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죽음의 위력
2022년 10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5-9
(4:5)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4:6) 시온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앙과 큰 멸망으로 이르게 할 것임이니라
(4:7) 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왔으며 열방을 멸하는 자가 나아왔으되 네 땅을 황폐케 하려고 이미 그 처소를 떠나 나왔은즉 네 성읍들이 황폐하여 거민이 없게 되리니
(4:8) 이를 인하여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대저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니라
(4: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왕과 방백들은 실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
하나님께서는 연출가이십니다. 유다로 하여금 시온성에 피하라고 하시면서도 유다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망하는 코스에 들어서게 하십니다. 그리고 유다로 하여금 자신의 나라가 완전히 망하는 것에 대해서 모든 유다 나라가 통곡하고 낙망하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왜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이런 식으로 의도적으로 연출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달리 죽음의 위력을 미리 맛봐야 합니다. ‘그냥 살다 죽을 때 죽겠지’가 아니라 죽는 이유는 미리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주님의 진노 앞에서 이끌려가게 되는 생애입니다. 여기에 대해 인간은 계속 엄연히 자기가 살아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살아 있으면서 행하는 자기 행함에만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 결과를 소중하게 붙들게 합니다. 이스라엘도 어느새 모르게 이방나라화 되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냥 방치 않고 찾아오십니다. 선지자를 통해서요. 그런데 이 선지자의 외침이 그냥 견해나 의견제시가 아닙니다. 나팔입니다. 아모스 3:6에 보면,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즉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앞장 세워서 자기 백성을 계시로 자극하시고 자각시키시는 겁니다. 이것은 분발시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결과만 붙들고 사는 그들에게 과정도 중요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바람직한 결과를 내다보면서 과정을 견디는 식으로 삽니다. 하지만 주님에게는 그런 인간들의 오해와 오류조차도 주의 일이 되도록 유도하십니다.
인간들의 무지와 불신앙을 들추어내는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으니 당연하 그 살아 있을 동안에 행했던 행함을 내세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만큼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되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주님의 취지가 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기가 자기를 공격하는 민족이어야 한다는 점을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방민족과의 차이점은 분명 있어야 합니다. 바벨론이라는 이방민족을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일으켜서 이스라엘 전 지역을 황폐케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더는 그 약속의 땅이라는 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실망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자기 나라의 역할과 사명이 거기에 있음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 곳’에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것’에 의해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약속의 땅이라는 부동산을 붙들고 그것을 내 것이라고 자부하면서 살 것이 아니라 이것보다 더 중요한 ‘약속 안’에 사는 방식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방민족의 왕이나 백성들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계시가 없기에 기분따라 삽니다. 예를 들면, 폴란드 왕이 심심해서 사냥하려 숲으로 나아갔습니다. 짐승들이 그날 따라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시럭”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나타났습니다. 폴란드 농부였습니다. 농부는 말합니다.
“나는 사슴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냥이 잘 안되어서 기분이 몹시 나빠있었던 왕은 들고 있는 총으로 그 농부를 쏘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신하가 황급히 달려와서 왕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왕이시여. 그 농부는 ‘나는 사슴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쏘십니까?”라고 하니 왕이 하는 말이, “나는 그 농부가 ‘나는 사슴이요’라고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쏘았다는 겁니다.
이것아 말이 안되지요. 하지만 모든 불신자는 이와 같습니다. 인간은 자기 기분을 자기가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니까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연출하시는 겁니다. 다같이 망하면서도 이스라엘은 그 가운데서 비로소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뭔지를 알아야 하는 겁니다.
오늘날 모든 인간에게 있어 죽음도 이와같습니다. 인간들은 살아가다가 그 끝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도만큼은 이스라엘처럼 뭔가 불신자와 다른 요소가 담긴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미리 죽음을 맛봄’입니다. 자살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원천에서 나오는 복음이 바로 그 계시입니다.
성도도 일상적으로 기분 따라 삽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 기분 따라 사는 것이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망해야만 하는 근거임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도 이방민족적임을 압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계시의 찾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는 현상임을 압니다.
인간이 죽어 마땅한 이유가 바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즉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행함을 공격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자기 행함의 결과에 대해서 늘 마음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행함과 무관합니다. 그것이 이사야 61:1-2에 나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안식일날 성전에 이 말씀을 펴놓고, 이 말씀이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눅 4:7-21) 희년이란 인간이 그동안 행했던 것과 전혀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그저 주신 상태로 되돌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정 지역에 국한 되는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서 ‘것’이 됩니다.
인간의 행함을 무효로 돌리므로서 구원된 상태가 도리어 인간의 모든 행함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 20:12-15에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미리 이 사실을 계시로 파악된 자들입니다. 자신의 행함에 대해서 필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사실을 살아 생전에 알게 된 자들입니다. 희년이란 그 용서의 환경에 미리 속하면서 주어지는 희년의 계시에 늘 감사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기분 따라 사는 것과 약속 따라 사는 것의 차이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22강-예레미야 4장 5~9절(죽음의 위력)22102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장 5~9절입니다. 구약성경 1056페이지입니다.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시온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앙과 큰 멸망으로 이르게 할 것임이니라, 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왔으며 열방을 멸하는 자가 나아 왔으되 네 땅을 황폐케 하려고 이미 그 처소를 떠나 나왔은즉 네 성읍들이 황폐하여 거민이 없게 되리니, 이를 인하여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대저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왕과 방백들은 실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
하나님이 뮤지컬 무대를 연출하시듯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시온성 안으로 도피하라”라고 하시고는 그다음에 다른 풍경과 장면을 연출하시고 보여줍니다. 바벨론이라고 하는 세상이 놀랄만한 아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등장해서 “너희가 사는 이 땅을 전부 다 황폐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시고 그다음 연출은 “너희는 황폐한 시온성을 보며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라고 하시고 그다음에 하나 더 나오는데 “이것에 나 하나님이 너희를 향한 진노요, 분노인 것을 그때 너희가 경험할 것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일방적인 연출이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의 연극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특수성이 뭐냐 하면 산 자가 죽은 자를 관장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산자를 관장하고 고발하는 그 희한한 일들이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네가 살았다고 한다면 네가 죽는 이유를 품어야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죽는 것은 나중에 나이 들어보면 알겠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이유를 살아있는 내가 그것을 함유하는 거예요. 그것을 품고 가는 거예요. 이것이 이방 민족과 달리 이스라엘의 특수성이에요. 하나님이 분노하는 이유, 심판하시는 이유를 다른 민족에게는 감을 못 잡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그 감을 잡아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 죽음의 이유, 우리가 죽는 이유를 미리 당겨서 알아야 하는데, 죽는 이유를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그것을 약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보통 직장을 가는 남편들이 퇴근하면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가족에 대한 말하지 않는 약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약속이 가족 구성원을 묶어주고 있죠. 이것은 주님과 자기 백성과도 마찬가지예요. 비록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약속은 살아있게 하죠. 주의 강림, 주의 오신다는 그 강림이 오늘날 성도에게는 일찍 퇴근해야 하는 것처럼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떠나면 안 되는 그러한 약속의 지배를 받는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그런데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이유, 그 이유에 대해서 바로 오늘 예레미야의 본문이 무엇 때문에 강림하는지 이스라엘이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노와 진노로 찾아오신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관심 두지 않았던 이유가 우리 자신이 전부 다 기분파이기 때문에 그래요. 감정에 휘말려서 약속이 뒷전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인생 자체가 기분 따라 살아가요. 촛불집회 같은 거죠. 아주 기분이에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기분 따라 살아가는 거, 그거 하나 할 수 있어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기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개무시 한다는 그 점을 알아채는 그것을 인간이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기분 따라 살면 됐지, 뭐 약속이 뭔데?’라는 이것이 이방 민족의 특징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을 하나님이 연출하시는 연극무대에 내세웁니다.
내세워서 하나님 쪽에 속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다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리고 기분 따라 살아가는 이방 민족을 동원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잊어버렸던 약속을 되새기게 만드는 그러한 작업이 계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의 일상이 반복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인생의 위기다’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이방 불신자와 다를 바 없이 살아왔는데 ‘내가 성도 맞아’라는 특징이 뭡니까? 바로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보여준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반복해서 되새기는 거예요. 기분 따라 사는 것은 본능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냐는 거죠. 여러분은 인생에 그것이 전부 다입니까? 남들처럼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이 다였나요? 아니면 다른 요소가 있었던가요?
그 다른 요소가 뭐냐 하면 죽기 전에 죽는 이유부터 챙기는 거예요. 죽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사는 거예요. 이방 민족은 자기 기분이 전부이고요, 다른 것은 안중에 없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어요. 폴란드 왕이 사냥을 갔는데 사냥은 잘 안 되고 짜증만 나는데 앞에 농부가 지나가니까 농부를 짐승이라고 생각하고 쏘려고 했어요. 사람인 줄 알지만 자기가 왕이니까 왕은 뭐든지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농부를 총으로 쐈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가만히 낌새를 보니까 왕이 자기를 총으로 겨누거든요. 그래서 손짓을 하면서 ‘저는 사람이에요’라고 했는데도 왕은 자기 기분이 나쁘니까 사냥의 즐거움을 위해서 총을 쏜 거예요. 당연히 죽었겠죠. 그런데 옆에 신하가 농부가 하는 말을 듣고 왕에게 “임금님, 농부가 ‘나는 사슴이 아니에요’라고 했는데요”라고 전하니까 폴란드 왕이 하는 말이 “나는 ‘내가 사슴이에요’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라고 한 거예요.
이방 민족에게는 자신의 기분, 왕의 기분, 침략자의 기분, 이런 것들이 전부입니다. 푸틴에게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안중에 없어요. ‘우리도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냥 기분 따라 전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모든 인간이 그런 잠재력을 다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스라엘도 그런 식으로 살아왔었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뭐냐 하면 “그래 네가 기분 따라 사는 것은 이해해.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어. 하지만 달라야 해”라고 하시는 거죠. 뭐가 달라야 하냐면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서 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그걸 너희는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시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이방 민족이 우상을 섬기고 기분 따라 사는 나라 흉내를 내면서, 그걸 부러워하면서, 그렇게 그들은 살았는가.
그들에게 뭐가 있었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 거주자라는 그런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했으니까 이 땅만 붙들면 된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에 왔으니까 이 땅을 꽉 붙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땅이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그게 잘못이에요.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결과뿐만 아니라 어떤 과정 자체도 주의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 이스라엘은 모르고 ‘뭐 하나 소유했고 건졌으니까 이제는 뭐 대충 살아도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의 안식하는 땅에서 하나님의 안식하는 것으로 바꾸시고 이게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결과물인 안식하는 땅,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 것이다’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경로에 의해서, 어떤 원칙에 의해서 안식하게 하느냐입니다. 안식하는 곳이 중요하냐 안식하는 것이 중요하냐 할 때 곳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것은 결과니까.
매일같이 안식하게 하는 거, 매일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우리 마음을 안식하게 하는 그 원칙이 하나님에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을 하나님 약속의 현실성과 바꿔주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에 나팔 부는 겁니다. 나팔은 이스라엘이 임해야 할 사명 같은 겁니다. 나팔에 대해서 아모스 3장 6절을 보겠습니다.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라고 여기 재앙이라고 했지요. 이스라엘 약속의 땅인데 젖과 꿀이 흐르고 평화로울 이 약속의 땅에 재앙이 임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죽음 같은 겁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를 몰라요. 뚝배기가 언제 떨어질지를 모르고 인간은 언제 사고가 날지를 몰라요.
그것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 아니고, 사고 나고 내가 소멸하는 이 자체를 하나의 약속 구성요소로 와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이 땅은 네가 갖고 저 부동산은 네가 가져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안식하는 것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6절부터 19절까지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라고 하시는데 이게 희년입니다. 희년은 시간이지 장소가 아니에요. 희년의 때가 되면 희년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희년의 약속의 요소를 소낙비처럼 계속 내리게 하는 중인 거예요.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매일같이 맞는 겁니다. 주의 약속을 은혜로, 선물로 비처럼 떨어뜨려서 맞게 하시는 거예요. 그냥 계속해서 선물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뭐냐 하면 이것은 내 것이라고 자기가 가져가서, 지키고, 키우고, 그것을 유지하고 결사적으로 붙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어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뭐지? 내 이름을 적어놓을 수 있는 것이 뭐지? 이런 것들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도 똑같이 그 짓을 했어요. 은혜의 해인 희년이라는 것은, 희년에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누가복음 4장의 말씀처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 자에게 보게 하고, 잡힌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이것이 은혜의 해에 계시한 약속입니다.
그러면 여기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이 자들은 왜 이렇게 처참한 환경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는 그러한 속성이 자기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연출된 상황이 뭐냐 하면 ‘내가 나팔을 불 테니까 네가 너를 공격 한번 해봐라’라는 그런 말이에요. 너 자신이 너를 공격하라는 거죠. 이건 정말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거죠.
팝송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제목이 너무 맘에 들어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7자인데 ‘무사히 돌아오길’이에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주님의 약속은 너희가 찾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찾아가는 식으로, 찾아가서 너희를 싸잡아서 주께서 너희를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시는 거예요. 어디 안으로? 약속 없는 곳에서 약속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나의 것에서 주께서 하시는 일 안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돌아가면 뭐냐. 돌아가면 더는 나의 행한 것으로 내가 가질 수 없는 상황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상황이 요한계시록 20장 12~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도 참 어려운데 읽어보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지옥불)이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죽음을 미리 맛보지 않고 살아있을 경우에는 뭐만 기대하느냐 하면 ‘내가 행했잖아요. 행했잖아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했잖아요’라고 행함만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행위에 대해서 자꾸 의미를 두는 겁니다. 주께서는 인간이 행하지 못한 것이 약속인데 그 약속을 미리 이스라엘에게 줬는데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을 흉내 내면서 자기가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이것도 행했잖아요, 행했잖아요, 자꾸 행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죽음 이후에 있었던 일을 요한계시록 20장이라는 돈도 얼마 안 드는 이 책을 통해서 다 알려줘 버린 거예요.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있지?’가 되는 거예요. ‘내가 어느 부동산을 차지하고 있지?’가 아니라.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 일을 성경책을 미리 주셔서 네가 죽기 전에 목숨 붙어 있고 심장 뛰고 있을 때 미리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희년이라는 겁니다. 희년은 기쁨의 날이에요.
자기 행한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를 두지 말라는 주의 약속입니다. 내가 찾아갈게. 네가 열심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찾아갈게. 희년 가지고 찾아갈게. 그럴 때 내가 속해있는 이 세상이 눌린 세상이고 깜깜한 소경들의 세상이고 내 행함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주께서 분노하시는 세상이에요. “이스라엘아, 내가 이방 바벨론 세워서 연출할 테니까 나팔 불 때 네가 너를 공격해 봐라”라고 하시는 거죠.
이것이 바로 지난번에 이야기한 ‘돌아오라’라는 말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라. 그러면 요한계시록 20장 마지막에 15절이 뭐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라고 나옵니다. 앞에 12절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되어있는데 생명책과 행위책 두 곳에 쓰여있어요.
두 책이 있는데 행위책에 기록된 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지옥불에 들어갑니다. 왜냐 하면 행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죽기 전에 있었던, 살아있을 때 본인이 행했던 모든 것을 기록한 책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행위책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미리 맛봐야 하는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아이고, 살다 보면 뭐 죽겠지’라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은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그 사람은 생명책에 존재를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듯이 그렇게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그렇게 그냥 가요. 만취한 자동차처럼 편의점이고 뭐고 그냥 박아버립니다. 브레이크가 있어야지요. 없으니 나팔소리고 뭐고 들리지 않아요. 주께서 나팔소리 들리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약속의 땅은 그냥 은혜로 주신 거예요. 행함이 아니라 그냥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주신 겁니다.
이곳이 나의 곳이라는 게 아니라 그냥 주님의 생명 안에 들어온 거예요. 생명의 계시로 그냥 날마다 우리 안에 생명의 자리가 형성되는 겁니다. 어떤 자리든 간에. 끝으로 이 말씀 드리면 왜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가 침범하게 하시느냐면 ‘네가 포로 잡혀가더라도, 네가 쫓겨가고 모든 것이 황폐하더라도, 너의 소유한 것 다 날아가더라도, 하나님의 진노와 그 심판의 나팔소리를 너의 품에 품어라’라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본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내 부동산보다 더 앞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의 특수성이에요. 이게 죽음의 위력인 거예요. 하나님의 예수님의 죽으심의 위력이 나에게 생명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드라마를 잠시 봤는데 죽음의 위력같은 것이 확 들었어요. 죽을 때 보람상조 장례사들이 있는데 그 장례사들이 원래 편안히 모시는 일을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인데 난데없이 장례사가 나서서 저 아저씨랑 저 아줌마랑 바람피웠다고 사진 쫙 뿌리는 일을 하는 거예요. (일당백집사)드라마 1회에서 나왔어요.
보면서 ‘와, 저것이 죽음의 위력이구나’라는 것이 확 왔지요. 과거에 네가 살아있을 때 어떤 행동을 했는지 확 뿌리는 거예요. 왜 진작 자기를 공격 안 했어요? 내 행함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왜 진작 공격 안 합니까? 내가 생명 얻는 것은 주의 덕분이고,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고, 희년에 완성하신 십자가의 은혜이고, 죄 사함의 용서가 나에게 영생을 준다는 생각을 안 하고, 왜 아직도 죽어가면서 자기 행함을 계속 쥐고 네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를 비교하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 민족이, 멸망 받을 이방 민족이 그런 짓을 한다고 이스라엘에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분대로 사는 거, 자기 행함의 가치와 의미를 챙기는 거, 불신자들이 그렇게 하고, 신자인 우리도 같이 따라 하고 있는 현실에 있습니다. 차이점이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죽고 난 뒤에 있는 생명책에 죄 사함의 능력이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희년으로써 미리 작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