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29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9:01

갈라디아서 제 29강 (이 근호목사, 2007년 11월 9일 a,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마지막 강의입니다. 그동안 갈라디아서 6장까지 공부했는데 다 공부하고 난 뒤에 남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나 갈라디아서 다 공부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데?”
“몰라.”
“들은 게 있을 거 아냐?”
“몰라.”
“강의 내용이 있었을 거 아니냐고?”
“몰라.”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하더냐고?”
“몰라.”

이렇게 되면 갈라디아서를 새로 시작해야 되겠지요. 갈라디아서는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갈라디아라는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있는 교회, 성도지요, 교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이 복음이라는 선물을 탁, 깨 보니까 그 안에서 뭐가 톡, 튀어 나왔어요. 거기서 십자가가 톡, 튀어 나왔어요.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라는 것이 십자가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복음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지붕에는 뭐가 있습니까?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있고 그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가 새로 생겼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뭐가 없는 사람들일까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사람은 나중에 천국에 가게 되고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나중에 지옥에 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쁜 소식, 복음을 이야기 했는데 그 안에는 십자가가 들어 있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었습니다’입니다. 그 ‘죽었습니다’가 덮여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천국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 갑니다.

이게 가마솥인데 이 가마솥위에 솥뚜껑이 붙어 있습니다. 솥뚜껑을 가지고 가마솥을 덮습니다. 이 솥뚜껑이 십자가라고 한다면 여기 덮여있는 사람들이 성도들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자기가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뭘 덮어 쓴 사람이 성도입니다. 솥뚜껑과도 같은 십자가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런데 이 솥뚜껑 밑에 개미가 한 마리 있다고 합시다. 이 개미가 자기를 덮어씌운 솥뚜껑을 밀어 낼 수 있습니까? 못 밀어 내지요. 한번 십자가 솥뚜껑이 우리를 턱, 덮어 버리면 우리 힘으로 십자가 밖으로 나오려고 애를 써도 나올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나올 수 없습니다. 솥뚜껑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입니다.

솥뚜껑아래 있는 개미는 자기 힘으로 그 솥뚜껑을 열어 제치고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덮어 쓴 사람은 죽음 이후, 영원토록 십자가 안에 있어서 그 사람은 지옥은 구경 못하고 앞으로는 천국만 구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왜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갑니까? 솥뚜껑(십자가)때문에! 솥뚜껑이 날아와서 덮치니까 지옥 갈수가 없어요. 이 솥뚜껑을 가지고 두 글자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은 용서 해주시는 사랑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솥뚜껑을 주셨다. 그 솥뚜껑의 이름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는 사랑이다. 그 사랑의 솥뚜껑이 우리를 덮쳐 버리면 우리는 마치 나약한 개미와 같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열어 제치고 바깥으로 도망칠 수가 없다.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 계속해서 용서, 용서, 용서 해주시는 사랑을 받아서 나중에 천국에 가게 된다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한테 직접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오늘로서 갈라디아서를 끝낸다고 했습니다. 1장부터 6장까지 갈라디아서 공부를 다 했는데 혹시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갈라디아서 공부를 다 해보니 어떤 내용이더냐?”
“몰라!”

이러면 안 되지요? ‘몰라’대신 ‘알아’라고 해야지요. 하늘에서 웬 솥뚜껑이 날아와서 덮었는데 그 사랑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사랑이라고요? 날마다 우리를 용서해서 마지막에 천국으로 데려가는 사랑, 그 십자가라는 사랑이 우리를 인도해서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의 내용입니다.

혹 누군가 갈라디아서에 대해서 묻거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받아서 천국 간다, 이것이 그 내용이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그 이야기를 들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에 내가 그 사랑을 거부한다면 어쩔래? 나는 그 사랑 안 믿어, 나는 고집이 세서 그 사랑을 발길로 차버리겠어’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 사랑은 우리보다 더 세기 때문에 아무리 발길질을 해도 그 사랑이 우리를 떠날 수가 없어요. 여기까지는 잘 아시겠지요?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1-14까지 관련된 이야기인데 아주 어려운 대목입니다.

솥뚜껑 이야기 더 해봅시다. 여러분은 여기서 그냥 살아요. 공부하고 직장 다니고, 목사님은 설교하고 그냥그냥 살아요.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뭐가 날아왔다고 했습니까? 웬 솥뚜껑이 날아와서 덮쳤습니다. 여기 안경집이 있는데 제가 제 오른쪽에 안경집을 던졌습니다. 주인이 그 안경집을 떨어뜨리고 나니까 안경집이 떨어진 그 동네가 천국 가는 동네입니다.

제가 아까는 십자가를 이야기했는데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그냥 공부하고 밥 짓고 빨래하고 있는데 솥뚜겅이 날아왔습니다. 그럴 때 이 바깥에 있는 친구 a가 말하기를, ‘야, 너는 어떻게 천국 가는데?’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솥뚜껑 아래 있는 친구 b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한테 용서받아서 천국 간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a라는 친구가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어떻게 했는데 하나님한테 용서를 받았느냐, 그 말이야’라고 묻습니다. 그때 b라는 친구가 하는 말이 ‘몰라’라고 하면서 ‘그냥 주님께서 이렇게 나를 툭, 던졌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는데 주님의 사랑의 솥뚜껑이 와서 나를 덮쳤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a라는 사람이 ‘와, 답답해라. 내가 묻는 요지는 네가 어떻게 했는데 하나님의 솥뚜껑이 와서 너를 덮치게 되었으냐, 하는 거야. 그것을 이야기 해 달라’고 합니다. b라는 사람이 끝내 ‘몰라’라고 합니다. 툭, 던지니까 여기 있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하면,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선악과를 따먹은 그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고 부터는 항상 이유를 따지기를 좋아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장래에 이렇게 될까? 이렇게 하면 나중에 이렇게 될거야’라고 항상 이유를 따졌어요. 이것이 또르르, 굴러갑니다. 이것이 왜 굴러갈까요? 내가 굴렸으니까 굴러갔지요. 그러면 내가 왜 굴렸어요? 내 팔이 있으니까 굴렸지요. 왜 내 팔이 굴립니까? 내 머리가 팔에게 굴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왜 머리는 팔에게 그렇게 굴러가게 했습니까? 그것은 내 맘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자꾸 이유를 따지는 거예요. 그렇게 이유를 따지는데 정작 구원받는 것은 나로부터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힘들 때, 내가 왜 이렇게 힘들까, 이유를 따집니다. 원인을 찾아내어서 그 원인으로 인해서 내가 되었다는 그러한 틀, 그러한 그물구조에 우리가 갇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는 이유 없이 구원하는데, 우리가 평소에 하는 생각들은 자꾸 이유를 캐내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왜 쌍꺼풀이 없을까? 수술을 안했기 때문이구나.’ 수술을 하면 되는데 수술은 공짜로 해주지는 않습니다. ‘수술비 얼마? 50만원? 의료보험은 안 되고. 50만을 가지고 수술을 하면 나에게도 쌍꺼풀이 생긴다. 그러면 50만원을 어디서 구하지?’ 또 이유를 구해요.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50만원을 벌어야겠다. 한 달 동안 번 50만원을 가지고 병원에 가서 그 돈 가지고 쌍꺼풀 수술을 하게 되면 나에게도 쌍꺼풀이 생긴다. 옳지,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야지.’ 그런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만 컵을 깨뜨렸습니다. 주인이 ‘나가라. 너 같은 애에게는 일을 못 시키겠다’고 합니다.

자, 아르바이트 하려던 것이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50만원 벌려고 했던 것도 안 되고, 그래서 병원에도 못가고, 병원에 못가니까 쌍꺼풀 수술 못하고 그러니 아르바이트를 안 하면 안 된다. ‘주여,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는 그런 것을 묻지 않고 구원하는데 우리는 버릇 들기를 ‘반드시 이유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왔다’고 들어서 자꾸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공녀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영국의 좋은 학교에 다니던 소녀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인도에서 하던 광산업이 망해서 그 때부터 선생님에게 미움을 받아서 다락방으로 거처도 옮기고 불쌍하게 울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소공녀의 아버지 직업은 왜 꼭 광산업입니까?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소공녀는 꿋꿋하게 살아가죠.

신데렐라를 아십니까?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문제 나갑니다. 왜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을까요? 1) 신데렐라가 까불었다. 2) 신데렐라가 말을 안 들었다. 속이 타서 엄마가 죽었다. 3) 신데렐라가 밥을 잘 안 먹었다. 4) 신데렐라가 달리기를 너무 잘했기 때문이다. 몇 번입니까?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 상관없습니다.

신데렐라가 어떤 행동을 했든지 간에 아버지는 이미 죽었습니다. ‘자기 탓이 아니다’는 말, ‘내 탓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어른들은 압니다. 어른들은 평생 동안 마음고생 하는 이유가 뭐든지 자꾸 원인을 캐서 ‘내가 이렇게 못사는 것은 내 탓이다, 내 탓이다’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가 우리 교회, 성도에게 하는 이야기는 우리(성도)의 옛 버릇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갈라디아서 6:12에 있는 대로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는 대목인데 이 대목이 무지하게 어렵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신데렐라의 아버지가 죽은 것은 신데렐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 너는 여자로 태어났니? 너 나쁜 짓 했구나.”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나쁜 짓을 하면 여자로 태어나고 착한 일을 하면 남자로 태어납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뜻은 이 겁니다. “얘야, 너는 이유를 달지 마라.” 그런 식으로 창조를 했는데 바보 같은 인간들이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는 바보짓을 하면서 아직까지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내가 못사는 것은 교회에 헌금을 적게 해서 그렇고, 내가 못사는 것은 뒤에서 목사를 험담해서 그렇고 내가 못사는 것은 교회 봉사를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자꾸 이유를 캐냅니다. 반대로 ‘내가 이만큼 사는 것은 내가 훌륭해서 그렇고 내가 이 만큼 재산을 모은 것은 내가 성실해서 그렇고, 내가 이만큼 잘된 것은 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렇다’고 자꾸 이유를 댑니다.

아무 이유 없습니다. 이것을 크게 써야 합니다. 이 안에서는 “아무 이유 없음.” 주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했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이유로 제시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환영한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받은 겁니다. 듬뿍 받은 겁니다. 아이스크림을 어디에 담아 줍니까? 끝이 뾰족한 콘에 아이스크림이 담기는 겁니다.

그 때 콘이 하는 말이 “네가 뭔데? 왜 내 위에 담기는데?” 그러면 아이스크림이 “네가 왜 이유를 달아? 내가 담기면 너는 그냥 담기면 그만이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로마서 9장에, 긍휼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릇은 뭐가 담기든 담긴 것을 그냥 담긴 채 있으면 그만이지 ‘주님, 왜 저를 사랑하는데요?’라고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왜 나를 축복하셨을까’라는 식으로 이유를 찾으면 안 됩니다.

“목사님, 고함지르지 마세요. 이유 안 찾습니다.”
“이유, 안 찾지요?”
“예. 이유 안 찾습니다.”

일주일 뒤에, 이유를 안 찾는 사람의 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주여, 왜 하필이면 우리 애가 교통사고를 당해야 합니까?” 대번에 또 이유를 찾습니다. 자기가 뭡니까? 콘이죠. 의존교회에서 공부할 때는 “이유 달지 마세요.” “예, 우리는 이유 안 달겠습니다. 그냥 공짜로 사랑받는 것은 옛날부터 다 아는 이야기인데 왜 자꾸 우리보고 모른다고 무시하는 겁니까?”라고 하면서 다짐까지 했건만 일상생활에서 조금만 자기 예측대로 안 되면 따지고 듭니다.

“하나님이여!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불상사를?”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따질 거야? 또 나한테 따질 거야? 지난번에 안 따지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따져.”
“주여, 저는 왜 이렇게 얼굴이 동글동글합니까?”
“따질 거야, 안 따질 거야?”

이 따지는 버릇, 아주 나쁩니다. 지금부터 왜 사람들은 그렇게 따지기를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가지고 살아가는 습관을 다 뒤집으려고 하니 이렇게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사람들이 무엇을 따먹었다고 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지? 나는 무엇을 하지? 나는 어떻게 되지?’ ‘나는 어떻게 될까’라고 왜 묻습니까? 궁금해서 묻고 싶어서 묻는 겁니다. ‘나는 앞으로 5년 되에 어디에 가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묻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것은 하나님 소관이지 자기 소관이 아닙니다. 여기 보세요. 안경을 이렇게 툭, 던졌습니다. 그러니까 안경이 하는 말이 ‘어? 내가 왜 여기 있지? 그런데 내가 3초 뒤에 여기 있을까? 저기 있을까?’ 주인이 또 들어서 던집니다. 안경이 또 ‘어? 내가 왜 여기 있지?’ 합니다. 주인이 “묻지 말라니까!”

하나님이 맘대로 인도하는데 인도하는 대로 가자마자 항상 생각하는 것은 ‘나는 왜 여기 있지?’라고 자꾸 묻는 거예요. 그 버릇이 나쁜 버릇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 묻는 것이 죄입니다. ‘내 친구는 50평짜리에 사는데 왜 나는 왜 20평짜리 아파트에 살까?’ 그것을 묻지 말라니까! 그것을 묻는 것이 죄입니다.

‘나는 왜 키가 작을까?’ 그냥 콘인데. 갈라디아서를 하고 로마서를 떼고 에베소서를 하고, 다음에는 에베소서를 할 것인데요,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교회를 20년 다니고, 복음을 알고 백날 공부해도 근본이 바뀌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콘에 불과하다는 것, 내가 아이스크림을 골라잡을 그런 권리가 없다는 것, 그쪽으로 인간자체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이 채우는 대로 나는 채워지고, 주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나는 가게 되고, 주님께서 그만 살아라, 하게 되면 나는 그만 산다. 왜?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나를 가지고 노니까. 그래야 선악체제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의 체제 말고 다른 체제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두 가지 그림을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이 건물 A, 이것이 건물 B입니다. 건물 A안에서는 ‘원인-결과-원인-결과-원인-결과’의 사슬로 살아갑니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다시 그 결과가 원인이 되는 식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부모를 잘 만나서 그렇다. 내가 아픈 것은 그때 차가 달려와서 나를 받아서 그렇다.’ 전부가 다 원인-결과로 이어져 있어요.

‘내가 그때 키가 작았던 것은 운동을 너무 안하고 집에만 틀어 박혀 있었기에 키가 안자라서 그랬다. 내가 운동하면 키도 자라고 뱃살도 빠진다’는 식이죠. 이 그물이 누가 쳐놓은 그물이냐 하면 악마가 쳐놓은 그물입니다. 그런데 B라는 건물은 ‘나는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여기 있지?’ 하면 여기서 사랑이 날아옵니다.

“저기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빨리 달려가거라.”
‘나는 왜 이 학교밖에 못 다니고 있지?’ “저기 또 사랑(용서)이 필요한 데가 있다. 빨리 달려가거라.”
‘나는 왜 고기 낚는 어부가 되지 않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을까.’
“저기 베드로가 까분다. 사랑은 달려가거라.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 요한은 언제까지 살겠습니까?”

“저기 또 사랑이 필요한 놈이 있다. ‘베드로야, 저 사람이 어떻게 살든지 너는 알바 아니다. 너는 사랑 때문에 원치 않는 죽음으로 달려가리라’.”
“어떻게 하면 내 아이가 공부를 잘 할 수 있습니까?”
“여기 또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 어서 달려가거라.”

여기(건물 B)서는 용서라는 그물을 자기 힘으로 뚫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 무슨 뚜껑? 용서의 솥뚜껑, 하나의 개미는 그 솥뚜껑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악마가 쳐놓은 그물이 선악과의 그물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다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그 원인이 선했으면 지금의 너는 선하고 그 원인이 악했으면 악하다고 했는데, 이런 선악의 그물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이쪽의 세계(B)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에덴에서 사람이 쫓겨난 이유가 선과악이라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했다는 그 자체가 그 이유이고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추방되었습니다. 추방되고 난 뒤에 계속해서 그 이유를 못 버리고 있어요. “목사님,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또 이유를 그렇게 대고 있어요. “예수를 믿으세요.” “저, 예수 믿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원인으로 해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결과를 나타내려는 것, 이런 식으로 구원이 된다면 그 사람은 앞으로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고 치매현상이 걸리면 그때 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인간은 이런 육적인 생각에서 탈출할수 없습니다. 만 날 이것만 생각합니다.

학생 같으면 ‘이번 달에 반에서 15등을 했다. 왜 15등을 했을까? 내가 공부를 너무 안 해서 15등을 했구나. 다음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5등을 해야지.’ 이렇게 한다고요. 그런데 똑같은 15등짜리 학생이 여기에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 15등을 하게 했을까? 아, 이것을 물을 필요가 없구나.’

그러면 다음에 주어진 환경 속에서 또 하나님이 주신 힘가지고 사는데 5등이 되었습니다. 15등 되었을때 친구들이 “야, 너 공부 열심히 해서 15등이 되었구나” 하니까, “아니야. 주님께서 15등 하게 했어.” 그 다음에 5등하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했어.” 5등을 하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했어.” 1등을 하니까 “이것은 내 힘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했어. 나에게서 원인을 찾지 마. 나는 주님께서 움직이는 것뿐이야. 여기에 던지면 여기에 던져지고 저기에 던지면 저기에 던져지는 것뿐이야.”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기서 복음을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당신같이 그렇게 하면 어느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하겠는가? 15등 하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데도 5등이 될 것 같으면 놀려고 애쓰지 꼭 5등이 되려고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15등 된 것이 아니고, 내가 게을러서, 라는 원인을 찾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원인을 안 찾으면 되는데, 원인을 찾다 보니까 또 다른 원인을 또 만들고 또 만들고 그러다 보니까 계속해서 나중에 5등 못하면 초조하고 불안해서 주님이 주신 은혜고 뭐고 다 놓치고 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를 끝내면서 과연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얼마나 이해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라 하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지금 원인 결과를 찾는 이런 틀을 벗겨버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되었단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솥뚜껑이 날아와서 구원된다고 했습니다.

그 솥뚜껑이 날아온다는 말은 솥뚜껑만 날아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 앞으로 될 일의 모든 것까지라도 그 모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못 벗어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12절에 보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니까 그 율법을 내가 원인이 되어서 그것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니까 그 율법 중에 하나가 뭡니까? 할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할례를 받게 하는 겁니다. 그 할례 받는 자가 나입니다. 내가 할례 받아서 할례 받는 내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주시는 용서가 아니라 내가 할례 받고 율법 지켰다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내가 구원된다는 선악적인 그물에 그대로 빠져있는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이것을 철폐하고 이것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이렇게 할례를 받는 이유가 십자가로 그냥 이유 없이 주시는 사랑이라 하면 이쪽 사람들이 자꾸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그 미워하는 것이 싫다는 거예요. 진짜 성도 같으면 ‘아하,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미워하는구나’라고 하면 될 터인데 ‘나의 어떤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미움을 받는구나. 그러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미움을 받지 않겠지’라는 식으로 원인과 결과를 또 계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믿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할례라는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자,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이제 율법을 행했다. 이제 나를 안 미워할 거지?”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솥뚜껑은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은 솥뚜껑 없어요. 자기가 자기 머리에 쓸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비해서 자기가 원인이 되어서 자기가 만들어 내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누가 죽었습니까? 내가 죽은 겁니까? 예수님이 죽은 겁니까? 예수님이 죽어서 십자가 아닙니까? 강의 제일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물론 나도 함께 죽지만. 예수님이 죽은 것이 십자가라는 말은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이미 선악과 속에 있기 때문에그것은 죽은 놈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할례를 행해야지. 내가 율법을 지켜야지. 내가 뭘 행해야지’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그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아무 가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인-결과 그것을 자꾸 따지기 때문입니다.

“사도님, 할례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왜?”
“할례를 안받으니까 다른 사람이 율법을 안지켰다고 나를 향해서 욕을 합니다.”

사도가 하는 말이,

“사람들이 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는 원래 하나님 앞에 욕을 얻어먹을 그런 죄인이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말고 그런 죄를 용서한 것이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해봐. 그게 뭐냐?”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면 되었지 왜 자꾸 할례를 행해.”
“그래도 미움 받는 것은 싫습니다.”
“그러면 미움 안 받는 수가 있어?”
“있습니다. 제가 할례를 받으면(제가 하는 일이 원인이 되어서) 미움을 안 받습니다(미움안 받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너무 안타까워하면서 바로 그것이 십자가를 오해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겁니다. 이제 갈라디아서를 다 끝내면서 지금 우리에게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유 없이 주어졌는데 왜 자꾸 자기 속에서 구원받는 원인과 이유를 따로 챙기고 만들려고 하는가, 그 말입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콘 위에 아이스크림이 덮이면 감사하면 될 터인데 자기가 콘 주제에 자꾸 맛있는 것을 찾아서 찍어 먹겠다는 겁니다. 자기는 콘이니까 아이스크림만 듬뿍 담으면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콘 위에 아이스크림이 있으면 그 콘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감사합니다. 저 같은 것에게 이렇게 큰 영광을 주시다니요.’ 이렇게 살면 되는데 자기가 자꾸 아이스크림공장을 만들어 내려 합니다.

‘이왕이면 꽃을 하나 만들어서 달까? 꽃 아이스크림.’ 이거 하나님은 안 좋아합니다. ‘이번에는 별사탕을 달아볼까? 별사탕 아이스크림.’ 이거 하나님은 안 좋아합니다. 십자가사랑은 우리가 따로 첨가물을 드릴 필요 없이 100퍼센트 그것으로 구원받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저희 집은 너무 가난합니다. 부자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너의 소관이 아니고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됩니까?’라는 것은 내가 예상하고 예측하는 겁니다. 예상하고 예측하는 것 자체가 내 위에 있는 아이스크림으로 영, 성이 안차고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아이스크림 덮어씌우면 감사하고 부자면 부자대로 아이스크림을 덮어씌우면 감사합니다.

가난해도 십자가로 구원받고 부자 되어도 십자가로 구원받으면 밑에 있는 가난이나 부함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는 겁니다. 어떤 아주머니께서 미장원에 갔는데 머리가 잘 못나왔습니다. 자기는 어느 탤런트를 생각해서 했는데 이상하게 머리모양이 빠졌어요. 그럴 때 짜증을 냅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내가 미장원에 다녀오는 길인데 머리가 이 모양 되어서 머리 때문에 속상합니다.”

머리모양 안 나와도 솥뚜껑이고 잘 나와도 솥뚜껑인데 머리모양 안 나왔다고 지옥가고 머리모양에 의해서 구원이 철수됩니까? 그런 발상은 내 위에 있는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내가 영, 감사치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기를 ‘오늘 머리모양이 잘 안 나와서 속상하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머리카락, 그 아주머니 것이 아닙니다. 주님 것입니다. “그래도 천사님, 미장원 바꾸면 머리모양 잘 나옵니다.” 미장원 바꾸어서 모양 잘 나왔다고 해도 그것이 본인 것 아닙니다.

‘내 것 아니어도 좋으니까 이왕이면 예뻤으면 좋겠다.’ 그 예쁜 자아는 허구입니다. ‘나’라는 자체가 허구입니다. 이게 이해가 잘 안될 겁니다. 얼마 전에 제 친지 한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백 살 까지 사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장담할 수 없고 그렇게 장담하면 안 되지요.

‘주여, 오늘밤에라도 낙원에 보내 주신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라고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백 살 까지 살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나 말고 다른 나를 생각했습니다. 백 살 까지 사는 내 모습을 따로 내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콘인데 가짜 콘을 따로 자기가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콘이 있는데 가짜 콘이 생겨났으니까 이것을 점선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나’라는 인간이란 하나님이 던져준 나, 인데 던져준 나에 대해서 영 불만입니다. 그래서 상상하는 나를 가정했는데 요 나가 신데렐라입니다. 백 살 까지 살고 집이 열두 채 있고, 땅은 12만평쯤 되고 친구들은 3600여명쯤 되는 이런 것.

목사 같으면 교인들은 한 7000명 되고 외제차 타고 다니고 사택은 한 150평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 이것은 현재의 나가 여기 있는데 다른 나를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허구적인 나가 나타나서 진짜 나를 핍박합니다. ‘에라 인간아 나가 죽어라.’ 그런데 핍박당하는 인간이 나가 아니라 현재의 나를 만드신 예수님, 실컷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예수님이 나한테 욕을 얻어먹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멱살을 쥐고 ‘내 인생을 물어내라’고 흔들어 대는 겁니다. 흔들어 대는 그것이 바로 ‘나는 할례를 행해야 되겠다. 왜? 남들이 욕을 하니까.’ 예수님은 “너는 할례 안 해도 돼”라고 했는데 “아닙니다. 할례를 안 하니까 미움을 받습니다. 나는 미움 안 받는 나를 따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할례를 행했습니다”라는 것이 바로 12절입니다.

자꾸 원인과 결과를 따로 내 쪽에서 만들지 마세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주신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백날 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무리 십자가, 십자가 백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엉터리 가짜 내가 진짜 주님이 던져주신 진짜 나를 이렇게 핍박하고 못살게 굴고 매일같이 자기를 때리면서 ‘나가 죽어라 이놈아, 남들은 이렇게 하는데 너는 왜 이것밖에 못하냐’라고 핍박하니까 날 위해서 죽으신 분이 나 때문에 또 죽게 생겼어요.

이래놓고 무슨 성도고 무슨 교인이며 무슨 집사 장로 목사입니까? 3500명 안된다고 따지는 목사, 재벌 안 되고 사업이 크게 안 된다고 따지는 장로, 이게 무슨 장로입니까? 자기가 따로 상상하는 나를 만들어 놓고. 성경말씀을 시시하게 보면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속사정을 완전히 꽤 뚫어 봅니다.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따로 나를 만 날 상상한다는 것, 그것 없어져야 합니다. 그것 죽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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