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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9강-성전 해석(슥4;7-10)이근호131020

아빠와 함께 2013. 10. 22. 07:56

성전 해석(스가야 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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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0-20 15:24 
                    성전 해석

2013년 10월 20일                      본문 말씀: 스가랴 4:7-10


(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4: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질문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스케줄이 택한 백성들 속에 파고들게 됩니다. 마치 바늘로 천을 찌르면서 그 바늘귀에 달린 실이 천 위를 마치 누비듯이 말입니다. 흔히들 신앙이라고 하면 느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TV 드라마를 보면서 줄거리는 놓치고 배우들의 장식품에 신경쓰면 제대로 드라마를 봤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라고 질문을 먼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답변한다고 급급합니다. 하지만 그 답변을 통해서 인간들은 기껏 가상놀이에 빠져 있음이 탄로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모두 가상과 가상과의 집합이요 모임입니다. 가상과 가상이 모여봤자 거기에 진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가상들을 그렇게 많이 생산한 것은 본인들이 가상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들추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질문에 진리라고 하면서 답변을 해대고 해석을 내리지만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늘 바뀝니다.

그것은 질문자 자체가 늘 바뀌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구상하는 스토리는 늘 자신들을 주인공으로 간주하면서 진행됩니다. 일종의 간증거리들을 내어놓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가상의 연쇄줄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구약만으로 해석이 불가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구약에 대한 나름대로 최상의 해석을 시도하면서 뭔가를 내놓았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책을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인간들의 지혜와 경험과 축적된 진리성이 다 함축되어서 발전된 양상이라고 자부했던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전면 부정됩니다. 즉 구약 해석은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진실과 진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사람들은 가상을 벗기면 진실은 그 뒷자리에 자리잡고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 뒷자리마저 가상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직면합니다. 즉 가상 뒤에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믿어싶어하는 그 인간 자체가 가상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들은 가상 뒤에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인간 자체를 부정해서 제거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질의형식입니다. 질의하므로서 은근히 진실을 목격하고 싶어하는 그 인간의 속마음을 가상의 평지위에 노출시킵니다. 문제는 이 작업을 누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고독하고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에 주인님이 등장합니다. 그 등장된 주인님이 구약 곳곳에 등장했던 주요한 인물들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 고리를 ‘언약’이라고 하고 그렇게 해서 구성된 전체 그림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요 인물들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증거하고 알려주는 생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자들입니다. 그들의 기능과 역할에 필수요소로서 오늘 본문 7절에는 ‘큰 산’이 등장합니다. 큰 산이 무엇인가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큰 산이 누구에 의해서 평지가 되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해서 수립된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의 완성된 모습은 신약 에베소서 2:20-22에 나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렇게 되면 그 산이란 스룹바벨이라는 왕(혹은 총독)에 의해서 지어질 성전을 위하여 잠시 등장했다고 사라져야 될 그 무엇입니다. 즉 가상 성전을 구상하는 인간적인 면들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성전 갖기입니다.

하지만 성전이라는 것도 가상체입니다. 이 가상체는 허물어지지 아니하면 참된 성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아이디어는 허물어져야 될 성전을 대체하는 성전이 앞의 성전과 어떤 물리적으로 유사성을 띠게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에 헤롯 성전이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배당을 자꾸만 성전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가상체가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받을 수 있는 접전지점이 마련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스룹바벨의 존재성을 알아채리는데서도 이미 실패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가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들은 몰랐습니다.
언약 자체의 해석은 새언약에 준해서 해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유사 언약만을 신봉하게 됩니다. 즉 “어쨌든 사람이 필요한게 아닌가”라고 우십니다. 물론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언약을 훼방하는 요소로서 필요합니다. 베드로전서 2:7에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는 대목이 이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죄인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무가치한 존재로 간주할 죄인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지 아니하면 성전을 완성되지 못합니다. 버림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즉 산 자들의 공간에서는 아예 장소가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되살아나면서 ‘없는 공간’이 새로운 장소를 만들면서 출몰합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마태복음 13:33를 보겠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천국에는 이 지상에 그 어떤 중심 자리도 만들지 않습니다. 그냥 부풀게 합니다. 마치 빵 속에서 누룩을 찾아낼 수 없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보입니다. 은총의 자리는 오로지 예수님이라는 스룹바벨의 역할과 기능의 결과로 나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성으로 촘촘히 엮여진 것이 새언약으로 구성된 성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소위 안다고 하는 그 큰 산들이 다 죄악된 것으로 십자가 앞에서 들통나서 평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슥4장7-10(성전 해석)1310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4장7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6페이지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설교하는 사람 입장에서 항상 제가 사람들을 대하면서 늘 갈등처럼 생각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세상일은 성경 말씀대로 되는데 사람들은 저한테 느낌으로 이야기해요. 이렇게 느꼈습니다. 저렇게 느꼈습니다. 이렇게 기뻤습니다. 이렇게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슬펐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럼 성경의 내용을 어디 갔습니까? 성경의 스토리와 전개는 어디로 가버렸죠?

저의 어머니가 TV를 보는데 드라마를 보시면 스토리를 이야기해야 될 텐데 저 아줌마 머리 모습이 웃긴다든지, 신발이 어떻다든지, 전혀 스토리를 이야기 못해요. 우리의 인생이라는 게 사실은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 인생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의 인생을 주님의 스토리에다 집어넣어 버립시다.

그러면 내가 따로 생각하는 내 인생의 긴긴 스토리는 별로 하늘나라에 유명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쳐주지 않아요. 주님의 큰 줄기가 중요하지 나만 즐거웠다는 내가 고생했다는 나의 고생담, 이런 것은 별로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만약에 성경을 덮어버리고 ‘당신 구원 받으라.‘라고 한다면 전부 다 자기 인생을 아주 미화시키고 거기다 과장되게 신의 놀라운 기적 덩어리로 조작을 할 거예요. 그러나 그러한 간증과 조작도 성경을 딱 펼치고 나버리면 그것은 슛 하고 다 허깨비로 사라져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너무 후한 점수를 주기 때문에 혼자 고생 다했고 혼자 인생 경험 다하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성경에 보면 모든 사람이 다 고생을 다 하게 마련 이예요. 혼자 고생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고생했다고 구원시켜주는 그런 하나님은 또 아니시거든요.

그러면 구원은 어디 있는가? 구원은 하나님의 스토리에 있습니다. 줄거리 전개에 있어요. 그러면 느낌 위주가 아니고 말씀 위주다. 간단하게 나옵니다. 논리가. 공식이. 느낌 위주가 아니고 말씀 위주다.

그런데 막상 스가랴 4장을 펴봅시다. 자 느낌 위주가 아니고 말씀 위주다. 봤는데 7절에 보니까 “큰 산아 무엇이냐” 우리가 등산 할 일 있습니까? 왜 큰 산이 나옵니까? 설악산 단풍 들었다고 큰 산이니까 설악산 단풍 들면 우리가 구원받습니까? 여기 산이 왜 나오느냐 말이죠. 큰 산이 왜 나오느냐.

그래서 설교자 입장에서는 여기 구약에 나오는 큰 산과 그리고 신약에 나오는 이미 예수님께서 ‘이 구약의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내용과 그걸 연결을 시켜줘야 돼요.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말이 안 되죠. 큰 산 보고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하면 큰 산이 있다가 ’내가 산이지, 뭐. 방금 네가 이야기했잖아. 큰 산이라고. 그래 내가 산이다. 어쩌라고.‘

그럼 우리는 이 해석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해석자체가 안 되니까 우리는 느낌으로 가는 거예요. 성경을 봐도 모르니까.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이 말을 왜 하지? 그래서 우리는 아이쿠, 모르겠다. 복잡하다. 이렇게 차라리 즐거웠다. 기뻤다. 짜릿했다. 은혜 받았다.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은혜는 우리가 느낌이 은혜가 아니에요. 7절에 보면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는 여기에 큰 산을 평지로 만들어 버리는 어떤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7절에서는 그걸 스룹바벨이라고 하는 겁니다. 스룹바벨 앞에서 큰 산은 녹아졌고 사라졌고 평지가 되었고 지평선이 되었고 그 큰 산을 녹여버린 그 능력에서 뭐가 나오는가?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7절 문맥 자체가 이렇게 되거든요. 느낌이 아니에요. 말씀입니다. 말씀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개 과정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드라마거든요. 전개 과정을 이렇게 하면서 문제는 스룹바벨이 또 누구며 그렇다면 큰 산은 또 누구냐, 이런 문제가 또 남게 돼요.

신약 성경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동안 사람들이 하나님께 질문을 너무 해댔다는 거예요. 질문을 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내막을 알아채고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라는 식으로 사람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잘못되게 믿어온 겁니다. 바리새인 유대인들이. 그들이 한 것은 사실 시늉 이예요. 흉내 내기입니다. 흉내 내기인데 그들은 그것이 흉내 내기인데요. 흉내 내고 모방하는 거, 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자 그걸 이해한다면 원판은 따로 있다는 걸 알 경우에만 이게 모방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지, 원판이 따로 없다면 이 세상은 모방의 덩어리밖에 없어요.

가면을 썼다는 말은 가면 뒤에 본 얼굴이 나온다고 할 때는 가면이 되는데 벗겨도, 벗겨도 가면만 벗겨진다면 본 얼굴이 계속 안 나온다면 어느 것이 가면인지, 어느 것이 진상인지 이건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진상이 없어요. 가면과 가면, 시늉과 시늉, 모방과 모방, 그거 밖에 없습니다. 원판은 없어요. 애초부터 원판은 없는데 자기들끼리 비교한 겁니다. 비교해 놓고 난 옳고 너는 그르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인간들끼리 비교한 겁니다. 어떻게 사느냐, 삼성그룹에 취직하면 사느냐, 농사짓고 사는 게 나으냐. 사람들끼리 비교한 거예요. 삼성그룹이 낫다. 왜 월급을 많이 받으니까. 이거는 인간들끼리 비교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진리란 견주는 데서 나온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진리란 견주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똑같은 모방을 견주어 봐야 똑같은 가면 벗어서 두 가지 가면 해놓고 어느 것이 진품이냐, 하는 자체가 거기서 진리가 안 나오는 거죠.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가면에 불과하다고 아주 무가치하게 짓밟힐 때 나라는 것이 누구로부터 모든 가치가 몰가치로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짓밟힐 때 나의 착함과 의로움이 ‘그거는 죄 덩어리야.’라고 모멸당하고 짓밟힐 때 그분이 진리입니다.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생명이라”

본디오 빌라도가 구원받는 찬스를 놓쳤어요. 진리인 걸 알 것 같으면 자리를 바꿔야 됩니다. 예수님이 피고석에 있고 내가 재판 석에 앉으면 안 돼요. 후다닥 방석 벗기고 ‘여기 앉으세요.’ 이렇게 해야 돼요. 그게 자리 바뀜이 구원 이예요. 내가 질문하면 안 된다고요. 우리는 주님이 구약에서 질문했던 것의 결과물로 우리가 여기서 발생된 겁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거예요.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게 아니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나로 하여금 내가 질문할 자가 아니라 주님이 작업했던 그 결과물을 새삼스럽게 만들어 놓은 것이 우리고, 그래서 원래 주인과 그 주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과의 만남이 성령을 통해서 성사됩니다. 백부장이 말했잖아요. 가라 하시면 가고 오라 하시면 옵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강아지 키우는 사람은 아시잖아요. 강아지를 사료를 주고 키우게 되면 그 강아지가 죽고 사는 것은 그 먹이를 주는 주인한테 주도권이 있어요. 자꾸 우리가 강아지 키우듯이 예수를 키워나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가짜에요. 가짜기 때문에 내가 출발하면 가짜가 되기 때문에 진짜 앞에서 그분의 애완견이 돼야 되고 그분의 고양이가 돼야 되고 그분의 장난감이 돼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짜와 연관성이 돼 있어요. 이게 진짜 주인을 못 만났으니까 우리는 시장에 나가서 가짜와 가짜끼리 서로 비교하는 겁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사람이 논리하기를 인간 세계는 4가지의 우상, 가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시장의 우상, 시장에서 들었던 풍월을 가지고 진리가 어떠니 따지는 가짜, 그리고 전통적인 가짜가 뭐냐 하면 종회, 우리 족보는, 우리 집안은, 여기서부터 세뇌 받아온 가짜, 이처럼 우리는 우상을 이렇게 우상을 곁에 두고 우상 뒤범벅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만 봐서는 이건 전혀 무슨 뜻인지 모르죠.

그러면 구약과 신약을 어떻게 연결시키면 되겠습니까? 저보고 물으신다면 구약 할 때 주께서 힌트를 줘요. 그 힌트가 뭐냐 인물이 나옵니다. 인물이 7절에 나오네요.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변화죠. 여기 인물이 등장하는데 인물 이름이 뭐냐, 스룹바벨이란 인물입니다. 우리가 어떤 인물이 등장할 때는요, 이런 것도 여러분들이 시간 있어서 성경공부 참석하고 같이 하면 좋은데 다 바쁘시거든요. 뭐 때문에 바쁜지 모르지만 다 바쁘시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전부 다 한 원천에 줄로서 연결돼 있어요. 꼭두각시 인형 알죠? 인형의 조각들이 실에 묶여서 위에서 이리 잡아당기면 당겨지고 안 당기면 팔이 축 쳐져있고, 딴따라라 따따, 인형극 할 때 사운드뮤직에 보면 나와요. 양치기 소년 인형극할 때 애들이 줄을 잡아당기면 인형이 놀잖아요. 구약 전체가 이쪽은 다윗, 엘리야, 모세, 노아, 스룹바벨, 특히 제일 중요한 인물은 멜기세덱,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들은 전부 다 하나의 인물들 이예요. 그 인물과 그 인물을 잡아당기는 어떤 보이지 않는 분과의 연결 사이를 뭐라 하느냐 하면 약속이라 합니다. 언약이라고 이야기해요. 인형극을 생각하면 돼요.

그러면 베드로는요?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우리는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 전체 연결된 인형과 당기는 그 주인과 연결된 언약 전체 덩어리를 뭐라고 하느냐 성전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이 성전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걸 성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이 예배당 아닙니다. 이 예배당은 월세 주는 거예요. 얼마 전에 주인 만나서 밥 한 끼 산다고 하는 거예요. 뭣 때문에 사겠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참에 목돈 주고 사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거는 그냥 부동산입니다. 이것도 부동산이고 저쪽에 있는 기존 갖고 있는 고딕체 건물도 하나의 건물 이예요. 여러분 아셔야 돼요.

성전은 장소가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장소가 가지지 못한 장소 없는 분, 오직 장소란 무덤이란 장소만 가진 분이 이 땅에 등장할 때 무덤이 장소 화 될 때 그게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라는 곳은 딴 사람은 못 들어가는 거예요. 죽은 사람이 산 채로 만들어 내면 그게 성전 이예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 땅에 없는 장소를 새롭게 만들어 내면 그게 성전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장소가 없어요.

왜 장소가 없느냐? 살았다고 하니까 장소가 없고,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죽었다고 생각하면 이미 죽은 우리 선배들, 모세, 노아, 아브라함, 다 모였습니다. 그게 바로 장소에요. 죽어야 보이는 장소, 그러나 살아서는 ‘어딘데? 어딘데?’ 좌표를 지정할 수 없는 장소, 그게 성전입니다. 그게 신약에서 말하는 성전이거든요.

그 성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그걸 따로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따로 만든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만들어 놓고 그게 어떻게 아닌가를 알아가라는 거예요.

왜 이렇게 특정 장소, 예루살렘에다 성전을 만들어 놓고 결국은 그게 아닌걸, 그게 엉터리인걸, 그게 하나의 모방에 불과한걸, 그건 가식에 불과한 걸, 왜 처음부터 이건 엉터리라 했어야 되는데 처음에는 마치 성전 섬기면 복 받고 어떻게 해놓고는 이제 와서 그건 땡! 그건 아니었었어.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느냐 말이죠.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 하나님 앞에 질문을 하도록 하는 겁니다. 질문은 일종의 해석이고 선택 이예요. 자기의 결정입니다.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서 내 운명은 달라질 것이다. 라는 선입관이 인간 속에 있거든요. 그 선입관만큼 발휘하라 이 말이죠.

성전을 놔두고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성전에서 양을 하루에 몇 마리 잡으면 되겠습니까? 성전에 제사장은 나이 몇 살까지 근무하면 되겠습니까? 자꾸 질문하라는 거예요. 그 질문하면 그때, 그때마다 답을 주는데 그 답은 바로 질문자의 죄를 들추어내는 답을 줘요. ’네가 제사해도 소용없다. 내가 원하는 제사는 제물이 아니고 상한심령이다. 이런 답변이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아! 상한심령이라고 알고 또 질문하게 되면 그만 또 다른 답변을 내놔요.

이거는 왜 답변이 자꾸 다르냐 하면 질문자가 자꾸 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질문하는 사람들의 질문의 관심사가 점점 더 자기 내면의 것을 노출하면서 질문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자식 키우는 사람은 알겠죠. 자식 키우는 사람이 어릴 때는 공부 잘할 테니까 선물 달라하는 선물은 유치한 달고나, 이런 것을 선물로 달라 하거든요. 그런데 좀 더 크면 휴대폰, 이렇게 나오죠. 앞으로 점점 질문하면 할수록 자기가 미처 몰랐던 자기도 미처 구성하지 못한 주변의 죄악 된 것으로 구성돼 있는 그러한 요구를 자꾸 내뱉으면서 거기에 따라서 부모의 대처도 변화될 수밖에 없죠.

성전을 만들게 함으로서 만들어진 그들로 하여금 성전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목격하게 만듭니다. 네가 애지중지하는 성전, 네가 그렇게 이거 있어야 복 받는다고 우겼던 그 성전, 마치 하나님이 거기 동의한 것처럼 여겼지, 하지만 그건 네 죄로 인하여 그게 스스로 어떻게 무너지는가 한번 보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이 그 소리 듣고 하기를 ‘무너져도 우리는 또 짓습니다.’ 왜, 그 성전 또 지을 수 있으니까, 한번 진 성전 두 번 다시 못 지으리요. 짓습니다. 주께서 ‘끽. 그 성전 아니거든.’ 그 성전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질문에 따라서 답변은 네가 예상치 않은 다른 답변이 나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우리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 갈 수 있는 어떤 다리도 인간에게는 허용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구약을 알아서 신약으로, 신약의 진짜 구원의 마무리로 접어드는 그런 모든 방법을 차단시킵니다. 차단시켜 놓고 계속해서 주님께서 거기다 딱 다리를  놔버리죠. 다리를 놔버리면 여기에 이 구약을 해석하면서 우리가 해석했던 모든 해석들은 이게 원래 옳은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는 겁니다. 실컷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줘놓고 그 말씀의 해답이 있는가. 그걸 방정식 풀듯이 풀어서 거기다가 완벽하게 지켜보려고 애를 썼던 모든 것이 다 무용지물로 만들 때 애초부터 인간은 자신에 있어서 자기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은총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나오지 않습니다.

은총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스룹바벨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이 스룹바벨은 사람이잖아? 하면 사람 맞습니다. 사람 맞는데 스룹바벨이란 사람이 똑같이 스룹바벨의 기능을 가지고 뒤에 숨어있어요. 앞에 스룹바벨이 죄로 말미암아 쓰러져야 됩니다. 앞에 성전 지었잖아요. 부동산 성전 불타 버리고 쓰러져야 돼요. 쓰러지면 그 뒤에 진짜 성전이 나오죠. 주님의 방법이 이겁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모방과 모방, 시늉과 시늉들만 쫙 깔아놨습니다. 원판은 후벼 파도 없어요.

제옥시스라는 옛날에 고대 유명한 화가가 있는데 제옥시스란 화가가 친구한테 그림을 보여줬어요, ‘내 그림 어떠냐?’ 친구가 ‘야, 네 그림 보고 싶어. 저 커튼 뒤에 있지? 저 커튼 걷어서 네 그림 보여줘’ 하니까 제옥시스 하는 말이 ‘저 커튼이 그림이야.’ 얼마나 잘 그렸으면 커튼 자체가 그림인지 진짜인지 분간조차 안 될 정도로 잘 그렸다 이 말입니다. 그 상대방하고 이야기했던 경쟁했던 화가는 포도를 그렸는데 새들이 진짜 포도인줄 알고 달려들었는데 벽에 박혀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한국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긴 있어요.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진짜 숨어있는 진짜 구원을 이루는 성전이 있잖아요. 그 성전은 숨어있어요. 숨어있는데 앞에 있는 성전이 이게 넘어져야 돼요. 그냥 넘어지면 안 되고 인간의 죄가 반영돼서 넘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결론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분을 먼저 말씀드리면  베드로전서 2장 7절에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뭐냐 죄인들이 필요합니다. 그 죄인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에 의해서 버림받음 ‘에이구 가치 없어. 무가치해, 쓸데없는 거야.’ 하고 버려줘야 죄인들이 나서서 귀한 것도 귀한 줄도 모르고 갖다 버려줘야 그 버림받음이 기초로 해서 성전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 버림받음이 계속 살아나야 우리는 그 버림받음 앞에서 우리는 항상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 우리가 버렸지. 사실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건데, 나는 가짜만 봤지, 진짜 생명을 주는 것은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했구나.’

그러면 그 성전의 지정된 장소가 어디냐? 그 장소는 이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어려운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려운 건데 그 지정된 성전이 어디 있느냐? 제가 성전 구절 읽고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세요. ‘아! 성전이 여기 있네. 거기만 찾아가면 되겠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마태복음 13장 33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성전이 어디 있죠? 빵 속에 누룩이 있는 곳이 성전이라면 그 누룩은 어디 가 버렸죠? 없어졌죠. 그러면 남아있는 건 뭡니까? 빵이 부풀어졌죠. 여러분 속에도 여러분들이 부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속에 누룩이 있어서 여러분들이 부풀어지기를 원해요. 전에는 내가 잘난 체, 내가 나의 의로 나의 의가 있는 그것이 내 구원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나의 의가 없어지고 주님의 의가 들어와 버리면 이제는 주님의 의가 들어왔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바로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 전체가 천국입니다.

사람이 자기 전체가 죄인 것을 안다면 우리는 거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살아가는 것도 은총, 은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스가랴 4장 7절 말씀입니다. 모든 은총은 스룹바벨에서 나오는데 그 스룹바벨은 너희들이 아는 스룹바벨 그 인물이 아니고 그 뒤에 숨어있는 원판, 스룹바벨은 가상적인 스룹바벨, 인간들이 익히 아는 스룹바벨은 그게 엎어져야 돼요. 죄로 인하여. 그게 엎어지고 그 뒤에 숨어있는 스룹바벨, 거기서 나오면 그것이 곧 스룹바벨 손에서 성전이 지어지게 되고, 그러면 스룹바벨은 십자가를 통해서 누구냐? 예수님이죠.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사람 앞에 버림받은 예수님, 우리는 그분을 버렸다 말이죠. 우리가 그분을 버려줘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죄가 되니까.

우리는 맨날 버리고 그 버림받은 돌 가지고 성전 짓고, 우리는 그 성전에서 영생을 얻고 그러니 그 성전 안에서, 천국 안에서 우리는 내 자랑 할 거 아무것도 없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연결 이예요. 그걸 새 언약이라고 했죠.

제가 아까 꼭두각시 인형 이야기 했죠. 모든 구약에 있는 사람들은 꼭두각시고 거기에 주님께서 들었다 놨다 하는데 그 연결고리는 언약이라 했지 않습니까? 오늘날은 바로 새 언약,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오늘도 들었다, 놨다 하는 거예요. 주님은 요물 같아. 들었다. 놨다. 항상 들었다. 놨다. 잘난 체 하다가 다시 ‘아이쿠, 내가 못났구나. 그래 난 잘났네. 실패하면 안 돼.’ 그 실패하면 안 돼, 그 자체가 바로 또 ‘내 자랑 질 하려고 했구나.’ 이걸 항상 우리가 느끼게 할 때 그렇게 움직이는 그 누룩이 들어있는 부풀은 빵, 그것이 바로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항상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눈이 지금도 우리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왜 성전일 수밖에 없는가. 우리가 거룩한 성전일 수밖에 없는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거룩 앞에 우리가 너무 죄인이기에 그 자체가 거룩인 것을 우리는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너무나 거룩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죄인 되는 이 기쁨과 감사가 용서가 항상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