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물품 보관소
2022년 10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3-4
(4:3)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상관있는 특별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나라는 이방민족 신경쓰지 말고 선지자를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너희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관장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속성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본인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점검받고 규정되어야 합니다. 전에 이스라엘에게 할례 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9-11)
여기서 ‘대대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세계 전체에 흐르고 있는 수상한 흐름과 경쟁적으로 견주는 흐름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자식을 놓고 죽는 일들로 대대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 5:4-5)
인간의 육신의 흐름과 비교되면서 두 이질적 요소는 역사가 끝나는 지점으로 서로를 보면서 질주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손으로 하는 할례는 기본적으로 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할례의 한계성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준 것이 됩니다. 손으로 할례한 그것만 할 뿐이고 마음의 할례는 더욱 요원하게 됩니다.
신명기 10:16에서, 마음의 할례 여부의 확인하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말라” 즉 육신의 할례를 행했다라는 것이 ‘마음의 할례’에 전혀 소용없음을 그들은 실제 마주치는 사건들을 통해서 확인받아야 했습니다. 즉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너머에 마음의 할례가 있었던 겁니다.
마음의 할례를 주님께서 주목하시는 이유는, Ⅰ인간의 마음이 악마의 자식, 곧 뱀의 자식을 잉태하는 인큐베이트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ⅱ뿐만아니라 그 상태를 대대로 후손들을 낳고 전달하고 있는 매개체가 되었던 겁니다. 따라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말은 ‘너의 마음의 아랫배 가죽을 칼로 베어서 그 내용물을 토해놓아라’는 말입니다.
영화 [에어리언]에서 여성 우주비행사가 괴물로 인하여 강간당해서 괴물의 자식을 잉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처럼 인간 내부에 인간 세계에서 흥미로운 바를 다같이 공감을 갖는 것들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5:3에서는 ‘아담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율법 속에는 ‘여자의 후손’의 흐름이 있습니다.
아담의 형상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육신의 형상이 ‘여자의 후손’ 흐름 속에서는 사정없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할례가 하등 소용없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는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힘이 필요한 겁니다. ‘할례’란 조상때부터 내려오는 것을 후손에게 전달되지 않고 차단되는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
마음의 아랫배 가죽으로 칼을 찢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뱀이라는 괴물을 끄집어내어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는 상태가 곧 ‘목이 곧은 상태’입니다.(신 10:16) ‘목이 곧다’는 말은, 상황이나 상태를 본인의 마음으로 다루어보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자기 경배로 이어집니다.
악마가 인간의 마음에 심어놓은 마음은 ‘내가 나에게 경배하기’입니다. 이 ‘내가 나에게 경배하기’가 확장이 된 것은 바로 ‘내 자식에 대한 나의 경배’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이란 실은 ‘자신의 신체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어 있는 악마의 성질이 고스란히 자식에게 전달됩니다.
사람들의 마음 낮추기가 삶의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전쟁터라는 생존에 혹독한 환경 속에서 20대 병사는 그래도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 경배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겁니다. 유언처럼 남기는 바는 이것입니다. 전에 고국에서 만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하기를, “부디 온전한 티셔츠를 보내온다면 당신의 진정한 사랑으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 온다할지라도 인간은 자기를 버리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 할례언약은 신약때까지 흘러들어갑니다. 골로새서 2:11-12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예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는 것만 ‘마음의 할례’가 됩니다. 이는 ‘나만의 세계’를 따로 형성해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7:21-22에 보면,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그 두 기둥 꼭대기에 백합화 형상이 있더라 두 기둥의 공역이 마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긴이라는 뜻은 ‘저가 세우리라’는 뜻이요, 보아스라는 뜻은,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성전이라는 단일체 내에 포함이 되어버린 자에게 해당되는 이름입니다. 할례의 최종상태는 하나밖에 없는 성전에 합류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할례가 세례로 이어지면서 완성되는 겁니다. 이 성전 안으로 들어서는 능력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섭니다.
이렇게 되는 성도는 자신의 빈 마음 속이 마치 ‘물품보관소’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됩니다. 반복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마음의 아랫 가죽이 베어지면 그 속에서 새로운 말씀의 깊이와 높이와 풍성함이 새롭게 하나님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마련되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면 성도는 자신이 이미 죽은 상태 안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사용함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무덤’을 지고 가는 자는 이미 ‘자기 무덤’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상태에서 타인을 만나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 내부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들어서 집어넣으주신 생명의 말씀을 끄집어낼 수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목이 뻗뻗하지않은 ‘마음의 할례’받은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더는 자신에 경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게 주님의 선물인 것을 늘 감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21강-예레미야 4장 3~4절(물품보관소)22101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장 3~4절입니다. 구약성경 1055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할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노하는 이유는 육신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육신의 할례는 인간이 할 수가 있겠죠. 육신의 할례는 손발이 있으니 할 수가 있는데 마음의 할례는 무슨 수로 할지 거기에서 난감해지는 거죠. 마음의 할례를 행하기 전에는 어떤 마음이었는데 행하고 난 뒤에 이런 마음으로 달라졌다는 그 차이점을 알아야, 할례 전과 후를 알아야, 마음의 할례를 했다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신명기 10장 16절에 보면 마음에 할례를 행했을 때 전후가 어떻게 달려지는 나와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라고 되어있어요. 마음의 할례를 안 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목이 곧게 서 있다는 겁니다. 상대를 내가 상대한다는 거죠. 내가 너를 다루고 이 세상은 내가 내 힘으로 헤쳐나가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모가지 곧게 세운 자세죠.
그러면 마음의 할례를 행했을 때 나타나는 것은 목을 곧게 세우는 상황이 사라져버린 상태입니다. 이것이 벌써 할례를 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할례를 행하고 난 뒤에는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거저 주신 선물이고 은혜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목이 곧게 서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말로는 마음이 낮아졌다고 하죠.
마음이 낮아진 것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에 보면 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라고 나옵니다. 마음 가죽을 벤다. 안에 뭐가 들어있어서 네가 행세깨나 하나 본데 안에 마음 가죽을 쫙 찢고 안에 있는 것들을 텅텅 비게 만들면 그야말로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이 성립되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마음 할례에 대해서 왜 이렇게 화를 내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이 말씀대로 율법이 율법대로 현실화하는 것을 하나님은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면서 그들에게 실천하기를 지시한 것이 있는데 막혀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겁니다.
왜 막혀있는가. 마음의 가죽을 안 찢어서 막혀있는 거죠. 그러면 마음의 할례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인, 그러니까 사람 안에 뭐가 계속해서 새롭게 채워지느냐 하면 저주받을 괴물이 인간의 마음 안에 계속해서 생성된다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사람은 본인이 그것을 못 느끼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 독소가 또 찼네. 빨리 찢어! 칼을 줄까? 빨리 마음을 찢어버려!’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마음 안에 계속해서 독소가 찢고 버리면 또 생기고, 찢고 버리면 또 생기고, 이건 뭐 공사를 크게 해야 하는 겁니까? 계속해서 뭔가 생기는데, 뭐가 생기느냐 하면 괴물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이 괴물을 임신하고 있는 거예요. 매일 같이 우리는 괴물을 임신합니다. 영화 중에 ‘에이리언(Alien)’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여자 우주비행사가 우주에 갔다가 임신을 했는데 외계인의 아기를 임신한 거예요.
영화 보는 사람들은 기겁하죠. 안에서 파충류가 튀어나오는 아주 무시무시한 영화입니다. 여자가 파충류 같은 괴물을 임신한 거죠. 그걸 보고 ‘상당히 흉하다. 무섭다’라고 하는데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악마의 자식을 우리가 계속해서 잉태하고 있고 지우고 낙태시키면 또 생기고, 낙태시키면 또 생기고, 이건 감당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 마음 자체가 포대기인데 무슨 포대기냐 하면 마귀의 자식을 생산하는 포대기로 아담의 자손들, 후손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겁니다. 그리고 괴물의 자식으로 말미암아 생긴 현상은 창세기 5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걸 보고 아담의 형상이라고 하죠. 괴물의 형상인데 그 괴물의 모습으로 그들은 자식을 낳고 난 후에 죽고, 또 자식 낳고 난 후에 죽고, 그렇게 아담이 죽었거든요.
아담이 죽었거든요. 아담이 죽은 그걸로 끝나야 하는데 그렇게 자식이 없으면 괜찮은데, 아담의 자식이 생겨서 아담 죽은 것을 반복시키고 재현하는 거예요. 아주 끈질긴 악마이고, 끈질긴 악의 후손들이에요. 뱀의 후손들이요. 그 뱀의 후손들이 인간의 몸을 매개로 해서, 숙주로 해서, 온 천지에 마귀의 자식만 쫙 깔아놓은 거예요. 방탄소년단 공연하는데 5만 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그 5만 명이 뭡니까?
본인이 흥미를 갖는 그것이 바로 본인의 정체인 것처럼, 본인이 신경 쓰고 본인이 사는 의미와 목적을 갖고자 하는 그 부분에서 그들은 흥미를 갖기 때문에, 차마 자기 아랫배를 칼로 찢을 수가 없어요. 나는 이것 때문에 사니까 자기는 자기를 못 찢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5장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자식 낳고 나는 죽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이 낳은 자식은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일에 책임 못 져요. 그냥 뱀의 자식만 낳을 뿐이지 책임 못 져요. ‘나 같은 것은 죽어야 해’라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낮은 건데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이 태어나고, 특히 아들이 태어나면 그 자식에게 경배합니다. 왜냐 하면 평소에 자기가 자기에게만 경배하고자 하는 것이 마귀가 우리 인간에게 집어넣어 준 고질병이거든요.
그 고질병을 자기가 늙어가고 시름시름 병들어가고 하니까 내가 아들 낳아서 아들을 나 대신 하는 거죠. 아들이 나의 확장이니까요. 내가 확장한 것이 자식이거든요. 자식을 경배함으로써 나는 뱀의 자식을 낳는 매개자로서 역할을 아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들이 아들을 부를 때 이름 안 부르고 ‘아들, 아들 뭐 해줄까?’ 그러죠. 아들이 이름이 없나? 왜 이름을 부르는가. 주의 이름 부르는 거 대체해서 아들 이름 부르는 겁니다. 주의 이름 부를 자리에 아들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뱀의 후손인 인간과 경쟁을 붙이십니다. 어떻게 경쟁하시는가 하면 이렇게 합니다. 인간의 몸을, 이스라엘의 몸을 물품 보관소로 간주해서 그 안에 가죽을 찢고 빈 상태로 놔두는데, 마음의 할례는 가죽을 찢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토해내게 하시고 안을 텅텅 비게 하시는 거죠.
비게 해서 문을 닫아 놓으면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이 나와요. 율법의 새로움. 새로운 말씀의 깊이가 거기서 나옵니다. 전자레인지 안에 뭐 넣고 ‘딩동’ 소리 나서 열어보면 그 안에 뭐가 만들어져있잖아요. 다시 물품 보관소를 열어보게 되면 전에 알았던 말씀의 깊이와 다른 새로운 말씀의 깊이가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도는 그 재미로, 그 덕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새로움이 없으면 성도는 못 살아가요. 그것도 말씀의 새로움. 익히 아는 말씀 같으면 알고 있는 나를, 내 마음이 내 경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께서 가죽으로 찢을 대상이 되죠. 그건 또 안다는 대상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에어리언 외계인이죠. 이걸 찢어버리고 거기서 하나님이 새롭게 마련해준 새로운 말씀을 그 안에 담아둡니다.
그렇게 뱀의 후손이라는 이러한 매개를 여자의 후손이라는 매개로 전환 시키고자 주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할례라는 율법을 주신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는데 그게 창세기 17장 10~14절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을 때 양피를 베라고 하신 거예요. 10절에 보면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라고 나오고 뒤에 쭉 보면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내 백성에서 끊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뜻은 무엇과 경쟁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느냐 하면 인간의 뱀의 후손인 아담의 후손들이 자식을 낳고 또 자식을 낳는 그 뱀의 후손들의 속성을 주님께서는 같이 경쟁적으로 따라 붙이시는 거예요. 뱀의 후손의 열차가 가고 있으면 그 옆에 선로 깔아서 여자의 후손도 같이 가면서 동일한 속도를 유지하고 마주 보면서 율법으로 주고받는 거예요.
율법 즉 죄가 죄 되게 하기 위해서 뱀의 후손 자리에 저주받을 일들이 계속 생겨나야 해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환자이어야 하고, 병든 자이고, 죄인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어요. 마치 의사가 환자를 찾듯이 주님은 의사가 되어서 우리를 환자로 간주하고 보는 겁니다. 그 환자의 특징은 스스로 자기를 못 고친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하시는 거죠. 마치 네가 스스로 처방을 해야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처방은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마음을 낮춰 본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악마가 만든 세상 환경이 한두 번 그었다고 해서, 회개하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온다고 해서 사람이 개과천선할 수 있는 그런 만만한 세상이 아니에요.
항상 현혹될 수밖에 없는 어떤 유혹이 우리 주변을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자욱한 안개처럼 우리를 꽉 붙잡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절망에 빠지더라도, 그렇게 빠지면 빠질수록 오직 자기에게만 경배하는 습성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게 되어있어요.
미군들이 월남전에 참전해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가 있어요. 왜냐 하면 월남전에 갔다는 것은 이미 죽은 목숨이에요. 20대의 나이에 거기 가서 인생 종 친다는 것이 너무나 아까운 거예요. 그것도 죽을 때 부모 앞에서 죽는 것이 아니고 뚝 떨어져서 생사도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월남전에 투입되는 것은 그냥 총알받이로 가는 거죠. 지금 러시아가 그런 거 아닙니까. 젊은 아이들 뽑아서 출전시키는 거. 그래서 얼마나 답답했으면 보트 다섯 대에 나눠타고 우리나라 동해안까지 내려와서 군에 안 가고 빠지려고 했겠어요. 그처럼 인간은 월남전에서 비참하게 되는 겁니다.
비참하다고 하면 누가 봐도 마음이 낮아졌다고 생각되는데 낮췄을 때 나오는 가사가 있어요. 낮출 때 마지막 유언처럼 하는 것이 있어요. 그 유언이 뭐냐 하면 ‘스카보로 시장에 가시려고 하나요’라는 노래입니다. Simon and Garfunkel (사이먼 앤 가펑클) - Scarborough Fair(노래제목)
스카보르 시장에 가시려고 합니까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 같은 그런 여러 가지 꽃들이 있는데
가죽 낫으로 잘라서 나에게 꽃다발을 주시면
나는 비록 죽더라도 비로소 나는 마지막으로
당신은 나를 사랑했노라, 내가 사랑하고 싶은 여자가
그 여자 또한 나를 사랑했다는 그 소식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스카보르 시장에 가면
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면, 내 마지막 소원을 전해주세요
땅 한 평을 준다면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거기가 어디냐 하면, 바닷가 해변이 있는 땅 한 평을 준다면
난 그것을 그 여인의 진실한 사랑으로 간주하겠어요
그리고 또 가사에 보면
스카보르 시장에서 여자를 만나거든 면 셔츠 하나 지어달라고 하세요
그런데 그 셔츠가 이음새나 꿰맨 자국이 없는 면 셔츠 하나를
나를 위해 지었다고 여자가 말해주기를 내가 원한다고 말해주세요
이음새가 없다는 것은 온전한 사랑을 받고 싶은 겁니다.
Are you going to Scarborough Fair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Remember me to one who lives there
She once was a true love of mine
Tell her to make me a cambric shirt
(On the side of a hill in the deep forest green)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Tracing of sparrow on the snow crested brown)
Without no seams nor needless work
(Blankets and bedclothes the child of the mountain)
Then she'll be a true love of mine
Tell her to find me an acre of land
(On the side of a hill a sprinkling of leaves)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Washes the grave with silvery tears)
Between the saltwater and the seastrand
(A soldier cleans and polishes a gun)
Then she'll be a true love of mine
(Sleeps unaware of the clarion call)
Tell her to reap it with a sickle of leather
(War bellows blazing in scarlet battalions)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Generals order their soldiers to kill)
And gather it all in a bunch of heather
(And to fight for a cause they've long a go forgot then)
Then she'll be a true love of mine
이 노래가 결국은 인간이 마지막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을 때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게 스카보르 시장이라는 노래 가사 가운데 잘 나타나 있어요. 비록 나는 죽지만 나는 온전한 사랑을 고대하면서 죽어간다는 겁니다. 나는 그런 사랑을 내세울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내세우는 겁니다. 이거는 마음의 가죽을 자르는 일과 전혀 상관없죠. 그 밀림에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그 20대의 군인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악마의 마음을 운반하고 있는 운반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나오는 교인들은 압니까? 뭔가 새로운 것을 내 안에 주님이 담아놓은 새로운 것이 있다는 말은 날마다 너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체 경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격장에 클레이 사격이 있지요. 공중에 원반이 뜨면 총으로 쏘는 거지요. 클레이가 진흙이라는 뜻인데 진흙으로 된 목표물을 공중에서 맞추는 겁니다. 총으로 아무리 쏴도 진흙 덩어리는 아파할 필요 없어요. 왜? 진흙이니까. 주님께서는 계속 쏘시는 거예요. 우리를 진흙으로 보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리 우리가 어려움에 놓여도 결국 남는 것은 남은 누구로부터 사랑받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자기 사랑, 이건 어떤 어려운 경우에도 포기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말은 네가 죽기 전에 진작에 주님께서 너 자신에 대해서 뭔가 비교되는 것들을 우리 안에서 임신 되어서 나오도록 그렇게 해놓을 필요가 있지요. 우리 자신을 경배하거나 우리 자신을 더이상 사랑할 필요가 없는 거요.
현대인들의 상황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군중 속에 고독. 아무리 자기 주변에 수천 명이 으싸으싸 모여들고 아무리 동호회 회원 수가 많아도 다 끝나고 나면 그렇게 고독한 거예요.
심지어 부부가 한 침대에서 잠자리에 들어도 자식이 손자들 데리고 와서 우글우글 북적북적해도 그때뿐이지 다 떠나고 나면 이상하게 고독하고 외로워요.
왜 그럴까요? 왜 인간은 고독을 느낄까요? 열왕기상 7장 21~22절을 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세울 때 성전 구조물 속에 커다란 두 기둥이 있어요. 14 미터도 넘는 거 같은데 그 두 기둥을 그냥 세운 것이 아니고 유난히도 이름을 붙여요.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그 두 기둥 꼭대기에 백합화 형상이 있더라 두 기둥의 공역이 마치니라” 공사가 끝났다는 말이죠. 여기에 성전 입구를 받치고 있는 기둥의 “야긴”이라는 뜻은 “저가 세우리라”이고 “보아스”라는 말은 “그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느니라”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간다는 말은 일종의 하나의 부속품으로 들어간다는 거죠. 하나의 벽돌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군중 속의 고독을 현대인들이 느끼느냐 하면 주님이 주신 할례의 세계, 이 세상과 끊어진 새로운 성전이라는 세계, 하나님 집이라는 천국이라는 세계를 몰라서 그래요 그곳에 우리가 하나의 일원으로 포함이 되어있다면 그 사람은 더는 고독을 느낄 이유가 없죠. 왜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자기 역할이 물품 보관소 역할 하니까요. 누가 와서 내 마음의 문을 열면 거기에 말씀의 새로운 것이 담겨 있으니까,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성도끼리 서로 복음으로 대화하는 가운데서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한 복음의 새로운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주님의 사랑을 느낀다면 이미 그들은 그 안에 성령이 교류하고 있고 그 안에 복음이 교류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한 채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나의 성전이 아니고 더불어 성전이에요. 함께 있는 성전이에요. 네 성전 따로 내 성전 따로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할례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하죠.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이 뭐냐 하면 이미 자기가 죽었다는 무덤을 지고 가는 사람은 이미 자기 무덤에서 벗어난 사람이에요. 빠져나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할례가 뭐냐 하면 그냥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라는 것은 구약이지만 그 구약의 열차, 할례 열차를 타고 신약에 도달되게 되면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죽은 자라는 자신의 무덤을 상대에게 제시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죽었던 무덤을 짊어지고 가는 거죠.
‘이게 바로 내가 이미 죽었던 표적입니다’라는 이것을 골로새서에서는 세례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죽으심에 합류된 증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할 때 그 십자가는 십자가를 져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내가 어디를 통과했는지, 내가 전에 펄펄 살았을 때 주님이 일부러 찾아와서 나를 죽여버렸다는 그 증거를 십자가라는 표시로써 자기가 그것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성도인데 왜 그렇게 잘 삽니까?’라고 하면 ‘이거 전부 다 내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선물입니다’라고 하게 되죠.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세상적으로 부자라 하는 것은 자기 의를 포기하고 얻은 거예요. 자기 잘남을 포기하고 그 대가를 치러서 돈으로 바꾼 겁니다. 부자는 자기 딴에 고생을 많이 한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가난한 자가 부자를 보며 부자 되었다고 시기하고 질투하면 안 됩니다. 너도 부자 되려면 네 자존심과 네 의로움 다 포기하든지. 자기는 천하의 착한 사람으로 살면서 부자 되겠다고 하는 그런 비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별로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인데, 부자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더럽게 살았다는 뜻이에요. 더럽게 살고 그 대신 부자 된 겁니다.
온통 생각을 돈, 돈, 돈밖에 생각 안 했다는 그 대가로 부자 된 거예요. 그런데 그 부자를 공짜로 탐내면 됩니까? 너도 나처럼 부자 되려고 하면 모든 배알 다 팔고 해야지요.
그래서 성도가 될 경우에 비록 수입이 얼마 안 되더라도 본인의 모든 것을 주님의 선물로 보기 때문에 마음이 부자가 되는 거예요. 한 달 수입이 기껏 이천 육백만 원밖에 안 되는데 그래도 가난하지만 다 주님이 주신 선물이니 부자지요.
차는 네 대 정도밖에 안 되는데, 일 곱대나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이것조차도 내 것이 아니고 선물이니 감사하죠. 이런 고백은 우리가 찢지 못하는 마음을 주께서 십자가로 날마다 성령이 오셔서 이걸 찢어버리죠. ‘이런 것이 또 있었네’라고 우리를 물품 보관소로 사용하시면서 성전에 필요한 새로운 말씀의 깊이와 넓이를 우리 안에서 끄집어냄을 당하는 직원으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전에는 괴물 들어있었는데 그 괴물과 더불어서 이제는 새로운 말씀의 성취도 함께 들어있음을 끄집어냄을 감사합니다. 이래 나 저래 나 내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도구로만 쓰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