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자랑
2022년 10월 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1-2
(4: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4:2)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돌아오기를 하나님께서 요청한다는 것은 지금 인간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아오라’는 요청에 대해서 그 대책을 본인이 세운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세운 대책은 세상의 여러 신들을 세우고 그 중에서 여호와만 고르면 된다는 겁니다. 참 쉽죠? 일단 타켓은 정해졌으니 본격적으로 공략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과연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식일까요? 이 방식을 의문시하기 전에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식을 인간이 구상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수행했던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기’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바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나에게 돌아오라’라는 지시에 따르면서 그들이 시도한 것을 율법에 충실하기입니다. 율법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인정하고 그 율법이 요구하는 실천을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 보조 법령들을 창안해 내는 겁니다. 좋은 목표가 전제되어 있다면 그 수단도 자연적으로 좋은 것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실패입니다. 이 방식이 실패했다는 것은 일체 인간의 노력하는 바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거절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라는 이름 자체가 이런 내용을 담는다고 마태복음 1:21에 나와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즉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실 ‘구원’은 먼저 ‘죄 속에 내가 있음’을 전제로 한 상태입니다. 한 발은 죄에 빠져 있고 다른 발은 의로운 상태에서 구원작업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위 의로운 쪽에 걸쳐 있다고 우기는 그 발마저 죄 속에 있는 것으로 발각시키는 작업이 주어집니다.
그 어느 인간도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단 하나의 율법이라도 못 지켜내었다로 만들어버리는 작업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입니다. 이는 ‘나에게로 돌아오라’가 곧 ‘인간은 돌아오는 데 실패한다’는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의 환경, 곧 인간은 본인이 하는 일을 통해서 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따로 망하기 위해 애를 쓰지 않더라도 본인이 매진하고 있는 그 인간이 자신을 망치고 망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의사, 판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목사의 목회 일이나 복음 전파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백수라고 그 아무 일 없음을 통해서 본인이 망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인간치고 안 망하는 자없고, 실패 안 하는 자가 없습니다. 흔히들 본인이 고생한다고 여겨지만 이 세상에서 고생 안 하는 자는 없습니다. 사람의 형편은 본인이 정하거나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경을 집어넣으신 겁니다. 인간사(人間事)는 인간이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요하지 않습니다.
전도서 3:2-8에 보면,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놀이동산의 롤로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모든 인간들은 나름대로 굴곡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것을 고생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담백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런 게 다 주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야” 이 사람은 왜 이리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가 관리할 인생이 더는 없어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2에 보면, 인간은 손 쓸 수 없는 지경이 된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를 졸졸 따라다니듯이 세상을 삽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쥐고 있는 악마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도 실패한 겁니다.
자신의 일의 가치를 못 놓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다름입니다. 자신이 복음 전파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평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인간을 이미 죽은 자로 보십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따라서 죽음을 야기한 동기를 더는 좋은 일이라고 우기면 아니되는 겁니다. 차라리 자신이 시도하는 모든 일은 이미 죽어야 될 자가 죽은 티를 낸 모습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2:7에서는, 죽었던 자를 주님이 건져내시면서 이미 정해진 자리에 앉혀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당연히 죽은 자를 살렸으니 죽은 자가 자기 구원에 영향을 제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어떻게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고 주님만 자랑할 수 있을까요?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늘에 앉아있는 자들을 이 세상에 수사관으로 파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살해당한 살인사건을 수사하게 하시는 겁니다. 철저하게 파헤치게 합니다. 이게 성도의 사명입니다. 왜 인간은 하나님을 죽였는가? 그것은 바로 세상에 따로 힘과 권력과 돈으로 천국을 만들려는 시도 때문인 것을 드러나게 하시면서 이 작업에 이미 성도들이 가담된 죄인임을 성도에게만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이로서 온전히 주님의 은혜과 하신 일만 감사합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천하의 죄인으로 만들어주심과 그것을 알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20강-예레미야 4장 1~2절(자랑)22100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1055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방금 본문 1절에 보면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라고 했는데 그러면 여호와 말고 다른 쪽으로 돌아갈 곳을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거든요. 여호와 말고 다른 쪽으로 돌아간다는 이 본문 말씀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구약을 철석같이 믿는 유대인들은 여호와께 돌아오려고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 돌아오려는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다 허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려는 그들의 노력이 다 허사로 끝난다는 말은 그들뿐만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못할 그러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본체에서 끊어졌다고 규정할 수가 있어요.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끊어진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끊어진 것을 무시하면 안 되죠. 끊어진 것을 우리 쪽에서 이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형편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여호와께 돌아가려고 애를 쓰던 그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면 그게 결국 우리의 사정이에요.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실패합니다. 끝!
로마서 2장 17~19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이런 너희들이 결국은 끝! 실패했다는 거예요. 시도를 안 해본 것이 아니고 온갖 시도를 다 했는데 끝이에요.
그 원인은 유대인 본인도 몰라요. 지금도 모르고 있어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무신론(無神論)자이지만 그중에서 대략 18% 정도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이렇게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고 여호와께서 구약에 지켜야할 것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호와를 안다고 여기는데 실상은 몰라요. 그 모르는 이유가 로마서 2장에 보면 나와요.
로마서 2장 28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라고 나와요.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이스라엘이라고 여기는 것은 겉면만, 형식만, 겉모습만 유대인이고 이스라엘이고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거예요. 겉면만 그렇지 속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할례를 행할 때 껍데기 육신에만 할례를 행했지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 말씀이 로마서 2장 28절에 나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신약에 성도인 우리도 지금 이 말씀을 보고 있어요. 이걸 보고 있으면서 ‘이건 남의 일이고 나와는 상관없다’라고 보면 안 되고, 그들이 어디서 실패했고 왜 실패를 했는지, 그들과 우리가 본성이 같은데 우리는 어느 대목에서 도대체 성공한다고 자부할 수 있느냐를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로마서 3장으로 넘어옵니다. 거기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너희들이 율법을 보는데’, 그들이 오늘 예레미야 본문을 역시 봐요. 예레미야 4장 1~2절도 역시 율법이니까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이게 율법이거든요. 이 율법을 유대인도 보고 오늘날 우리도 보면서 그들은 성공했다고 자부하고 우리는 이래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단정 내리고. 도대체 어디서 견해 차이가 나는 겁니까? 그들의 열심이 부족했습니까? 그들이 정신을 딴 데 팔았습니까? 아닙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기능 자체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망하게 하려고 율법을 줬다는 사실을 그들은 상상도 못 한 거예요.
‘설마 하나님이 인간을 망하게 하려고 그러셨을까?’ 설마가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인간은 자기 하는 일이 자기를 망치는 일이에요. 의사가 의사 때문에 망해요. 판사가 판사 때문에 망하고, 목사가 목사일 한다고 자기가 망해요. 백수입니까? 백수가 자신을 망하게 해요. 인간의 자기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일인데 그 일을 통해서 네가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체험하게 하려고 평생 그 일을 허락하신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말이죠. 나의 일이. 이제 연세 많아서 다른 것은 할 것이 없고 손자 키우잖아요. 손자 키우면서 망하고 계신 거예요. 인간은 뭘 해도 망합니다. 유대인들이 이걸 몰랐어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인간의 본성은 안 망하기를 바라는 본성, 이것이 마귀의 속성인 것을 그들은 감히 상상도 못 했어요.
남은 망해도 나는 안 망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망하게 해도 우리나라는 망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이것이 악마의 본성인 것을 상상도 못 했죠. 다른 아파트 불 나도 내가 사는 아파트 불 안 나면 좋겠다는 이것이 악마의 근성인 것을 어떤 인간이 상상하겠어요. 인간은 자기 행복을 위해 살고 망하지 않으려고 교회 오잖아요. 그러니까 교회가 엉망이죠.
이게 끊어졌음을, 끈이 떨어져 있음을 아주 무시했던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끈이 끊어졌기 때문에 율법이 아니라 소위 믿음이든 소망이든 사랑이든 뭐라고 해도 이 끈은 절대로 이어지질 않습니다.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끊어진 끈은 이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절망이네?’라고 하잖아요. 절망하세요. 왜냐 하면 절망이 우리의 본 모습이기 때문에. 이 모습이 우리 본 모습입니다.
제가 이렇게 극단화해서 밀어붙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거는 오늘 본문 4장 2절에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라는 ‘나로 자랑한다’라는 것이 현재의 우리 상태에서는 불가능하고 어떤 조치가 있고 난 뒤에 주만 자랑하는 절차가 있어 줘야 가능하거든요. 그 궤도가 있어야 해요.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방금 제가 한 말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악마)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 영에서 네가 숨 막히고 벗어나질 못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악마에게서 벗어나지를 못했다는 것을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이름에도 그게 담겨있어요.
예수님 이름의 뜻이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미 그 출발선, 토대가 구원이라는 것은 이미 죄 안에 들어있는 자를 대상으로 하는 거예요. 한쪽은 죄에 걸치고 다른 한쪽은 의에 걸친 이런 인간은 구원하지 않습니다. ‘다리 하나 도로 집어넣어!’ 철저하게 죄 속에 집어넣어야 해요.
조금이라도, 한 다리라도, 한 발가락이라도 의로운 쪽에 있으면 안 되고 의로운 것이 나오면 안 됩니다. 그거는 가짜 복음이고 사기입니다. 보이스피싱은 돈만 뺏기지 이건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거예요. 철저하게 이건 조금이라도 인간의 의가 나오면 사기입니다. 헌금할 때 진심으로 정성으로 기쁨으로 성령으로 드렸다는 것은 전부 다 사기입니다.
인간은 헌금할 때 그렇게 온전하게 할 수가 없어요. 전도할 때도,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고 인간에게는 온전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것들을 하느냐. 그 온전함이라고 우기는 그 자체가 죄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끄집어내게 하시는 거예요. 부모에게 공경하고 효도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하나님 섬김 같은 그런 건 있을 수 없죠.
요한1서 3장 16절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을 사랑해 놓고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안 바치거든 그건 사랑도 아니라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고요. 같은 성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랑의 단어도 입에 담지 말라는 겁니다. 그걸 누가 실천에 옮깁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세요. 가서 돈 3천만 원만 땡겨달라고 하세요. ‘같은 성도인데 돈 3천만 주세요’ 왜? ‘외제 자동차 한 대 사게’라고 해보세요. 어림도 없죠. 목숨은 고사하고 3천만 원도 안 빌려주는데. 인간은 혼자 있으면 참 착하고 성스럽고 성인군자입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누가 자극을 주면 그 순간 흩어져있던 자아가 응집력을 가지고 방어태세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스스로 ‘정신 바짝 차려라. 손해 보면 안 된다’라고 단속합니다. 이게 인간의 자아입니다. 분명히 어질고, 부드럽고, 다 퍼줄 것 같은데 막상 사태가 하나 터지게 되면 나부터 챙기는 것이 이건 본인도 어떻게 말릴 수가 없어요. 본성이에요.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못 고칩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이렇게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상태이고, 제가 인간은 이미 죽었다고 했지요.
여러분이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예요. 성경대로 에베소서 2장 1절에 의하면. 그런데 악마가 쥐고 있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죠.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여기 에베소서 2장 4~6절에 보면 성경에서 가장 난해하다고 생각되는 구절이 나와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구절. 읽어도 설명은 안 해줘요. 너무 어려워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게 자기가 죽지 않았다고 하면 살았다는 것도 못 느끼게 되어있거든요. 자기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살았다는 것이 비로소 감지되는 거예요. 6절에 계속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늘에 앉히시니. 하늘에.
이 구절이 인간들은 제일 어렵다고 이야기해요. 이미 너희는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이 가당찮은 이야기입니까? 장차 하늘에 앉을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장차 아니고 이미 하늘에, 하나님 옆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왜 성경에서는 이런 인간이 납득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해 줍니까? 성경이 납득하라고 준 게 아니에요. 납득 못하는데 이게 현실이 되었음을 수긍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소급해서.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것을 성경을 보는 족족 그걸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인생치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자기 인생이 가장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나보다 더 힘든 사람 나와보라고 해.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같이 힘듭니다. 나만 고생했다고 하는데 고생 안 한 사람 없어요. 전부 다 고생해요. 이건희 삼성 회장도 고생하다가 죽었고요, 그 아들도 고생하고, 모든 인간이 다 고생하고 있어요.
그런데 고생한 티를 모르는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똑같은 관점이라면 다들 고생하는데 관점 자체가 달라진 거예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인생이 복잡해서 롤러코스터 타는 것처럼 타고 있다고 봅시다. 제가 전도서 3장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전도서 3장 1~8절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이것을 롤러코스터 타듯이 모든 것을 경과 했다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걸 보고 다른 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까, 아니면 참 편안한 인생이라고 합니까? 고생 많이 했다고 할 거예요.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겪더라도 이걸 단백하게 보는 사람, ‘그게 뭐 내 때인가? 주께서 웃을 때도 주었고, 울 때도 주었고, 관절이 아플 때도 주었고, 좀 낫게 하실 때도 있고, 어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때도 있었고 헤어질 때도 있었고, 그게 내 때인가? 주님의 때지’라고 단백하게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은 본인이 고생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로 봐요. 왜? 하늘에 앉아 있기 때문에. 하늘에 앉아 있는 이미 끈이 이어진 상태에서 이미 모든 것이 하늘나라에 합격이 되어있는, 천국에 합격 된 상태에서 지상에서 무슨 환란이나 어려움도 못 견딜 게 있겠습니까. 그건 그냥 만화책 보는 것과 똑같은 건데요. ‘주인공이 헤어졌네. 어, 만났네’라고 이것을 내 일이 아니라 주께서 일으킨 일에 자기는 그냥 만화책에 주인공 정도로만 생각하는 거예요.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결국 지금 상태가 하늘에 앉아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어떤 성도가 이렇게 할 때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너는 어떻게 그것을 믿게 되었느냐?’라고 묻게 되면, 그게 바로 에베소서 2장 8절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이걸 믿어? 이거 네가 믿었지?’라고 하면 우리는 ‘아니. 내가 안 믿었어’라고 하죠. ‘그러면 어떻게 그런 상태가 되었어?’라고 다시 물으면 우리는 ‘이건 나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라고 하는 거죠.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왜 자꾸 빠뜨리십니까? 그걸 빠뜨리면 안 돼요. 그건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일은 반드시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전제로 해서 그다음에 선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뭐냐 하면 오늘 본문 예레미야 4장 2절에 말씀처럼 여호와만 자랑함이 도드라지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내 실력도 아니고 내 믿음 실력도 아니죠. 말씀이 말씀대로, 약속이 약속대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 결과물로 이 땅에서 존재하는 겁니다. 결과물로. 그러면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하늘에 앉아 있으면 될 텐데 왜 이 땅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만화 속 주인공이든 뭐든 일단 당하면 아프잖아요.
그런데 왜 살게 하시는가. 그게 자기가 편안하고 자기가 구원받았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서 주의해야 해요. 내가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게 되면 이건 주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을 자랑해야 해요. 심지어 자기가 전도하는 것도, 복음 전하는 것도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사도바울이 한 말입니다.
복음 전하니까 나는 너보다 낫고 너보다 귀한 존재라는 이런 게 아니고 이것도 나는 부득불 하는 것이지 너는 너의 할 일 하고 나는 나의 할 일 하면 되고 자랑할 것은 주님만 자랑하면 된다는 이것이 주의 뜻이거든요. 이것이 바로 마음에 할례받은 사람입니다. 마음에 할례라는 것은 주께서 약속을 이룬다거나 말씀을 이룰 때 네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결과적으로 우리가 기쁘게 흔쾌히 받아들이는 마음 상태를 말해요.
내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죠. 인간은 열심히 하면 자기 자랑밖에 안 나오거든요. 고린도전서 1장 29절에 보면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일이냐 아니냐의 그 성격을 규정할 때 이것이 기준이 돼요. 뭔가 대단한 일을 했는데 이건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한 것으로 자랑 못 하게 하는 그 방식만 하나님께서는 고집하십니다.
실컷 인간을 부려놓고도 내가 못 하는 일이었다고 하는 식으로만 계속 결과가 나올 때 그게 주의 일이지, 이건 하나님도 도와줬지만 나도 했다는 식으로 나오면 그건 주의 일이 아닙니다. 그건 성령의 일이 아니에요. 인간 육체의 일이고 마귀의 일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 보면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비로소 예레미야 4장 2절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랑하리라”가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서 완성이 되잖아요.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게 되는 사람이 없는데 생기게 할 것이다. 약속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이 지상에서 질곡에서 고생 고생들을 이렇게 하느냐. 그것은 바로 주님을 자랑하기 위함이라고 제가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수모를 당했잖아요.
수모를 당하시고 결국 재판이라는 이름의 살인사건이 터졌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살해당하셨어요.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하늘에 이미 앉은 자로 하여금 그 사건의 내력과 원인과 주모자와 그에 대한 모든 계기, 그러니까 거기에 투입되는 원인들을 조사하라고 우리 성도를 파견하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동부경찰서 수사관이라고 일단 봅시다. 그러면 동부경찰서 관할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드라마 시작되니까 몰입하시기 바랍니다. 한 아이가 있는데 재벌 집 셋째 아들이다. 원래 셋째 아들이 보통 철이 좀 없어요. 이 셋째 아들이 마약 먹고 까불다가 살인을 했는데 동부경찰서 서장이 수사과장에게 “덮어. 그냥 덮어”라고 한 거죠. 이건 어디까지나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검찰도 이미 재벌 집 편들이 포진되어서 쉬쉬하고 언론도 조선일보까지 장악되어서 전체가 다 사건을 덮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단 형사가 자기 명예를 걸고 이건 끝까지 파헤친다고 결심을 한 거예요. 옛날 드라마는 보통 경찰관 말단에서 나오는데 요즘은 말단 검사가 나서서 하고 하다 하다 이제 천 원짜리 변호사도 나와서 수사해요.
성도에게는 사명이 있는데 뭐냐 하면 십자가라는 살인사건을 추적해서 그 원인을 파헤치는 사명감이 주어져 있는 거예요. “누구야? 하나님을 죽인 자가?” 끝까지 사태를 파악해서 살인사건의 범인을 색출하는 거예요. 이게 성도들의 특징입니다. 성도들의 공통점이고요. 성도가 각자 하는 일이 달라요. 직장도 다르고요.
각 직장에서 물론 월급 받기 위해서 일하지만, 월급날은 챙겨야죠. 보너스도 챙기고 잔업수당도 챙기는데 그게 목적이 아니고 이 회사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살해한 살인사건에 그 범인이 여기에도 있다는 그것을 한번 색출해 보세요. 증거를 수집하시고, 지문조사도 하시고, DNA도 조사하시고, 왜 인간은 하나님을 그토록 미워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그 이유를 찾아보세요.
정 안되면 청와대 가서, 아니면 용산까지 가서라도 모든 매사에 이유를 찾아내면 됩니다. 너무 허황한 이야기를 한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때도 거기서 찾아볼 수가 있어요. 병원에 앉아서 대기하면서 들려오는 소리, 의사와 환자가 주고받는 소리를 통해서 오직 사람은 돈이 있어야 살고, 명예 때문에 살고, 인기가 있어야 살맛이 나는 그런 것들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들었던 소리거든요.
악마의 소리가 온 지구상에 확 퍼져있잖아요. 한국이고 일본이고 관계없이. 어디를 가더라도 곳곳에 퍼져있으니까. ‘아, 저거구나’ 돈과 인기와 세상의 권력을 쥐는 그것이 동기(motivation)가 되어서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살해당했다는 그것을 찾는 겁니다. 참 쉽지요. 오전에도 쉽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오후에도 쉽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범인을 찾아야 해요. 범인이 누구였습니까? 굳이 말을 해야 합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죠. 우리가 바로 범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범인을 수색하라고 우리에게 이 삶을 살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예수 잘 믿었다는 자랑 일체 못하게, 내가 봉사했다는 자랑 못 하게, 내가 선교했다는 자랑 못 하게, 그저 ‘주여 제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고백,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되는 고백, 그때 십자가만이 자랑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남들 욕할 거 없이 한통속으로 굴러가는 세상임을 너무나 살아가면서 체험합니다. 하나님 죽은 거 관심 없고 누가 누가 행복하냐만 관심 있는 세상에서 같은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범인인 것을 이제 구원받은 입장에서 찾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