간음한 여인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이게 해답입니다.
성경 지식을 안다고 해서 그 성경 지식을 내가 나한테 써먹을 수 없는 대상이 나에요. 성경 지식은 성경의 모든 완성은 반드시 십자가 지신 분을 경유해서 십자가의 효과로서만 우리에게 전달되어야 돼요. 새로운 공간은 하늘나라의 방송국입니다. 하늘나라를 중계방송하는 거예요. 유일한 채널이에요.
하늘나라가 인간에게는 선악체제로 통한다면 그 선악체제가 생각하는 선이 있잖아요. 최고의 선, 최고의 거룩,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영화에 보면 도둑놈이 금고 뚫으려고 아래층에 은행이 있는데 위층에서 뚫어가지고 아래층 내려가가지고 금고 직통으로 문 열지 않고 들어가려했지요. 그런데 지도를 잘못봐가지고 뚫었는데 그게 화장실에 들어갈 수가 있어요.
선악은 어디까지만 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들은 생각했어요. 회복이라 했어요. 천국 회복. 그러니까 처음의 에덴동산의 선악과 있고, 생명나무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거 잃어버렸으니까 주께서 준비한 천국에도 생명나무 있고, 선악과 있고 둘 다를 갖췄다고 생각한 거예요. 선악과 요소가 지옥으로 간다는 사실을 그건 상상도 못했지요. 그러나 인간들의 코스는 뭐냐 하면 지옥으로 가는 쪽만 계속 들이밀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온 교회와 온 기독교와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공감하고 동의하고 한 통속이었어요. 전부 다 한 통속이에요. 그들이 한 통속이라도 그들이 자기가 속한 환경을 의심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자기 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 의. 자기의 자존심과 자긍심.
내가 지금껏 살아왔던 내 공간이 상실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상실되지 않을 수 있다. 이 희망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내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나는 예수님이든 누구든 나는 반길 용의가 되어있다. 이게 인간이 처해있는 시험 든 상태입니다.
시험이라 하는 것은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시험이라 하는 것은 내 의가 다치지 않는 쪽으로 모든 생각이 돌아가는 그것이 바로 악마의 시험에 홈빡 지금 젖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시험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지요. 향수병을 깼던 마리아지요.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지요. 잃어버린 자지요. 아이구~ 이 구닥다리 이거 누가 후딱 안 가지고 가냐, 나의 이 쓰레기같은 나를 뺏어갈 사람 없나.
어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욕을 얻어먹는 길이 곧 천국 가는 길이다. 우리에게 발린 선악이라는 것, 선과 악의 윤리 도덕 그 유약을 성령께서는 칼로 가져와가지고 그걸 벗겨냅니다. 벗겨내면 아파도 너~무 아파요. 내 가족이라는 거, 내 의라는 거, 내 펀드, 내 돈, 내 집, 내 아파트. 경상도 말로 해가지고 내가 우이 돈가지고 샀는데. 이걸 내가 잃어버려. 못 잃어버리지요.
그러면 그런 자세에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마태복음22장 이 질문. 이 질문의 답변은 답변 못합니다. 역시 우리도 답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질문을 건방지게 우리가 답변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답변할 수 있는 힌트는 제가 제공해 드릴 용의가 되어있습니다. 힌트. 지금 음흉하게 웃는데. 내가. 카메라에 보이는 이 웃는 모습. 밉상스런 모습 다 보이지요.
그게 마태복음9장에 나옵니다. 음흉하게 웃는 모습. 마태복음9장17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환경이 새로운 공간이 마련되지 아니하면 내가 나한테 던진 질문이나 모든 말씀이나 산상설교나 기존 공간에서는 이게 기존공간을 터져버리게 만들어요. 낡았다는 것을 그대로 까발리고 있는 거예요.
낡은 선악체제에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도 이해 못하는 말씀이에요. 선악체제에서 우리가 선악체제라는 그 악마의 위세, 권력이 벽이 허물어져서 그 자투리가 된 게 우리에요. 우리는 악마가 친근해요. 악마는 안 보이니까. 악마가 친근하다는 말은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는 선악체계와 나의 양심과 친근해요. 나쁜 것은 나쁜 것이고,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에 대해서 우리는 하등에 의심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의심 안해서 문제에요. 우리는 그걸 이 자체가 뭔가 납득이 된다는 것에 우리는 너무 쉽게 속아요. 납득이 되는 것에.
착한 사람은 착하고, 나쁜 사람은 나쁘다. 이 말이 틀렸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착한 사람은 착하고, 나쁜 사람은 나쁘다. 입자와 입자와의 관계입니다. 공간의 관계가 아니에요. 착한 사람! 누가 착하되? 해서 율법을 줬거든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의가 없고 우리는 의인 없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이 들어온 환경 속에서 아직도 의인 타령하고 있어요. “내가 의인이다.” “율법이 있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아~ 율법이 있는데도 아직도 의인이라고? 나와. 나와. 나와. 율법이 있는데 의인이라고?” “느 아부지 뭐하시노?” 뽈대기 잡아당겨가지고. “어디서 선생님 앞에서 느그 아부지 자랑하고 있다고?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악마인데요.” “그럼 니는. 니는 뭔데?” “악마의 그 자식인데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주님께서는 아예 심어놔요. 열 두 제자 안에다가. 느그 애비는 악마다. 이 가룟유다야! 가룟유다에 심어놓았지요. 니는 니하는 행세를 결국은 니가 옳다, 그르다를 오직 예수님 앞에서만 그 마지막 모습을 드러낼 거다 이 말이지요.
유다는 자살하기 전에 이미 자살했어요. 자살하기 전에 이미 죽은 존재였어요. 자살하기 전에. 가룟유다가 늙어 죽는 게 아니고 자살했다는 것에 의미심장하게 생각해 보세요. 한 고집 했다 이 말입니다. 왜 지가 자기의 목숨을 끓습니까. 내 목숨 끊는 대신 보상을 얻기 위해서. 그게 뭐냐, 나는 예수님 앞에서도 나의 의를 버리지 아니했노라.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복음 피해서 다 도망갑니다. 제2, 제3의 가룟유다의 친구들. 가룟유다의 밴드들. 모두 다 가룟유다에요.
자, 마태복음9장17절을 통해서 해석이 난해한 마태복음22장으로 건너가 봅시다. 새포도주를 낡은 포도주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리하면 부대가 터져 할 때 포도주를 너희들이 포도주를 생각하면서 포도주를 넣는 부대까지 두 개의 요소를 보지 못하고 포도주 하나만 주목했다는 거예요. 두 개의 요소.
제가 부산강의에서 성도의 삶은 듀엣으로 봤지요. 이중창. 이중창에는 멜로디 파트가 있고, 화음 파트가 있잖아요. 우리는 무슨 파트 담당이냐, 화음파트에요. 본 멜로디는 누구 파트냐, 주님파트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 성경 말씀을 답습한다고 증인 되는 게 아니고 주고 받아야 돼요.
나는 말한다. 오른 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한다. 주께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럼 우리는 보조를 추임새를 해야 돼요. 저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담박에 압니다. 이런 식으로 보조를 맞춰줘야 주와 동행하는 성도입니다. 나는 복음을 개, 돼지에게 던지지 않았다. 그럼 우리는 뭐해야 돼요? 머리 좋은 사람은 다 알지요. 제가 개, 돼지입니다. 이래야 말씀이 살아요. 내가 사는 건 신경쓰지 마시고요, 보조를 짝패가 되어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돈을 하늘에 쌓아두고 땅에 쌓아두지 말라. 나는 죽으면 죽었지 땅에 쌓아두겠습니다. 저는 우리은행에 펀드 두 개 넣었습니다.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나보다 합당치 않고, 저는 주님보다 천하 손녀, 손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럼 주님께서 파이팅! 죽이 맞구나! 니가 죽이 맞아. 요걸 볼때기. 요거 이쁜 거. 요거 어디까지 사랑할까. 내가 죽도록 사랑할 거야. 이게 주님과의 우리는 간격 짓고, 지어진 간격을 주님 쪽에서 그걸 메어버리고 한몸되게 하시고. 또 우리는 간격 만들고 또 이걸 제거해버리고.
마태복음9장에서 두 개를 생각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포도주 귀하다고 포도주를 받쳐주는 있으나 마나한 유명하지도 않고 본대 나지도 않는 그 가죽부대를 고려 못하고, 포도주만 생각해서 주여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복음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습니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죽어라. 인간아! 이건 안 돼! 안되고, 예수 믿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습니다. 이런 외침이에요. 이런 외침. 망가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망가질 생각을 안한다고 해서 망가질 우리들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니 고집대로 버텨라. 그게 너답다. 내가 유약 발라놓은 거 착한 유약 있잖아요. 긁어낼 거야. 끌로. 망치 들고. 팍! 팍! 완전히 옛날 60년대 엿장수와서 엿할 때 큰 엿 가지고 애들 고무신이나 신발, 유리병 가지고 오면 잘라줬다고요. 좀 더 주이소. 가. 가. 이것만 먹고 가라. 혹시 너희 집에 텔레비 가져오면 좀 더 줄게.
우리 속에 코팅되어 있는 것을 깎아 줄 때 생살, 날것이 나와요. 우리의 날것이. 전혀 말씀에 말씀 들었다 하면, 복음 들었다 하면, 무조건 묻지도 않고 반발하는 악마의 자태가 나와요. 악마의 얼굴이 나와요. 성경 말씀 이대로 하면, “그거 하면 돈 생기나? 그거 해가지고 쪼다 되는데.” 이런 거.
디모데후서3장에 보면 그게 나오지요.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고, 성경에 나와서 이야기하면, “그러면 돈 미워해서 굶어 죽기 딱 맞다. 우쩌라고? 취직하지 말라는 말이가? 취직하지 말고 교회 전도사나 할까?” 이런 식으로 이리 나온다고요. 전도사 되면 돈 안 좋아하는 줄 알아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건 절대로 아니지요.
주께서 깎는 방법은 우리보고 니 마음대로 하게. 마음대로. 마음대로 해서 우리가 어떤 노력해도 스스로 자기의 코팅된 윤리도덕을 자기의 의를 못 깎는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들어버리지요.
자, 어째서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이제 마태복음20장 넘어가 봅시다. 지금 제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하시는 일이에요. 여기에 말라기에도 나오지요. 어떻게 연단하고 어떻게 처리해서 자기 백성 만드는가, 그 과정을 하나님의 사자가 오셔서 내부적으로 그 과정이 있어야 돼요.
그 방법은 어떻게 하는가, E1→ E2→ E3→E4....En 잘 보세요. 또 머리에 쥐난다고 하지 말고. E는 이벤트에요. event. 인간은 사건과 사건의 연속입니다. 두 번째 사건이 이벤트2가 등장하면 이벤트1은 사라졌어요. 하나의 사건이 앞에 사건을 덮어버립니다. 인간의 생애는 이런 식이에요. E1→ E2→ E3→E4....En 까지. 인간의 시간이외에는 이 사건에 의해서 인간은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간다.” 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시간은 강처럼 흐른다. 라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이게 어떤 환경이냐 하면, 인간의 기억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인간의 기억은 악마가 장악한 선악 지식의 외벽이 떨어져 나가서 인간의 기억을 작동하는 가동하는 기계 원칙이 되거든요. 기계. 작동하는 기계. 설비를 악마가 제공한 거예요. 인간의 기억 속에서. 인간의 기억 속이니까 기억은 이건 인간이 뭐냐 하면 인간은 자꾸 분류를 해요. 벌어진 사건 가운데 자기가 관심 있는 것만 뽑아서 하는데.
관심 있다는 말이 그냥 관심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얼마나 좀 더 악에서 선으로, 무가치한 데서 가치 있는 것으로, 무의미 한데서 의미한 쪽으로, 내가 천박한 쪽에서 고상한 쪽으로 가는 자기 의에 그 욕망에 의해서 기억이 작동되게 되어있습니다. 내 의에 보탬 되는 것은 잘도 기억하고, 내 의에 손상이 간다든지 그런 건 본능적으로 이것을 거부하게 되어있어요. 본능적으로.
꿈이라는 것은 바로 낮에 활동할 때는 작동이 잘 되는데, 꿈에 잘 때는 작동이 안되잖아요. 꿈에는 뭐냐 하면, 꿈 나온 뒤에 검열해요. 내가 선하고 의롭게 되는 요소와 그것을 위협하고 해꼬지하는 것에 대해서 꿈속에서는 강력하게 반발해요. 그래서 꿈에서 깨어난 뒤에 아휴! 이 땀 좀 봐. 이렇게 하고 있지요.
자, 꿈에서 무엇을 사수하려고 했지요? 꿈에서. 죽으면 안돼! 내가 남한테 농락 당하면 안돼! 나의 훌륭함이 손상 가면 안돼! 평소의 자기의 속마음이 꿈속에서는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나오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면서도 잠자지 못해요. 잠들지 못하지요. 자면서도. 육체는 잠을 잤는데 나의 의는 잠들지 않는다. 새로운 소설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나의 의는 잠들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의 기억은 잠도 안 잔다. 나의 기억은.
그렇게 나의 의만 되는 이벤트만 기억돼서 이걸 축적해 나가면 여기서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갈수록 나는 더욱 더 성숙해지고 똑똑해지고, 따라서 훌륭해지고, 갈수록 실수를 줄여나가는 완벽에 가까운 존재로 뭐가 되느냐 하면, 이벌루션 Evolution 진화되는 거예요.
내가 성숙하고 발달하는 그 재미로 인생을 사는 거예요. 전에 보다 지금이 더 낫다는 거예요. 마태복음11장 25절보겠습니다.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는 뭡니까? 숨기시고. 숨김의 방향은 파도는 악에서 선으로 나가는데, 이 땅에 오셔서 헤엄치시는 주님의 운동은 거슬르지요.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반대로 가는 거예요.
슬기롭고 지혜있는 자에게는 점점 더 멀어져요. 진리로부터.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진리하고는 점점 더 멀어져요. 내가 주의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할 때에 주님께서 하는 말이 “누구예요? 누구시지? 나는 처음인데.” “천사! 이 사람 알아?” “모르겠는데요.” “완전 영구야.” “잘 모르겠는데요.” “문 닫아라.” 문 닫아버려요. 뭐 했냐, 너 그동안 인생. 뭐 했어?
어린아이에게 나타나심을 감사하나이다.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갑니다. 확정된 거예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 간 사람 중에 어린아이 아닌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마태복음25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못 똑똑해서 난리도 아니에요. 교회에 가도 못 똑똑해서 난리도 아니에요. 누가 누가 똑똑하냐, 누가 누가 잘하나, 노래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E1, E2, E3, E4, 여기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는 이렇게 내립니다. 주님대로 하면 E4, E3, E1, E2, 무작위적으로 인간의 기억의 순서를 이걸 완전히 개무시해버리는 거예요. 완전히 개무시해버려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공놀이로 이해가 가능하다. 공놀이.
우리 삼촌이 그런 이야기했다고 제가 옛날에 여러번 예를 들었는데. 식상하지만, 그만큼 시간이 뜸했으니까 이제 이야기해야 되는데. 우리 삼촌이 장난삼아, 농담삼아, 축구경기를 보다가 “참, 저 사람들 참, 더운데 땀 나는데 애쓴다. 그 공 22개 주면 안 싸울 건데, 왜 자꾸 공 1개를 줘서 저러느냐.” 우리 삼촌이 장난삼아 그런 농담을 잘하거든요.
축구경기에서는 공이 두 개가 아니고 세 개가 아니고 하나입니다. 하나가 되면 공이 우위권있습니다. 공이 위치가 열 두 명의 사람들의 위치를 조정해요. 공의 위치가.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알아요. 축구 경기하는 사람에게 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공은 돈 주고 얼마든지 사면 되지만, 중요한 것은 매시라든지 김민제 같은 경우에 500억입니다. 손흥민은 800억인가 더 되는 것 같은데. 그 많은 값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은 뻔히 알면서도 막상 그 돈 많은 사람들, 값어치 나가는 사람들 뛰는 것 보면 쫄랑쫄랑 누구 따라가요? 그 돈 몇 푼 하지도 않는 공 따라 간다고요. 공.
그 사람들에게 인간에게 어떤 인간에게도 가치 없는 십자가 따라가는 사람 들. 기존의 공간 속에서 자기 의를 찾던 사람들이 맥없이 십자가만 찾아가는 사람들로 전환된다는 것은 공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새로운 공간에 들어온 것을 축하드립니다. 환영합니다. “주여, 저의 좌표와 인생의 저의 모든 위치를 배치를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활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이 터키에 있던지, 사도바울이 아시아에 있던지, 예루살렘에 있던지, 자기는 십자가만 따라가는 거예요. 심지어 지중해 건널 때 폭풍이 와가지고 276명이 다 죽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안 죽는다. 왜 인줄 아나, 니가 갖고 있는 니가 공 갖고 있잖아. 사도바울 니가 공을 갖고 있잖아. 이 공을 로마까지 전해야 하기 때문에 저 사람들 필요한 만큼 사용될 거야. 죽는 척 하지 마! 안 죽을 거야. 그걸 통해서 무엇이 인간이 중요한지, 복음이 중요한지를 니가 제대로 파악하라 이 말이지요. 어느 게 중요한지.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뭐냐 하면, 사람하고 사귀려고 해요. 주님하고 사귀고 싶지 않아요. 사람하고 사귀는 겁니다. 그 고집 어디 가겠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항상 이 시간 자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려요.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이 성도를 볼 때 뭐라고 봅니까? “니 왜 시대에 따라서 안 살고 니가 왜 니 마음대로 헤엄치나?” 이런 이야기하지요.
그럼 우리는 말하지요. “내가 언제요?” “니, 봐, 니 어버이날 동생들 오고 시동생들 오는데 니는 복음 들으러 나갔잖아. 어버이날 됐으면 집에 앉아가지고 시동생, 시누이들 와가지고 전 지지줘야지. 왜 니가 나가 버리느냐. 손님들은 누가 대접하라고. 왜 시대와 거꾸로 살아.” 라는 핀잔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어요. 물론 우리는 그 덕분에 살은 찌지만. 그 소리 듣고 얼굴빛은 더 좋아. 눈치코치 안보고.
이것을 마태복음20장 이런 말씀있어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보세요. 시간이 바뀌었잖아요. 교회오니까 복음 들은지 몇 년 됐습니까? 2년 됐습니다. 캬이 씨~ 우리는 20년 됐습니다. 2년 되어서 어디서 십자가에 와서 말발내고 있고 어디서. 그런데 주께서는 나중에 온 자가 소위 20년, 30년 십자가 복음 알아듣던 사람을 완전히 뒤통수 쳐버리는데요.
주께서 그렇게 이벤트를 벌인 거예요. 이벤트. 무슨 복음의 세계에 고참이 어디 있습니까? 고참이라고 하지 마세요. 헌부대라고 이야기하세요. 이제부터는. 아이고~ 이제는 늙어서 숭숭숭 포도주 다 빠졌어요. 실제로 복음을 많이 들으면 나중에 자요. 복음 열 개하면 아홉 개 다 빠지고 부대가 다 낡아가지고 숭숭 빠져나가버렸어요. 그 때에 보완해주는 것이 뭐냐, 신참들. 쫙 해가지고.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아이구! 내가 늙었구나! 벌써.”
그래서 주께서는 일단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수님을 무작위적으로 우발적으로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튀는 공으로 이 땅에 보내버렸습니다. 기존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보고 신학 어디 나왔습니까? 이리 물을 만 하지요. “출신이 뭔데? 전라도 출신이야? 경상도 출신이야?” 출신 묻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 출신은 하늘나라다.” 이리 되는 겁니다. 대화가 됩니까? 대화가 안 되지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하늘나라를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 땅에 내려와야 믿을 게 아니냐,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 제대로 이야기한 거예요. 인간은 복음을 못 믿습니다. 따라서 공, 공이 십자가복음이잖아요. 십자가 복음. 복음과 더불어서 성도가 발생돼요. 짝패되라고.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없는 성도를 만들어내요. 없는 성도를.
그러면 이 성도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도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이렇게 바뀌어야 돼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해야 돼요. 그러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조상의 죄를 이벤트4지요. 이벤트4가 이벤트1에 시간을 끌었기 때문에 죄를 들추어주는 일을 한다. 어떻게? 자손이 조상의 죄를 대신 다 짊어져요. 이게 바로 마태복음22장에 그 해답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은 주가 되니까 거창한 분이 오시는 줄 알았지요. 본인이 죄인이란 걸 감지 못하고, 많이 똑똑하고 많이 율법 공부 했으니까 우리 선수들끼리 제대로 통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정작 메시아로 오신 분은 그 똑똑한 자들에게 밀려가지고 뺨 맞고 옷벗기고, 창에 찌리고, 못에 박히고, 온갖 수난을 당하면서 결국은 그 제자들이나 바리새인은 은근히 생각했지요. 우리가 고문하고 하지만 행여나 혹시나 메시아같으면 죽기 직전에 천사가 와가지고 4, 3, 2, 1, 0할 때 이렇게 “어?? 다시 숨을 쉰다.” 이런 멋진 반전 같은 것을 기대했는데. 꼴까닥 그냥 죽어버렸어요.
진짜 해가 산 넘어 가듯이.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그 동네로 가버렸어요. 이로서 기존 공간은 새로운 공간,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갈 수 없는, 새로운 공간을 기존 공간이 유도한 셈이 된 거예요.
포도주는 있는데 헌부대밖에 없잖아요. 헌부대가 포도주 담고 있다고 우기는 것 때문에 결국 새 포도주 발생을 유도하는 계기가 된 겁니다. 우리의 E1, E2라는 이 죄인. 이 죄인 때문에 E4에서 오는 분이 충실하게 E1, E2의 죄를 더욱 죄 되게 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죄짓는 것은 죄가 아닌 것이 되어버렸지요. 죄가 아니고 주의 일이 되어버렸어요. 아~ 이 큰 복음을 그냥 쉽게 그냥 줘도 되는가, 지금 갑자기 제가 막 떨립니다. 박하사탕 같은 이 복음을 이 시원한 복음을 비도 죽죽 오는 거 같은데, 함부로 전하는지 모르겠는데.
죄는 지었는데 천하에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주의 일을 한 셈으로 된 사람이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였습니다. 얼마나 세계 뻔뻔대회에 금메달감이에요. 그 주제에 뭐라고 합니까? “주님 저 알지요.” 주께서, “그래, 니 안다.” 이게 대화 끝이에요. “주님, 저를 생각해 주세요. 저, 알잖아요.” “알고 말고지. 내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니가 강도라는 그런 주의 일을 한 당사자가 너잖아.” 갑자기 강도짓이 죄가 아니고 뭐가 돼요? 주의 일이 되어버린 거예요.
강도라는 죄. 그 죄가 주의 일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무슨 요소? 주님의 십자가 피가 관여한 겁니다. 중간에 있는 십자가가 피가 저쪽에 구원받은 쪽에 튀어버린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 십자가 홀로 졌지만, 옆에 강도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흐른다. 어떻게? 거꾸로. 시간을 거꾸로 흐르는 거예요. 그럼 미래에서 흐르느냐, 아니에요. 미래에서 흐르는 게 아니고, 위에서 흐르지요. 기존이 E1, E2, E3, E4이렇게 해서 오지만, 그 E4가 위로 예수님이 위로 올라가면, 이미 다 이루심에서 모든 시간을 관장하고 모든 미래까지 다 관장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궁금하다고 해가지고 2050년, 2060년까지 미리 볼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냥 오늘만 봤으면 다 본 겁니다. 오늘 저녁에 후딱 올라가게 되면 음주운전 차량에 받쳐 가지고 죽게 되면 참, 좋은 소리 한다. 음주운전에 받쳐 죽게 되면 천하 남편 다 버리고 우리는 자식은 미안하다. 하고, 주와 함께 거하면 돼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이 소원이었습니다.
빨리 죽고 싶다. 정리할게. 늘 정리하는 식으로 설교했거든요. 이 마지막 편지다. 고린도후서 이런데 보면 사도바울도 자기 미래에 대해서 아는 바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나는 몰라도 된다는 거예요. 이 자신감.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지? 내 비트코인 값이 오를까, 내릴까. 그거 알 필요 없어요. 오늘이 주어진 마지막 날이니까요. 오늘 저녁이 마지막 만찬.
중요한 것은 공이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을 그동안 태어나서 지금까지 움직이게 했다는 고백이에요. 공이. 십자가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것을 성령이 임하면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증인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이 공간에 와서 전혀 다른 공간을 유발하면서 거기서 말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말라기 봅시다. 말라기2장 끝에,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제물과 같을 것이라. 누가요? 누가 와서. 감당하지 못할 분이 와서 우리보고 선악으로 감당하는, 그 감당하는 손 떼라! 손 떼! 내가 감당할게.
친히 사랑으로 몰약으로 사랑으로 우리로 하여금 선악으로 윤리로 못했던 것을 사랑으로 우리를 녹을 벗겨내서 페인트를 벗겨내서 녹을 깨어서 거기다가 그 죄 덩어리에다가 예수의 피로 그것을 씻어주는 방식으로 새로운 공간의 구성인 백성으로 만들어내시는 작업. 이게 말라기의 구약의 마지막 예언입니다.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홀로 두지 마시고 예수님과 단짝이 되시고 한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