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아버지의 가족

아빠와 함께 2022. 9. 25. 18:08

설교노트

 

아버지의 가족

2022년 9월 25일          이근호목사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9-22

(3:19)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3: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 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21) 소리가 자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나는 너희 아버지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그 어느 인간이 이 말은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었다’고 하시지만 정작 그 땅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에게는 그 땅의 원래 주민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빈 땅이란 이 세상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각자 인간들이 거기를 접수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모든 땅은 인간에 의해서 차지당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 줄 빈 땅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이 땅에, ‘아버지로서 나타날 하나님’은 없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이란 인간의 자율적 선택에 의해서 선택당하는 겁니다.

즉 인간에게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쪽이 골라 잡히는 겁니다. 방금 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해보세요. 즉 “내가 망하게 한 하나님을 나는 진짜 하나님으로 인정하겠다”는 사람이라고 이 사실이 증명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이 자진해서 망하기 위해 신을 믿는 자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은 진정코 아버지가 아닌 겁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보고 ‘아버지’라고 말할 자격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하십니다. 자식은 없는데 아버지부터 먼저 등장한 셈이 됩니다. 이게 약속(=언약) 나타남의 특징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모조모 따져 보고 판단할 그 어떤 단서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말만 앞장세우는 겁니다.

당연히 인간들은 안 받아들이지요. 왜냐하면 자신들의 명석한 판단을 경유하지 않았기에 고려 대상에서 배제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칭(?) 아버지라는 하나님 대신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골라잡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바람난 여자라고 몰아세우시는 겁니다.

에스겔 16:31과 34에 보면, “네가 누를 모든 길 머리에 건축하며 높은 대를 모든 거리에 쌓고도 값을 싫어하니 창기 같지도 않도다…너의 음란함이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함은 행음하려고 너를 따르는 자가 없음이며 또 네가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 그런즉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평한 것이고 실제 유다나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그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없는 그저 주변 대국에 자진해서 안기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미국에 안기고 싶은 것과 똑같습니다. 본인들이 원하는 신을 섬긴다면 이것은 하등 비난받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이것은 간음행위가 되는 겁니다. 이 차이점을 이해하는 자가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즉 참된 이스라엘은 본인이 편하고 행복한 생을 보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이 되는 나라가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나라가 되는데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 절차가 하나님 아버지쪽에서 일방적으로 진행시키십니다. 풀이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등장하십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그런데 아버지께서 땅을 주시는 방식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사는 공간을 염두에 둔 땅입니다.

빈 땅을 아들인 이스라엘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거주민이 있고 주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을 강제로 추방시키고 난 뒤에 생긴 땅에서 이스라엘로 살게 해놓으시고 “내 아들, 내 장자”라고 칭하시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이 아버지도 아닌 신을 신이라고 섬겼기에 ‘매맞아도 싸다’는 의식을 유발하십니다.

문제는 이미 아들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다움으로 유지하는 조건 하에 그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 조건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해 버린 겁니다. 이 또한 아들됨의 목표가 실패가 되는게 아닙니다. 도리어 필수적인 절차로 자리잡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가 이 세상을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너는 신자가 아니다. 둘째, 그 이유는 이러하다. 셋째,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자가 곧 신자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아들을 지상에 만들려는 이유는, 이 땅의 지배자로 자신의 아들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을 다스리는 마스터 키로 삼으시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19에, 교회가 그것을 담당하게 됩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풀어도 다 풀리고 무엇을 매면 절대로 풀리지 않는 그런 열쇠를 이 지상에서 만들려고 하십니다. 이 아들 중심의 집단이 되려면 그 일원도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즉 이땅에 진정으로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를 없애고 자신이 아버지가 되려는 자들의 천하인 것을 밝히는 작업이 병행됩니다.

창세기 19:31-33에 보면,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자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방민족인 모압과 암몬의 출발은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자들의 집단으로서의 민족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도 이와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탕자를 받아주시는 것으로 아버지가 아버지다움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을 사정없이 죽이고 몰아낸 주님 앞에, 스스로 탕자임을 인정못한다면 결코 주님이 다루시는 마스터 키가 될 수가 없습니다.

마스터키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됨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쓸어버리는 그 전쟁 도구가 됩니다. 즉 교회나 이스라엘이 스스로 마스터키를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들 자체가 마스터 키가 됩니다. 아들이 없고 딸 밖에 없는 슬로브핫의 가족도 하나님으로부터 유산을 이어받게 됩니다.(민 36:10)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아들되심을 인정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에 가족에 편입된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는 이 원리가 우리 인간과 상관없이 유효하게 작용하고 밌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18강-예레미야 3장 19~22절(아버지의 가족)22092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장 19~22절입니다. 구약성경 1054페이지입니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소리가 자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의사라는 것은 환자만 받습니다. 환자가 되지 아니하면 그냥 의사가 아니고 동창생 친구 정도로 보죠. 상대를 의사로 보는 것은 내가 고침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부분인데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19절에 보면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아름다운 땅)를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언급하셨습니다. 땅을 주었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굉장히 현실적이고 실질적인데 인간에게는 땅을 주었다는 것이 실질적이 아니고 땅은 그냥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내가 차지하고 정복하는 거죠. 땅을 하나님이 주었다고 하면 그 땅은 원래 하나님 것이었다고 될 경우만 땅을 주는데 인간 머리에는 하나님 땅은 이곳에 없다고 여깁니다.

왜냐 하면 어느 땅이든 거기 가며 거기 거주민들이 있거든요. 토착민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주었던 땅이 빈 땅이었습니까? 아무도 살지 않았던 땅입니까? 거기에 열 족속이 버티고 있었어요. 그들이 그냥 거기서 버티고 논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그들은 열심히 농사짓고 자기의 생존과 생계를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던 민족들이 있습니다.

그 민족들이 가나안 땅을 자기 땅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죠. 그러나 하나님 말은 다릅니다. 그 땅은 하나님 땅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 땅인데 이스라엘이 자식이 되는 조건 하에 그 땅을 거저 주겠다는 겁니다. 자식일 경우에만.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민족들은 그들이 아무리 유구한 역사를 이루며 수천 년을 살아도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개념으로써 살아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신을 섬겼죠. 신을 섬겼는데 하나님이 만들어낸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은 패밀리가 아니라는 거죠. 가족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가족은 이 세상에 이스라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특수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신이 존재해서 생기는 관계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고 자동적으로 아버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되려면 하나님의 자식이 되어야 하는데 그 자식의 원형은 일류의 역사 마지막에 나옵니다. 미태복음 3장 17절에 보면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런 아들의 모델케이스 이고 진짜 아들의 모습은 아버지와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 관계를 언약 관계라고 합니다.

그 언약 관계, 그 언약을 구약성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수시로 주었고요, 이스라엘 생기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야곱 이후에 생겼기 때문에 그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언약에 의해서 아들이 될 구성요소를 이미 하나님께서 지상에 작업을 펼쳤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모든 약속의 끝에는 없던 자식이 생겼음이 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없는데 자식은 있다는 그런 아버지가 나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있다면 반드시 자식이 있다는 그런 아버지로서 나는 이 땅에 드러낼 것이라는 겁니다. 아버지는 있는데 자식이 없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식은 있는데 아버지가 없는 그런 경우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있으면 반드시 그 자식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아버지가 그 자식을 책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식은 스스로 책임질 수 없습니다. 또 책임져서도 안 되고요. 아버지와 자식 관계를 언약 관계라고 했지요. 아버지와 자식의 언약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출애굽기 4장에 보면 그게 나와 있습니다. 하도 많이 봐서 여기를 딱 펼치면 무슨 내용인지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알면 뭐 합니까?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데.

출애굽기 4장 22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 이야기를 볼 때 우리는 이미 뒤에 이야기를 알고 이해하는데 뒤에 이야기를 모르고, 아무것도 없고,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있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아직 없을 때예요. 아무것도 없는데 뭐만 불쑥 나오느냐, 마치 김칫국물부터 먼저 마시는 격으로 뭐만 불쑥 나오느냐면 하나님의 약속만 제시되어있는 거예요.

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하나도 없는데 너는 많은 사람의 아비라는 하나님의 약속만 털썩 던져놓으신 겁니다. 그건 이 세상에서는 뭐냐 하면 말만 앞세운다고 하는 겁니다. 하여튼 실속은 없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 중에 사람같은 사람 못 봤다는 그런 식으로 말만 앞세우는 거예요. 그렇게 말만 앞세우는 그러한 신을 인간은 절대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말만 앞장세우는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실적을 본인이 판단해서 ‘이거 쓸만하네, 이런 신 같으면 믿을 만하네’라는 식으로 자기가 스스로 점검과 검토에 나서서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고 하는 거예요. 투자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투자할 곳의 자료들을 다 수집하고 과연 내가 이 부동산에 투자할 만한지 자료를 검토해야 하는데 말만 믿고 하는 것은 보이스피싱과 같은 것이지 그것은 투자가 아니죠.

감정과 기분을 말고 정확하게 된다는 예측같은 것을 보고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만 앞장세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증거를 내봐야 너희들이 믿을 위인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 절차는 반드시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결코 내가 자식이 될 자격과 권한과 그러한 처지가 아니었음을 자식 만들려는 내용으로 그걸 끌어당기는 겁니다. 순서가 이렇습니다.

첫 번째, 나는 신자가 아니다. 두 번째, 왜 신자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자기 아들 아닌 자를 자기 아들 만드는 방법은 너는 신자가 아닌데 왜 신자가 아닌지 이유를 밝힙니다. 신자가 무조건 말씀을 앞장세워서 “너는 내 백성이 아니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내 백성 아닌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다음이 중요해요.

그럴 때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들이 납득한 것이 아니고 신자 아닌 자를 만들어내는 그 실력과 작업의 주인공이 약속 그 자체예요. 약속 그 자체가 신자 아닌 것을 이야기하고 왜 신자 아닌지 그 이유까지 설명합니다. 그러면 약속이 임한 그 신자 아닌 사람은 신자가 돼요. 그럴 때 ‘아,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내가 겸손하고 내가 회개하면 신자 되는구나’라는 잔머리 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신자가 되려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 이라고 약속이 스스로 주님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특징이 뭐냐. 나는 신자가 아니었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왜 나는 신자가 아닌가를 평생을 통해서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두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에스겔 16장 3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누를 모든 길 위에 건축하며 높은 대를 모든 거리에 쌓고도 값을 싫어하니 창기 같지도 않도다”

에스겔 16장은 유다와 이스라엘이 이방나라 앞에서 자진해서 창기로서 음란한 짓을 한다고 나오는데 음란한 짓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약한 나라를 큰 나라가 좀 봐주세요. 좀 이뻐해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아 주세요’라는 그런 작업을 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소국이고 이방 신을 믿는 저 앗수르와 바벨론은 큰 나라 대국이니까 그 큰 나라의 품에 안기면 이 작은 나라의 미래가 안정적일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게 그러한 깊은 사랑으로 전쟁을 벌인 거예요. ‘이 작은 나라야, 내가 품에 안아 줄게’라고 하니까 우크라이나가 ‘싫어요’라고 나온 거예요. 미국은 아주 큰 나라예요. 한국은 작은 나라입니다. 제가 지난 오후에도 말했지만 작은 나라가 생존하는 방법은 작은 나라가 창기처럼 품에 안기는 것뿐이에요. 현대자동차 보조금 주든 말든 무조건 개개면서 안겨야 해요. ‘좀 봐주소. 쫌~. 핵전쟁 일어나면 좀 봐주소’라는 식으로 안기는 수밖에 없어요.

이스라엘도 그렇게 한 거예요. 이스라엘도 간음하고 음란하다는 말은 성경적 이야기고 하나님이 자기 자식 만드는 관점에서는 음란이고 패역이지만 일반인에게는 그게 생뚱맞고 무슨 이야기냐는 거예요. 다들 그렇게 하는데. 맞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하나님 뜻은 그들은 아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거예요. 다들 그렇게 살고 자기가 좋아하는 하나님 선택해서 사는데 에스겔 16장 31절에 보면 “창기도 아닌 것이”라고 나와요.

창기 같지도 않죠. 왜냐 하면 창기는 자기가 노동의 대가를 받고 하니까 노동을 했으면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스라엘과 유다는 오히려 대가를 주고 자기 몸을 파니까 이것은 창기 같지도 않다는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자기 이스라엘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이 모욕적인 상태, 여러분은 스스로 이런 인간 되기를 기뻐하십니까?

우리는 자꾸 하나님과 거래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알아요. 우리가 얼마나 모욕적인 상태를 거부하고 거역하는지, 본래적으로 거역하는지를 너무 잘 알아요. 이스라엘은 지금 운이 좋아서 돈도 안 받는 창기 된 겁니다. 정말 운이 좋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이런 절차에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들어간 거예요.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창세기 48장 17절에 보면 야곱이 늙어서 눈이 어두워요. 늙으면 다들 눈이 어두워지는지 이삭도 눈이 어둡고 야곱도 눈이 어두워졌어요. 야곱이 147세까지 살았으니 송해보다 더 오래 살았어요. 두 아들에게 안수하는데 16절을 한번 읽어 보면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언약이죠. 언약으로 축복하는 거예요.

이쯤에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언약이라는 것은 아들도 아닌 자를 아들 만드는 작업, 가족 만드는 작업이고 작업의 순서는 ‘첫째, 너는 신자가 아니다. 둘째, 신자 아닌 이유는 뭐다’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그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 자가 신자 되고 하나님의 가족 되는 그 절차를 말합니다. 두서너 번 더 할까요? 이제는 기억하세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너는 신자 아닌데 신자 되고 복 받을 자격도 없는데 복 받았다는 과정으로 뭐를 하느냐면 두 팔을 가지고 어긋맞게 해요. 팔을 나란히 하는 것이 아니고 크로스(겹치기)하는 거예요. 크로스 한다는 것은 복에서 제외되었던 자가 복을 받는 자리에 들어가고 복을 받았다고 여기는 자를 제외하는, 인간의 생각과 역으로 가는 우리 하나님, 내 뜻과 매사에 정반대로 일하시는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 이 인간 입에서는 함부로 나올 수가 없죠.

왜냐 하면 우리가 뭘 기뻐하지 않는 상태인 것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소가 도살장 안 끌려가려고 두 발로 막 버티잖아요. 그처럼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서 버티는 겁니다. 우리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한다는 것을 구분하는 이유는 머릿속에 기억 때문에 그래요. 과거 기억에서 다져지고 다져진 우리 자아성은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버티는 겁니다.

연세 많은 분이 고집 센 이유가 거기 있어요. 살 만큼 살았기 때문에 황소가 버티듯이 딱 버팁니다. 버티면 뭐해요. 힘이 빠졌는데. 강제로 요양병원에 납치되듯 들어가는데요. 그래서 야곱이 과정, 경로, 프로세스(Process)를 이야기하려고 어긋맞게 했는데 17절에 보면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야곱이 어긋맞게 손을 얹으니까 요셉이 “아버지, 실례” 하면서 강제로 아버지 손을 떼면서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서 노망 증세가 있는데 이 아이가 큰아들이고요, 이쪽 아이가 둘째입니다”라고 어긋난 팔을 풀어서 나란히 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때 야곱이 하는 말이 진짜 아버지의 아버지다운 말입니다. 창세기 48장 19절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 처지가 이런 형편이고 엉망진창인 것을, 이렇게 몰아넣으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면 거기에 대한 유일한 응답은 “나도 안다. 그게 언약 코스다. 네가 뭘 원하고 뭘 기뻐해서 이런 기도하는 것은 내가 뻔하게 안다. 알기 때문에 너의 뜻대로 안 해 줄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서 자기가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을 뺍니다. 뺄 때 그 원리에 대해서 여러분 아시는 말씀드리면 누가복음 15장 17~18절에 유명한 말씀 나옵니다. 탕자 비유 다 아시죠.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는 바를 모르고 내가 기뻐하는 데로 둘째 아들은 가출한 겁니다. 아버지 유산을 달라고 한 것도 자기가 기뻐한 것이고 그 유산 가지고 독립하겠다고 아버지 품을 떠나서 도시 가서 허랑방탕한 것도 자신의 뜻이었습니다. 자신의 뜻이라는 것이 굉장히 귀한 실패예요. 이게 필수코스였습니다. 실패 없는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요.

실패한 경우에만 전에 알던 아버지와 실패한 후에 아버지의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질 것을 주께서 원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가 싫다? 아버지가 싫은 거예요. 이게 근원적이고 생리적으로 타고난 거예요. 인간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잔소리하거나 누구보다도 자기 위에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자가 싫은 거예요. 교회 나와도 하나님의 지시가 싫은 이유가 지가 착하게 해서 그 착한 것 가지고 자랑질하려고, 아버지 앞에 예수님 앞에 자랑질하고 싶은 것이 내 깊은 마음이에요. 그러나 그 뜻을 의도적으로 주께서는 좌절시키고 내 뜻이라고는 조금도 반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에요.

인간들이 기껏 하는 것은 ‘아나바다’운동이에요. ‘아껴 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기’라는 말입니다. 이걸 다시 깊이 있게 네 자로 말하면 ‘숨내도피’라는 말입니다. ‘숨고, 내뻬고, 도망치고, 피하고’ 이건 제가 지어낸 말이에요. 계속해서 탕자는 아버지 있는 곳으로부터 숨고, 거기서 도망치고 자립하려고 했어요. 독립하는 기쁨이죠. 이게 악마가 준 우리 본성에 일치하는 우리의 기쁨의 요소입니다.

어디 뉴스에 보니까 태풍 올 때 갯바위에서 나이가 서른쯤 된 어떤 사람이 낚시하다가 물에 휩쓸려 죽었어요.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이 30년 동안 그렇게 공부하고 애쓴 것이 갯바위 위에서 물에 휩쓸려 죽는 그 결말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공부를 했겠습니까. 사업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쉬려고, 이번 기회 아니면 낚시하기 힘들 것 같아서 일기예보 무시하고 낚시하러 왔다가 갯바위 위에서 서른 살 나이로 죽었어요. 그 모습이 자기가 가꾼 귀한 거죠.

하루는 공원 벤치에 가보니까 물건이 있는데 아무도 가져가질 않아요. 그 물건은 모과예요. 모과가 벤치에 있고 밑에 떨어져도 아무도 안 가져갑니다. 왜?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거거든요. 다들 원치 않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은 아버지 자체가 이 땅에서 원치 않는 것임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해 주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세계인 것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가족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본인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것이 없어도 그냥 내가 나에게 그냥 격려하는 거예요. 너는 자랑스러운 사람이야.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그런 장한 사람이야. 내가 스스로 나를 격려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인간은 감염요인이에요. 코로나바이러스예요.

전부 다 없애 버리고 싶은 바이러스예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낼게요. 어느 넓은 지역에 쓰레기가 하나도 없다 할 때 제일 먼저 여러분이 떠오르는 것은 뭘까요. ‘아, 여기는 사람들이 안 찾고 사람들이 살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겠죠.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누군가 와서 매일같이 다 치워버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은 감염요인이에요. 더러움을 감염시키는 더러운 코로나바이러스입니다.

주께서는 매일같이 하는 일은 인간들을 다 치워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깨끗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레위기 26장에 나와요. 34~35절에 보면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내 땅, 거룩한 땅은 안식을 좀 해야 하니 너는 좀 나가줘. 나가고 난 뒤에 너희가 들어올 자격이 없는 것을 알 때 이 약속의 땅에 오게 하겠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기존의 거주민들을 쫓아냈어요. 이제 누구 차례냐면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날 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땅에 부합되는 인간이 아니면 절대로 내 가족이 될 수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룩한 백성이 되는가. 이제 남은 문제가 그 한 가지 문제이겠지요. 그게 바로 마스터키예요. 마스터키 이야기가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나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스터키라는 것은 어떤 문도 다 열리는 거예요.

모텔같은 데서 각방 마다 열쇠가 다 다르지만 주인에게는 마스터키가 있어서 어떤 방이라도 다 열수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느냐면 그 마스터키를 본인이 쥐고 있으려는 거예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천국 열쇠를 본인이 쥐려고 하는 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 마스터키를 주님 자신에 의해서 마스터키가 된 자를 따로 만들어요.

내가 마스터키를 소유한 것이 아니고 내 자체가 주님의 열쇠가 되는 새로운 사람들 만드는 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나를 사용하는 것이에요. 무엇으로? 뭐든지 풀면 풀리고 매면 매이는 걸로. 그 과정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의 뜻은 좌절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안다. 내가 합력하여 선을 이룰게”라고 하시죠.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주님 말만 앞장세우지 말고 내가 납득 되도록 해 주세요”라고 하죠.

“네가 납득 되도록은 절대 안 해 준다. 너는 끝까지 신자가 아니어야 해. 신자 아닌 자를 천국의 열쇠로 사용하는 나를 믿어야 해”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어떤 가정이든 아들에게 땅이 유업 되어요. 아들에게 땅이 유업 되는데 민수기 27장 3~4절에 보면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스려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에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시간이 많이 가지 않는 선에서 좀 어렵지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어렵지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창세기 19장 31~33절에 보면 “큰딸이 작은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자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엄마는 없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따라 나왔던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자식을 낳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9장 36~38절에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이 이야기를 통해서 소돔과 고모라에 있던 인식 자체가 사라지지 않고 이방 민족으로 확산이 되어버려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두 딸이 보고 들은 것은 아버지를 없애는 것이고 아버지를 내 자식을 낳기 위한 남성으로 이용해 버리는 그러한 풍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이 이방 민족이에요. 이방 민족의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모압과 암몬 뿐만이 아니고 모든 이방 민족이죠. 푸틴이 있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한국, 모든 곳은 아버지가 없는 민족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달라 가지고 딸들이 ‘우리들에게 아들은 없고 딸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민수기 27장 4절에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아버지의 이름이 나는 딸이기 때문에 족보에 오르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들이 없는 이상은 우리도 족보에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게 해달라고 할 때 5절에서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품하니라”라고 나와요. 모세도 자신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할지 모른 거예요. 아들에게만 주는데 아들이 없을 경우에 이 딸들은 과연 아버지의 유업이고 기업인 아버지 땅 안에, 아버지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 땅에 아버지의 아버지 됨이 그 안에 들어있거든요.

그 땅을 딸이라는 이름으로 과연 아들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느냐. 민수기 36장 5~6절에 보면 받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게 명하여 가로되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가족에게로만 시집갈찌니”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기업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아버지 됨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조치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집안은 아들이 없어요. 상실이고 결함이 있어요. 누락된 겁니다. 어떤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요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받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가족 아닌 자가 가족 되는 유일한 방식은 그 땅, 예수님이죠, 예수그리스도를 아들이든 땅이든 이방 민족이든 이스라엘이든 예수님의 아들 됨을 인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자, 이것이 마스터키, 이것이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등장, 하나님 아들들의 등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우리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음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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