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와 두 감람나무
2013년 10월 13일 본문 말씀: 스가랴 4:1-6
(4: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4: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4:3)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4: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4: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이 벌이시는 모든 일들은 인간들의 속내를 그대로 폭로시키는 일들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꼬깃꼬깃 숨기려하여도 인간의 본색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인간이 진정 사수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의입니다. 이 자기 의는 평생을 걸쳐 자신이 노력해서 획득한 것이라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전교 1등을 했는데 옆에 질투심많은 친구가 말하기를 “그것은 네가 운이 따른 결과야”라고 한다면 매우 기분 나쁠 것입니다. 바로 인간들이 주장하는 죄란 실은 죄를 안 지으면서 까지 지키려는 자기 정당함입니다. 평소에 살아가는 버릇이 그러하기에 어떤 사태를 통해서는 나타나는 것은 “나는 능과 내 힘으로 이런 결과를 얻었다”는 자부심입니다.
바로 인간에게 이런 점이 있기에 인간은 천국에 합류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자들에게 바로 이 점을 일깨워주고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십니다. 이 찾아오심을 통해 성도는 자신의 본색이 노출됩니다. 즉 “나는 내가 납득이 되는 것만 믿기로 합니다”는 본색말입니다.
로마서 10: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렇다면 구원받기 참 쉽다고 여길 겁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되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바로 믿음이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 출발은 믿음이 아니라 의심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0:25에 보면,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의심하는 그 자리가 곧 주님의 작업과 합치되는 자리입니다.
의심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의심 자체를 해소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의심을 생생하게 살려내므로서 ‘사람의 능이나 사람의 힘’으로 구원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천국의 취지만이 부각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잠자고 있는 선지자 스가랴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깨웁니다.
그리고 보여줍니다. 등대와 두 감람나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본 것을 그대로 묘사하라고 하십니다. 이로 인하여 선지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게 하십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이미 의심의 바탕에서 비롯된 질문이 됩니다.
자연스럽게 인간 심성 내부에 누구나 깔려있는 의심의 층을 드러냅니다. 천사의 대꾸가 의미심장합니다. “네가 몰랐어? 왜 모르고 있었지?”하는 투로 나옵니다. 누가 우리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네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습니다”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주만 별 복잡한 뒷 이야기가 필요치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답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하는 질문층 자체로 끄집어보이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일은 사람의 힘이나 사람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고 말입니다. 즉 뭔가 더 알아서 스스로 의심을 해소하는 식으로는 구원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등대와 감람나무는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구원에 민감한 기대감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면서 실제 구원은 다른 출처에서 비롯됨도 아울러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곳은 바로 성전입니다. 등대는 성소에 있는 물건입니다. 따라서 등대를 보여주신다는 것은 일정한 지점에 고정되면서 실시되는 성전 기능이 마지막 때에 특정 지점에 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는 거룩과 비거룩을 장소적으로 폐쇄된 성전 경계선으로 구획하던 원칙이 깨어지고 성전 안에 있는 성전이 성전 밖으로 노출되어 경계선이 허물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사람의 능이나 힘으로 되어지는 작업은 아니고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실시되는 작업입니다. 등대란 성소 안에 있는 물건입니다.
성소 안에는 세 가지가 들어있습니다. 출입구는 동쪽에 있고 입구 들어서자 마저 남쪽에 등대가 있습니다. 일종의 조명시설입니다. 그리고 마주보이는 북쪽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12개의 ‘누룩없는 떡’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떡을 지속적으로 비쳐주는 기능이 등대가 하나는 역할입니다. 다른 빛을 낼 수는 없습니다. 이 등대 꼭대기 근처에는 주발이 있는데 한 등대 줄기마다 7개 씩 있으니 7×7, 모두 49개의 주발이 있습니다.
여기에 감람기름이 계속 제공되어서 맞은편에 있는 12개의 진열된 떡을 비출 수가 있습니다. 12개의 떡은 하나님의 택한 민족의 12지파를 의미하는데 ‘누룩이 없는 떡’이라는 점에서 전에 출애굽 했던 그 시절의 취지를 잊지 말고 반복해서 기억되어야 될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지성소를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텐이 쳐져있는데 이 입구에는 향기를 만들어내는 기구가 있습니다. 불을 지퍼 향기나는 것들을 태워 향을 만들어내는데 이 태우는데 투입되는 불은 아무 불이나 되는 것이 아니라 제단에서 제물이 홀라당 다 태워버린 그 무시무시한 봐주는 것, 일체 없는 그 심판의 불입니다.
이 의미는, 제단에서 불은 하나님의 진노로서 비쳐지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의 반복만이 하나님을 흐뭇하게 하시는 향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쨌든 이런 향단까지 등대에서 내뿜어진 빛 아래서 진행됩니다. 두 감람나무는 등대 앙쪽 곁에서 등잔관을 통해서 계속해서 기름이 제공되게 합니다.
그렇다면 ‘두 감람나무’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그것은 두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과 제사장입니다. 제사장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마땅히 진노받아야 됨을 말해주고, 왕 앞에서는 왕이 갖고 있던 독단적 권한, 곧 죄 사함의 권한 행사로 인하여 혜택입은 자 성도에 해당됩니다.
바로 이 기능의 결합이 예수님이십니다. 감람나무는 곧 예수님의 이런 사역을 증거하도록 예수님과 연결된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 의해서 조성되는 자신들이 아닙니다. 사명이 주어져 있기에 그 사명 안이 예수님의 활동지역, 곧 세상의 중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의심 속에서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슥4장1-6(등대와 두 감람나무)1310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4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5페이지입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경 내용을 이렇게 보게 되면 참 이상합니다. 왜냐 하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그래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이야기해주면 간단한 문제일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잠자는 사람 깨워놓고 ‘뭐가 보이지?’ ‘뭣이, 뭣이 보입니다.’ ‘보이니까 너 보이는 대로 설명해 봐라.’ ‘보는데 등대 있고 두 감람나무가 보이고 등대구조가 이렇습니다.’ 그리고 스가랴가 묻죠. ‘그런데 천사님, 이게 뭡니까?’ 하니까 ‘너 모르나?’ ‘모릅니다. 모르니까 묻죠.’
그러면 우리 같으면 ‘그래, 이 등대는 이렇고 두 감람나무는 이렇다.’ 이렇게 설명해 주면 간단하게 끝날 문제인데 뭐라고 6절에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무슨 정답입니까? ‘이게 등대고 이게 두 감람나무다.’ 하면 되지, 이게 무슨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정답이 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여기서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의심하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믿는 자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의심하는 자를 구원해요.
로마서 10장 10절에 보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하고 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이룬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냐, ‘믿으면 되네.’ 하거든요.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른다면, 그러면 믿기만 하면 되는데 믿기만 하니까 그게 믿음이 안 되는 거예요. 그 믿음이 그 믿음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믿기만 하면 되네.’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이거는 사람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거는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여러분이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를 머리가 바짝 깨어 있는 사람은 알거에요. 아!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우리한테 자극을 줘서 우리가 성질 급하게 ‘이게 뭡니까? 등대는 뭣이고 감람나무는 뭡니까? 내가 알아채면 구원받죠?’ 이렇게 성질 급하게 우리의 본색을 톡 까놓고 나타나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뭐라고 단서를 붙이느냐 하면 ‘네가 그걸 안다고? 알고 싶다고? 사람으로 안 되거든. 능으로 안 돼.’ ‘그러면 안 되면 끝이네요.’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의 신은 되게 하신다.’ 이렇게 나서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옛날 죄를 짓고 난 뒤에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치마를 입었잖아요. 우리 같으면 ‘이 딴 치마 입어서 돼? 치마 갖다 버려. 끝’ 이러면 끝이 될 텐데 그 치마를 벗기고 ‘다시는 치마 입지 마. 알겠어? 벌거벗고 돌아다녀.’ 이렇게 돼야 우리의 논리적 절차가 그렇게 되는데 그걸 벗기고 가죽 옷을 만들어서 입혀 버립니다.
그런 경우가 또 있어요. 이삭을 낳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낳았잖아요. 낳고 난 뒤에 “그 자식은 그 자식이 아니고 구원은 그 자식 계통이 아니고 이삭 계통이다.” 이미 자식을 낳고 난 뒤에 아니라는 거예요.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찾아오신 대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도마라는 제자가 나오는데 도마라는 제자가 빠져 있을 때 주님께서 문을 통과해서 들어왔습니다. 제자들이 도마에게 하는 말이 ‘예수님 살아났습니다.’ 도마가 ‘살아났다고? 나 안 봤어. 나보고 강요하지 마. 나 안 봤으니까 안 믿을 거야.’
이게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의심입니다. 우리는 도마가 의심했잖아요. 그러면 12 제자 가운데 누가 가장 주님을 많이 표현하느냐 하면 역시 도마입니다. 왜, 의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심한 자를 구원해요. 그런데 교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심을 안 하고 믿기 때문에 그 믿음이 믿음도 아니면서도 믿음 있는 척이 돼 버린다 말이죠. 충분히 의심하고 평생을 다가도록 의심을 해야 됩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 아이쿠, 말도 안 되는 소리, 믿기는 믿지만, 믿어야 구원된다니까 믿기는 믿지만 이게 말이 안 되지.’라고 의심을 하세요. 그게 자기의 본성에 맞아요. 그래야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실감나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들어와서, 성령이 들어와서 구원받지. 결코 내가 똑똑해서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계속해서 자기의 똑똑함을 자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 똑똑하지 않은 것을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것도 문제고요.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일을 벌이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천국을 뚫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시킵니다.
또 예를 들면 바로 홍해를 건너 왔던 사람들, 놀랬죠. 예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너 왔으면 그걸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앞에 요단강이 차단돼 있습니다. 홍해 하는 방식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 익히 아는 그 기도발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익히 아는, 한번 효과 본 기도발도 찬양발도 소용없어요. 홍해 건너오는데 찬양했잖아요. 찬양하니까 그 찬양함으로서 우리는 이긴다고 했거든요. 그 찬양 또 다시 써먹으려고 덤벼든다면 더 이상 그것은 소용없어요. 꼭 애들 가르칠 때, 훈계하고 애들 달랠 때 방법 같습니다. 한번 써먹은 방법은 애들이 알아서 아주 간교해서 또 써먹으면 옛날 효과 안 나타납니다. 애들이 그렇게 그런 점에는 머리가 좋고 나쁘고 관계없어요. 전부 다 똑같아요. 머리가 잘 돌아가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도 그 점을 알기 때문에 어쨌든 인간들의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지상의 사람이 아니고 그야말로 천국에서 살만한 사람으로 전환시켜 줍니다. 자기 자랑하지 않고 정말로 자기 자랑하지 않고 정말로 내 덕으로 구원 받았다는 소리 안 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내 덕분에, 내가 잘나서 구원됐다는 그 마지막 남은 앙금까지 전부 다 끄집어내는데 우리의 평생이 거기에 써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등대 보여주고 두 감람나무 보여주면서 누구라고 그걸 보게 되면 묻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묻게 되는데 그 물음에 대해서 주님은 성령께서 알아서 하실 거라는 답변으로 거기에 대해서 직접 답변을 안 해준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유념해야 됩니다. 물론 성신께서 이룬다 해놓고 그 뒤에 보면 ‘두 감람나무는 바로 이런 기름 부은 자 둘이다.‘ 이렇게 14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우리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에요.
‘이 두 감람나무가 무엇입니까?’라고 한다면 우리가 기대한 답변은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하죠. 이름을!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하는 겁니다. 두 감람나무는 김대중과 노무현이다. 이렇게 딱 집어서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하죠. 그런데 끝까지 주님께서는 두 감람나무 이름은 없습니다. 왜냐 이름 없는 게 정답 이예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자신의 이름에 우리의 목숨과 자존심을 거기다 다 걸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 조치에요.
사람이 나 말고 누구 이름을 불러주게 되면 우리는 시기 질투가 생기면서 그 사람을 따라잡으려고 아등바등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한 게임과 경쟁 자체가 천국에서는 없습니다. 아미 지옥에는 게임만 있을 것이고 천국에는 아예 게임이라는 것이 종결된 상태가 됩니다. ‘네가 더 세고 내가 더 약하다는 그런 게임은 여러분 눈 뜨고 살아있을 때 스마트 폰 있을 때만 하세요. 죽고 난 뒤에는 그 재미난 게임 없어집니다. 없어진다 하면 천국에 안 가려는 사람이 있겠는데 천국 우리 맘대로 가고 싶다고 가는 게 아니니까 질질 끌려가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이 내용에 대해서 등대와 두 감람나무를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일단 특정 인물은 아닙니다. 특정 인물이 등장하면 우리가 그걸 따라잡으려고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지옥 백성 만들려면 그렇게 하세요. 일체 너 잘났고 나 못났고 너 못났고 나 잘났고 이런 게 일체 없습니다.
그러면 등대는 무엇이고 두 감람나무는 무엇인가? 등대를 보여주신 것은 폐쇄된 건물로서의 성전이 경계선이 깨지면서 이게 세상 바깥으로 노출되는 겁니다. 옷을 벗기는 거죠. 프랑스 파리에 보면 뽕삐드란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은 그 당시에 획기적인 건물 설계를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건물 안에서 바깥으로 노출되지 않아야 될 에어컨 배관이라든지 모든 온수 배관 이런 것들이 그대로 바깥에 다 노출시킨, 사람으로 말하면 피부로서 내장을 감춰야 되는 게 사람인데 내장이 다 드러나는 그런 투명인간처럼 건물을 지어서 유명한 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은 거룩한 곳 이예요. 거룩한 곳과 더러운 세상과 이렇게 아주 확고하게 구분지어서 있었던 그 성전을 거룩과 비 거룩의 경계를 허물어서 이제는 거룩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는 겁니다. 어떻게 들으면 ‘신난다.’ 할 수 있는데 사실은 신나는 것보다도 세상은 끝났다고 보면 됩니다. 왜 끝났다고 보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인생이란 자기가 가꾸기 나름이거든요.
그런데 자신이 가꾸지도 않았는데 구원받은 사람이 망나니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세상은 대책이 없습니다. ‘어이, 나는 구원 못 받았는데 너는 왜 구원 받았는데?’ 하면 ‘이것은 주님의 긍휼로 구원받았어.‘ 이렇게 외치니까 ’이건 달음박질을 해도 안 되고 열심 낸다고 되는 게 아니야. 교회 다닌다고 되는 게 아니야. 주의 사랑이 임하니까 난 구원받았어. 다 십자가 효과야.‘ 이렇게 외쳐버리면, 안 받은 사람은 어쩌라고? 이게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성령으로 됩니다. 이 구원의 법칙을 우리끼리 쉬쉬, 우리끼리만 알자고 했던 시절이 옛날이라면 지금은 이게 바깥으로 돌아다니면서 외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 단속하는 목사 입장에서는 망나니 간수하는 것처럼 감당이 안 돼요. 감당이 불감당이라.
그러니까 교회에서 기껏 내세운 대책이 뭐냐, ‘성령 없는 사람은 육으로 났기 때문에 하늘나라 못 보고 성령 있는 사람만 천국 봅니다.‘ 라고 성경에 나오니까 그 다음 대책이 뭐냐, ’그러면 성령 받읍시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성령을 줘야 받죠. 성령을 주는 방법이 바로 등대에 있습니다. 등대와 감람나무 사이에 있습니다. 등대 보여주고 등대만 보여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감람나무를 보여준 이유는 감람나무는 등대가 불빛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름의 제공 처, 일종의 양쪽에 붙어있는 일종의 간이 주유소 같은 역할입니다.
기름을 계속 제공하는데 기름을 제공하는 관이 7개의 관이 있어요. 그리고 등대에는 등잔이 7개 달려 있습니다. 7☓7=49, 총 49개의 등잔이 있고 등잔에 기름이 고이도록 하는 주발이 있고 거기에 7개의 관을 통해서 기름이 부여되는데 그 기름이 두 감람유에서 기름이 제공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등대라는 게 원래 어디 있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복판에 있었는데 여기서 한마디 해야 되겠어요. 한복판이란 말은 사명이 있는 그곳이 한복판입니다. 옴프로스, 옛날 그리스 신화에서는 그리스 아테네를 옴프로스, 세상의 배꼽이라 했어요. 아폴로 신전이 여기다. 지금도 아테네에 보면 있어요. 여신 아테나 신전이 있다고요. 세계 ...제 1호죠. 만약에 그것이 어떤 특정 장소에 세상의 배꼽이 있다면 거기서 생명수가 나온다면 우리는 멀리 있으면 거기를 찾아가면 되거든요. 옛날에 그리스뿐만 아니고 이스라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스라엘의 중심은 뭐냐,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중심은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그 성전을 향하여 1년에 3차례씩,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모든 가장들은 세미나 참석 하도록 호출 돼야 되고 그 세미나를 지도하는 사람들은 제사장들이 합니다. 전에부터 있던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현 그 주민들에게 계속 알려주고 그 세미나에서 교육받은 가장은 자기 집에 가서 자기 아내나 자식들에게 자기가 제사장에게 배웠던 하나님의 전례나 하나님의 약속들을 가르쳐야 되는 겁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아버지의 권위기 때문에 그래서 십계명에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라”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육신을 만들어 났다고만 공경하라는 게 아니고 언약 안에서 아버지란 언약을 대대로 전수하고 가르치고 교육하고 그걸 전달시키는 그 기능에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공경하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공경 받는 아버지가 되려면 자식들한테 그냥 ‘아버지다.’ 나서지 마시고요. 주 안에서 아버지가 돼요. 술 주(酒)자 주 안에 아니고 주(主) 안에서. 술 빼고 예수님의 소식을, 구원 소식을, 사랑을 전하는 아버지로서 전해야 됩니다. 거기에 마땅히 삶도 같이 포함이 돼야 되겠죠. 자칫하면 자식들이 주의 사랑으로 사랑한다 해놓고 패기는 왜 팹니까? 이렇게 나올 수가 있거든요.
20년 동안 청소년 상담한다는 어떤 아줌마가 아들이 나와서 고백하기를 바깥에서는 좋게 상담해 놓고 자기 자식은 패더라는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엄마 왜 패느냐?’ 하니까 ‘내 손이 먼저 나가는데 어떡하느냐’ 그렇게 이야기했답니다.
그러니까 항상 이 세상의 중심은 뭐냐 하면 말씀 중심이거든요. 이것이 스가랴에 오게 되면 어떤 특정 인물? 아닙니다. 특정 장소? 아닙니다. 뭐냐, 두 감람나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명입니다. 누구든지 수천 명, 두 명이 아니고 세 명이 아니고 네 명이 아니고 수천 명이 되든지 사명이 있으면 그거 옴프로스, 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대만에 놀러간다고 비행기 타고 간다면 그 비행기 타고 가면서 십자가복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면 그게 중심 이예요.
제가 안양 공부하는데 거기 참석한 어떤 집사님이 간증을 해요. 자기가 ‘감기’라는 영화를 봤답니다.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복음적으로 영화를 봤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감기라는 영화에 보니까 감기 걸린 사람들은 무서운 전염병이기 때문에 돼지나 소나 구제역이나 비브리오균처럼 전염병이 있잖아요. 그 병에 걸리면 소나 돼지를 구덩이 파놓고 폐기하잖아요. 똑같이 영화에 보면 사람들을 층층이 겹겹이 사람들을 집어넣는 그 장면이 나온 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면역체를 갖고 있는 소녀도 같이 죽어야 될 그 사람 무더기 속에 포함이 됐다는 거예요. 그걸 알아 챈 여자 애인이 기어이 그 여자를 찾아내서 건질 때 그 건지는 것을 보면서 그분은 뭘 생각했냐 하면 요한복음 17장 “너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이 땅에 있는 것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이 전염병 걸린 죽음 세계에서 너만은 유일하게 복음 전하라고 주셨다.‘라는 것을 아주 통렬하게 영화 보면서 느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영화 값 7000원, 8000원 아깝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렇게 성경에서 우리가 의심을 해서 구원을 받아야 될 이유가 의심하는 자체가 뭐냐 하면 내가 나는 무조건 내 위주거든요. 내가 이 세상의 중심처럼 이렇게 버릇이 그래요. 뭐 성질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우리는 타고난 버릇이 항상 세상이 어떠해도 나 잘되면 괜찮은 세상 이예요. 모든 게 내 기분 따라서 감정 따라서 내가 속해 있는 것에서 내가 무조건 잘돼야 돼요.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브라질한테 2:0으로 지면 기분 나쁜 거예요. 무조건 내 중심 이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의심을 통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의심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의심케 함으로 말미암아 그 중심 부위를 옮기는 거예요. 어디서? 나로부터 두 감람나무로. 그런데 두 감람나무는 어디와 연결돼 있느냐 하면 등대와 연결돼 있습니다. 등대라 하는 것은 어디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텐트 촌, 그 중앙에 있는 성소가 있는 성막인데 성막 입구가 동쪽이거든요. 동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또 하나의 텐트가 있어요. 거룩한 텐트인데 그 입구에 들어가게 되면 남쪽에 등대가 있어요. 북쪽에는 테이블에 떡 6개, 6개해서 12지파를 상징하는 떡이 있어요. 떡은 늘 갈아줘야 돼요. 안 그러면 곰팡이 피니까. 그 누룩 없는 떡을 보면서 등대가 조명시설이 돼서 저쪽을 비춰줍니다. 빛을 비추려면 여기 등잔에 기름을 계속 공급을 해줘야 해요. 기름 떨어지면 안 되니까. 그리고 거기에 기름 불티를 제거하라고 집게까지 만들어서 등잔에 기름이 잘 통하도록 그렇게 했어요.
12 떡은 뭐냐 하면 처음에 유월절 날 그들이 먹었던 떡이 맛없는 딱딱한 떡 이예요. 딱딱한 떡을 진열함으로 말미암아 그때 그 시절 첫 마음, 처음에 죽음에서 기어 나왔던 그 시절을 잊으면 안 된다는 그것을 시간은 흘러도 이걸 구체화, 사물화 시켜서 물체로 만들어서 기념물로 박물관처럼 그렇게 배치한 거예요. 그렇게 마주보면서 빛을 비추게 돼 있고 바로 들어가면 남쪽도 아니고 북쪽도 아니고 바로 동쪽 반대 서쪽에 보면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입구에 향로에 향이 피어져 있습니다. 그 향불의 불은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마당 번제 단에서 피운 제물을 홀라당 다 태운 그 무서운 심판의 불로서만 향을 피워야 되죠.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번제 단에 피웠던 그 심판은 우리 보기는 끔찍하지만 그 불은 우리는 끔찍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아하! 이런 향기도 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향수를 태우는 그 불과 제물을 태우는 그 불을 일치시키면서 그렇게 배치를 해놓은 겁니다. 향내 나는 그 뒤에 커텐인데, 커텐을 젖히고 들어가면 이곳은 보통 사람은 못 들어가고 오직 제사장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 제사장, 그 제사장은 모든 인간은 다 똑같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제사장이 보기에 똑같아요. 왜냐 제사장이 보기에 다 죽어야 되니까. 아침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사람은 천국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간다 하죠. 그래서 사람이 불만인데, 이건 제 아이디어인데요. 만약에 모든 사람이 지옥 간다면 어떻습니까? 전혀 불만 없죠. ①그게 바로 제사장은 ‘모든 사람은 다 죽어야 돼.’ 이게 제사장입니다.
그게 오늘 스가랴에서 여호수아입니다. 그런데 ②그럼 어떤 사람을 건지느냐? 그건 왕이 등장해야 돼요. 왕은 멜기세덱 이예요. 그래서 여호수아와 멜기세덱, 투톱, 이게 바로 두 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멜기세덱과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제사장이고 멜기세덱은 왕, 총독이 왕이거든요. 이 두 사람이 있어버리면 ‘너는 뭐야?’ 또 이렇게 나온다고요. 우리가. ‘누구는 인간 아니고 지만 인간인가? 누구는 기름부음 받고’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기름부음 자체가 이게 등대에서 그러니까 빛 자체는 예수님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빛에서 나오는 기름이거든요. 빛과 연관된 기름이라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사장이고 예수님이 왕 이예요. 예수님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 가도 마땅하다고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사명을 발휘하시고 그 사명을 발휘하신 예수님께서 ‘그런데 너희들만큼은 내가 특별히 선택해서 내 왕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식으로 우리를 건지니까 그 감람나무의 두 기능, 그 왕과 제사장의 기능은 예수님 안에서 그게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 하나가 된 것을 거저 부여받은 사람이 오늘 날 두 증인,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 두 감람나무, 이 사람들의 운명은 이 세상에서는 예수 이름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의 길을 가면서 복음은 복음대로 전파되도록 그렇게 조치가 되는 겁니다.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막에 있는 기구는 정지돼 있고 고정돼 있는 것 이예요. 사람이 그 등대를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사람의 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자기가 알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듯이 이제는 우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하셔서 모든 것을 이뤄나가시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의 태도는 의심입니다. ‘하나님, 저 주의 일 못합니다. 저 아시잖아요. 저 고상한 일, 거룩한 일 빼주세요. 저 안 합니다.’라고 하게 하시면서 하게 만들므로 말미암아 남들 보기에 ‘너 참 착실하네.’ 가 아니라 주께서 착실하게, 보이도록 그렇게 하실 때 우리는 고백합니다. ‘이거는 내 힘이 아니고 내 능이 아니고 나를 감람나무로 사용하시는 그렇도록 기름을 부여하고 기름을 공급하고 주고받는 관계가 되게 하신 등대되신 빛 되신 예수님의 그 주시는 힘으로 내가 이렇게 성도로서 이 어두운 세상에 살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작기 때문에 큰 거보다 작습니다마는
주께서는 작은 것 안에 큰 것 담았습니다.
이게 누룩 비유인데요.
작은 누룩이 새로운 세계를 만든 것처럼
비록 보잘 것 없는 우리이지만
우리 속의 큰 사명 때문에
남들이 구원받는 큰일을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의심케 함으로써 또 다시 믿음을 어떤 것이 참된 믿음인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믿음도 내 힘으로 내 능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우리로 살게 하시는 주님의 힘이 우리에게 믿음을 충족시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