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2013년 11월 3일 본문 말씀: 스가랴 5:5-11
(5:5)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5:6)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이니라 하시고 또 이르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5:7)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니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5:8)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
(5:9)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5:10)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니
(5:11)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에바는 됫박을 말합니다. 스가랴 선지자에게 이 됫박을 보이시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여인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납으로 된 뚜껑이 덮이게 하십니다. 이 광경을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게 현실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이런 내용이 담길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노래방을 좋아하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연속극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 여인을 됫박에 갇히게 하는 현실을 끌어당길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나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드높일 현실 외에 다른 현실에 눈가지 않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리어 우리의 현실이 현실이 아니라는 쪼로 고발하시면서 이 본문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현실은 이미 납이라는 무거운 뚜경 아래에 갇혀있어야 될 현실이며 그 현실은 실상은 그 됫박이 이동해서 안착되는 시날 땅, 곧 영원히 멸망당한 도성인 바벨론에 운명을 함께 해야 될 현실이라는 겁니다.
사람을 가두어놓는다는 것은 곧 사람의 자기 판단과 인식은 주변의 환경과의 내부적인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한 것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가 살겠다고 덤벼든 그 세계로 인하여 오히려 자신들이 죽게 됩니다. 인간성도 파괴되고 열심히 바르게 살아보고자 해도 다 헛수고가 됩니다. 급기에 자신이 당한 만큼 후배들이나 남들에게 복수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변의 환경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인해 죄 아래 갇혀 있는 형국이 됩니다.
사람들은 죄를 모릅니다. 그 대신 죄라는 것을 경험상 파악하고자 합니다. 어느 세월에 죄를 다 경험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평생을 죄지어도 죄의 실상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직도 자신은 죄 아닌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음을 믿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일말의 희망을 갖고 싶은 것은 그것을 천국까지 가지고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에서는 자신의 자존심과 돈을 영원히 잃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13의 말씀, 즉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영원한 것만 천국에서 통용되는데 우리는 여기다가 우리의 자존심과 돈도 끼어넣어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는 자존심과 돈을 배격하십니다. 이러한 경향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찾아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속에 이 말씀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걷어내시면서 이 본문 말씀이 따로 현실을 창안하는 식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현실은 애초부터 현실이 아니었다고 그 허위성을 걷어내십니다. 천에 그려진 그림은 그 천을 걷어내면서 같이 날아가버리는 겁니다. 나의 존재 의미를 최후까지 잃지 않고자 노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됫박에 갇힌 한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해서 하나님의 현실의 일부로 간주해버리십니다.
그리고 이 현실을 신약에까지 그대로 데려갑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말씀현실이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실제 상황이었다는 것을 밝기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두 개의 상반된 현실이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갈아타기를 시도하게 됩니다. 종교 단체의 힘을 빌려서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갈아타기는 모두 실패하게 됩니다.
갈아타기 시도하는 순간은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모으시는 분이 아니라 끊어내는 식으로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0:33에 보면, “무릇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자나 무릇 이것을 타인에게 붓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교인들이 궁하지 않습니다. 기준을 제시해서 그 기준에 맞지 아니하면 누구라 할지라도 다 끊어내십니다. 이 작업의 끝에 가면 모든 인간들은 결국 다 떨어지고 오로지 예수님만 남습니다. 이 방식을 예수님도 실시하셨습니다. 천국을 설명하시면서 포도원에서 일군들이 일하는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아침 일찍 온 사람과 퇴근 직전에 참여한 사람과 비교하십니다. 처음 온 자들의 사고방식은 늦게 온 사람에 의해서 들통나게 만드십니다. 끝에 온 자나 처음 온 자는 동일한 품삯을 제공하는 것이 천국에서는 너무나도 합리적이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 현실에서는 참으로 불합리는 하나님의 처사입니다.
바로 이런 방식조차도 사람들을 떨어내는 방식으로 쓰여집니다. 결국 그 누구도 갈아타기에 성사될 수 없다면 실패의 나락에 빠지게 됩니다. 구원에 실패하는데 이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짜 구원의 능력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쪽의 널빤지에서 저쪽 세계에서 돌출된 널빤지도 옮겨타고자 시도하다가 실패한다면 두 개의 현실세계 사이의 질곡으로 떨어집니다.
바로 그 떨어진 곳에서 십자가의 능력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그리고 구원될 자를 밑에서 바쳐올립니다. 마태복음 11:28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밑에서 밀어올리면서 그 능력 위에 타고 있는 자는 일체 자기 자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실패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원에 실패해야 구원됩니다. 농협에서 수곡수매하면서 끝이 둥근 삽을 쌀 포대기 속에 쏙 밀어넣습니다. 그리고 빼내면 거기에 낟알 몇 개가 실어나옵니다. 결코 둥근 삽을 꽂은채 판매하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십자가는 결코 빼는 법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의 옆구리에 찔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토록 십자가의 진수가 온몸에 확 퍼집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오늘 본문도 완성상태로 담기게 됩니다. 이러면 성도는 두 개의 상이한 현실을 상호 바라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는 사람들은 남들에게 기죽지 않는 방향으로 살고자 합니다. 이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또 다른 현실에 직면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성도는 할 말을 잃습니다. 결코 자기 공로와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않게 됩니다. 오직 이 말씀을 십자가로 완성됨만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고자 하는 것이 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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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06 07:06 |
11강-슥5장5-11(에바)1311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5장 5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16페이지입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이니라 하시고 또 이르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니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여기 나오는 에바라든지, 또는 여인이라든지 이거는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는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 이 말씀 자체가 우리한테는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필요치 않은 말씀으로 느껴지는데 그것은 우리가 구상한 이 현실이 사실은 있으나 마나한 현실입니다.
우리 현실 속에 에바나 한 여인이 있고 두 여인이 있고 이런 게 아니고, 우리가 만든 현실이 이게 아니고, 요게 먼저 있고 두 여인, 에바, 여기서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현실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에 이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가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면서 우리가 생각한 현실을 추방하고 배제하고 흩어버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 하나의 허구다. 라는 것을 벗어버리는 그런 식입니다.
그러면 말씀의 세계 속이 영원히 남는 것이고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사라지는 거죠. 우리가 돈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잘 아는 이야긴데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히 함께 한다는 거거든요. 그럼 우리는 거기다 하나 집어넣고 싶어요.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돈, 혹시 내 자존심, 같이 넣고 싶은데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내 자존심과 내 명예와 내 체면과 내 돈은 믿음, 소망, 사랑이 영원하게 만드는 그 현실은 들어갈 수가 없어요. 둘 중에 하나는 튕겨져 나와야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돈과 자존심과 내 명예와 내 육신으로 갖추어진 현실에서 갈아타기를 해야 됩니다. 윤 덕기 집사님이 교회 올 때 차를 세 번씩 갈아탄다는 거예요. 잘못 갈아타면 엉뚱한 데 갈 수 있겠죠. 401번, 직행 1번, 급행 1번 타려면 갈아타야 되잖아요. 다른데서 오시는 분은.
이처럼 우리도 내가 생각한 현실, 자본주의 현실에서 갈아타기에 실패해버리면 우리는 이쪽 세계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갈아타기, 이쪽 현실을 버리고 저쪽, 성경에 나오는 에바가 있고 여인이 있고 그리고 요 말이 실감나게 만드는 그 현실 속에 갈아타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갈아타는데 우리가 실패합니다.
그걸 제가 울산에서 강의할 때 그렇게 강의했는데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살고자 하거든요. 나라는 존재를 가지고 천국으로 가는 버스에 갈아타는데 이게 천국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가지고 가면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이게 조각조각 깨져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내 존재 가지고 버티다가는 이게 두 세계가 서로 원칙이 안 맞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 갈아타기에 패배하고 실패합니다. 이쪽 발판에서 저쪽 발판으로 뛰어서 갈아타야 되는데 뛰다가 거리가 모자라서 그 중간에 있는 절벽으로 떨어져 버리죠. 절벽에 떨어진 그 실패의 자리가 바로 구원의 능력이 발휘되는 자리입니다.
놀랍게도 실패해야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구원에 실패해야 그게 바로 구원받아야 될 자의 모습 이예요. 실패자가 아니면 이 현실 세계에 우리가 합류될 수 없어요. 구원에 성공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구원에 매일같이 실패해야 돼요. 실패하면 실패한 자를 밑에서 들어 올리게 되면 그 실패한 자는 그냥 일반적으로 들려지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 자랑할 수 없어요. 그냥 공짜로 들려올라가는 겁니다. 이건 세리가 되던 창기가 되던 바람을 피우든 뭐 깡패가 되든 상관없이 밑에서 들어 올리는 힘이 너무 대단하기 때문에 위에는 그냥 죄인의 입장에서 그냥 같이 들어 올리니까 들어 올리는 높이에 따라서 같이 올라가다 보면 그것이 영생의 나라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들어 올릴게.” 내가, 예수님 내가 들어 올릴게. 네가 뜀박질하지 말고 네가 철봉 매달리지 말고, 철봉 매달려야 나중에 떨어집니다.
아까 우리 예배 시간 직전에 장로님이 참, 속에 담긴 참 아픔을 이야기했거든요. 이거 매주 기도해도 다른 교회 같으면 했던 거 또 하면 되는데 전 세계에 생중계 되니까 이제는 기도의 바닥을 쳤다는 거예요. 그래서 했어요. ‘내가 만약 장로님이라면 나는 바닥 쳤다는 기도 내용을 해버린다. 이제 바닥 쳤습니다. 알아서 들으세요.’ 실패했다는 그것이 바로 성공했다는 이야깁니다. 언제 기도해서 성공한 적 있습니까? 우리가. 누구나 자기와 관련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분신이거든요. 누가 하게 되면 자기 마음처럼 아슬아슬해요. 요번에 한국 시리즈해서 사람들 다이어트 많이 했습니다. 이거 맨날 지다 이기고, 지다 이기고 처음부터 이기면 되는데, 삼성 팬들 살 다 빠졌어요. 자기하고 연관된 사람이 뭐하게 되면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됩니다. 특히 제 아내가 기도할 때는 조마조마해요. 저기서 대충 끊어서 예수이름으로 기도 끝내야 되는데, 더 나올 것 없으면 끝내야 되는데…ㅎ
우리가 갖고 있는 현실은 오늘 본문처럼 이 에바라는 것이 이름은 멋있지만 한 되, 두 되, 하는 여인 하나 들어갈 정도의 하나의 되, 측정 기구가 에바인데, 그 에바를 여기에 등장 시킬 때 우리가 생각하는 아침에 눈뜨고 직장 나가는 그 현실 속에는 에바가 필요 없고 여인이라는 것도 필요 없어요. 여인은 술집에 가면 있지, 에바 속에 들어있는 여인은 필요 없습니다. 여인 하나를 측정 기구에다 집어넣고 뚜껑을 덮는데 그 뚜껑이 뭐냐 하면 납 이예요. 무겁다는 말이죠. 덮었으면 이걸 들어 올릴 수 없는 아주 무거운 거예요. 그게 우리 현실에서는 이런 아이디어가 안 떠오는데, 건너 갈아타야 될 저쪽 현실에서는 그게 유일한 현실 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이해한다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현실은 무조건 나한테 이익이 돼야 돼요. 나하고 연관된 사람은 다 잘돼야 되고, 나한테 이익이 돼야 되는데 저쪽 세계는 우리 이익이나 손실 같은 거는 아예 이건 입도 뻥끗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손해돼도 네가 이익 돼도 그게 하나님한테 있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없죠. 그냥 세상 자체가 실패했다 치고 너도 그 안에서 실패한 거예요.
납속에서 여인이 뚜껑에 갇혀 버립니다. 갇혔으면 지하 동굴에 있어야 되는데 여기 또 여인 둘이 나타나요. 오늘 여인 세 명 나타납니다. 여인 두 명이 나타나서 여인에게 날개가 있어요. 날개가 있는 것은 이걸 들어올리기 위한 중력을 이기게 한 날개로 여인을 그 상자 속에 집어넣고 뚜껑은 납으로 덮고 마치 관처럼 만들어서 그걸 들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바람이 일어서 에바를 들고 천지 사이에 들어서 이게 고정돼 있는 게 아니고 어디로 가느냐, 이게 시날 땅으로 갑니다. 11절에 시날 땅이 무슨 땅이냐 하면 바벨론 땅 이예요. 인류 최고의 문명국가로 평가되는 바벨론, 그리고 로마 바벨론, 앗수르, 어떤 문명국가도 이 바벨론이라는 그 범주 바깥으로 못 나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이 세상 자체를 바벨론으로 봐요. 시날 땅으로 봅니다. 그 시날 땅에서 영원히 그처럼 너는 거처를 거기에 딱 안착을 시켜버려요. 날개가 바짝 들어서 안착을 시켜 버린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바벨론 멸망과 동시에 이 안에 있는 여인과 납도 같이 멸망하게 돼요. 이런 식의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만들어 낸 거예요. 이 땅에.
방금 한 이야기가 상당히 황당하게 들리신다면 그걸 신약 적으로 설명하면 약간은 도움이 되겠습니다마는 완전하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설명이 필요하니까. 이걸 신약 적으로 여러분이 복음을 잘 아시니까 약간 이해가 될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스가랴의 내용을 신약 적으로 표현한 것이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죄 아래 가두었다는 요 표현으로 요거 스가랴 5장 5절에서 11절 이야기를 대신합시다. “죄 아래 가두었다.”
그러면 우리는 ‘아! 죄 아래 가두었다.’를 여인 세 명 등장해서 여인 가둬놓고 천사 나와서 들고 시날 땅으로 갔구나. 아이, 죄 아래 가두었다는 쉬운데 뭐 복잡하게 이렇게 시날 땅이 나오고 납이 나오고 대적이 나오고 왜 그렇게 하느냐.‘ 라고 생각하시는데 신약에는 더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죄 아래 가두었다는데 죄가 뭔지를 몰라요.
내가 지은 죄는 죄가 아닙니다. 진짜 죄를 가리기 위한 죄인인 척 했던 겁니다. 죄는요, 우리의 경험의 대상이 안 돼요. 우리의 경험을 넘어섭니다. 착하게 살아도 죽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본인이 미처 알지 못하는 죄를 본인이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 끝은 저주요, 지옥이고 죽음이죠. 평생을 살고 죄져도 죄를 몰라요.
어제 토요일 날 모임에 가면서 거기 죄인들을 만났거든요. 숙모님 칠순해서 식구들 다 만났는데 거기서 연세 80된 고모님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자기가 신성일 만나 봤는데 참 더럽게 늙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신 성일씨가 더럽게 늙었다고 한다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본인은 신성일보다 3살 더 많거든요. 그런데 ‘나도 더럽게 늙었다.’ 하면 이게 내가 납득이 되겠는데 신성일은 무슨 죄를 져서 그렇게 더럽게 늙었고, 본인은 그만큼 죄를 적게 져서 깨끗하게 늙었느냐 이 말입니다. 깨끗하게 늙으신 분은 우리 어머니밖에 없어요. 우리 어머니는 깨끗해요. 세끼 다 챙겨 잡숫고, 목욕하시고 깨끗하게 늙으셨거든요. 그럼 평소에 죄를 안 졌느냐 이 말이거든요.
여인은 우리를 말하거든요. 여인을 그 죄라는 납속에 집어넣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살고자 하는 그 현장이 우리를 죽이는 현장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뛰어든 그 직장이 나를 지옥으로 보내는 직장일 줄이야, 그리고 그 직장 때문에 나는 죽어가겠다 싶어서 거기서 사표내고 과감히 뛰어나온 그 농장 현장이 나를 죽이는 농장일 줄이야.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 납속에 갇혀있는, 이 죄 속에 갇혀있는 세상에서 스스로 나를 살려낼 어떤 방도가 없습니다. 교회 열군데 바꿔도 소용없어요.
머구리 병이라는 게 있어요. 머구리 병이라 하는 것은 한국식 잠수부를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들이 자주 죽어요. 죽는 이유가 사람이 숨을 쉬어야 되는데 숨을 쉬게 되면 거기에 산소도 들어오지만 질소도 들어와요. 질소의 분자가 숨 쉬면서 혈액 속에 섞이게 되게 되면 이걸 물속에서 압력의 급작스런 이동에 의해서 갑자기 뛰어버리면 이 질소가 갑자기 거품이 일어서 온 천지 다니면서 고통을 준다는 겁니다. 그게 머구리 병이라는 거예요. 머구리란 말을 잘 안 쓰는 말인데 옛날 남 대구 정류소 근처 사거리에 가게 되면 머구리 회집 하나 있어요. 어디 가면서 봤어요. 아! 저게 손수 잡아서 낚시하고 회하는 거구나.
내가 살기 위해서 선택한 그 장소가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현실 속에 의하면 그건 바로 됫박 속에서 기껏 몇 걸음 이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자기는 새로운 현실을 마련했다고 자부하고 이젠 살았다고 웃었는데, 그 살았다 하는 그 회사, 그 직장이 나로 하여금 내 뜻에 위반해서 나의 양심에 위반해서 그리고 우리 회사 살리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다른 회사의 정보를 빼내고 다른 회사를 죽이는 그 일에 깃발 들고 설치도록 그렇게 구라와 거짓말 치면서 물건 팔아먹도록 그렇게 하게 만드는 나를 죽이는 그 회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천국 가는 갈아타기를 해야 되는데 그 타러가는 방법은 어떤 방법을 써야 갈아탈 수 있는가? 제가 그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노래 잘하는 내가 되고 싶다.’ 할 때 내가 노래 잘하는 내가 되려면 노래를 불러봐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럼 노래를 불러보면 노래 잘하는 나와 노래 잘하기와 내가 분리돼 있는데 막상 내가 노래를 해보니까 노래를 잘하더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노래 잘하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노래 잘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할 때 우리는 결합이 되는 겁니다.
‘나는 기타를 잘 치고 싶다.’ 할 때 쳐보면 될 게 아닙니까? 쳐보면 곧잘 치니까 역시 앞으로 나는 그냥 내가 아니고 기타 잘 치는 나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바로 그 속임수를 십자가가 와서 그 속임수를 끊어버립니다. ‘이게 어디서 구라치고 있어?’ 나와 노래 잘하는 걸 끊어버리고 기타 잘 치는 걸 끊어버려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갈아타기를 시도할 때 ‘가만있어라. 가만있어.’ 뚜껑 열고 집어내는 건 네 몫이 아니고 예수님 몫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분리시켜야 돼요. 이 세상에서 나는 돈 벌었어. 돈 벌은 나를 돈 벌은 것과 나를 따로 가위로 잘라서 따로 떼 내요. 그 다음에 나는 설교 잘했어. 설교 잘하는 것과 나를 따로 떼 내버리면 이건 죄인 되거든요. 자꾸 죄인 되기 위해서 ‘뭐 나는 주특기가 이거 잘하고 이거는 못하지만 착한 일은 잘하고, 이걸 자꾸 잘라버립니다. 잘라 버려놓고 그 다음에 뭐를 하느냐 하면 방금 이 사실을, 우리는 가치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의 옆구리에다 창 자국처럼 그냥 찔러 넣어버려요.
여러분 추곡 수매할 때 보세요. 농협 직원이 어떻게 합니까? 가을 되면 추곡 수매할 때 동그란 날카로운 칼 같은 그거 가지고 폭 쑤십니다. 우리가 쌀가마라면 아파요. 어디가? 옆구리가. 십자가 진 창 자국처럼. 푹 찍어서 ‘오! 이거 쌀 괜찮네. 이거 느낌 있네. 요거 1등급’ 해서 다시 빼고 그 쌀가마는 일부는 봤지만 전체가 그렇다고 치고 수매하잖아요.
그런데 추곡 수매하는 칼은 우리는 빼지만 주님은 그 측정하는 칼을 쑤시고 그걸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 속에. 그러면 십자가를 집어넣어 버립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떤 인간도 십자가 앞에서는 제대로 죄인 이예요. 십자가가 포함되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 안에서 나는 세상을 보고 세상은 십자가 바깥에서 나를 본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십자가 안에서는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겁니다. 이걸 집어넣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십자가 들어있는 쪽을 추려내요. 골라냅니다.
여러분들이 구약 성경을 우리가 제대로 보면 이게 눈에 보일 거예요. 출애굽기 31장 14절에 보면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라고 돼 있고 그 다음에 출애굽기 30장 33절에도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했거든요. 우리 생각에는 안 그래도 교인 수 없어서 모으려고 애쓰는데 자꾸 끊어내고 잘라내고 축출하고 골라내고 솎아내고, 그래가지고 이놈 빼고 저놈 빼고 하면 남는 사람 뭐 있겠나,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완전히 똥 뱃장이라니까요. ‘싫으면 말고.‘ 하는 식 이예요. 그냥 계속 끊어내고 잘라내요. 그거는 뭐냐 하면 십자가 박힌 자만 골라내는 작업을 지금도 주님은 멈추지 않습니다. 고 십자가 안에 뭐가 응축돼 있는가? 바로 스가랴 5장에서 나오는 모든 현실이 십자가 안에 다 담긴 채로 우리 옆구리에 팍! 찔려 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두 가지 현실을, 어렵지만 요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두 개의 현실을 다 봐요. 이 세상 현실은 남들이 자기 긍정하는 것처럼 나도 덩달아서 ‘나도 너 못지않아. 나도 우리 집 있어. 나도 자가용 있어. 몇 키로 탔어. 나도.’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전부 다 저쪽과 이쪽을 자랑하고 싶은 그쪽과 동일해요.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들 이예요.
그런데 옆구리에 들어온 십자가 때문에, 이 십자가는 스가랴 5장까지 연결된 십자가에요. 모든 성경과 연결돼 있으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속에서 나도 기죽지 않고 싶고 나도 사람처럼 큰소리 치고 싶은데 이 십자가만 생각하면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큰소리 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천국이란 포도원에 가서 일할 일꾼을 모집하는 것이다. 할 때 포도원에 사람들을 모집하는데 10시에 온 사람. 12시, 1시, 오후 3시, 5시에 온 사람이 있거든요. 올 때 골라잡아봐라 이 말이죠. ‘너 어느 쪽 할래?’ 우선 예수님께서 제일 늦게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탁 던져주고 ‘자. 어느 쪽 할래?’ 하면 ‘저 10시에 할게요.’ 10시에 하면 여섯 데나리온을 받으니까. ‘저는 열두시에 할게요.’ 왜, 능력껏 네 시간만 일하면 되니까.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잖아요.
천국은 뭐냐 하면 천국은 장소, 어디 가는 게 아니고, 골라내는 작업 자체가 천국이라는 겁니다. 가짜고 진짜고 골라내는 작업이 천국이죠. 여기서 저기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가 터진 창 자국 속에서 천국은 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주여 십자가로 저로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면서 저를 건져내시는군요.’ 이게 박하사탕 향기가 확! 온몸에 퍼질 때 우리는 손마디 발목 , 뭣을 가지고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자랑하지를 못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교회 와서 자랑하고 목사 앞에서 자랑하는 것은 다 좋은데 주님 앞에서는 자랑치를 못해요. 이게 보통 인간 아닙니다. 꽂혔어요. 십자가에 꽂혔기 때문에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나 이 세상사는 것 같으면 납속에 갇혀 있는, 에바 속에 갇혀 있는 하나의 여인 같은 신세고 몰골이다. 따라서 우리는 갇힌 상태로 죽어 마땅하다. 어디에서? 이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당연히 죽어야 된다. 그런데 죽어야 된다는 이 사실을 우리한테 십자가로 안에서 꽂아놓으니까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알고 있는 세상의 현실이라고 아는 그게 전부하고 알지, 그거 말고 딴 현실이 있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여유가 있다는 그것, 그것은 이미 쳐다보고 내다보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소속은 뭐냐, 십자가 안! 곧 천국 영생, 천국 안에 이미 놓인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을 통해서 주께서 그 복음의 작업은 골라내는 작업은 끊쳐지는 작업은 그 사람을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 하는 거예요.
그래서 루터는 말하기를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다. 만인, 모든 사람이 다 목사다 이 말이죠. 칼빈은 그걸 따로 바꿔서 목사 따로 있다 하지만 루터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 했어요. 성령 받은 모든 사람이. 왜, 그 사람이 똑똑한 게 아니고 그 사람에게 박힌 십자가가 알아서 그 사람을 복음만 전하도록 최종적으로 그거만 전하도록 증거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스가랴 이 5장이 여러분 옆구리에 박혀서 확! 퍼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똑똑하지도 않고 잘나지도 않고 착한 일 많이 한 것도 아니라 새로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꽂히다 보니 또 다른 현실을 둘 다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서는 당당하고 잘났지만 십자가 앞에서 아무자랑도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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