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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7강-조건 지어진 인간(슥3;6-10)이근호131006

아빠와 함께 2013. 10. 6. 17:15

 

조건지어진 인간(스가랴 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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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0-06 15:54 
조건 지어진 인간

2013년 10월 6일                        본문 말씀: 스가랴 3:6-10

(3:6)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3: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3: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3: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상호 어울리지 않는 대상들을 함께 배치해놓으셨습니다. 여호수아, 순, 돌, 순 같은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단 하루에 죄를 사하지 위한 장치들입니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은 죄를 양산하는 공장같은 처지에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죄가 먼저 선행되어야 죄 씻음을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를 씻을 수 없고 죄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을 다녀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건축가들은 마천루(높은 건물) 안에다 모든 것들이 구비되어서 인간에게 여구한 모든 것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일 생활터전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래층에는 산부인과가 자리잡고 그 위에서 보육시설, 그리고 그 윗층에는 유치원과 학교를 세우고, 그 윗층에는 각종 회사와 주거지를 마련하고 그 윗층에는 각종 편이시설과 헬스클럽과 그리고 간편한 농토와 채소재배, 모험을 원하는 자들에게 암벽등반 코스와 여름에도 스키를 타고 싶다면 스키장도 만들고 윈드서핑장까지 구비하고 맨 꼭대기층에는 공동묘지와 교회까지 만들면 된다는 겁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 건물에 다 집어넣고 평생토록 건물 밖으로 나올 일이 없게 하겠다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 자기가 살던 현실 밖으로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입니다. 피조물이란 이처럼 피조 세계 밖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그 폐쇄공간은 그냥 지내는 공간이 아니라 저주가 둘려쳐지며 창세기 4장에서 그 안의 세계가 죄의 지배로 본격화됩니다. 가두어놓고서 죄의 통치를 받게 하는 식으로 세상은 진행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놓으시고 관찰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눈에 박히 일곱 눈이 바로 그 기능을 표현합니다.

일곱 눈이란 스가랴 4:10에서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여호와의 관찰 범위에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창조 세계의 관찰은 창조의 본디 목적과 연계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 목적인 신약 시대나 알려집니다. 에베소서 1:7-10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분의 피’ 중심으로 세상의 창조가 완성됨으로 이미 확정난 것입니다. 이 완성을 위하여 예수님에게 피흘릴 조건으로서 이 세상은 분주하게 움직여져야 합니다. 곧 죄가 계속 유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유발된 죄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시편 73:1-9에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미끌어질 뻔 했다는 겁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어설펐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당해야지만 성도의 안목으로 죄가 파악됩니다. 악인이 마치 더 잘되는듯한 상황을 접하지 않고서는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한 환상을 바뀔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11-12에 보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욕하는 세상이 이제는 성도를 노리고 들어옵니다.

성도가 같이 수모를 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이 내리시는 복입니다. 이 복은 이 세상을 사시다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신 적이 있던 바로 그 분의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복이 되는 이유는, 세상 밖에서 세상을 제대로 된 안목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가는 방식이 바로 얼굴을 마주 보는 경우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얼굴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들어오시면서 취하시는 방식, 곧 기능입니다. 곧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여기는’ 바로 이 방식이 죄인을 접하는 하나님의 방식 맞습니다.

바로 은혜와 긍휼의 객차에 하나님의 각가지 율법들이 담기게 됩니다. 제사이든 실생활 법이든 그 자체가 모두 다 은혜와 긍휼입니다. 그 제사법 중의 하나가 바로 하루에 온 죄를 다 씻어준다는 대속죄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6:29에 보면,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한 날을 위해 다윗 혈통을 통해서 ‘이새의 순’이 맺힙니다. 그분이 바로 죄악된 세계에 침투하기 위한 메시야입니다.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일곱 눈을 가지고 죄를 말씀하시고, 죄를 죄되게 드러나게 하시므로서 이 죄악의 최후의 반발은 ‘메시아 죽이기’에 성공하게 만듭니다. 이로서 피 중심의 세계가 성립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처음부터 피 중심으로 돌아감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강-슥3장6-10(조건 지어진 인간)1310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3장 6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5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사람 등장하죠. 여호수아, 하나님 등장하죠. 하나님, 그리고 돌맹이도 하나, 돌도 하나 등장하는데 그 돌에는 눈이 일곱 개 박혀 있는 돌이고 또 여기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내 종 순, 새싹이죠. 새싹 비슷한 호박순 같은 거. 고거 꺾어버리면 호박 자체가 안 열립니다. 문득 그게 생각나네요. 그거 여기 나오죠. 이러한 배치들, 이러한 장치들, 뭣을 설명하느냐 하면 죄가 하루에 싹! 사라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런 배치들이 깔려있는 겁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목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하고 달라요. 따로 있어요. 특히 눈이 일곱 개라. 눈이 일곱이라는 것은 7이라는 숫자가 여러분 성경에 나오거든 아! 창조라 하는 것이 끝난 것이 아니고, 창조는 이미 끝났기 때문에 창조의 원칙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천지 창조할 때 그때 없었잖아요. 천지 창조할 때 우리 후손들은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있어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천지 창조할 때 천지 창조했던 그 분명한 원리가 있고 그 이유가 있을 텐데 우리는 창조된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누리고 즐기고 해가 그냥 있는 줄로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 해가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해가 없는데 오늘 아침에 떴을 때는 우리가 굉장히 기이하게 여겨지겠죠. 저 덩어리가 왜 생겼지? 저 별이 왜 있는 거야?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말이죠. 다 이유가 있어요.

해가 있고 별이 있고 사람이 있고 다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신약에 오면 이렇습니다. 죄를 단 하루에 제거하기 위해서 천지 창조가 배경으로 세트장으로 이렇게 설치돼 있다는 겁니다.

너무 비약적인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에베소서 1장에 보게 되면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한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세상 죄를 씻은 그분을 중심으로 세상을 통일하게 하겠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게 하겠다. 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그 계획을 해놨어요.

문 씨 성을 가진 문선명이란 분이 있는데 그분이 통일교를 창시할 때 본문이 에베소서 1장 10절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통일하겠다는 이 뜻이 뜻이다. 라고 했는데 그리스도 통일한 게 아니에요. 문 씨 재벌로 통일했죠. 문 씨 가문으로. 도대체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라고 언급하면서 자기도 따라서 붙어가니까. 그리스도는 하나의 핑계고 말 뿐이었죠.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인지 모르겠고 나는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게 강조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겁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란 이 말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있지는 않다. 그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딱 하나에요. 이런, 이런 배치물들이 어떻게 해서 그게 움직여서 단 하루에 죄가 없어지느냐? 단 하루에 죄가 없다는 것은 9절에 나오죠.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그러면 이 일곱 눈이라 하는 것은 이건 성령님께서 살펴보는 건데 스가랴 4장 10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나님께서 관찰하시죠. 실험실에 쥐 넣어놓고 실험자가 관찰하듯이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하얀 쥐로 풀어놓고 그 하얀 쥐가 설쳐대는 것을 cctv로 다 찍어서 그걸 관찰하시면서 그렇게 죄를 양산하시고 양산된 그 죄에 대해서 단 한 번에 그것도 예수님의 피로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 피 흘림 중심으로 이 세상을 다시 건설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이 구라가 아닌가? 이 계획이 인간이 지어낸 게 아닌가? 라고 의심하신다면 예수님이 오셨다가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요 십자가 사건이, 강감찬이나 이순신 장군이나 클레오파트라나 옥타비아누스, 이런 세상 역사가들과 완전히 차이가 나요. 맹자, 공자, 부처, 김일성. 김일성 아직까지 죽었잖아요. 안 살았다 이 말이죠. 루터 킹 목사도 종교에서 뭐라 하지만 아직 죽어있어요. 로마의 카이사르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렇게 외쳤지만 그 소리뿐이고 지금도 죽어 있잖아요. 세례요한도 죽었죠.

하지만 지금 모드 활동은 주께서 살아계시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계시는가? 창조의 원리를 갖고 창조의 원리를 나누어주면서 꽃가루 뿌리듯이(무대에 가수 있으면 꽃가루 뿌리듯이) 창조의 원리를 뿌리면서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그 창조의 원리가 뭐냐? 단 하루에 죄를 사하여 주는 거예요. 이게 진리에요. 시편에 보면 안식일 지키라고 돼 있어요. 물론 출애굽기 민수기에도 나오지만, 시편에 보면 “그날은 거룩한 날이라 그 안식일을 지켜라” 이 안식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 안식일을 지켜라. 안식일이 중요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안식일 날 죄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단 하루에!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성전은 유지된다. 영원하다. 성전이 왜 있습니까? 그 성전 안에 있는 일어난 기능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죄가 단 하루에 사라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가 없으면 안 돼요. 죄가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흘리지를 못해요. 죄가 있고 그 죄에 대해서 죄인이 스스로 죄를 해결 못해야 되고요. 그 죄를 그냥 해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를 흘림으로 없어질 때 그 피 흘린 그분이 우리 구주가 되셔서 온 세상 모든 만물은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은 창조의 세계는 본래 제 자리를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이렇게 태어난 겁니다. 그걸 증거 하고 그걸 감사하고 기뻐하고 천국에서 그걸 영원토록 드높이라고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꼭 제가 이야기해놓고 자꾸 의심 드는 것이 의심 병인지 모르지만 ‘그거 구라 아닙니까?’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이게 구라가 아닌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안다니까요. 사도바울이 십자가 하나만 해도 충분하다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 뜯어보면 신구약 다 들어있거든요. 예배당 꼭대기 왜 십자가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 문제 핵심을 알고 가셔야 돼요. 이 핵심이 뭐냐 하면 어떻게 이러한 배치들이 단 하루에 죄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우선 죄가 무엇인가를 먼저 말씀드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그 두 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죄가 무엇인가, 여기 여러 가지 표현될 수 있는데 다른 표현이 시편 73편에 나옵니다. 거기에 전형적인 죄 모습이 나오는데 읽으면 지루하니까 내가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어떤 신앙인이 기도하기를 ‘내가 참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요?’ ‘내가 미혹 받을 뻔했어요.’ ‘왜요?’ ‘하나님 안 믿는, 복음 모르는 악인이 모든 일에 만사형통해서 그걸 보고 쭈르륵 미끄러질 뻔했습니다.’라고 했어요. 바닥에 참기름을 발라 놓은 것 같아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거만한 자와 멸시하였습니다. 저희가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우리 시나리오로는 안 돼요. 시나리오대로 되려면 권선징악이 돼야 되거든요. 악한 인간은 결국에는 죽고 구박 받던 그 며느리가 시집에서 구박 받지만 기어이 나중에 자기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고 재벌회사 부회장 접수하고 그게 결혼의 여신이거든요. 뭔가 이렇게 끝이 잘 돼야 드라마 봐도 재미가 나는데 그 찬란한 멋진 장면을 보는데 끝까지 잘 되네. 끝까지 잘 돼요. 아! 하나님이 없는 모양이라. 맞아, 맞아. 하나님 없어.

진짜 하나님이 계신다면 악한 놈은 무조건 망해야 되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은 무조건 잘 돼야 될 텐데 이건 반대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죽는 때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죽을 때도 강건하고 타인과 같이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고 그러니 교만이 저희 목걸이고, 목걸이가 있는데 진주 목걸이가 교만 목걸이고, 강포가 저희 입는 옷이며, 갑이 자꾸 을을 핍박하고 강포죠. 그리고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보톡스를 너무했어. 요새는 보톡스 말고 찌르는 게 있답니다. 보톡스를 너무 맞아서 눈이 퉁퉁 부어서 눈이 솟아져 나왔어요. 저희 소득은 마음에 지나며, 소득이 너무 높아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자기가 잘 된 것을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을 측정하게 됩니다. ‘저 인간 저주 받았을까, 저게 복 받았을까. 아이구, 저거 봐, 저주 받은 거 맞아. 하나님 믿어도 저주 받았어. 왜? 나처럼 안 됐으니까 저주 받은 거 맞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요게 바로 죕니다.

제가 지금 죄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너무너무 잘 되는 거. 범사에 잘 되고 만사에 형통한 것. 요거 죕니다. 제가 로마서 8장 설교하면서 이게 성도한테는 잘 되는 게 환란이라 했죠? 모든 게 잘 되는 게 환란이고 핍박인 겁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에 보면 ‘복이 있나니’ 마지막 복이 뭐냐 하면 “너희가 내 복음으로 인하여 욕을 얻어먹으면 그게 복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복음 때문에 욕 얻어먹은 지가 언제 적 이야깁니까? 5년 전 이야긴지 기억도 안 나죠. 우리는 남한테 욕 안 얻어먹으려고 그렇게 애쓰는데 성경에서는 그거는 복을 피해가는 것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복을 받으면 반드시 이 땅에서 욕을 얻어먹게 돼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냥 욕 얻어먹으면 안 되고 복음 때문에! 예수님 자신의 의 때문에, 예수님의 의! “예수님 때문에 욕을 얻어먹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복 받았느니라” 대접으로 복 받았다 이 말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 방금 이야기한 시편 73편 요거 기억해 놨다가 이상한 소리 하는 사람 있으면 이 이야기해주세요. 뭐 집안에 우환이 있기 때문에 벌 받았다 하는 사람에게 해보세요. 이건 악인들이 오히려 더 잘된다는 세상.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께서 한 번에 죄를 없애주기 위해서 죄를 키우시고 죄를 생산하는 그 마당으로 이 세상을 활용하신 겁니다. 이 세상에 참한 마귀하나 키우시죠. 마귀를 키우고 거기에 마귀의 쫄따구들을 열심히 활동케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두 번 다시 천국을 볼 이유가 없게 만드는 세상으로 전환시킨 겁니다.

어떤 글에 이런 글을 봤어요. 마천루, 100층 이상 건물을 마천루가 하는데 그 마천루 안에서 그 지하실부터 산부인과가 있어요. 지하실에서 애가 태어나서 2층인가 3층보면 거기에 직장이 있고 그 위에 학교 있고, 모험을 즐기고 싶다면 175층에는 암벽 등반하는 데가 있고 여름에 스키장 보고 싶으면 198층에 스키장 만들어 놨고 겨울에 뜨거운 물에 수영하고 싶으면 215층에 수영장 만들어 놨고 완전히 마천루 안에서. 그리고 죽는다. 그러면 275층에 공동묘지 마련해 놨어요. 한 건물에 모든 것을 갖추어 놓은 것, 미래의 마천루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나서 그 안에서 살다가 그 안에서 죽게 만들은 거죠. 일종의 설국열차와 같이 밖에 나갈 필요가 없는 것, 그게 인간들이 사는 이상 세계. 하나님께서 그걸 만들어 놨어요. 창조 때 그렇게 만들어 놨습니다. 피조세계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천국요? 그 안에 천국 다 만들어 놨는데. 교회? 그 안에 교회 있는데. 성당도 그 안에 있어요. 종교도 그 안에 있고. 기도할 처소 다 만들어 놓고.

애로점이 있다면 그 세계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죽으면 죽었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적이 없다는 것이 아! 인간의 치명적인 이게 약점입니다. 죽어서 사흘 만에 죽어서 찾아온 적이 없다는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되게 손해보는 느낌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신이 되고 싶다. 멋있게 살고 싶다. 해도 우리는 마천루에서,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빠져나간 세계가 어떤 세계이냐를 누구한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사람이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공자? 맹자? 어디도 없어요. 왜, 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죽어봤어? 죽어봤어? 죽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주일학교 애들 오늘 설교가 이거였거든요. 예수님이 있는데 마르다가 음식을 해줘요. 음식을 해주느라 바쁜데 이 싸가지 없는 동생 마리아는 마르다가 음식 두 가지, 세 가지 하느라 불에 올리고 한 쪽에서는 지짐 굽고 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까 언니가 보다, 보다 못 봐서 저 싸가지 없는 것 버릇 고치자 싶어서 ‘예수님, 동생 보고 내가 손이 모자라니까 도와주라고 예수님이 충고하세요.’ 하니까 예수님이 휙~ 돌아보시면서 ‘마르다야, 너는 네가 음식 만들어 줘서 나한테 대접하는 그걸로 네가 만족하려고 하지만 이 마리아는 내 입에서 내가 만든 내 입에서 나온 말씀을 거저 얻어먹기만 하는 그것이 나는 왜 이렇게 예쁜지 모르겠다. 네가 솜씨 내서 하는 음식보다도 내 말을 듣고 있는 이것이 오히려 옳은 선택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미 갔다가 오신 분이예요. 이미 하늘나라 사시다 오신 분이기 때문에 기껏 음식 먹어봐야 그 음식이 그 음식이고, 그 음식이 그 음식이고, 잔뜩 기대하다 보면 그 맛이 안 나오고 그렇잖아요. 제일 좋은 음식은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라고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6.25 때 건빵 두 개 가지고 전우들끼리 나눠먹는 음식,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수백 번 얘기했어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눈이 밤 땡이 되도록 솟아나서 풍족하게 사는 게 목적이 아니고 그게 축복이 아니고 한번 이 세상 빠져나가 봤으면 좋겠다. 빠져나가든지, 아니면 빠져나가신 분과 한번 만나봤으면! 이 땅에서. 이 속에서 이 땅을 보지 말고 밖으로 빠져 나와서 세상을 이렇게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그게 축복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 있습니까?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하루에 모든 죄가 날라 간다는 사실과 관련성이 있어요. 그게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모세가 세상 버릇을 그대로 발휘하게 돼요. ‘하나님, 하나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싶습니다. 뒷모습 말고.’ 왜냐 하면 얼굴을 봐야 내가 봤다고 할 수 있거든요. 사람이 누굴 봤을 때 뒷모습 보고 봤다 하면 안 돼요. 정면을 봐야 봤다 할 수 있죠.

옛날 노인네들 선 볼 때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도 정면을 안 보여주고 뒷면만 보여주고 결혼해서 나중에 손해 봤다 하거든요. 옛날에. 지금은 안 그렇지만. 지금은 보고 해도 갈라서고 하지만. 옛날에는 뒷모습만 본 거예요. 제대로 본 게 아니에요. 그래서 모세가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정면을 봐야 이게 만난 거고 본 겁니다. 라는 식으로 ‘하나님, 정면으로 얼굴 한번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중요한 말씀 나옵니다. 이쪽 세계에서는 얼굴을 봐야 그게 믿을까 말까가 선택이 가능하겠지만 하늘나라에서의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네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기능, 어떤 일이 있어요. 그 일속에 네가 말려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일에 말려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 쏟아지는데 그 일이 뭐냐 하는 겁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에게는 긍휼히 여기고 내가 은혜 줄자에게는 은혜를 준다. 볼 생각하지 말고 가서 기다려라. 은혜 너한테 갈 것이고 긍휼 너한테 갈 것이다. 그 은혜와 긍휼이 뭐냐 하면 단 하루에 우리의 죄가 씻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긍휼과 은혜에 따라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줄줄이 하나님의 십계명과 그리고 시민법과 제사법과 온갖 법들이 하나님이 죽 내미는 사다리를 타고 미끄럼틀, 긍휼의 미끄럼틀, 은혜의 미끄럼틀을 타고 제사제도가 내려오니까 제사를 드릴 때 제사 드려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제사 드리면서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피 흘림의 주목할 때 ‘아! 이 세상에는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구나.‘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파악하죠.

요것이 신약시대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전했고 아무도 그걸 못 알아들었고, 아침에 했죠.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알아듣지를 못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지었고 거기다가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욕하는 죄까지 추가해서 지었고 그 죄가 십자가 죽음을 당했고 사흘 만에 다시 와서 성령을 주실 때에 그게 바로 은혜요, 모든 것이 그 십자가 은혜요, 긍휼이라는 것을 사도바울은 알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도 알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편지를 써서 이 내용을 급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택한 백성에게 모든 걸 전하는 겁니다.

모든 죄는 7월 10일 날, 레위기거든요. 그 은혜를 따라오는 레위기 16장 29절에 보면 7월 10일 날 죄의 속죄일에 단 하루에 날라 가는 것처럼, 이것이 신약에 오면 어떤 특정 날이 아니고 단 한 분, 예수님을 통해서 다 날라 간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순, 호박순, 새 싹, 그게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어떤 순이 나올 건데 그 순이 열매 맺으면 십자가가 되는 거예요. 부활 되고.

그러면 우리는 내가 빠져나가지 못한, 내가 빠져나갈 수 없었던 이 세상을 빠져 나와서, 애굽같은 세상을 빠져나가서 그리고 그리던 그 하늘나라, 상상도 못했던 그 천국에 우리는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언약이라 하고 이 언약을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예수님은 새 언약으로서 십자가를 우리에게 제시했고 그 십자가에 모든 담긴 내용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성령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하나님의 계획이 치밀하고 쓸데없는 게 하나도 없는데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도 쓸데없이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증인으로 사는 그러한 배치 물로서 아직도 숨 쉬고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