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2022년 10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22-25
(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3: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3:24)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의 어렸을 때로부터 우리 열조의 산업인 양떼와 소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3:25)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는 수욕에 덮이울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열조가 어렸을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왔다’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진정으로 돌아온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끄럽다, 수치스럽다’는 것을 서슴없이 내어놓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어느 인간들이든지 자진해서 자신의 근원을 노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알더라도 숨기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문제점은 자신을 인간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근원으로 돌아오라’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서 나간 모든 태도와 행동은 아무리 복잡한 과정과 연쇄적 경과를 거치더라도 자기를 겨냥해서 돌아오는 결론을 잡을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자신의 근원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 옳음, 자기 잘남으로 귀결되는 경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존의 인간과 구분지으십니다. 인간 자체는 우상입니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시작과 끝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돌아갑니다. 당연히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모래 사장에 누가 먼저 지나갔다면 거기에 발자욱이 남겠지요. 그 발자국 주인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어떤 정보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것이 흔적이요 이것이 형상입니다. 일반 모래사장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남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에 자신의 흔적을 남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반인간, 즉 우상과 통하는 이방민족과 접촉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에 그많은 소와 양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지상의 모형판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에서 내려다보시는 관점을 유지하십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 행진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나르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출 19:4)
하나님께 제대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만 나올 수 있는 고백 중의 하나는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렘 3:23)의 내용이 이를 말합니다. 즉 인간들이 하는 기도와 이스라엘이 하는 기도가 달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차이점은 마태복음 6:7-8에 잘 나와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기서 이방인의 기도가 어떠한 지를 압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기도는 반드시 ‘너희 아버지’ 관계가 수립된 조건 하에서는 가능한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고 난 이후의 기도는 모든 기도가 예수님에게 일단 집합되어야 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결과는 결코 기도한 당사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는 곧 이방인이 모든 기도나 이스라엘이 하는 모든 기도가 기도한 당사자가 예상한 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꼭 기도의 응답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로만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어떤 일인지는 사전에 인간에게 들킬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식으로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곧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옴’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오려면 전의 인간이 아니라 예상 못할 다른 인간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나는 거짓 것을 섬겼습니다’는 고백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곧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그런 유일한 민족에게서 나오는 특이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다윗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곧 다윗에게 일어날 일이 이스라엘 전체에 공통적으로 일어날 일이라는 구조가 바로 ‘다윗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계약의 상대자로 삼는 방식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선택된 자입니다. 왕과의 맺은 결과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존립여부가 결정되는 겁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다윗왕은 식음을 전폐하고 밧세바 사이에서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을 위하여 7일 동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아이를 밧세바 몸에서 사산시키지 않고 출생시켜 놓고서는 일주일이란 수명을 허락합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자존심은 죄다 다 끌어모아서 간절하게 기도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어떠한 존재이어야 하는 것은 이미 신명기 17:18-20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즉 율법을 ‘곁에 두라’는 것은 율법 자체가 왕의 직위 안으로 스며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우상화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에 율법이 주사액처럼 스며들게 되면 강렬한 저항이 일어납니다. 그 강렬한 저항이란 다름 아닌 자기 의로움입니다. 마지막 남아 있는 자기 가치성.
율법은 이것을 들추어내면서 통과해서 이스라엘의 근원에 도달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복이 나옵니다. 인간들은, 본인들이 잘 되기 위해서 ‘바르게 살면 복받는다’고 우깁니다. 하지만 실은 ‘복’ 자체만이 바른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3에 나오는 말씀 같은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이란 자기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 거덜 난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성도를 이렇게 만들었을 때, 바로 이 상태가 유일하게 복된 상태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자만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즉 내 안에 ‘나는 아직도 가치 있어요’라고 외친 그 어떤 건덕지도 남아 있지 않게 만드는 바로 이 상태가 복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받기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 고통조차 무의미하기에 괴로운 겁니다. 힘들어도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면 그 어떤 수모도 감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생해도 결국 자신이 가치없는 존재로 결론지어질 것을 생각하면 인간들의 마음은 괴로운 법입니다.
복, 즉 하나님께 돌아옴은 이런 상황에 처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감사하고 상태를 뜻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인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19강-예레미야 3장 22~25절(흔적)22100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장 23~25절입니다. 구약성경 1054페이지입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의 어렸을 때로부터 우리 열조의 산업인 양떼와 소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는 수욕에 덮이울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열조가 어렸을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양 떼와 소 떼, 이것들은 구약시대의 정경이죠. 양 떼와 소 떼를 키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 부르시면서 동행해 왔는데요, 그 이스라엘을 하나의 모형판으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그 모형판을 하나님께서는 위에서 바라보는 안목으로 구약성경을 이끌어왔습니다. 주일학교에서도 설명했습니다만, 독수리 날개에 얹어서 이동했다는 것은 독수리처럼 위에서 보는 안목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밑에 있는 이스라엘은 수평적이어서 그저 자기 코앞에 있는 거, 곧 자기 생활에 일어나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 수평에서 수평으로 이동하고, 움직이고, 살길을 찾아서 열심히 헤매는 보통사람들이 사는 그런 인간의 한계점을 유감없이 마음껏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에 있는 안목과 땅에 있는 안목의 차이점을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하기까지 그대로 다 보여줬습니다.
예를 들면 땅에 있는 사람들은 바르게 살면 복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르게 살면 복 받는다고 율법이 이야기하니까 바르게 살면 복 받는다고 이해했는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고 복된 것이 바로 바른 것이라고 이렇게 나온 거예요. 복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 그 처지가 남들 보기에 수치스럽고 우스꽝스럽다고 할지라도 그게 곧 복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늘의 안목이 아니라 땅에 있는 안목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 경험하게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23절에 보면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라고 되어있어요. 떠드는 무리는 바로 기도원이죠. “쭈여~쭈여~”라고 떠드는 겁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거죠. 인간들이 기도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고통받는 것이 괴로워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고통마저 무의미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예요.
고통 해서 어떤 결과가 나오면 까짓것 이런 고생 해 보겠는데, 이런 고생 해서 좋은 결과 나오면 뭐든 하겠는데, 그래서 이런 고통이 미래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그런 소망 때문에 참아낼 수가 있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백날 고통 해도 이게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해볼 것 다 해봤는데 의미가 없다는 거죠. 뭐 어쩌라고? 이게 그렇게 허무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이스라엘도 경험하고 오늘날 우리들도 경험한 것이지만 우리가 기초를 몰라요. 인간은 눈에 보이는데 인간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기초를 모릅니다. 인간이 뭐냐고 물어보면 이미 나왔던 인간으로 설명해요. 그거 말고 인간이 어디서 나왔느냐를 설명하라는 거죠.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이런 게 뭐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요?
학교에서 진화론 배우면서 그거 배우잖아요. 50만 년 전에 두 종족이 유인원에서 나왔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고, 요새는 또 멸종 안 했고 둘이 교배를 했다고도 하는 다른 말들을 복잡하게 하기도 하고, 그렇게 빙하기에 와서 둘 다 엉망이 되었지만, 다시 불굴의 의지로 일어서서 그때부터 어떻게 되었다는 그런 주장들이 있어요.
인간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과학이 아니라도 인간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이 있어요. 말씀드릴까요? 인간의 몸속에 있는 모든 것은 우주의 일부라는 겁니다. 이것은 과학 이전에 불교고 뭐고 모든 종교에서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몸은 우주의 일부다. 인간은 어디서 나왔나? 우주의 일부가 뚝 떨어져 나왔다.
그것을 오늘날 천문학이라든지 오늘날 천체 물리학에서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생명은 어디서 나왔는가? 유성에서 생명으로 나왔다. 생명은 어떤 형태인가? 물의 형태이다. 유성에 물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조건이 맞아서 인간이 되었다. 그런 이야기들이죠. 인간의 출처는 지구이지만 생명의 출처는 외부에서 왔다는 것이 외계행성설 이잖아요.
그거 하겠다고 비싼 돈 들여서 화성에 가서 수증기 성분 찾는다고 수조 원을 들여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이 우주의 일부라는 말은 인간 자체가 우상의 일부라는 뜻이에요. 여기 24절에 보면 “부끄러운 그것” 이게 우상이거든요. 인간의 출발은 우상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출발은 하나님이에요. 이걸 구분할 줄 알아야 해요.
이스라엘은 인간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언약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이름에서,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몸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디로 회귀 되어야 하는가. 이스라엘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이스라엘 본래의 자리가 누구시냐, 바로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한다고 요한복음 1장에 나오죠?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는 우상이 출발점이거든요. 헛되고 헛된 거, 그야말로 그들은 우주의 일부죠. 이스라엘은 흙으로 돌아온 것들과 접촉을 하면서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잊어버렸어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탈해서 언약 없는 신, 자기 본성과 맞다고 생각하는 신과 결합했는데 그걸 오늘 24절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부끄러운 그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부끄러운”이라는 말을 왜 하는가.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라고 되어있거든요. 패역한 것을 고치게 되면 고친 상태가 어떤 상태이냐 하면 그 고쳐진 상태가 23~24절에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 “부끄러운 그것”, 그러니까 참으로 부끄럽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치료가 끝난 상태예요.
본래의 언약으로 돌아온 진짜 이스라엘의 고백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사람, 우주의 일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부였습니다. 하늘나라 일부였습니다. 천국은 나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예요. 나의 나라라는 것은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나라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생각한 것은 언약의 나라, 주님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를 이야기한 것이지 인간이 사는 행복한 나라를 하나님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점은 바로 기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기초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모래사장에서 어떤 사람이 밟고 지나갔을 때, 그 후에 혼 사람이 딱 보니까 모래사장에 발자국이 있어요. 거기서 모래사장은 재료가 되죠. 만져보면 모래니까. 모래인데 모래사장의 표면 자체가 어떤 문양, 그러니까 형상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사람의 형상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이 발자국을 내고 지나가 버리면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돼요. 이것은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정보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흔적을 남겼지만, 그 이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 지상에, 이 평탄한 지상에 하나님의 흔적을 남겼어요.
그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예수님만 찾지 말고 이스라엘 역사를 생각하고 공부를 해야 해요. 이스라엘 자체가 그들이 이방 민족과 만나면서 그들 입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참으로 우리는 부끄러운 짓을 했습니다’라고 고백이 나올 때 그게 주님이 작동한 흔적이에요. 내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그 자체가 정말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고백을 교회에서나 사람 만나서 하면 되지 굳이 큰 산과 작은 산에 기도원에 가서 소리지르면서 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럴 필요 없죠.
마태복음 6장 7절에 보면 그 부끄러운 것들이 어떻게 나오는가가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러니까 이방인은 언약이 없고 자기가 인간인 줄 알지 이스라엘이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기 몸은 우주의 일부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요. 그다음 말을 보면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신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교회 교인들은 도사라서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기도하라고 하면 10초에서 20초면 끝나버려요. 말을 많이 하는 버릇은 누구와 관계할 때냐면 사람과 사람끼리 간곡히 부탁할 때 했던 소리 또 하고, 자기 사정이 어떤지 말하면서 인정사정을 두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느니라.
그런데 마태복음 6장 8절에 보면 결정적으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라고 나오고 더 놀라운 사실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게 인간에게 먹힐까요? 이게 우리에게 먹힐까요? 차라리 입에다가 밴드나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는 것이 낫죠. 입이 있는 이상 뭔가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이건 기도하지 말라는 말과 똑같죠.
다시 말해서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네가 입이 터져있고 혀가 나오는 이유는 다 쓸데없는 것만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과 똑같은 거거든요. 입 벌려 봐야, 기도해봐야, 쓸데없는 이방인 기도, 중언부언밖에 더 있느냐는 식이죠. 달리 말하면 ‘네가 인간이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이 원하는 기도는 인간의 기도 말고 이스라엘의 기도, 너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관계가 수립된, 언약적 관계가 수립된 그 사람의 기도를 주께서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단서를 붙였어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단서 이전에는 누구 이름으로 기도했는가. 인간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차이가 뭐냐. 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면 내가 소원하고 원했던 것은 결과물이 내 앞으로 떨어져요.
그런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면 결과물이 나에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로 가버려요. 이건 뭐 기도한 당사자가 비록 나라고 할지라도 너에게는 콩고물도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기도는 몇 시간 째 했느냐?” “세 시간 반이요” “콩고물도 없다” 뭐 이런 식이거든요. 기도 하나만 봐도 이처럼 큰 차이가 있습니다.
큰소리치고 울부짖는 것이 이제 생각하면 23절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허사. 헛된 짓만 했구나. 헛된 짓이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기도를 하는 너의 존재 자체가 헛된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네가 왜 모르느냐는 겁니다. 헛된 데서 나오는 존재가 헛된 요구를 하니까 결과도 헛되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헛되지 않은 기도의 응답이 뭐냐 하면 아까 언급했던 것처럼 바르게 살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산다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복 자체가 스스로 우리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게 만드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해서 그걸 알았어야 해요. 인간은 몰라도 이스라엘은 알아야 해요.
독수리처럼 위에서 이미 내려다보는 특수한 민족은, 인간은 몰라도 하나님만 아시는 그 내용을 그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의 응답은 뭐냐? 마태복음 5장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기도 응답 간단하죠. 이런 이야기 어디서 들어본 적 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하다는 뜻은 뭐냐 하면 개뿔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주께서 있는 것을 다 토해내게 하시고 걷어내게 하셨어요. 그냥 남아있는 것은 껍데기 육신밖에 없어요.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다 들어내고 긁어가서. 그걸 가난한 상태라고 해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거예요. 빈터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고 네가 빈공간으로 채워져 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과 그 마음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시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지요. 시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뭔가 생긴 거, 집 안에 있는 라면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자식이고 뭐고 모든 것이 선물이에요. 걸친 옷가지, 살아온 하루하루가 다 주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점을 말로 할 것이 아니고 그냥 이렇다고 결론만 내릴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를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6절에 보면 다윗왕이 나오는데 그 왕은 이스라엘을 대표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했다는 것은 다윗에게 일어난 상황이 이스라엘의 상황과 동일하다고 보시면 되고요, 다윗에게 일어난 일이 왕이기 때문에 그의 백성에게 똑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그런 뜻에서 하나님께서는 왕인 다윗을 건드린 겁니다. 일단 왕의 위치부터, 왕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인지 그의 입지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17장 18~20절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왕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여호와의 이름의 맥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도가 뭐냐 하면 성령의 뛰는 맥박이죠. 성령님은 안 보이니까 뛰는 것은 팔딱팔딱 뛰면서 등장하는 실제적인 모습은 성도가 되고 구약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하나님의 심장박동으로 움직이는 하나님과 백성이 관련되어있는 매개체, 중간지점에 등장하는 것이 왕의 입장입니다.
그것을 방주가 있는 노아 언약이라고 하지 않고 율법을 받는 모세 언약이라고 하지 않고 왕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전부를 걸어서 왕 하나 잘 키워서, 왕이 잘 되면 그 왕과 동일한 백성을 복제해서 양산(量產)하겠다는 계획을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메시아가 뭐냐 하면 다윗언약에 준해서 오는 합당한 왕을 메시아라 하고, 왕이라 하고, 선지자, 제사장이라 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거예요.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실언(失言)하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라 필히 성공했다. 율법대로 왕이 된다면 그 왕 하나를 바라보고, 왕에 대한 희생과 왕의 공로를 바라보고 백성들은 거저먹게 되어있는 그런 체제, 그걸 왕국이라 하고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왕이 다 하는 거거든요.
예수님 덕분에 백성이 거저먹었다는 이런 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왕의 자리가 바로 예수님이고 그걸 미리 보여주는 것이 다윗왕이에요. 다윗왕은 철저하게 율법 책에 있는 모든 것이 우선 백성은 제쳐두고 왕에게 모든 것이 적용되는 겁니다. 왕의 입장이 그것 때문에 생긴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그 왕이 율법을 율법대로 적용하기 위해서 다윗이라는 이 우상, 인간은 인간 자체가 우상이에요. 우주의 한 부분이니까 우상입니다. 아무 밑도 끝도 없는 우주의 부분이니까. 원천도 모르고 시작도 모르고 기반도 모르니까 그냥 우상이에요. 모든 관계가 끊어졌으니까 우상인 겁니다. 끊어진 관계를 잇기 위해서 율법이 주사를 놓는 거예요.
깊숙이 주사를 놓을 때 다윗은 아프죠. 주사를 놓은 것이 뭐냐 하면 간음죄이고 살인죄였던 겁니다.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경솔하게 인간이 한다면 거부했을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자체가 율법의 세계이기 때문에, 언약의 세계이기 때문에, 피해도 피하지 못하도록 파고 들어오시는 조치를 하시는 거예요.
TV 예능프로에서 제가 아주 싫어하는 프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쁜 개는 없다’예요. 그러면 좋은 개만 있다는 건지 하여튼 인간이 나빠서 그렇지 모든 개는 착하다는 거예요. 그걸 패러디해서 나쁜 환경은 없어요. 인간이 나빠서 그렇지요. 왜냐 하면 율법이 율법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나쁜 환경은 없어요. 필요했던 상황만 있어요.
거기서 율법이 주사기를 놓고 들어오죠. 여기서 다윗은 두 개의 갈등이 생기는데 이 갈등이 시편 6편에 나옵니다. 내용이 너무 길어서 그냥 말씀드리면 나는 안 그러려고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느냐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수척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진노를 징계를 받습니다. 내 영혼이 왜 이러합니까’라고 갈등이 생기고 인간 안에 주름같은 뭔가가 생기는 거예요.
그 예로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보면 적당해요. 남을 속이는 속임수와 전략이 자기 속이는 전략으로 전환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멀쩡하다는 전략, 세상은 악해도 나같이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는 전략 있잖아요. 자기를 절대화하는 전략이 나를 망치는 거예요. ‘나는 흠이 없다, 나는 완벽하다, 나는 바르게 살았다, 나는 인생 선방했다’라는 그 전략이 나를 의롭게 지키는 그 전략이 나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애썼던 그 전략이 오히려 나를 공격해버리는 겁니다.
양치기 소년 알죠? 자기 심심해서 했던 거짓말이 진짜 늑대가 왔을 때 자기 키우는 양들은 다 잡아먹혔잖아요. 아무도 안 도와줬어요. 그건 양치기 소년이 자기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마을 사람 생각 안 하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 우리 중심이잖아요. 바르게 살면 복 받는다고요? 아니요. 그게 저주예요. 바르게 사는 그 자체가 이건 착각이었습니다.
그 바르게 사는 것을 뚫고 들어왔을 때, 바로 다윗에게 사달 났어요. 임신이 되어서 아기를 났는데, 차라리 아예 임신이 안 되거나, 아이가 사산되었으면 나을 텐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아기를 낳게 만들어요. 그렇게 태어나고 며칠 지나서 실실 죽어갑니다. 나로 인해 태어난 아기가 죽어가는 것을 보니까 여기서 다윗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사무엘하 12장 16절에 보면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신하들이 임금님이 피곤할까 봐 일으키려고 해도 다 물리치고 17절에 보면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라고 나오는데 자기는 다 물리치고 이 아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아기를 살리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의 마지막 남아있는 의로움을 다 긁어내서 수치스러운 존재 안 되기 위해서 자기가 극렬하게 노력하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이게 바로 다윗이 보여주는 기도예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기도의 심보가 이렇습니다. 자기 자존심 챙기려는 기도, 그 외에 다른 기도 없습니다. 더는 내가 망가질 수 없다고 하는데 뭘 ‘더’가 있어요. 이미 완전히 망가졌는데. 너의 기초를 모르는구나. 처음부터 너는 망가지고 너는 우상이었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어떻게 응답하시느냐 하면 아기를 죽여버려요. 왜냐 하면 다윗이 아기를 살리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항상 예상 밖으로만 응답해요. 이게 하나님 응답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예상대로 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만 주지, 생각한 것은 절대 주지 않습니다. 비켜 갑니다. 왜? 우리가 부끄러운 것이라는 고백을 토해내게 하려고. 우리는 나만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토해내는 이것이 돌아오는 것의 특징입니다. 이게 돌아온 탕자의 고백이었어요.
‘제가 탕자 맞습니다. 저는 저밖에 몰랐습니다’ 왜 우리는 신나게 이런 고백을 못 합니까. 나밖에 몰라서. 그래서 제가 끝으로 드릴 말씀은 ‘나쁜 개는 없다’ 즉 이 세상에 나쁜 환경은 없습니다. 다 주로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기 위한 적절한 환경, 만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런 환경임을 찬양하는 거, 성도 아니면 어찌 이런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뜻대로 기도하게 해 주시고 그 뜻이 어떻게 좌절되고 우상적인 기도인 것을 소급해서 깨닫는 기쁨을 허락해 주셔서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인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