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26강 (이 근호목사, 2007년 09월 14일-b, 서울의존교회)
'케제만’이라는 신학자는 「예수는 자유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예수님이 행적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이것이 법이다’ 하는 것을 다 거부해요. 사람들이 ‘이것이 법이다’ 하는 것에 섞이는 법이 없이 아주 돌발적으로 행동을 해버립니다. 의도적으로 그 ‘법이다’ 하는 것과 ‘나는 무관하다. 상관없다’는 식으로 모든 행동을 해버립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지요. 자유의 영역은 이 밑의 율법의 영역과 연결점이 없어요. 두 어린이가 노래를 하는데 한사람은 형이고 한사람은 동생이고 형제 둘이 나와서 노래를 합니다.
“자, 둘이 제창을 합니다. ‘나비야, 나비야’를 둘이 같이 부릅니다” 하고 노래를 하는데 세상에, 갑자기 형이 손으로 동생의 입을 틀어막았어요. 그렇게 틀어막아 놓고서는 혼자서 큰 소리로 불러 버렸습니다. 동생의 그 입을 막는 손이 율법입니다. 다른 손 가지고 크게 부른 것은 예수님의 자유의 선포입니다.
‘눈먼 자는 눈을 뜨고 세리와 창기는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갑니까? 주님이 “내 맘 대로다. 왜?” 예수님은 자유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를 구원 안 시켜 주는 법이 없어요. 주님이 원하는 자를 마지막 때에 영광스럽게 부활 안 시켜주는 주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기 솜씨를 과시하는 겁니다. 한쪽 손으로는 뭘 막고?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입이 틀어 막히니까 자기 딴에는 그 방해를 떨치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마구 인상을 써가면서 노래를 부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보통 자유라고 할 때 “나는 자유하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나 입던 도포나 개량한복 입고 다니고, 이 외수 같은 사람들도 있고, 록 가수나 영화배우 같은 연예인들도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맘대로 살면서 자유라고 해도 뭐가 없습니까? 남의 입을 틀어막는 것은 없습니다. 석가모니, 공자 이런 사람들 다 자유로운 사람들 아닙니까?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잘난 체를 다 하는데 그렇더라도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그런 무모한 짓은 안하거든요.
예수님의 자유는 “자유다!” 그 정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입을 틀어막아 버립니다. “나는 입을 열 자격도 없어. 너는 심판받아야 돼”라고 틀어막고 자유를 외쳤습니다. 왜 틀어막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홀로 이루어서 혼자 다 이루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영역에는 무엇을 배제하느냐? 인간을 배제합니다. 인간의 이름을 배제하는데 그것은 어렵기 때문에 그냥 인간을 배제한다고 합시다.
처음부터 인간을 배제하고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분을 향하여 그분의 능력으로만 모든 만물이 회복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틀어막을 자격이 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으니라.”(롬 8:29,30)
이 모든 것이 지금 뭘 틀어막았습니까? 법을 지켜서 하겠다는 것을 틀어막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여기에 보탬이 됩니까, 안됩니까? 보탬이 안 됩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내가 성경말씀 열심히 지키는 것이 내가 의롭게 되는 일에 보탬이 됩니까, 안 됩니까?
보탬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의인이 맞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유를 위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유인 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손이 입을 막거든요. 하는 말이 “너는 네 힘으로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너의 힘으로는 의롭게 안 돼?” “주님이 날 틀어막았거든요.” 주님이 날 틀어막았다는 고백은 성령을 안 받으면 못하는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매일 같이 나를 틀어막더라”는 그 기쁨의 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시는 그 행복감. “주여, 오늘 아침에도 기도 열 개나 했는데 오늘도 그 열 개 다 펑크 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 정말 살아 계시는 군요.” 우리가 언제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아느냐 하면, 내 뜻대로 하나도 안될 때 비로소 빼꼼히 주님의 얼굴이 보여요.
“주님은 참 빈틈이 없으시군. 내 욕망을 틀어막는데 하여간에 귀신이다. 어디로 도망쳐도 다 잡아내는 구나.” 내 뜻대로 안되게 하시는 은혜, 그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이 안 나올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내뜻대로 되어 버리면 주님만이 할수 있는 자유영역에 내가 침범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으니라” 여기에 뭐가 섞이느냐 하면, 내 행위가 섞이게 되고 그것은 내가 법을 지킨 것이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사람입니다. 법에 속한 사람은 어디에서 끊어졌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입니다. 바로 이 자유를 엿보려고 온 사람들이 있어요.
갈라디아서 5: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 입에서 너무 심한 욕설이 나왔어요. “하나님의 자비를 훼손하는 자는 스스로 자멸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저주 받아서 아예 폭삭 망해 버려라, 이놈들아!” 그런 욕설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13절입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우리가 하지 못하고 주님께서 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자유라는 말은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법이 아니면서도 법 지키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아 버립니다. 인간의 행위를 틀어막습니다. “내가 길이다”는 것은 “는 길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진리다”라는 것은 “너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생명이다”라는 뜻은 “너는 생명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입을 틀어막아요.
틀어막아버리고 홀로 그 일을 다 이루실 때 그것을 바로 자유라고 합니다. 인간의 힘이 거기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받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매일 “내가 무엇을 행했다”는 그것을 작살내고 매일 부정하게 만드는 그런 작업을 동반해서 “주님만이 하셨다”는 것이 나오게 합니다. 그러면 이 자유는 누구 겁니까? 이 자유는 누구만 이루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겁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이 말씀은 “네가 용쓰고 애 안 써도 돼”라는 그런 행복감으로 다가와야 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라는 이 말씀을 해석하려면 “스스로 자신을 살리려고 애쓰고 용쓰지 않아도 그런 것과 상관없이 구원이 된 신분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은 “너는 이미 구원받았어. 너는 이미 하나님이 아신 자야, 아신 자이기에 그 마지막도 영광스럽게 보장된 거야. 너는 가만히 있어도 돼. 내가 다 할거니까.” 그래서 입을 틀어막는 거예요. 입을 틀어막고 “원치 않는 길로 데려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너는 네 것이 아니고 이 예수 내 것이다”라는 겁니다.
“ 것이기 때문에 너는 네 마음대로 못하고 내 맘대로 할 거야”라는 뜻입니다. 이게 얼마나 부담이 없습니까? 기분 좋지요.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것은 “이미 자유의 영역에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제 걱정할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 육체의 기회를 삼는 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육체로 했다는 것이 어디에서 어느 경우에 발각되는가? 율법이 가까이 갈 때 육체의 일이 드러납니다. 법이 오게 되면 갑자기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면서 마음이 심난해 집니다. ‘지켰다. 혹은 못 지켰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아주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쉽게 말해서 욕심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죄를 낳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분해해 봐야 됩니다. 욕심을 분해해 보면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선과 악을 나눕니다. 자기는 무조건 선한 쪽에 속하고 자기 타입이 아닌 것은 무조건 악한 쪽에 속하죠. 예를 들면 자기는 화상을 입지 않았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이 화상을 입은 것을 보면서 측은해 하고 또 한편으로는 고소해 합니다. ‘나는 화상을 안 입었는데 너는 어깨에 화상을 입었군. 참 안되었다.’
그 다음에 자기는 빨간 옷을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은 검은 옷을 좋아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빨간 옷은 자기가 좋아하니까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됩니다. 다음의 예는 자기는 개고기를 안 먹어요. ‘어떻게 애완용으로 기르는 개고기를 식용으로 먹을 수가 있어?’ 그러면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나는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사람으로도 안 본다’는 이 말은 ‘나는 개고기를 안 먹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쌍커플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쌍커플이 있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쌍커플이 없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겠지요. 만일 자기가 경상도 사람이라면 경상도는 좋은 편이고 전라도는 나쁜 편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자기의, 자기의 의로움을 위해서는 무엇이 악하냐 하는 것을 세밀하게 쪼개고 쪼갭니다. 또 쪼개서, 쪼개면 쪼갤수록 자기는 선하고, 선하고, 선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확인받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여자 다 괜찮은데 똑똑한 여자는 용서가 안 된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똑똑한 여자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 말이죠. 그래서 ‘똑똑한 여자를 아침부터 만나면 이유 없이 기분 나쁘더라.’ 이유 없이 기분 나쁘다는 말은 아예 차에 치어 죽든지 망해버리라는 말입니다. 똑똑한 여자가 망하고 저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똑똑하지 않은 나는 자동적으로 신의 츅복을 받는 자아인 것을 확인할 수 있겠지요.
이것은 아담으로부터 타고나는 겁니다. 이 작업을 하루에 얼마나 할까요? 적게 잡아서 24시간 합니다. 아침에 눈뜨면 시작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집 같은 경우는 설거지를 한 가족과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가족으로 나뉩니다. 제가 설교 중에 예화를 드는데 제 아내가 부탁해서 제가 음식쓰레기를 버린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난 뒤에 어떤 집사님이 약간의 화가 난 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내 남편에게 남 보기에 부끄럽게 음식 쓰레기를 버리도록 하는 일이 없다. 아무리 뭐 해도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쓰레기를 버립니다”고 말입니다. 그게 뭡니까?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신(?) 목사님이 반바지를 입고 음식쓰레기를 버린다? 그분 보기에 이것은 도대체 앞뒤가 안 맞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바로 육체의 소욕입니다. 육체의 소욕이란 타고난 성깔 그대로 발휘하는 것이 육체의 소욕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성깔, 나는 무조건 선해야 되고 나의 타입이 아닌 것은 무조건 악하고 망해야 된다고 여기는 그 성깔이 육체의 소욕입니다. 그것은 처음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을 그때부터 나온 겁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인간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내 타입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생전 만나본 적도 없고 관계도 없는 탤런트 얼굴이 나오니까 보기 싫다고 채널을 돌려 버립니다. “아니, 저거 또 나왔네. 내가 텔레비를 안보면 안 봤지 네 얼굴은 안본다” 하면서 텔레비전을 꺼버립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한 이야기중의 한 대목입니다.
사람이 제일 난처한 것이 뭐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대상한테서 도움을 받을 때 참 난처합니다. 그럴 때는 표정관리가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다른 분의 이야기인데, 강의는 2층에서 하고 3층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살고 있었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단이라고 고함까지 지르면서 강의를 했는데 돌아오려고 보니까 타이어가 펑크가 났더랍니다. 자기교회 교인들은 아무도 안도와 주는데 그 여호와의 증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돕더라는 것입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주의 은총이라 해야 할지….
옛날 봉화에 살 때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수도까지 끊겼는데, 뒷집에 사는 안식교인이 자기 집에서 호스 연결해서 물 대준 일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이단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내 타입 아니라고 갖다 버린 그들마저 주님께서 건사하시고 마리 아셨다는 입장에서 부르시고 구원할 때, 자동적으로 나는 주님의 자유의 훼방꾼이 됩니다.
내가 꼴 보기 싫은 것을 주께서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했다는 겁니까? 성령을 따라서 행한 것이 아니고, 자유를 따라서 행한 것이 아니고 내 육체의 소욕이 작동하는 대로 했더니만 주님의 숙제를 내가 방해한 방해꾼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 일이 비일 비재합니다. 매일 같이 그런 일이 생겨나고 쉴 새 없이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벗어납니까?” 이것은 하나의 공식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혹은 아니다’의 표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일의 끝이 ‘감사 합니다’로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짜증납니다’로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소매치기를 했는데 순경한테 걸렸다. 짜증난다.’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소매치기 하다가 걸리고 나서 ‘주여, 감사합니다. 저보고 인간되라고 이렇게 경찰 손에 잡히게 하셨군요’라고 감사하게 되면 소매치기 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일이 뭐냐? “범사에” 그 다음에 뭐죠?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그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나 오늘도 소매치기 안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칼빈은 이런 것을 잘 몰랐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런 명령들을 가지고 뭐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성경대로 하시면 그것이 착한 일이 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하지 말아야 되는 나쁜 일도 많이 있지만, 나쁜 일도 아니고 착한 일도 아닌 중간 것도 많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어디로 피신하느냐 하면 나쁜 일도 아니고 좋은 일도 아닌 중간으로 다 피신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을 살아보세요.
전에는 착한 일이라고 우겼던 그것이 인생을 더 살고 보니 세상에, 그것이 내 타입으로 움직였던, 내 타입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비를 베풀어 놓고는 마치 사랑을 베푼 것 인양 호도했던 철없던 지난 세월이 후회스럽지요. 내 육체의 소욕대로 해놓고는 마치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은 것 인양 그렇게 과시했던 그 기억들. 그래서 결론은? 우리가 살아갈 때 살아 있는 동안은 하루라도 한시라도 내 육체의 소욕 아닌 것이 한순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있는 대로 ‘육체의 소욕대로 살지 말고 성령을 좆아 행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라고 나올 텐데, 성령은 우리와 상대하지 않고 주님과 상대합니다. 여기 떡이 하나 있는데 제가 성령입니다. 말로 하면 어려우니까 쉽게 하기 위해서 연극으로 해야 됩니다.
어린이 한분이 여기 있고 저는 성령인데 성령님은 이 애 하고 상대하지 않고 누구와 상대한다? 예수님과 상대하죠. 예수님이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을 좆아 행하라”고 했지요, 이것이 말씀(떡)입니다. 성령이 이렇게 그냥 집어서 어린이에게 먹여 버립니다.(성령의 대역인 목사님이 말씀으로 놓여져 있는 떡을 집어서 어린이의 입속에 그냥 집어넣어 버린다) 내 말을 지켜줘 그게 아니라 성령은 누구를 바라본다고요?
그러면 이렇게 먹게 된 영광은 성령영광이 아니고 누구 영광? “주님의 십자가의 영광으로 내가 떡을 먹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은 주님을 증거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예언하시기를 “내 뒤에 보혜사가 오는데 그 보혜사는 다른 것은 못하고 예수님께서 행한 것만 그대로 죄인들에게 적용시키는 쪽으로 일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6:13-15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예수님 행한 것, ‘예수님 수고하셨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더하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그것을 그대로 미리 아신 자를 위하여 성령께서 예수님의 보혜사 역할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에 의해서 떡을 먹고 나면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주여 왠 떡입니까? 나는 내 타입이면 무조건 좋아하고 내 타입이 아니면 무조건 다 싫어하는 육체의 소욕체의 소욕대로 살았는데 이것이 웬 떡입니까?” 하면서 “이것이 전부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할 때, 그 순간을 찰칵 하고 사진 찍으면 8장의 사진이 그대로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 할 법이 없느니라.”
이것은 누구 힘으로 끊을 수 없습니까? 내 힘으로도 안 끊어집니다. 다른 사람도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것을 끊을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집어 넣어버렸습니다. 누가 말립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에 나에게 이런 혜택이 오다니!’ 하고 있는 그 모습이 온유이고, 형제우애고, 양선이고, 그게 참음이고, 자비이고, 충성이고, 절제지요.
이것을 한꺼번에 다 끌어 모으면 “범사에 감사하라”입니다. 애가 아프더라도, 집에 불이 나더라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집이 내 집도 아니고 그 애도 내 애도 아니고. 이것이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더 돕기 위해서 안산강의 중에 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자유의 영역은 산정상입니다. 아주 높은 산, 흰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높은 산입니다. 이 자유의 영역은 미래의 영역입니다. 미래에 이렇게 될 겁니다. 현재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과거, 다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의 영역에 속한 자는 “미리 아신 자”에 속했기 때문에 무엇까지 보장을 받는가? 영화롭게 되는 것까지 보장 받습니다.
미리 이 자리에 서서 소급해서 현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새삼스럽게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로서 육체의 소욕이 있더라도 그 육체의 소욕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 아닌 것은 무엇인가? 현재 여기, 산 아래 있는 나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겁니다. 자꾸 열심히 자기 자신을 밀어 올리는 겁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보통생활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19세기의 시를 암송했는데,
「삶이 너를 속일지라도 너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오늘은 항상 우울하지만 마음은 항상 미래에 있는 것
지금의 모든 날은 다 사라져 버리지만
그 때가 되면 사라진 그 날이 그리워지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은 미래에 있는 것.” 이 시의 문제점은 계속해서 10년 전에 한 그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되지 못하고 ‘구원될 걸, 아마도?’ 하는 식으로 계속 시간을 뒤로 미루는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나중이 되면 뭔가 해결될 것처럼. 어린이가 어른이 되면 착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영악스러운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인간성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어른이 되면 그 인간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는 죄 아니라고 여긴 것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아, 이것까지 나쁜 짓이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열심히 일해서 얻은 대가는 건전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안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었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구나. 얼마나 건전하게 돈을 벌었는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돈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그 것 자체가 이미 주의 말씀에 위배되는 육체의 소욕이구’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 때 그 아는 그것을 찰칵, 사진을 찍으면 그것이 뭡니까? 그것이 양선이요, 온유요, 형제우애요, 절제요, 오래 참음 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알면 성령의 열매가 아닌 것이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의 인줄 알면서 그 모든 것이 육체의 일이 됩니다. 이제는 자기의 라고 주장하는 육체의 열매에 어떤 것이 있는가를 봅시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유업이란 상속이라는 말입니다. ‘하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그러면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내가 행해서 얻는 나라가 아니고 아무것도 안했는데 상속되어서 받을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받아서 들어가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서 살만한 사람이 되려면 뭘 알아야 됩니까? ‘나는 이러 이러한 인간이었음’을 자인해야 됩니다.
사람이 죄 인줄을 모르면 자기 정당화를 하게 되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강도짓을 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 내 주특기인 것을,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혀서 죽으신 것을 보고 그게 내 죄인 줄을 알 때, 그것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고 바로 그것이 하늘나라 상속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살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하늘나라 들어갈 사람답게 살아야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 들어갈 사람답게 사는 것이 뭐냐? 내가 내 힘으로는 죄밖에 짓지 못한다는 것을 알 때 그때 십자가가 드러나고 십자가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말씀을 뺐다고 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런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빼버리면 우리는 뭐합니까? ‘나 구원받았다. 끝! 나는 이제 내 맘대로 산다.’ 이렇게 됩니다.
이게 바로 13절에 있는 대로 ‘자유를 줬는데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뭘 알라고요? 우리가 이렇게 살던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 말씀대로 밝힐 때 구원받은 내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해 주신 십자가를 자랑 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어디에 못 박았습니까? 이거 중요합니다. 어디에 못 박았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우리의 형틀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원래 누가 죽는 형틀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시는 형틀이 십자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하여 그냥 공동묘지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불신자가 다 같이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의 육체가 죽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공동묘지가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양쪽 다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냥 보기에는 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것 같아도 한쪽은 그냥 자연스럽게 죽고 한쪽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간주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누가 접선합니까? 이미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가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다리고 있다가 십자가 자기 죽음까지 인도합니다. 인도하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되면 우리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 덕분에 우리가 주님의 이루신 자유의 영역(롬 8:29,30)이 몽땅 우리의 상속으로 되는 겁니다.
안산에서 식사를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불교의 자기부인과 기독교의 자기부인이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불교에서도 자기를 부인하라는 소리를 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불교에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죄인이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에서 나와서 무로 간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과 다르잖아요. ‘이것이 오렌지인데 이 안에 아무것도 없어’ 와 ‘이게 오렌지네’ 하고 다르잖아요. ‘우리 안에 죄가 가득하다’는 것 하고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미련두지 마라.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여, 죄인입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과 분명히 다르지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증거 하려면 우리가 죄인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하늘나라는 아들의 나라이고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스러운 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겁니다. 토기장이가 우리를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은혜의 그릇으로 만든 겁니다(롬 9:21). 지옥 가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십자가 안 믿는 꼴좋다!’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지옥에 가야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불신자들이 들으면 사람의 존엄성과 인격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돌멩이가 날아옵니다. 그래서 돌멩이에 맞아 죽은 분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사람을 모독해도 당신같이 그렇게 완전히 짓밟는 사람은 첨 봤다”고 나옵니다. 잘 못 들어서 그렇지요. 첨 봤다는 그 말은 그동안 이야기를 해도 듣기 싫다고 듣지 않다가 그때서야 들은 거지요.
여러분도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기분 나쁘십니까? 제가 여러분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이야기는 없다고 봅니다. 왜? 내가 나를 부담지우는 것에서 자유로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인간되고자 하는 그 부담에서 자유로워졌잖아요. 주님한테 고맙다고 해야 됩니다.
꼬깃꼬깃 내가 나를 안 놓치고 엄마가 자식을 키우듯이 합니다. 아가씨가 시집가기 전에는 성가대 하고 교사하고 이런 저런 봉사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지만 시집가고 나서는 자기애 밖에 몰라요. 모든 관심사가 내 새끼 밖에 몰라요. 예수고 뭐고 없고 자기 새끼 밖에 몰라요. 지독한 자기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 때 과도하게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푼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과도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평소에 내가 나만 챙기기 때문에 ‘주님은 너무 심하게 용서 하십니다’라는 의아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보고 그냥 좋아라고 주신 사랑이 아니고 ‘더 이상 네 생각 안 해도 된다’고 우리가 우리 생각하는 부담에서 떨쳐버리기 위해서 그런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거예요. 애가 “엄마, 배고파. 맛있는 자장면 … ” 이러고 있는데 엄마가 전화를 걸어서,
“거기 중국집이죠? 팔보채, 난자완스, 탕수육, 쟁반짜장 … 얼른 갖다 주세요.”
“엄마, 난 그냥 자장면이나 먹으면 되는데 …”
“가만있어. 이것 다 먹어라.”
“엄마, 이거 너무 과도해.”
“네가 과도하다고 여긴 것은 너 배고픈 것만 생각했지 너를 사랑하는 엄마 입장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너한테는 과도하게만 보이는 거야.”
앞으로 입만 떼기만 해봐라.
“엄마, 용돈!” 은행에서 26억 가져와 버립니다. 우리는 평소 습관이 우리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하심을 너무나 과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날 위해서 내가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줄 수 있는 사랑을 마땅히 공급받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 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는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뒤에 붙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강의를 들으면서 궁금해 할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는데 문제는 진짜 입니까? 혹시 그냥 위로삼아서 해주는 조작된 이야기 아닙니까?”
갈라디아서 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나옵니다. 우리 같으면 ‘나 구원받았다’고 촐랑대면서 자랑할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 구원 받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십자가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분명히 2000년 전에 터졌지요?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다 그대로 진실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해석할 때 절대로 십자가쪽으로만 해석해해야 됩니다. 십자가만 자랑해야 되는데 거기에 다른 것이 곁들여지면 성경해석이 전부다 조작된 것이고 엉터리 해석입니다.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식으로 사도바울이 성경을 썼기 때문에 이 성경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만 풀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같은 성령 받은 사람끼리 의사소통이 되려면 사도바울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경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앞에 다른 이야기를 잔뜩 해 놓고도 그것이 어디로 통한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맞잖아!’라는 쪽으로 나왔다면 우리도 동일한 성경을 보면서 ‘그러니까 십자가 맞잖아’라는 쪽으로 해석이 되어야 사도바울과 같이 한통속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가 사도바울과 같이 되면 우리한테는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마귀가 하는 말이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누가요? 마귀가! 어떤 목사는 사도바울을 모독하는데 마귀보다 더 못합니다. 마귀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아요. 그 말은 사도바울 같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마귀가 볼 때에 우리를 성도로 안 본다는 뜻입니다.
요즘 뉴스에 신정아 사건이 떠들썩하게 나오면서 그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해도, 저는 세상을 볼 때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예수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일대학을 나왔든 그렇지 않든 간에 안에 예수가 없는 것은 사람도 아니라는 겁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개고기를 먹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소욕이죠. 그런데 갈라디아서 6:14에 의하면 성령에 의해서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성경 해석을 어떻게 했습니까? 육체의 소욕을 위해서 성경해석을 한 거예요.
‘자, 한 십억을 가져야 산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방법이 뭐가 있습니까? 기도하는 방법이 있지요. ‘주여, 10억을 주옵소서.’ 그런데 앞사람이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한 20만원만 주옵소서. 20만원 없으면 나는 죽어버린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건 내 타입이 아니야.’ 20만원 위해서 기도하고 20만원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내 타입이 아니고 적어도 10억이 있어야 내 타입이 되는 거예요.
이게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기도를 해 온 거예요. 그런데 고맙게도 주께서 그 기도를 전혀 안 들어주는 것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 목사님,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맘대로 기도하세요. 왜? 육체의 소욕이니까.
기도할 때 솔직한 게 제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솔직한 것을 수정해 봐야 그것도 솔직한 거니까. 솔직한 것을 수정해 봐야 주께서 속아 넘어가실 리가 없으니까. 솔직하다는 말처럼 솔직하지 않은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솔직해도 껍데기처럼 벗겨보면 덜 솔직한 것이 또 남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라고 말하면 그것은 솔직하지 않은 말 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솔직하지 않은 층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솔직하게 한다고 하지 말고 ‘지금 내 성질대로 한다’고 하면 맞습니다. 흔히 되도 않는 말중에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 하는데 그런 것은 없고 ‘취중객소리’만 있습니다. 본인도 진담인지 뭔지도 몰라요. 내일 되면 또 다릅니다. 매일 같이 가짜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종잡을 수 없어요.
다만 아는 것은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도 상관없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 다른 불신자들은 공동묘지에서 죽고 화장터에서 죽지만 우리는 죽는 장소가 어디? 십자가입니다. 어떤 분은 국립묘지에 묻혔다고 자랑스러워하는데, 어디에 묻히든 예수 없는 것은 인간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있어야 마지막 때 무덤에서 나올 때 부활할 때 영광스러운 부활로 나오는 겁니다(요 5:28,29).
영광스러운 부활은 누가 이룬 겁니까? 그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주님의 아이디어입니다. 주님의 숙제고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바쁜 일상을 사는 가운데 비가 내리는 이 금요일 밤에 주께서 몰아넣어서 모인 것은 쓸데없는 것 때문에 우리의 청춘과 세월을 다 지새우고 있다는 것을, 우리 육체의 소욕 때문에, 내 좋아하는 타입을 얻고자 평생을 허비하고 낭비해 왔다는 것을 다시 알아서 앞으로는 살면서 낭비하면서도 낭비인줄로 아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일이 되면 내일 또 낭비할 것인데 제발 내일 부터는 ‘낭비구나. 헛된 수고를 하는구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을 아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90이 되었다 해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주름진 껍데기밖에 남지 않아요. 아무 쓸모도 없어요. 20대의 그 물기가 90이 되어 다 빠지면 쭈글쭈글 합니다. 아무리 미인 소리 들어도 80이 넘은 미인은 못 봤어요. 진솔한 내 모습은 흉측한 모습으로 이 세상 은퇴를 합니다. 이미 그것은 예상된 겁니다. 정과 욕심은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80이 되든, 90이 되든 십자가외에는 자랑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쁘다 보니까 십자가 잊어버렸습니다. 바쁘다 보니까 사소한 일인지 아닌지 분간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바쁘다고 성경 안보다 보니 작은 일에 목숨 걸었습니다. 내 육체의 소욕에 우리의 운명을 거기에 걸었고 그것이 성공인지 알았습니다. 이런 촐랑거림과 부질없음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자유가 덮치니 그 모든 것이 용납이 되고 미리 아신자가 영화롭게 되는 것까지 우리가 알았사오니 이제는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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