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0714a슥13장06절(대리계약)-이 근호 목사
스가랴13장하겠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성경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을 중간에 집어넣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있다면 여기에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이야기, 이 사람도 자기 이야기 이렇게 이걸 허락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 있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 있는 질서체,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그 힘의 망, 이런 것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말씀의 질서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엮여져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말씀이 자체적으로 엮이고, 엮이고, 엮이고, 그리고 그것이 작동을 해서 거기서 힘이 생기고 그 힘 안에 인간들이 놓여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안 믿지요. 안 믿는데, 왜 이런 사실을 안 믿느냐 하면요, 인간들이 따로 만들어낸 질서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헌법이라는 거예요. 헌법 그리고 국가의 눈에 보이는 질서, 그게 엄연히 있기 때문에 이 질서가 만들어낸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을 선뜻 인정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뭐를 주목해야 되느냐, 이스라엘을 주목해야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왕이 없을 때 멀쩡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왕이 생김으로부터 이게 무너졌습니다. 그 왕이 뭐냐 하면 눈에 보이잖아요. 이스라엘은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 한도 밖에서 형성된 나라라고 보면 돼요. 인간의 한도 밖에서.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나라. 아주 특이한 나라입니다.
제사 드렸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거기에 현존한다.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 자연이 대자연 네추럴 대자연이 반응한다는 식이에요. 마치 사람이 날아가는 독수리나 새하고 대화하는 것처럼 그게 아주 이상한 일이잖아요. 정원에 있는 꽃 보고 한두 시간 동안 잡담하고 왔다. 이게 성립이 안 되잖아요. 안 되지요. 인간이 어떻게 자연과 사귈 수 있겠습니까.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됩니다. 인간 이스라엘이 사람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과 자연 사이에 그게 연결되는 질서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자연은 이스라엘이 필요할 때는 해도 멈춰야 되고, 우박도 내려야 되고, 그리고 요단강도 갈라져야 되고, 요단강 갈라질 때는 아주 특이한 게 보통 요단강은 물이 그렇게 많지를 않아요. 딱 이스라엘이 요단강에 당도했을 때 그 타이밍에 맞춰서 요단강은 물이 범람해야 돼요. 홍수가 나야 되고.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능력, 우리 인간의 능력 한도 내에서 요단강을 건너갈 것인가, 아니면 한도 밖에 있는 어떤 다른 힘에 체제가 있어서 그 힘의 체제에 의존해서 그 덕분으로 우리가 약속의 땅에 진격할 것인가,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시는 거예요. 이 땅에 와서 훌륭한 말들을 지혜들을 많이 설파한 사람들이 많지요. 많은 철학자들이나 성인군자들이 많지요.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한도 안에 있습니다. 영웅도 있고 많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버려요. 죽었는데 사흘만에 살아나버렸어요. 예수님이 죽고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인간세계에서는 간격이라는 것이 비로소 처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는 게 없으면 인간이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완결돼요. 살다 죽었다. 끝. 죽은 자에게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 없어요. 죽고 난 뒤에 너희 집에 와서 죽고 난 뒤에 뭐 해줄게. 예를들어서 “어머니, 잡채를 맛있게 하는데 어서 건강해져서 어머니가 병실에 누워있어서 오늘 내일 하니까 어머니, 어서 건강해가지고 저에게 맛있는 잡채 해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고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어머니의 이야기가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해서 잡채해줄게.” 이리 되어버리면 갑자기 간격이 생겨버린 거예요. 간격.
한쪽 세계가 없으면 간격이 성립이 안 되는데, 이쪽 세계 건너 저쪽 세계의 출현. 그리되어버리면 저쪽 세계는 인간의 능력의 한도 넘어서는 그 다른 힘이 작동해야 되고, 작용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이 바로 그런 겁니다. 열심히 따라 붙이면 구원된다는 그런 이야기는 그건 베드로가 실패한 거예요. 베드로의 실패, 그렇다면 베드로의 실패는 모든 인간의 실패지요. 가장 근접한 옆에서 삼일동안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배울 것 다 배웠고 놀라운 기적들을 다 체험했으니까. 그러나 그 놀라운 기적, 배웠던 그 말씀, 아무짝도 소용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언급을 했지만 제자들은 그 기적을 목격하고 들었던 그 말씀이 어디까지나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키우는데 보태겠다는 뭔가 간격을 전혀 생각 못하고 단절, 간격을 생각 못하고, ‘할 수 있는데로 열심히 하면 뭐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열심히 하면 서울대학도 들어갈 수 있지요. 그러나 서울대학이 천국은 아니거든요. 열심히 하면 교회 권사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자 목사도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천국이 아니잖아요. 왜? 간격을 증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단절된 간격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단절됨이 여기 있네.” 라고 나타내지 못한 행위는 그냥 노력이고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 예를 든다면 기도라는 거예요. 기도. 기존 교인들까지 이야기하게 되면 말씀이야기를 안해요. 주로 기도 이야기를 많이 이야기해요. 내가 기도원에 가서 2시간동안 기도했다. 기도 이야기를 많이 해요. 기도하는 것. 이걸 옳은 일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리되어버리면 ‘인간이 행한 것 중에서 옳다 하는 일이 나오게 된다.’ 이런 논리에요.
인간의 행한 것 중에서 옳은 게 나와버리면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이 아닌 셈이 되어버려요. 모친의 죄중에서 나를 잉태됐다고 다윗이 고백했는데 시편51편에. 그럼 다윗의 하는 것은 전부가 죄입니다. 전부가 상한 심령이에요. 그럼 다윗이 그 전에 기도를 안 했겠어요? 했겠지요. 그럼 다윗이 나는 모친의 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하지만, 제가 5년 전에 기도한 것은 그건 옳았습니다. 이게 성립이 됩니까? 성립이 안 되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어떤 권사님이 손 들고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까지 부정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왜 당신의 기도를 내가 부정하지 말아야 될 이유을 대세요. 이렇게 하면 “예, 저는 나쁜 짓 많이 했습니다. 나쁜 짓 많이 해도 하나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 나의 행동만큼은 이걸 죄라고 스스로 인정하기 싫습니다.” 이리 나온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하겠지만, 제가 하면 “당신이 데카르트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의심해도 나는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말은 내가 고로 내가 존재한다는 말은 의심할 수 없다. 이게 데카르트의 기본 논리의 시작이거든요. 당신이 데씨요? 데씨 가문입니까? 데카르트입니까? 딴 거는 의심하고, 딴 거는 의심하고, 3+5=8이라는 것은 이건 악마의 장난일 수 있지만,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있다. 이 자체는 내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존재한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그건 지금 데카르트 틀린 겁니다.
데카르트가 왜 틀렸느냐,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은 몇 년 뒤에 살다가 소멸되기 때문에. 존재라는 말은 소멸되지 않아야 존재하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눈만 뜨면 하나님 이야기해도 그건 그 이야기 가르쳐 준 사람 없으니 헛것이 돼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냥 현상입니다. 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전도서1장에 보면 살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고 이렇게 말씀의 질서체에서 권력체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사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그러면 살아 있을 때에 나는 누구냐,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죽었을 때에 우리가 하는 이 모든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말이에요. 이거 블루베리지요. 죽는데 이거 하나 먹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거 먹고 죽는데. 아침 식사들 했잖아요. 그게 나를 죽게하는 독약이라면, 쥐약덩어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아침 먹고나 죽어라. 이러면.
죽음이라는 확정된 진리 앞에서 아침 맛있게 먹었다, 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이 산다, 죽는다, 하는 것은 어디에 근거하느냐 하면 자기가 존재일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거기서 자기의 의미를 두는 거예요. 나는 살아야겠으니 죽으면 안 돼. 이건 자기가 존재한다고 존재하는 것이 옳은 생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현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를 살게 하실 분이 살게 해주시면 산다. 그런 뜻이거든요. 존재를 나로 최종 마감하지 마시고 존재를 나 말고 다른 분에게 존재를 넘기는 거예요. “주께서 내 딸을 12년 동안 귀신 들리게 했습니다.” 이런 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거. “주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되게 했습니다.” 이런 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의 이야기하는 믿음은. “주께서 내가 이 교회에 오게 하셨습니다.” 그런 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의 최종적인 존재성을 자기한테 두지 말고 예수 안으로 두는 거예요. 최종적인 존재성을 예수님한테 두면 예수 안에서 나의 지금 살아있다는 의미의 시작점이 예수님 안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안이 되는 겁니다. 그것부터 우리의 생각 자체가 수정되지 않으면 그걸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침을 맛있게 먹어야 되고, 점심을 맛있게 먹어야 되느냐 하면, 왜 먹어야 되느냐, 놀러갈 때는 놀러가야 되고, 수련회 핑계 대고 부산에 3박4일로 놀러가는 거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주께서 시켰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주께서 시켰기 때문에. 나는 일하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주께서 놀아라 하니까 할 수 없이 7박8일로 지중해에 오천만원주고 크루즈여행 해야지요. 할 수 없지요. 주께서 시켰는데 어떻게 해요. 주께서 시켰는데. 칠순잔치 안하려고 그렇게 뺏는데도 불구하고 생일축하합니다! 교인들이 케이크 사가지고 불러버렸는데 어이 합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는데. 뭐 나는 사진 찍혀야지요.
남편보고 돈 벌어오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나가서 돈 벌어주는 걸 어떻게 받아야지요. 이건 나를 살라고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는 현상을 내가 체험하는 거예요. 옛날에 KBS 프로에 보면 그게 있었어요. 조영남이 나와 가지고 일하고 난 뒤에 일당을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프로가 있었어요. <삶의 체험 현장> 삶의 체험 현장이에요. 주님의 일하심을 주께서 만드는 육신으로 체험하는 그 기간 그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래서 감상적이고, 정서적이고, 감정적이고, 정을 움직이는 걸 정돈이라 해요. 전부 다 이거 지우고요, 우리는 뭐냐 하면 기계가 돼요. 기계. 존재했느냐, 안 했느냐 따지지도 않을 정도로 차가운 기계. 이게 천사들이고, 그 천사들이 야곱의 머리위에 오르락 내리락 해서 그래서 하늘의 기계가 천사라면 땅의 기계가 이스라엘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었고요. 야곱이 만났던 야곱이 천사와 했던 천사의 이름이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거든요. 하나님의 군대로서 지상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단 규모, 사단보다 더 크지요.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싸움을 전문으로 하여서 이 땅에 나타난 현상. 하나님이 존재함을 지상에 현상으로서 증명해낼 그런 단체.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게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감정이나 감성이나 정서, 정동 여기에 휘둘리지 마세요. 휘둘리지 마세요. 친구하고 싸워가지고 찔찔찔 눈물 마구 흘리다가 갑자기 남편이 땅 던져놨는데 땅값 올라가지고 땅 팔아가지고 10억이 있다하면 갑자기 입이 확 벌어지지요. 울 때는 언제고 갑자기 돈 들어오니까 웃고 난리지요. 얼마나 인간은 감정적인지요. 정서적인지. 그 감정적이고 정서적이고 감상적인 거 이걸 주도하는 게 누구냐 하면 자아라는 겁니다. 자아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은 기분에 산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기분 따라 수시로 바뀌어요. 바람이 어디로 부는가, 수시로 바뀝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질서체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작동하는 것은 이스라엘이에요. 이 스가랴는 바로 이스라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이야기인데요. 스가랴 다음에 말라기 나오고 그 다음에 마태복음되지요. 신약 때. 신약이 되면 스가랴가 보여주는 이 말씀의 작용이 신약에 있는 제자들과 오늘날 성도들에게 그대로 똑같이 적용을 해요. 그래서 우리는 스가랴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스가랴13장의 이야기가 하나 하나 풀려면 굉장히 힘든 논리적 장벽들이 놓여있어요. 그 장벽들이 있는데 그 장벽들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힘들 때는 제가 미리 결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 개의 논리로 이야기할 수도 있고요, 두 개의 논리로 이야기할 수도 있고요, 하나의 논리로 축약할 수 있어요. 세 개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진실을 믿는 자에게 속이는 자가 등장하고요, 속이는 자를 속임으로서 진실이 등장합니다. 진실을 믿는 자가 먼저 선행되고⓵ 그걸 속이는 자가 등장하고요⓶ 스가랴13장에서는 이걸 거짓 선지자에요. 거짓 선지자를 속임으로서 진실이 등장하는 것. 이게 바로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⓷. 절차가 그리 됩니다.
13장 2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렇죠. 그 뒤에 거짓 선지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거짓 선지자가 하는 거짓말이 3절, 4절, 5절, 6절, 그리되어있어요.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여기 사람들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중심이니까. 이스라엘을 속이기 위해서 그 짓을 그렇게 합니다.
그럼 진실을 믿는 자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구원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진실을 믿는 자. 진실을 바라는 자를 누가 먼저 마중 나온다?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이 먼저 마중을 나온다. 그게 스가랴13장 이야기에요. 쉽지요. 별로 어렵지 않잖아요. 복잡해 보이지만.
진실을 믿는데 누가 마중나온다고요? 주님이 나오는 게 아니고 먼저 뭐를 깔아놓는다고요? 진실을 속이는 자들이 나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잖아요. 그럼 속이는 자들은 무엇을 흉내내겠어요? 메시아를 흉내내는 자가 등장하고, 이 메시아를 흉내내는 자를 흉내냄으로서 예수님 오시는 거예요. 세 번째가 어려운 거예요.
이미 메시아를 흉내내니까 나중에 알아요. “야, 사기꾼들이 있구나! 세상에 우리는 진실만 추구하는데 더럽게 사기꾼들이 웬 말이냐.” 하고 실망하겠지요. “앞으로 이런 짓을 하는 이 사기꾼은 우리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진실을 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단호하겠지요.
그 사기꾼의 모습으로 진짜가 온 거예요. 보이스피싱 같은 경우에 “여기는 금강원입니다. 은행 앞에 오천만원을 뺐어요. 또는 당신 딸이 보이스피싱 걸려가지고 액정이 나갔습니다. 액정 하나 얼마를 넣으세요.” 라고 할 때 이게 한 번 속고 난 뒤에는 액정 소리만 들어도 싫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오시느냐 하면 그 사기꾼을 똑같이 따라 하는 거예요. “액정 깨졌습니다. 돈 넣으세요.” “이 사기꾼아!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를 못 믿게 되는 거예요. 왜 못 믿느냐 처음부터 진실을 바라고 진실을 믿을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었던 겁니다. 진실은 모든 인간을 기피해서 나옵니다. 피해서 와버려요. 이게 세 단계 논리로 이야기한 것이고요.
두 단계 논리로 하면 이렇습니다. ‘선포하는 자가 선포되는 것.’ 갑자기 세 단계에서 두 단계로 축소하니까 굉장히 어려워졌지요. ‘선포하는 자가 선포된다.’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신약성경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오면 믿어라. 예수님께서 선포해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선지자가 되기 때문에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너희들에게는 마태복음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주여, 주여, 하는 자만 올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렇지 않으면 니가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마치 뭐 같으냐,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아서 마지막 때 무너진다. 그러니까 내가 전하는 말씀을 들어라. 이리되면 예수님은 뭐가 돼요? 선포하는 자가 되지요. 진리를 전하는 자가 되지요.
그런데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사도바울의 편지나 그 뒤에 사도의 편지에 보게 되면 사도행전에 보면 뭡니까? 예수님 자신이 선포의 내용의 주인공이에요.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선포하는 자가 아니라 선포하는 자체가 선포의 유일한 내용이에요. 여러 내용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가득 찰 때 그게 복음이 되는 거예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선포할 때는 말씀의 질서체, 이 세상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계를 주께서 전파를 합니다. 전파를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레미야의 한 사람,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마태복음16장에 그렇게 소감을 이야기하잖아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인자는 예레미야 같습니다. 선지자 한 사람이랑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뭘 모르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말씀 전하는 예수님 자신이 본인을 겨냥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몰랐어요.
그냥 제자들이 하나님이 계시고 자기 여기 있고, 모세가 준 율법이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율법 잘 지키라고 우리를 독려하시는 훌륭한 랍비 선생님인 줄 알았던 거예요. 제자들은 율법을 지키듯이 예수님 말씀을 지키면 구원될 줄 알았어요. 예수님 말씀은 더 과격해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얼마나 과격합니까. 빌려달라는 사람에게 그냥 줘버려라. 얼마나 과격해요. 참으로 과격하거든요.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너무나 과격해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계시고 여기 우리 인간 있고 율법 있으니까 율법을 지키겠다는 그 의도 자체를 문제 삼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하나님 존재하시고 나는 이 땅에 존재하고, 인간은 이미 죽은 자인데 자꾸 죽은 자 아니라고 여기는 거예요.
더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체제에서는요, 인간을 산 자로 보지 않고, 죽음 그 다음에 간격, 단절된 간격, 그 이후에 등장할 그 사람을 겨냥해서 주께서는 말씀을 전파한 거예요. 그러니 있지도 않은 인간들, 하지만 주께서 만들고자 하는 그 인간들 안에 무엇이 담겨야됨을 내다보면서 주께서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해가지고 멀쩡히 내가 살아있으니까 날 살리기 위해서 말씀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러한 잘못이 오늘날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구원받는다 하니까 사도행전에 나오고 성경에 나오니까 예, 그거 믿겠습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그게 죽으라는 이야기인데. 믿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말씀을 믿겠습니다. 하게 되면 믿는 나는 안 죽어야 돼요. 왜냐, 믿는 내가 죽어버리면 믿음도 같이 날아가기 때문에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 되는데 믿음 자체가 내 죽는 순간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믿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구원 받는 나도 없어진다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에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지요. 그건 인정 못하지요.
그저 뭐 눈 감길 때까지 어쨌든간에 믿고 또 열심히 믿고 간절히 믿고 그리고 그냥 믿는 것도 안 되고 미씁니다! 하고 시옷이 하나가 아니고 두 개, 세 개 믿씁니다. 믿씁니다. 세 개 붙이려하면 얼마나 더 세게 힘을 줘야 돼요. 그냥 무조건 믿씁니다. 믿씁니다. 그 믿씁니다를 “그냥 죽어버려. 인간아!” 이 뜻이다 이 말이지요. “왜 자꾸 믿어서 살려고 하느냐” 말이지요. 죽으라고 주께서 말씀 주셨는데. 그 말씀을 믿음으로 지켜서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13장1절에 보면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이리되어 있잖아요. 이게 스가랴13장1절 말씀이지요. 신약에 가면 스가랴13장1절 말씀, 이 말씀이 누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이게 들어오게 돼요. 그러면 이 말씀은 인간이 이해하는 13장1절과 예수님의 13장1절 사이에 사흘이라는 단절된 간격이 생겨버립니다.
13장1절 믿는 자는 주님의 13장1절을 못 믿게 되어 있어요. 왜? 주님이 생각한 13장1절은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주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 나오는 다윗의 족속도 존재하지 않는데, 주님에게만 존재하고, 예루살렘 주민도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왜? 예루살렘만이 유일한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래요. 죄라는 개념은 예수님만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더러움이라는 개념도 예수님만 알고 있어요. 씻는다는 개념도 예수님만 알고 있습니다. 샘? 특히 샘은 인간은 몰라요. 예수님만 알 수 있어요. 그걸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샘에 대해서 인간이 아는 샘에서 또 예수님만 아는 샘으로 어떻게 전환되느냐를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통해서 말씀의 질서체를 보여준 겁니다.
여러분, 요한복음4장에 그 여인이 부러워요? 부럽습니까? 남자 다섯명 사귀고 여섯 번째 사귀는 그 남자가 부러워요? 지금 그 사마리아 여인처럼 여러분 똑같이 성령 받은 사람은 똑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인간이 아는 말씀의 내용과 주님이 아시는 말씀의 완성된 내용이 어떤 간격과 단절을 가지고 있는지를 오늘날 성도를 통해서 증거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 여인은 샘에 물길러 왔잖아요. 그러나 그 샘이 그 샘이 아니에요. 왜냐, 그 샘은 목마를 수밖에 없는 샘이었어요. 요한복음7장 37~39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않지요. 그들 안에 샘이 없지요. 그들이 믿은 것이 샘이 아니고, 성령이 샘인 거예요.
성령은 현재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도 샘이 없어요. 어떤 누구도 스가랴13장1절 모릅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런데 그 예수님에게만 있는 샘은 그 예수님을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거짓 선지자로 규정해서 인간들에게서 나온 현실 속에서 사라지라고 떠밀었지요. 그게 예수님의 죽음이었잖아요.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이미 죽어 없는 존재에요. 그럼 남아있는 존재는 뭐냐, 인간 존재밖에 없지요. 그러니 인간 존재는 가짜가 되는 거예요.
진짜 존재는 가짜 존재가 떠밀어가지고 가버렸던 예수님의 세계 예수님의 진짜 존재라면 거기에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모든 존재는 진짜 존재를 떠미는 존재. 그러니 이건 가짜 존재지요. 가짜 존재가 스가랴13장1절을 달달 외운들 그게 무슨 샘이 되겠습니까. 여기에 샘은 뭐냐,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했다. 성령이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했다 이 말입니다. 성령이. 성령은 모든 말씀이 완성될 때 그 때 성령이 같이 오시는 거예요. 말씀이 다 이루었는데 거기에 대한 그걸 알아먹는 인식, 알아들을 수 있는 인식, 그건 성령께서 그러한 조건으로서 성령이 조건으로서 세팅되어서 이게 설정되어야 돼요.
TV 설치해도 TV선 연결 안 되면 TV 안 나오지요. 그렇잖아요. 특히 케이블TV와가지고 셋탑박스 조정해야 되지 않습니까. 세팅이 되어야 된다고요. 예수님이 아무리 말씀해도 인간은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다 알아들어요. ‘아~ 나라는 것은 말씀에 입각해서 어느 것 하나 지킨 게 하나도 없고, 오히려 못 지켰던 거구나!’ 이걸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께서 알려주는 겁니다.
제가 젊을 때 유행했던 노래 중에서 어떤 사람이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나는 참 바보같이 살았다. 하는 노래가 있어요. 김도향의 노래. 이 사람이 난 참 바보같이 살았다고 하는데요, 그 말이 젊을 때는 내가 몰랐지요. 지금 와보니까 그 사람 틀렸어요. 나는 바보같이 산 게 아니고 반대로 살았어요. 반대로. 삶이라는 게 없는데, 삶이 있다고 치고 제대로 살려고 노력한 거예요. 그 자체가 잘못이고 그러니까 여기에 거짓 선지자가 꼬이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가 어떻게 꼬이느냐 하면 거짓 선지자가 메시아 흉내 내면서 꼬이는 거예요. 참 재미있지요. 오늘 스가랴13장. 거짓 선지자가 메시아 흉내 내면서 메시아라고 오고 그게 거짓이고, 진짜 선지자는 사람들 앞에 거짓 선지자가 메시아 흉내 내는 것이 거짓 선지자라고 아는 그 거짓 선지자의 흉내를 누가 흉내 낸다? 메시아가 흉내 내는 겁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느냐, 단절 때문에. 인식의 단절. 존재에서 발생 되는 내가 뭘 알아야 주위 환경에 내가 적응해야 내가 살아있는 걸 더욱 더 확실하게 밥 먹고 산다. 이러한 자기 인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이 신뢰를 주께서는 그걸 관통해 버리고 그냥 쓱~ 요새 쓱이 왜 자주 나오는지 몰라. 쓱 지나가는 거예요. 그냥 쓱 지나가는 거예요. 그걸 횡단이라 해요. 횡단.
어려운 말로 횡단. 횡단이라 하는 것은 앞뒤 가리지 않고 개무시하고 그냥 통과하는 걸, 나는 내 갈길 간다. 그걸 횡단이라 합니다. 횡단하는 인생. 오~ 그거 길이 아닌데! 논밭 가운데 횡단하여 건너가는 거예요. 사각형에 길이 사각형에 요리 조리 가야 되는데 가운데 중간으로 가는 거예요. 완전히 √2 라. 이걸 이근호라 하는 거예요. 아이구~ 개그했다. 괜히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겸손해요. 희생적이에요.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5절에 나옵니다.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이것은 아모스7장14절을 자세히 봅시다.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겸손한 메시아 흉내를 내는지요.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이리 되어있지요. 자기를 뭐로 봅니까? 농부로 보지요. 아모스가 대단한 선지자입니다.
마지막 때에 절단나는 처참한 암담한 어두움의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여러분에게 보냈다.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에요. 아모스가 초반기 선지자에요. 이사야 이후에. 이사야, 예레미야 이후에 초반기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초반의 그 선지자가 “나는 선지자 아니야. 나는 그냥 농부에 불과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것을 해서 대히트치니까 거짓 선지자가 그걸 그대로 흉내 내는 거예요.
그것만 흉내 내는 게 아닙니다. 6절 봅시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이게 뭐냐 하면 바로 그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이 자기가 이 세상에 가장 버림받은 자. 낮은 자. 상처받은 자로 자처하면서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한 거예요. 이건 쿠바의 건국 정신을 일으켰던 유명한 사회운동가 체 게바라 그 사람이 얼마나 비천하게 살았습니까. 도대체 종교인이지 사회운동가인지 구분 안 될 정도로 비천했어요. 쿠바의 카스트로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모택동도 마찬가지에요. 중국의 사람들에게, 대중들을 현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누추하고 가장 천박하고 천한 자리에서 활동을 함으로서 갇힌 자, 억눌린 자들로부터 어떤 환상을 유도해 내는 그걸 전략으로 삼았던 거예요.
부흥사도 그렇잖아요. 부흥사도 성경책 두꺼운 거 끼고 교인들이 적어도 목사 같으면 기도 많이 하고, 교회는 기도밖에 할 줄 몰라요. 기도 많이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 카리스마적인 영적 존재일 것이다. 이걸 사람들이 각인되어있으니까 거짓 선지자들이 그걸 그대로 원하는 컨셉에 맞춰주는 거예요. 일단은 기도를 많이 했으니까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을 흉내를 내야 되니까 목이 쉬어야 되고, 모든 단어가 신령한 단어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를 낮추는 겁니다. 그 세 가지 요소를 한 세트로 뭉치면 이렇습니다. 할렐루야! 부족합니다. 이거요.
할렐루야! 목 쉬었거든요. 기도 많이 해서. 할렐루야 용어 자체가 영적인 용어 아닙니까. 할렐루야! 부족합니다. 부족한 종이. 오늘 이 자리에 주의 부르심을 받고 여기 왔습니다. 그 다음 말 생각 안 날 때는 한 텀을 쉬어가요. 텀을 쉬어 갈 때는 접속사가 뭐냐, 그러므로. 그 다음에 생각 안 나잖아요. 그 때 또 상대에게 마이크를 넘겨요. 믿습니까? 가사 기억 못하는 가수들이 하는 방법이 이거에요. 다 같이 합시다. 하는 것처럼. 믿습니까? 할렐루야!
그 다음 또 생각 안나잖아요. 저쪽에 할렐루야 했으면 이쪽에 하고. 지금 뭐하노. 다 잊어버리거든요. 그러면 저쪽에서 당회장 목사가 눈치 막 주는 게, 반응을 보여야 우리 교회에 믿음 있다고 합니다. 믿습니까? 하면 아멘! 이건 뭐냐 하면 생중계할 때 박수치라고 문자로 나와요. 사전에 관람객에게 박수! 박수라고 팔로우 단어가 뜨면 박수를 쳐야 돼요. 그래야 쇼 분위기가 난다고요.
그래가지고 부흥사는 이 사람들 은혜를 줘야 되는데 아직까지 맹숭 맹숭하잖아요. 그러면 이건 설교하다가, 설교하는 것도 귀찮고, 아는 것도 없고 해가지고 그 다음에는 강제로 통성기도를 시켜요. 할 때 소리가 약하면 더 세게 하라고 합니다. 나중에 그 기도회가 끝나면 전부 다 목이 컬컬하게 쉬어있어요. 그러면 그게 은혜받고 성령 받고 한 뜻이고, 기도를 할 때 그냥 기도하면 안 되고, 막 자기 육신을 치라고 해요. 그러면 뜨겁잖아요. 뜨거우니까 성령의 불 받은 거예요.
성령의 불 받았다. 그 다음 마지막 하이라이트 준비가 남아있어요. 성령의 불 받았잖아요. 불 받았으면 값을 내야지. 결국 노리는 것은 돈입니다. 처음부터 교인들이 기도 이야기만 했거든요. 고 라인에 구멍에 맞춰 들어가는 거예요. 기도? 그럼 기도 좋지. 여러분보다 더 뛰어난 기도 기도원에 맨날 기도합니다. 이래 해가지고 목 다 쉰 거 보세요. 목 쉰 사람 툭 때리면 갑자기 왜 때리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확 달라지지요.
기도? 이거 넋두리입니다. 넋두리하고 기도하고 내용의 차이 없어요. 아이고~ 우이하노. 아이고~ 우이하노. 교회에서 하면 기도고, 집에서 하면 넋두리가 되고요. 도대체 얼마나 속아야 됩니까?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속아 넘어가야 돼요?
그게 바로 뭐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자기 구원을 기다리고, 복 받기를 기다리고, 성령 받기를 기다린 거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게 바로 죄였어요. 존재의 자체가 현상으로 날아가면 되는데 괜찮은 존재로 업그레이드 하려고 하니까 나에 대한 거. 나에 대한 관심사를 가지고 그런 집회에 참석하고 그런 사람을 기다리니까 내가 곧 최고의 시험이에요. 내가. 나의 존재가. 최고의 유혹은 나였다.
끝까지 못 놓는 그것이 내가 넘어설 수 없는 최고의 시험거리입니다. 자기를 넘어서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아예 우리한테는 기대를 걸지를 않아요. 주께서 치워라 그만! 어디서 흉내 내고 있어. 안 해도 돼! 하던 안 하던 니 맘대로 해. 그러나 주께서 하는 것은 진리는 뭐냐, 네가 죽는다는 것.
아까 세 번째 했지요. 두 번째는 선포 하는 자 선포되는 것. 그래서 단절이 일어나지요. 첫 번째는 뭐냐, 첫 번째는 이거에요. 주님의 대리계약. 니가 뭐를 하던지 목이 쉬던지 나는 모르겠는데 이거 하나로 끝내자. 내가 니 대신 계약해 줄게. 대리계약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20714b슥13장06절(대리계약)-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스가랴13장에서 이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는 것은 외부의 사정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요. 끄집어내고 이 바깥의 상황과 주님과 만남을 일으킨다. 만남을 일으킨다. 또는 충돌시킨다. 이렇게 되지요. 인간의 내부의 사정을 인간은 몰라요. 그런데 여기 거짓 선지자들이 와가지고 내부의 사정이 바깥으로 등장하게 되면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걸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그걸 현실이라고 합니다. 현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내부에 잡고 있는 내부의 욕망에 흐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욕망의 흐름. 이건 아마 수련회 때 더 상세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내부에 욕망이 흐르게 되게 되면 상대방의 몸은 상대방 것이 아니고 내 몸은 내 것도 아니고 같이 흐르고 있는 욕망의 것이 되는 겁니다.
욕망이 죽이 맞을 때는 니 몸, 내 몸 없이, 니것 내것 없이 하나로서 뭉치게 되어 있어요. 친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됩니다. 욕망이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리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욕망의 흐름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욕망의 흐름에 이의를 제기한다.
욕망의 흐름은 인간이 조절하거나 관리 대상이 아니지요. 인간이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욕망은. 내 몸은 관리가 돼도 욕망은 내 몸보다 더 우선되기 때문에 조절 대상이 안 돼요. 그러니까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니까 욕망이 어떻게 돼요? 이의 제기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가만두지 않고 밀치겠지요. 공격하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로마서9장에서는 이걸 뭐냐, 예수님 자신을 걸림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걸림돌.
예수님은 우리를 걸림돌에 넘어지게 하는 이유가 우리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작동하고 있는 욕망을 자극하는 식으로 말씀을 해요. 욕망을 자극하는 식으로요. 우리의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욕망이 요청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뭐냐 하면 나의 욕망은 다 남에서 배운 것이다. 그래서 이걸 어려운 말로 타인의 욕망이 곧 나의 욕망이 되었다. 태어나서는 아빠, 엄마의 요구 사항이 나의 희망 사항이 되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 인생이라는 것은 일체 없고 주위에 가까운 나한테 은택을 주었고 나를 위하여 희생했고, 나에게 혜택을 입은 자들의 요구 사항에 부흥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되지요. 그들의 기대에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그러니까 이 모든 인간세계는 한통속이지요. 안에 자체적으로 폐쇄적으로 돌고 도는 그 욕망의 구조 안에서 그 소용돌이 구조 안에서 너무 빨리 도는 그 욕망에서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예를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늘 마주치고 늘 여러분들이 경험했었어요.
그 중에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의 예니까요. 지금 제가 말을 끄집어냈지만 해결책도 있어야 되지요. 해결책도 없이 그냥 문제만 끄집어내면 안 되거든요. 그 솔로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나이 서른 넘어서 여자 한 대여섯명 나오고 남자 대여섯명 나왔는데 그 나오는 사람들이 여성들이나 남성들이 전부 다 짱짱한 직업을 가지고 온 거예요. 변호사, 의사 짱짱한 직업을 가지고 있고 사업도 멋있는 IT 사업을 한다든지 그래가지고 밥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다만 결혼이 벌써 남자는 거의 40가까이 여자는 30대 중반이 나와가지고 기회를 맺어주는 좋은 관계 맺으라고 선보는 그런 프로그램이에요.
여러분은 바빠서 한 번도 못 봤겠지만, 그런 프로그램인데 거기에 각자 자기를 소개하는 거예요. 나는 이런 남자 같으면 좋겠다. 이런 여자 같으면 좋겠다. 그 전에 나는 이런 여자인데 이런 남자인데 내가 요구하는 배우자형은 이렇습니다. 이야기하는 가운데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제가 개를 네 마리 키우는 사람인데 이 개는 내 자식과 같아서 나는 이 개가 죽는다면 같이 죽을 용의가 되어 있으니까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해주는 남자면 좋겠습니다. 한 마리도 아니고 네 마리.
이게 뭐냐 하면 그 사람의 주관이라는 거예요. 욕망으로 다져진 주관. 주관은 외부의 타인의 욕망에서 그걸 견디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주관이라는 자아 영역을 따로 만드는데 만드는 방식 중에 하나가 개 네 마리 키우는 것으로 요거는 자기만의 아지트를 만든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나이가 한35살쯤 됐는데 자기가 결혼을 하는데 신랑을 어떤 신랑감이냐 하면 내가 이렇게 구축해놓은 지금까지 구축해놓은 주관, 개 네 마리를 만들어 놓은 내 자아관에 협조가 될 거 같으면 사귈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자, 저는 뭐 이걸 정신병이라고 간주하고 싶어요. 자신의 빈자리에 타인의 욕망, 타인의 욕망은 항상 내 욕망보다 크잖아요. 내 욕망보다 커요. 크니까 항상 인간의 자아의 욕망 자리가 자아의 욕망이 이만큼이라면 타인의 욕망은 요만큼. 빈자리에요. 이 빈자리에 개 네 마리가 들어온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개 네 마리가 안 들어오게 되면 남들의 요구사항에 내가 견딜 수가 없어요. 이것 하라, 저것 하라. 이 정도 되어야지. 이렇게 살아야지. 자꾸 요구를 하니까 나이 서른 넘었는데 뭐하노. 남자하고 빨리 결혼해야지. 주위에 이것이 너무나 자기가 프레스 압력이 되고 스트레스 되니까 완충용으로 개 네 마리 키운 거예요. 왜? 개는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말을 안 하거든요.
제가 얼마 전에 주일 낮에 설교했지요. 어느 날 내가 키우던 개가 갑자기 나한테 잘해주겠다고, 예를 들면 앞치마 두르고 막 요리하고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답은 죽여버려야지요. 왜냐하면 주관 속에서는 나만이 왕이에요. 내가 신이에요. 이건 타고 난 거예요. 그런데 외부는 뭐냐 하면 외부의 욕망은 나를 그 외부 욕망에 무릎 끓게 하니까 나는 신이고 싶은데 다른 사람의 욕망은 나를 강제로 무릎 끓게 하니까 내가 견딜 수 없잖아요. 그러면 내 자체만으로 내가 황제요, 신으로 왕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그거 아니면 숨이 막혀서 못 살 것 같아. 그거 아니면. 그래서 내 개 네 마리 키웠다 말이죠.
그러면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는 뜻은 뭡니까? 나는 역시 여왕이고 너는 내 개나 키워라. 해결책은 이겁니다. 이게 어디서 왔는가, 과거에서 누적된 겁니다. 해결책은 뭐냐 하면 새로운 낯선 요구가 오는데 낯선 요구는 이걸 하라가 아니라 이미 내가 간격 넘어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내가 이룰 수 없는 그 수준, 그 레벨, 그 완성됨을 우리에게 드리 밀면서 너의 주관은 있으나 마나한 것으로 죽여버리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어제부로 나는 죽고 오늘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거 아니면 다른 해결책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개 네 마리 키우는 여자가 만약에 그날 부로 성령 받아서 죽었다면 그 여자가 개 네 마리 키우는데 같이 나와 돌볼 사람 찾는 게 아니고, “저를 이뻐해 준다면 그걸로 저는 족합니다.” 이러겠지요. 갑자기 뭐가 없어졌지요? 내가 남한테 요구사항이 하나도 없어졌잖아요. 내가 나름대로의 요구사항, 내 주관이 없는 거예요.
전에는 주관이 뚜렷하고 남의 자리가 비어있었는데 이제는 뭐냐, 나의 자리가 비어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이야기가 나한테 걸림돌이 되지를 않습니다. 왜? 주관이 없으니까. 주관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주관 자체가 없으니까. 그렇게 주관 없이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사도들은 인간의 땅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니고 주의 나라를 돌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사도행전이. 사도행전은 어떻게 뭘 성과를 내볼까 이런 사람이 아니고 이미 완성된 땅을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 완성된 땅에 이단도 있고, 마귀도 있고, 온갖 것 다 있지요. 마치 공중부양, 허경영처럼. 공중부양. 허경영이 그 정도 날 것 같으면 말도 안한다. 공중부양하듯이 그 고생들을 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 일행들이.
그러면서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같은 말인데 이 지상에는 제발 나를 넣어주지 마세요. 이런 뜻이에요. 이 지상의 사람으로 나를 넣어주지 마세요. 나는 지상에서는 내 흔적은 없습니다. 이런 뜻인 거예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리고 땅에서는 죽었다. 골로새서 3장4절, 나는 땅에서는 죽었다. 지상에서 나를 찾지 마세요. 결혼? 재산? 죽을 건데 왜 결혼하고, 죽을 건데 재산을 왜 모읍니까.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 돈 있는 자는 하나도 내 거 아니라고 여기라. 왜? 세상은 곧 끝장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7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리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것을 토속적으로 하면 사도바울은 하늘의 기운을 받고 있습니다. 성령이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공포, 괴로움, 슬픔, 이건 어디서 흘러나오는가, 땅의 기운에서 나온 겁니다. 땅이라는 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저주받은 것들은 거기다 다 집어넣은 쓰레기장이지요. 말이 좋아서 죄의 활용 장이지 죄 활용 장 아니에요. 쓰레기장이에요. 저주받은 것.
창세기 3장에 땅으로 쫓겨난 순간 저주 속으로 들어온 거예요. 악마도 들어온 거예요. 인간도 거기에 한통속 되어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힘들게 살다 그냥 죽는 거예요. 이게 저주입니다. 저주의 땅, 땅이거든요. 땅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토지의 몸이라 할 수 있어요. 몸. 이거 중요한 건데. 몸. 땅이 몸이라는 거예요. 이 말을 왜 쓰느냐 하면 몸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쓰잖아요.
그런데 토지를 몸으로 보는 이유가 인간의 몸도 토지의 일부다. 이 말입니다. 같이 저주받은 점에서 토지나 인간의 몸이나 똑같고요, 결국 인간이 죽으면 토지로 돌아가지요. 흙으로 돌아가지요. 왜냐,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기 때문에 그래요. 흙으로 와서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마치 도자기 같아요.
<고스트>라는 영화에 사랑과 영혼에 데미 무어가 앉아있는데 뒤에서 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어요. 그 유명한 장면이 나온 노래가 언체인 멜로디지요. 엘비스 프레슬리가 불렀던 엘비스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마지막 대사가 그겁니다. 마지막 대사 한 번 적어볼게요. 2시간 반이 넘어요. 2시간 40분동안 하는데. 엘비스는 여기에 없다. 이게 마지막 대사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여기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에 있지. 엘비스 프레슬리는 여기에 없는 거예요. 엘비스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에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라는 그 장르의 시장에서 록큰롤로 완성 시킨 그 엘비스 프레슬리의 일대기를 이야기하면서 그는 매니저한테 평생을 매여 살아갔던 그 불행사 이야기가 죽 있습니다. 그 모습이 오늘 여기에 나오는 바로 거짓 선지자가 하는 모습과 동일하지요.
여기 6절에 한 번 봅시다. 6절 보기 전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굉장히 자기를 비천하게 모택동처럼 비천하고 가난한 자의 친구고, 어렵고, 낮은 모습으로 보임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신비로운 환상을 자아내게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신이 아니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특별한 삶을 거짓 선지자가 조작해 내고 있다는 겁니다. 밥퍼준다든지 이런 거 있잖아요. 밥퍼사랑 목사. 천주교 같으면 문둥병 발을 씻겨주고 그 물을 마신다든지 이런 거. 어떻게 하든간에 인간이 이건 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캐치해서 그걸 그대로 실현해 보임으로서 타인들을 속여나가는 그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의 특징입니다.
4절에 봅시다.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털옷을 입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엘리야가 입었고요, 신약에 또 누가 입었습니까. 세례요한이 입었지요. 털옷을 입은 엘리야가 최고의 기적을 많이 일으켰어요. 엘리야를 기다렸어요. 사람들이. 또 말라기 선지자가 또 누굴 언급하느냐, 자기의 초창기 선배인 엘리야를 언급했거든요. 말라기 마지막에 보면 마지막 때에 누가 오면 메시아 온다? 엘리야 오면 곧 메시아가 오는 그게 징조로 보아라, 하니까 사람들은 엘리야를 기다린 거예요. 엘리야를.
그런데 엘리야를 기다리니까 거짓 선지자가 왔다! 장보리. 왔다! 이때다. 장보리가 왜 나오나. 왔다. 이 때라 해가지고 털옷을 입고 예언을 하는 거예요. 덥지도 않은가 여름에. 그 미친 짓 왜 합니까? 사람들을 속이려면 무슨 짓을 못해요. 사람들을 속이려면. 아까 한 것처럼 부~족~합니다! 부족하면 부족합니다. 하면 될 텐데. 부족합니다. 기도를 많이했거든. 목이 쉬었어.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속이려고 하는 거예요. 왜? 왜 속이려고 하느냐 하는 겁니다.
속이려고 하는 것은요, 자기 주관을 자기 힘으로 스스로 벗길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속이는 거예요. 자기는 부인은 하지 않고 자기를 많이 부정하면 마음을 낮췄다는 티는 내고 싶고 다른 방법은 그건 뭐 낮추고 낮추고 마음 낮추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지요. 진실. 우리 가운데 다 돈만 좋아하고 다 세상 권력만 좋아하는데 저 사람을 보라. 저 사람은 돈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진실을 외친다. 진실. 이 진실의 효과가 대단합니다.
진실을 외치고,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의 레벨, 진실을 아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어떤 컨셉있잖아요. 컨셉을 그대로 따라해버리면 그 사람은 진실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고요, 그 사람의 힘은 진실처럼 작용합니다. 진실의 효과가 뭐냐, 진실 앞에 인간은 다 부끄러워하거든요. 그걸 노리는 거예요. 부끄럽게 한다면 그 사람은 그 가짜는 그 인간을 마음대로 갖고 놀 수가 있어요. 랍비여, 랍비여, 해가면서. 갖다 다 바칠 수가 있는 겁니다. 돈이고 뭐고 다 갖다 바치지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부산강의 때 아베 총 쏜 사람이 왜 죽였느냐, 아베를 왜 죽였지요? 자기 엄마가 돈 안 갖다 바쳤으면 돈 안 바쳤으면 아베를 죽일 이유가 없지요. 인간은 돈이 지 자존심이에요. 자기의 주관이에요. 돈이. 그런데 자기 주관이 남한테 아베한테 살해당했잖아요. 엄마돈이 지 돈인데 엄마가 돈 갖다 줘가지고 지 집안 망하게 되었으니까 이제 엄마까지 간수하게 되었으니까 자기 인생이 힘들다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집안을 누가 죽였습니까? 아베가 죽였으니까 이제 거기에 대한 나의 가치는 아베를 죽임으로서 나의 가치는 살인하면서 나의 가치는 내 주관의 의미는 드디어 다시 유지할 수가 있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내가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치사하게 가난하게 사기 당해서 자존심 상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범죄자가 될지언정 나 건드리면 봐! 나 건드리면 이런 꼴 나는 거야. 하는 그것이 자기를 어떻게 한다? 부끄럽지 않게 하는 거예요. 자기의 자존감을 높이고 자기의 의를 살리는 것은 부끄럽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스스로 자기 주관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 선지자들은 그렇게 되버리면 남들을 못 꼬시잖아요. 그래서 남들이 되고 싶어 하는 하지만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 레벨까지 경지까지 자기가 먼저 가서 낮춰버리면 진실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돈만 챙기고 세상 세속만 챙기는 그것이 부끄러워가지고 자진해서 어매 기죽어! 하고 다 숙이겠지요. 그걸 노리는 겁니다. 이게 털옷의 유혹이에요. 털옷 한 방에 쓱 다 넘어가는 겁니다.
뿐만 아니고 6절에 보면요, 거짓 선지자들이,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이 상처라는 거. 이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이건 열왕기상18장28절에 보게 되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잖아요. 구경꾼들. ‘아이구, 저 양반 얼마나 대단한 선지자일까’ 자기가 신과 직접 통하는 그런 대단한 선지자라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학대해요. 상처를 낸다고요.
상처를 냄으로서 일반인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한 다른 경지의 어떤 하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을 티를 내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가. 거짓 선지자들이 자꾸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은 욕망이 지 맘대로 안 돼요. 이 욕망이 신의 차원을 닿기를 원해요. 이게 마치 뭐냐 하면 숙제 같은 거예요. 나도 초월의 맛을 보고 싶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샤인>이라는 영화에 보면 이거 치고 난 뒤에 사람 완전히 요양병원에 갑니다. 너무 힘들어가지고. 이거 쳐가지고 주인공이 쓰러져버려요. 그 정도로 이건 사람 죽이는 곡이거든요.
그런데 임윤찬이라는 18살 먹은 애가 이거 치고 난 뒤에 손수건 하나만 있었어요. 땀 좀 닦고 또 쳤어요. 1시간6분동안 쳤어요. 이걸 전부 다. 그것보다 더 잘. 초절, 초월을 의미하는 겁니다. 초월을. 자꾸 높이뛰기의 반을 자꾸 높이는 거예요. 왜 높이느냐, 사람들은 그걸 신의 능력으로 구경하고 싶은 거예요. 대리만족하고 싶은 겁니다. 내가 신이 주는 초월적인 맛이 없으면 사람은 너무나 식상해서 못 살아요. 사는 자체가 매일 똑같은 삶의 자체가 식상해서 못 살아요. 맛이 없어서 못 산고요. 맛이 없어서. 재미없어서 못 살아요.
나로 하여금 신선하게 끓어오를 수 있는 그 어떤 맛. 골프치다가 홀인원하는 그 맛있잖아요. 그런 맛. 새로운 거 없나. 그걸 원할 때 그만 손흥민 한 골 넣어라. 그럼 손흥민 한 골 넣으면 육만명 모이잖아요. 토터너하고 우리나라의 프로축구 대표단하고 해가지고 6:3으로 이겼잖아요. 손흥민에게 빠지는 거예요. 유현진이는 손목 아파서 끝났고. 왜 거기에 빠집니까? 내가 인생이 재미없어서 못 살아요. 재미없어서.
이거 뭐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고 이거 뭐야? 뭔가 확 풀 수 있는 그런 거. 검사하다가 노래자랑 나오고 그런 거 있잖아요. 왜 나왔습니까? 인생의 맛을 느끼려고 나왔습니다. 트로트 노래 부르고 이런 거요. 전혀 자기 직업과 상관없는 그런 직업을 해가지고 삶의 활력소를 부여하는데. 그걸 하려면 계속 기준을 높여야 되지요. 끊임없이 기준을 높여야 돼요. 임윤찬 얘는 이젠 죽었어. 내년도에는 더 잘 쳐야 돼요. 이젠 조성진이 잘하느냐, 이런 식으로 내기하고 있다고요.
그만큼 악마가 설정해 놓은 신의 경지라는 게 사람들은 안 속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복음은 대리계약이에요. 우리 자신이 계약 안 했습니다.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천국의 일이 언제 인간의 일이 되었습니까. 지옥 가는 일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아무 상관 없어요. 주께서 우리 허락도 없이 대리계약 해놓고 그 다음에 대리계약 했잖아요. 그러니 모든 권한은 누구한테 넘어왔습니까? 예수님에게 다 넘어온 거예요.
자, 이제 내 세계, 천국에 올 거냐, 말 것이냐는 것은 주님의 자기의 마음이에요. 주 예수의 마음이 도달된 사람은 “내가 너를 찜했어. 가자.” 이러면 천국이고. 안 찾아오면 지옥이지요. 그 찾아올 때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거예요. 십자가 앞장세우는 거. 십자가 앞에서 니가 앞으로 어떤 초월적인 피아노를 잘 쳐도 니 아무 상관 없어. 구원하고 아무 관계 없어. 천국은 니 하고 관계없어. 나하고 관계있어. 그 소식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게 받아들여지면 그 사람은 합격이에요. 이미 대리계약에서 합격이 된 겁니다. 이런 털옷 입고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이런 짓, 자기 몸에 상처 내는 이런 짓은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할 필요가 없어요. 왜 이런 부질없는 짓을 해요.
13장 1절 봅시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분명 1절 했지요. 그 다음에 거짓 선지자 나왔지요. 7절에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자, 진짜 목자는 사람들에게 거짓 선지자로 대우받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일이 먼저 벌어져야 돼요.
13장1절에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있으리라, 할 때는 아주 점잖게 좋게, 좋게 뭔가 일이 이루어질 것 같지요. 그것은 그 인간은 그런 구원받을 권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애초에 인간하고 계약할 마음이 없고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그걸 쇼킹한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그 사건이 하나님이 목자를 치는 겁니다.
하나님이 목자를 치니까 양이 흩어진다는 이 대목, 여러분들은 이 대목에 대해서 신약성경에서 많이 보신 적 있지요. 언제쯤입니까. 열 두 제자가 모여있을 때 겟세마네 기도할 때요, 겟세마네 기도하고 난 뒤에 그 때 끝나니까 밤이 되었지요. 밤이 되니까 거기에 가룟유다가 누구를 모셔왔잖아요. 자기 군병들을 데리고 왔잖아요. 마태복음26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데리고 올 때에 그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니까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럴 때 이게 뭡니까. 선지자의 글을 이루려함이라. 스가랴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아까 강의한 거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의 질서체가 그 말씀의 질서체가 인간들은 말씀의 질서체가 눈에 안 보이고 너, 나로 보거든요. 내가 저 예수님을 믿으면 되잖아. 이게 아니라니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의 질서체가 있기 때문에 그걸 관통할 수가 없어요.
그 말씀의 질서체는 누구 쪽에서 완성하느냐, 예수님 쪽에서 완성해가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완성된 보이지 않는 질서체를 끌고 스가랴의 말씀대로 너한테 적용이 되었다. 라고 해서 우리를 데려가는 식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스가랴 말씀도 하나님이 우리의 대리계약의 내용이거든요. 말씀을 지켜서 구원 받는 사람이 없게 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구원은 받았는데 자기가 지켜서 구원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말씀 지켰다 하는 사람들은 계속 탈락되는 거예요. 원칙은 말씀은 못 지키는데 구원 되는 게 원칙인데 자꾸 이 말씀 지켰습니다. 저 말씀 지켰습니다. 말씀은 잘 모르는데 기도는 열심히 합니다. 이런 희한한 소리를 다하고 있는 거예요. 철야했습니다. 이런 거요. 철야기도해서 우리 애가 좋은 대학 들어갔습니다.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말씀을 이루는데 어떤 말씀을 이루느냐, 목자를 치니 양들이 전부 다 지 갈 길로 흩어지는 말씀이 성도에게 이루어져야 돼요. 저는 비겁한 자였습니다. 그런 고백이 이미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그런 고백이 거침없이 나오지요. 그걸 짜증내면서 하지 말고 즐겁게. 뭐든지 즐겁게 춤을 추다가 뭐든지 즐겁게 해야 돼요. 즐겁게. 회개도 즐겁게 해야 돼요. 즐겁게 당연한 것처럼.
그리고 못지키는 것이 그건 의당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그것처럼이 아니고 그게 사실이고요. 목자를 치니 내 짝이 흩어졌다. 그러면 목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목자 없어야 돼요. 어디 우리같은 인간에게 무슨 목자가 필요합니까? 개 네 마리 키우겠다는데 무슨 목자가 필요해요. 그 사람 왜 목자가 필요해요. 개 네 마리 내 개 네 마리인데. 목자가 와서 내 개나 키우라는데 그게 무슨 목자를 찾습니까? 내가 니 개를 죽여버리겠다. 하면 내가 니를 죽여버리겠다. 이리 나올건데.
인간은 자기 주관이 있는데 주관을 자기가 버릴 수가 없어요. 악마의 세계에서 그나마도 버티는 것이 지 주관이고, 개 네 마리입니다. 이 소리 듣고 또 개키우는 사람 또 뭐라고 하겠다. 정말 구원 받았으면 썬 루프 있는 차 있지요. 그것도 정지할 때 말고 달릴 때 목 빼고 내다볼 때 속이 얼마나 시원합니까. 옥상 있는 지붕 말고 옥상 없는 지붕이지만 수리하려고 조그만 칸막이 있지요. 그 지붕에 올라가 보세요. 훤한게 주위 다 보이지요. 그게 구원받은 상태에요. 고개를 내밀고 전체를 다 보는 거예요. 세상 끝장난 이후까지 다 보는 거예요. 왜? 그게 말씀의 세계거든요. 말씀의 세계입니다.
그 위를 보게 해요. 예수님만 알았던 그 세계. 다른 사람은 못 봤던 그 세계를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예수님 뭘 하셨나, 하고 같이 볼 수 있는 안목을 주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1절에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그 다음 어떻게 됩니까? 끝까지 사랑하지요. 한 사람은 예외입니다. 한 사람은 예외라고 되어있어요. 끝까지 사랑하지요.
사도요한이 성령 받고 이 말을 할 때는 사도요한이 뭘 믿느냐 하면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요 말씀. 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자기 안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면 끝까지 자기 사람 사랑한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끝에 이리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사랑한다 해도 내가 그걸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러고 있다 말이죠. 이건 이미 자기 주관을 뚫지를 못했어요.
그 주관이라는 지붕에 갇혀있는 거예요. 자기 주관 지붕에 갇혀있는 거예요. 그걸 뚫고 나오면 뚫고 나왔으니까 아래쪽은 뭐냐, 내 주관의 세계, 위쪽은 주님의 약속의 세계, 약속의 세계에서 내 주관의 세계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시건머리 없는 소리인걸 이렇게 즐겁게, 즐~겁게 내 식언없는 것을 바라보면 되거든요. 아이구~ 한심스럽기도. 내가 저렇게 살아왔구나! 그냥 즐겁고도 한심스럽고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자기 자신을 그렇게 감상하세요. 천하에 더러운 것. 하면서 기분이 좋아가지고 어쩔 줄 모르는 좋아가지고. 자신의 살아온 과거를 한꺼번에 압축해서 되돌아보는 식으로 살아가면 된다 말이지요.
6절부터 봅시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참, 이 말씀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사실은. 왜? 제가 어렵기 때문에 아까 3, 2, 1을 설명한 거예요. 이 상처는 거짓 선지자들이 조작하려고 자기가 진짜 아세라 바알 선지자처럼 칼로 자기를 찔러가면서 “느그 이거 못하지? 나 신의 능력으로 하잖아.” 또 폼내는 거예요. 자기를 위장하기 위해서 한 상처거든요. 상처인데.
실제로 이 상처가 요한복음 20장 25절에 보게 되면,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래서 27절에 보세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거짓 선지자의 상처는 누가 냈습니까? 본인이 자해하듯이 냈지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처럼.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상처는 누가 낸 거예요? 불신자들이 낸 거예요. 그리고 도마가 먼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창자국, 못자국을 보지 않고서는 안 믿겠다. 누가 먼저 이야기해요? 도마가 먼저 이야기하니까 도마가 그 잘못된 것을 주께서는 그대로 따라 합니다.
이 말은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원칙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즐겁게 파악해야 될 이유가 그곳에 가야 그게 은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린애같이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는 자신을 어른으로 대우해요. 따질 것 따지고 할 것 하고, 안 할 것 안 할 수 있는 능력자로 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시건머리 전혀 없는 철딱서니 개구쟁이 애로 봐요. 니 계약하지 마! 니 하나님하고 계약 하지 마! 계약 못할 이유가 있어요. 개코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니까. 하지 마! 내가 할게. 끝까지 사랑 안에 이 내용이 담겨있어요. 철딱서니 없는 거. 상처, 주께서 자해한 거 아닙니다.
예수님을 몰라보고 찔렀던 그 상처를 주님께서는 고이 고이 간직합니다. 영원토록 간직하지요. 고이 고이 간직하지요. 그래서 사랑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거예요. 왜? 그날치 철딱서니 없는 죄는 또 지으니까.
자, 죄가 뭐냐, 자기를 따지는 게 죄지요. 내가 누군지를 내 주관에 시험에 빠져가지고 나만 생각하는 그 시험에 마지막 시험에 늘 빠져가지고 내 지키는 거 제대로 살자. 이런 식으로 빠진 거예요. 자기가 어린애인줄 인정 안하고. 자꾸 시건머리있는 어른인줄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 생각하고 엉뚱해도 너무 엉뚱해요. 전혀 만남도 없고 연관성도 없고 공통점도 없는 그런 정도로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엉뚱한 생각이 간격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주님에 대한 은혜와 감사는 커집니다. 내가 이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고 엉뚱한 사람이었구나! 그걸 감사하는 거죠.
다시 스가랴 돌아가 봅시다. 스가랴13장. 내 양을 친다. 칠 때, 양이 흩어지지요. 하나님께서 목자를 쳐버립니다. 그럼 목자는 없는 거예요. 목자가 없다는 말은 계약자가 없어진 거예요. 사라진 거예요. 인간에게는 계약자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모든 인간은 당연히 마땅히 멸망 받아야 되지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고 창세기3장에 선악과 따먹을 때에 이미 확정된 사실이에요.
복음의 기쁨은 뭐냐 하면 결정 났다는 거예요. 결정 났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행동을 조심하든 열심히 하든 관계없이 이미 결정 나버렸어요. 수시가 좋은 이유는 12월달 이전에 이미 모든 합격이 결정 나버린 거예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모호하지도 않고 애매하지도 않아요. 끝까지 사랑한다. 그게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작렬하고 있어요. 제발 좀 못나져라. 제발 좀 우수하지 말고. 제발 좀 대견스럽지 말고. 철딱서니 없음에 극을 달하라. 그거거든요. 어린아이의 철딱서니 없는 것.
우리가 한치 앞은 몰라요. 그러나 멀치는 이미 결정 났어요. 우리는 한치 앞은 모르지만, 세상은 어떻게 끝난다는 것은 압니다. 대리계약. 하나님의 대리계약. 그 대리계약이 뭐냐, 니가 나를 이렇게 죽였잖아. 내 살과 내 피. 그것에 합류하는 자는 이미 결정난 사람이에요. 구원에서.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한 치 앞을 안다. 이걸 자랑하는 게 아니고 멀치를 자랑하지요. 이래나 저래나 끝났어. 끝났어. 예수님 재림하면 끝나는 거야. 주께서 영광스럽게 오시는 것은 완전히 완결되고 종결된 거예요. 어떤 게으름과 노력도 변화지 않습니다. 이게 기쁜 거예요.
그게 뭐냐 8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2/3는 멸망하고 1/3은 남으리라. 멸망하는 쪽이 많습니까. 남는 쪽이 많습니까? 멸망이 많지요. 그렇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인간들이 하는 모든 진리 규명은 다수에요. 많은 숫자가 동의하면 진리에 가깝고 소수는 진리에 가깝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인간의 생각을 엎어버립니다. 그래야 걸림돌이 되니까요. 그래서 재직회 2/3 찬성으로 하는 말이 나온 거예요. 현 상태를 원만하게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2/3정도는 동의해야 된다. 왜? 만장일치일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는 2/3정도만 해도 얼추 진리다. 라고 순순히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이게 인간의 생각이지요.
그걸 주님께서는 반대로 역으로 가버립니다. 2/3가 진리가 된다면 1/3은 뭐가 되지요? 불의가 되지요. 잘못된 게 되지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지요. 그러니까 그들의 입장에서는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구원 안 하고 할 때, 그들의 의견을 개진할 자격이 이미 박탈 됐어요.
박탈됐다는 말은 그동안 인간의 지혜의 집대성이 뭐냐, 2/3만 돼도 이건 하나님이 봐도 이건 진리다. 라는 것이 그들의 모든 역량과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할 때, 그정도 진리라고 그들은 꾸역 꾸역 문명을 일으켜온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그들의 지혜 때문에 목자가 날아가버렸다니까요. 구원자가 없어요. 그 잘난 지혜가지고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구원자가 없는데.
제가 지금 네 번째 이야기하는가, 이런 그림이요. 강남강의에서 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 가버렸지요. 예수님이 가버리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떠났잖아요. 떠났는데 우리와 함께 있는 예수를 인간들이 만들어내요. 교회에서. 뭐 좋다고 열심히 하면 복줄게. 예수님이 가버렸는데. 가버렸어요.
왜 갔는가, 우리가 찔러서 갔지요. 우리가 싫어서 갔지요. 그걸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사태가 한꺼번에 다 밀려오는 겁니다. 제가 싫어서 주께서 떠났습니다. 그게 뭐냐, 창자국, 못자국 거기서 뭐가 흘러나왔습니까? 피와 물이 흘러나왔잖아요. 살이 찢어졌잖아요. 그 십자가를 즐거워하고 그 십자가를 사랑하라 이 말입니다.
왜, 내 행위가 거기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나의 주관이 들어가 있으니까요. 나를 도외시하지 않고 나를 끌어당겨서 내 정체를 밝힌 정체가 그 주님에 의해서 제대로 밝혀졌기 때문에 더 이상 나는 이렇다 이야기할 것은 없어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다. 그걸로 종결났어. 내 모습은 종결났어요. 이게 우리의 최종적인 증명사진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죽어 마땅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 사진 잘 나왔어요.
죽어가는 사람이 뭘 무서워해요. 사흘동안 하고 싶은 대로 맛있는 거 먹고 크루즈 여행가고 또 기회가 되어서 골프 치거든 허리 나가도록 치고, 개 네 마리 키우던 백마리 키우던 키우고 싶고, 뭐 그게 죄인 것을 알면 되지요.
그게 뭐냐 이 세상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고방식하고 떨어지는 걸 그걸 뭐냐, 연단이라고 해요. 연단. 불로 연단한다는 것은 원래 금속과 금과의 얻고자 하는 금과 분리시키는 거예요. 분리할 때 얼마나 세상의 욕망에 맞춰서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 욕망을 욕망에서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아버지가 뭐라고 하든, 엄마가 뭐라고 하든, 친구가 뭐라고 하든, 아니 내가 과거에 내가 뭐라고 하든 북한말로 “일 없어. 나는 상관없다.” 자식이 뭐라고 하든 주께서 나는 이미 죄인으로 규정 난 그걸 즐거워할 거야. 이걸 가지고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9절에.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라 할 것이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관여할 것 없는 자꾸 나랑 의논하고 나 자신을 관리하고, 나 자신을 미련을 두고 있는 이 정신질환같은 여기서부터 십자가를 꽂아서 이제는 나와 너, 너와 나가 아니라 말씀의 완성 속에서 다시 우리 자신들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안양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후를 넘어서 (1) | 2022.10.08 |
---|---|
9/14수요설교정리 (1) | 2022.10.08 |
은혜로운 통곡 (0) | 2022.07.03 |
6/15수요설교보충-파수꾼 (0) | 2022.07.03 |
보증자 (0) | 2022.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