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0224a 다니엘12장 2절(제3의 영역)-이 근호 목사
p.234 밑에서 11번째 줄에, [다니엘서의 묵시에는 이점을 달리 처리한다. ‘죽은 자의 부활’ 사건으로 설명한다.] 부활 사건에 대해서 밑에서 4번째 줄에, [그런데 그 신상은 결국 땅에 엎어진다. 역사 위에 엎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서’ 땅 위에 엎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역사 위에 엎어지게 되면 역사가 인간보다 더 우선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역사로서 엎어지면 역사는 없어지고 인간은 남게 돼요. 인간>역사. 인간이 역사보다 더 남는 겁니다. 역사보다 인간이 더 우선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사에서 인간을 뽑아내는 겁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간 의식이거든요. 인간의 시간 의식이기 때문에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이죠. 현실이 우선이냐, 인간이 우선이냐? 인간들은 현실 속에서 자기가 태어났다고 생각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고 현실은 인간이 조작했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이 만들어냈다고 보는 거죠.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현실을 만들어놓고 그 현실에 자기가 속해서 농락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인간들은 ‘인간>역사’ 이렇게 보지 않고 인간<역사, 즉 인간보다 역사-다른 말로 하면 현실이죠-현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둘 사이에 전쟁을 유발시키고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켜서 인간보다 역사가 우선이라는 것을 역사보다 인간이 우선이라는 식으로 바꾸게 하는 전쟁을 누군가가 관여해서 하는 겁니다.
다니엘 12장을 보겠습니다. 다니엘 12장 1절에,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라고 되어 있는데 이 미가엘은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천사죠. 천사 또는 천사장(天使長)이라 하는데 여호수아에도 마찬가지에요. 여호수아에도 군대 장관 나오죠 (수 5:14). 미가엘 천사가 하는 기능은 전쟁입니다. 전쟁.
전쟁인데 여기에 그 전쟁의 취지가 나와 있어요. 12장 1절에,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그렇게 되어 있죠.
전쟁을 하는 의도, 목적, 기대감, 하나님이 전쟁을 일으키고자 추진하는 그 취지는 역사보다 인간이 우선이고 인간보다 무엇이 우선이냐 하면 책이 우선이라는 거예요. 책>인간>역사. 책이 우선이다.
미가엘이, 영적 세계에 하나님이 개입함으로써 ‘역사보다 인간이 우선이다’ 더 나아가서 ‘인간보다 책이 우선이다’라는 쪽으로 몰랐던 내용이 거기 하나 더 추가되는 겁니다.
다니엘 12장 2절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이렇게 되어 있죠.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다’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뭐가 되죠? 부활이라 하죠. 부활. 부활이 되려면 일단 다 죽어야 돼요. 일단 다 죽인다. 일단 다 죽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시편 7편 11절에 보게 되면 거기 하나님의 명칭이 하나 나와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기능, 재판하는 기능, 재판장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뭐한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God judgeth the righteous, and God is angry with the wicked every day.(KJV) God is a righteous judge, a God who expresses his wrath every day.(NIV)
첫 번째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재판할 때 어떻게 재판하느냐 하면 ‘그 누구도 무엇이 되지 말라’, 이것에 의한 재판입니다. 그 누구도 무엇이 되지 말라. 보통 재판하게 되면 착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눠서 ‘너 착한 사람 되어야 돼. 넌 나쁜 사람 되면 안돼.’ 이렇게 하잖아요. 하나님의 재판은 그 누구도 무엇도 되지 말아야 될 것이 하나님이 매일같이 우리한테 분노로 재판하는 취지입니다.
재판할 때 분노를 가지고 재판한다는 것은 우리를 이미 아신다는 거죠. 착한 사람 되게 해달라고 재판하는 게 아니에요. 그 한 예가 솔로몬 재판인데, 창녀들이 같이 살다가 자기가 낳은 아이 하나를 죽이고 죽은 아이와 바꿔치기해서 자기 것이라 우겼던 그 재판을 할 때에 그 아이에 대해서 솔로몬의 판결은 뭐였습니까? 그 애를 둘로 쪼개라는 거예요. 그 아이는 누구의 것도 되지 말아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에 ‘하나님, 바르게 살겠습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이걸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인간이 되지 말아라. ‘나는 ~이 되겠습니다’ 하는 자체를 파괴시켜버리는 거예요. ‘나는 ~이다’ 그런 것을 네가 기대하지 말라는 재판을 하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부활은 일단 모든 것이 전부 다 사체가 되어야 되는 거니까요. 시체가 돼야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화가 난다, 분노한다. 그 이유가 뭐냐? 분노는 하나님이 해야 돼요. 재판하시는 분이 분노해야 돼요. 시편 7편 11절 다시 읽어보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이 늘 분노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의로움을 세상에 계속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분노가 설마 나한테는 안 오겠지?’라고 할 대상은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 저한테는 분노할만한 게 없죠. 그렇죠?’라고 할만한 인간은 없어요. 누구에게도 다 분노해요.
분노하는 그 취지는 뭐냐? 그 누구도 무엇이 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있는 자가 되지 말라는 거예요. 사체가 되어야 돼요. 시체가 되어야 돼요. 시체가 되게 되면 여기 시체를 분석할 때 두 가지가 있죠. 시체 바깥쪽에서 시체 보기, 그것하고 그다음에 반대로 안쪽에서 시체 보기.
바깥쪽에서 보게 되면 성경 자체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숨이 끊어져 진짜 흙이 된 사람에게 다니엘 12장이나 성경 말씀 시편 7편 11절 같은 게 해당될 수가 없죠. 이미 귀가 먹었는데 이미 눈이 감겼는데 들을 수도 없는데 뭘 그 사람보고… “나는 늘 분노한다.” “걔 죽었는데요?”
쓸데없는 거예요. 쓸데없는 말씀이죠. 죽은 자한테는 말씀이 쓸데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준다는 말은 겉에서 보면 사체가 아닌데 안쪽으로 보면 이미 너는 사체인 것이 말씀을 통해서 증명되고 확인되는 거예요.
부부싸움 할 때 남편이 아내 괴롭히니까 힘이 없는 아내가 남편 막 붙들고 “죽어, 죽어, 죽어!” 이렇게 하잖아요. 그건 아직까지 “겉으로 볼 때 넌 사체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런 뜻이란 말이죠. “겉으로 보기에 너는 사체가 아니야.” 이게 문장이 너무 길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줄여서 두 자로 “죽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내한테 구박받는 남편이 복음을 안다면 “나 벌써 죽었어.” 아내가 “너 뭐야?” “나 그 무엇도 아니야. 난 이미 사체야. 그 무엇도 아니야.” “그렇게 네가 생각하는 그 의도가 뭐야?” 다니엘 12장 2절, 티끌 가운데서 부활 되기 위해서.
역사보다 인간이 우선이고 인간보다 무엇이 우선이라 했습니까? 책이 우선이죠. 이 책 안에는 바로 다니엘 12장 2절이 들어있습니다. 티끌 가운데서 영생 얻을 자도 있고 부끄럽게 지옥 갈, 부끄러운 영원한 삶을 살 자도 이 책 가운데 두 종류의 인간이 들어있는 거예요. 두 종류의 인간이.
겉으로 나와 있는 역사 또는 현실은 인간이 조작한 거고 진짜 제대로 된 현실과 역사는 책 안에 숨어있는 형식이죠. 숨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 요한이 막 울죠. 계시 책은 받았는데 이게 일곱 개의 파라핀으로 봉인되어 있는 거예요. 자기가 딱딱 단추 떼듯이 뗄 수가 없어요. 열리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막 울죠. 우니까 천사가 “걱정하지 마라. 다윗의 사자가 이걸 떼리라.” (계 5:1-5) 뗄 때마다 역사와 인간 작살나는 겁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왜 이 현실이 환상이냐 하면 그 무엇도 아닌 것이 인간인데 인간이 자기가 사체라고 여기지 않고 시체라고 여기지 않고 살았다고 여기니까 살았다고 여기는 인간이 내가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철학, 예술, 과학, 종교 이런 것을 계속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특히 과학도 마찬가지지만 종교, 문학도 마찬가지고요. 그 절대성을 향하여 인간 쪽에서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있는 신을 만들어내서 ‘우리 산 자와 산 자끼리 한번 만납시다’ 하는 쪽으로 절대 진리를 향하여 추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겉에서 본 사체에요. 겉에서 보니까 멀쩡하게 살아있는 거예요. 물론 군데군데 죽어가고 있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고 내가 요양병원에 가서 죽는 건 나중 문제고요. 지금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데 가만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퇴직했다고 집에 가만 있을 수는 없는 거죠. 뭔가 하는 거예요. 뭔가 하면서. 아침에 거울 보면서 ‘나 살아있는 거 맞잖아.’ 하고 화장도 좀 하잖아요.
그런데 겉으로 보는 것 말고 안쪽에서 봤을 때는, 이미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책에 담겨있는 계시를 통해서 늘 확인받는 것. 이게 바로 나는 이미 안에서 볼 때 티끌 가운데 죽어있는 사체와 마찬가지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영생의 대상자가 됩니다. 왜? 다니엘 12장 2절이 그 사람 속에 이미 파고들어왔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 계시 책에 있는 내용이 사체 안에 자기 안쪽까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그 신상은 결국 땅에 엎어진다. 역사 위에 엎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서’ 땅 위에 엎어지는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루어질, 계시가 실현될 곳이에요. 아시다시피 그 세계는 인자의 나라입니다. 인자 되시는 분, 예수님이 오셔서 이 계시의 내용대로 유일한 산 인간, 사체가 아닌 죽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맞다면 결국 인간 세계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제가 한 것이 성경대로 옳다고 한다면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인간을 죽인다. 하나님이 인간을 죽일 때는 죽이시는 이유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신다고 할 때 ‘죽이신다’를 주님 입장에서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이 됩니다. 주님의 심판. 둘째, 인간은 하나님께 대든다. 그래야 이게 전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약간 지루하시겠지만 이 대목을 성경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역대상 5장 25절부터 보면,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하숫가에 옮긴지라 저희가 오늘날까지 거기 있으니라”
이걸 요단강 동편이라 해요. 요단강 안쪽은 약속의 땅인데 요단강 바깥쪽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거기가 목초지로서 너무 딱이고 목축하는 데에 너무 좋아가지고 약속의 땅 들어가기 전에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그 땅을 탐낸 거예요. 그래서 모세한테 부탁해가지고 ‘우리 여기 거할게요.’ 이렇게 한 거예요.
그들의 선택은 뭐냐 하면, 살아있는 나를 계속 살릴 수 있는 땅이라고 약속의 땅을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 기다리는 계시의 책이 완성되는 그 세계가 아니고, 지금 살아있는 내가 보다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생존의 터전으로서 약속의 땅을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문제에요? 자기가 계속 살아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다니엘 아까 보셨죠. 주님의 책은 우리를 뭐로 본다? 사체, 시체, 시신으로 보는 거예요. 시신으로 보고 그 시신 속에 책의 내용이 약속대로 주어지게 되면 죽은 자가 부활해서 영생을 얻는 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 방식을.
그러니까 여기 5장 25절에서는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왜 범죄하느냐 하면 자기가 사는데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범죄해요. 지난 강남강의에서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사람이 죄짓는 이유가 모자란 느낌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거예요. 자족하고 만족하는 게 아니고 뭔가 마저 채워야 나답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슬그머니 올라오는 게 욕심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뭡니까? 심판은 아까 뭐라고 했어요? 잊어버렸어요? 심판은 뭡니까? “너는 제발 무엇도 되지 마. 아무것도 되지 마.” 이거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인간 속에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무언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가지고 대드는 거예요. 대드니까 그들은 이방 우상을 섬겼죠.
자, 여기서 우상과 참된 하나님의 차이점을 봅시다. 우상은 인간이 똑바로 볼 수 있어요. 참 하나님은 똑바로 못 봅니다. 이것은 어디 나오느냐? 출애굽기 33장에 모세가 시내산을 올라갔는데 하나님 얼굴을 못 봤어요. “수그리(엎드려)!” 해가지고 못 보게 만들고 등짝만 보고 그냥 지나갔어요.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 (출 33:20-23)
모세가 출애굽기 3장에서 떨기나무 보죠. 떨기나무에서 하나님 음성 들었습니까, 얼굴 봤어요? 얼굴 못 봤죠. 모세가 본 것은 불이었어요. 불은 어떤 불인가? 소멸하는 불이죠.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 삼손의 부모도 하나님을 봤어요, 못 봤어요? 불 가운데 올라갔어요, 불 가운데 (삿 13:20). 음성 들었어요. 하나님 못 봅니다.
하나님 쪽에서 보여주려면 하나님 쪽에서 낮아져야 돼요.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천사 찾아오죠. 그리고 야곱에게 얍복 강에서 하나님 쪽에서 낮아지죠. 얼마나 낮아졌는지 야곱하고 씨름할 정도에요. 야곱이 만약에 영암 씨름단쯤 되가지고 했으면 그 천사 혼날 뻔했어요. 안다리 후리기 뭐 이래가지고 들배지기 했으면 천사 거꾸러뜨릴 뻔했어요. 물론 천사도 결정적 한방이 있지만.
야곱과 천사의 만남은 인간의 속성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건드리면 그게 천사가 되든 누구든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발작을 일으켜서 대드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생존 방법은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식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결핍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계속 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 범죄라는 것은 경합입니다. 인간의 범죄란 경합. 시합하고 경쟁하고 한판 붙는 거예요. 게임하고.
그래서 바둑하는 이것, 악(惡)입니다. 바둑이 악이에요. 자기의 모자람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승리감으로 빈 결핍을 채우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승리감 가지고 마음의 허한 곳을 채우는 거예요. 남자들이 직장 갔다와서 게임하는 것, 애들이 컴퓨터 게임하는 것, 손흥민 응원하는 것, 야구, 모든 스포츠가 전부 다 경합이잖아요. 다투는 거잖아요. 왜 다투는가? 허한 마음을 내가 응원한 팀이 이김으로써 다소 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모든 관심사가 현실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관심사를 쭈욱 쭉 자기 쪽으로 빨아당겨서 자기 속으로 응집시키는 겁니다. 자기 허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꽉꽉 메우는 그런 식의 인간 모습이 경합하는 거예요.
자기 아들한테 “너 몇 등 했어?” 무심코 던지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경합이거든요. 특히 고3 담임 같은 것 할 경우에 “선생님 반에 서울대 몇 명 들어갔어요?” 이런 거. 요새는 서울대학 몇 명 들어갔냐고 하지 않아요. “선생님 반에 의대 몇 명 들어갔어요? 약학대학 몇 명 들어갔어요?” 이거 묻죠. 의대, 약대, 한의대, 치과대 그거 묻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경합이에요.
이게 무슨 세계에요? 우상의 세계에요. 우상의 특징이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만든 제조과정을 본인이 다 알잖아요. 목수 불러다가 다듬은 걸 알잖아요. 세워놓고 “아이고, 무서워라.” 이런 거 없어요. 웬 아우라? 자기가 만들었는데 무슨 아우라가 있어요? 그냥 똑바로 쳐다보는 거예요. 똑바로 쳐다보기 때문에 우상의 모습은 자기 내면에 있던 신이 바깥 형상화된 거예요. 형상체에요. 내면에 있던 무형(無形)이 바깥쪽으로 유형화(有形化)된 것이 우상입니다.
부처. 석굴암의 부처 모습이 얼마나 인자합니까. 왜 인자하냐? 자기 인자를 극도의 예술적 표현으로 가미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자해 보이는 거예요. 특히 관상학적으로 석굴암 부처는 굉장히 인상이 좋게 되어있고 팔자 좋게 되어있어요. 귓고리가 늘어났으니까. 귓고리가 늘어나가지고,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부처가 신(神)이 될 상이죠. 노태우처럼 귓불이 많이 내려왔어요.
참 하나님은 ‘네가 나를 똑바로 쳐다볼 대상 아니다’는 겁니다. 역대상 9장 1절 한번 봅시다. 아까 역대상 5장에서는 어떻게 했던가요? 인간은 범죄하고 하나님은 쳐버리고. 앗수르 왕 불이라는 왕을 보내서 인간은 대들고 하나님은 쳐버리고. 심판해버리고. 그러니까 그 사이에 화평이나 화해란 있을 수 없죠.
여기 9장 1절에 보겠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보계(족보)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유다가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만들었죠. 인간은 범죄하고 하나님은 범죄하면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절대로 놔두지 않고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하죠.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대치는 극한 대치에요. 중간에 화해한다든지 통한다든지 이런 거 없어요. 인간도 분노하고 하나님도 분노하고. 그냥 마주쳐서 인간은 그냥 심판받고 인간은 그냥 심판당할 뿐이고 그러면서도 대들고.
그런데 9장 2절에 봅시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는데 그러고 난 뒤에 누가 돌아왔습니까? 여기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제일 먼저 돌아와요. “먼저 그 본성(本城)으로 돌아와서 그 기업에 거한 자는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과 느디님 사람들이라” 70년 포로잡히고 난 뒤에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 빈 약속의 땅에 제일 먼저 돌아온다고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심판도 아니고 대듦도 아닌 중간에 틈이 발생 되죠. 중간에 틈이 중보자죠. 철저하게 인간은 대들어야 되고 철저하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봐주는 것 없이 심판을 해야 됩니다. 그 심판과 대듦 사이에 레위 지파가 갖고 있는 고유의 기능이 제대로 이제는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분. 인간은 매 맞으면서도 꼭 대들어서 하여튼 얻어 터질만한 인간. 그 둘밖에 없겠느냐는 거예요. 과연 그 둘밖에 없겠는가? 제3의 지역이 없겠느냐 하는 거예요. 제3의 지역은 바로 레위 지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왜 이걸 제가 언급하느냐 하면 책 때문에 그래요, 책. 이 책이 어디서 튀어나오느냐? 책이 처음으로 튀어나오는 데가 있어요. 출애굽기 32장 32절요. 여러분, 방금 이야기한 걸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산 밑에 있는 백성들 우상 섬겼죠. 그래서 이건 얻어맞습니다. 그런데 산 위에 하나님은 뭘 고집해요? ‘나는 계약대로 하지 않으면 다 죽인다.’ 그거 고집하십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 32절에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세가 시내산 올라가서 본 게 있어요. 뭘 봤느냐? 책을 봤어요. 모세가 뭘 아는가? 역사보다도 인간보다도 생명책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도 그걸 언급했죠 (눅 10:20). 제자들이 현실 속에 살면서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니까 아주 신바람 났어요. 그래서 자랑하죠. “우리가 복음 전하니까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주의 능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거 좋아하지 마라. 네가 하나님을 거론해도 너는 하나님을 모르고 우리가 귀신을 쫓아낸다 해도 너를 몰라.”
너는 하나님과 인간 그것 말고 다른 제3의 구역에 관심 둬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걸로 기뻐하라. 귀신이 너한테 항복한 걸 좋아하지 마라. 만약에 귀신이 너한테 항복한 걸로 기뻐한다면 갑자기 책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돼요? 귀신을 쫓아낸 내가 우선되잖아요, 내가. 내가 우선되죠.
수요일에 한 문장을 다시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믿지 않는 방식. 그다음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 방식.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 말을 번역하면 ‘나 주님만 의지합니다. 주님이 도와줄 줄 믿습니다. 난 주님만 고대합니다. 기대합니다.’ 그게 불신앙이다 이 말이죠. 왜? 시작을 자기 쪽에서 시작했으니까. 이렇게 도와줘버리면 나를 안 잊어버리는 거예요, 나를.
하나님의 재판은 뭐라 했습니까? 너는 아무것도 되지 말라 했거든요. 왜? 너는 태어날 때부터 사체이고 시체이기 때문에. 그런데 거울 앞에 내가 살아있으니까 내가 왜 시체냐고 하죠. 내면적으로 볼 때는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죽은 자에요.
관계가 끊어졌는데 관계가 끊어진 이유가 뭐냐? 안에 마귀가 살아있어가지고 계속 우리들 위신을 부추겨주는 거예요. 계속해서 우리 위신을 부추겨주니까, ‘그래, 나는 고귀한 거야. 나는 아직도 살아야 돼. 나는 내 말빨 서야 돼.’
계속 큰소리치며 살아가지만 나중에 큰소리가 나이 들면 점점 더 사그라들어요. 어깨도 좀 구부러지고. 전도서 나오잖아요. 어깨도 구부러지고 눈도 어둡고 자식들보고 혼내도 손자들이 와서 막 놀리고. 맛있는 것이 그렇게 맛있었는데 지금은 이빨이 고만 망가져서 맛있는 것을 씹지도 못할 정도로 맛을 못 느낄 정도로 모든 게 그냥 붕괴되는 거죠. 파괴되는 거예요. 모든 게 파괴되는 거예요. 아무리 발버둥치며 살고자 해도 우리 내부적으로 계속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도 마귀는 멀쩡해가지고 계속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내가 늙어도 고집 하나는 만만치 않다’ 뭐 이런 걸 자랑이라고 내세우면서 그렇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믿지 않는 방식이 뭐냐 하면, 교회 50년 다녀서 권사 됐는데 끝까지 나는 믿음을 놓지 않겠습니다, 이게 불신앙이에요.
주께서 믿음 놓으라고 죽이는데 죽이시는 취지도 모르고, “끝까지 나는 주를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좀 버려. 나를 좀 놔줘!” “주님 붙들겠습니다.” “베드로야, 넌 나한테 오지 마. 좀 놔. 저리 가. 너는 내 처소에 오지를 못 해.” “끝까지 목숨 바쳐서…….” “네 목숨 필요 없어. 네 목숨 필요 없어! 네 목숨이 왜? 주의 이름에 네 목숨이 왜 끼어드는데?”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믿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주님께 기대했다가 실망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게 신앙 아닙니까. 하여튼 주님은 내 뜻대로 된 적이 없어,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믿음이라고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8장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 보는 것 중에 누구도 포함되느냐 하면 본인의 몸체도 들어있죠. 자기에 관한 것도 들어있어요. 내게 관한 것을 내가 바라지 않겠습니다. 내게 관여된 것 어떤 것도 내가 더이상 기대하고 고대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야 되는 게 마땅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내 몸을 포함해서 나를 역사 속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역사의 영웅, 역사의 일원. 역사의 일원이란 역사를 구성하는데 내가 보탬이 되었다는 거예요. 가정이란 역사, 자식 잘 키우는데 내가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빼는 거예요. 내가 힘들게 17년 동안 일해가지고 자식 시집 다 보내고 이 정도 하면 뭐 엄마로서 했잖아요. 지금은 은퇴했지만. 비자발적으로 조기 은퇴했지만, 뭔가 이 가정이라는 역사에 기여했다는 거예요. 뭐 시체로 기여했겠어요, 시체로? 그게 뭔데요? 그래서 생긴 게 뭔데? 자기 포기 못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시는 것은 제발 나를 믿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요. 살아있는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우상적인 하나님밖에 없어요, 우상적인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낸 거예요. 모세를 불러내니까 딱 두 가지 구역으로 나눠졌죠. 한쪽은 저주받을 이스라엘, 한쪽은 구원이 아닙니다. 심판이에요. 하나님은 언약에 의한 재판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누구든지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하잖아요. 이걸 하나님이 포기합니까? 포기 안하죠.
그런데 모세가 40일 올라가 있을 동안 밑에서는 뭐를 섬겼죠? 우상을 섬겼잖아요. 우상은 뭐라 했습니까? 살아있는 그들 본인이 제조해낼 수 있는 신. 살아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상상하고 꾸며낼 수 있는 신. 그래서 만들어진 신과 자기가 동질성으로 유통이 되고 소통이 되는, 대화가 되고 납득이 되는 신이에요.
납득된다는 말은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납득이 돼요. ‘네가 나를 믿는구나. 기특하다.’ 이런 소리를 하나님께 들을 때 순간 우리는 뭐가 됩니까? 내가 나를 부정하지 않아도 되죠. 그렇잖아요.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이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건 예수님이 사울에게 하는 것이고. 진짜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고, 가짜 하나님은 ‘네가 대견하구나. 착하구나. 훌륭하구나.’ 이건 가짜죠. 그건 종교죠. 교회에서 말하는 종교.
제발 좀 아무것도 안 되어야 될 텐데 자꾸 뭔가 자기 지정된 위치를 자기가 만들어내려고 해요. ‘나는 ( )입니다.’ 이 문장 틀을 포기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매일같이 하나님이 분노하죠.
이 분노를 심하게 느끼면 고마운 점이 생겨요. 장점이 생겨요. 우리가 정서적으로 안정이 돼요. 맞아도 너무 맞으면 안정이 된다니까요. 우리가 하는 짓이 진짜 마동석한테 귀싸대기 맞는 식으로 철썩 철썩 맞으면 우리가 갑자기 안정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불평하지 않고. 특히 엄살떨지 않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엄살떨지 않고. 엄살떨지 않는다는 말을 아주 쉬운 말로, 자기 인생에 징징거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취직 안 한 애들이 꼭 징징거리잖아요. 다 세상 탓이고 세상이 나의 실력을 안 알아줘서 그렇고 나 같은 귀한 사람 왜 안 뽑냐고 늘 징징거리죠. 이건 덜 맞아서 그래요. 마동석한테 덜 맞아서.
분노한테 더 맞아버리면 안정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뭐든지 감사하게 되죠. 심지어 먹는 것, 입는 것도 감사해요. 물 마시는 것도 감사합니다. 왜? 이쪽에 귀싸대기 맞은 표시 다 나면서 “물 먹어.” “감사합니다.” “강정 먹어.” “예, 감사합니다.” 한 대 얻어맞았거든요. 얻어맞으니까 끽소리 안 하고 하는 거예요.
꼭 욥기 42장 같아요. 아무 소리도 못해요. 그렇게 말 많던 욥이 아무 소리 못해요.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었고 감히 쳐다볼 수도 없어요. 그래서 오기는 왔고 쳐다봐야 되니까 자기 쪽에서 뭘 하느냐? 재를 뒤집어써요, 재를. 부엌에 가서 재를 뒤집어쓰고 “나는 시커먼 재 속에 포함되어서 재와 나와 동일시되었습니다, 하나님. 저 재입니다. 이미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저를 불살라도 마땅합니다.” 재 속에서 하나님을 똑바로 못 쳐다보고 삐딱하게 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에게 처음에 줬던 복에 곱빼기를 줘요, 곱빼기를. 딸도 전보다 더 이쁜 딸 주고. 괜히 그 딸만 죽어서 손해 봤어. 재산도 완전히 배나 줘버리고. 그때 욥이 안 것은 뭐냐? 이 재산, 이 자식 하나 어느 것도 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죠.
강남 강의를 여러분들이 들어보면 제일 초반에 나와요.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자기 목숨보다 미워하지 않으면 내게 올 수 없다 할 때 (눅 14:26) 거기서 제가 이렇게 해설했죠. 간단하게 해석했어요. 내 것이 있어야 뭐 내 걸 고집하지. 처나 자식이나 심지어 나도 내 것이 아니잖아요. 강의 끝나버렸어요. 강의 끝났죠.
그래서 제3의 구역을 둔 거예요. 그게 출애굽기 33장, 다시 한번 봅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게 있다 했죠. 뭘 봤다 했습니까? 책을 봤죠. 책에 보니까 이미 모세는 합격자 명단에 자기가 있어요. 합격자 명단에 자기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모세가 뭘 한 게 아니고 모세가 올라오는 그것조차도 책이 책다운 자기 현실을 실시하는 과정 속에서 모세가 필히 구원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책이.
모세보다 뭐가 우선이다? 책이 우선이에요. 그 책은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 전에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명단 구성할 때 이미 확정된 거예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확정된 그 명단 리스트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하고 아들하고 이미 합의했죠.
그래서 그게 예수 안에서 예수 이름으로 확정된 명단이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 자신의 이름을 현실로 펼치기 위해서 모세, 엘리야를 하나도 잃어버리면 안돼요. 요한복음 6장 39절,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될 이유가 예수님 자기 숙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예쁘다고 하는 게 아니고 우리 귀해서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예수님 되려면 아버지와 확정된 그 명단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될 그 업무까지 다 해야 돼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다고요.
once and for all. 한 번으로 인하여 단번에 모든 걸 다 이뤄버린 거예요. 책의 내용을 다 이룬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천사를 보내서 성령을 보내서 그 명단대로 방문하는 겁니다. 유월절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발렸는가 그거 보고 찾듯이 예수님의 언약, 내 피와 내 살이 있는가 그 명단 보고 아, 이 집 왔구나. 딩동. “계세요?” “누구십니까?” “데리러 왔습니다.” 그럼 끝난 거예요.
그게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거예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사람을 꼬시는 게 아니고 대조하는 거예요. 마치 가스 검침 나오듯이. 복음 전하는 사람이 유난 떨고 감정 피울 하등의 이유 없습니다. 상당히 기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면 돼요, 기계적으로.
“실례지만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십자가 피에 대해서…” “나가!” “알았어요, 알았어요. 이 집 아니구나. 이 집 아니구나.” “실례지만 혹시 목사 되십니까?” “네 목사입니다.” “교회가 이단인 줄 아시고…” “나가!” “아이구, 예. 알겠습니다.” 복음 전하면 목사고 집사고 장로고 명단 없는 사람은 튕기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성경 말씀대로 환난 받는 것을 도리어 기뻐하라는 말이 이제 술술 풀리는 거예요.
출애굽기 33장에 보게 되면 이미 책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책 안에 제3의 영역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대신 희생해야 돼요. 누가? 모세가. 제3의 구역이 뭐냐? 대신 희생하는 거예요. 아버지 뜻도 알고 인간들이 얼마나 모질게 하나님께 대든다는 그 양쪽을 다 자기 인생에 담아야 돼요.
그러니까 인간의 죄를, 자기가 죄짓는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처럼 담당하는 거예요, 자기가.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모세는 알잖아요. 백성들의 죄를 모세가 대신 담당하게 해달라고 모세가 허락을 구하는 겁니다. 그게 ‘대신’이에요.
대신, 이것이 제3의 영역이죠. 제3의 영역이 틈으로 나오면서 책은 드디어 현실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 책 안의 내용이. 그냥 예수님만 부활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첫 번째이고 그다음에 부활될 자, 부활될 자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적용시키죠. 그걸 ‘현세적 종말론’이라 합니다. 세상 끝이 안됐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성령을 줌으로써 하늘나라에 입성하게 만드는 거예요. 세상이 안 끝났는데 아직 내 목숨이 끝나지 않았는데 하늘나라에 미리 입성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학입시도 두 가지 종류가 있죠. 하나는 정시 있고 수시 합격이 있어요. 기분 같으면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하겠는데 여러분 마음을 내가 모르니 뭐. 다만 축하해드리고 싶어라.
이 ‘대신’이라는 것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까, 우리를 모독합니까? 문제에요. 이게 복음인데 이게 우리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거예요. 장례식에서 제일 황당한 일이 뭐냐 하면 아휴, 남편 죽었다고 “여보, 여보”하고 이렇게 울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와서 본처 우는 것보다 더 많이 울 때, 울던 본처가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뭐 이런 게 다 있냐? 그런데 그 엎드려 울던 여자가 나중에 고등학교 학생보고 “야, 너도 와서 같이 울어라. 아버지다.” 혼외자식?
그다음부터는 장례식은 시마이했고 “아줌마는 누구십니까? 얘는 뭡니까?” “옛날 아줌마 결혼해서 애기 못 낳을 때 대신, 여기 ‘대신’ 나와요, 죽었던 우리 애 아빠가 아줌마 애 못 낳는 줄 알고 대신 나하고 관계 맺어서 애 낳았는데 아이가 이렇게 컸습니다. 듣기로는 우리 애 아빠가 46억을 남겼다면서요.” 이제 본론 들어가는 거죠, 본론. 돈도 없는데 왜 찾아왔겠어요? 국민연금? 누구 이름으로...?
방금 제가 들었던 예를 한번 보세요. 본처 마음이 어떻습니까? 섬뜩하죠. 이게 뭐에요? 그러면 처가 쪽 남자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이 여자하고 애하고 당장 내쳐라!” 하지 않겠어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돈 46억 남겼다고 어딜 기어 들어와. 내치라 하겠죠.
이게 바로 복음을 대하는 인간들의 본심입니다. 그 심각한 얘기는 10분 후에 보겠습니다.
광주강의20230224b 다니엘12장 2절(제3의 영역)-이 근호 목사
자, 아까 이야기 계속해야 되겠죠. 지금 다니엘 12장에서 부활을 뭐로 보느냐 하면 석방으로 봐요, 석방. 감금된 상태에서 석방된 걸 부활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카엘이 전쟁을 할 때 사람하고 전쟁하지 않아요. 미카엘은 책대로 전쟁해요. 그 책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경합과 전쟁, 그걸 무산시키는 전쟁입니다.
바리새인적인 용어로 취지를 살려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복음이란 철저하게 비(非)-윤리적 토대를 그 위에 도배하는 식이 돼요, 복음이란. 비-윤리적이 없어버리면 복음의 가치가 생기지 않아요. 비-윤리적 또는 비-도덕적. 바리새인이 하는 그것을 감안해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기 의로움이 극대화된다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 이게 경합이거든요, 경합. 어렵죠. 한번 적어볼게요. 인간 세계에서는 경합을 한다. 시합을 하는데 그 시합, 경합의 주제가 뭡니까? 이게 바리새인에 의하면 뭡니까? 자기 의죠. 그럼 내가 의로우면 남들은 뭡니까?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러한 주장이 왜 엉터리냐 하면 random connection, 무작위적인 연결들, 인간 세상 자체가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들이닥친 우발적 사태 속에 인간들은 다 각자 각자 거기에 random, 무작위적으로 놓여있는 상태거든요.
인간이 착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지금? 뭐를 지금 뿌리치는 거예요? 그 어떤 주어진 상황을 본인이 고려하거나 본인이 취사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비-윤리적이다. 어떤 사람은 되게 도덕적으로 보인다. 보이겠죠. 그렇게 보이겠죠. 그 사람은 지금 random connection, 무작위적인 연결고리, 연결선, 연결들을 그들은 지금 고려하고 있지 않은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어버리면 나는 그냥 툭 던져진 존재, 내가 의도한 것은 어떤 것도 먹히지 않는 세계라는 사실을 본인이 인정 안 하게 되죠, 본인이. 내 인생은 내가 착실해서 내가 이만큼 건사했다고 우기는 겁니다. 다들 그렇겠죠.
그럼 뭐가 죽어버립니까? 부활은 석방이라는 게 죽어버리죠. 왜냐하면 부활이 되려면 나는 속박된 상태, 우연에 속박된 상태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결혼하는 거예요. 총각, 처녀들이 결혼할 때 feeling, 그냥 감정적이에요. 이것 저것 따지지 않습니다.
조건 좋은 사람들 주위에서 해줘도 전부 다 싫어, 싫어. “조건 좋잖아.” “조건은 좋은데 내가 싫어.” 어떤 조건이라도 나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다른 어떤 좋은 조건이 오게 되면 “제 이름은요. 옥순씨, 제 이름은 ~입니다.” 이게 <솔로>라는 예능 프로에 나와요. 가명으로 여자 5명, 남자 5명 해놓고 제일 마지막에 ‘나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나는 선택하겠습니다’ 해가지고 비로소 좋아하는 여자, 남자한테 자기 본명을 밝히는 게 나와요.
그러니까 이것은 철저하게 자기가 속박된 상태에서 선택하는 거죠. 우연에서 필연을 끄집어내는 거죠. 그래서 그 선택에 대해서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을,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고 우기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반격은 이렇게 됩니다.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그리고 장애자들, 이거 본인이 선택했습니까? 이 사람들이? 선택한 거 아니죠. 강도 된 사람에게 “너 장래희망이 뭐고?” “강도입니다.” 이렇게 선택한 사람 있어요? 아니죠. 장애자들, 소경들, 절름발이 본인이 장애자 되고 싶어서 환장해가지고 자기 스스로 다리 끊고 안 했죠.
특히 전쟁에 의해서 가난한 자들, 남편이 전사해서 졸지에 과부된 자 이런 자들 뒤에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구약에 보면 후견자가 계세요. 이 후견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 후견자의 자격으로만 나타나요. 그러니까 이게 ‘대신’이에요. 이 천대받는 자들을 대신해서 내가 등장하는 거예요. 이게 출애굽기 22장에 나옵니다 (출 22:22-24).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는 것은 곧 나를 학대하는 것이다.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 본인이 이렇게 가난한 자로 오세요, 예수님 본인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할만한 분으로 오신다고요. 그리고 그 예수님의 후견자가 누가 되느냐 하면 아버지가 되시죠. 그러니까 그 후견자 제도, 대신의 삶을 사는 거예요, 대신.
외손자가 집에 와서 밥을 먹는데 제 딸이 제 아내보고 “엄마” 이렇게 하니까 외손자가 갑자기 이상한 거예요. “왜 할머닌데 엄마라 해?” 왜 할머니보고 엄마라고 이야기해? 엄마는 내가 불러야 되는데, 나는 할머니라 부르는데 왜 엄마라고 부르느냐. 걔는 이제 복잡해진 거예요. 걔는 대신을 몰라요.
엄마라고 부르는 그 엄마 안에 본인이 들어있는 거예요. 대신 안에 우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외손자가 제 아내보고 “할머니” 할 때 그 할머니 안에는 대신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할 때는 주님은 우리의 후견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 자체가 후견자로 오셔서 후견자라는 connection, 후견자 관계를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내가 너를 대신해 줄게. 네가 밥을 먹을 때 내가 대신 먹어줄게. 네가 잠잘 때 내가 대신 잠자줄게.’ 이러면 말이 상당히 어려워지죠. ‘네가 길을 걸을 때 네가 조깅할 때 내가 대신 조깅해줄게.’ 이게 굉장히 어렵잖아요. 이걸 신약에서는 간단하게 ‘예수 안에서 조깅하고 예수 안에서 밥을 먹고 예수 안에서 잠을 자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후견자의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쯤 해서 제가 또 여기에 관련되는 노래 가사를 갖고 왔죠.
<나혼자(alone)> 씨스타
추억이 이리 많을까 넌 대체 뭐할까 아직 난 이래 혹시 돌아올까 봐
나 절대 이런 애 아닌데 이런 적 없었는데
사랑 너무도 독해 아직도 못 깼나 봐
너무도 달콤한 니 말에 속아 이제와 혼자
( I'm falling down I'm falling down )
차라리 만나지 말걸 그랬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이토록 쉽게 우린 끝인가요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
나 혼자 노래하고 이렇게 나 울고 불고 넌 떠나고 없어 후회해도 소용없어
오늘도 나 혼자 ( Whoo Whoo Whoo Whoo Whoo Whoo Whoo Whoo )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TV를 보고
나 혼자 취해 보고 이렇게 매일 울고 불고
사랑 참 달콤했어 이별이란 그림자 안에서
오늘도 잠 못자 ( Whoo Whoo Whoo Whoo Whoo Whoo Whoo )
...
그러니까 이 복음이라는 것은,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복음에 접근 못합니다. 왜? 인간은 바로 이 <나혼자>라는 가사처럼 결국은 자기 혼자로 자기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으로 여겨서 계속 찾아가죠.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이게 역사 속에 있는 우리 인간이 자기가 사체가 아니고 엄연히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는 방법이 이 방법이에요. 자기 쪽에서 찾아가요, 자기 쪽에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나 말고 누가 있어야 돼요. 나 말고. 나 말고 누가 있어야 돼요. 남들이 너 귀신 들렸구나, 무슨 소리를 해도 괜찮아요. 하여튼 나에게 나 말고 다른 분이 있어야 돼요. 한번 적어볼게요. ‘나 말고 다른 분이 있어야 한다.’ 보통 모든 인간은 홀로 살잖아요. 홀로 남겨지죠. 그런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볼 때 미친 사람이죠. 귀신 들렸거나 악령 들렸다는 소리를 할만하죠. 나 말고 다른 분이 있어야 돼요.
예를 들면 교회에서 부교역자 뽑는데 “목사님, 우리 교회에 오실 의향 있습니까? 계약은 1년 계약이고요. 월 200 드리겠습니다.” 요새 200 주는가 모르겠어요. 부교역자 200만원 잘 안 줄 거예요. 하여튼 “보너스 400% 드리고 200만원 드리겠습니다. 오실 의향이 있습니까?” 하면 보통 기도해보시고 결정하세요, 하잖아요. 기도해볼 것도 없어요. “주님, 어떻게 할까요?” “지금 방금 누구보고 이야기했어요?” “지금 나 말고 다른 분이 계셔서.”
그럼 그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다른 분인 주님 자체가 죽음을 능가하신 분이잖아요. 책 자체가 살아 있어버리면 거기서 영생이 부활이 나오죠. 다른 분이 함께 있다는 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분이 나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죽음을 능가하는 이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그 교회 부교역자로 갈 때 조건이 뭐냐? 월 200주고 보너스 몇 %가 아니라 ‘죽어도 좋습니까?’라는 이 조건보고 가야 되죠. 죽어도 좋습니까. 그래야 다니엘 12장의 죽은 자의 부활이 살아날 거잖아요.
어떤 사람이 35세에 죽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그 사람이 35년간 살았던 모든 것은 그 사람이 15세 때, 24세 때 일어났던 모든 것도 35세 때 죽어야만 되는 이유를 사람들은 뽑아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겠죠. 이미 아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분이 나를 대신하는 거예요. 대신이란 말 표현을…… 그냥 함께 있다는 뜻이 아니고요. 우리를 가위표로 지우는 식으로 대신하는 거예요.
너 혼자 밥을 먹는 게 아니고 내가 밥을 먹고. 너 혼자 영화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영화를 보고. 같이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영화를 보고. 네가 노래하는 게 아니라 내가 노래하고 너는 노래 안 하고. 이렇게 울고불고, 네가 울고불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울고불고. 너는 나의 아바타란 말이야, 아바타. 누구 말대로 재미 하나도 없는 아바타 2!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TV를 보고 나 혼자 취해 보고 이렇게 매일 울고불고.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혼자 사는 게 문제에요. 나를 대신할 어떤 자가 없으니 죽든 말든 나라도 버텨야 되죠. 나라도 살아야 되고. 특히 나라도 내가 살기 위해서는 안 죽기 위해서는 내가 의로워야 돼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그런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말고 거기서 도피하고 피해야 돼요.
혼자 있어도 이렇게 해서 정당하다는 그 말이 성립되는 것이 우리한테 있다는 것, 그게 결핍이고 그래서 대드는 거예요. 하나님께 대들고 예수님을 볼 때 하나의 우상 보듯이 똑바로 쳐다보고 지 할 말 다하고 그렇죠.
이스라엘 역사, 아까 역대상 5장도 보고 9장도 봤는데 이방인들이 멸망 당했다, 이거하고 이스라엘의 멸망 때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을 안 사람들이에요. 그 안 사람들이 결국 멸망 당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자기가 자기를 놔버리는데 실패했다는 거예요. 살아있는 나는 절대로 나를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이방 나라와 전쟁을 붙여서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한테 잡혀서 파괴되고 멸망되는 방법, 그게 이 세상의 전쟁이 되는 겁니다.
죽음을 능가하신 분이 지금 살아있다면 우리는 아바타가 되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속 사는 쪽으로 가게 되면 나중에 죽는 게 아니고 그냥 잠자는 게 돼요. 왜? 처음부터 주님이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죽었으니까. 죽었는데 내부적으로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려줬으니까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이제 너 비서 노릇 그만해도 된다. 이제 좀 쉬자. 그동안 참 17년 동안 일한다고 고생 많이 했다. 이제 쉬어라. 수정과나 만들고, 단술 만들고 생강 넣어서. 집안 살림하면서 푹 쉬어라. 쉬는 거죠.
그래서 사도행전 7장 끝에 보면 스데반 집사 나오죠. 스데반 집사님의 퇴직식은 아주 화려했습니다. 본인이 석방되는 날이고, 주께서 양쪽에 하얀 두부를 갖고 ‘에라이, 먹어라. 그동안 죄인으로 산다고 고생 많이 했다.’하고 갖다 먹이는 거예요.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간음한 여인에게 두부를 먹이듯이.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일체 우리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겁니다. 우리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 대신이 죽어버려요. 대신이라는 것은 일부를 대타하는 게 아니고 몽땅 다 대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니엘 12장 다시 봅시다. 다니엘 12장에 나오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할 때 그 일이 언제 나오느냐 하면 4절에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되어 있죠.
마지막 때, 이 말씀을 완성할 때, 바깥에 있던 주님이, 하늘에 계신 주님이 우리 안까지 들어올 그때, 말씀 자체가 다 이루었다는 것으로 봉함된 채 우리 안에 쑥 들어왔을 때, 우리 안에서 뭐가 나와요? ‘다 이루었다’만 나오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만 나오려면 도대체 뭘 이루었는지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시 모세처럼 되는 거예요. 모세가 양쪽을 다 아는 거죠. 인간들이 우상 숭배자라 하는 것을 모세도 알고 실제로 모세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잖아요, 그렇죠? 구약에서. 신약에는 들어갔지만.
그리고 하늘나라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창세 전에 예정된 자라는 책대로 하나님께서 그 완성을,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도 모세는 알고. 그러니까 모세는 제3의 영역에서 희생의 역할로 백성과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적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걸 선지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죠.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라는 말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책의 내용이 펼쳐집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쭉 보게 되면 여러분 아시니까 굳이 찾을 필요 없는데 교회를 이야기할 때 2장, 3장에 있는 교회가 모두 몇 교회입니까? 일곱 교회죠. 여덟 교회 아닙니다. 아홉 교회 아니에요. 여섯 교회 아니에요. 일곱 교회에요.
일곱 교회는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의 오른손에서 나오죠. 1에서 7이 나오죠. 1에서 주님의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았잖아요, 일곱 별을. 왜 갑자기 요한계시록을 봅니까? 라고 묻는다면 여기 다니엘 12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다니엘 12장 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되어 있어요.
‘별과 같이’라는 말에서 별로 묘사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가 하늘에 붙박이처럼 박혀서 빛나는 거예요. 세상 일에 영향받지 않고 빛나고 있다는 뜻에서 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곱 별이라 하는 것은 지상에 어떤 변화에도 관계없이 굳건하게 고정화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별과 대비해서 이 지상에 일곱 교회가 왔는데 편지를 보낼 때는 일단 그 편지 출발이 예수님부터 출발합니다. 에베소 교회도 그렇고 서머나 교회도 그렇고. 요한계시록 2장 8절에 보면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그러니까 아까 우리가 배웠으니까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나한테 이야기하시기를,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따라서 너도 죽었다가 살아나야 돼.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 9절에 보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10절에 보면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결국 함께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이유가 아니에요, 함께 있기 때문에 우연적인 우발적인 random connection이 아니고 확실한 connection으로 함께 있는 거예요. 이미 확정된 팔자이기 때문에 죽었다가 살아나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를 경유해야 된다? 죽었다,를 환난 가운데 그리고 죽음 가운데 옥에 던져지는 가운데 우리가 놓일 수밖에 없죠.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럼 우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경찰에 잡혀서 감옥에 갇혀야 됩니까? 또 이렇게 이야기해가지고 이 광경을 자기가 연출해서 시나리오 짜가지고 그때를 대비해서 옥에 갇힐 때 “예수님 사진을 밟아라.” “나는 절대로 밟지 않겠습니다. 으으윽.” 사무라이 나카무라가 칼 가지고 “그렇다면 예수를 위해 죽겠는가, 우리 천황을 위해 죽겠는가?” “나는 죽어도 예수를 못 버린다.” “죽어라.” “으악!” 뭐 그런 연출을 자꾸 구상하는데 그렇게 굳이 우리가 뭐 김은숙 작가도 아니고 그렇게 시나리오 짤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감옥이기 때문에 그래요. 강정 먹는 감옥생활, 귤 먹는 감옥생활. 감옥생활 치고는 아직까지 한가하지만 우크라이나 같은 경우에는 감옥이 좀 곤란하겠죠. 미사일 막 날라오고 전기 다 끊어지고 수도 다 끊어지고.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고요. 생사를 알 길 없고.
이 세상이 우연 맞아요.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책에 의하면 우연이 아니고 필연입니다. 반드시 그러해야 해요. 아까 이 말 다시 해봅시다. 한 시간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겠지만 아까 했던 것 한번 정리해봅시다.
시편 7편 11절, 하나님은 재판장이죠. 재판장이니까 재판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재판장이 재판을 안 하면 말이 안되죠. 재판을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선한 자는 건지고 악한 자는 벌하는 그 재판 하는 게 아니에요. 뭘 합니까? 매일 everyday 매일 분노하는 식으로 재판한다는 말은, please 제발 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된다는 거예요.
너한테 주어진 어떤 상황도 어떤 취지로 내가 그 상황에 너를 집어넣느냐 하면, 너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시내산 밑에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게 그럼 ‘아무것도 아니겠습니다.’ 이러면 끝나잖아요. 그게 안되니까 매일 같이 분노하는 거예요. 이게 안되니까.
명령한다고 우리가 들을 위인들입니까. 우리가 명령에 복종할 것 같으면 대신 죽으심이, 새 언약이, 내 살과 내 피가,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 질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주님은 살아있는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우리를 죽음에 내몰면서 구원하시는 거예요. 죽음에 내몰리는 자체가 구원되는 과정의 일부다 이 말이죠.
분명히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처참하게 비참하게 죽음에 내몰립니까?”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럼 뭐 월 760 받고 죽음에 내몰리고 장사하는데 손님이 아침부터 들끓어서 죽음에 내몰리고 어떤 사람은 몸이 건강해서 보디빌더 하면서 죽음에 내몰리고 어떤 사람은 자식이 너무 잘돼서 변호사 시험 합격, 의사 합격 그래서 죽음에 내몰리고.
이래 내몰리나 저래 내몰리나 남의 인생 너무 탐탁잖게 보지 마시고 너는 인생 그렇게 죽음에 내몰리고 나는 이런 식으로 죽음에 내몰리고 다 달라요. 그러니까 엄살떨지 말고 징징거리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은 어떤 경우라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시고 발걸음도 세시는 분이거든요. 잠언서에 보면 발걸음도 세신다 했어요. 어떤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됩니다.
그러니까 서머나 교회에 보낸 것은 “너 교회 맞아?”라고 확인해주는 말씀이에요. 내가 너에게 의도적으로 환난을 받게 한 것에 대해서 네가 그것을 고마워하느냐를 지금 보게 하시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당부합니다. 동행 정도가 아니고 아예 나를 늘 없애고 죽이는 식으로 살아계신 분, 주님이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상 수시로 누가 튀어나옵니까? “제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라든지 “제가 말씀을 전하니까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할 때, 쥐어박으면서 “그거 좋아하지 말고 책을 잊어버리지 마라. 책에 명단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그 말씀을 하시는 거죠.
자, 그러면 이 작업을 위해서 p.235 한번 보겠습니다. 야, 이것도 참 만만치 않다, 내용이. p.235 중간, 위에서 11번째 줄에요. [느부갓네살과 다니엘의 두 번째 만남]이라 했는데 다니엘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중심 다니엘.
다니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이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어떤 점에서 신앙이 좋지 않냐 하면 다니엘도 여전히 구약 사람이 돼서 이 인간 세계가 평화롭게 가길 원해요. 그래야 자기도 평화로우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보니까 자기 나라가 속해있는 이 바벨론이 메대, 바사한테 망한다는 소리, 그리고 또 그 나라가 가만 있지 않고 헬라, 마케도니아한테 망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충격을 받아서 며칠간 앓아 누웠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전쟁한다는 자체가 자기 신상이 불편해진다는 것에 대해서 다니엘도 동일하게 우리하고 똑같이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어요. 계시라 하는 것은 신약 계시처럼 성령 와서 주는 게 아니고 다니엘을 포함해서 계시가 서서히 무르익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다니엘 입장에서는 그 미래를 감당하기가 굉장히 힘드는 겁니다. 다니엘은 본인이 아직 살아있으니까.
그러면 다니엘에게 계시는 뭐냐? 7년. 시간성. 자, 이건 설명이 많이 필요하겠죠. 많이 필요한 거예요, 이것은. 느부갓네살과 다니엘의 만남에서 다니엘은 가만 있는데 누가 짐승이 됩니까?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되죠. 짐승이 됩니다.
이번 주일 오전 설교에 제가 중요한 포인트 있는 말씀을 했어요.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하면서 뭐를 지키려고 하느냐 하면 신비성을 지키려고 했어요, 신비성.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여러분 알아 맞춰보세요. 공기와 주님과의 관계는? 공기, air와 주님과의 관계는? 어렵죠.
공기는 뭡니까? 물질이잖아요. 이 물질과 주님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거예요. 주님이 공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안돼요. 그렇게 되면 뭐가 빠졌나? 중간에 인간이 빠져버려요. 여기에 인간을 집어넣고 주님과 공기 사이에 연결고리가 해명되어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이기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흔히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제3의 영역으로 오셨잖아요. 제3의 영역은 사물로 물체로 되어 있는 이 현실 세계 말고 책 내용 말고 중간에 현실보다 역사보다 뭐가 우선이다? 인간. 인간보다 뭐가 우선이다? 책.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 이것이 우선이잖아요. 그러면 인간 부문에 제3의 영역이 겹쳐버린다고요. 인간이 뭐로 바뀝니까? 주님으로 바뀌는 거예요.
아들이 아닌 자가 아들로 오셔서 아들이 아닌 자를 대신해버리면 그때부터 우리 아들 아닌 자가 아들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 요소를 집어넣고 공기와 주님과의 관계를 설명해야 되는 거예요. 물질이 주님한테 어떤 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알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신비성을 지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들이 이미 공기라든지 우주, 자연과학, 천문학 이에 대해서 인간 자체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미 물질화시켜놓은 거예요. 관측에 의해서 관측하는 자가 관측만 하는 게 아니에요.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해석을. 공기, 자연, 금, 금속, 지구, 달, 별에 대해서 이미 해석을 내린 거예요. 누가요? 관측하는 자가.
관측하는 자가 해석해버리면 뭐는 빠져요? 무슨 해석이 빠져버립니까? 관측하는 본인에 대한 관측은 누가 하죠? 이게 성립됩니까, 성립되지 않습니까? 성립되지 않죠. 내가 누구냐를 백날 관측해봐야 안 보이는 거예요.
내가 원숭이 쳐다보면 나를 압니까? 쳐다보니까 원숭이가 갑자기 말을 해가지고 ‘너 누구야?’ 하는 그거는 발람 선지자한테 한 얘기에요. 발람 선지자가 누구한테 자기 본색이 들킵니까? 당나귀. 당나귀한테 들키잖아요. ‘왜 때리십니까?’ 하극상이죠. 이등병이 상병한테 대드는 하극상. 왜 때리십니까? 이래가지고 발람이 기절을 할 정도에요, 세상에.
진짜 자기 자신을 누가 정확하게 이야기해준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반가운 이야기가 아니고 기절초풍할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인간이 나라는 것은 내가 관측한 정보를 수집해서 그 안에서 자기 의로움을 동반해서 자기를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내가 이래서 아직도 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동반해서 이야기한다고요.
부부끼리, 부부싸움을 여러분 해본 적이 없잖아요, 부부싸움 하면서 그 대화를 보세요. 대화에 반드시 뭐가 들어가요? ‘나는 이래서 정당하다’가 포함 안된 대화 나오던가요? 인간은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이래서 나는 정당하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를 평할 자격이 있지만 너는 나를 함부로 평하지 마.’ 이걸 전제로 해서 대화해요. 이게 대화입니까, 이게 폭력이에요? 지금 애들도 마찬가지에요. 자식들도 마찬가지에요.
ChatGPT? GPT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걸 통해서 나를 알 수 있습니까? 과학? 수학? 우리나라 서울대 수학과 나오고 수학과 대학원 나와서 현재 프리스턴 대학교수로 있는 사람 있어요. 필즈상 받은 사람, 허준이. 그 사람이 이런 말 했다고요. “당신은 뭘 제일 잘합니까?” “나는 모든 걸 잘해요. 수학 빼놓고. 난 수학 빼놓고 다 잘해요.” 자기가 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럼 왜 수학의 노벨상이라 하는 필즈상을 받았는가. 이것을 자기는 우발적이라 보는 거예요. 나보다 받을 사람이 많았는데. 그리고 곡면의 경우의 수인가 그걸 푸는데 자기가 운이 좋아서 푼 거죠. 운이 좋다는 말이 뭡니까? 내 목적과 기대한 것과 무관하게 상 받은 거죠. 그럼 상 자체도 내가 굳이 안 받더라도 남이 받더라도 내가 조금도 기분 상할 이유가 없다, 가 되죠. 물론 그런 경지까지 간 사람은 아니고요. 해석이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디모데에게 중요한 것은 디모데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에게 주어진 아우라 같은 신비성, 그걸 지금 사도 바울은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은 중요하지 않아요. 느부갓네살에게 있어서 신비성은 뭐냐? 느부갓네살은 짐승이 된다는 거예요. 문제는 다니엘은 짐승이 안됐다는 거예요. 그 차이점이 중요하죠.
다니엘은 증인이지, 관측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니엘과 함께 있는 분, 다니엘은 아까 했죠? 함께 계신 대신이 있잖아요. 지금 바벨론 나라가 이스라엘을 건드렸고 이스라엘의 현재 대변자가 다니엘이에요. 바벨론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를 건드린 게 아니고 누구를 건드렸냐?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인간 역사가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의 책을 건드린 거예요.
아까 첫째 강의에 의하면 인간 역사가 하나님의 책을 건드린 거예요. 건드려야 그 내막이 나올 게 아니겠습니까. 환난 가운데 나올 게 아니겠습니까. 건드려보니까 졸지에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된 거예요.
짐승이 되었는데 짐승이라는 꿈이 실제 인간 역사에 어떤 기간으로 나타났어요. 몇 년 동안 짐승 되었는가? 7년 동안 짐승 되었어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의 역사는 짐승의 7년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7년 안에 감금됐다. 7년에 속박되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하나님이 규정한 7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70 이레가 드디어 풀립니다. 7년, 이 시발점은 느부갓네살의 7년부터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가 이스라엘답게 된 역사는 몇 년이냐 하면 70년이에요. 그 땅에 사는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약속의 땅을 비워줘야 돼요. 하나님의 거하실 약속의 땅을 비워줘야 되잖아요.
그 빈 곳에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스라엘 사람 있습니까? 없죠. 포로잡혀 갔으니까요. 남아있는 사람은 혼혈아들이고 제대로 이스라엘이라고 우길 사람 없이 비어있죠. 비어있다는 그 비어있음이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죠. 비어있다는 것이.
이스라엘은 이 땅에 없다. ‘없다’를 어디서 아느냐? 약속의 땅 바깥쪽에서 아는 거예요, 바깥쪽에서. 사체가 된 것은 우리 내부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가 이미 죽은 자로 아는 거예요. 그런데 바깥에서는 모르죠.
우리가 전에는 약속의 땅에 살던 민족이 무슨 민족이다?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그 땅에 살지 못하게 되었죠, 현재 이스라엘이.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뭘 바라봅니까? 현재 있는 자기가 사는 곳을 스스로 부정하고 자기부인이 되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이 땅에 태어난 나는 진정 나가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런 말이 있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이 깨어졌을 때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요. 이별할 때 사랑을 알죠. 사랑한다는 말은 못해도 안녕이라는 말은 해야지. 박선주가 불렀던 <귀로>라는 노래에 나와요. 그런 노래 있어요. 아무 말 없이 가버린 그대가 너무 미워. 나중에 한번 들어보세요. 구구절절 참 노래도 잘 부르지만 노래 괜찮아요.
그 가사를 생각하면서 도대체 사랑한다는 말하고 안녕이라는 말의 차이가 뭔데 이거는 안 해도 이건 해야 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잘 생각 안 나요. 사랑한단 말은 못해도 안녕이라는 말은 해야지. 그동안 살았던 의리를 생각해서. 아, 의리 생각하는구나. 그러니까 사랑은 놓쳐도 의리는 남겠다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은 챙겨야 되겠다. 네가 그것마저 짓밟나? 그런 뜻 같아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리면 그대가 너무나 미워.
지금 70년이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한테는 계시로 다가오는 거예요. 70년만 지나면 이 약속의 땅에 간다. 가면 뭐하나? 여기 누가 기다리죠? 다윗 언약이 기다리죠. 다윗 언약은 뭡니까? 이스라엘이 온 이방 나라를 통치했던 것. 이방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고 역전되어서 도리어 우리가 모든 이방 민족을 다스렸던 그 대단했던 다윗, 다윗 언약의 시절로.
그 다윗 언약의 시절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지 사무엘하 22장을 보겠습니다. 이건 좀 어려워요. 보세요. 7절에 보면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여기 분명히 다윗처럼 되어있죠. 다윗처럼. 다윗이 지금 하나님의 신을 받아서 계시를 받아서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장래 일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하니까 다윗이잖아요. 다윗이지만 다윗 안에 들어계신, 아까 이야기한 다윗을 대신해서 다윗 삶을 사시는 그분이 예언하기를, 8절에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진노는 하여튼 한결같아요, 진노는.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또 10절에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1절,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인자가 메시아가 올 때 천사의 구름 타고 나타나시는 그걸 인자가 메시아가 오는 때라고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은 그걸 기다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보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다윗의 자손이야? 다윗 언약대로 오실 메시아 맞아? 그럼 당신 구름 타고 왔어?” 라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 답변이 뭐냐? “내가 그렇게 올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죽여버린 거예요.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죠. 뭘 구름을 타? 지금 행색이 초라한데요. 주께서 오케이, 구름 타고 온다고 한 것은 너희들은 너의 관측 있잖아요. 아까 우상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살아있는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신이라 했죠. 주님께서 그들을 바라보게 만든 거예요.
지금 여기 70년이 뭐냐? 약속의 땅이 비어있잖아요. 바깥에 있는 사람이 뭘 생각합니까? 70년만 지나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처음에 다니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70년이 뭐로 바뀌는지 알아요? 70 이레로 바뀌어요.
70 이레로 바뀌면서 아하! 갈 필요가 없다. 다윗 언약의 완성은 이 세상 전체에 대한 것으로 이 세상 자체가 이스라엘과 무관하게 멸망해야 될 파괴되어야 될 세상인 것을 안 겁니다.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이방화 되고 우상화된 것은 주께서 하는 인자의 나라가, 들어가는 나라 말고, 인자의 나라가 따로 있다.
그렇다면 이 인자의 나라는 느부갓네살 짐승이 극대화된다고 다니엘은 깨닫게 되었어요. 느부갓네살 우상 자체가 인류 역사의 시작과 끝을 말해줘요. 마지막 끝에 금, 은, 동, 철과 진흙에 섞여 있는 것을 마지막 올 때 태산 돌멩이를 쌓아서 이걸 넘어뜨리죠. 그럼 우상은 땅에 엎드러져요. 역사로서 우상입니다. 역사 위에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로서 떨어져버려요.
마치 사무엘상 5장 4절에 다곤 신상이 언약궤 앞에 완전히 엎드러져서 박살 난 것처럼. 역사 속에 조각조각 난 후에 그때 무슨 나라가 됩니까? 인자의 나라죠. 인자의 나라가 되려면 70년을 이루면 안 되죠. 70 이레를 이루어야죠. 그럼 현재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 다니엘부터 대신 함께 있는 다니엘부터 새로운 인자의 나라가 시작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다니엘 12장에 나오는, 모든 인간은 이스라엘이고 이방인이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닌 자. 그냥 사체가 되어야 돼요. 시신이 되고 시체가 되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야 돼요.
70년을 바라보면서 기다렸던 여기 바깥에 다니엘이 있죠. 여기 하나님께서 70년 말고 70 이레의 계시를 주세요. 70 이레가 되어버리면 여기 7년은 어디 포함되느냐? 70 이레에 포함돼요. 처음에 7로 시작되면 7+62+1, 합쳐서 70 이레가 되는 겁니다.
최종 완성은 1 이레잖아요. 1이 있으니까 1이라는 최종 밑에 중간지역 62 이레가 있는데, 62 이레란 옆에 7 이것을 깨부수는 거예요. 7년 동안 뭐 하느냐? 하나님이 다시 돌아와서 뭘 짓는다? 에스라, 느헤미야 뭐를 짓습니까? 어쭙잖은 성전 지었죠. 성전 지었잖아요. 그 성전을 지었을 때 이스라엘은 아직 역사는 흐른다~ 역사는 흐르는 줄 알고 있어요.
역사 자체가 비역사적 해석이에요. 역사 자체가 무산되기 위해서 여기에 1과 7 사이에 1 하나 남기기 위해서 소실시키기 위한 기간이 62 이레에요. 이것은 7년째 만드는 성전을 이방 나라가 와가지고 다 부숴버리는 거예요. 역사를 가지고 역사를 부수는 거예요. 이게 인간 전쟁입니다.
자기들끼리 물어뜯어서 자기들끼리 망해버려라.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는 고맙게도,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하는 합기도가 나를 망치게 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너는 그런 식으로 합기도 해서 망하고 너는 뭘 해서 망하고 놀면서 망하고.
하여튼 우리가 하는 것이 역사 속에 있는 관측된 나의 역사가 무너짐으로써 내가 홀로 있는 게 아니고 이미 대신 그냥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자기처럼 죽었다가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인하여 그 과정을 필수적으로 겪게 하시는 이 일에 주께서 참여시켜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합시다. 또 나 홀로 울고불고 좀 하지 마시고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니엘을 통해서 또 말씀을 통해서 하신 일이 그대로 새 언약 안에서 현실로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 바라는 것이 우리의 우상을 유발한다는 것을 깨달았사오니 하나님 주신 그 신비로운 것을 귀하게 감사히 여기면서 보이지 않는 분과 십자가 지신 분과 함께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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