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9/14수요설교정리

아빠와 함께 2022. 10. 8. 08:17

수요설교 정리(20220914:옮기심)

수요설교 중에 제가 핵심으로 잡은 것은 인간은 왜 무서워하느냐, 그 대목이었어요. 인간은 왜 무서워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많은 사람들이 해답을 제시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왜냐하면 오는 고객들에게 뭐 보여줄 게 없으면 손님이 안 오잖아요. 힘들게 오고 돈 들여서 왔는데 뭐 맹탕이다,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이지요.

철학박사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철학적인 결론을 내놨는데 그래서? 이게 어디에 필요한데? 이게 무슨 도움이 되는데? 이러면 그건 철학적 논문 가치가 없잖아요. 남한테 도움이 되고 남한테 보탬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그것 때문에 철학자들도 고민하면서 갖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해요.

그러면서도 모르는 게 뭐냐 하면 왜 무서워 하느냐 하는 거예요. 제가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그동안 인간들은 인간이 죽는 것이 무섭다고 알고 있어가지고 이미 BC4세기부터 인간은 죽음은 무엇인가, 이것만 정복하면 없어질 줄 알았어요. 인간들이.

철학자를 분류하면 자연주의적 철학자라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이렇게 학파가 나와요. 그건 뭐 여러분들이 들을 필요 없고요.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죽기 전에는 아직 안 죽었기 때문에 겁낼 필요 없고 죽고 난 이후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음이 겁나지 않는다. 요게 해결책이었어요. 그게 이천년동안 이어오고 있어요.

왜 무서우냐를 설명을 안 하고 죽음을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죽음을 정복했다. 그 이론을 죽음을 정복했다고 생각을, 이론을, 그대로 가져온 게 뭐냐, 불교에요. 그 비슷한 시기는 불교나 그리스철학이나 비슷한 시기들이에요. 유교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은 자꾸 죽음에 대해서 겁을 내니까 죽음만 정복하면 무서움도 없어진다고 생각하니까 그 공자의 제자가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됩니까?” 물으니까,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는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다.” 이거 신경 쓸 필요 없다! 죽었을 때 그 때 생각하면 되지. 미리 당겨서 생각하느냐. 이게 인간들이 하는 해결책이었습니다.

공자 말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이지요. 집의 어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여보, 우리가 죽기 전에 심판이 있단다. 빨리 교회에 갑시다.” “아이고, 죽을 때 되면 알아서 갈게.” 이리 하지요.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는데 죽음은 아직 멀었어. 내 봐라. 나 운동 잘하는 거 봤지? 나 아직 멀었다.” 이게 그냥 자연스럽게 튀어나와요. 안 죽었다는 거예요. 그럼 미리 죽음을 당겨서 하게 되면 쓸데없는 걱정 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생명보험이나 들어놔라. 그게 대책이에요. 생명보험.

뭐냐 하면 사람은 어떤 체험을 하지 않으면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제대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죽음 직전에도 대책이 안 돼요. 왜 덜 죽었으니까. 죽음을 앞두고 2.5초 남았으니까 아직까지는 안 죽은 거예요. 그래서 요양병원에 가면 노인네들이 죽을 때 약간 의식이 있을 때, 내 장례할 때 절대로 화장하면 안된데이. 내 돈 일부러 했지. 내 수의복 좋은 거로 하고. 너는 너무 아끼더라. 이런 거. 죽을 때까지 잔소리야.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학문은 어떤 수학자가 필드상 받아가지고 강의할 때 내가 만약 수학자인데 수학자의 노벨상 필드상을 받았다. 학생들 있다. 강의할 때, 여러분! 죽음이 뭡니까? 이리 이야기합니까. 아니지요. 그게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에요. 타인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요. 내 하고 싶은 대로 못 살아요. 뭐든지. 인생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여럿이 만들어요.

철들은 청춘남녀가 우리 좋으면 우리 따로 살자. 아니에요. 그 둘 양가집 자식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준비된 부모들의 바람, 희망이 모여서 결혼식이 되는 거예요. 우린 결혼식하지 말고 우리끼리 안돼요. 해야 돼요. 보람이 그게 보람이거든요. 그래야 애 낳으면 애 키워주고 다해요. 저희들끼리 살면 애를 안 봐준다고요.

이 세상은 내가 혼자 안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 말은 좋게 들리면 안돼요. 내가 이 세상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뜻이에요. 빠져나올 수 없어요. 그래서 어제 수요일날 갈라디아서3장22절,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가두어졌어요. 자폐증처럼 살아갑니다. 있는 추천 없이 다보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걸 뭐로 보느냐 수요일날 그걸 뭐로 보느냐 그걸 바로 의미의 장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의미의 세계에요.

짐승이 나를 낳아주고 짐승이 나를 기르시니 두 짐승이 아니면 이런 짐승이 어디서 생겼을까, 정철의 시조 내가 개사했어요. 제가 고쳤습니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두 분에게 어떻게 이 은혜를 어디 되어 갚아오리. 갚을 길이 없다. 너무 귀하다. 그게 뭐냐 조선시대에 유교풍토 가운데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늘의 복을 받는다는 그 이데올로기가 있어요. 그러한 종교지요. 종교. 그게 종교거든요. 부모한테 잘해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 가 종교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제사가 반드시 그렇게 중요했던 거예요. 종교가. 그게 의미의 장이에요. 예수님은 모든 의미의 장에서 벗어난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 의미의 장에서 우리가 추방당하는 거예요. 추방당하는 것. 그게 수요설교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인간은 못하지요. 의미의 장인데.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빠져나오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음보다 더 센 걸 준비했어요. 그게 뭐냐, 옮김입니다. 옮김. 죽음보다 더 센 것.

이쪽 의미의 장이 있잖아요. 이쪽 의미의 장. 지금 음성 듣는 사람은 이쪽이 뭔지 모르겠다만. 이쪽 의미의 장 꽂아가지고 이쪽 케이크로 옮겨요. 미운 오리새끼 되던 말든 간에 옮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는 옮기면서 뭘 바꾸느냐 하면 배를 케이크로 바꿔줬는데 옛날 관성에 의해서 자기가 배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늘 강의에 의하면 순환구조로 해가지고 늘 패버려야지요. “저 열심히 케이크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니는 다 이루었다. 케이크야.” “아닙니다. 저는 아직 죄인이고 멀었습니다.” “니는 죄인 되려하지 말고 이미 죄인이야. 그래서 의인이야.” 라고 한 거예요. 이 공간 안에서. 이게 옮김이에요. 옮김.

그래서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지요. 아브라함이 졸지에 멍청한 사람이 됐어요. 그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사람이 됐는데, 가는 곳마다 이쁜 자기 아내 때문에 목숨에 위협을 받아요. 목숨 위협을 받는다고요. 이것도 자기가 계획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께서 무슨 게임을 벌이는지 그 게임 속에 있는 아브라함 본인이 몰라요. 이게 오징어게임인지 뭔지 지가 노력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이쪽 의미의 장, 천사와 주님과 하나님과 같이 사는 천국의 백성으로서 이미 삼아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배가 케이크가 되게 하는 거예요.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서는 아무리 지금 배를 뚫어 봐도 될 가능성이 제로에요. 이건 밀가루로 되어있지요. 이건 배즙이잖아요. 안되잖아요. 안 되는 걸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내부에서 케이크의 씨앗이 자라나서 이게 배가 케이크 되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옮겨놓기. 옮겨놓기 때문에 죽음보다 더 세잖아요. 그러니까 주를 위해서 죽는 게 그것조차도 심각한 일이 아니고 그냥 하나의 과정이고 은혜고 절차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철학자들이 그렇게 고민하는 것. 죽음만 해결하면 무슨 일이 없겠다는 것. 이미 성령 안에서 이미 죽음 문제해결 다해버렸어요. 죽는 게 아니고 상이한 다른 기준으로 따로 본향을 향하여 가는 거예요. 본향이니까 이쪽 고향은 가짜지요. 그리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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