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30강 종강 (이 근호목사, 2007년 11월 9일 b, 서울의존교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솥뚜껑이 우리에게 덮쳤습니다. 덮치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꼼짝 못하고 십자가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우리 위에 덮쳐진 그 십자가가 뭐냐,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십자가가 우리위에 덮쳤는가? 만약에 진짜 솥뚜껑이라면 그 밑에 있는 느낌은 무겁다, 단단하다, 숨이 막힌다는 식으로 나올 텐데 십자가가 덮치면 ‘왜 그 분께서 죽었을까’ 하고 나와야 합니다.
‘왜 주의 죽으심이 우리를 지배해서 우리가 천국 가는 겁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직장에서 일하면서, 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그런데 주님은 왜 죽은거지?’ 제가 열심히 강의하고 있으면서도 ‘그런데 주님은 왜 죽었는데요?’ 택시운전기사가 열심히 운전하면서 ‘손님 하나 더 태워야지’ 하면서도 ‘그런데 주님은 나같이 이렇게 성실하게 손님 태우고 택시기사 하는 나를 위해서 왜 죽으셨는데요? 택시 운전하는 그것이 무엇이 나쁘길래 죽으셨는데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진짜 십자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냥 모자 하나 쓴 것처럼 ‘이 신기한 모자를 쓰면 천국 가는 모자입니다. 이 모자는 절대로 벗어내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이 모자가 그냥 모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피를 흘리면서 덮어씌우니까 우리는 그 피가 자꾸 묻어가면서 ‘그런데 왜 자꾸 피를 흘리시는데요?’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피가 없으면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죄가 용서가 안 됩니다. 한 어린이가 나와 보세요. 자 여기 이 애가 냄새가 많이 납니다. 목욕을 잘 안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냄새가 나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모기약을 가지고 계속 뿌리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택시 운전 합니다. 택시 기사는 택시운전하고 설거지 하는 사람은 그냥 설거지 합니다. 15등하는 학생은 5등하겠다면서 공부합니다.
그러고 있는데 자꾸 뭐가 모기약이 뿌려지는 겁니다.
"왜 자꾸 뿌리는데요?”
“냄새나잖아.”
“무슨 냄새요?”
“죄 지었잖아.”
“설교하고 강의하는 이것이 왜 죄인데요? 맛있는 주스 마시는 이것이 왜 죄인데요?”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전체입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마음에 양심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이 양심과 법이 있는 이유가 지금 우리 맘속에 선과 악이 서로 대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과 악을 안다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나는 운전을 잘하니까 나는 착하다 그리고 운전을 안 하고 게으름을 부리면 나는 나쁘다 착한 사람 되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나쁜짓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점점 착해지기에 죽어서 좋은데 가고 살아서도 더 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쁜 짓을 하면 ‘나는 이런 것이 나쁜 것이라고 여기기에 나는 죄인이다’라고 단정하는 거예요. 제가 의존교회에서 많은 강의를 했습니다만 지금 제일 어렵고도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쁜 짓을 해서 이게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나는 벌을 받는다’는 이것이 바로 나쁜 짓이 되는 거예요. ‘내가 나쁜 짓을 했기에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되었다’는 그 생각이 원래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던져준 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래 의도한 사람이 아니고 아주 엉뚱한 사람입니다.
진짜 원래 의도한 사람은 갈라디아서 6:15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안 것이 죄가 되기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추방되었습니다. 그 자식들이 새끼 치는 식으로 낳고 또 낳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좋은 일 했으니까 벌 내리지 마세요. 내가 나쁜 일을 했으니까 착한 일로 메우겠습니다. 착한 일을 두 배로 했으니까 복을 많이 주셔서 다른 사람 다 망할지라도 나는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자꾸만 엮습니다. ‘오늘 성경공부 참석했으니 이번 한주는 복에 복을 많이 더해 주세요.’ 이것은 옛 사람입니다. 옛날의 그 망해야 될 사람입니다. 지옥가야 될 사람입니다. 새로 지은 사람은 그런 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착한 짓이야. 이것은 나쁜 짓이야.’ 그것은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 양심의 소리가 문제가 됩니다. ‘양심대로 살면 나는 복 받아서 오래 살고 양심에 어긋나게 되면 나는 망해서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 내가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 이런 것은 하나님의 생각에 애초부터 없었던 마귀가 지어낸 엉뚱한 생각입니다.
“목사님!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으나 그 말대로 한다면 사람들을 다 게으름뱅이 만들 겁니다.” 이렇게 나오는 분들이 있는데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머리카락도 세시고 발걸음도 세시는 것을 아십니까? 방금 제가 몇 걸음 걸었습니까? 모르지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제 머리카락 몇 개입니까? 모르지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만든 새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상관없이 새 사람의 원리대로, 새사람의 원칙대로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 사람을 위해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 책임지고 구원하는 새로운 원리에 속한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예수 믿을 때 예수 믿는 일이 착한 일이 되어서 그 착한 일의 보상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그리 되면 성령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육체의 일이고 도덕, 양심상의 일입니다. 그 착한 일 중의 하나로서 ‘예수 믿기’ 라는 착한 일을 해서 그 착한일의 보상으로 천당 간다는 것은 옛사람의, 죄악 된 인간들이 했던 그 행세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매일 같이 없애버리면 남는 것이 있습니다. 없애버리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요? 그러면 그것은 구원 못 받은 사람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 합니다. 이제부터 예수 안 믿기로 해 보세요. “목사님, 이제부터 예수 안 믿습니다. 절대로 예수 생각 안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뭐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나를 주께서 십자가로 구원했다’는 이것이 남아 있어야 그게 새사람입니다. 내가 예수 안 믿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러분을 덮어씌운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축축한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난 예수 안 믿기로 했는데 이건 뭐야? 어? 내가 예수 믿기로 했든 안 믿기로 했든 관계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내가 구원된다’는 그것이 바로 내가 원인이 되지 않고 주님께서 뜻이 있어서 구원해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누구를 증거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성령이 임해서 구원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이 갑자기 성령세례를 받고 나니까 그 때부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다른 사람이 와서 “야, 너 왜 갑자기 예수를 믿는데? 너는 어떤 착한 일을 했기에 구원을 받는데?” “아니야, 아니야. 내가 착한 일 한 것 없어.”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 쪽에서는 사람이 뭘 해야 그가 한 그것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가 전에 유치원선생님을 했는데 그때 했던 동화와 동요가 몇 개 생각납니다.
동화책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애가 하는 말이 “기린 아저씨, 기린아저씨. 나무에 올라가면 안돼요.” 기린이 담장위로 목이 쑥 올라와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 애 생각에는 담장 위로 목이 쑥 솟아오를만큼 키가 되려면 뭔가를 밟고 올라설 때만 그만한 키가 유지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린아저씨가 “나? 나무에 올라간 것 아닌데”라고 합니다.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왜 그리 키가 큽니까? 원래 큽니다. 기린은 원래 목이 길어요. 우리가 예수님의 새사람 된 것은 예수님 때문에 새사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린 아저씨가 나무에 올라가서 키가 커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원래부터 새사람 된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자꾸 원인을 따져서 ‘어떻게 해서, 뭘 믿어서 구원되었습니까? 어떤 착한 일을 해서 구원되었습니까?’라고 만 날 따지는 겁니다.
이게 환장할 일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백날 연구하고 가르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을 모르는데. 제가 아직까지 피 흘리는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새사람이라는 것은 우리 쪽에 원인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왜 하필 피냐, 그 이야기는 아직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양심이라든지 혹은 법을 지키는 이유는, 법 지키고 양심 지키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보상으로 천국에 넣어줄 줄 알고 법을 지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새사람 된 사람은 없습니다. 왜 사람이 행함으로, 율법 지켜서 구원 안 되는 이유는, 뭘 지킨다는 그 자체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했던 그 인간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생긴 버릇입니다. ‘이것이 선일까, 악일까? 내가 이런 일을 하면 선한사람 되고 저런 짓을 하면 나쁜 사람 되겠지’라고 생각해서 이왕 선한 일 하는 것, ‘예수 믿기’라는 착한 일을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새사람하고는 관계없이 우리가 그냥 지어내 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 나이 많이 들어서 치매 걸려서 예수 안 믿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까?
그러면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는 지옥 가는 겁니까? 갈라디아서 마지막 대목에 와서 왜 이것을 강조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어떤 구절을 공부하든지 ‘내가 저것 알아서 구원받아야지’라는 생각은 갈라디아서 자체가 거부합니다. 사도바울이 거부하고 주님이 거부합니다. 기린아저씨가 이미 큰데 뭐하려고 또 발을 딛고 올라섭니까?
기린아저씨가 발뒤꿈치 들었습니까? 그냥 가만 서 있었습니다. 새사람은 그냥 그대로 사는 거예요. 운전을 하든 운전을 안 하고 놀든 그냥 있는 거예요. 그냥 있어도 새사람 맞습니다. 주님의 피 뒤집어쓰고 그냥 있어도 이미 새사람입니다. 죽으면 천당 갑니다. 거지 나사로는 개가 와서 무시하고 핥았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기죽었습니까?
가난하든, 개가 핥든지 그것하고 새사람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천사가 와서 큰 사람 대우해서 천당에 데려갔습니다. 아브라함도 거기 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천국 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거지여서 천국 데려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새사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택함 받으면 그냥 천국 가는 겁니다.
이미 새사람의 영역에 속한 사람은 이것이 믿어집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기린입니다. 기린 되려고 목 빼지 마세요. 수술하지 마세요.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대머리만 구원한다고 하니까 멀쩡한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행함 아닙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여기 대머리 있습니다’하고 손들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새 사람 됩니다.’ 맞죠. 그냥 맞다고 믿어지는 겁니다. 내 피가 아니고 예수님 피입니다. 그냥 믿어지는 거예요. 믿었다는 내 행위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6:14을 봅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새 사람 안 된 사람은 이 뜻이 뭔지 모릅니다. 14절에 있는 ‘나’라는 것은 내가 나의 주인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각자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각자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인 이상은 이 본문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이 안경집이 ‘내가 주인이다’라고 하면 주제파악을 못하는 겁니다. 안경집의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제가 이 안경집의 주인입니다. 내가 던지면 던지는 대로 이 안경집은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어디에 던졌습니까? 십자가 안으로 던졌습니다. 십자가안은 예수님의 죽음 안입니다.
지금부터 왜 피인가? 왜 예수님이 피를 흘려야 되는가?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우물을 그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멀쩡한 사울을 이 우물 속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우물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먼저 죽였던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서 생긴 우물이 바로 이 우물입니다.
이 이물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밀어서 예수님이 죽었고 이제는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떠밀어서 우물 속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왜 죽였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선과 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가지고 있어서 ‘착하든지 악하든지 다 내가 하기 나름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 11:25,26)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쪽 사람들은 ‘내가 착하면 영생 얻고 내가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가, 내가’라는 그런 것은 다 생각하지 말고 ‘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고 나를 믿지 않는자는 저주를 받는다’라고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내 생각하다가 남 생각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잘났어. 나는 훌륭해.’ 그럼 저 사람은? ‘몰라 그것은 관심 없어. 나는 씩씩해. 나는 달리기도 잘해. 잠도 잘자. 축구도 잘해.’ 24시간동안 남 생각한적 있습니까? ‘나는 000을 찍어야지’라는 것은 000을 생각하는 겁니까? 자기 생각하는 겁니까?
앞에 ‘나’가 붙어 있지요. ‘오늘 저녁은 치킨을 먹을까, 피자를 먹을까?’ 누구 생각합니까? ‘나’지요. 24시간 자기에게서 떨어져 본적 있습니까? 그것은 정신병 환자 같으면 몰라도 어떤 인간도 ‘나’로부터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람은 ‘나’만 믿는다는 뜻입니다. 나의 결정, 나의 행동만 믿습니다.
나 안 믿고 다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떠밀어서 우물 속에 빠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너를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할수 없는 불가능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를 믿으라.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라고 백날 이야기를 해봐야 우리는 ‘나’에서 못 벗어납니다. 곧 죽어도 나와 함께 더불어 죽고 싶습니다.
내가 제일 소중하고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날 데려가면 몰라도 내가 날 포기하고 믿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님 계신 곳에 자진해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보시기에 저쪽은 이미 죽은 자요, 우리 보기에 예수님은 이미 우리 손에 죽은 자가 됩니다. 예수님 보기에 예수님 우물밖에 있는 자는 죽은 자요, 이쪽에서 보기에 예수님은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울이라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야 된다고 했던 그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사도바울을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자기가 핍박했던 예수님 우물에 풍덩 하고 빠졌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은 내게 대해서 죽은 자고 세상 사람들은 나를 예수와 똑같이 죽은 자로 본다는 겁니다.
세상은 자기 양심을 자랑하고 자기가 법을 지켰음을 자랑하지만 사도바울은 ‘십자가외에는 자랑할것이 없으니’라고 합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입니다. “목사님, 내가 갈라디아서에서 뭘 배우면 됩니까?” “그 ‘나’라는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누가 뭘 배우고 말고가 아니라 크레인처럼(이런 놀이기구도 있지요? 500원 동전 넣고 인형도 꺼내기 하는 놀이기구) 나를 집어서 우물 속에 집어넣는데 이 우물의 흔적이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내 머리 위에 솥뚜껑에 십자가 피 묻은 것은 ‘이미 너는 예수와 더불어 생명 안에 있느니라’는 증거로서 예수의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나는 십자가와 함께 죽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에 그것이 영광이고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자기가 살았던 세상을 보니까, 저 인간들은 아직도 자기양심과 자기율법을 자랑하는, 선악과만 생각하고 원인과 결과만 생각하는 하나님께 저주받을 인간이고 사도바울 본인은 죽었던 나를 주님께서 살린 것을 알아서 ‘내가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이고 피입니다. 십자가란 ‘내가 옛날에는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이렇게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인하여 피 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남들 보기에 죽었다는 그 장소가 유일하게 영생이 있는 곳, 영생의 샘물이 있는 곳입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 때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연극처럼 그것을 제가 약간 각색해서 연출해 보겠습니다.
“여인아! 물 좀 도.”
“당신은 경상도 사람인데 왜 서울사람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나한테 물을 주면 내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지 롱.”
이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 그 우물은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
두 번째, 내가 어떤 방법으로 물을 퍼 올립니까?
이 두 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여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내게 물을 주면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지 롱” 하니까 “그래요? 어디쯤에 그 우물이 있으며 어떻게 길어 올릴 수 있느냐”고 물은 겁니다.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영생, 천국이라도 내가 뭔가 행함으로 따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고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천국이니, 하나님이니 뭣이든 내 양심껏 하면 그 천국이 내 것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이야기를 다 하고난 그 여자가 “난 예수님을 만났다!” 하고 소리치면서 물 길러 올 때 가지고 온 물동이를 다 버려뒀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아줌마, 아까 목마르지 않는 샘물에 대해서 주고받던데 그 샘물이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퍼 올리는지 그 방법을 알아냈습니까? 못 알아냈습니까?” 그러면 그 여인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그거요. 몰라도 됩니다.”
“왜요?”
“이미 마셨으니까.”
“아니, 그 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은 몰라요.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이 지리적 공간적인 세계 말고 다른 세계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도 내가 알 필요 없습니다. 그때는 내가 철딱서니 없어서 ‘어떻게 하면 퍼 올릴까’라고 했지만 이것은 내가 퍼낸다든지 내가 어떻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나를 가지고 영생하는 물속에 놓으니까 내가 가는 그곳에서 퐁퐁 물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곳에 생명의 물을 먹게 되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가지고 노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그곳이 바로 생명의 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메시야를 봤다’고 하는 것은 ‘이미 나는 생명수를 봤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그것을 퍼 담지 않아도 되고 내가 그 기적을 안 가져도 되고 예수님자체가 계속해서 내 속에서 생명의 물이 터져 나오도록 조치를 한 겁니다.
그것을 좀 엽기적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아줌마가 있습니다. 그 아줌마가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하면 그 물을 길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그 아줌마에게 내시경 검사할 때 쓰는것 같은 호스를 집어넣습니다. 그 호스로 물을 막 집어넣으니까 아줌마 눈에서 물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예수님께서 내안에 있으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이 막 나오는 거예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자랑할 것은 뭐밖에 없다?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생명밖에 없다고 막 나오는 겁니다. 물을 퍼 담고 어디 가서 물을 긷고 그런 것이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날 가지면 되는 겁니다.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이름이 나사로입니다. 나사로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사로가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와라.” 그러니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지금 나사로는 죽었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갈 때 네 명이 올라갔습니다. 올라가 보니까 거기에 엘리야도 있고 모세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초청했습니까? 이미 예수님 계신 곳에 엘리야도 있고 모세도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이미 낙원에 있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자에게는 이미 죽어도 산 것이고 살아도 살았습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입니다. 따로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든 운전을 하든 그게 주님 안에서 살고 영생하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6:15입니다. 행하기는 뭘 행합니까?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나 버렸는데 행하기는 뭘 행하고 율법을 지키기를 뭘 지킨다는 말입니까?
어제 일본팀하고 야구경기 한 것 어떻게 되었습니까? 6:3인가로 한국 팀이 이겼는데 진 일본팀이 씩씩거리면서 “한 번 더 붙자. 한 번 더 붙자. 계속 12회 13회 더 하자” 하면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야구는 9회까지 해서 승부가 갈리면 그것을 끝나는 겁니다. 무승부 아닙니다. 끝났습니다.
지금 율법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았고 솥뚜껑이 날라 왔으면 그것으로 끝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새삼스럽게 십일조해라, 안식일 지켜라, 율법을 들이댈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아셔야 갈라디아서를 아는 겁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사전에 자신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던져준 대로 가보니까 거기 십자가 있고 그게 우물속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 있는 사람의 특징이 ‘나는 자랑할 것이 하나 밖에 없는데 나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1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갈라디아서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라디아서 2:17,1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뭘 헐었습니까? 양심이고 법이고 그것을 다 헐어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지요? 예수님이 죄 많은 분 같으면 부활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렸다는 그 말은 다른 길로서는 영생 얻을 길이 없고, 예수님 십자가 아니고서는 어떤 인간도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를 부활을 통해서 보여 줬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 왜 죽었습니까?”
“너의 죄 때문에 죽었잖아.”
“제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네가 만 날 율법, 내가 어떻게 하면 착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벌받게 된다. 나는 나쁜 짓해서 벌 받았고 착한 일 해서 복받고, 만 날 생각하는 것이 선악, 선악, 선악만(에덴에서 쫒겨난 습성) 생각하잖아.”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 십자가로 모든 것을 끝내버렸습니다. 골로새서 2:15에 있습니다.
골로새서 2:14,15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승리하신 겁니다. 모든 저주는 그분이 대신 다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올 저주가 없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저주를 못 받습니다. 왜? 저주를 가져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저녁때 음식쓰레기를 비롯해서 모든 쓰레기를 집안에 다 널부러져 있는데 아침에 보니 깨끗합니다. 누가 문 열고 들어와서 쓰레기를 다 가져갔습니다.
구경할 쓰레기가 없습니다. 다 가져가서.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그분께서 사랑의 그물로 계속해서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다 가져가 버렸습니다. 안산에서 강의한 부분 잠간 다시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19입니다.
고린도후서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으니라.”
여기 보면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하십니까?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 다음 5:21입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 누가 합니까? 우리 양심껏 법을 지켜서 하는 겁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는 그 우물 속으로 풍덩 하고 놓아주니까 거기에 디뎌 보니까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묻어있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염색합니다. 빨간 물감에 우리를 풍덩 집어넣어서 “아이고, 이놈 빨갛게 잘 되었다”고 하시고 파란 물감에 집어넣어서 “아이고, 이놈 파랗게 물 잘 들었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가지고 노십니다.
이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옛날의 선악적 그물이 아니라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는 무조건적인 그 용서가 염색이 되어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를 다시 끄집어냈습니다.
갈라디아서 6:15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여기 보면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법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지켰다고 하면서 ‘축복 달라’고 자꾸 이야기하고 그것 못 지켰다고 ‘저주 받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에 의해서 이미 저주는 없고 있는 것은 오직 계속 용서하시고 천국 가는 길 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게 솥뚜껑입니다. 개미가 솥뚜껑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여러분에게 덮씌워진 사랑이 여러분이 평생 동안 일구어 낸 여러분의 수고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이 생산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습니다. 한나가 기도해서 애기를 낳았습니다. 그 애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한나가 사무엘을 바칩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얻어낸 내 새끼다. 이것은 내가 공부해서 얻어낸 5등이다. 내가 애쓰고 수고하고 운동해서 나는 이만큼 건강하다.'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100평짜리 집에서 살고 싶습니까? 살아보면 얼마 못가서 별로 안 좋습니다. 100평짜리에 사나 30평짜리에 사나 다 헛되고 헛되니 인생이 헛됩니다. 애기 낳은 뒤에 예쁘니까 또 하나 낳고 싶어서 또 하나 낳아 보면 그 기쁨이 몇 년 안갑니다. 금방 또 낳고 싶어지는데 살림살이가 안 되니 낳지를 못합니다.
사람의 만족은 끝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결핍과 허무가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콘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콘이고 그 위에 예수님의 아이스크림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옛날 습관, 내 노동에 의해서 결과를 얻어 낸다는 그 습관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상의 아이스크림, 이렇게 점선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이런 것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없는데 나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되었다 치면 여기 뭔가 또 있어요. 또 상상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이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국민소득이 1000불만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000불이 되니까 또 허무하거든요. ‘하나님, 5000불이 되게 하옵소서’ 합니다. 그게 되니까 ‘2만불’, 그게 되니까 지금은 ‘동해 바다에 석유가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석유 나오면 그게 천국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하심이 영 맘에 차지 않고 감사하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감사할 맘은 없고 석유 나오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나의 기도덕분에 대한민국에 석유 나온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자기중심, 내 중심,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절대신, 내가 신이다, 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이런 생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어떤 법을 지키면 됩니까? 양심껏 살면 축복해 줍니까?’라는 소리가 자꾸 나오는 겁니다.
할머니들이 새벽기도 하면서 무슨 기도합니까? ‘하나님, 저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새벽기도 하는 노인들 저는 못 봤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새벽기도 3초, 5초만에 끝납니다. 그렇게 안하고 뭐합니까? ‘손자가 영국에 유학 갔는데 안 아프게 공부 잘하게 해주시고, 어디를 가든지 남산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뛰어 놀게 해주시고, 이번에 아들이 부장으로 승진했고 이제는 다음에 전무인데 속히 전무되게 해주시고 우리 교회 교인 200명인데 내년에는 300명 되게 해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하는 사람이 일용할 양식이 감사하겠습니까? 주기도문에 있는 대로 기도도 할수 없습니다. ‘주여 내 죄를 사해 주시고.’ 죄지은 것이 없는데, 옛날에 다 용서받았는데 그런 기도 왜 합니까? 예수님의 거저주시는 용서에 감사하지 못하고, 이런 콘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사도바울처럼 ‘나는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이런 사람 못되고, 자꾸만 나는 위대한 사람, 진급하고 승진하고 부자 되고 재벌 되는 ‘나’가 되기를 간곡히 기도하는 이런 죄, 이 결핍성, 이 불만족, 여러분은 이 죄 다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한다’(롬 8:26)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빌 바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짜 콘이 눈에 들어오도록, 떠오르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되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밝히 보여줘서 ‘공상(궁상)떨지 말고 너 같은 죄인도 이렇게 용서받은 것을 감사해서 사도바울처럼 나는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그런 고백이 내가 고백해야 할 유일한 고백이다’라고 깨닫게 합니다.
자꾸 가짜 ‘나’를 만드시면 안 됩니다. 가짜 나를 만들면 허무를 느끼고 허무를 느끼면 우울증 걸립니다. 우울증 책 읽어 봤습니다. 그 증세가 첫째 잠이 안온다. 둘째 체중이 빠진다. 우울증이 왜 오는 겁니까? 프로이트에 의하면 ‘남에 대한 분노를 자기에게 퍼붓기 때문에 우울증이 온다’고 했습니다.
‘왜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석유가 나오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석유가 나오지 않는가? 사우디를 폭파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까? 저 못난 인간이 나보다 먼저 승진했는데 저걸 죽여? 공부도 못하는 게 선생님한테 사랑을 받는데 저걸 내가 혼내줄까?’ 나의 미흡한 것에 대한 분노를 남에게 퍼부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까 대신 나한테 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때리는 겁니다. ‘이렇게 나를 때려도 하나님이 기도를 안 들어 줍니까?’ 교회 다니면서 우울증 걸리니 꼴이 참 좋습니다. 무슨 그런 것이 다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주께서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가난해도 허무하고 부자 되어도 허무합니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어릴 때는 한창이지만 나이 들어 90될 때가 있습니다.
노인이 되면 다 흙이 되어 산산이 부서집니다. 부서질 인간 처 발라봐야 별 의미 없습니다. 별 의미 없습니다. 바른다고 허무한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쉽지만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16-18입니다.
갈라디아서 6:16-18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아멘.”
기쁨으로, 정말 고마워서 ‘나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시니 정말 아멘, 아멘입니다’하고 진짜 하나님의 은혜에 아멘, 하시는 새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정말 오해했습니다. 십자가로 새사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영 성에 안차고 만족치 못해서 남들 가진 욕망을 따라 잡는다고 헛되고 헛된 세월 다 보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죄 많은 인간입니다. 이 죄 위에 주의 피를 얹으사, 그 피로 다 씻어주심을, 씻을수 없는 죄가 없음을 또다시 감격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피의 능력을, 용서를 찬양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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