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30413a말2장15절(수치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말라기2장10절,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않았느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해요. ‘우리에게 나의 것은 없다.’ 이것은 마태복음5장에서 햇빛과 공기와 모든 빗물, 단비,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악인, 선인 가리지 않고 다 주신 거예요. 그것도 은혜로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나의 것은 없다는 말이 뭐냐 하면 모든 게 공짜다. 모든 게 공짜에요.
그러면 말라기에서 제사는 뭐냐, 제사란 돌려드리는 것. 누구한테? 이게 중요해요. 나에게 머물게 하지 말고. 중요하다. 이거. 나 혼자 중요하지만. 나에게 머물게 하지 말고, 내가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은 공짜니까 나에게 머물게 해서는 안 돼요. 나에게 머물게 하게 되면 나는 뭐가 되겠어요? 나에게 이건 자아가 되겠지요. 자아가. 나에게 자아가 되는 거예요.
제사란 뭐라고요? 돌려드리는 것. 뭘 돌려드려요? “공짜로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돌려드리는 거예요. 돌려드리게 되면 자아의 내용은 뭐가 되느냐 하면 텅 비워있겠지요. 비워있다. 돌려드렸으니까. 다 드렸으니까. 그러면 드리는 방법은 “공짜였습니다. 제가 노동해서 얻은 게 아니었습니다. 내 자아는 내가 구성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고 돌려드리는 거예요. 이런 고백은 뭐냐 하면, “저요? 저 공짜에요.” 저 공짜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말라기에서 제사이야기하는데 제사란, 돌려드리는 것이다. 돌려드릴 때 그 당시 말라기에서 욕 되게 하거든요. 말라기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할 때 돌려드리는 게 제사인데, 뭘 돌려드리느냐 하면, 자아를 따로 챙기고 형식만 돌려드렸어요. 이 말라기가. 자아를 따로 남겨둔 거예요. 우리는 공짜로 살잖아요. 어느 누가 지 잘난 맛에 못 살잖아요. 목숨도 그렇고 햇빛, 공기, 모든 거 마찬가지에요. 다 공짜로 사는데 자기 자아를 따로 챙기기 위해서 형식만 돌려드리는 척만 한 거예요.
튀르키예에서 얼마전에 지진이 일어났지요. 지진이 일어난지 50초만에 우리나라에서 감지되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지구가 너, 나게 없다는 거예요. 튀르키예가 소식이 얼마나 멉니까. 거기서 지진이 9. 얼마의 지진이 일어나니까 한국에 가만히 있는 멀리 있는 우리에게 감지되었어요. 우리끼리, 너, 나를 나누는 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튀르키예도 하나님이 공짜로 주었고, 한국에도 공짜로 주었기 때문에 너따로, 내 따로가 이 지구상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몽골에서 황사 불었다. 그럼 우리나라는? 관계없는 게 아니잖아요. 국가 경계가 인간이 정한 거예요. 이거 아무 의미 없어요. 바람 같은 거 자연이 불다가 “아, 여기는 중국이네.” “여기는 대한민국인데 조심해야겠다.” 이런 바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건 중국이고, 이건 한국이다. 이건 누가 정합니까? 인간이 정했지요. 인간이 무슨 중심으로 정했습니까? 내 것 따로 챙기기 위해서 국가라는 것이 만들어진 거예요. 니는 니 가정, 나는 내 가정. 내 것 따로. 그런데 제사라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것도 아닌데 나에게 머물게 해서는 안되지요.
그 다음 들어갑니다. 왜 머물게 하지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나의 것이 없다는 뜻이고, 처음부터 나에게 없고, 지금 공짜인데 왜 공짜인데 나의 것을 챙기려 할까요. 공짜인 걸 아는데. 압니다. 압니다. 예, 감사하지요. 하면서도 자기를 따로 챙기지요. 이게 말라기에서 말라기를 통해서 말라기가 바로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요. 말라기가 구약의 마지막이니까. 그 다음과 연결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수치를 못 이긴다.’ 인간은 수치를 못 이깁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창세기3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부끄러워 수치를 못 이기는 거예요. 목숨은 버릴 수 있을지라도 뭐는 못 버리겠다. 내가 수치스러운 자아는 못 버리겠다. 이게 마귀가 우리한테 집어넣어준 거예요. 수치를 못 버리겠다. 그러면 수치를 버린 분이 계시지요.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다는 말은 마음껏 나에게 뭐를 퍼부어라? 수치를 퍼부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나한테 욕을 해라. 그러면 너희들은 스스로 수치를 못 이겼다는 것이 티가 나버려요. 인간들이.
예수님은 욕 얻어먹고 그냥 수치스럽게 죽었는데. 예수님보고 욕을 하는 사람은 왜 욕을 하는가, 예수님이 미워서가 아니라, 저 사람처럼 예수님처럼 수치스럽게 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자기 수치를 못 버린 분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고 다 알지요. 사도잖아요.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수치를 못 이겨서 자아가 그렇게 강해서 의아스럽지요. 나옵니다. 고린도후서12장에 나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다는 말은 우리는 공짜라는 뜻이고요. 하나님께 제사드리라는 말은 니가 공짜라는 고백을 하라는 거고, 그게 하나님께서 주께서 다 주신 거니까 되돌려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지요.
제사에서 지적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짜인데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나에게 머물러 있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누가복음16장 했잖아요. 거기에 유명한 말 나왔지요. 불의한 청지기 나오지요.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재물로 뭐를 사귀라고 했습니까? 친구를 사귀라고 했지요. 불의한 재물, 설명하면 불의한 재물 원래 누구 거예요? 직원 거 아니잖아요. 그 사장님 있잖아요.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가 사장인양 행세하는 거. 주님은 불의한 거 맞다고 이야기해요. 불의한 거 맞는데. 불의한 것은 이게 의로운 게 아니에요. 불의한 거 맞는데, 그러면서도 그 사람에게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뽑아내요.
지혜는 뭐냐 하면 불의하기 때문에 자기가 현재 처지가 멸망당한다는 처지와 연계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 나, 불의하다.” 이게 아니고 “불의하면 나는 이제 조저났어. 나는 이제 죽었어.”라고 불의한 것을 본인이 인정을 하고, 그 다음에 그 대가로 우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예요. 허겁지겁 자기 돈도 아니고 남의 돈을 가지고 챙기려 하겠지요. 지 살 궁리를 하겠지요.
살 궁리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허다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불의한 청지기를 무엇과 연결시켜 봅시다. 무엇과 연결시키지요? 수치와 연결시키는 거예요. “나, 죽으면 안 돼!” “나, 망하면 안 돼!” “그게 왜? 왜?” “나, 수치스러우니까. 부끄러워하니까.” 그런데 이것이 사도바울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거예요. 그것도 구원받기 전의 사도바울이 아니고, 구원 받은 후에 사도바울에게 이같은 일이 또 다시 반복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뭡니까. 육체의 소욕과 성욕의 소욕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되풀이 되는데 고린도후서 한 번 보겠습니다.
단지 수치만 이야기하려고 제가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고린도후서12장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내 육체에 가시 그 다음에 뭐가 나왔다? 사탄의 가시지요. 오? 사도바울이 성령 받았잖아요. 마귀하고 상관없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둘 다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요. 뭐를 증거하는 용도로 활용하겠다는데 뭘 증거하느냐, 이게 사탄의 요소가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아야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비정상이 된 게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지금 망한 게 아닙니다. 지금 지옥가는 게 아니에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무슨 요소가 남아있다? 사탄의 요소가 남아있어요.
사탄의 가시가 왜 들어갔겠습니까? 자, 이제부터 설명합니다. 사탄의 가시가 사도바울에게 왜 들어갔겠습니까? 너, 구원받았으니까 이런 이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뭐? 니 구원받은 입장에서 뭐 안 된다? 니가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거 누구 이야기라고요? 사탄이 그걸 알고 사탄이 들어간 거예요. 니 구원받았잖아. 천국가잖아. 그런데 니가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거. 뭡니까? 나는 결코 부끄러운 존재가 되면 안 돼! 이것을 사도바울도 감당을 못한 겁니다.
베드로처럼 내가 예수님 따라가는데 목숨바치겠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소리 한다는 것은 남들 보기에 대단해 보이지요. 그런데 뭐를 못 이긴 거예요? 자기를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이 머리 좋아서 아시겠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꺾을 수 없는 그 마지막 선, 그 마지막 선을 넘어서는 거예요. 그걸 뭘 넘었겠어요? 주님은. 수치를 넘은 거예요. 수치를.
수치 뒤를 가버린 거예요. 수치로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가득차 있는 이 세상. 그 장벽. 그 장벽을 내가 부산강의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되지도 않는데 영어썼습니다. Blocking. 이걸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발돋음 하세요. 그러면 복음관계가 보입니다.” 중요할 때는 좀 적으세요. 인간들이 있잖아요. 발을 한 번 들어보세요. 발돋음. 저는 이걸 어디서 배웠는가, 봉준호 감독한테 배웠어요. 1인치 자막 1인치만 넘어서게 되면 영화의 참 모습이 보입니다.
이 인간관계가 뭐냐 하면 인간관계가 브로킹(Blocking)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인간관계뿐이에요. 인간관계에서 무엇과 무엇의 충돌입니까. 누가 더 수치스러운 존재이냐, 누가 덜 수치스러운 존재이냐, 그것 배틀하지요. 인간관계에서는.
그래서 마귀는 알아요. 니가 예수 믿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 안 낫다. 이런 논쟁에 마귀가 집어넣지요. 애가 담장을 넘을 때, 애가 야구장에 갈 때, 옛날에는 야구장에는 담장이 허름했거든요. 야구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합니까? 애들이 키가 작을 때는 발돋음하잖아요. 뭘 넘어서는 거예요. 인간관계의 브로킹을 넘어서야 되지요.
그러면 인간관계의 브로킹을 넘어서면 거기에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이 없지요. 인간이 없고 그 브로킹을 건너 먼저가신 누구만 보이겠어요? 예수님만 보이겠지요. 이렇게 발을 탁 드는 거예요. 그러면 남편관계, 자식관계, 아내관계, 모든 가족관계, 시가집, 친정집 모든 관계가 발을 돋았으니까 아래쪽이 보이겠지요.
아래쪽이 보이면서 그 주님이 보잖아요. “주님, 뭘 해결하고 넘어갔습니까?” 물으면 주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창세기3장 해결했다는 거예요. 인간은 어쩔 수 없어요. 병 같은 거예요. 왜? 어떤 병? 베드로처럼 내가 목숨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나보기에 수치스러운 존재, 수치스러운 자아는 나는 정말 싫어. 그거는 극구 밀치고 싶어요. 내가 수치스럽다는 것. 지금 꽉 죽었으면 좋겠어. 수치스럽다는 소리마는 안 듣고 싶은 거예요. 부끄럽다는 말은.
그래서 사도바울이 몇 번 기도합니까? 자기가 사도잖아요. 아프잖아요. 기도를 했겠어요? 안했겠어요? 했겠지요. “사모님, 암 걸렸을 때 기도했어요? 안했어요?” 했지요. 할 때는 내용을 편집해요. 나는 죽어도 괜찮은데 아이 셋 저거..., 괜히 남 걱정 다하는 것처럼 하지요.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조금만 살려주신다면 인생을 주님 앞에 헌신하겠습니다. 되지도 않는 장담들을 하면서 하지요.
그런 기도하지 말고 발돋음만 하면 되는데. 발만 돋아버리면 인간관계 브로킹 없어지지요. 그런데 그 중요한 거 있어야 돼요. 주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사도바울에게 그 인간관계 속에 사도바울을 집어넣어버려요. 우리 주님께서. 왜 집어넣느냐, 니가 뭔데? 이걸 주님이 이렇게 합니다. 니 은혜가, 고칩니다. “니 역할이야. 니 역할이 그만하면 됐어.” 니는 니 역할을 니가 넘어설 수 없다는 거예요. 왜? 예수님의 증인되어야 되니까.
내가 구원받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나는 이러합니다. 나는 □입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건 인간관계에서 성립되는 거고, 주님이 건너갔는데 건너간 주님이 보이게 되면 주님 쪽에서 우리는 역할과 기능을 부여받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그게 뭐냐, 니 은혜가 그걸 은혜라 해요.
네게 준 기능이 네게 충분하다. 그 기능이야. 니가 사탄의 가시로 원초적이라 하는데. 원초적 애초적 요소가 우리의 몸에 있는 한 우리 속에 같이 섞여있습니다. 그게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에서 갈등을 유발하게 되어있어요. 계속해서. 우리는 그걸 보고 괴로워서, 기준을 무슨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습니까? 나는 수치스럽지 않고 싶다가 기준이 되어가지고 발악을 해요. 막 노력을 한다고요. 요건 발돋음을 하게 되면, ‘아, 지금 내가 역할이 중요한데 나는 뭐에 수치스럽지 않아야 된다는 것에 대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몰랐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뭐냐 하면 너를 시원이라 하는데, 시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오리지날.
시원의 요소를 집어넣어서 사도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고. 어렵게 말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품고 있다. 어려운 말로. 내가 아무리 기억해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내 안에 들어있었던 거예요. 심지어 그것조차도 공짜에요. 그것조차도.
내가 나에게 필요한 것 뽑아내고 내가 구성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일방적으로 나를 다루시는데 내가 미처 기억도 않는 요소까지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용도로 활용하신다 이 말이에요. 그게 사탄의 가시에요. 그냥 몸이 아픈 게 아니고 감기기운이 아니고 사탄의 가시에요.
시원적인 것, 오리지날. 그렇게 되게 되면 요것을 신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사도바울을 산 제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산 제물. 말라기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드릴 때 정성껏 농산물 드렸지요. 드려봐야 뭡니까. 아까같이 자아 남기고 뭘 드렸다? 형식을 드린 거예요. 형식을.
만약에 제사 드릴 때, 가장이 제사드릴 때 위선적인 행동을 제가 수십년동안 30년 동안 본 사람이에요. 우리 집이 강력한 유교집안이라서 우리 할아버지가 술로 돌아가셨어요. 그 때는 제 명이었어요. 거의 70가까이 가셨지만. 술을 너무 많이 드셨어요. 특히 사기 당하고 난 뒤에 그렇게 술을 많이 드셨어요. 그렇게 하면서도 제삿날만 되면. 제삿날이 몇 번인가, 1년에 10번은 아니고 한 5번 왔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할머니 애먹었어요.
하게 되면 두루마기 꺼내고 열단 병풍 딱 치고, 나는 제삿날에 열단 병풍 보고 있으면서 갓 쓴 노인네 낚시하는 거 보고 있고, 점잖은 다 빼고 있어요. 왜냐, 뭘 안하기 위해서. 술 잡술때 그 모습하고 다른 그 때만큼은 의젓해 보이는 거예요. 자아 빼놓고 자아 챙기고 나머지는 전부 다 자아를 보호하는 수치를 감추는 형식과 제도로서 그냥 입막음하면서 제사 드린 거예요. 말라기가. 확 오지요. 이 말라기에 그렇게 욕하는 이유를.
그러면 3장에 들어와서 주님의 조치는 뭐겠습니까? 2장에서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그 다음에 2장17절부터 주께서 임하시는 날이 와요. 제목을 붙인다면 주께서 임하시는 날, 자, 그러면 이렇게 꾸지람을 했으면 우리 같으면 뭡니까. “똑바로 제사를 드려!” 가 되잖아요. 그렇죠. 니가 이렇게 했고, 이렇게 했고, 니가 아버지의 취지를 공짜를 모르고, 도로 드려야 될 텐데 반띵한다고 지가 챙기고 챙기면서 하나님 저 믿습니다. 이리 나오니까 앞으로 똑바로 하라는 말이야, 제대로 하라는 말이야, 우리네 상식인데.
그게 아니고 “주께서 왜 오십니까?” 올 때가 되었다는 거예요. 3장에서. 올 때가 된 거예요. 올 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무르익어야 되느냐 하면 드디어 맛이 갔다는 표현이 있지요. 이 제사도 이제는 식상했어. 지루해요. 새롭지가 않아요. 제사드리는 당사자도 새롭지 않고, 제사 받는 하나님도 본문에 나오지만 “야~ 좀 지루하다~ 아~ 정말 지루해.” 이 제사제도가 지루하고 드리는 사람도 재미없고 형식으로 하니까.
그럼 인간 쪽에서 조치를 내려야 돼요? 하나님 쪽에서 조치를 내려야 됩니까? 하나님 쪽에서 조치를 내리는 방식이 이 제사제도의 완전함, 완벽함을 어떤 분을 보내서 대신 실시하겠다는 그래서 율법을 이루겠다는 것이 3장에 죽 나옵니다.
3장 나오기 전에 2장에서 철저하게 그들의 속내를 지적을 해야 되겠지요. 말라기2장에서. 왜? 3장에서는 아예 인간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심지어 제사 드리는 제물부터 제사드리는 당사자까지 공짜로 오십니다. 왜 처음부터 한 아버지니까요.
자, 그러면 2장10절을 다시 보게 되면요. 자, 그러면 여러분 의문점은 ‘분명히 아까 목사님께서 모든 세상에 악인과 선인에 다 공짜로 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도 하나님의 공짜입니다. 하면 구원될 수 있잖아요?’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지요.
오늘 본문 2장10절에서 아버지를 하면서 뭐를 지목하느냐 하면 아들을 지목해요. 그러면 어제 수요일 설교한 거 잠깐 볼게요. 예루살렘이 있다. 할 때에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예루살렘도 있지요. 다른 나라도 있고. 자기의 직장도 있고. 자기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예루살렘은 없다가 아니라 예루살렘 있는 건 인정하는데 그 중에 여러 가지 중에 뭡니까. 하나이지요. 왜?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중심이라는 말은 자기가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단도리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어제 재판장, 선지자, 방백들, 방백들이 왜 법 모르는 서민들을 등쳐먹었습니까. 이 중간계층 이 사람들은 뭐냐, 본인을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활용한 사람이에요.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공격은 이들에게 향했잖아요.
제가 어제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여러 가지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뭡니까. 예루살렘만 있다는 거예요. Only. 예루살렘만, 만, 있다. 이걸 예수님께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인간들은 나말고, 아까 인간관계있지요. 발돋음하기 전에 브로킹 보기 전에. 앉아서 인간들 관계에서는 너도 인간, 나도 인간, 나는 여러 가지 인간 중에 하나가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여럿인간, 여럿인간 말고 오로지 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 유일하게 연결이 성립되는 어디다가 집중하느냐, 아들에게 집중해요. 수요일날 예루살렘에 집중하는 것처럼 오늘은 아들에게 집중한다고 보시면 돼요. 예루살렘은 누가복음 13장에서 선지자가 죽어야 될 공간이, 선지자가 죽는다는 말은 이건 시간관계상 말씀 안 드렸습니다만, 요한계시록11장에 보면 그곳이 바로 선지자가 죽는 그곳이 예루살렘이에요.
선지자가 죽는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고 거기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제 수요일 윤석열 국정지지율하면서 제가 그런 질문을 던졌지요. 예수님이 만약에 대통령이라면 지지율 몇 %나오겠느냐고.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들었어요. 질문을 그렇게 하기 전에 한 번 순서를 해봅시다. 장로가 대통령이라면 지지율 몇 %나오겠어요? 목사가 대통령 된다면 몇 %나오겠습니까? 사람들은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하겠지요. 하나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되겠어요? 0%나옵니다. 0%나와요.
하나님께서 2장10절에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한 아버지께서 지은바가 아니냐고 하면서 자꾸 물어요. 한 아버지가 지은 바가 아니냐. 하나님께서 3장에서 어떤 분을 보내기 전에 어떤 작업을 하느냐 하면 지워버리는 장차 오실 제대로 아버지를 아는 그 분 말고, 나머지기 사람들을 가위표, 지워버리는 작업으로 뭐냐 하면 성결, 그리고 제사를 문제 삼아서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12절,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어디의 장막에서 끊어 버린다 했습니까? 야곱의 장막에서 끊어버리고 나오지요. 그 다음에 13절,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 아니하시지요.
15절 봅시다. 15. Has not the LORD made them one? In flesh and spirit they are his. And why one? Because he was seeking godly offspring. So guard yourself in your spirit, and do not break faith with the wife of your youth.
(NIV) 15. And did not he make one? Yet had he the residue of the spirit. And wherefore one? That he might seek a godly seed. Therefore take heed to your spirit, and let none deal treacherously against the wife of his youth.(KJV) 15. "But not one has done [so] who has a remnant of the Spirit. And what did [that] one [do] while he was seeking a godly offspring? Take heed then, to your spirit, and let no one deal treacherously against the wife of your youth.(NASB)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이리 되어있지요. 한 개를 남기기 위해서 그동안 자칭 경건하다는 자들을 딜렉트 지워버리는 거예요. 지워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행위로만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예수님의 천국에 들어갔다는 이유 때문에 뭐를 아낌없이 지워버려요? 내가 행한 것은 아낌없이 지우개로 지워버려야 되겠지요. 지워버리는 거예요.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 지워버릴 때 뭐도 지워버려요? 바로 지워버릴 때 나의 세계관도 같이 지워버리는 거예요. 나의 세계관.
자, 요점을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 빼놓고 이걸 왜 다 지우는가, 그것은 아까 발돋음했지요. 발돋음해서 브로킹을 넘어서시기 바랍니다. 인간 대 인간관계 아닙니다. 거기서 훌륭한 인간된다고 뒤쪽을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발돋음을 해야 됩니다. 발돋음을 할 때 그 자세는 더 이상 저 넘어가신 분이 공짜로 주신 분이기 때문에, 나는 공짜로 제게 없습니다. 하는 사람만이 발돋음을 할 수 있어요.
이걸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래가지고는 발돋음 되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제사제도를 통해서 3장에 오실 그 분만 남기기 위해서 한 아들, 한 자손 그 분을 만드는 작업에 제거하는 작업에 나서십니다. 그럼 우리는 무슨 대상입니까? 아주 기쁘게도, 아주 감사하게도, 우리가 제거대상이 된다는 게 기쁘지요. 사탄의 가시를 넣어서 제거해 버리는 것. 우리한테는 은혜지요.
더 이상 내 자신에게 신경 안 써도 되니까요. 그 점을 이제 도표로 그려보겠습니다. 이 도표는 어디서 따왔느냐 하면 여기서 따왔어요. ‘라캉의 광학모델’ 제목을 밝혀주는 것은 녹취하시는 분에게 캡쳐 할 수 있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를 알려드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라캉의 광학모델은, ‘자아는 가짜다.’ 자아는 가짜라는 사실을 광학모델로 라캉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모델로 밝혔습니다. 가짜. 가짜니까 광학모델을 제가 그대로 한 번 그 사람의 설명에 따라 그려볼게요.
상징적 공간(허상의 세계,상징의 세계)
대타자
눈:주체 거울
↖주체,자아이상
오목거울
(큰타인)
↑
‘나는 이럴 수가 없다!’
“진짜 나는 진짜 나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진짜 나는 니가 알 권한과 권리가 니한테는 없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가짜니까, 실선으로 하면 안 되겠지요. 점선으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자아가 보는 세계관만 가짜가 아니라 자아라 생각하는 것도 가짜가 되고, 자아가 건설하는 자기 세계관, 그래서 자기 단도리하는 그 세계관도 가짜다. 어제 스바냐에 의해서 재판장이나 선지자나 방백들이 본인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고 이 감히 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자기 걸 챙긴 거예요.
그 이유는 뭐라고 했습니까? 수치스럽지 않는 자아가 되기 위해서. 자아가 가짜인데 수치스럽지 않겠다는 그 시도가 다 헛수고가 되겠지요. 제가 라캉이 이야기하는 용어는 다 빼겠습니다. 이거 하면 골치 아파요.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만 이야기하고 그 사람이 쓰는 용어는 이 제자리에서 다 빼겠습니다. 이 사람은 가짜인데 가짜가 진짜 행세하지요. 진짜 행세한다는 거예요. 가짜인데 진짜 행세한다는 거예요.
그 가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아라고 이야기하고, 자아 또는 나라고 하고, 진짜를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나누어요. 아주 알기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자아(나)는 내가 상상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상상할 때 이게 나에요.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무엇이 될까, 여기에 나라하는 것은 상상하는 나에요. 상상이니까 다른 사람이 끼어들 필요가 없지요.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보고. 그러니까 이건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건 타인이 남이 보게 되면 이걸 자기애에요. 자기 사랑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지요. 자기 사랑에. 요게 뭐라고요? 이 사람은 가짜라는 거예요.
그러면 가짜가 주체가 되게 되면 이것도 가짜지요. 가짜인데,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할 때는 이건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이 너는 이렇다고 이야기해주게 되면 우리는 그 순간 주체가 되는 겁니다. 주체가.
그러니까 주체의 특징은 해체와 재설정이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이 주체는 이 사람이 이렇다 하면 그래, 나 그런가, 저 사람이 와서 이렇다 하면 서로 상반되는 의견을 할 때는 이 사람이 했을 때는 내가 그렇다고 했던 그것이 순간적으로 또 해체되고 저 사람이 하는 거 가지고 뭐가 됩니까? 내가 재설정을 하게 되는 거예요.
한 몇 년 지나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또 재설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남들에게 휘둘리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럼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하잖아요.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휘둘리지 않겠다고 이건 남들이 이야기하기 전에 이건 내거라고 잡아 있잖아요. 그것 자체도 이미 남들이 손을 본 거예요.
어린 애가 뭘 압니까. 부모가 이야기한 것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이상은 이건 새로운 정보가 오지 않는 한 유지하고 있다가 새로운 정보 선생님이 와서 뭐라고 하면 바꾼 용도지 재료 자체는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휘둘렸고, 죽을 때까지 휘둘리고 둘 다 가짜에요.
자아(이상 자아)도 가짜고, 주체(자아 이상)도 가짜인데, 가짜이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은 진짜가 없어요. 이게 허상의 세계에요. 허상의 세계 이걸 가지고 라캉은 뭐냐 하면 이게 상징화된 세계. 상징의 세계. 이걸 현실로 보는 거예요. 현실. 상징의 세계. 내가 나밖에 모르는 이것을 이게 상상의 나의 세계. 나의 세계로 된 겁니다.
그러면 상징의 세계인데 그럼 텅텅 비워있으니까 실제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라캉은 광학실험을 해요. 그래서 제목이 광학모델이에요. 광학실험을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광학실험을 해보는 겁니다. 받침을 딱 하나 해놓고 받침안에 항아리를 딱 놔요. 받침안에 항아리를 놓는다 말이에요. 받침대 위에다가 꽃을 놔요. 실험이니까 얼마든지 이리 만들어낼 수 있어요. 실험이니까. 여기다가 오목거울을 딱 두는 거예요. 오목거울을 놓고 실험을 해요. 오목거울을 두고 여기다 따로이 보통 거울, 평평한 거울을 딱 하나 만들어 둡니다.
왜 이런 실험을 하느냐 하면 오목거울에 비친 이 상이 실험에 딱 비출 때 어떻게 비추느냐 하면, 요 안에 있었다고 여겼던 이것이 위로 올라와요. 올라오고 꽂혀져 있던 꽃이 밑으로 내려가겠지요. 상이 반대로 뒤집어지니까. 왜 이런 실험을 하느냐 하면 인간의 이 허상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가짜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짜이외에는 실제적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실제는 진짜 있는 것. 가짜 말고 진짜 있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진짜 나 있잖아요. 진짜 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 오목거울이 해가지고 이렇게 받침대 안에 항아리가 있고 받침대 위에 꽃이 있는 거예요. 여기서 이 주체가 가짜입니다. 주체가 받침대 안에 꽃병이 있고, 받침대에 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럴 수가 없다는 거예요. 받침대에 꽃병이 있고, 꽃병 위에 꽃이 있는 게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이걸 본인이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 세상은 다 이런 세상이니까. 이미 타인으로부터 교육받고, 훈육받고 있는 모든 세계에서는 내가 그들과 함께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돼요. 왜 그래야 돼요? 안 그러면 내가 그 사람에게 뭘 듣기 때문에. 수치의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들의 세계가 가짜들의 세계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빠져나갔지요? 인간관계에서 발돋음 했지요. 발돋음 할 때 그냥 당한 게 아니고 뭐를 심하게 당했습니까? 수치를 당했지요. 베드로가 그걸 못 넘었지요. 사도바울은 죽을 때까지 이미 넘은 채로 주님 증거하기 위해서 그 안에 들어있어야 되고.
베드로는 죽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기 수치는 못 느끼고. 나중에 닭 울 때, 시시한 미미한 닭이 울 때, 비로소 내가 니보다 더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막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내가 어디서 막히는지를 알았던 거예요. 내가. 어디서.
이 수치스러운 존재가 안 되려고 했던 이것이 나를 폐쇄시킨 거예요. 나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진짜는 있어요? 없어요? 운다고 해서 진짜 되는 게 아닙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진짜 되면 안돼요.
어제 수요일날 요약할 때 이렇게 했잖아요. 천국 갔을 때 이사야6장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그거 했을 때에 제가 요약해서 이렇게 썼어요. 한 번 적어볼게요. 이사야는 이 땅에서 죽을 필요도 없고, 살 필요도 없다. 요약한 거 제가 적어놨습니다. 읽어본 사람은 알 거예요.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을 때에 내가 이 자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본인하고 아무 상관이 없게 된 거예요. 상관이 없어요. 내가 어느 게 진짜냐, 가짜냐, 자체가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냥 공짜로 주시는 내일의 목숨가지고 공짜로 주시는 햇빛과 공기 속에서 자기 자아 가짜가 예수님 앞에서 수치를 넘어선 예수님 앞에서 내가 날마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을 삭제 당하는 기쁨과 즐거움만 있으면 돼요. 딴 거 필요 없어요. 그리 되는 거예요.
다시 계속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보고 싶은 거예요. 이 실험을 딱 하면서, 오목거울을 했는데 이런 그림을 연상한다는 것. 이런 그림을 연상한다는 것. 이것은 진짜는 이 막 뒤에 있는데 그 막 뒤에 있는 진짜 그림을 원형 있잖아요. 받침대 안에 거꾸로 꽃병 있고 받침대 위에 꽃이 있는, 거꾸로 단지가 있는 이런 것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예요.
한 번 적어볼게요. “나는 이럴 리가 없다.” 사람이 뭘 되기가 싫은가 하면 바로 요게 되기가 싫은 거예요. 내가 이럴 리가 없어. 이럴 수가 없어. 자기 딸을 학교에 보냈는데 60대 운전사가 장례식에 술 한 잔 먹고 와가지고 애를 학교 앞에서 죽였습니다. 그 소식 들을 때 엄마의 즉각적인 태도는 뭡니까? 이럴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 전쟁 그렇게 이야기해도 남의 이야기에요. 남의 이야기입니다. 아, 그래, 전쟁해라. 그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런데 내 딸이 죽었을 때 그럴 수는 없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지 자식 죽일 때, 대부분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보통 사람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 저한테 이런 지시를 내린 적 없지요. 그지요? 하나님, 똑바로 이야기하세요. 이런 지시를 저한테 내린 적 없지요. 그지요? 나는 진짜 나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진짜 나는 니가 알 권한과 권리가 니한테는 없다.” 왜,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거 가짜입니다. 이게 주체에요. 좀 더 여기서 용어를 붙인다면 이 상징계에 현실세계에서는 가짜 주체와 나. 나(이상 자아)와 주체(자아 이상)의 차이점은 뭐냐, 주체는 타인이 개입했다는 것이고, 요거(자아)는 뭐냐 하면 자아, 이건 이상 자아라 하고, 이 용어 괜히 이야기했어. 이게 너무 헷갈리기 때문에 이건 잘 모르는데 이건 잊어버리시고.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내가 어릴 때 상상의 세계 어릴 때거든요. 세상에 나가지 않았을 때에 생각했던 나에요.
그래서 세상에 나가서 휘둘리는 거예요. 휘둘리지 않는 방식으로 휘둘리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까. 가장 나를 붙잡는 것은 내가 수치스러운 존재가 안되어야 된다는 이건 사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아담이 치마 입은 거, 해 입은 거 그 원리는 우리가 어디가도 뽑아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수치가 되지 않는 방향 같으면 누가 어떤 이야기를 내가 골라잡아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자아 이상이에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니 커서 뭐 될래? 대통령 되고 싶어. 대통령은 왜? 수치스럽지 않기 때문에. 계속 골라가는 겁니다. 계속 찾는 거예요.
내 주체에 합당한 나의 직업, 나의 환경, 삶의 모든 것. 끊임없이 찾아다닙니다. 이 모든 세계가 어느 세계에서 일어난다 했습니까? 무슨 관계? 인간관계. 인간관계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마찬가지고, 성도는 물론이고, 담궜다가 부활의 이름으로 담궜다가 빼내는 거예요.
다시 하면, “나는 이럴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 예수님 믿는 사람 잡아 죽일 때 자기의 확실한 태도였습니다. 내가 달라져요? 안 달라집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30413b말2장15절(수치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2장17절 보겠습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이리 되어있지요. 아까 한 거 다시 한 번 크게 적어볼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의 예상을 벗어납니까. 이 말이지요. 본인이 가짜인 걸 모르고, “왜 하나님은 내가 알아야 될 범위 바깥에서 일하십니까. 왜 사탄의 가시가 저한테 왜 들어옵니까? 저한테 물어보면 제가 하나님하고 어떤 관계인데, 사도의 관계인데, 왜 하나님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조치가 왜 저한테 주어집니까?” 라는 그 말과 같은 말이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뭐냐 하면, “내가 그렇게 나빠요?” 내가 그렇게 나빠요?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주님께서 1번에서 2번으로 건너오는데 니가 여기에 대해서 하등 손대지 말라는 거예요. 둘 다 공통점이 뭐라고요. 둘 다 공통점을 따라 시작! “그럴 수는 없습니다.” 2번은 좋아서 그런 거예요. 주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주님 왜 그러세요. 똑같이 주님 왜 그러세요? 하면서 한쪽은 분노지요. 한 쪽은 뭡니까. 환희입니다.
이사야6장 말씀처럼 내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지금 이사야가 슬퍼서 이야기하는 겁니까. 예상 밖의 자기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 거예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망하게 되었다 해서 망하는 게 아니에요. 망하게 되었다는 기능. 그 역할을 자기 입에서 내뱉었다는 그 사실이 “주여, 저를 그렇게 사용하시다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좋아서 하는 말이에요. 좋아서. “아무것도 아닌 저를 사용하시다니 이럴 수가 없습니다.” 좋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것을 아까 여러분이 골치 좀 아프더라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까 라캉 이론을 해볼게요. 라캉 이론에서 복잡하지만 이런 겁니다. 나라는 것은 ‘나’입니다. 나. 이걸 주체라 했지요. 주체. 이게 무슨 계? 현실을 뭐라고 했습니까? 상징의 세계. 모든 게 상징이에요. 왜 상징일까요? 실제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전부 다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왜곡해서 다 내가 내 맘대로 해석해서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 뭐라고 하든 좋다고 하든 곧이곧대로 안 들어요. 어느 쪽이 내가 수치스럽지 않느냐 쪽에서 내가 일반적 해석을 경유해서 “아, 나 그 사람 맞아요.” 하는 거예요.
“나, 죄인 맞습니다.”이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죄인 맞습니다. 고백함으로서 나는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위장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게. 그러니 현실은 상징계거든요. 상징계인데 여기서 누가 있는가 A(큰타인:대타자)큰 타인이 계속 나한테 영향력을 줘요. 영향력을. “좀 잔소리하지 마세요. 나, 산속에 들어갈 거예요.” 하면서도 궁금해하는 거예요. 누가 그러는데? 니가 그런 사람이라 하나? 고레? 주체 자체의 형성에 있어서 타인들의 요구사항이 나한테 도달해요. 타인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게 나에요. 너는 이리해야 되고, 너는 저리 해야 되고. 너는 우리 집안의 영광이야. 니는 이래야 니는 사람다운 실망스러운 존재가 안 되는 거야. 계속해서 꾸준하게 이게 누적이 된 겁니다. 계속해서.
가만히 있는데 집 앞에 타인이 보낸 택배가 계속 오는 거예요. 보니까 금반지. 꼭 해야 될 것 같아. 택배 금반지 안에 금반지 보내고. 모자 보내니까 모자 써야 될 것 같고. 미지의 누가 모자 안 쓰면 미지의 누가 욕할 것 같고. 우리의 인생은 계속 노출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외부요소가 수입이 되는 거예요. 수입이 그들의 욕망에.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대비책해서 수치스럽지 않도록 자기 조절에 나서고. 이게 너나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여기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막이 들어와요. 딱딱한 쇠말뚝이 이게 차단시켜 버립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실제에요. 실제. 진짜로 있는 것. 진짜로 있는데 여기 A라는 타인이 만든 현실세계 상징의 세계에서 나는 주체(S)가 될 때에 이 사람들이 뭘 하느냐 하면, 말을 하고 언어를 말하고 몸짓으로 이야기했거든요. 우리한테 정신적 심적 압박을 가했어요. 굉장히 압박을 가한 거예요.
“바로 니안에 블랙홀(빈자리) 만들어놨다!”
말,언어,몸짓→압박
(레위언약)
현실은 상징의 세계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야 되고, 자식이 자식다워야된다고 압박을 가했던 거예요. 압박을 가하니까 나한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자기 사랑에 빠져있어요. 자기 사랑에 빠져있는데 자꾸 요구를 하니까 내가 뭐가 되겠어요. 이게 균열되는 거예요.
나는 내 한 고집하거든요. 한 고집하는데 다른 사람이 요구를 하니까 쪼가리 나버린 거예요. 평생토록.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분열된 주체($). 쪼가리 났으니까 내가 나를 종잡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본드가지고 붙여야 되겠지요. 붙이는데 붙이는 방법을 내가 몰라요.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는 괜찮은 계기를 주는 타인이나, 타인의 요구나, 타인의 혜택이 오게 되면 이게 또 후딱 붙어요. “이거야 맞아! 그렇지! 이게 나였어.” 하고 후딱 붙어버려요.
그런데 그 사람이 배신한다든지 떠나버리면 이건 더 아픔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왜? 인간은 자기 사랑밖에 모르기 때문에. 내가 예상하는 것. 그래서 제가 어제 수요일날 그런 내용을 했지요. ‘인간이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나를 유지할 의도가 있다.’ 어제 했는데 기억나십니까. 하도 후딱 해버리니 기억 안 나지요. 오목사님 녹취보면 다 나와 있을 거예요. 내가 어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기대를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버티겠다는 거예요. 나는 버티겠다는 그 고집이 작동하는 거예요. 뭘 버티는데? 니가 누군데? 니가 누군데 버티는데? 할말 없지요. 왜? 나는 남들이 만들기 때문에. 남들이 만들었는데 자기 사랑에 빠져가지고 그 재료를 남이 주는 욕구 중에서 얼기설기 해가지고 그냥 대충 설정한 거예요. 조립을 한 거예요. 조립을.
조립을 했다가 뭐가 오게 되면 조립한 거 어떻게 됩니까. 얼마나 어설픈지 다 깨지겠지요. 그 작업 자체가 다 무용지물 소용없다는 것을 쇠말뚝이가 날아오지요. 이 쇠말뚝이 이 진짜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이거 중요하다. 말로 표현 불가. 라캉 철학은 여기까지에요. 현재 밝혀낸 것은. 얼추 밝혀냈지요. 어디까지 내렸느냐 하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되고, 막히는데 그 막히는 “누구야? 너!” 누가 나한테 15년동안 군만두 먹였어! 누구야? 너! 막히는데 그건 말로 표현이 안돼. 말로.
왜냐? 모든 말은 어디에 해당됩니까. 모든 말은 기성 세대에서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말인데 말로 표현이 안되는 거예요. 말로 표현이 안되니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 딸이 어떤 딸인데 왜 아침에 등교하다가 왜 죽습니까.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주체가 자기가 딸과 함께 행복하다는 주체가 어떤 우발적인 사고로 인하여 어떻게 됩니까. 분열됐지요. 분열된 거예요.
이태원에 갔다가 자빠져서 죽은 사람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고 난리지요. 책임자 추궁해가지고 안전관리 장관 사태하라 하지요. 그럼 나라에서는 그 분열된 주체는 뭘로 붙입니까. 4억, 3억, 이러면 돼! 세월호도 4억5천 줬다는데 니도 하면 되겠어? 돈. 그래도 내가 자식 팔아서 돈 벌었다는 소리는 그건 아니야. 그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 누구보고 합니까?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지요. 나, 분열된 거 아니야. 나, 버티고 있어. 또 고함지르는 거예요. 그런데 원인은 뭐였습니까? 세상도 이것도 가짜고, 나도 가짜고, 진짜는 가짜를 가짜로 폭로시키는 진짜의 난입. 딱 떨어져요. 그냥 쑤셔버려요.
공사장에 공사하다가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은 그게 되는데, 공사장에 만약에 공사 재료가 되는 철근이 몸 신체를 통과해버리면 이게 진짜 완전히 절단나지요. 다리를 절단하든지 절단났지요. 충격적이지요. “신이시여, 저한테는 이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인간이 봉합할 수 있느냐 분열된 세상에 대한 욕구와 세상이 나한테 한 욕구와 내가 그 욕구에 부흥해서 탐을 내는 나의 탐심이 이렇게 연결된 것 그것이 인간이거든요.
여러분이 이건 안다 치고 여기 한 번 적어볼게요. 오늘 이걸 제목으로 삼고 싶은데요. 이게 뭐냐 하면 이미지인데. 쉽게 말하면 ‘얼룩덜룩’ 이에요. 아까 거울에 비친 내가 원한 것만 보고자하는 그게 자아상이 얼룩덜룩 어떤 얼룩이 져 있는 거예요. 거울을 통과하지 못해요. 그냥 얼룩이에요. 내 자체가.
구체적으로 하나가 된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이게 하나가 안 되고 해리된 상태, 찢어진 상태, 좀 저 사람과 됐다 싶으면 또 찢어진 상태. 조립과 해체를 매일 반복하는 거예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 작동하듯이.
거울에 있는 이미지. 이미지를 통과를 못하는 거예요. 실제는 거울 뒤에 있는데.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말에 대해서 따로 모든 일을, 모든 율법을, 모든 일, 율법이 되겠지요. 다 이루실 분. 왜냐 하면 이게 말라기거든요. 구약이라 말이지요. 구약이니까 이루신 게 아니고, 이루실 분을 따로 보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주체, 분열된 주체, 쪼가린 난 분열된 주체, 쇠막대기 지나갔으니까 쪼가리 났잖아요. 이 쪼가리 난 것을 자꾸 결합을 하려 하는 거예요. 그 때 좋았어. 작년에는 내가 너무 좋았는데 이럴 수 없습니다. 뭘 이리 집어넣어야 되지 않습니까. 샌드위치에 패티를 넣든지, 뭘 집어넣어서 하나가 되는데. 이게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이것도 가짜고, 이것도 가짜기 때문에 합쳐도 가짜에요. 백날해도 가짜에요. 그 다음 날되면 다른 사람 또 짝을 진다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 세계 말고 이 얼룩말고 이 뒤편에서 거울 뒤편에서 진짜 아들 하나님의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것을 저는 이제부터 강의할 거예요. 지금부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는 야곱으로 되어있어요. 야곱. 말라기1장2절 한 번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무엇을 사랑했고? 야곱을 사랑했고. 야~ 참, 공부 좀 했으면 여러분 좀 알아야 돼요. 야곱을 사랑한 게 아닙니다. 사랑이 뭘 만드는가, 야곱을 만들었어요. 이 이야기는 로마서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먼저 있었고, 사랑의 역할, 사랑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뭔가 인간을 만드는데 그게 바로 야곱이에요. 야곱이고요, 미움이 먼저 있는데 그 미움을 미움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여기 3절에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들의 산은 황폐하다. 이리 되어있지요.
에서는 미워했으니까 여기 에서가 나왔지요. 이것을 가지고 시원적이다. 원초적이다. 아까 사탄의 가시했지요. 원래적으로 하게 되면 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은 뭐냐 하면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요거.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
야곱안에 사랑이 나오는데 야곱 안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하면 아버지와 그리고 우리에게 새롭게 찾아오실 아들 사이에서 나온 사랑이 구약 때 먼저 초반에 야곱에서 줬다는 이야기를 말라기에서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사란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란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것을 되돌려 줌으로서 “나의 원천은 현재 분열된 나에게 원천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나의 나됨은 내 안에 없고 나는 공짜로 주신 게 되니까 내가 끌려가는 그곳에 나의 원천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 골로새서에서는 이걸 누구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 드리는 작업에 말라기2장에서 죽 이야기하는 것은 제사였습니다. 그 제사 직업에 종사하는 자가 누구냐, 제사장이었어요. 제사장. 제사장은 백성들을 누구한테 돌려드려야 돼요? 아버지께 돌려드릴 때 그게 사랑의 표현이잖아요. 돌려드릴 때는 내가 옳다, 그르다 하면 돼요? 안돼요? 안되지요. 내가 나한테 평가할 대상 자체가 아니에요. 사랑은 이미 저쪽에서 평가가 이미 끝난 상태에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니가 굳이 니가 새삼스럽게 사랑에 대해서 니가 평가할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위주가 되어버리면 에서처럼. 사랑을 내 차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심지어 이 야곱이라고 하는 이 나라가 되면 이름이 뭐가 돼요? 이스라엘 되지요. 이스라엘이 방향이 아버지와 아들은 공부했지만 복습합시다. 오늘 어렵기 때문에. 아들은 인간 쪽에서 뭐가 되겠어요. 그럴 수 없느니라, 에 해당되는 분이에요. 왜? 인간들 많은데 굳이 아들이 또 올 리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로 온다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아들을 보낼 리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라고 되지요. 그런데 장님이나 문둥병자는 어떻게 봅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잘 오셨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쓰지 않도록 해주는 거예요. 하여튼 제사는 방향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쪽에서.
이스라엘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왜 만들려고 했습니까? 에서에서 갈라진 이것을 두조각 난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떻게 합쳐서 사랑받는 사람이고 싶은 거예요. 누가? 본인이. 그게 바로 가짜지요. 그게 상징의 세계지요. 실제가 아니고, 상징의 세계.
실제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아들을 보냈지요. 그러니까 이 아들은 뭐냐 하면, “그럴 수가 없나이다. 그럴 수 없습니다.” 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구원 받는다는 것, 천국간다는 것이 성경책은 이렇게 두껍잖아요. 두꺼운데도 막상 구원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별 할말이 있어요? 없어요? 욥처럼 말하기를 제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합니까. 제가 끼어들 잽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지요. 끼어들 잽이 안돼요.
종교가 문제가 말이 많다는 거예요. 여러가지 형식을 만들어내야 되니까. 왜 만듭니까? 내가 가짜가 되지 않고, 내가 진짜가 되기 위해서, 끌어모아야 될 것이 있다는 거예요. 끌어모으면 안돼요. 돌려드리면 되지요. 자꾸 끌어모으겠다는 것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있는 사도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한 거예요. 계속 진도 나갑니다.
자, 말라기에서 야곱마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의 레위언약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저주받는 에서도 실패했고, 야곱도 실패했고, 그러면 ‘똑같잖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차이점이 있습니다. 실패한 이유를 알겠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가져와서 하나님 앞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경건한 자로 만들려고 시도한 것. 실패입니다.
실패한 대상의 특징은 뭐냐 하면, 빈자리입니다. 다시 뭐가 빠져나간 빈자리. 하나님의 형상이 빠져나간 그 빈자리. 그 빈자리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여기에 모이게 만들었어요. 일종의 반지가 되어버리지요. 안에는 빈자리가 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 빈자리에서 뭘 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에 해당되는 새롭게 계시하는 하나님의 일이 여기서 어떻게 나올까를 보게 되지요. 마징가제트! 나오지요. 뭐 하나 툭 튀어나오는. 툭 튀어나온 걸 보게 하지요.
그러면 요 주변에 있는 이 사람. 주변의 이 사람과 새로 등장할, 이것도 미지니까. 말라기는 미지입니다. 말라기는 아직까지 예수님이 안 오셨어요. 말라기는. BC400년경이니까요. 미지의 사람과 무슨 관계? 새로운 계약 관계가 성립됩니다. 요것이 뭐냐, 제사 언약이에요. 레위 언약이에요. 레위 언약.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이 레위언약의 특징은 뭘로 완성되는가, 그것은 바로 죽음으로서. 제물의 죽음으로서 이것이 제사니까. 죽음으로서 성취가 돼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뭐를 쳐다봐요? 레위언약을 본인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말라기를 지적을 통해서 알았어요. ‘아, 내가 우리가 한 짓이 이런 짓이구나!’ 내가 하나님을 믿고 나중에 메시아를 믿어서 구원 얻고자 하는 이 짓과 이건 우리가 아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다는 무슨 뜻이에요? 내가 예상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과 무관하게 일을 진행시키는 주께서 나타난 어떤 결과 그것이 여기서 이 블랙홀에서 아무도 없는 빈 자리에서 툭 튀어나오겠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저주받을 에서의 경우를 보세요. 그 빈자리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자기 걸로 막혔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사람이 힘들게 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좋았던 것, 남들이 칭찬했던 것, 내가 수치스럽지 않은 존재인 것을 스스로 그게 있어야 그런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람은 자기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생이거든요. 내가 나를 사랑하면서 하루, 하루 보내는 것이 인생의 의미화로 주어지는 겁니다.
의미화로 주어지는데 이렇게 쇠말뚝이 없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지를 위해서 헤매일 거예요. 꽃꽂이 해봤다가 낚시 해봤다가 난 처봤다가 집에서 조그만 자수하다가 안 그러면 젊은 애 같으면 나이트 들어갔다가 입뺀 당해보기도 하고. 아줌마는 오지 마소! 해가지고 우사 당하고. 젊은 애들 뭐 찾지? 해가지고 경마도 해봤다가 온갖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허전하지 않게 나를 허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이 허하지 않는 방법은 내가 남들보기에 내가 수치스럽지 않고, 부끄럽지 않을 존재가 될 때, 사는 보람이 있잖아요. 계속 메꾸는 거예요. 사업도 해봤다가 주식도 해봤다가 온갖 것. 돈도 벌려고 애썼다가 이걸 메꾸는 거예요.
그러면 빈자리를 보는 우리는 이런 쪽이 되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빈자리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작에 그럴 것 같으면 아예 그 사람이 메시아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실패해야 돼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근사해 보이는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은 이방인과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레위언약은 결국은 이 사람들이 와서 기다리고 주께서 보충하는 식이 아니라 아예 땡겨주는 빈자리로 만들어버리고 땡겨주는 이 작업까지도 누구 소관이겠어요. 주님 소관이겠지요. 그게 바로 어디 나오느냐 빨간 걸로 하겠어요. 그게 바로 말라기4장에 나옵니다. 말라기 4장. 땡겨주는 거 누가 하느냐, 이게 바로 엘리야가 해요. 오실 엘리야. 4장 5~6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작살나기 전에 내가 선지자 누굴 보냅니까? 엘리야를 보내지요. 아, 정말 성경 어렵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엘리야는 이미 죽었잖아요.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 인간세계, 상징세계에서는 죽은 자는 공동묘지로 보냈어요. 산 자들의 세계에요.
정신병이 뭐냐 하면 죽은 자가 나한테 말하는 거 이거 정신병이에요. 병원가야 돼요. 귀신이 왔어. 이런 이야기합니다. 그건 말이 안돼요. 이 세상에서는 나에게 지시할 그런 세계가 있을 때 세상이 돼요. 이 현실세계에요. 죽은 자의 욕망은 이건 그 대상이 안돼요. 그 욕망에 부흥할 필요가 없어요. 죽은 자들은.
왜냐하면 명령하는 자가 부끄럽지 않은 대단한 자이어야 해요. 노숙자나 비리 비리 노는 사람이 나한테 와가지고 당신이 이렇게 하면 복받습니다. 하면 우리는 그 말 안 듣습니다. 왜? 말하는 당사자가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상태로 오잖아요. 그래서 십자가가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멋있는 하나님이 이야기하면 받겠는데, 니 나따라 오면 십자가에 죽을 수 있어. 그걸 어떻게 호응을 합니까. 같이 죽을 수가 있는데.
그러니까 엘리야가 와서 너희에게 보낸다 했지요. 자, 여러분 묻습니다. 엘리야를 보내면 우리가 말을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안 듣습니다. 왜그러느냐 이미 말라기에서 모든 인간은 희망 없다는 것이 이미 확정났기 때문에, 엘리야를 보내던, 누구든 보내던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 땅에 와서 세례요한의 소기의 성과는 계획은 실패로 끝나야 돼요? 성공으로 끝나야 돼요? 실패로 끝나야 돼요. 선지자는 실패하는 그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실패하는 그 장소. 그게 수요설교였어요. 실패로 끝나야 돼요. 세례요한도 어처구니없었어요. 분명히 자기 입으로 주님은 흥하고 자기는 쇠해야 된다고 해놓고 자기가 옥에 갇히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리 나온 거예요.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주여,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엘리야는 잠시 뭘 잊었는가 하면, 자기가 인간이 아니고 자기가 얼룩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예요. 그냥 소리에요. 주님의 소리이기 때문에 본인의 몸체, 실체, 그런 것은 역할에 포함이 안 되어있습니다. 여기 외칠 것을 외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6절에 봅시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이거 누가 한다 했어요? 여기 말라기에서는 누가 한다 했어요? 세례요한이 하지요. 엘리야가 하지요. 엘리야가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패했지요. 그러면 여기 6절 같으면 엘리야가 실패했으면 그러면 여기 엘리야가 한 명이어야 합니까? 두명 이어야 합니까? 이건 교과서에 안 나와 있어요? 한 명이에요? 두 명이에요? 두 명입니다. 예수님이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야는 사람들이 그 당시 엘리야를 기다렸거든요. 말라기 다 외우니까. 그대로 산다고 우기니까. 주께서는 너희들이 기대한 엘리야 너희 손으로 죽게 만들어요. 그래야 나중에 구원 받은 사람이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한 게 실패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 실패가 곧 성공입니까?” “바로 니 안에 내가 블랙홀 만들어났다!” 빈자리 만들어놓은 거예요. 빈자리.
옛날 같으면 빈자리가 후딱 메워야돼요. 너무 허해서. 왜? 남한테 내세울 게 없어서. 내세울 게 없으면 부끄러운 거예요. 사람이. 남들은 다 내세우는데 자기는 내세울 게 없어서. 그런데 성령이 와서 주님이 오셔서, 영이 와서 빈자리를 만들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니가 게 맛을 알아?” 이리 되는 거예요.
이 빈자리가 무슨 자리인가 하면 엘리야가 죽은 자리고, 세례요한이 죽은 자리이고, 예수님이 죽은 자리이지요. 그렇다면 이 빈자리가 무엇을 말해주는가, 나의 의는 더는 생산되지 않는다를 알려주는 빈자리에요. 내가 나의 의로움으로 이제 시달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시달릴 이유가.
4장 봅시다. 4장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치료하는 광선으로 고칩니다. 인간은 치료받지 않으려고 해요. 왜냐, 그동안 평소에 내가 나를 치료해왔기 때문에. 내가 의사와 병원을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너희가 뭐와 같다? 외왕간에서 나온 뭐와 같습니까? 송아지. 새로움이에요. 새로움. 송아지라 하는 것은 막 태어난 소지요. 새로움이에요. 천방지축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아요.
또 3절에,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건 창세기3장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치는 거와 같은 유사한 맥락이지요. 시원적이고, 오리지날 적인 것이 계속해서 살아있지요.
자, 그렇게 보시고, 계속 내용 이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요, 아들이 어떤 식으로 오는가, 정답은 레위언약을 달성하시면서 오신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레위언약을 집어넣은 것은 지금까지 강의에 의하면 나는 내 사랑에 빠져있거든요. 그리고 하나님이 있고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사람이 보기에도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고 싶지요.
그럼 여기서 주인공이 뭡니까? 하나님 있고, 내가 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까 빈자리했지만, 주님께서는 여기다 뭘 집어넣는가, 레위언약을 집어넣어요. 레위언약을. 심지어 하나님마저 언약에 따르고 성도는 물론 이 레위언약에 따라야 되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언약의 효과에 대해서 3장10절에 있는데 이건 크게 읽어 봐야 돼요. 하도 유명한 말씀이라서 크게 읽어봐야 돼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나의 집이에요. 나의 집. 교회 말고. 교회 십일조 내라는 말이 아니고 어디에 내라? 나의 집이에요.
나의 집에 십일조를 내게 되면 그 다음에 그것이 나의 집에서 무엇이 생산됩니까? 복이 가득해지겠지요. 이 작업을 누가 한다는 말입니까? 작업을 누가 했었어야합니까? 이 작업을 누가 했었어야 돼요? 이스라엘이 했었어야 되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언약이 주어졌으니까. 레위 언약 했어야 되지요. 성공했어요? 실패했어요? 가끔 실패했습니까? 끝까지 실패했습니까? 끝까지 실패했어요. 누가 오실 때까지 실패했어요? 예수님 오실 때까지 끝까지 실패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끝까지 실패해요.
실패하라고 하는 것은, 끝까지 실패하라는 말은 인간이 실패를 염두에 두고 뭐를 애초에 집어넣는, 심지어 철근으로 집어넣었다. 레위언약을 집어넣은 거예요. 다시 한 번 그 유명한 그림인데, 아는 사람만 유명하지 모르는 사람은 그것도 몰라요.
상징의 세계
뭐냐 하면, 나는 분열되어 있지요. 나는 분열되어있습니다. 나는 분열된 것은 앞에 쇠말뚝이 없다고 치고, 우리는 이렇게 멀리 있지만, 제가 둥글게 할게요. 둥글게 하는 게 나아요. 사실은. 우리는 어디에 있다. 상징의 세계에 있다. 이게 누구의 세계다? 타인의 세계다. 각자 각자 뭐를 시도한다? 서로가 서로를 부끄럽지 않은 존재, 수치스럽지 않은 존재로 위장하면서 살아간다. 전부 다 가짜입니다. 전부 다 가짜에요.
왜 이게 가짜냐 하면, 이 가짜라 하는 것은 라캉이 밝힌 게 아니고 프로이트가 밝혔어요. 프로이트가. 프로이트라는 사람이 정신분석을 전한 사람이 뭐냐 하면 환자를 받아보는데 환자가 엑스레이를 찍어도 아무 이상이 없어요. 이상 없는데 신체적인, 반복적인 안 좋은 행동이 나오는 거예요. 어떤 여자 분인데. 이게 늘 그러는 게 아니고 어떤 당하거나, 어떤 모습을 볼 때는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고 때만.
그래서 그 당시에 모든 과학은 인간이 의식하고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이걸 접근하니까 해결이 안되는 거예요. 무의식에 집어넣으니까 이게 해결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의식은 뭐냐, 무의식보고 “나오지 마!” 밟아버리는 거예요. 이걸 프로이트는 억압이라 했어요. 억압. “니가 나오면 내가 수치스럽잖아. 그러니까 니는 내 안에서 입 다물고 있어.” 꽉꽉 누르는 강도가 점점 심해지니까 내 몸이 내가 통제가 되어야 되는데 어떤 때는 통제가 안 될 정도로 내 아픈 상처 트라우마가 기어나와요. 확 밟고 있는 거예요. 나오면, ‘내가 점잖은 사람이 아니잖아~~. 나는 개망나니 되는 거야.’ 확 밟고 있는 거예요. 더욱 더 밟아요.
밟으니까 누가 당하느냐 하면 밟고 있는 내가 더 힘들어. 약도 안 되고, 입원해도 안 되고, 뭘 해도 안돼요. 나는 의식세계에서 노는데, 이 눈치코치도 없는 무의식이 계속 튀어나오는 거예요. 계속 나는 누구를 닮으면 안 돼. 나는 누구처럼 되면 안 돼. 그건 나의 수치였었어. 이런 식으로 계속 하는 거예요. 이 프로이트가. 프로이트가 이런 이론을 했거든요. 이게 억압된 게 참다 참다 못해서 어디에 나오느냐, 꿈에 나와요. 꿈. 이 꿈의 해몽이 유명합니다. 꿈인데, 이게 해결책이 안됐어요. 왜? 꿈의 해결책은 더 깊은 꿈으로 변신을 하기 때문에, 이걸 미꾸라지 잡으려다 터져서 들어가는 거예요. 꿈으로 놓친 걸 다른 속의 꿈으로 피신하고, 그 놈의 꿈속의 꿈을 또 잡으려하니까 꿈속의 꿈속의 꿈을 또 꿈을 꿔서 꿈이 내 기억에 안 좋은 상처를 꿈으로 해결했는데 이제 그것 가지고 안 되니까 꿈속의 꿈으로 꿈속에 그런 게 나오지 말라고 꿈에 꿈을 또 꾸는 거예요.
점점 더 현실세계와 동떨어지지요. 그럼 현실은 벌벌 떨고 있고. 자기는 이유도 몰라요. 왜냐, 발작이기 때문에. 의식이 사는 게 아니고, 내가 통제 못하는 가운데서 무의식이 내 몸을 순간적으로 통제해 버리니까 내가 거기서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두뇌 대수술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프로이트는 그걸 설명을 못해가지고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해서 나온 게 ‘죽음 충동’이라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기쁨은 죽음으로 이끈다. 해놓고는 자기는 죽어버렸지요. 해결책 안나요. 그걸 라캉이라는 제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무의식이 꿈으로 나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꿈이라는 대신에 뭘 하느냐 하면 평소에 말로 나온다고 하면 된다는 거예요. 이게 라캉과 프로이트의 차이점입니다. 평소의 말로. 평소의 말로 하는 거예요.
그건 뭐냐, 말로 해주는 게 아니에요. 환자에게 말을 하도록 유도해 주는 거예요. 말하는 순간 그 환자는 밤에 꿈꿀 때 하는 말을 벌건 대낮에 정신분석가에요 정신과의사가 아니고 정신분석가라 합니다. 정신분석 앞에 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끄집어내면 그 사람은 상징세계로 들어왔지요. 상징 세계로 들어왔으면 그걸 치료됐다고 합니다. 내가 가짜인 것을 알았을 때, 치료 끝! 이제 돈만 받으면 돼요. 이게 치료방법이에요.
왜? 니가 별난 존재야. 남들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니가 뭔데 진실을 찾아? 찾지 마! 우리 가짜야. 그게 인간세계야. 그러니까 유난 떨지 말고 가짜로 살자. 그게 치료에요. 해결책 없어요. 그걸 라캉이 밝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겁니까. 그 사실을. 세상은 몽땅 가짜라는 것. 어떤 해결책이 있다? 없다? 없다는 것.
그런데 이스라엘은 달라요. 왜? 뭐가 있기 때문에. 레위 언약이 있거든요. 제사언약이 있어요. 제사 언약은 동물을 잡는 거잖아요. 자, 우리가 현재 물리학, 생물학을 공부하는 현실세계에 있다고 봅시다. 자, 어떤 사람이 어린 양을 잡습니다. 어린양을 잡는데 이건 어린양을 잡을 때 동영상 찍어가지고 현미경까지 들여다보면서 어린 양이 몇 분 뒤에 죽었다. 라고 합시다. 그게 숨어있는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논리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안 나오지요.
이 세상은 타인들, 인간들의 상식적인 세계 아닙니까. 이 사람들의 학문은 인간이 수치스럽지 않게 분열된 것을 지식으로서 이걸 자연을 이용해서 합체하려하는 그런 세계가 인간세계잖아요. 그런데 레위 언약에서는 어린 양을 잡으면 하나님께서 그걸 흠양하시고 우리의 뭐가 없어진다? 죄를 용서해준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세계에서 용납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지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수요일날 뭐냐 하면, 하나님, 하나님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어느 세계에 벌써 기울어졌다? 현실세계, 납득이 되는 세계에 이미 기울어진 거예요.
이걸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스바냐 선지자가 날카롭게 지적하는 거예요. 이 형식 주의자들! 제도주의자들! 세상에 푹 젖어있으면서도 그들은 하나님마저 형식으로 우리 형식으로, 손을 묶어내고, 다룰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러면 그걸 누구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아까 봤지요. 언약이 오게 되면 하나님마저 어디에 종속된다? 레위 언약. 인간은 물론 종속되어야 돼요. 특수성이에요. 그런데 레위지파를 완성하신 분은 하나님이 보내준 누가 완성하느냐 하면, 경건한 아들, 예수님이 완성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예수님이 완성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인간들은 어떤 누구도 레위언약을 달성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 돼요? 못 되어야 돼요? 되지 말아야 돼요. 그게 바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아직도 우리 안에 작용하는 거예요. 니는 어떤 경우라도 미래와 운명에 대해서 니가 끼어들지 말아라. 끼어들면 안돼요. 우리가.
주님이 다 이루었는데 우리가 왜 끼어듭니까? 끼어들면 안돼요. 신약에서 그 이야기하기 위해서 소위 끼어들었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선지자가 차단시키는 거예요. 하나의 쇠말뚝을 집어넣는 거예요.
스스로 근사하게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는데, 자, 3장10절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고, 그리고 나의 집에. 나의 집 없습니다. 나의 집은 예수님이 와야 만들어지는게 나의 집이에요. 나의 집에.
그런데 사람들은 이 나의 집을 뭐로 보느냐 하면, 오늘날 교회라고 생각했고, 옛날에는 성전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성전은 이미 불타버렸어요. 유대인들은 성전이 없으니까 회당, 모이는 회당, 요새 같으면 예배당. 예배당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십일조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를 시험하라 했거든요. 시험을 하시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시험할 자격증이 없습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이 시험은 십자가에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할 때 이미 시험이 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시험 당사자가 됩니다.
그 마태복음4장에서 악마가 예수님한테 뭐했습니까? 시험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시험할 필요 없어요. 자기 하수인인데 뭘 시험해요. 벌써 전부 다 패배자들인데요. 안되는데 뭘 시험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계속 보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빈자리에, 블랙홀에 우리는 초청받아가지고 옆에 보면서 저 빈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말라기와 레위언약이 어떤 식으로 오직 한 분에 의해서 온전히 성취되고 있는가를 지켜보는 거예요. 심지어 세례요한도 실패했던 그 일. 레위언약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말라기2장봅시다. 말라기1장11절에, 내 이름을 위하여 깨끗한 제물을 바치라 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과 무엇과 연결되어야 된다. 그냥 제물이 안 되고 어떤 제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격판정 받는 깨끗한 제물 되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12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내 이름을 경멸히 여겼다 되어있지요. 1장13절, 너희들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그러니까 제사하는 것이 번거러운 거예요. 그리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왜 이런 걸 가져왔습니까.
제사를 하는 걸 지켜보는 자들이 누구냐 하면, 같은 인간들, 타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제사장 입장에서 그 사람들 속여 넘어가면 그만인 거예요. 기도할 때, 혼자 기도하면 괜찮은데, 남들이 볼 때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한테 기도하는 게 아니고 남을 어떻게 하면 잘 속일 수 있는가에 염두에 두고 기도하게 되어있어요. 식사기도, 대표기도. 옆에 누가 있을 때. 왜? 인간은 분열된 주체이기 때문에. 자기의 주체 본색을 여과없이 다 드러내고 있어요.
남이 있으면 남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까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어느 세계에서? 이 가짜의 세계에서. 상징의 세계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예상대로, 계획대로, 목적바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데 정작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너무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자신만만했고,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근사하고 관리하는데 너무나 집중했기에, 난데없이 쳐들어온 주님의 홀로 다이루심에 대해서는 우리의 즉각적인 반응은 이겁니다.
“주여, 이럴 수 없습니다. 왜 저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드러내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으로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친절하고 성실성있는 조치가 말씀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말씀을 보면 볼수록 다 이루었다는 기쁜만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