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27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8:58

갈라디아서 제 27강 (이 근호목사, 2007년 10월 12일-a,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를 1장부터 5장까지 공부해 왔습니다. 성경만 있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가정 해 봅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살지 않는 어느 섬에 헬리콥터가 날아왔습니다. 그 헬기에서 성경책만 툭, 던져 놓고 갔습니다. 사람도 없는데 성경책만 떨어졌을 때에 그 성경은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닙니까?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세상은 성경말씀대로 될까요, 안될까요?

오늘 갈라디아서 6장을 할 텐데, 갈라디아서 5, 6장의 말씀이 헬기에서 펄렁 거리면서 떨어졌을 때에 그 성경말씀을 보는 사람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고 읽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그 성경말씀대로 세상이 진행 될까요, 안될까요?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2년 뒤에 어떤 사람이 파선하고 표류해서 이 섬에 상륙하고 나서 성경책을 보게 되었어요.

그때에 그 사람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1) 나는 구원받았다.
2) 나는 구원받지 못했다.
3) 나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과 상관없다.

이중에서 어느 쪽이 정답이 되겠습니까? 초반부터 너무 어려운 문제를 냈습니까? 정답은 3번입니다. 왜 정답이 3번이 되느냐 하면 ‘나’가 들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는 정답에서 탈락되는 겁니다. 성경을 보고 ‘나는 구원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갈라디아서 5,6장에서 하는 이야기와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책을 집어 들면서 ‘나는 구원 받았구나’라고 생각한다면 논리에 어떤 문제점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성경책을 안 봤더라면 지옥 가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책을 안 봤다면 그가 천국에 갈까요, 지옥에 갈까요? 정답은 하나님 맘입니다. 그것을 3번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무인도에 올라와 보니 성경에서 하는 이야기가 내가 구원받았느냐, 안받았느냐와 상관없이 하나님 자기 맘대로 일을 하셨구나. 그리고 그 일을 하신 결과 중에 하나로서 내가 성경이 이 섬에 도착한 지 2년 뒤에 와서 성경을 보고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도 내가 잘나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중에 있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렇게 해 놓고 비로소 1번,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맞구나’라고 한다면 그것도 정답이 될수 있겠지요. 1번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3번을 거쳐서 1번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바로 1번으로 가면 3번이 무시당합니다. 방금한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5:24의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십자가가 오기 전까지는 전부 다 나 위주로, ‘신이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신이시여 저를 버리지 마시고 천국에 보내 주소서. 오, 신이시여, 제가 주를 찾나이다.’ 전부 다 생각이 ‘나’ 중심으로 갑니다. ‘나’중심으로 생각 할 것 같으면 이 성경 덮어버리고 그 자리에 불교의 경전이나 알라의 경전인 코란을 갖다 놓아도 그 사람은 변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경이냐, 불경이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미리 성경책 펴기 이전부터 ‘오, 신이시여, 날 구원하시려고 성경을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이것을 보고 구원을 받겠습니다. 자, 어디 한번 읽어나 볼까나’ 이래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성경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쳐다보기도 전에 지레짐작으로, 자기 멋대로 ‘아마 성경은 날 구원하는 책일걸?’하고 각본을 짠 셈입니다.

이거 안 됩니다. 이거 뜯어 고쳐야 됩니다. 교인들도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을 설교할 때 ‘내용 뻔하지 뭐. 이런 내용으로 나올걸?’ 합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까 ‘그런 내용으로 나올걸?’하는 나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면서 치면서 그것을 깨버리는 설교를 들을 때 ‘내가 또 내 위주로 생각 했구나’ 하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내가 내 위주로 생각하는 이것이 인생의 짐이었구나’ 하는 이것이 감동으로 밀려온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약속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헬기가 여기 착륙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밑에 사람이 있다고 할때 그 사람은 시끄럽겠습니까, 안 시끄럽겠습니까? 귀를 막을 겁니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소리가 나죠. 그러면 밑에 있던 사람이 “시끄럽다!”하겠지요. 자, 그러면 여기에 사람이 없다고 칩시다. 사람이 없을 때 헬기가 착륙하면 소리가 납니까, 안 납니까? 나잖아요. 그게 정답입니다. 성경은 자기 혼자 다 “타타타타타!” 움직이는데, 여기 성경도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옆에 있다 보니까 “헬기 파일럿 아저씨, 시끄러운데 엔진 좀 꺼주시겠습니까?”라는 말을 할 수는 있어도 “당신은 내가 여기 있는데 왜 헬기의 프로펠러를 왜 돌려?”라고 항의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경대로 일하시는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화내거나 짜증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오늘 확실하게 배웁시다. 믿음이란 내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성경은 “타타타타타타!” 하고 움직인다는 겁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어떤 여자 분이 자기 딸의 몸이 아프니까 “예수님께서 어서 오셔서 제 딸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할 때에 “나는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러 왔지 개 같은 인간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타타타타타타!, 나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지 개같은 이방민족의 소원을 들어주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일을 하러 왔다. 타타타타타!” 하니까 그 여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맞습니다. 개도 주인이 부스러기를 던져주면 ‘어마나, 부스러기다’ 하고 주워 먹을것이 아닙니까?”

“옳소이다”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맞습니다. 주님께서 ‘타타타타타!’ 하시는데 저도 거기에 끼어들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영광이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네가 이스라엘이구나. 네가 참 믿음이 크도다” 하면서 즉시로 그 딸의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마 15:21-28).

성경은 내가 있든 없든지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엔진이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돌아가고 움직이는 헬기를 보면서 ‘저렇게 움직이네’ 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거, 시끄럽다. 내가 지금 조용하고 싶은데 왜 떠들어!”라고 버티고 있으면 그 사람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자기 자신만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 5:14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온 율법을 이루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두 자로 ‘사랑’이죠. ‘온 율법을 이루는 것’은 ‘사랑’입니다. 온 율법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거죠. 그러면 온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추가적으로 할 것이 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게 없습니다. 여러분이 헬기가 “타타타타!” 할 때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제가 맹렬하게 소리가 왕왕대도록 확성기를 달아 드릴까요? 제가 엔진좀 손봐 드릴까요?”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자체적으로 ‘사랑’은 핑핑,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온 율법이 이루어서 자체적으로 잘 돌아가기 때문에 누구는 빠져야 됩니까? 우리는 거기에 가담하면 안 되고 빠져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서 우리 몸을 거기서 빼야 됩니다. 빼버려서 사랑을 받는 입장에 서 있어야 되는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고 부탁이고 권면입니다.

성령의 열매, 매우 쉽지요? 그러면 어떤 때, “타타타!”하는 헬기를 망칩니까?

1) 도끼
2) 칼
3) 수류탄
4) 기도

몇 번입니까? 이것은 정답이 많아요. 1-4번까지 전부 다 해당됩니다. 헬기가 잘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헬기가 참, 성능 좋다. 사랑이 막나오네.’ 여러분, 저는 어릴 때 봤는데 설탕을 넣고 기계를 돌리면 솜사탕이 막 나오는 것 봤습니까? 발판을 막 구르면 구름처럼 솜사탕이 올라오고 그것을 막대로 말아서 솜사탕을 완성합니다.

그처럼 주님께서 발을 구르니까 안에서 무엇이 피어오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막 피어나지요?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야, 신기하다. 저거 봐! 사랑이 막 피어나는구나’ 하면서 우리는 그 사랑을 맛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맛보기만 하면 되는 그것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라고 했습니다. 왜? 모든 법은 뭐라고요? 모든 법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부지런히 움직이시면서 사랑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맛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그 맛을 보면서 “야,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감사하면 그것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쉽습니다. 정말 쉽습니다.

교도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에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었든 그것을 아예 묻지를 않겠습니다. 당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서 일체 묻지 않는 이유는 당신은 표류하다가 이 무인도에 도착한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자, 이제 내가 소개할 것은 헬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당신이 무슨 이유로 모레 사형선고를 받는지는 모르겠는데 죽을 때까지 제가 당신에게 이야기 할 것은 헬기입니다.”

공중에서 ‘타타타타타타!’ 하고 주님께서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온 율법으로 무엇을 만든다? ‘사랑’을 만듭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이 무인도에 도착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면 당신은 성령의 열매로서 정과 욕심을 못 박은 성도입니다”라고 했을때 그 사람은 대단히 기뻐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기뻐할 겁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고, 여기 이 무인도에서 부동산 투기를 해서 50층짜리 빌딩, 100층짜리 빌딩, 땅은 한 50만평, 아파트는 100평짜리 10채를 갖고 있는 한 아저씨가 있다고 합시다.

“아저씨,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스스로 작용해서 옵니다” 할 때,

이 사람이 흘깃 보고서는,

“나, 그거 별로야. 별로 안 좋아.”
“그럼 뭐가 좋습니까?”

“나는 내가 노력해서 벌어들인 이 수천억의 재산이 훨씬 더 좋다. 주님의 사랑도 고맙기는 하지만 별로 마음에 내키지가 않는다. 이 넓은 땅과 재산이 더 좋다”고 이야기 하면 그 사람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고 성도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그것이 육체의 열매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 나라는 온 율법을 다 이루어야 갈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온 율법을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 그 온 율법을 이룬 사람이 누구지요? 타타타타타!, 헬리콥터, 예수님이 다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그냥 공짜로 누리고 받는 사람 같으면 성도지만 그렇지 않고 온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도 없고 태도가 불량스럽고, ‘그게 뭔데? 나는 내가 한 노력이 더 가상하고 중요하다’라고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온 율법에서 하나라도 어기기 때문입니다. 온 율법을 하나로 묶어 버렸습니다. ‘사랑’이라고 묶어서 우리에게 주는데, 이 사람은 자력으로 천국에 가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에 불과하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헬리콥터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알아요. ‘나는 무인도에 표류하다 온 하나의 나그네’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늘에서 온 사랑의 헬리콥터에만 기대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갈라디아서 5:24절을 설명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십자가 이야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했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입니다. 분명히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여기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어떻게 됩니까? 죽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를 어떻게 한다고요?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요. 안경 쓴 어린이가 잠깐만 앞으로 나와 주세요. 이게 못이고 이게 망치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손 벌려.” 이쪽에 꽝! 꽝! 이쪽에 꽝! 꽝! 이쪽도 꽝! 꽝!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답니다.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의 표시가 뭐냐? 우리가 원하는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건강 주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면, 우리 전체를 다 못 박아 죽여 버리면서 “똑바로 서! 손 벌려! 똑바로 서! 손 벌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하고 죽여 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이게 참 이상해요. 우리는 이런 방법 말로 다른 방법을 원해요.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그런데 네가 좀 나쁜 짓을 했어. 네가 욕심이 좀 많은데 그거 좀 고쳐라. 이제 욕심 하는 고쳤는데 너는 세상적인 정이 많아. 정도 좀 고쳐야 되겠구나. 고쳤고, 그러면 고칠게 그거 두 개뿐이네. 됐어. 고쳤지? 깨끗하게 되었어요. 자, 고쳤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박수 한번 칩시다. 짝짝짝! 이제부터 깨끗한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이 날 새 인간 만들기 위해서, 나의 약점들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뜯어 고쳐서 새 사람 되고 깨끗한 인간 되어서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 이런 사랑을 우리는 은근히 기대를 했지요. 아버지가 자식 불러 놓고,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오늘도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 놓고 잔소리를 좀 할 모양이군’
“얘야, 내가 너를 참 사랑하는데, 수학이 0점, 국어는 좀 하는가 싶었는데 국어가 10점, 과학은 15점, 다 합해서 25점밖에 안되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좀 올려라.”
“예, 아버지, 알겠습니다. 저의 공부 못함을 용서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으니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는 은근히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이리 와. 옳지. 손을 올리고 이쪽 손도 올리고. 너는 죽어야 된단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똑바로 손을 올려라. 꽝! 꽝!” 죽여 버립니다.

그렇게 죽이고 난 뒤에 형이 왔습니다. 형은 숙학 100점, 영어 100점, 국어 100점,

“아빠 나, 무지 신난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너도 좀 이리 와볼래?”
“아빠, 저는 100점 맞았어요.”
“알지. 내가 너 공부 잘하는 거 알지. 여보! 못 좀 가져오세요. 아까보다 더 큰 못으로 가져오세요.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아버지, 저는 100점인데요?”
“공부 잘하는 것 안다. 에라, 죽어라 이놈. 공부 잘하는 것 가지고 하늘나라 들어갈 줄 아느냐?” 그리고는 못 박아 버립니다.

공부를 잘하건 착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왜 이렇게 십자가에 우리를 죽이는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당시, 그때는 아담이 ‘나’라는 것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마귀가 와서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는 신처럼 된다”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깨뜨릴 때부터 처음으로 아담에게서 ‘나’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내가 깼다. 내가 먹었다. ‘따먹지 말라’는 것을 내가 먹었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림으로서 비로소 사람이 하나 건지는 것이 뭐냐?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여기 있다’가 등장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고분고분하게 들으면 그것은 바보고 등신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 나는 비로소 ‘나는 나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나’라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아담은 하나의 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신이냐? 선악을 아는 새로운 신이 거기에 등장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함께 되었으니 저 아담과 우리는 함께 살 수 없다”고 해서 쫒아내고 말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담이라는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이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있었기 때문에 계명을 깨뜨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맛있는 것 따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귀가 와서 “너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신처럼 되리라” 하는 순간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있고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 그 앞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여기 비타 500하고 저하고 같이 있는데 처음에는 선악과를 안 따먹는 조건 하에 아담은 살았습니다. 선악과를 안 따먹으면 선악과는 아담이 안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을 “따먹지 말라” 하고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어이, 너는 따로 놀아라” 하는 그 순간부터 ‘나’가 등장하면서 계명은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서 떨어질 때 처음으로 ‘나’가 생겼어요. ‘나’가 생겨나면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은 ‘나’의 바깥에 있는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계명은 내 안에 있을 경우에만 지킬 수 있는데 이미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어떤 율법, 어떤 계명도 내가 다가서면 도망가도 다가서면 도망갑니다.

다가서면 도망가고 다가서면 도망가고 멀어지면 다가오고 멀어지면 다가옵니다. 지키려고 가면 도망가고 지키려고 가면 도망갑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지키려고 하는 한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못 지키게 되어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나’라는 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깨어버린 이후에 등장한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어진 ‘나’를 가지고 성경말씀을 새삼스럽게 지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매우 어려울 줄 알았습니다. 지금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수학 100점, 영어 100점, 과학 100점, 이렇게 공부 잘하는 애를 아버지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도 왜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처음에 헬리콥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강의가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헬리콥터는 사람이 있어도 시끄럽습니까, 안 시끄럽습니까? 사람이 있어도 시끄럽죠. 사람이 있어도 시끄럽죠. 그런데 사람이 있으면 뭐라고 합니까? 사람, 내가 있잖아요. 내가 여기 있는데 헬리콥터가 시끄럽게 타타타타타! 하고 있으면 뭐라고 합니까?

“아저씨, 헬리콥터좀 멈추세요!”
“왜요?”
“내가 시끄러워요. 시끄러워서 못살겠어요. 그러니까 그만 멈추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온 율법을 예수님이 지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 밖에 모르기에,

“이 말씀을 내가 지킬 것인데 당신이 뭔데 건방지게 당신이 지키는가? 당신이 온 율법을 왜 지키는데? 내가 지킬 건데. 내가!”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가 못 지키거든?”
“내가 왜 못 지킵니까?”

“너라는 인간이 처음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그 인간이 아니고, 따먹고 난 뒤에 아담의 죄가 묻어 있는 그 인간이기 때문에 이미 너는 끝나버렸어. 이미 선악과를 우지직, 하고 부수어 버린 이상 너는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살수 없는 나쁜 신으로 취급받기 때문에 안 되는 거야. 이미 에덴에서 쫓겨난 입장에서 지키기는 뭘 지켜. 에덴동산에 있을 때도 못 지킨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난 주제에 지키는 뭘 지켜. 못 지켜. 지킬 수가 없어”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우리는 선과악에 대해서 분별할 줄 압니다.”
“그러니까 내가 에덴동산에서 쫒아 냈잖아. 그것을 왜 알려고 하지?”
“이미 알게 된 것, 말씀 주시면 제가 알아서 이것이 선인지 악인지 판단해서 지키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사랑하시면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사랑하거든?”
“사랑하는 것 아니까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리와! 너는 죽어야 된다.”

어디로 데려갑니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를 죽입니다. 지금 뭐가 문제입니까? ‘지키냐, 못 지키냐’ 하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뭐가 문제입니까? ‘내가 지킨다’가 문제입니다. 문제점. ‘내가 지킨다.’ 이것이 잘못입니다. 이것은 범죄 한 후에 하나님보시는 그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과 맞먹으려는 인간밖에 안됩니다.

선과악을 아는 것으로서 신과 함께 놀려는 것밖에 안됩니다. 착한 사람들 더 착하게 해 주고, 공부 잘 못하는 사람들 공부 잘하게 해 주면 되지 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입니까? 그 이유는 뭐냐? 원래의 그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너를 죽이는 것.”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뭐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만 할 수 있습니다. 문제 나갑니다. 그러면 한번 죽은 나가 그것으로 죽을까요? 한번 죽인 나가 또 살아날까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나’가 없어집니까? 또 살아납니까? 또 살아나지요. 그러면 또 죽이지요. 그것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란 주님의 영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되면 날마다 튀어 나오는 ‘내가 지킨다’ 가 ‘나는 못 지킨다. 나는 죽어야 돼’ 라는 생각으로 바뀌어 지게 됩니다. 어린이 여러분, 인생 앞으로 살아가실 때 참 힘들 겁니다. 저도 이만큼 살아오면서 힘들었습니다. 애들 보고 천사라고 하는데 태어날 때 그 모습이 천사가 아니고 악을 씁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게 누구 작품이겠습니까? 엄마 아빠의 작품입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그런 아이 구원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정과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됩니다. 엄마와 아빠가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요. 누가 합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성령을 따라서 정과 욕심의 십자가를 못 박아 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제발 좀 가만히 있어줘. 제발 가만있으라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가, 내가, 내가’하고 자꾸 내가 등장합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왜 자꾸 내가 등장할까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과 동료처럼 되었는데 인간은 추방되었거든요.

원래 선악에 대해서 몰라야 될 인간이 선악에 대해서 알아 버렸습니다. 여기에서는 누구의 지배를 받느냐? 악마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인간이 선악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신처럼 행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지배를 받는 이상 항상 “너는 신처럼 굴어야 돼. 너도 자유의지가 있어. 너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어”라고 자꾸 옆에서 부추깁니다. 여기서 계속 ‘나’가 튀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를 설명하겠습니다. 빛이 우리에게 비추이면 우리는 거울이 되어서 빛이 되비쳐 나옵니다. 첫 번째 빛을 ‘원’이라 하고 두 번째 빛을 ‘투’라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비추셨을 때 거울을 튀어 나오게 되면 뭐로 나오는가? 고난과 희생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희생의 모습으로, 처참한 죽음으로 나왔다면 빛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아니면 거울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밝은 빛이 왔는데 그 빛이 거울을 비추자 시커멓게 죽은 채 튀어 나왔다면 거울에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울에 문제가 있지요. 빛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왔는데 그 빛에 대해서 거울이 희생과 죽음과 고난으로 비추어 나온다면 거울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울에 뭐 밖에 없습니까? 이 거울에 문제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뭡니까? 선악과 따먹고 무엇처럼 되리라? 신처럼 되리라. 문제가 그것 한 가지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신이 한분이어야 합니까, 두 분이어야 합니까? 그래서 구약에서는 우상숭배를 그렇게 싫어하는 겁니다. 다른 것은 다 용서해도 우상숭배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왜 신도 아닌데 신인 체 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뭡니까? 신도 아닌 것이 신 인체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데 누가 신 인체 합니까? 선악과 따먹은 우리가 신 인체 행세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본래의 사람으로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짜 신을 죽여야 됩니다.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신을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십자가를 알았다’고 해놓고는 다시 신처럼 되려고 할 때 질문입니다.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죄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나서 신처럼 되고자 하는 것은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역시 죄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누구만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만 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믿고 난 뒤에는 뭐가 없어져야 됩니다. 뭐가 없어져야 됩니까? ‘신처럼 구는 것은 잘못 되었습니다’라는 것이 나와야 됩니다. 다시 합니다. 내가 신처럼 되려고 하는 것은 죄 아닙니까, 죄입니까? 그러면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뭘 느낀다? ‘내가 신처럼 되는 것은 죄 입니다’라고 해야 되지요.

그러면 십자가를 통해서 뭐가 없어져야 됩니까? ‘내가 신처럼 되는 것은 죄야. 이것은 없어져야 돼’라는 마음이 생겨나야 되겠지요? 그렇게 생겨나야 된다면 십자가를 믿게 된 사람은 마음자세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신처럼 되고자 해야 합니까, 반대로 가야 합니까? 반대가 뭡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나와야 되는 겁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다! 나는 개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 복음을 안다’ 하면서도 나오는 것을 보면 계속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대체 저 사람은 지금 십자가를 정말 통과했는지, 아니면 안통과 했는지? 아담이 신이 되고자 한 것은 자아성 때문에 처음으로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는 죽을 때까지 계속 튀어 나옵니다. 육이 살아 있는 한 계속 튀어 나옵니다. 그러면 튀어 나올 때 마다 뭘 느낍니까? ‘나는 이것 때문에 죄인 중에 괴수다’라는 것을 절감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게 신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니까 십자가를 통과 했다고 하면서도 ‘우리 하나님처럼 됩시다’ 하는데 무슨 이런 것이 다 있습니까?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나 이제 예수 믿었다. 술 끊었다. 이제 하나님하고 맞먹자. 내가 하나님이다.’ 그런 생각 안 듭니까? 아니면 예수 믿고 난 뒤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는 생각이 들던가요. 도대체 당신이 죄라고 여겼던 기본 죄가 기껏해야 간음죄, 살인죄, 사기 친 죄, 그런 죄이지 진짜 아담처럼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죄,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는 진짜 죄 인줄 정말 압니까?

그 죄가 나로 하여금 선과 악을 아는 자의식, ‘나는 나다’라는 생각 때문에 말씀은 저 앞에 있고 ‘말씀은 내가 지키면 되지. 뭐, 내가! 누가 지킨다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내가 지킨다. 내가! 주여, 저 말씀은 내가 지키겠습니다’라는 자세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타타타타! 헬리콥터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그 헬리콥터 좀 멈추라’고 한다든지 ‘내가 그 소리 좀 크게 나도록 해 준다’든지 이렇게 까불대면서 거든다는 것 그것은 정말 세상이 헬리콥터 중심인지 모르고 자기중심, 자기 구원중심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궁금증이 있습니다. “목사님! 죽이려거든 몰래 연탄가스 피워서 죽이든지, 절벽에서 떨어뜨려서 죽이든지 해야 하는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로 죽이십니까?” 그 문제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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