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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12강-네마리 말(슥6;1-8)이근호131110

아빠와 함께 2013. 11. 10. 19:30

 

 

네 마리 말(스가랴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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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1-10 15:31 
                    네 마리 말

2013년 11월 10일                        본문 말씀: 스가랴 6:1-8

(6: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 산이더라

(6:2)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6:3)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6:4)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6: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6:6)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흰 말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쪽 땅으로 나가고

(6:7)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6:8) 그가 내게 외쳐 말하여 이르되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 하더라

세상을 묘사하는데 있어 하나님, 곧 선지자의 방식은 우리 자신들이 세상을 묘사하는 방식과 심한 대조를 이루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데 힘들어합니다. 이런 대조가 의도적으로 성립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취지가 결코 세상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세상 중심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들은 ‘나 위주’에서 시작해서 줄곧 ‘나 위주’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궂은 날씨가 계속 되더라도 자기가 여행하겠다고 마음먹은 그 날은 활짝 개여야 하나님께 감사할 마음이 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억지로 감사하고 싶어도 심정으로 감사가 안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중심처에서 나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친히 마음먹고 세우신 곳입니다. 곧 성전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이해코자 한다면 우리의 중심처를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점에 이사하는 그 복잡성으로 인하여 계시해석은 여전히 난관들을 만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지금 나 위주의 중심처에서 하나님의 중심처인 성전으로 옮겨가는데 있어 여전히 우리의 의중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래된 껌을 벽에서 떼어낼 때, 껌은 그 저항적 성질을 여지없이 보여주듯이, 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곱게 이동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이 버팀의 속사정을 오늘 본문은 보여줍니다. 즉 성전이 새롭게 세워지는데 있어 각각지 요소들이 그 본성과 본심이 노출되는데 거기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강제력도 멈춤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 중심으로 평소에 살기에, 기도 응답이 안된다고 답답해하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정해놓은 중심처에서 지금도 분주하고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 중심처로 옮긴 사람만이 그 현실성에 동감하게 됩니다. 동시에 기존에 자신이 고집하던 현실은 옳은 현실관이 아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성전은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는 질문이 가능한 것은 옛언약시절 뿐입니다. 새언약 시절에서는 ‘어디에 성전이 있습니까’가 아니라 ‘누가 성전의 완성입니까?’라고 물어야 옳습니다.

옛언약은 시간과 공간 내부에 성전과 그 기능이 잡혀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성전은 건축구조물로 실제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성시시킨 제사드리는 시간도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언약 안에서는 모든 만남은 우연입니다. 필연적으로 만나게 하는 그 어떤 제도나 장치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친히 하나님의 신으로 지은 성전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제자들은 성령받고 난 뒤에 이 변천을 알았습니다. 성전, 곧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몸은 인간들이 호출한다고 자동적으로 납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성전이 우리 인간에게 납실 필요가 없는 이유는 성도는 이미 성전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전으로 인하여 기존의 성전은 미련없이 폐기되어야 하고 그 환경도 같이 폐기 되어야 합니다. 환경마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전 존재가 성전 밖으로 확산되는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는 말이 됩니다.

즉 세상 운명은 성전 운명과 같이 진행됩니다. 마태복음 24:6-8에 그 증거가 나와 있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한 때 성전이 있었고 그 성전 덕을 보면서 신의 축복을 독점했다고 자부한 유다나라가 성전도 불타고 나라도 불탑니다. 성전 파괴에 따른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새언약 시절에는 성전개념이 성전 밖으로 확대됩니다. 그렇다면 성전 안 뜰에서 하나님의 저주받을 받아내고 생산해낸 놋제단은, 오늘 본문에는 ‘놋산’이라는 식으로 ‘저주받을 제국의 참담한 운명’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이 스가랴 선지자 때는 바벨론을 두고 말합니다. 스가랴 4:7에 보면,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메시야가 지상에 왕으로 등극하는 그 때가 되면 그동안 성전 활동을 모독하고 방해한 큰 산으로 작용하던 바벨론은 평지가 되어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작업들은 모두 한 지점에서 쏟아지는데 그 지점과 새롭게 새로운 성전의 중심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있어 심판을 행사하던 천사를 말에 비유합니다.(계 6장) 이 말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바람’입니다. 그런데 그 바람은 색깔이 각기 다르고 방향도 두 패로 달리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성전에 대한 적대적 공경이 남 북, 두 방향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북은 바벨론 제국이요 남은 애굽 제국입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나온 출처는 곧 심판이 감행한 권리가 있는 분이 계신 곳, 곧 차기 완성된 성전입니다. 이곳이 계시의 중심처입니다. 말들이 나오는데 활달하고 멈추지 않는 기능력을 표현한 말입니다.

놋산 사이에서 나왔기에 이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실행자들이 되고 그들은 떼를 지어 움직입니다. 말 색깔이 다른 것은 동일한 의미에서 죄라고 해도 죄란 각 기대와 환경의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죄가 새로운 면면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란 새롭게 일어나는 상황에 맞춤 식으로 적용됩니다.

이는 곧 우리네 인생을 말해줍니다. 정신차린다고 죄가 몽땅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번갈아가며 등장됩니다. 그럴 때마다 성전의 놋제단, 새언약 때는 십자가의 깊은 면들이 덮쳐서 적절한 심판을 행사하므로서 성도로 하여금 오로지 하늘에 있는 성전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위해 먼저 이 지상을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사셨던 예수님이 먼저 가 계십니다.

모든 이를 다 죽이는 천사들, 그것은 긍정적 의미를 가지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나신 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능력이 발휘되는 장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늘 깊이있게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11-13 10:07 
12강-슥6장1-8(네 마리의 말)1311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6장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17페이지입니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 산이더라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흰 말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쪽 땅으로 나가고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그가 내게 외쳐 말하여 이르되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해되고 안 되고는 이거는 우리 소관이고, 어쨌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가 이해 안 되는 이 말씀을 피해서 하나님께 접근할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이해가 안 되는 이 말씀을 앞장세워서 그 안쪽에,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만남에서 이 말씀도 같이 그 현장에 같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 돼요.

옛날에 소개팅 할 때 중매쟁이도 함께 왔잖아요. 지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매하는데 이 말씀이 우리와 함께 있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받아야 될 처지에 있기 때문에 모른다고 한다는 것이 하나님 아는데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알아야 되겠죠.

그렇다면 알고 싶은데 방금 이렇게 죽 읽었습니다마는 이건 경마장도 아니고 왜 말들이 이렇게 날뛰고 있는지 왜 하나님께서는 날뛰는 말들 가지고야 하나님을 설명 해야만 하는지, 이 말들 없으면 하나님이 왜 설명이 안 되는지, 그런 것들이 먼저 궁금해서 나오거든요.

이러한 궁금증은 위치가 잘못돼서 그래요. 위치가 내 중심으로 살다 보니까 이렇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중심을! ‘잠시만요, 우리 중심을 옮기고 갈게요.’ 성경의 모든 중심은 내 중심이 아니고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중심을 향하여 이 스가랴 이 말씀이 집중하여 그곳을 달려가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지묘동에 사는데 지묘동 중심이 아니고, 지묘동을 중심으로 보니까 말들이 왜 설치는지 모르는 거예요.

예배 마치고 곧장 여러분이 댁으로 가시잖아요? 여러분이 댁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의 습관화 돼 있는 평소의 관습이 뭐냐 하면 ‘세상, 세상해도 중심은 내가 사는 내가 기거하는 이 집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니까 성경을 봐도 우리 집 잘 되기를 원하고 내 아파트 값 올라가기를 바라고 그렇죠.

그런데 중심 자체가 우리가 변경이 돼야 됩니다. 중심 자체를 변경을 하는 걸 가지고 아주 고상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고상하게 이야기해서 인간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우리는 사람 시선이 너무 따가워요. 그래서 항상 시선이 우리는 스트레스가 되는 겁니다. 제발 남들이 날 칭찬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스가랴 6장 말씀에 의하면 네 중심부터 옮기면 될 걸, 자꾸 너는 그 자리에 머물려고 하고 너 좋은 쪽으로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을 찾다 보니까 가짜 하나님만 생각되지, 진짜 하나님은 지금 다른 곳에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데, 우리는 기도해놓고 ‘왜 하나님이 조용하지?’ 하나님은 안 조용해요. 말씀대로 지금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엉뚱한 곳에 가서 하나님 찾으니까 거기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으니까 조용한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중심은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게 되는데 인간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은 현재 내 자리 말고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되는 겁니다. 그곳이 뭐냐 성전입니다. 성전! 그래서 이 스가랴 6장의 계시는 앞서서 이야기한 성전을 새로 지으라는 새롭게 지어질 그 성전의 그 공간, 장차 메시야가 오시는 그 공간, 그 공간에서 있을 때 비로소 예언의 말씀은 비로소 실감나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어진 성전이 어떤 성전이냐 하면 진짜 벽돌로 만든 성전이거든요. 실제로 건축 구조물로 실제로 있는 성전 이예요. 그런데 우리가 복음 알았다고 우리 아는 상식에 의하면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은 우리는 그리스도 몸이 성전이다. 그렇게 되거든요.

자, 중심을 찾아라. 중심이 어디냐? 성전이다. 성전은 경도가 어디고 위도가 몇 도고 좌표 상 어디쯤에 있느냐, 가보자, 여행사 통해서 가보든지 가보겠다. 그러면 신약에서 그거는 쓸데없다. 왜, 성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몸이 성전이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는 ‘가도 소용없네.’ 왜 소용없는가? 마태복음 24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난리와 닌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라고 돼 있어요.

지금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이 세상 자체가. 재난과 재난, 전쟁과 전쟁. 수능 앞두고 채점하는 그 과정부터 전쟁 이예요. 학부모들 와서 ‘이 점수 가지고 어디 갑니까? 우리 애는 가채점해서 이정도 점수인데 어떻게 됩니까?’ 내가 보니 전쟁입니다. 좋은 대학은 정원수 줄이고 좋은 의대도 줄이고 한의과 정원수도 줄이고 약대도 줄이고, 돈 되는 좋은 직업은 정원수 줄이고 전쟁 이예요.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이게 성전 자체가 건물로 지은 그 건물이 가짜 성전이었습니다. 있어야 되는 건 맞는데 오래 갈 성전은 아니었어요. 그 성전이 무너짐으로써 이 지구상, 우리가 현실이라고 버티고 있는 이 세상도 이제는 서서히 철거작업에 들어서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진이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뭐 괜히 일어난 줄 압니까?

세상은 멸망당해야 되고 새로운 성전은 일어난다. 이 내용이 바로 새 언약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전이 건물로 돼 있는 것은 그 당시에 다윗 언약 때는 성전이 실제로 건물로 있어야 하기 때문에 건물을 지었고, 그 다윗 언약이 새 언약으로 넘어오면서 건물이 성전이 아니고 사람의 족보가 성전이다. 아무나 족보가 아니죠. 다윗 가문이 바로 성전이 된다. 하나님 아들이 된다. 이렇게 아주 난해한 말씀을 하시면서 성전 파괴 작업에 도입되었고 그 파괴 작업에 동원된 자들을 오늘 본문에서 4마리의 말이 나오는 겁니다. 하여간 초반에 들어가는 것도 이렇게 길어요.

 왜냐 하면 중심이 항상 우리 삶의 중심, 나 잘되면 복이라고 생각하는 중심 때문에 이 중심 바꾸기 위해서 우리를 다시 한 번 성전, 그리고 그 성전도 깨져버리는 성전, 파괴되고 불 타버린 성전, 그로 인하여 이 세상에 땅에서 사는 모든 것은 죽은 자가 되는, 그렇게 죽은 자가 되는 그것이 새 언약에 있는 담긴 내용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은 기분 좋겠다, 하지만 이 세상에 모든 자는 죽은 자인데 그 죽은 자들 속에 하나님도 포함돼 있습니다. 자기 아들도 포함돼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뭐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 아닙니까? 죽음이 먼저고 죽음을 극복한 자가 누구냐를 찾는 겁니다. 그분 따라가게 되면 우리도 같이 부활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시나리오입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냥 죽여 버리는 겁니다.

제가 제 평생 60년 살았는데 60년 가운데 제가 제일 드라마 가운데 제일 맘에 드는 드라마가 요즘에 나오는 드라마가 있어요. 오로라 공주인데 어떻게 복음적인지, 좀 잘 되려고 하면 죽여 버려요. 바로 그게 내가 쓰고 싶었던 드라마가 저거다. 내가 만약 작가라면 다 죽여 버립니다. 오로라 빼고 다 죽여 버려요. 좀 결혼 좀 하려고 하면 혼주도 죽여 버리고 사랑했던 사람도 죽여 버리고, 자기 엄마도 죽여 버리고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창세기 5장 아닙니까? 아담이 태어나고 죽고 또 죽었더라. 죽음의 연쇄 고리, 연쇄 고리가 계속 이어지면서 에녹만 살았더라. 오로라 공주만 살았더라. 얼마나 은혜로워요? 나는 다 죽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죽는다는 그 결과만 좋아하지 말고 어떤 과정, 뭣 때문에 왜 죽어야 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성전이 등장하는 취지를 보여줄 때는 한쪽이 등장하게 되면 양지가 되면 다른 쪽은 음지가 돼야 돼요. 음지 되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로서 양지가 양지로서 드러나는 겁니다. 한쪽은 소멸되고 소멸됐다고 여기는 그 가운데서 뭔가 새롭게 등장하는 거예요.

제가 아침 설교 마지막에 인간은 죄 지어야 된다 했죠. 인간이 죄 지어야 된다는 이 말은 모든 것이 복음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죄 지어야 한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은 죄 지어야 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나 잘하고 못하고, 잘난 존재고 못난 존재고 그런 나로부터의 구원, 그러니까 인간으로부터의 구원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속했다 해놓고 맨날 자기 행동 점검하고 측정하고 ‘복 오겠나? 이번 주 복 오겠어? 이번 주 저주 오겠어?’ 그러면 안 돼요.

전에도 강의했지만 무슨 큰 일 앞두고는 갑자기 사람이 행동을 스스로 조심하게 돼요. 큰 일 앞두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내가 행동을 좀 조심해야 성사가 될 거야.’ 자꾸 이렇게 하는데 얼마나 자기로부터 구원이 안 됐으면 일부러 하나님께서 복잡하게 얽히게 만들겠어요? 수능 앞두고 행동을 어떻게 자제하고, 부모가 돼서 애가 수능 치는데 부모가 춤이나 추고 명품 가방이나 들고 돌아다니면 안 되고 조심해야 된다 이 말이죠. 절대로 경거망동하거나 경솔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거죠. 스스로 그걸 다짐하는데 그건 아직도 환상 속에 있는 겁니다.

그 일을 제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4마리 말이 도와줍니다. 4마리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추적해 보면 4마리 말은 바로 성전을 없애고 성전을 세우는 그분에게서 말이 나왔습니다. 왜 말이냐? 토끼가 아니고 쥐가 아니고 왜 말이냐? 이게 바람타고 오거든요. 바람타고 이게 활동력이 있어요. 결국 말이라 하는 것은 4가지 바람을 이야기하는데 바람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쓸어 가면 전부 다 변화가 일어나요. 태풍 불면 갑자기 황무지 되잖아요. 변화를 유발하는 요소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럼 변화를 유발하려면 변화가 돼야 된다는 것이 먼저 전제가 돼야 되겠죠.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문제가 있으니까 변화돼야 되지 않습니까? 그 문제 되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뭐냐 하면 바로 산이라고 해요.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

놋산으로 돼 있는데 이 놋이란 말은 모든 게 성전 중심이니까 성전으로 해석해야 돼요. 성전에 배치돼 있는 그 내용물이 확대 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현실의 확대로 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현실의 바깥 현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성전에 들어오게 되면 바깥 현실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를 하나님 시선 앞에서 다시 재 이해가 된다 이 말입니다.

성전 뜰 안에 있는 그 놋 뱀은 물론 맹렬한 심판을 받는데 그 놋 제단이, 놋 제단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성전을 박차고 밖에 나가면 곧 우리가 살고 버티고 이 세상 모든 세상, 229개 모든 국가가 하나님 보시기에 놋 제단처럼 심판 받아야 마땅한 제단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모든 인간은 십자가 사건 앞에 저주 받아 마땅한 대상들로 이미 낙인 찍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서는 놋 산, 놋으로 만든 산 덩어리, 마운틴, 한 마디만 딱 던져도 우리가 그렇게 ‘세상이 무엇이냐, 어떠냐.’ 철학가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그들이 몰랐던 진짜 정답은 그냥 저주 받을 산처럼 저주 받을 것이다.

그러면 저주 받을 들판이 돼야지, 산이냐? 왜 산이냐 하면 원래 산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스가랴 4장 7절에 보면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이게 평지가 되기 위한 사전 모습이 산 이예요. 산이 됐다가 평지가 되는 겁니다. 평지 될 때 처음부터 평지가 아니라 산이 되는데 그 산의 역할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스룹바벨에 대한 공격,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 그러한 기능을 하기 위해서 산처럼 버티는 기능, 잠시나마 맘껏 해보라, 그래서 산 이예요. 결국은 곧 그리스도로 인하여 평지로, 별 볼일 없는 평지로 전환될 것이기 때문에 임시적으로 산으로 이제는 주께서 기능을 맡겼네요.

그러면 그 산이 이스라엘 당시에는 뭐냐 바벨론을 이야기합니다. 이 바벨론에서 나오는데 두 산 사이, 바벨론이 둘로 쪼개지죠. 메대와 바사로 쪼개지면서 이걸 두 산이라고 한 겁니다. 스가랴 6장 1절에서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복잡하죠? 복잡합니다.

여기서 스가랴 설명하는데 복잡하지만 십자가는 아예 복잡한 정도가 아니고 아예 모르게 돼 있어요. 십자가, 십자가, 입에 발린 십자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게 돼 있어요. 어떤 청년 죽었네. 이렇게 돼 버려요.

어떤 책에 보니까 이순신 장군이 죽었던 이유가 나와 있어요.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총탄에 맞아 죽은 것은 원래 안 죽게 돼 있는데 안 죽어도 이토히로부미가 일본으로 빨리 귀환하고 있었는데 귀환하는 걸 마저 가서 공격을 구태여 이순신 장군이 해야 될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공격 하나 안 하나 선조대왕에 의해서 이순신 장군은 이미 사형 당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왜군 공격하는데 마지막 몸 바치다가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적의 손에 죽는 게 낫지, 왕의 손에 죽는 게 안 좋다는 거예요. 무슨 역사적 내막이 그런 게 있다는 겁니다. 하여튼 선조는 공 세운 장군은 다 죽여 버려요. 장차 자기 정권에 방해되기 때문에. 정치적 내막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도 복잡한데 계속 껍질이 층층이 있는데 예수님 십자가는 아무리 해도 계속해서 나오는 게 있어요. 바벨론 제국은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장차 이 땅에 성전이 등장하는데 그리스도 몸, 교회가 등장하고 나면 그때 바벨론 역할을 누가 하느냐, 이 세상 모든 나라가 이 놋 산의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깊이 있는 거죠. 십자가를 인하여 이 스가랴의 묵시적 용어가 실제 용어로 전부 바뀐다는 거죠. 역사적으로 그렇습니까? 물으면 아까 제가 마태복음 24장 이야기했잖아요. 이스라엘 현재 망했잖아요. 예수님이 미리 예언했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이미 공포를 한 거예요.

그러면 그 산이 바벨론이 깨지면서 거기서 4마리의 말이 나오는데 2절에 보면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셋째 병거는 백마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말들이 왜 색깔이 다 다르죠? 또 혼란스럽네요. 말이 왜 색깔이 다르고, 첫 번째는 색깔이 다르다는 점과 두 번째는 6절에 보면 “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가매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편 땅으로 나가고”

첫째는 말의 색깔이 다르다는 점과 두 번째는 그들이 순서가 있다는 거예요. 말 출정이 동시에, 네 마리가 택배 기사처럼 한꺼번에 출발해서 다 보는 게 아니고, 줄줄이 따라서 가는 거예요. 한쪽에 에스코트 하듯이 한쪽에 따라서 순서 지어서 가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이유를 캐내게 되면 여기 구라가 많이 삽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죠. 그런데 구라가 아니려면 이거는 되도록 앞뒤가 맞아야 되니까, 색깔이 다르다는 것은 기능이 다르다는 것인데, 기능이 다르다는 것은 죄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데서 동일해요. 하지만 죄의 종류에 대해서는 그때, 그때 달라요. 사람마다 다르고 민족마다 다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죄를 짓는 게 아니고 각자 자기 분야에서 따로, 따로 죄를 지어요.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대로 죄를 짓고 중들은 중대로 죄를 짓고 목사는 목사대로 죄를 짓고 백수는 백수대로 죄를 짓고 거기에 맞춤으로서 놋 산에서, 심판하는 산에서 왔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서 바람같이 말들이 기능을 가지고 바람같이 색깔을 가지고 징벌을 주는데, 색깔이 다른 것은 그 징벌의 내용물이 서로 달라서 그래요.

다른데 중요한 것은 색깔은 달라도 모두 다 한곳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여기는 반드시 동일해야 됩니다. 그 4마리가 한곳에서 나왔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냐? 그곳은 아까 바벨론에서 나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바벨론을 놋 산으로 표기했다는 말은 그럼 어디서 나왔는가? 성전에서 나왔죠. 그럼 성전은 어딘데? ‘성전은 어딘데?’ 라고 말하면 안 돼요. ‘성전은 누구십니까?’ 라고 해야 돼요. 새 언약 시대는.

안식일이 언제입니까? 라고 묻는 것은 새 언약에 맞지 않아요.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라고 이야기해야죠. ‘목사님, 주일이 안식일입니까?’ 그렇게 물으면 안 돼요. 시간적으로 물으면 안 돼요.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라고 물어야 되고, 그 다음에 물을 것은 그 주인님이 뭘 하십니까? 뭘 하는 게 안식일의 완성입니까? “나는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자비가 베풀어주는, 할당되고 배당되면 그것이 곧 안식일의 완성이니라.” 십일조는 드리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를 드린 분을 믿는 게 곧 십일조 완성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아십니까’ 책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헌금 안하고 복을 받는다 했어요. 그 책 보면 목사들 놀랄 수밖에 없죠. 헌금도 안 하고 복 받는 시대가 이 새 언약 시대에요. 왜 자꾸 돈 내야 복 받는다고 왜 자꾸 구라와 사기를 치느냐 이 말이죠.

자꾸 새 언약이라는 것은 우리가 현실에 있기 때문에 새 언약을 표기할 때 현실적 용어를 동원할 수가 없어요. 묵시적 용어를 현실적 용어를 묵시적 기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말이 설치는 거예요. 백날 봐야 말은 승마장에 있지, 말이 동물원에 가야 있지 말이 어디 있습니까? 건장한 말들이 뛰어다니면 그게 마지막 종말의 징조입니까? 실제로 영화 보면 그런 게 나와요. 종말 영화 보면 10가지 재앙들이 눈에 보이는데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마지막 재앙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되기 때문에 심판의 징조를 찾으려 하면 교회 나오시면 됩니다. 제발 교회 좀 나와서 ‘아, 이게 심판이구나.’ 이렇게 보시면 돼요. 베드로전서에 나오거든요.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 내가 교회부터 손 볼 거야. 교회부터 손본다는 것은 다 저쪽은 이미 다 손본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기 때문에 그 장소에서 말씀을 얼마나 왜곡시키는가 보란 말이죠.

제가 결론을 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말들이 활개 치는 장소입니다. 마구 짓밟고 다녀요. 왜, 바벨론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럼 짓밟힌 사람이 ‘우리가 왜 바벨론이냐?’ 하면 바벨론은 진짜 있는 그 성전을 핍박하는 역할이 바로 바벨론이 맡은 거예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메대 바사가 교회를 핍박하고, 그래서 교회를 핍박한다는 것은 교회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복음, 또는 예수님의 복음을 아는 사람을 미워하고 싫어한 그 현장, 그 현장은 곧 말들이 설쳐서 징벌을 가하는 현장, 바벨론이라는 현장입니다.

이것을 스가랴를 통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끝으로 이렇게 언급함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에게 얻고자 하는 그 반사이익은 뭐냐, 이렇게 설쳤다. 여기 북편인데 북편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북쪽 바벨론을 말하고 남편은 뭐냐, 어룽진 말은 남편을 가는데 이건 애굽을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에 지리적으로 이 용어를 쓰는 거예요. 결국 이스라엘 중심으로 세워진 성전 중심으로 남북을 다 작살내는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렇게 하면서 서서히 부각되고 융기되는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으로 진 성전이 새롭게 등장하는 거예요. 파괴하면서 파괴되지 않는 성전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죄가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시고 바라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바벨론 같은 우리 속에서 오늘도 십자가는 빛이 되어서 어두운 우리를 눈부시게 만듭니다. 할 말이 없도록!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가는 것이 사실은 주께서 살려주셔서 사는 건데 우리는 살았다는 것만 좋아했지, 우리의 역할은 자주 잊어버립니다. 이제는 살려주신 분이 십자가 지신 그분이 자신의 희생으로 살았기에 지금도 날마다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