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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10강-날아가는 두루마리(슥5;1-4)이근호131027

아빠와 함께 2013. 10. 27. 17:22

날아가는 두루마리(스가랴 5:1ㅡ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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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0-27 15:28 

             날아가는 두루마리

2013년 10월 27일                     본문 말씀: 스가랴 5:1-4

(5:1)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5: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

(5: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5:4)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성전 짓는데 있어 인간들과 경쟁합니다. 성전 짓는데 있어 귀환한 백성들이 태만해하니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와 학개 선지자에게 계시의 말씀을 담아서 성전짓기에 제촉하십니다. 그러면서 분명히 중요한 언질을 그 속에 담아두십니다. 스가랴 4:6에 보면,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너희들이 짓는 그 성전 짓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시는 성전 짓기에 병행하면서 진행중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일단 인간들에게 성전 짓기를 맡겼다면 인간들이 얼마나 성의껏 성전 짓는가를 지켜보기를 원합니다. 즉 하나님마저 자기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을 인간들이 원치 않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자신의 존재 가치가 자기 영광과 관련있습니다. 성전지으면서 하나님에게도 기뻐할 일이 되고 자기도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이기를 기대하면서 인간들은 성전 짓기에 나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른 노선을 준비해두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 손으로 지을 수 없는 ’성전짓기‘입니다.

여기서 왜 사람이 지을 수 없는 성전이 등장되어야 하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영원히 살 처소를 두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15:17에 보면,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일으키시고 홍해바다를 가르신 이유가 인간들을 행복이나 염원하고 소원을 만족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거하신 집을 짓기 위함입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자들은 자진해서 원한다고 해서 뽑히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사건의 와류에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말려든 자들이 거기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전의 특성은 이스라엘 역사가 진척되면서 그 깊이 더욱 깊어집니다. 이 깊이는 곧 거룩의 강도에 비례합니다. 즉 거룩에 접근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참 백성은 저주를 더 실감합니다. 현실이란 단순히 인간쪽에서 잘라서 규격화 시킬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유발해서 발생되는 그 현장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 출애굽의 취지는 이제는 ‘성전 짓기’를 통해서 보다 구체화됩니다. 전에는 단지 ‘애굽의 탈출기’에 불과하다면 이제는 ‘자신의 행함의 가치로부터의 탈출’로 심도있게 진행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성전 짓기에 담기지 못할 낯선 설계도면이 ‘하나님의 친히 성전 짓기’에 도입됩니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저주를 뿌리는 날아다니는 말씀 가죽’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설계도에서 삐져나온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전 짓기의 그 여파는 이 인간세계의 ‘저주 선포’로 번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두루마리의 규격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가로 세로가 20척, 10척입니다. 즉 10.5m와 5.2m입니다. 이 규격은 솔로몬의 성전의 표준 규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열왕기상 6:3에 보면, “성전의 성소 앞 낭실의 길이는 성전의 너비와 같이 이십 규빗이요 그 너비는 성전 앞에서부터 십 규빗이며” 여기서 ‘낭실’이란 ‘주랑’을 의미합니다.

솔로몬 성전은 전에 성막 구조와 여러 가지로 차이납니다만 그 중의 하나가 주랑이 성소 앞에 있다는 겁니다. 성막에서는 뜰에서 바로 성소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만 솔로몬 성전은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주랑을 거쳐야 합니다. 과연 이 주랑이 꼭 있어야 할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신으로 지어지는 성전 구조와 관련성이 있습니다. 즉 ‘저주의 폭격 없이는 용서의 환희도 없다’는 원칙의 적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짓게 되는 성전에는 사람의 손 때가 묻을 수는 없습니다.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저주의 글들이 적혀 있고 이 저주의 글은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는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공중 활용성과 관련있습니다. 저주의 선포 자리가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활동된다면 저주란 인간에게는 외면하거나 부정될 수 없는 실질적인 현실국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신에 대해 어떤 반항과 반발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공에서 저주를 퍼부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발악의 효과는 지상에 머물고 저주받을 준비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엄중하십니다. 다니엘 5장에서 이와 비슷한 경우가 나옵니다. 바벨론의 최후의 왕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제사기구에다 술을 담아 흠뻑 취할 때, 공중에서 손가락이 나타나서 저주합니다.

이 저주를 가리거나 취소시킬 능력은 인간에는 없습니다. 당하면 그냥 당해야하는 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을 성전 구조에다 담게 됩니다. 그러면 저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주란 거룩을 위한 필수적 절차입니다. 청소없이는 깨끗함이 없듯이 거룩한 없앨 것은 없앱니다.  

저주가 그 용도에 주내용이 됩니다. 신명기 27:16-26에 보면, 10가지의 저주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저주에 의한 폭격당함’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시는 성전 작업의 일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차라리 저들로 하여금 “천벌받게 하옵소서”라는 고백과 더불어 하나님의 용서만이 우리 속에 자리잡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슥5장1-4(날아가는 두루마리)1310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5장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6페이지입니다.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스가랴를 이렇게 보면서 도대체 스가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당체 무슨 취지로 또 어떤 뜻에서 이런 말씀들을 이렇게 글로 쓰게 하시는지 난감하죠. 성도는 난감하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궁금해야 됩니다. 난감한 건 맞는데요. 왜 이런 납득이 안 되는 전혀 우리 경제 활동과 정치 활동과 일반적인 가정활동과 전혀 상관없는, 이거 드라마 제작하면 아무도 안 봅니다. 줄거리도 없고 이해도 안 돼요.

그런데 왜 이걸 우리에게 주시는가? 하나님께서 성전 만들기에 나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가 만들어 내겠습니다. 하나님, 가만히 계세요. 시키는 대로 성전 만들라 하면 우리가 만들어 냅니다.’라고 또 우리는 이런 말씀 주시지 말고 ‘성전 만들어 내.’ ‘예, 여기 있습니다. 만들어서 갖다 바치겠습니다.’ 헌당식 올리면서 성전입니다. 하고 ‘돈 내서 금가락지 빼내고 전세 옮기면서 나머지 바칠 테니까 이런 성경 말씀의 난해한 말씀 하지 마옵소서. 우리가 예배당 지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성전 그 성전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지을 때 인간들보고 성전 지으라는 것은 같이 나란히 가보자, 네가 지은 성전과 내가 지은 성전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 한번 비교해 보자는 겁니다.

그 같은 예가 마태복음 12장에 나와 있어요. 예수님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낳고 난 뒤에 마리아가 임신해서 형제들을 낳았거든요. 또 예수님에게는 어머니도 있어요.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설교하고 현장에 동생들하고 엄마하고 보고 싶어서 와 본 모양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른 거예요. ‘예수님, 저 뒤에 예수님 동생과 어머니가 와 있습니다.’ 그렇게 이를 수 있지 않습니까? 안철수 연설할 때 안철수 가족들 와 있으면 ‘안철수 의원님 여기 와 있습니다.’ 측근들이 자랑할 수가 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말하기를 ‘누가 모친이며 누가 형제들이냐?’라고 하시거든요. ‘너희들이 형제라고 생각해?’ 그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의미 없는 걸 왜 낳게 했습니까?’

우리가 항상 불만이 그거에요. 우리보고 죄인이라 하는데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단정 지을 것 같으면 왜 죄인을 그냥 만들어 주십니까? 하는 문제에요. 만들어 놓고 죄인 같으면 이미 만들어진 우리는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보고 자살하란 말입니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책임 안지고, 죄인이여 지옥가라. 이러면 우리는 뭐가 돼 버리느냐 말이죠.

그래서 에이, 성경 보기 싫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뭐가 이해가 되는 소리를 해야지 볼 재미가 나는데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날라 가는데 어쩌라고. 두루마리라 하는 것은 남자들이 입는 두루마기가 아닙니다. 두루마리라 하는 것은 글자가 쓰인 가죽 천 같은 건데 둘둘 만다 해서 두루마리인데  거기다가 두루마리는 빈 곳은 없어요. 전부 다 글자가 빽빽이 적혀 있습니다. 적혀 있는 그 두루마리가 양탄자처럼 펼쳐져서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날라 가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가 아니라 우리는 아예 성경 보는 태도가 이래요. 그 이야기 내용이 무엇입니까, 가 아니라 왜 쓸데없는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그런 투로 우리는 생각하거든요. 하나님의 성전 만들기에서 필수적인 요건이 이 두루마리가 날라 가야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두루마리가 날라 가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만든 성전 만들기에 이게 포함이 돼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전과 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행해서 열심을 다하여 바치는 거.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의 두루마리는, 우리는 그렇게 예배당 지으면서 ‘하나님, 제 착한 거 좀 봐 주세요. 얼마나 착합니까? 복 팍팍 내려주셔서 예배당 멋지게 지어주세요.’ 참 예배당 지어본 적도 없습니다. 하여튼 예배당 짓게 되면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 남한테 안 뒤지려고 했고 부흥사가 사기 친 그대로 바치면 복 받는 줄 알고 이판에 믿음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고 진짜 복 받는가 싶어서 30배, 60배 되는 것처럼 돈 넣고 돈 먹기 하는 식으로 바쳐보기도 하고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그거는 우리가 성전 지으면 질수록 성전 짓는 우리가 잘나고 또 잘나고 또 잘난 존재로 전환돼요. 성전 지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성전 지었다.’라고 하는 우리 존재가 너무나 잘나 보인다 이 말이죠.

부산을 한 달에 한 번씩 가거든요. 해운대에 가는데 해운대에 갈 때마다 70 몇 층인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그 숲으로 이룬 그 동네에 가요. 거기에 보면 눈부실 정도로 햇빛이 찬란해요 .해운대 바다 옆에. 저기 사는 사람들은 밑에 내려다보면서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겠습니까? 아파트 높은 고층에 87층짜리가 있는데 그 앞에 100 몇 층 또 짓는데요. 거기 살면서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면서 살게 되듯이 우리가 예배당 지을 때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이게 바로 우리가 예배당 짓고 성전 짓는 한계입니다.

거리에 비해서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두루마리는 뭐냐, 저주만 나와요. 착함을 보장해주는 성전 짓기는 우리가 하는 식이고,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면서 나오는 것은 저주가 나오니까 저주가 나오는 방식은 하나님이 짓는 성전 설계도에 포함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 지으면서 두루마리가 날라 오는데 거기에 대한 크기에 대해서 언급을 해놨어요. 크기가 얼마냐 물어보니까 크기가 20규빗이고 광이 10규빗입니다. 하나님이 그 당시에 스가랴에게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은 성전 짓는 것을 이 사람들이 지루해서 중단을 시켜놨어요. 그러니까 다시 네가 성전 짓는 것을 촉구하라고 하시는 계시 중에서 이 계시가 포함돼 있습니다.

인간 성전과 하나님의 성전의 어떠한 대비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장이 20규빗이고 광이 10규빗인데 규빗이란 45.6센티미터인데 장이 20규빗이니까 이게 12.5미터 정도 되고 광이 10규빗이니까 이건 5미터 정도 되는 게 날라 가거든요. 이 규빗은 처음에 솔로몬 성전에 어떤 규빗과 일치되는가를 보니까 열왕기상 6장에 보니까 솔로몬 성전의 성소 입구에 낭실이 있어요. 낭실 크기가 딱 요크기입니다.

원래 솔로몬 성전과 옛날 모세 때 성막과 구조적 차이가 있어요. 처음의 성막에는 낭실이란 게 없어요. 성소 들어가면 뜰에서 바로 성소 문 열면 성소 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낭실 거치고 성소 들어가게 돼 있어요.

그 낭실의 의미가 뭔지 몰랐는데 여기 하나님의 스가랴의 예언서에 보니까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저주를 만끽한 자에게만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가 확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

그러면 사람이 스스로 저주할 사람은 없어요. 제가 한 유튜브 동영상 중에 제목이 이겁니다. ‘천벌 받으세요.’라는 내용이 있어요. 제가 동영상 60개를 올렸는데 49개가 확 지워져 버렸어요. 특정 종교에 대한 비하라 해서. 그들은 바보 같아. 11개도 특정 종교 비하한 겁니다. 11개는 왜 남겼는지 모르겠어요. 내용도 잘 모르는 모양이라. 그래서 집사님이 다시 복구해서 다 올려놨어요. 하여튼 별일도 다 있어요. 특정 종교를 비하한 게 아닙니다. 인간 자체를 비하했어요. 그걸 왜 그리 몰라. 인간 자체를 비하했는데 무슨 특정 종교를 비하해요? 인간 자체 태어난 게 죄라고 이야기했는데, 자기를 부인하라 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어쨌든 간에 여기 날라 가는 것이 저주인데요. 저주가 3절에 나옵니다.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저주가 날라 가는 거예요. 저주가 날라 가줘야 하나님의 성전의 작업이 진척이 됩니다. 희한한 성전이죠.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나는 저주 받고자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동영상에 ‘천벌을 받으세요.’ 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욕하는 것 같지만 욕이 아닙니다. 사람이 ‘나는 천벌을 받아야지.’ 하는 그 순간부터 마귀란 마귀는 다 떨어져 나가요. 귀신은 다 떨어져 나갑니다.

귀신이 언제 오는지 알아요? 뭐 갓 바위 가서 자리하나 깔까요? 귀신 언제 오는지 압니다. 귀신은요. 내가 잘 되려고 내가 밥 먹고 살려고 할 때 귀신은 어디가든지 다 온갖 귀신은 다 날아옵니다. 하늘의 유성 떨어지듯이 온 귀신 다 와요. ‘그래, 나는 천벌 받으면 안 돼.’ 이러면 귀신 다 날라 들어요.

내가 천벌 안 받는 방법 이야기해줄게. ‘기도해라. 헌금해라. 어떻게 정성 다해라. 수능 앞두고 난리 났어요. 지금. 방송국마다 카메라 들고 끝까지 올라갑니다. 수능의 계절에 온 징후에요. 갓 바위가. 대구 유명한 것은 옛날에는 사가였지만 지금은 갓 바위입니다. 수능과 더불어서, 짝을 이루어서.

그래서 천벌을 받으라는 말은 그걸 사랑해서 하는 말 이예요. ‘천벌 받을게.’ 이러면 그렇게 들끓던 귀신들이 다 떠나고 없어요. 그런데 천벌 안 받으려고 하면 없는 귀신 수많은 군대귀신 다 들어옵니다. 귀신들끼리 싸워요. 성경 3장 읽어라. 아니 모자라. 저번에 3장 읽었는데 실패했잖아. 7장 읽어야 돼. 자기들끼리 와서 성경 읽어라, 기도 2시간해. 아니, 2시간 모자랐어. 새벽기도 나가야 돼. 온갖 귀신들이 다 한 거예요. 그 귀신들을 부르는 곳이 교회입니다. 특정 종교 비하하는 것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려면 저주라는 낭실을 통과해줘야 돼요. 20규빗, 10규빗, 저주란 낭실을 통과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용서가 왜 고귀한지를 알아요. 그런데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장소가 뭐냐, 허공입니다. 이게 공중을 날아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허공을 사용할 때는 미처 사람들이 장난질 치지 못하는 곳이 허공 이예요.

사람들이 손댈 수 없는 곳에 사람들이 저주가 날아 올 때 그 저주를 어떻게 해결할 길이 없어요. 허공 속을 날아가기 때문에. 허공 속을 저주의 성경책이 날아가니까 날아가면서 그냥 저주를 땅에 폭격하니까 스텔스기라. 완전히 레이더에 걸리지도 않아, 막 저주를 폭격하니까 그게 성전 짓는 프로젝트 중에 하나 포함돼 있습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거기 허공에 대한 멋진 활용도가 나옵니다. 벨사살 왕이 술 먹고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얼마나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지내던 그 제사 기구 다 들고 오라 해서 거기다 폭탄주를 만들어서 ‘위하여! 여호와를 이긴 우리 마르둑 신이여! 위대하다.’ 하는 식으로 짠, 하고 했겠죠. 그럴 때 여기 허공이란 공간이 하나님한테 아주 멋지게 활용됩니다. 뭔가 보이더란 말이죠. 그것을 벨사살 왕이 술김에 봤던 모양이라. 술김에는 잘 안 보이는데. 보이니까 허공에서 손가락 나왔어요.

저도 가락교회 가서 깜짝 놀랐어요. 허공에 귀신 한번 봤습니다. 이 귀신은 자연적인 귀신이 아니고 인공으로 만들어 낸 독일에서 만들어 낸 귀신인데 이게 뭐냐 하면 BMW 타고 가는데, 요새 한 달에 두 번 목요일에 BMW 타요. 밤중에 타는데 헤드 업 디스플레이라 해서 저 운전석 허공에 보면 거기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속도 숫자가 나오는데 75.키로, 밑에 네비게이션도 같이 떠요. 집사님이 ‘보세요.’ 해서 보니까 ‘안 보이는데.’하니까 당겨서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보니까 거기 떡 보이는 거예요. 이 차가 기능이 전자 차가 260까지 전자가 있는데 그런 거 처음 봤어요. 이 차는 자기가 엉뚱한 생각하다가 앞 차를 받을 것 같으면 자동적으로 안전벨트가 꽉 쪼이면서 다닥다닥 자동적으로 시동까지 꺼져서 운전사를 보호해요. 가격이 1억 6천. 그 허공 속에 문자판이 뜨고 다 뜨는 겁니다. 이 허공은 사람이 손댈 수 없어요. 있었잖아요. 허공에 뭐가 떴잖아요. 잡아보세요. 잡히지 않죠.

여기서 문제는 왜 하나님이 성전 짓는데 왜 저주를 펄럭이면서 저주의 말씀 책이 왜 날아 다녀서 왜 온천지에다 저주를 퍼부어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신명기 27장 8절에 보면 거기 벌써 이미 낌새가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성전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면 성전은 무엇입니까? 성전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같이 기거하는 공간이 성전입니다. 제가 분명히 정의 내려졌습니다. 성전이란 하나님만 계시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과 자기가 뽑아낸 구원받은 남은 자, 오늘 아침에 이야기한 남은 자끼리 같이 사는 그곳이 성전입니다. 그러면 성전은 어떻게 되는가, 거룩한 거거든요. 거룩이 되려면 성전은 소제, 청소를 해야 거룩됩니다.

애들이 철이 없는 경우가 엄마가 늘 청소를 해주거든요. 늘 청소를 해줘요. 애들은 맨날 어지르고 아가씨들은 자기 방에 가면 옷 다 벗어놓고 몸만 빠져나오고 나중에 외출하고 나서 아가씨 방에 가보면 온 천지에 쓰레기고 머리카락이고 머리카락이 다 고무줄같이 다 늘어져 있고 장롱에 있는 옷은 다 벗어나 던져놓고 그걸 자기 딸은 알아요. 내가 나중에 외출하고 돌아오면 번쩍번쩍 깔끔하게 엄마가 다 치워준다는 것을.

그런데 아가씨가 모르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시집을 가면 본인마저 치워버린다는 사실, 딸 치웠다 하잖아요. 보통 우리 청소는 나 빼놓고 치우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도 나가라. 언제 너도 나가.‘ 할 그 시점이 바로 성전이 이루어지는 시점입니다. ’더러운 너도 나가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주를 이야기하는 것은 저주 안에서 우리 인간이 저주 안에 들어오면 뭐로 바뀌느냐, 육신으로 바뀝니다. 육신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어떤 장치에 말려 들어가느냐 하면 육신이 되었다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그 장치에 우리는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저주가 임했다. 우리는 저주 앞에서 나는 인간도 아니고 흙에 불과해요. 그걸 사도바울은 육신이라 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우리는 통고 받으면서 성령이 온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인간을 육신으로 바꾸고 그 육신을 육 있는 몸으로 오신 예수님의 육신의 몸에 의해서 바꿔치기 해서 그리스도 몸 안에서 성령이 하늘에 속한 천사 같은 사람이 되는 그 작업에 말려들어갈 때 이미 성전 작업은 개시가 된 겁니다. 시작이 된 겁니다. 그래서 그 개시의 작업 안에서 우리는 저주라는 낭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의 빛에 우리는 완전히 말이 있어도 고마움에 어떤 딴 말을 못 할 정도로, ‘이렇게 저주 받아야 될 나를 이렇게 환영해 주시고 그 천국에 영접해 주시니 오직 그 피, 주님의 희생 외에는 다른 보물은 저한테 없습니다.‘라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영적인 사람으로 돌변하는 겁니다.

이렇게 영적인 사람으로 돌변할 때 그것이 사람의 능이 아니고 사람의 행함이 아니고 예배당 짓는 것도 아니고 손수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지어지는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진짜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략이고  작전인 것을 우리는 미처 모르고 우리는 방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방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맘껏 우리를 육신 되게 하심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눈에 띄게 하는 그러한 사랑을 만끽하는 그래서 하나님이 참 인자하신 파괴자란 사실을 점차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