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1013a슥14장20절(죽음의 노예)-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 제일 마지막에 마지막 시간으로 합시다. 스가랴14장12절부터 보면,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이렇게 되어있지요. 이방민족입니다.)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그들이 잘못 건드렸다. 뭔가 그들이 들어서지 말아야 될 곳에 들어섰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인디아나 존스>의 영화에 보게 되면 고대인들이 보물을 영원히 감추고 보존하기 위해서 온갖 함정들을 다 파놓잖아요. 그것도 모르고 탐욕이 많은 고고학자나 그런 군인들이 함부로 들어서다가는 고대인들의 저주 위에 휘말려서 졸지에 해골이 되고,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거룩하지도 않은 게 왜 함부로 거룩한 곳에 들어섰느냐, 그렇게 되지요. 14장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이렇게 스가랴가 끝납니다. 거룩이 거룩만 남는다. 거룩만 남고 속된 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뜻인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그 거룩 속에와 같은 성질의 거룩, 동질의 거룩이 안에 같이 공유될 때만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민족은 뭐냐, 이방민족은 세속이지요. 더럽다. 이방인들은 더럽다로 규명되는데 이방인들은 자기가 더럽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 안 하고 있어요. 인정 못하겠다고 이리 나오는 겁니다.
어떤 어린애가 태어나면서 “엄마 나, 더러워”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없지요.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것은 그건 어릴 때는 부모가 교육해서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손 흙 털고, 머리 감아야지. 손 씻고 밥 먹어야지. 일종의 어머니가 그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거룩함과 더러운 것. 거룩함과 더러움을 이야기함으로서 우리 가정에서는 흙 만진 손이랑 씻지 않은 신체가지고서는 우리 가정에서는 살 수 없다,를 계속해서 애한테 각인시키는 겁니다.
이 집안에서 살려면 깨끗해야 된다. 그 집안 나름대로 뭐가 되겠어요. 거룩이 되겠지요. 그런데 어린 애가 손을 안 씻었다. 어디 놀다가 초등학교2학년 애가 골목에서 놀다가 그냥 손도 안 씻고 밥을 먹었다. 그랬더니만 그 밥 먹는 순간 그 아이의 살이 썩으며,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혀가 입 속에서 썩으며,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안 일어나지요. 그러니까 부모가 애들한테 이야기한 거룩은 가짜다. 한계 있는 겁니다. 잘못된 거룩이에요. 옳지 않은 거룩이다. 가짜 거룩이지요. 온전하게 인간문제를 다 처리 못한 가짜인 겁니다.
자, 그 이유가 뭐냐, 공간문제에요. 땅 자체가 거룩한 땅인데 인간 더럽다. 그러니까 이 땅이 일시적으로서는 이방민족을 용납을 해가지고 멀쩡하게 살도록 해주지만 땅의 새로운 요소가 가미됩니다. 절기 요소가 가미되어버리면 땅 자체가 그 인간을 해골로 만들지요.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썩으며, 혀가 썩을 것이요, 이렇게 만드는 일이 작업이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절기를 가지고 스가랴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절기가 뭐냐, 19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18절에 보면,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이리 되어있어요.
원래 초막절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알고 있는 절기인데, 그 절기를 이방민족들이 안 지켰다고 드디어 그 최후의 날이 다가오는 거예요. 그럼 스가랴에서 말하는 그 최후의 날, 사람들이 멸망해야 되고 썩어야 될 이유는 뭐냐, 딱 하나지요. 초막절 지켰느냐, 이걸 묻는 겁니다. 초막절을 안 지키면 저주 받게 되어있다는. 이건 이방민족한테는 상당히 황당하지요. 황당한 일입니다.
그 동시에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전달하는 바가 돼요. 이건 중요하니까 크게 써볼게요. ‘내 목숨과 바꿀만한 말이 아니거든 듣지 말라.’ 이걸 우리 현장에 적용하면, 내 목숨을 바꿀만한 말로 안 들리거든 성경 공부 참석하지 말라. 와 똑같아요. 취미나 오락이 되어서는 안돼요. 성경공부가. 학원의 수강생 같은 자세 같아서는 곤란합니다. 몰랐는데 하나 배웠다. 그 배운 거 왜 배웁니까? 내 목숨을 건재하기 위해서, 지켜내기 위해서.
그건 지금 나의 최후를 여전히 모르고 무지상태가 지속되는 거예요. 무지 상태가 지속되는 것밖에 안 돼요. 내 목숨을 내놔도 괜찮은 말을 들어야 이게 진정한 복이 아닙니까. 이게 자유거든요. 이게 자유다. 예를 들면 어느 것이 진정 나를 자유케하는가, 1번, 남편이 멀리서 돈 벌어온다. 2번, 주식 대박 났다. 3번, 애가 취직해가지고 곧 결혼해가지고 내 집에서 뺄 것 같다. 드디어 독립할 것 같다. 이거 무지 기쁜 소식이지요. 지가 돈 벌어서 결혼해서 이제는 자식이 부모 섬기게 되어 있다. 4번, 초막절을 알았다. 어느 것이 자유입니까.
주님께서 초막절을 들이대는 것은 초막절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거룩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니가 진짜 거룩의 맛을 봤나?” 지금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초막절은 뭐냐, 초막절의 내용이 뭐길래 우리의 목숨 내놔라 할 그 정도로 자신감을 갖고 있느냐, “니 목숨 내. 가져 와! 가져 와! 내가 바꿔줄게. 니 목숨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썩어버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외칠 수 있는 내용이 그 초막절 안에 들어있거든요.
초막절 안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거룩과 함께 머물기. 거룩과 함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룩한 땅과 함께 머물기! 거룩한 땅, 대지, 토지, sio2, 이 지면의 땅의 성분과 함께 머물기. 거룩한 장소 안에 들어와서 살기.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초막절하는 행사가 딴 게 아니에요. 집 떠나서 텐트 생활하는 거예요. 집 떠나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갈 때에 이등병의 편지인가 그렇죠. 김광석 노래에 나오지요. 남자들은 그거 들으면 막 웁니다. 훈련받을 때 혹시 저 산등성 넘으면 고향 집이 보일까. 몸은 군에 왔는데 마음은 고향 집이 그리워서 발꿈치 들고 보는 거예요. 보초 서면서 언제 집에 가느냐, 달력에 가위표 마구 그어놓고 이렇게 하지요.
집 떠나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간다. 이건 죽음이에요. 왜냐하면 집은 단순히 내가 거주하는 곳이 아니고, 나의 나 됨을 형성시키는 장소거든요. 집이라는 게. 그 집에 누가 있는가,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었다.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는 것이 왜 나냐, 아빠 엄마의 훈계, 가르침, 아무것도 할 줄 모르게 내민 그분들의 돌봐주심. 빨래해줘, 밥해줘, 그래서 지금의 내가 됐다는 것. 그 뿌리, 나의 뿌리지요. 나의 뿌리와 결별, 이별한다는 것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고 난 뒤에 경험 해야 될 것은 자기와의 죽음이에요. 왜냐 아브람의 이름은 나는 집안의 어른이니까. 이 집안의 어른으로부터 자기가 돌아가셔야 돼요. 이 집안의 어른이 되어버리면 그건 약속이 아닙니다. 그건 육이지요. 혈육이에요. 혈육에서 영이 되려면 여기에 제3의 요소가 투입되어야 되는데 그게 약속이고, 그 약속을 위해서 천사3명이 찾아 방문했습니다.
내년 때 자식 생긴다, 거기까지만 이야기했지요. 아직 아브람은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22장에서 그 자식을 나한테 바쳐라. 니 아들은 아브람 너를 고향으로 보지 않고, 니가 고향이 아니라 다른 데서 왔다는 것을 니가 표현해라. 니 아들을. 그럼 고향이 어디냐, 도로 가야지요. 자기 집으로. 자기 집이 어디인지,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이삭이.
그럼 아내 사라가 임신 안 한 상태에서 임신이 잠시 풀렸다가 임신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철저하게 이용한 거죠. 거룩이 속됨을 경유해야 속됨을 심판할 수 있는 거룩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의 기존의 목숨도 그냥 목숨도 내놓을만한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내 실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라는 마음 자세로서 성경 공부를 왔는데 주님께서 너의 그 더러움을 경유해서, 더러운 너 자신과 하나님이 준비한 그러한 너 자신의 결별을 언급하거든요.
이삭이 아버지와 헤어집니다. 헤어지게 되면 그 짧은 순간에 헤어지게 되면 아브람은 자기 육으로 남고, 이삭만 덜렁 약속으로 가지요. 그런데 그 남아있는 아버지마저 이삭 따라가려면 아브람이 이삭의 빈자리를 채워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새로운 제물을 하나님 쪽에서 제시해버립니다. 그게 양인데, 그 양의 내용은 사실은 양이 아니지요. 아들 이삭이지요. 방금 이삭이 있었던 자리에 양이 죽으니까. 바꿔치기한 두 개의 대상을 한 반석위에서 둘 다 다 보게 하는 거예요.
아들이다. 양이다, 양이다. 아들이다. 둘 다 동일하게 동일한 하나의 기표로서 기호로서 이 세상에 등장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그 하나로 말미암아 그 어린양 되신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너야? 나야?” 묻는 거예요. 양단간의 각오를 묻는 겁니다. “계속 니로 실존 유지할래? 아니면 나로 갈아탈래?” 이리 묻는 거예요. “바꿔치기 할래?” 이리 묻는 겁니다. 그걸 로마서6장 같으면, “죄의 종이 될래? 의의 종이 될래?” 묻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 뒤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모든 복음적 표현들이 전부 다 같은 거예요. 전부 다. 기본 자체가.
절기는 뭐냐 하면, 절기는 땅과의 만남이에요. 절기가 유월절, 맥추절, 그 다음에 마지막 절기가 초막절이에요. 수장절이라 할 수 있고. 초막절이라 할 수 있는데. 수장절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거져 주신 열매를 마음껏 만족스럽게 추수했습니다.” 라는 것을 수장절의 의미라면, 똑같은 날인데 그 수장절이 뭐냐 그 초막절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개털이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과연 내가 이 땅에 거주 집을 나를 위한 거주 집을 살 자격이 안 됩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텐트의 특징은 개인용이 아니고, 집단용 텐트라는 사실이에요. 집단용이에요. 이걸 잘 보여주는 성경 대목이 뭐냐,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 지금부터 여호수아를 해야 돼요. 절기를 지키는 것은 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절기 지키라고 해서 유월절 지키고, 맥추절 지키고, 텐트생활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지금도 유대인들이 할 때는 초막절 지켜요. 심지어 뉴저지에도 초막절 지키는 교회를 안다니까요. 가스펠로우쉽 교회. 하여튼 교회가 무슨 절기 지키겠다는 것은, ‘전부 다 교회가 돈이 많이 아쉽구나!’ 라고 보시면 해석이 끝나는 거예요. 특별 이벤트를 통해서 필요한 헌금을 확보하는 그런 방편이 되거든요. 원래 이벤트가 그런 거예요. 마트 이벤트도 마찬가지고.
초막절 지키는데 지금은 들판에 못가니까 도시니까 옥상에다가 텐트해놓고 대나무나 종려나무로 해가지고 베어오든지 빌려오든지 해가지고 걸쳐놓고 옛날에 광야 때 했던 우리가 약속의 땅에 오기 전에 고생, 고생했던 거 기념하자. 성경 말씀 읽으시고. 우리를 이렇게 함께하셔서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천국에 오게 한 거 감사합니다. 이렇게 초막절 지키는 거예요. 초막절 지키면서 그 때 오면서 했던 겨우 겨우 먹던 끼니밖에 안 되는 음식들을 낮은 마음으로 서로 나누고 먹고 그렇게 지키는 거예요. 심지어 일주일 동안에는.
그러니까 일주일 뒤에 저희 집에 후딱 가면 되거든요. 저희 집에 가가지고 히타 틀어놓고 TV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절기 지켰다는 거죠. 하나의 하나님의 계시가 지금의 내 목숨과 바꿀만한 게 아니라, 내 목숨을 살찌울 만한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나의 더러움을 성경 지식이 와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그것을 거룩으로 이렇게 변모시키기 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된 게 절기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이 절기라는 것. 절기라는 것을 쉽게 말씀드리면, 이건 하나의 계절이거든요. 계절. 계절,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시장가서 이 가을 5Kg주세요. 가을 5Kg 얼마 합니까? 질문 자체가 안 되지요. 인간이 뭐든지 질문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은 질문 자체가 안 돼요. 왜 질문 자체가 안 되느냐 하면, 계절이 인간보다 범위가 더 크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돈으로 사는 물건이 인간의 의식보다 작고 부분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돈으로 구입이 가능한 거예요. 사가지고 내가 지금 마련되어있는 내 세계 속에 담아낼 수 있는데. 가을, 겨울, 봄, 여름 이 계절은 인간의 집에다가 바깥에는 눈이 오고 있는데, 봄으로 만들 수 있어요? 봄이다! 하고 반팔입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건 보일러 탓이지요. 보일러 온도 높여 놓아서 반팔입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실제로 바깥에 나가면 겨울이지요.
계절 자체를 포괄적으로 변모를 못 시키잖아요. 그게 운명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거 했지요. 나보다 먼저 있음을 아는 것이 집사라고요. 나보다 먼저 누가 계신 것을 먼저 아는 것. 이건 돈으로 헌금으로, 전도, 선교로서, 그 분을 내 소유로 만들 수 없는 거예요. 그걸 아는 걸 뭐라고 했다고요? 집사. 집사님들! 이 자랑스러운 명칭을 한 번 여기서 또 감격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면서 불러봅니다. 집사님들!
나보다 먼저 선제하시는 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그 말씀이 나보다 선제하기 때문에 말씀이 나를 만드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한 겁니다. 그게 절기에요. 주님이 나를 필요로 했지, 내가 주님을 필요로 한 게 아니에요. 내가 주님을 필요로 하게 되면 그건 교회가 되고, 그건 종교가 돼요. 내게 필요한 예수, 삼위일체, 그건 하나의 종교가 돼요. 종교. 하나의 오락이 된다고요. 내게 필요하니까.
남편들 가운데서 이런 남편 드물어요. “아내가 필요해서 내가 당신의 남편 됐어.” 이런 사람 별로 없고. “니는 내가 필요해서 니는 내 아내 됐잖아. 나가씨~ 예수 믿는 거 꼴보기 싫어.” 자기가 먼저라는 거예요. 한 푼도 안 준다. 그냥 나가! 여러분! 경상도 말로 단디 해야 됩니다. 단디. 단단히 해야 돼요. 집 명의 누가 됐는지 단단히 해야 됩니다. 지가 알아서 나가주면 고맙고.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의 세계를 거룩한 세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땅은 그냥 땅인데 이 땅이 최종 땅이 추구해야 될 최종적인 목표 내용을 계절, 절기지요. 이스라엘의 절기. 절기가 와서 마지막 만남의 장이 되어버리면 그게 절기 가운데 유월절, 맥추절, 마지막 절기가 1년에 초막절, 초막절 되면 모든 역사는 끝나버립니다. 모든 역사는. 드디어 땅이 제구실을 제기능을 작동하는 그 때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게 초막절이에요.
절기의 본 취지와 땅의 만남.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 때 자기 집에 안 살고 어디 산다 했습니까? 텐트에 살지요. 텐트 주변은 어떻게 됩니까? 텐트 주변은 사막이지요. 그렇지요. 텐트 주변이 사막이라면 아무것도 없이 사막이고 인간으로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사막이라면 텐트에 있는 사람은 이건 죽음 안에 있다. 이렇게 표현되는 겁니다.
텐트 생활한다는 것은, “나 죽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 죽음 안에 다 모여! 죽음 안에 다 모여!” 그런데 그냥 죽어버리면 자살되는데. 텐트 안에 모여 죽으라는 그 지시와 명령이 이게 초막절이라면, 절기라면, 이 절기 안에 지시하던 초막절을 명령한 그 분도 이 텐트 안에 함께 기거하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기가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원한다. 맞는 말이에요. 그러나 더 정확한 말은 하나님은 자기 자신만을 원한다,가 더 정확한 말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말이 아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말은 나중에 끝나고 나서 소급해서 보면 그렇게 되는데, 더 정확한 말은요, 내가 거룩하니 내가 거룩하다. 내 안에 거룩하다. 이리 되는 겁니다. 거룩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을 적용시켜 버려요. 거룩을 그냥 할당하고 배당해 버리는 겁니다. 거룩을 제공해 주는 겁니다. 절기 안에 들어온 사람. 텐트 안에 들어온 사람. 그것도 죽음의 텐트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6장에서는 내 살과 내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너희에게는 영생이 없다고 되어있지요.
영생이 없다는 말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면 영생을 준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에요. 왜그러느냐 하면, 공간 문제 때문에. 공간문제거든요. 내 살과 내 피가 있는 곳 외에는 영생이 없다는 말은 더 간단하게 축약하면 영생은 이 땅에는 없다가 돼요. 내가 주지 않는 한 영생은 없다가 돼요. 절기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거룩은 없다가 됩니다. 이거 아니면 없다는 말은 더 두 자로 줄이면, 그냥 없다! 에요. 이 땅에 생명도 없고, 거룩도 없고, 그냥 없는 거예요.
그러니 이방인들은 절기 밖에 있는, 텐트 밖에 있는 이방인들은 뭐가 되느냐, 12절,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라, 뭐 아쉽습니까? 이거 뭐 섭섭합니까? 섭섭해 하지 마세요. 이게 우리의 본 모습이에요.
이 땅을 우리가 내 땅이라고 함부로 부동산 등기 내 땅이라고 등기 함부로 한 거예요. 땅이 내 말 듣는 게 아니고, 땅은 절기 말 듣고, 초막절 말 듣고, 주님 말 들어요. 땅이 자기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땅위에 살면서 썩어버릴 때 이건 텐트 밖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 땅이 자기의 본질을 가동시켜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땅은 주님이 시키는 대로 가동했지요. 초막절을 모르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 땅이 “예,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저주!” 그러니 그 땅에 살았던 이방민족은 살이 썩고, 눈동자가 썩고, 혀가 썩고, 오늘 제목은 ‘썩고’. 다 썩고.
결국은 이렇게 썩거든요. 리마인드. 거꾸로 돌려봅시다. 전까지 썩어버린 그 사람이 하루 전에는 저희 사무실에서 김마담한테 쌍화차 시켜가지고 먹고 있다니까. 한달 전에는 골프치고 있어요. 1년전에는 벤츠타고 돌아다니고. 3년전에는 지 딸 결혼식에서 허허 웃고 있고. 그러면 이 초막절 아는 사람은 3년전 그 사람 딸 결혼식에 갈 때 촬영할 때 어떻게 촬영합니까. “자, 썩은 것 보자. 자, 썩은 것 찍어보자. 썩은 이빨, 썩은 눈동자, 썩은 눈동자. 웃기! 옳지. 좋습니다. 가족들 모이세요.” 가족들 20명 모였으면 썩은 해골 20명에 집단 촬영이 되는 거예요.
가게 문 열고 “어서 오세요. 썩은 눈동자” 아이구, 참 내가 말을 너무 선급하게 이야기했다. 썩은 눈동자, 괜히 했고, 안 들으신 걸로 하고. 뭘 원하십니까? 바지 드릴까요. 이 썩은 눈동자. 아이구, 또 말 나오네. 썩은 눈동자 보약 하나 지어드릴까요. 이게 진실입니다. 이게 진실이에요. 교회에 500명 나오면 전부 썩은 해골 500명 온 거예요. 장로라고 장로석에 앉으면 썩은 장로들 앉아 있고.
프랜시스 베이컨. 그 베이컨이라는 20세기의 화가가 그린 그림이 있어요. 교황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살점이 촛물처럼 녹아내리면서 눈은 빈 동굴처럼 그린 그림이 있어요. 그 사람 그림은 요새 팔면 천억 넘어요. 세계적인 유명한 화가인데. 그 사람은 인간을 그릴 때 정육점의 고기 있잖아요. 고기처럼 하는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외부는 보이는 것들은 속지 말고, 인간의 내부가 어떤 모습으로 되어있는지를 내부를 살펴서 그린 그림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던 권위, 명예, 체면, 돈, 재력, 다 흘러내리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원하는 초막절은, 거룩하지 않고 속된 것, 그 속된 것이 무엇이었던가, 속된 것은 거룩이 와야 속된 것을 알거든요. 이 더럽다, 라고 하는 규정은 거룩이 와야 더럽다가 규정이 돼요. 20절을 보게 되면,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보게 되면 뭐냐 하면 절기의 순환의 연속이에요. 순환. 뱅뱅 도는 것. 순환의 연속이 이스라엘 역사였다는 겁니다. 역사를 볼 때 인간이 공간과 시간을 인간이 측정하기 때문에 지나간 것은 순환이라는 개념이 없고, 지나간 것은 그냥 지나갈 뿐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절기,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은 “이건 작년에 했나?” “했습니다.” “그럼 오늘 안 해도 되겠네.” 이게 아니라 1년을 주기로 해가지고 계속 순환하는 거예요. 순환한다는 말은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시간 개념은 결코 그런 개념가지고는 거룩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은 땅에 살면서 땅이 지향하는 바와 땅위에 사는 본인이 지향하는 바와 공간과 시간 개념이 이게 서로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다르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과거의 역사를 이어간다 이 말이지요.
역사 이어가는 거, 어제 수요설교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아브람의 연속과 아브라함의 연속이 다릅니다. 아브람의 연속은 그냥 자기의 내가 이 집안에 니보다는 아들보다는 내가 선조다. 그러니까 이건 종족 보존이지요. 종족 보존. 종족 보존에 치중하는 것이 아브람의 연속이라면. 아브라함의 연속은 여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부산강의에서 할례가 주어지게 되어있고요, 어제 설교에서는 멜기세덱과 관련되어있어요.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에요.
할례와 멜기세덱의 공통점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가 없는 거예요. 이 땅에 족보가 없어요. 이 땅의 시간 개념을 순환 개념으로 바꾸어서 이해해야 한다는 거예요. 바꾸어서. 거룩이 세속을 거쳐서 도로 거룩으로 순환하는 그 순환고리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그 안에 합류하도록 초대한 겁니다. 일종의 거룩의 놀이동산에 아브라함은 올라 탄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속적이지요. 세속적이라는 말은 나쁜 일만 한다는 뜻이 아니고 시간개념과 공간개념이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고 지탱하고 실존을 생계를 유지하는 거기에 마지막 최종 몰두를 거기에 다 쏟아부었다 이 말이지요. 자기 가정에서는 자기가 왕이니까. 이게 세속적이에요. 인간들 입장에서는 나쁜 일이 아니에요. 이건 마땅히 해야 될 일이에요. 밥 먹고 사는 게요. 그런데 그 마땅히 하는 일. 마땅히 하는 일로 자기 정신이 완전히 무장되고 장착돼 있잖아요. 그게 광야에 무슨 소용이 있었습니까?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까. 물이 있습니까. 양식이 있습니까.
광야의 생활은 그냥 텐트 생활이지요. 광야의 텐트 생활을 압축한 게 절기거든요. 초막절이라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광야에서 다른 개념의 시간, 공간개념을 갖출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우리를 도와준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님을 도와주면서 우리가 얼마나 세속적이고, 광야에서는 그걸 세속적이라고 하지 않고 다른 말로 애굽적이라 하지요. 애굽적. 다른 말로 하면 우상적이다.
우리는 애굽에서 애굽의 신을 섬겼으니까요. 애굽의 종교를 믿었다. 이 말은 애굽의 문화를 따랐다. 문화를 따른 거예요. 문화, 문명 같이 보면 됩니다. 같은 뜻으로. 문명이라 하는 것은 나의 속마음을 표현할 때, 표현의 수단이 문명이고 문화라는 겁니다. 표현의 수단이에요. 제가 설교할 때 유행가 하잖아요. 심수봉의 노래 가사 하잖아요.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과 함께 내일은 행복하겠지. 할 때 그 유행가 가사에 대해서 그게 뭡니까. 이 시대의 문화와 문명이에요. 이 시대에. 왜 하느냐, 그게 표현되어있거든요. 인간의 속마음이 표현되어있어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 게 대화입니다. 대화. 세상 대화는 뭐냐, 사라질 것들의 대화에요. 안녕하세요? 밥 먹었어요? 모두 사라질 너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지고, 너도 시커먼 구멍, 눈구멍, 모두 사라질 것들의 대화에요. 백날 해봐야 거룩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거룩에 이르는 대화는 들을 때 내 목숨과 바꿔치기할 만한 내용이 올 때 그게 바로 거룩한 대화지요.
아브람이 연속될 때는 시간과 공간개념이 연속 개념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할례하고 멜기세덱은 이게 뭐냐 하면 순환구조니까 이 자체가 시간을 절단시키는 겁니다. 시간을 절단시켜서 이건 시간과 무관한 질서 체제. 그게 하나님의 절기에 관한 율법이지요. 반복하는 거예요. 되풀이하는 것. 반복하고 되풀이하면서 그 깊이를 더하기 위해 속된 속성을 이스라엘에서 빼낸다. 이게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은 자기를 찾아요. 하나님은 자기를 찾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자는 하나님 본인밖에 없기 때문에.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끌려 들어간 거예요. 끌려 들어갔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에 집중해야 돼요? 우리가 필요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해서 우리를 뽑아 세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굉장히 긍정적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역할은 긍정적이 아니고 부정적이에요. 죄인 하나 건져서 하나님 자신이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을 거룩이라는 개념을 죄인을 두고 의로 바꾸면서 거룩 개념을 실현시켰다고 스스로 하나님이 그것을 원했던 겁니다. 그게 거룩의 완성이에요. 그게 십자가이기도 하고요. 안 그러면 주께서 택한 백성을 그냥 하늘에서 그냥 낚시대로 꿰어서 끌어가면 되지 자기 백성을 위해서 대신 희생할 이유는 없어요. 십자가에 희생했다는 말은 죄인을 경유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거룩과 의가 하나님의 만족스러운 거룩과 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죄는 뭐냐, 시간과 공간을 잘못 이해한 것이 죄지요. 시간과 공간을. 하나님은 순환하는데 인간은 순환이 아니고 계속 자기의 종족 보존에 앞서는 거예요. 할례가 뭐냐, 할례는 여성이 아니에요. 남성의 생식기 끝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자르는 이유가 뭐냐, 더럽다고요. 더럽다고. 인간의 혈육, 아담의 혈육 자체가 더러운 거예요. 더럽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만 유일하게 할례 언약으로서 거기서 자기 자신을 제시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할례 언약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할례 언약에 합당한 자를 이삭을 태어나게 합니다. 그러면 태어나면서 제일 먼저 이삭이 한 것이 할례 언약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태어난지 7일이 아니고 8일만에 할례를 행해버려요. 그러면 이삭은 뭐냐, 할례 언약의 결실물이 되지요. 열매가 되지요. 더러운 것은 죽는다.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저주받아 죽는다. 그렇다면 이게 주의 저주성. 더러운 것은 죽는다를 남성의 생식기 끝에다가 표시를 해놓게 되면 더러운 자는 반드시 죽는다.를 운반자로서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겁니다.
십자가 알고 장착하고 부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늘 갖고 있어야 구원되는 거예요. 십자가 후딱 알고 됐고, 이제는 부활만 남아있다. 이게 구원되는 자가 아니에요. 늘 십자가의 반복성, 되풀이가 되는 거예요. 왜? 십자가가 있어 줘야 더 깊이 있게 우리의 죄를 주께서 십자가 지신 취지를 평생 살아가면서 온갖 경우를 다 만나게 하지요. 경우에 경우들을 다 만나게 해서. 이건 깨끗하고 이건 더럽다가 아니라 어느 것 하나 안 더러운 것이 없음을 더 깊은 안목을 가지고 발견할 때, 그 때 터져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감사와 고마움이에요. 모든 일에 감사와 고마움이에요.
16절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이리 되어있지요. 이방인 중에서도 초막절에 초대받은 자들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뭘 지키면 구원받습니까?” 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만을 구원해요. 문제는 그 구원하는 장소가 어디냐, 초막절이 이루어지는 곳. 시기는 언제냐, 초막절날. 이리 되는 거예요. 초막절이 절기의 마지막이니까요. 지상의 마지막이에요. 초막절이 왜 절기의 마지막이냐, 거기는 그냥 맨땅에 텐트치고 사니까요. 맨 땅에 텐트 친다는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의 문명과 문화 그런 것은 개나 줘 버려라 이 말입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거대한 뮤직 홀, 화려한 미술 전시관, 국회의사당, 링컨 센터, 개나 줘버려라. 개한테나 거기서 살라고 하라. 나는 가장 땅과 밀착해서 살겠다. 땅 그 자체로 남아있다는 그것이 왠 떡이냐, 라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냥 땅의 날것, 생 날것 그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절기가 바로 초막절입니다.
그 초막절날 텐트생활하면서 내가 나를 지키고 사수할 수 있는 요소는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없어요. 그냥 땅에서 와서 그냥 아무것도 없이 위에는 별, 아래는 땅. 영어로 하면 솔리트리맨 고독한 사람. 솔리트리맨 유명한 팝송이 있었어요. 외로운 사람. 세 자로 하면 외톨이. 어느 정도 외톨이냐, 나로부터 헤어진 외톨이. 나로부터도 바이 바이 한 외톨이. 전에는 내 것으로 살았던 내가 이제는 내 것마저 내 것이 아니고 나를 떠나버리고 남아있는 그 외톨이. 그게 바로 <이등병편지>지요. 집 떠나 열차타고 훈련소로 갈 때, 어느 장정도 훈련소에서 친구 만나야지. 이런 사람 없습니다. 훈련소에서 친구 많이 사귀어야지. 말뚝 박을까, 이런 사람 없어요. 그건 아주 특별한 사람이고. 군대놀이 좋아해가지고 너무 좋아서 자발적으로 간사람 말고.
보통 끌려간 사람들은 언제 제대해서 돌아가서 복귀할 생각만 해요. 훈련소에서 친구 만나야지. 나 너무 설레. 이런 거 없어요. 나 머리 깎는 거 너무 설레. 이런 거 없어요. 그 전에 머리 깎는다고 그걸 다 홀라당 깎았으니까 얼마나 섭섭했겠어요. 나의 흥미와도 바이바이야. 나의 모든 취미, 오락, 흥미까지도 바이바이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느냐는 말이지요. 내 목숨과도 안녕입니다. 내 목숨과도 안녕.
이제는 하나님의 절기에다가 절기 속으로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들어가면 이건 이게 되지요. 뭐냐 하면 이 단어, 디스코 팡팡!! 인천에 있다는 놀이동산. 둥그런데 있어가지고 마구 흔들 때, 붙들고 안 떨어지려고, 다리 들썩 들썩하고, 디스코 팡팡!! 음악은 들리는데 이건 가만히 있지 않고 팡팡 돌지요. 그런데 디스코 팡팡!!의 특징이 그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순환구조를 아무리 뛰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있다는 것. 온갖 우사는 다 당하지요. 뒹굴고 엎어지고 체면이고 위신이고 다 날아갔는데 나중에 휴~, 음악 끝나고 난 뒤에는 땀 흘리면서 ‘아~, 이 안이 이런 세계였구나!’ 주님 가신 길 좁은 길, 체험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21013b슥14장20절(죽음의 노예)-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왜 나의 구원은 안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진실이 초막절이 쥐고 있기 때문에 안 이루어진 거예요. 이건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는 오늘 본문처럼 이방나라까지 적용됩니다. 이방나라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던 그 하나님이 초막절이니까 초막절은 죽음 경험이거든요. 죽으심만이 진정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죽음만이 진정 살아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두 종류가 있다. 지금 나이 들어서 죽는 것, 그냥 육신의 죽음. 두 번째는 최종적 죽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죽을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 죽어요. 아담에게 죽으리라, 했잖아요. 선악과 따먹었다고. 그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 를 아담이 그걸 실현해 내지를 못합니다. 아담보고 정녕 죽으리라고 명령하신 그 하나님이 본인이 죽는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에요.
명령내린 명령은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최종적으로 구현할 수 있지, 그 명령 받은 인간은 구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뜻은 안 이루어져야 되지요. 당연히 안 이루어져야 되지요. 왜? 진실이 아닌데 왜 이루어져야 돼요. 안돼요. 진실은 주님만이 이룰 수 있어요. 죽음도 삶도 주님만이 이루어져야지 진실도 아닌 우리가 이룰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점은 주님과 동행한다는 점이 장점이에요. 홀로 있지 않고 율법을 주신 주님과 함께, “율법 지켜라! 내가 기다릴게.” 이게 아니라 율법 주신 하나님이 율법적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 그 결과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서 비로소 벌어진 일들이에요.
여호수아에서 계속 일들이 터질 때,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물어야 될 것은 뭐냐, “우리와 함께 하나님이 계신다.” 가 아니라 교회에서 말하는 함께 계신다, 가 아니라 이렇게 물어야 돼요. “함께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라고 물어야 돼요. 함께 계신 분이 어떤 분이냐, 물어야 돼요. “집에 남편 있어요?” “남편 있어요.” 이게 아니고 “남편 어떤 분입니까?” 모르지요. 함께 살아도 모르지요.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함께 있어도. 그 내막을 알 수가 없지요. 집에 자녀가 있지요. 자녀가 어떤 애 입니까? 몰라요. 앞으로 한 커플, 두 커플, 양파껍질처럼 계속 나올 거예요. 그러나 다 나오기 전에 내가 늙어 죽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결국 내 애가 누군지를 몰라요. 어떤 애인지 몰라요. 인간은 서로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도 몰랐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줌으로서 터져버린 일들, 그게 여호수아입니다. 인간은 사건들의 집합체. 인간은 사건들의 집합체에요. 그래서 인간의 자아는 기억을 담는 방식, 또는 그릇이 돼요.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과거의 기억을 담아서 말을 하는 거예요. 과거의 기억을 담아서. 그러면 자아는 뭐냐, 그 기억을 미래까지 이동시키는 하나의 운반 그릇이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자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애굽에서 갖고 있던 게 뭐였어요? 기억이지요. 기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온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 배제하고 직접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와 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싸움에 보태준 거 있습니까? 없지요. 그냥 제자리에 있었는데 승리는 누구 승리입니까? 이스라엘 승리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이 바깥으로 나오게 된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원로들이 모여서 회의해가지고 “야, 애굽에서 못 살겠다. 나가자.” 회의한 적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 그런 회의를 못합니까. 그들은 애굽의 바깥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들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최고의 국가의 바깥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들이 지향하고 바라보는 것은 우리도 애굽나라처럼 절대 왕권의 전제정치 절대왕이 지배하는 이 거대한 나라가 그들의 소망이기 때문에 자기 소망을 스스로 철회하고 소망 없는 곳으로 퇴보한다. 이건 인간에게는 없어요. 우리 망하기로 합시다. 이걸 회의 주제로 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김건희라는 그 이름의 여자분이 대통령 부인이 논문 쓰면서 “나, 이 논문은 내가 무엇이 표절인가를 그 극치를 보여주겠다.” 이런 목적으로 논문을 썼습니까? 아니지요. 그건 아니지요. 목표가 뭐냐, 박사학위가 목표잖아요. 나 박사학위 안 받아도 돼. 논문의 표절이 이런 게 표준이야. 이리 해야 표절이야. 그걸 보여주려고 쓴 건 아니잖아요.
인간은 반대로 자기 존재를 부인한다는 쪽이 아니고, 자기 존재를 극대화 절정으로 긍정하는 쪽으로 누구든지 지향하는데 그게 바로 인간의 기억이에요. 그걸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참, 얼마나 골치 아프겠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결국은 약속의 땅을 차지했지요. 그거 보세요. 이거 웬일이에요? 어떻게 그 약속의 땅을 차지했으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거기에 대한 힌트가 전에 울산강의하면서 우리 전도사님이 저를 울산역까지 끝나고 난 다음에 태워주거든요. 태워주면서 조수석에 안전벨트를 했어요. 했는데 자기가 생각난다는 거예요. 자기가 전에 목사님이 앉는 그 자리에 쌀가마를 얹고 운전을 하니까 차 소리가 자꾸 삑! 삑! 나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쌀가마에 안전벨트를 안 했어요. 우리가 아는 안전벨트는 뭐냐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지 쌀가마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닌데 이게 자동차라는 기계는 그걸 파악하지 못하고 무조건 안전벨트 풀렸으니까 삑! 삑! 시동은 걸었지 안전벨트를 안하니 소리가 나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쌀가마에 안전벨트를 했다는 거예요. 쌀가마는 기분이 좋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안전벨트를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절기라는 이름으로.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니가 안전벨트를 안 하면 적을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형편이 그런 형편이에요. 대단한 형편 아닙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를 구경하면서 개인적인 텐트는 없고 전부 다 집단텐트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텐트는 있어도 의미 없기 때문에. 똑같은 형편에 놓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놓고 하나님께서 “자, 가자!” 이리 되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데요?” “가자, 사막으로!” 사막으로 갈 때, 사막으로 가면서 백성들이 얼마나 불안에 떨었겠습니까. 물도 없고, 양식도 없을 때에.
그 때 모세를 통해서 알려준 말이 내 율례와 법도를 지키면 된다. 아~~, 이건 무리한 요구입니다. 율례와 법도를 안 지키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지요. 애굽에서 익혔던 기억에 의하면 인간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무조건 어떤 경우라도 죽으면 모든 것은 다 실패다. 이걸 몸에 익히고 온 거예요. 인간들은. 모든 인간들은 그래요.
그런데 광야에서 율례와 법도를 지켜라, 는 뭐냐 하면 죽음을 너의 주인으로 삼고, 너는 그 죽음에 노예가 되어라. 이게 여호수아의 주제입니다. 보통 인간은 주인이 누구냐 하면 내가 주인이에요. 주인이기 때문에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도 안 죽어야 돼요. 안 죽어야 됩니다.
그러나 율례와 법도 앞에서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돼요. 왜? 더러운 인간을 애굽에서 뽑아냈으니까. 더러운 인간은 율법의 관점에서 더러운 인간은 지극히 더러워해야 그게 율례와 법도가 함께 공존하고 있던 티를 내기 때문에 그래요.
자, 우리 가운데 십자가가 있다. 또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있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우리에게 합당한 대우입니까. 천하에 죄인 중에 괴수가 될 경우에만 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어요. 이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법무부 차타고, 본 적은 없는데 드라마에서는 봤어요. 법무부 차를 타고 거기 흉악한 제소자들 수갑 채워서 호송차 하잖아요. 호송할 때에 그 호송차 내부를 제복을 가지고 유니폼을 가지고 두 그룹을 구분해야 돼요.
운전사하고 호송하는 그 사람은 법무부 제복을 입어야 돼요. 그리고 뒤에 있는 제수들은 무슨 옷을 입어야 돼요? 죄수복을 입어야 되지요. 그런데 죄수들이 이렇게 법무부의 제복을 입고 앉아가지고 히히덕 거린다는 말은 도중에 중간에 반란을 일으켜가지고 운전사 빼앗고 지금 탈취해가지고 지금 교도소가는 길에서 자기는 지금 탈출하는 중이라 보면 되지요.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이 있으니까. 호송을 얼마나 어설프게 하면 지가 수갑을 알아서 다 풀어가지고 운전사 뒤에 해가지고, 그걸 정의로운 검사가 끝까지 억지로 해가지고 범인 잡는다고 언론에 막 내는데 범인들은 가는 호송차 속에 전부 다 한패가 돼가지고..., 그래야 드라마가 되니까. 뭔가 구분 지어야 되지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대단한 존재로 자부하고, 자연이나 하늘이든, 별이든, 해든, 나를 살리는 이유 때문에 저 달이 있고, 별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에요. 타인이 있는 이유도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흔히 복음 안다 하는 사람이 입만 열면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주의 은혜로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주의 은혜로 뭘 살렸다는 말인고. 나를 살렸다. 나를 살리는 게 아니고 복음을 살려야지. 왜 자꾸 나를 살렸다고 하는가. 주의 은혜로 복음을 또 깨닫게 되었습니다. OK. 그건 인정하겠는데, 복음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또 밥 먹게 되었습니다. 밥을 언제까지 먹으려고. 밥은 요양병원에 가도 주는데. 죽을 때까지 밥 주잖아요. 아, 밥 죽을 때까지 밥 주는데, 그 밥 얻어먹으려고 하나님이 도와주는가, 그건 아닐 건데. 주의 증인 되라고 지킨 거고, 십자가 복음 지키기 위해서 주께서 줬는데. 그건 중간에 뭔가 그 배식을 지가 날름 탈취한 거 같아.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음이 너의 주인공, 죽음이 주인공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율례와 법도가 주인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로 의도적으로 죽음의 길을 가게 하는 겁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나와요. 출애굽기에도 나오고요. 출애굽하고 여호수아,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 다 연결되었다고 보시면 돼요. 어쨌든 광야생활이니까.
그런데 신명기 같은 경우는 그래요. 그 사람들이 가다가 소가 도살장에 걸어가다가 갑자기 앞발로 버티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소가 진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소가 인간이라면 자기 죽을 자리 보고 본능적으로 자기는 버티는 거죠.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 나와서 그냥 바로 들어가도 되는데 왜 40년간 뱅뱅이 돌아 그 광야길 뱅뱅이 돌았습니까. 본능적으로 자기 살 생각을 하니까 버티게 된 거예요.
이러다 우리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기가 차지요. 너는 벌써 죽었어. 이미 애굽에 나올 때 이미 죽은 채로 나왔고, 니가 홍해 건너 올 때 죽어서 건너온 거 기억 안나? 우리 주일학교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만, 그림 자체가요, 그림이 멋있어요. 푸른 물감으로 해가지고 바다를 그려 넣고 애들 아주 소풍가듯이 이렇게 해가지고 건너오는 모습의 그림이 있어요. 그림을 여러 번 보여줬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다른 말투로 하면 “이게 뭐야. 이게? 도대체 이게?” 왜 멀쩡한 길 놔두고 물속으로 기어들어가요. 이건 죽음의 길, 죽음의 길을 들어와야 거기서 생명의 길이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니가 죽는 것이 니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건 끝을 알아야 버릴 것을 알아요. 이 새 책 나왔는데 새 책 끝에 보면 그 표지에다가 그걸 딱 걸쳐놨어요. “끝을 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니가 이제 버릴 것을 버려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버티지요. 본능이니까. 욕망이니까 이건 못 고칩니다. 인간이 어떻게 욕망을 이깁니까. 욕망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그 버티게함으로서 거기서 속마음을 주께서 들추어내는 거예요. 바깥에는 율례와 법도의 세계인데 니 안의 세계는 율례와 법도를 거역하는 본능이 자리 잡는 그 두 개의 이질적인 것은 광야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아요. 광야 아니면. 왜 초막절을 지켜야 될 이유를 알겠지요.
초막절은 그동안 인간이 초막절과 얼마나 절기와 얼마나 싸워왔다는 것을 극단적인 텐트 생활을 통해서 그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그 마지막 절기가 초막절이지요. 쌀가마에 지나지 않은 게 내가 안전밸트 해주니까 안전밸트의 의미도 모르고 지가 쌀가마인줄 모르고 인간인줄로 알고 차가 왜 덜렁 덜렁 거립니까. 이리 나오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덜렁거리든 위로 튀든 간에 안전밸트 채웠잖아요. 이 쌀가마야! 쌀가마도 아깝다. 사실은.
나의 끝은 초막절이 쥐고 있어요. 나의 끝은 죽음이 나를 쥐고 있어요. 그래서 쟈크로 된 옷 같은 거 쟈크를 중간에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두렵지요. 하지만, 쟈크를 끝까지 다 내려서 아주 쟈크가 그 궤도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봅시다. 튀어나왔다고 본다면 그럼 그건 뭐냐,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거예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튀어나오고 다시 쟈크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이건 뭐냐 하면 이건 내가 죽으려고 두려워했던 그 때 자아가 체험하지 못한 준비된 새로운 체험. 주님 가신 길, 좁은 길이지요. 영생의 길.
영생의 길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영생이 되었는가를 체험할 수 있는 여분의 시간이 되는 겁니다. 여분의 기회가 되지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호수아를 한 번 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광야 생활 끝나고요, 본격적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감자샐러드라고 봅니다. 감자샐러드 저도 한 번 만들어봤어요. 하도 유세 떨어서 나도 한 번 만들어보자. 유세 떨만한지. 감자 두 개 삶고, 계란 두 개 삶고, 마요네즈 준비해가지고 그래가지고 할 때, 요 과정이 멋있어요. 으깨버린다. 자기의 개별적 동질성이, 어느 게 감자지? 어느 게 삶은 계란인지? 전혀 표 안 나게 으깨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의 특징이에요.
감자샐러드 먹고 있는데, 단독으로 감자덩어리가 있다면 그 즉석에서 으깨버리지요. 그게 아간이에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해가지고 그대로 눌러버리지요. 개별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감자 샐러드를 으깨서 하나로 만들어줘야 이방민족이 어떤 종류의 이방민족을 맞닥뜨렸다 할지라도 그쪽은 전체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거룩 대 세속의 대결구조.
거룩 대 세속의 대결구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게 있어요. 거룩과 세속의 대결구조라 했지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대결구조는 아닙니다. 거룩 과 세속의 대결구조는 맞는데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대결구조가 아니에요. 거룩은 이스라엘이고, 세속은 이방민족이다. 이렇게 막 연결시키면 안 됩니다. 그러면 뭐냐,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차이를 통해서 거룩과 세속의 대결구조 이건 맞아요.
자, 대결하는 것과 차이 나는 것, 차이 나는 것은 내 위주의 대결은 우리 인간에게는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로마서 보겠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하나 중에 하나가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 그 대목이에요. 그게 로마서12장 19절에서 20절에는 어떻게 풀어지는가 한 번 보세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이거 지금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보고 이야기하지요. 성도보고 이야기하면서 친히 뭘 갚지 말라? 너의 원수를 니가 갚을 자격이 너한테는 없다는 거예요. 너의 원수를.
부부싸움하면서 웬수야! 웬수야! 하잖아요. 실질적으로 우리의 원수는 없어요. 어제 수요일날 제가 기도제목을 하면서 기도제목이 바로 이런 취지였습니다. 남한테 강요하지 말라. 남을 윽박지르지 말라. 그 사람도 지 맘대로 사는 게 아니다. 그걸 기도하라는 거예요. 우리는 뭔가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서 명령하고 지시하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줄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사람 말을 듣지 않고 주님 말을 듣지, 인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둘 다 으깨져야 하기 때문에. 둘 다 개별자의 자격으로 살 권한이 없기때문에 그래요. 개별자 자격으로. 그래서 고린도후서5장에 보면 성도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체가 자기를 위해 산다는 자체를 으깨버렸으니까.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서 일어나고 형성된 일들이에요.
아까 후딱 했는데 다시 하게 되면, 인간은 사건의 집합체입니다. 인간을 하나 하나 뜯어보게 되면 전부 다 사건, 사건, 여기에 관련된 사건, 숱한 사건, 숱한 계기들, 숱한 사람들이 일어난 일들이 모여서 이게 질서 잡힌 것이 이게 내 몸이에요. 내 몸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거기에 관여하고 있는 거예요. 불교는 요 정도는 알고 있어요. 연계설. 하나를 위해서 잇다라 연결되어있다는 거예요. 누가 했는지 그건 몰라요. 누가 했는지를 몰라요. 주 하나로 세상은 통일되기 위해서 하는 그건 몰라요. 그냥 현상만 바라보고 있어요. 많이 바라보다가 나중에 초막절한테 걸려가지고 바라본 눈 다 동굴처럼 시커멓게 될 거예요.
자,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 했습니다. 이건 원수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원수가 생기거든 너의 원수가 아니고 주님의 원수인지를 파악하라는 겁니다. 왜? 어떤 인간에게도 인간의 원수를 주께서는 만들어낸 적이 없어요. 모든 건 주님의 원수이지 너의 원수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원수에게 갚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율법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과대하게 보복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지나치게, 과도하게. 그런데 어느 정도가 지나친지 그건 인간은 알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율법은 지키지 못할, 인간은 지킬 수 없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 다음에 20절에 봅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이게 참, 원수입장에서는 진짜 이건 그 원수입장에서는 자기 자아를 비침하게 만드는 행동들이에요. 남편보고 담배 끊으라고 잔소리하던 아내가 남편이 술 먹고 와서 담배 피울 때 담배 딱 끄집어낼 때, 라이타 해가지고 담배 불피워주는 요 모습. 캡쳐해서 사진 한 번 찍어보세요. 이거 얼마나 못된 아내에요. 엿 먹어라. “내가 하지 말라는 것은 또 했지. 인간아! 나는 니를 도와주고 싶어.” 이런 거. 이게 도와주는 겁니까? 니는 철저하게 악에 니는 내 율법에 망가져야 돼! 이런 뜻이다 이 말이지요.
원수에게 먹을 것을 줌으로서 원수가 개과천선하지는 않아요. 원수로 하여금 혹독한 처벌이 주어지게 되는 그 계기를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리함으로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뜨겁지 니? 부끄럽지 않아? 너는 지금 부정 못해. 니가 원수 짓한 것에 내가 보탰기 때문에 니는 빼도 박도 못하게 너는 악이야. 그래서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입니다. 악을 악 되게 들추어내기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입니다.
아,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이에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자기 업무 정지 당했잖아요. 누구한테? 사울왕한테. 그런데 사울이 찾아왔을 때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울을 어떻게 했습니까? 막 독약 먹여가지고, 푸른난초 옆에 놓고, 푸른난초 모르지요. <작은 아가씨들>에 나와요. 그렇게 했습니까. 저주했습니까? 아니지요. 임금님 힘내세요. 먹이고 입혔지요. 그래서 천국 갔습니까? 신접한 여인이. 동기생이라는 거죠. 지옥의 동기생이에요. 반갑다. 친구야!
진실은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등장해서 모든 꿈을 다 짓밟아버려요.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은 지금의 내가 만든 가설입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지금 만든 거예요. 지금. 지금 나의 어린 시절의 감상은 그 어린시절 그 때 돌아가도 그 때는 전혀 없어요. 첫 아이가 태어날 때 보통 옛날 사람 같으면 20대 후반, 요새 같으면 30대초반 되겠지요. 애기가 태어났습니다. 애기 태어날 때 아빠들, 애기한테 정신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가장 인생에서 자리 잡을 때에요.
거의 24시간 가운데 집에 와서도 회사 생각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자리 잡을 수가 없어요. 자기 직장생활할 때에. 여자는 애기 임신했으니까 집에 있고. 집에 있으면서 하루종일 뭐하느냐 하면, 이 아기를 저 남자가 얼마나 어디까지 보장해주고, 언제까지 생활비 대줄것인가, 하루종일 아하고 옆에 누워가지고 그거 생각하다가 뚱뚱해지지요. 그런데 남자는 애를 낳아도 짐스러워해요. 이제는 사표를 내도 함부로 못 내요. 이왕 사표 못 낼 거 승진해야 되지요. 그러면 안 하던 아부해가면서 안 하던 짓거리 해가면서 그저 직장 안 떨어져야 그 자식까지 있다는 그 책임감을 내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런 남자가 한 30년 지났다고 봅시다. 꼭 자식한테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니 처음 어릴 때 내가 니하고 안 놀아줘서 미안하다. 그러나 어릴 때 미안하다는 그 미안한 감정은 지금 자기가 만든 가설이에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되면 미안하고 자시구 할 게 없어요. 밤늦게 잔업하고 12되어서 자야 되는데 내일 아침 또 7시 되어 출근해야 되는데 새벽2시에 애가 앵하고 운다. 애들고 그냥 던지고 싶어요. 요새는 아파트라서 높아서 못 던지지만, 옛날에는 아파트가 아니고 단독주택이기 때문에 던질 수가 있어요. 바닥까지 던질 수 있어요. 요새는 창문 열고 던지면 큰일나지요. 잠 좀 자자. 니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 힘들지요. 내가 고생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라는 말이 입에 달았어요. 지금까지 고생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술만 먹고 들어오면 그 소리하잖아요. 누구 때문인데. 뭐 누구 때문에? 니 때문이지.
죽음 자체가 주인이 되지 아니하면 기껏해서 회개한다는 것이 지금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서 자기 정당함을 위한 가설을 내세우는 것이 기껏 하는 짓이에요. 미안하다. 그 때 못해줘서 미안해. 우리 다음에 놀러갈까. 어디 제주도 갈까? 그 때 못해준 거 채워줄게. 그 채워준다고 위로가 됩니까. 지나간 것은 지나갔는데요. 끝나버렸는데. 그게 돼요?
아무리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를 이겨도 그 성과가 이스라엘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장치까지 여호수아에게 마련되어있습니다. 야! 우리가 이겼다. 가 되면 안 돼요. 이건 이스라엘과 이방나라가 대결구조가 되는 거거든요. 차이 나는 건 이해되는데, 대결구조는 최종성과는 누구한테 가야 되느냐, 하나님이 대결하는 곳에 가야 되지요. 하나님이 대결하는 곳이 뭐냐, 놀랍게도 이건 세속 나라가 아니고 이방나라가 아니고 우상입니다. 우상. 자, 그렇다면 만약에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는 대결구조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사기에 노골적으로 되어있어요.
죽음이라는 것이 최종적이라는 것이 여호수아 어디에 나오는가, 여호수아 마지막에 한 번 봅시다. 24장32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무엇입니까? 요셉의 뼈. 아버지의 죽음이지요. 우리 이스라엘 아버지의 죽음이에요. 아버지의 죽음을 운반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의 죽음에 기꺼이 노예들이에요. 그럼 이번 승리는 누구의 덕이다? 아버지의 죽음의 덕분입니다. 그 아버지 요셉. 그 아버지의 죽음. 요셉의 죽음은 그 죽음을 통해서 뭐가 나오느냐, 약속이, 죽음이 아니면 약속이 안 나와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요,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처음 들었지요. 십자가, 십자가, 수천번 들었을 거예요.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십자가가 뭡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노예가 됐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이 주인이 되어서 우리는 그의 운반체고, 직원이고, 집사고, 그의 증인이고, 그분의 종이 되고, 그분의 노예가 된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이 땅이, 오늘 여호수아를 왜 끄집어내느냐, 땅 문제 때문에 끄집어내요. 땅. 땅 문제에요. 땅을 어떻게 정복하느냐, 정복될 수 없는데 어떻게 정복했느냐, 그 땅이 빈 땅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꽉 채워졌지요. 무얼로 꽉 채워진 땅이냐 하면, 죽음의 종이 아니라 살겠다는 신, 너를 살려줄게 라는 신들의 땅이에요. 이게 바로 열 족속이고, 이게 바로 이방민족이에요. 나를 살려주는 신. 두 자로 우상이지요.
오늘날 교회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교회들 목사 설교하는 거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 살려줍니다. 지금 그 이야기만 되풀이해서 계속 내놓잖아요. 하나님께서 은혜로 여러분을 살려줍니다. 그러면 성도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싫어요. 그 소리 그만하세요. 스탑! 스톱은 아니고 스탑! 스탑! 그 소리 그만하세요. 죽어도 좋은 이유만 설명해 주세요. 그거 말고. 어떻게 사느냐만 이야기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 목숨 사느냐 그런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은 말씀주세요. 내 목숨과 바꿀만한 말씀주세요. 이 목숨이 짐이고 지긋지긋합니다. 끝내더라도 기쁘게 끝낼 수 있는 말씀주세요. 그렇게 외쳐야 되지요.
외친다고 들을 사람 아니니까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그럴 때 그들은 뭐냐, 사람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에요. 그 하나님의 원수를 이 땅에서 먼저 이스라엘 사람이 접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이 전쟁은 너의 전쟁이 아니고, 나의 전쟁이다. 모세언약의 전쟁이다. 너와의 대결구조가 아니고 나와의 대결구조다. 그럼 나는 뭐냐, “이스라엘 백성들아! 내가 뭘 갖고 있지?” “언약궤요!” “또 뭐 갖고 있지?” “율례요!” “또 뭐지?” “율법입니다.” “그러면 적들은?” “언약궤가 없어서.” 아, 그건 틀린 말이지요. 살고자 하기 때문에.
적들은 본인이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극단적인 것은 다 갖고 있어요. 본인이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 쳐들어온다는 소식 듣고,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하는데, 그 수단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거짓되게 항복하는 것도 포함돼 있어요. 기브온 사람들. 거짓되게도 항복했어요. 여호수아 다 할 필요 없고요. 이 시간에.
기브온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 가까운데서 왔으면서 곰팡이 핀 떡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속였잖아요. 속였을 때, 그들을 처단할 수 없는 이유는 언약이 언약하고 체결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하고 체결한 게 아니고 언약하고 체결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관여 못해요. 그것도 언약 요소에 포함되는 겁니다. 어떻게 포함되는가, 하나님과의 전쟁인데, 이스라엘은 자기 가오, 자기 자존심, 체면, 그것만 챙기면 됐지 뭐. 이런 식으로 그 전쟁을 자기 체면을 위한, 자기 명예회복을 위한 전쟁처럼 이렇게 인간의 내부에 죄악성이 마구 마구 나온 거예요. 여호수아 전쟁 속에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이방민족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왜 복음 모르는 사람들과 부딪치고 늘 주변에 복음 모르는 사람들만 생기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저는 뭐 복음 아는 사람만 만났는데요.” 언제 변질될 지 어떻게 알아요. 언제 집사가 잡사가 될 지 어떻게 알아요. 복음 안다고 하는 목사가 언제부터 복음 모르고 자기 기분에 도취해서 사는지 어떻게 알거에요. 그런 거조차도 주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한 환경이에요.
“저 사람과 니가 다른 바가 있는 줄 아나. 똑같아 본성이.” 라고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겁니다. 만나게 함으로서. 중요한 것은 니가 구원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필요로 해서 너를 사용한다는 그 관계, 언약관계가 중요한 거예요. 그 언약 관계가 뭐냐 하면 아까 했어요. 죽음의 종. 오늘 제목입니다. 죽음의 노예. 적어놔야 돼요. 나중에 죽으면..., 신나지 않습니까.
초막절이라는 것은 집 버리고 그냥 텐트생활하는 거예요. 한데. 바깥에. 텐트나 하나 달랑 치고. 죽음 체험이에요. 죽음 체험. 싸이가 전에 부산에서 쇼를 했는데 쇼 이름이 무슨 쇼이름이라 했습니까. 흠뻑 쇼. 물을 흠뻑 적신다. 했는데 코로나에 흠뻑 적셔. 주께서는 우리를 죽음에 흠뻑 맞닥뜨리게 하는 거예요. 어디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를 가진 이방민족과의 전쟁에 집어 뜰게 해가지고, 우리가 기피하는 죽음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죽음을, 오히려 죽음을 기피하는 우리를 가지고 강제로 죽음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겁니다.
무기가 뭐냐, 할례였습니다. 할례. 할례는 조기에 자살하는 거거든요. 이미 죽었음을 내 몸에다가 새기는 것이 할례입니다. 조상에서부터는 육신의 그 흐름을 중간에 차단시켰으니까요. 이제는 육신으로부터의 고리가 끊어지고 약속과 이어져버리지요. 약속과 전복되었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 겁니다. 할례. 마음의 할례. 그래서 부산에서는 할례라는 것은 마음의 할례는, 육신의 할례는 끝을 잘라버리지만, 마음의 할례는 마음을 드러내고 거기다가 속된 것부터해서 거룩으로 이어가는 제사장의 움직임 또는 제사 제물의 움직임 또는 제사 피의 움직임, 하나님께 흔쾌히 받았던 그 제물의 피가 마지막 지상 속까지 뿌려지는 고 때까지의 과정을 우리 속에 담아버립니다.
그럼 우리 일상은 어떻게 되느냐, 맨날 불신자와 만나는 거예요. 불신자. 거기서 나온 유명한 포맨. 송재원씨가 한 팀에 있었던 포맨이 불렀던 노래. 맨날 술이야~. 세상의 문화는 다 필요 없는 게 없어요. 맨날 술이야. 우리는 맨날 불신자만 만나요. 어서 오세요. 불신자. 눈동자 빠져서 휑한 불신자, 혀바닥 썩은 불신자. 맨날 만나는 사람이 불신자만 만나요. 불신자 남편, 불신자와 같이 동거하기. 불신자와 함께 머물기. 도대체 이 불신자가 머물러 줘야 “주님, 저 언제 자를 거예요? 아이구, 지긋 지긋하다. 정말.” “아직 멀었어. 주의 증인. 더 해야 돼. 이 집사야!” 집사란 뜻은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본인이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누구 일을, 남의 일을, 그 사람 일을 하는 게 집사잖아요.
우리가 갖고 있던 가설, 나 위주의 세상보기, 여호수아처럼 그냥 이 땅 주인이 있는데 땅 주인도 아니면서 땅 주인이 있는 데를 이건 아주 억지같이 쳐들어가는 과정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전쟁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아까도 했지만, 여호수아 24장32절에 요셉의 뼈를 세겜에다가 딱, 중심 거기에 본부가 있던 곳이에요. 세겜에 누워서 딱 하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겠어요. 바로 이곳이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분입니다. 주님의 계시는 곳입니다. 그게 바로 신약에서 말하는 약속의 땅이에요. 천국입니다.
죽은 자의 땅. 약속의 땅이에요. 천국입니다. 죽은 자의 땅. 십자가 죽으신 분의 그 분의 계시는 곳으로 우리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데려간다는 것은 그 동안 그 사이에 얼마나 엄청난 기적과 기적이 연속되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엄청난 기적이지요. 그래서 무빙워크라는 게 있지요. 무빙워크. 수서역에도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도로가 가는 게 있잖아요. 그것처럼 절기 위에 우리가 놓이는 거예요.
절기위에 놓이면 절기가 알아서 움직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절기 따라서 같이 움직이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무빙워크를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어요. 지금도. 뭐냐,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이게 이방 나라에서는 계절,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절기. 이게 절기잖아요. 주님이 여기서 돌리는 거예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돌릴 때, 유대인들은 주님이 돌리는 것을 알지만, 이방민족은 이건 자연스러운 일로 보는 거예요. 봄오면 여름되고, 여름되면 가을되고, 가을되면 겨울되고.
그런데 돌리는 그 절기가 맨 그 땅이 그 땅이 아니라 결국은 이 세상이 초막절이 보여주는 저주 받을 자와 모든 것이 거룩할 자를 가려내는 무대가 바로 땅이었다는 겁니다. 그 무대에서 이 인류를 대표해서 먼저 학예회를 벌린 자가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약속의 땅이라는 제한된 구역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대로 딱 장치를 해놓고 거기에 이스라엘 사람들로 보내서 제일 먼저 한 것이 할례 행하게 했지요. 할례.
처음에는 할례부터 한 게 아니고 언약궤부터 앞장 세웠는가 그렇지요. 처음에 여리고성 정탐했고요, 요단강 건너가지요. 언약궤부터 앞장 세운 거예요. 언약궤. 언약궤는 뭐냐,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계시지요. 언약궤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 뭐로 바꿨느냐 하면 이게 주의 이름이 돼요. 주의 이름.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 이 말은 이름을 가진 인간들 개별자 속에 들어왔다, 하나의 개별자 속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들어와서 주의 이름이 되어버리면 그 주의 이름 앞에 이름을 가진 모든 인간들은 감자샐러드처럼 으깨져가지고 자기 이름을 그냥 유지하면 안돼요. 없애버려야 돼요. 할례도 그렇고. 그러니 여리고성을 누구 이름으로 건졌다가 승리하면 돼요? 여리고성을 함락한 것은 주의 이름이지. 이스라엘 누구의 영웅이라든지 여호수아 때문에 하지 않아요.
여호수아 전쟁할 때 하늘에 뭐도 멈췄습니까? 해가 멈췄지요. 해가 멈췄다 하는 것은 여호수아가 앞장선다 할지라도 그 전쟁은 어디까지나 주의 이름이지요. 평소에 여호수아가 취미로 해를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취미를 가진 자가 아니잖아요. 평소에 해하고 관계있습니까. 없지요. 해와 관계있는 분은 지금 전쟁을 압도하고 전쟁을 선두지휘하는 주의 이름과 관련있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쟁의 이스라엘이 거기에 같이 합류하게 된 겁니다.
기생라합을 여리고성에서 건져낼 때, 붉은 줄. 붉은 줄을 늘어뜨리는 것. 이런 것 하나, 하나가 기생라합에게 주께서 했던 작용한 것이 붉은 줄 하나로 표현이 되도록 다 주께서 모든 일에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럼 여리고성 들어갈 때 언약궤 들어갈 때나, 언약궤가 요단강 건너갈 때, 여리고성할 때도 언약궤 들어갔잖아요. 언약궤라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뭐냐, 주님이 앞장 서는 그곳에 우리는 뒤에 노예로서 따라가야 되지, 내가 주의 일하겠다고 얼쩡대고 앞장서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절기가 스스로 회전하도록 주께서 오셨고, 이 땅에 고난받으시고, 십자가 죽으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는 이 순환구조. 무빙워크에 우리가 그냥 올라타기만 하면 되지요. 참 편해요. 문제는 디스코 팡팡이 문제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울퉁불퉁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원수 된 요소를 바깥으로 끄집어내게 하는 주님의 사랑인 것을, 주님에 대한 축복인 것을, 이제는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감사하는 저희들 마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