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0915a슥14장04절(최후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14장1절부터 할 텐데요. 우선 7절하고 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자, 이 스가랴14장 7절, 8절 말씀을 우리한테 턱 던져주는 거예요. 이 던져주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 건넴’. 말을 건넨다.
말이니까 이건 말씀이고, 인간은 자연 속에 있고, 말씀은 말씀하시는 분은 점선으로 되어있지요. 자연은 보이지만, 주님은 안 보이니까. 안 보이는 쪽에서 보이는 쪽으로 나타나는 방법은 말 건넴입니다. 말을 건네는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을 건네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계시를 받는 겁니다. 그 선지자 중 한사람이 누구냐, 스가랴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보고 있는 스가랴14장에서 7절에서 8절.
말을 건넬 때에 인간들은 말을 건넨 것 가지고 이 말 건넨 내용을 자기 쪽에서 조립해보는 거예요. 조립해보면 조립이 안 돼요. 7절에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는데, 그래 그 날이 있어.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라. 이게 뭐예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낮이면 낮이고 밤이면 밤이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런 하루 하루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인간은 자연이라는 일종의 스프 그 안에 들어있어요. 자연의 일부로 들어있어요.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들어있으면서 뭐라고 자처하느냐 하면 자연의 대변자로 자처합니다. 대변자. 자연을 우리가 정복했다. 자연은 우리 손아귀에 있다. 이렇게 우리가 다룰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자연의 일부가 아니고, 자연의 타자. 타자라 하는 것은 투수할 때 타자가 아니고 남이라는 뜻이에요. 자연을 지켜보고 있는 어르신네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어르신네.
어르신네가 되면서 인간들이 노리는 게 뭐냐 하면 자연을 알면 모든 것을 안다가 돼요. 자연을 알면 모든 것을 안다. 자연의 질서를 알면 우리는 진리를 획득했다. 동물이 죽고, 식물이 죽고, 인간이 죽는다. 아~ 그러면 죽음은 그걸로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끝이 된다. 인간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간다. 여러분, 대표적인 자연은 뭐냐 하면 인간의 구성요소는 세포다. 물질이다. 인간은 물질이다. 물질이고 물질이 죽어서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이건 흙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정도만 알아도 우리는 뭐 얼추 알 것 다 안다. 이렇게 자연에 대한 어른으로 자부합니다.
자, 인간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데 자신감을 갖을 때 뭘 놓치고 있는 거예요? 뭐를 놓친 겁니까? 말 건넴을 놓친 거예요. 인간은 이렇게 창으로 찌르면 피를 날 거고, 손에 못을 박으면 피가 나게 되면 그건 나중에 심장에 적용되면서 죽는다. 끝! 이게 바로 인간들이 자신감을 갖고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진리 안에서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말 건넴에서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예언 성취가 부활로 증명된다는 것은 인간들로서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자기가 어른인데 눈에 보이는 이 자연세계에 대해서는 자기가 꽉 잡고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우리보고 무식하다는 소리 하지 마! 모른다고 이야기 하지 마! 우리는 알아. 알아. 다 알아.” 창으로 찌르면 죽고, 손에 못 박으면 죽어. 끝. 끝이야. 그런데 부활했는데요. 심지어 창자국, 못자국까지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부활했어요. 이거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인간이 아는 진리라는 범주 안에 주님의 말 건넴은 애시당초 애초에 주님의 말씀은 인간이 설정한 진리 구역 안에 들어올 마음이 없습니다. 깰 마음이죠. 깨는 거예요. 인간이 자연을 보고 연구하는 것은 그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뭘 원하느냐 하면 안정성을 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 중요하지만 들어보면 고요하고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 그걸 원해요. 모든 인간들은.
나이 60 넘었다. 그러면 60 넘으면 뭐 출세고 성공이고 돈 버는 것도 귀찮아. 그냥 안정적으로 살면 되겠어요. 한 달 수입이 이천정도는 되고, 아파트는 50평, 차는 한 3대 정도, 그 정도. 애들은 아무 때나 결혼시키면 돼요. 딸은 판사하고 결혼하고 아무 때나 시키면 돼요. 둘째 딸은 의사하고 하면 되고, 큰 아들은 한의사 며느리 만나면 되고. 그냥 아무 때나. 툭 던지면 그러면 부모로서 할 도리 다하고, 그냥 안정적으로 연금은 최소한 천만원 정도. 안정적으로. 그러면 됐지 뭐. 안정을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스가랴14장 안정적으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말 건넴을 통해서 그걸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예루살렘에 14장 1절, 2절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이리 되어있어요. 인간은 안정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안정을 깨뜨려 버립니다. 와~~ 이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우리는 안정을 원해요. 자연에 알만큼 아니까 우리는 마음 편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어요. 마음 편하게. 골칫거리 없이. 아무 사고 없이. 무탈하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안정을 흩트려버립니다. 그리고 다 깨져버린 이 도성, 인간이 원하는 안정된 도성을 하나님의 불안정으로 가득 채워가지고 우리에게 돌려보냅니다. 딱 돌려보내지요.
돌려보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시장에서 상인들이 계산할 때 이거 오만원인데 좀 깎으면 안 되겠습니까? 아이고~ 이거 원가 남지 않는다 해놓고 계산기를 자기 쪽으로 내가지고 따따따 해가지고 딱 돌려보내요. 요기까지. 사만이천원까지 됩니다. 지금 사정이 이렇습니다. 말하기 싫거든요. 사람하고 말하기 힘들어 안돼요. 기계로 보여주는 거예요.
주께서는 예루살렘을 불안정으로 채워가지고 “이게 니 현실이다. 자, 봐라.” 하고 계산기를 돌려 보게 하듯이 우리에게 보게 하는 겁니다. 불안정입니다. 안정성을 얻고자 하는 너희들에게 살만한 도시는 예루살렘은 아니다. 예루살렘을 파괴시켜버려요. 그리고 왜 파괴시키느냐 여기에 인간 같은 인간은 없다. 인간 같은 인간은 없다.
말 건넴을 통해서 올바른 인간이 등장해야 되는데 인간들은 말 건넴을 차단하고 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자연을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을 지배하려고 한 거예요.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질서를 파악하게 되면 자연 전체를 통치할 수 있고 자기 필요한 것을 빼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파괴한다고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선지자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선지자의 심정을. 선지자의 가장 기쁜 순간은요, 선지자가 제일 기쁜 순간은 내 살길이 열릴 때, 아닙니다. 내 미래가 안정적일 때, 아닙니다. 내가 숨통이 트여질 때, 아닙니다. 선지자의 제일 기뻐하는 것은 주님이 살아계시고 말씀대로 일하신다. 이 점입니다. 내가 일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일하시는 것을 선지자는 제일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자기가 수난 받을 때, 얼마나 욕을 얻어먹었을 거예요. 선지자가 수난 받으면서 인간은 자기 자리 위치 그것을 기초를 다시 보는 계기가 돼요.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게 정상일까, 내가 내 바탕이 온전한가를 사람이 자기 뜻대로 안되고 난간에 부딪히고 어려울 때 내가 누구야? 나 지금 제대로 사는 거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거예요.
사람이 수난 받지 아니하면요, 자기를 재해석할 이유가 없습니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사는 대로 사는 게 제일 편하거든요. 지금 이 자연에 대해서 인간들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연은 심판의 도구에요. 심판의 도구인데, 인간은 자기를 어디 봐서 나를 심판해? 자기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연을 잘 구슬려서 거기서 법칙을 끄집어내서 편리한 대로 밥 먹고 살면 되지, 자연에서 원하는 것만 빼내면 돼서 나만 살면 결국 헤헤 거리며 나는 이익 봤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의 입장에서 이런 말씀한다고 선지자에게 돌아올 이익은 뭡니까? 선지자가 이런 계시를 받아서 이렇게 했을 때 선지자의 몫으로 돌아오는 게 뭡니까? 없어요. 이 말은 내가 어떻게 안정적이냐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하는 일이 얼마나 안정적이냐가 더 중요한 문제거든요. 주의 하는 일의 일관성. 그래야 내가 나를 안 믿잖아요.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건이 터져버리면 지나온 모든 안정성이 다 허물어지는 겁니다. 참 제가 이 말하는 제가 밉더라도 들어주셔야 되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58년 동안 살았다. 아무 문제없고 탈이 없고 살았다. 그런데 58년째 생일 그 다음날 탈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섭섭한 이야기지만 58년 산 거 다 날아갑니다. 이건 섭섭한 이야기지만 이게 사실이에요. 그러면 58년 그 다음날도 괜찮았다. 소용없습니다. 59년째 그 생일날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몰라요.
그러니까 이건 생각을 바꿔야 돼요. 내가 나는 안정적으로 원한다. 원하지요. 뭘 잘못되어서 원하지요. 말 건넴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니까. 자기 이익만 생각하니까. 늘 초조한 가운데서도 이만하면 선방했다. 하고 이렇게 하지요. 하지만 무슨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몰라요. 차라리 선지자처럼 생각을 바꿉시다. 내가 어떻게 되든 죽이 되던 밥이 되든 상관없이 주의 일의 일관성에다가 우리가 갈아타야 돼요. 버스 갈아타야 돼요. 내 몸을 내가 꾹 쥐고 있지 말고 내 몸에서 내가 탈출해야 됩니다.
내가 자연의 일부잖아요. 자연의 일부인데 내가 자연의 일부에서 탈출해야 돼요. 탈출하는 방법은 말 건넴이 올 때 이 나를 버리고 말 건넴에 나를 여기다가 올라타는 겁니다. 말 건넴에 나를 섞어 넣는 거예요. 섞어 넣으면 이게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은데 이거에요. ‘최후를 넘어서서’ 한 번 따라해 보세요. 최후를 넘어서서. 감사합니다. 참새! 짹짹!
최후를 넘어서는 것. 최후를 두려워하고 기다리는 게 아니고 최후마저 넘어서는 거예요. 최후를 이렇게 바라보는 게 아니고, “저게 최후구나! 안 돼!” 마지막을 바라보지 말고, 마지막에 뒤편을 보는 거예요. 앞에서 보면 멋있는 디자인된 연극풍경이지만 뒤에서 보면 베니아판 누런 못질한 베니아판 나오지요. 이게 세트의 뒷모습입니다.
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 세상에 그것보다 더 안정적인 사람 없습니다. 최고입니다. 그게 최고에요. 그 최후가 참 좋아요. 최후에 하고 난 뒤에 그걸 성령 안에서는 부활이라고 하는데. 성령 안에서 부활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방금 이야기한 최후를 넘어서를.
왜냐하면 성령은 마지막 때 오는 거거든요. 마지막을 받았으니까 마지막을 기다리는 게 아니고 뒤쪽으로 바라보면서 살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리 되는데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불가능하니까 건네진 말 위에 올라탈 수밖에 없어요. 그 안에 섞이면 돼요.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이건 인간이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이 스가랴14장 7절을 어떻게 조립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아는 하루는 낮이든 밤이든 둘 중에 하나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고 그런 건 없어요. 그런데 7절 끝에 보면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이 말씀에 우리가 참여하고 뛰어들고 거기에 올라타고 하는 겁니다.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이건 내가 조립하거나 내가 구성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이미 말씀에 올라타 버리면 나의 주인장이 말씀이 되어버려요. 내가 굳이 도대체 그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니는 알 거 없어.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우리가 알아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거든요. 그건 우리의 의지고 판단이지요.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으리라. 그러면 빛이 오기 전에 앞에 순서가 뭐다? 어둡다는 거예요. 그 어둡다를 저는 최후로 본 겁니다. 최후가 와야 돼요. 마지막이 와야 되고, 마지막이 온다는 그 절차를 걸쳐야 그 다음에 최후를 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경우가 생기는 거예요. 이런 자를 가지고 이걸 ‘남은 자’라 해요. 남은 자.
남은 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 모두 다 최후를 거친 자. 최후를 거친 자에요. 자, 자연세계에서의 최후라 하는 것은 죽음이에요. 흙이 되는 겁니다. 자연세계는 끝은 끝이에요. 끝 넘어는 없어요. 죽음은 죽음이지. 죽고 난 뒤에 만나자. 이런 거는 자연세계는 증명이 안 됩니다. 물리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죽고 난 뒤의 모임 유령의 동우회 이런 것은 생물학적으로 그거 논문 제출이 안돼요. 박사학위 논문이 안 됩니다.
그건 심령과학이지 심령과학도 아니다. 하여튼 과학은 그런 거 용납하지 않아요. 과학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똑같은 일이 반복될 때 과학이에요. 반복되지 않으면 이건 요술이고 마술이고 미신입니다. 똑같은 경우와 똑같이 반복되어야 돼요. 똑같은 효과가 나야 돼요. 똑같은 동일한 결과가 주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게 과학입니다.
그러니까 과학적으로 과학이 진리라고 우길 때, 이 스가랴14장7절, 8절 같은 말씀은 이건 뭐 생뚱 맞는 이야기에요. 나 14장 7절, 8절 나는 거부할래. 나는 안 믿을래. 이리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최후의 세트장 너머를 못가지요. 최후를 넘어서지를 못하고 그냥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그 다음에 네비가 어떻게 작살날지 그건 버들버들 떠는 거죠. 주님께서는 이 자연을 통해서 뭐냐 하면 ‘자연을 통해서 심판하겠다.’ 뜻입니다. 심판하는 이유는 인간 같은 인간은 없다. 이게 심판의 이유입니다. 인간 같은 인간은 없다. 주일 낮 설교의 제목이 가짜인 거 아시지요. 인간 같은 인간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같은 인간은 어떠냐 하면 이런 겁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한창 전쟁이 심하게 일어났을 때에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걱정하는 것이 먹을 게 없어가지고 감자가지고 요리를 해먹는데 감자가 없어가지고 씨감자까지 먹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씨감자를 먹어버리면 내년에 가면 농사는 어떻게 짓고, 없지요. 다음 해에 모종해야 될 곡식까지 소비를 해버리면 농사는 끝나는 겁니다.
아무 대비책 없는 거죠. 그래서 인간이라면 마지막은 다 하더라도 마지막 그것만큼은 여지를 남겨두는 거예요. 여지를. 말씀을 듣고 복음을 들을 때에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그 말씀을 받아들여요. 그 말씀이 옳다. 하지만 그 말씀이 엉터리일 경우에 나를 살릴 수 있는 씨감자 또는 모종할 수 있는 최후의 곡식만큼은 딱 꼬불쳐놓는다는 말은 딱 챙겨놓는 거예요. 그런 자세로 듣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자기의 최후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라도 예수님 앞이라도 나의 최후를 내드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 혼자 죽을 수 없습니다.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작은 일말의 다시 내가 재기할 수 있는 그 마지막 재료하나 만큼은 못 놓겠다고 버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 반면에 어떤 사람은 복음이 들어오면 그야말로 좋은 의미에서 멍청한 거예요. 그냥 믿어버려요. 저거 어떻게 하려고? 저거 어떻게 하려고? 이런 거요.
뒷감당 되겠어? 나는 그런 거 모르고 이 성경 말씀이 유일한 현실이다. 인간들이 하는 과학적 현실은 현실이 아니고 이것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이 부활 때문에 그래요. 죽었다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거고요. 이순신 죽은 건 다 알아요. 1492년 십이지한테 다 아는데. 이순신 장군이 부활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압니다. 지금 이순신 장군이 부활해도 안 믿어요. 부활하면 내 진리체계가 모독을 받기 때문에 용납이 안돼요. 죽은 이순신은 인정하는데 동상세우고 인정하는데 광화문에다가. 살은 이순신은 죽여 버려요. 사람들이 교회 와서 예수님은 존경해요.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의 인생을 이끈 것은 내가 아니고 주님께서 살아서 지금껏 우리가 살게 했다는 그 부활하신 주님은 만나면 죽여 버려요.
왜냐하면 나의 자유의 가치가 상실되기 때문에. 나의 선택과 나의 의지가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자존심까지 무너질 필요는 없다 이리 보는 거예요. 마지막 그 씨감자같이 마지막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이에요.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감. 그것마저 파괴된다면 우리는 무의미하게 되어버리지요.
그렇게 되면 뭐냐, 수요설교 다시 해야 돼요. 인간이 걱정하고 무서워하는 이유는 내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티 날까봐. 짐승이 될까봐.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애써서 공들여 살아온 것이 다 의미 없을까봐 겁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요, 예루살렘을 시범조로 심판을 해버립니다. 심판하는 대목이 14장1절에 나오지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정리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예루살렘을 통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과 그리고 심판이 없음을 이렇게 같이 대비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과 없음을.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채로 지금 있잖아요. 있음이 된다고요. 그러면 없음은 이건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니까 없음이 된다 말이에요. 없음이 있다는 말은 엉터리 말이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철저하게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은 이 예루살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씨감자 하나 마지막 최후의 자존심 하나는 남기려고 버티잖아요. 그 사람이 만약에 예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찾아올 것이다. 언젠가는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메시아가 온다. 그전부터 이미 메시아가 약속했다. 이 말이에요. 예루살렘은 내가 다시 건설하고 든든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만큼은 다치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이 이방민족한테 당하고 수모당해도 피할 자기 안정성, 인간은 안정성을 원하지요. 안정성은 어디서 마지막에 피난처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예루살렘인 거예요. 이게 시편에 가득 나와요. 시편에. 시온은 나의 반석이요, 안식처요,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결국은 여기서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가 되어가지고 우리를 찾으러 온다고 믿는 거예요. 예루살렘.
그런데 주님께서 여기서 예루살렘이 있는 여길 가지고 거세하는 거예요. 거세. 아무것도 아닌 자를 아무것도 아니 게 하는 절차를 통해서 그 아무것도 아닌 그 인간마저 제거해 버리는 겁니다. 살려고 하는 나를 없애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있다. 있다. 있다, 에다가 많이 양보해가지고 많이 스스로 겸손하고 양보해서 “하나님, 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죽어라.” 아무것도 아닌 이 정도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설마 이것마저 거세할까. 그거마저 거세해 버려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 가지고 뭔가 다시 한 번 나를 소생시킬 수 있는 마중물이라 합니까.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마저 주께서는 작살내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 없음이 되어버려요. 여기서 유명한 어려운 단어 하나가 등장하는데 정말 어려운 단어인데요, 여러분 실력이 되니까 적어보겠습니다. ‘가짜가 원본이다.’ 아주 중요한 시점이에요. 가짜가 원본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내 가짜 되기는 이건 전부 다 엉터리에요. 진짜 우리는 내가 가짜 되고 싶어도 절대로 가짜가 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가짜라고 우기면서 그걸 진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마중물, 마지막 기초, 가느다란 기초, 가초라고 우리는 자부하는 겁니다. 온전한 가초가 될 수 없어요. 우리는. 온전한 가짜는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가 못하는 가짜를 주께서 대신 보여주신 겁니다. 어디를 봐서 예수님이 메시아입니까. 전혀 메시아답지 않아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대하는 그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는데 그 중에 유형 중에 하나가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고 낮춰가지고 바닥 인생을 살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걸 쿰란공동체라 해서 이스라엘 쪽으로 성지 순례하는 사람은 가는 코스가 있어요. 코스 보면 쿰란공동체 유적지가 발견되어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안 믿지요. 내가 겸손하고 낮추고 이렇게 나는 가짜라고 외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그것을 통해서 내가 진짜 될 수 있는 경계선, 그 위치에 나를 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들은 실시한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심지어 수도원에 가면 이런 게 있어요. 침묵의 수도원. 봉쇄 수도원하는 게 있어요. 프랑스나 미국가면 한 두군데가 아니에요. 자발적으로 봉쇄하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반입하고 나머지는 자체적으로 농사 짓고 과수농사하고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하고 노동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침묵하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어서 주께서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더 살고자 하는 인간의 생존의 마지막 남은 생존욕구마저 마귀의 마지막 무기라고 자부하고 그것과 투쟁하고 싸우면서 침묵하면서 오직 기도하고, 노동하고, 최소한의 에너지만 공급하는 질 떨어진 양식만 먹는 수도원이 제가 알기로는 천군데가 넘어요. 이슬람교도 쪽에도 있어요. 물론 불교는 많고요.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그들은 가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가짜가 원본이기 때문에.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본인이 가짜라 하는 그 가짜가 인간이 본인이 자연세계에서 끄집어낸 지혜를 통한 진짜를 어렴풋이 마주하면서 내가 가짜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진짜 내가 가짜 인간을 알려면 반드시 뭐가 필요하냐 하면 거세를 해야 돼요. 이게 마지막 내가 쥐어놓은 것까지 주께서는 아주 냉정하게 그걸 잘라버려야 돼요. 뭐를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잘라버리면 그것이 바로 스가랴14장의 이야기입니다. 14장 1절부터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나오게 되면 14장 7절에 나오는 어두움이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빛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어두움에 가기 때문에.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요,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어떤 날이냐 하면 7절을 우리가 아는 우리가 체험하는 자연세계에 자연현상으로 하면 기껏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점점 더 밤이 깊어지고 어두워서 새벽인데 이건 뭐 동이 틀 때 쯤 해서 밤이야, 낮이야, 구분하는 경계선에서 조금 약간만 기다리면 드디어 새벽이 해가 떠올라서 낮이 된다.’ 기껏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밖에 안되거든요.
이게 그렇게 되어버리면 예루살렘 심판한다는 내용이 여기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심지어 심판하는 모습을 봅시다. 4절에.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이건 감람산이 쪼개진다는 거예요.
감람산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 앞에 있어요. 예루살렘 앞에 있는 감람산이 쪼개진다는 말은 이건 감람산뿐만 아니고 예루살렘부터 애초부터 이건 예루살렘은 쪼개져 있다는 것을 감람산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다 모르겠지요. 이게. 그래서 이 문장으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사라지는 매개자’ 인간이 두려워하는 이유 중에 하나 무의미가 되는 것도 두렵다 했지요. 같은 뜻입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본인이 사라질까봐 겁나는 거예요. 본인이 여기 있는데 있음이 없음 될까봐 겁나는 거예요. 기어이. 그래서 자식이 어디에 물에 빠졌다 하면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은 실종됐다 하면 그래도 죽었다 하는 것보다 낫잖아요. 사라졌으니까.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희망을 갖잖아요. 시체라도 찾아야 내 마음이 안정성을 얻겠다는 이유가 인간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굉장히 겁을 냅니다.
인간은 본인이 사라지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기 때문에 스스로 사라질 수 없어요. 자살해도 안 사라져요. 그러면 인간이 스스로 거세한다든지, 스스로 가짜가 될 수 없고 가짜가 되는 흉내나 내는 기껏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 짓밖에 못하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은 전혀 이루지를 못합니다. 흉내 내기나 한다고 해서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일부가 아니고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무슨 짓한다? 지가 대장질하지요. 대장질. 지가 대장이에요. 대장 되어버리면 자연은 뭐냐 하면 내 관찰의 대상이 되고 지는 관찰한 것을 끌어 모아서 하나의 자연과 스스로 알아서 자연과 마주서는 존재가 되고 말아요. 아까 이 이야기는 내가 요런 표현은 안했지만 비슷한 이야기는 했지요. 다시 하다보면 다른 표현이 돼요.
하나의 마주서는 대치가 되어버리면 이건 자연은 학대의 대상이 돼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우리 따로이 구성한 이걸 대타자, 큰 나. 나 니보다 노는 게 달라 씨~. 이리 되잖아요. 자기를 스스로 따로 나와서 자신을 독특한 존재로 구성이 되어버리면 상대방은 착취와 핍박과 학대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무리와 군중의 차이. 차이를 아셔야 돼요. 짐승은 떼지어 다니지요. 무리. 군중은 짐승을 가지고 군중이라 하지 않아요. 군중은 뭐냐, 인간사회에 적용됩니다. 인간사회는 여기 본인들이 지도자를 원해요. 본인들이. 대타자를 원한다고요. 큰 어르신네를 원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힘들어서 못 살아요. 만약에 어떤 여자가 싫다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계속 따라옵니다. 그래서 여자가 여쩔 수 없이 경찰에 고소해가지고 재판을 한다 합시다. 그런데 남자가 성질 나가지고 그 여자 따라 다녀가지고 칼로서 그 여자 근무하는데 죽여 버렸다 칩시다. 신당동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스토커해서 죽였어요.
만약에 상상인데, 만약에 그 오빠가 있다면 1번 재판하고 싶다. 2번 그 남자 똑같이 칼로 죽이고 싶다. 몇 번이겠어요? 죽이고 싶지요. 재판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바로 현재의 미국 사정이에요. 미국에서 왜 무기가 갈수록 더 잘 팔리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당했던 피해를 국가가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점을 무기회사는 부각시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래야 만족스러워요. 사실은 우리의 욕망은 이빨 두 개 뿌렸는데 이빨 네 개 뿌려야 만족하지만 그건 너무 심한 거고. 최소한은 균형은 맞춰줘야 원한이라도 풀 수 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미국에 재판하면 석달이고 넉달이고 다하고 나중에 사형제도도 없고 거기서 국민 세금내가지고 잘 먹고, 남 가정 완전 사람 죽여 놓고 지는 거기서 교도소에서 고참 노릇하면서 사형 없는데 10년이고 20년이고 기술 배워가지고 훌륭한 사람 소리듣고 그리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럼 피해자가 받은 억울함은 어떤 인간은 사람 죽여 놓고 편안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상처를 품에 안고 어떤 한 순간도 마음 편하게 못 살고. 누가 감옥살이하는 거예요? 지금. 둘 중에. 가해자가 감옥살이하는 게 아니고 감옥 호텔에 사는 거고. 이 피해 입은 사람이 감옥살이하는 이 불합리한 세계에 이건 아무리 따져도 납득이 될 수가 없지요.
그러면 어떤 강도가 들어왔을 때에 “니 그러면 우리 경찰에 신고한다.” 이래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쪽은 지금 총 들고 오는데. 그쪽은 총 들고 왔을 때에 LA에서 한인가게에서 만약에 내가 한인가게 편의점 한다. 어떤 흑인이 총 들고 왔다. 여기는 권총 들면 안 되지요. 장총 들고 들어가야 되지요. “기다렸다. 빵!” 쏴버려야지요. “왜 쐈습니까?” “먼저 쏠 것 같아서 쐈다” 하면 끝나는 거죠. 한 대 맞고 쏘면 안돼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쏠 수가 없잖아요.
이게 인간이 맞아요. 왜? 인간은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인간은 밉고 살인하고 싶은 충동이 우리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이게 인간다워요. 국가의 치안에 맡기세요. 이건 전혀 우리의 본성과 안 맞는 거예요. 따라서 복수를 해도 내가 복수를 해야 돼요. 피해자 내가 복수를 해야 돼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집집마다 총이 다 있고, 집집마다 방마다 총 다 있어요. 그렇게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진짜 지옥입니다. 대혼란이에요. 총을 갖고 있어도 더 큰 문제가 일어나는 거예요. 오발 사건은 문제가 아니고 좀 기분 나쁘면 총 쏴버리는 거예요. 니 내 기분 안 알아줬다고 무조건 쏴버려요. 문자 씹었다고 쏴버려요.
어쩔 수 없이 총 다 빼앗고 어쩔 수 없이 교도소 만들어서 이런 식으로라도 불평 불만이 많더라도 할 수 없다 치고, 멀쩡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형제도 없애고 사람 죽인 사람은 교도소에 집어넣는 이 방식, 그렇게 할 때 어쩔 수 없이 뭐냐 하면 뭘 믿어야 돼요? 국가를 믿어야 돼요. 국
가가 타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예루살렘이고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그것을 주께서는 폭격을 해버려요. 거세해 버리고, 심판해 버리는 거예요.
자연 안에서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국가의 법질서가 우리를 지켜주는 한 약간은 우리가 안정감을 숨을 쉴 수 있다, 라는 심지어 그것마저 주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니가 아직도 니가 가짜인 걸 모르는구나! 니가 거세 대상인 줄 모르는구나.” 하고 공격합니다.
공격하니까 국가가 공격하는 메시아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죽여버렸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뭐가 돼요? 하나님이 말씀 건넴으로 오신 그 분이 본인이 말씀이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그 분이 곧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이 어떻게 됐어요? 이 인간세계에서 사라져버렸지요. 누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을 매개하고 연결시켜주는 분이 중보자가 사라져버렸지요. 그러면 성도는 이게 말씀의 완성입니다. 성도는 사라지는 매개에 그 말씀에 올라타서 같이 사라지게 되면 아까 제목을 뭐라고 한다 했습니까? 최후를 넘어서.
최후를 넘어설 수가 있지요. 마지막을 넘어설 수 있는 거예요. 이 스가랴에서는 선지자가 대표자겠지요. 말씀을 넘어서게 되면 어두움이라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 모든 인간은 거세당해야 돼요. 빛을 기다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야 됩니다. 빛을 기다리고 싶은데 왜 빛이 안오지? 이런 인간도 하나도 생겨나지 않아야 돼요.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 빛이 왔으되 빛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만 있어야 돼요.
그래야 뭐가 성립되느냐 없음에서 있음이 순전히 사라졌던 매개자의 솜씨로 작품으로 이 새로운 성도가 생겨나는 겁니다. 어두움이 어두움다워야 그러니까 어두움 중에서 어느 한 인간도 빛을 기다리는 사람이 일체 없어줘야 그 때 빛이 오게 되어있어요.
최후는 우리가 기다리는 최후는 최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혼인잔치에 처녀 열명이 있었잖아요. 신랑은 하나고 열 명이 있었지요. 열 명 중에서 잠 안 잔 여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 한 명도 없어야 돼요. 모두 다 잠을 잤어야 돼요. 모두 다. 다만, 그 지혜로운 여인은 건네 온 말씀을 옆에 기름으로 생각하고 옆에 해놓고, “이 말씀의 실천자는 나가 아니다.” 라는 거예요.
잠 자지마라, 잠 자지마라. 하면 벌써 5분 뒤에 잠자고 있어요. 중얼 중얼. 잠자면 안 돼. 신랑 오면 못 만나, 못 만나. 자고 있어요. 왜냐하면 신랑 올 때 깨어있어야 한다는 그 말씀은 만나는 처녀가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처녀는 자야 돼요. 실천에 옮기지 못하도록 거세되어야 돼요. 거세. 잘려져야 된다고요. 내 희망, 내 구원, 내 말씀에 대한 기대가 다 잘려져야 돼요.
그 작업을 지금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보고 지금 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이루지 이 말씀 공부한 우리가 실천에 옮기는 말씀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빵점 맞으면 돼요. 속 편합니다. 천하에 속 편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첫 강의에서 안정성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에 안정성이지, 내가 안정성을 기대하면서 하는 안정성은 이건 제거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가짜가 원본이라는 말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이 땅에 원본은 없다는 겁니다. 원본은 없다에서 원본을 잘라버리면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에 인간은 없는 거예요. 자연 앞에서 자연의 어른인체 하는 인간은 하나님은 주신 적이 없어요. 이유가 뭐냐, 물으신다면 자연의 대변자는 예수님입니다. 자연의 대변자는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겨냥하는데 인터셉트, 중간에 죄지은 인간들이 “자연아! 니는 나하고 놀자.” 하고 자연을 자기가 돌아가 가가지고 수력발전소 만들고 온갖 태양 팬을 만들고 자연을 자기 원대로 사용하고 활용하고, 하면서 또 어디서 들은풍월은 있어가지고 창세기1장28절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건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경우지. 가짜 인간은 그런 자격도 안돼요. 범죄한 인간은 저주 받아야지요. 범죄한 인간의 그 위치. 주위는 부산강의에서 이렇게 했습니다.
땅 그려놓고, 땅에 못 그리는 그림 그렸습니다. 뱀 하나 그려놓고 인간은 여기 뱀의 자손이지요. 뱀의 자손 돼서 뱀처럼 땅에 엎드려서 땅에서 올라오는 모든 저주를 맡으면서 어떻게 산다? 기어가듯이 산다. 야~~ 참, 인간의 팔자의 서글픔입니다. 인간은 땅을 파야 살 수 있어요. 땅이 주인이지, 인간이 주인인지 분간도 안 되지요. 사실은 땅이 주인이지요.
땅이 제때에 비가 오지 않고 땅의 세계가 제때에 활용되지 않으면 인간은 굶어죽습니다. 땅에게 종속된 인간. 저주받은 뱀의 모습. 이게 무슨 진짜입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엉터리밖에 없었습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20915b슥14장04절(최후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많이 난해할 겁니다. 왜냐하면 대립물 때문에. 대립물. 대립물이라 하는 것은 서로 마주보게 하는 양쪽이 서로 이질적인 것. 상이한 것. 같지 않은 것. 반대되는 것. 그런 것을 양쪽에 세우는 겁니다. 양쪽에 A라는 것과 B라는 것을 상이하게 되면 따로 가면 되는데 서로 다르면서도 같이 만나게 해주는 것. 이게 대립물이에요.
지옥과 천국을 따로 가면 되는데, 지옥과 천국을 따로 놓으면 되는데 같이 만나게 해주고. 그리고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인간이 따먹은 선악과 따먹고 도둑질해서 도망친 이 세상이 따로 가면 되는데, 주님께서는 그 둘을 따로 가게 하는 게 아니고 대립시키는 거예요. 저리 가! 너는 저리 가! 이렇게 안 만나게 하는 게 아니고, 마주보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마주보게 하는 그 여기서 A도 만족시키고 B도 만족시키는 그 새로움이 여기 이 자리 차이에서 나와요. 차이에서. 선악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들 때, 만들 때는 그냥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의 뜻이 담겨서 만들었어요. 그러면 하나님 만든 뜻이 훼손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냥 방치하겠습니까? 뭔가 조치를 하시겠습니까? 조치하겠지요.
해손당한 선악과 그리고 뭐는 온전합니까? 생명나무는 온전하지요. 이 둘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만나서 훼손 되었던 그 취지가 이 만남의 두 대립물 사이에서 새로움으로 완성을 시키는 겁니다. 선악과의 취지를 완성을 시키지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부산강의에서 바로 인간의 선악과 따먹고 죽는다고 해서 인간이 죽음을 아는 게 아니에요. 선악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 진짜 죽음은 요 사이에서 생명나무와 사이에서 생명나무 되시는 분이 선악을 따먹은 그 처벌까지 받으면서 여기서 죽음이 나오는 거예요. 진짜 죽음은.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내가 아는 죽음은 죽어도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아는 죽음 가지고는 소용이 없어요. 구원은 그 죽음까지 거처야 구원이 돼요. 그런데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모르니까 구원이 될 수가 없지요.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할 때만 구원이 되지요. 인간이 예수 믿고 죽는다고 다들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만드시고 생명나무도 만드셨기 때문에 양쪽 다 취지를 완성시킬 책무가 있었던 겁니다. 스스로 책임이 있었던 거예요. 그 책임에서 흘러나오는 죽음. 그 죽음에 참여해야 생명세계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 생명 세계에. 그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있는 위인은 없지요. 인간은 없습니다.
죽음에서 이게 생명이라면. 죽음세계에서 생명세계로 내가 그냥 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경유해야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경유한다는 말은 이 생명세계가 예수님을 경유해서 나아가는 게 아니고 생명세계가 예수님 안에 들어오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받아들였고, 이 죽음의 세계도 예수님도 받아들였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는 양쪽 다 받아들여서 그걸 그 취지를 완전히 완성시켜버릴 때에 예수님은 구주가 주님이 돼요. 하나님의 계획이 완료가 된다. 하나님의 모든 하시는 일이 완성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죽었다가 부활할 때. 부활하실 때 주께서는 주가 되신다 하잖아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어려우니까 묻겠습니다. 예루살렘은 누가 기억하고 누가 예루살렘 성전을 만들겠다는 그 기획과 그 예루살렘을 특수한 장소로 선택한 것이 인간의 의지입니까? 주님의 의지입니까? 주님의 의지지요. 그걸 다윗언약이라고 해요. 다윗언약.
언약할 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언약할 때는 주님의 의지가 우리 속에 건너왔구나! 노아한테 방주 만들라고 한 게 노아 생각이 아니고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주님의 아이디어지요. 그게 언약이에요. 내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준다.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주님의 아이디어에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 누구의 뜻입니까? 주님의 뜻이에요.
나는 구원받겠다. 누구의 뜻입니까? 나의 뜻이지요. 너를 구원하겠다. 누구의 뜻입니까? 주님의 뜻이에요. 내가 주님 기억하는 거 주님은 기억하지 않고, 나를 주님께서 기억했기 때문에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옮겨 타야 되지요. 내가 아는 주님을 버리고 주님이 아는 나로 그 기억 속으로 옮겨 타야 되지요. 그걸 뭐냐 하면 관점정리라 해요. 관점정리.
관점이 내 관점이 아니고, 주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옮겨 타고 정리 정돈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관점정리 용어가 어렵지만 수요일 어제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다 이루었다. 달랑 다섯자에요. 나중에 이루었다가 아니라 다 이루었다의 공간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그게 사랑이에요. 춘향전 판소리에 잘 나와 있습니다. 춘향전 판소리에 보면 이래요. 이리 오너라. 앞을 보자. 저리를 보자. 뒤태를 보자. 이리보자. 저리보자. 까불고 있거든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공간 안에 앞태가 되든 뒤태가 되든 멀리가든 앞에 가든 전부 다 사랑 안의 공간의 동질의 적용을 받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예수 안이에요. 이게 안에서 구원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성령 안, 십자가 안,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성경에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예수 믿었다가 너무 강렬해서 예수 안을 다 떼고 이야기해요. 내가 믿습니다. 주여. 내가 믿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여기지 않고 내 의지로서 계산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쌍시옷 들어가잖아요. 믿습니다, 는 믿음이 아니고 믿씁니다. 해야 믿음인 줄 알고. 더 믿다가는 토하겠다. 믿...., 하다가 토한다.
그 선악과 이미 따먹은 상태에서 죽으리라, 주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너가 정녕 죽으리라” 할 때에 이 말씀이 있잖아요. 이 말씀. 내가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말의 건넴. 말이 건너오는 것. 또는 말을 제시하는 것. 어디에 온다? 자연세계에. 눈에 보이는 자연밖에 없는 이 세계에 무엇이 투입되는 겁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이 거기서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지만 건너온 거예요. 그게 선지자에요.
그래서 자연 속에 있는 인간들은 뭘 해석을 못합니까? 건너온 이 스가랴를 해석을 못하는 거예요. 자꾸 자연적으로 이미지를 형성하려했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는 인간들이 건너온 이 말씀을 인간은 건너가고자 하니까 여기에 갭이 생긴 거예요.
바로 가는 게 아니고 여기에 대립물이니까 떨어져있으니까 끊어져있으니까 끊어진 것을 인간이 여기서 통과할 수가 없는 거예요. 끊어졌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중요한 것은 뭐냐, 끊어졌는데 어떻게 끊어진 저쪽 세계에서 생명세계에서 날아온 성경 말씀을 끊어진 이 세상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그걸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느냐, 이게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참 중요하지요. 그러면 이해된다면 여러분 뭐든지 할 수 있겠어요. 이게 이해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소원이 어디 있어요. 세상에. 끊어진들 할 수 있으니까. 끊어진 것이 이해가 되니까. <블랙폰>처럼 전화기가 끊어졌는데 세상에 소리가 들이잖아요.
분명히 끊어졌어요. 그런데 소리는 들리는 거예요. 왠일이야? 왠일이야? 세상에 이럴 수가. 여기서는 하나님께서는 끊어진 것을 다 계산해서 예루살렘을 돌려주지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 남은 자도 쫓아내버려요. 살 수 없는 곳. 살 수 없는 곳을 주께서 예루살렘을 만들었어요. 인간은 살 수 없는 곳. 그걸 신약적으로 한다면 천국은 인간에게 없는 곳. 있어도 갈 수 없는 곳.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곳. 그게 천국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천국을 귀한 줄 알아야 돼요. 갈 수 없는데, 0%에요. 들어가는 확률이 0%인데 천국에 들어갔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귀하신 자리에 오신 거예요. 정말 귀한 자리에 온 겁니다. 인간의 능력을 능가해 버렸어요. 주님의 능력입니다. 갈 수 없는 곳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예루살렘 동편에다가 감람산이 있지요.
네가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을 자, 첫째 인간이 이해하는 것. 인간이 이해하는 것. 네가 정녕 죽으리라. 너는 인간을 말하고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은 뭐다? 나를 이야기한다. 이리 생각하면 인간 선에서는 맞다고 생각하겠지요. 아담아! 네가 정녕 죽으리라.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헉! 헉! 으으윽!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안 죽었잖아요. 주의 말씀은 구라였어요. 거짓말이었어요? 안 죽었다 말이지요. 인간이 이해하는 이렇게 이야기해야지요. “그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니가 900살 살고 죽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정녕 죽으리라. 했어요. to부정사. 문법에서 to부정사라는 것은 뭐냐 하면 시제가 없는 거예요. 시제를 뺀 거예요. 시제를. 과거, 현재, 미래를 빼버린 거예요. 어떤 공간 안에 있을 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 상태는 달라질 게 없다. to부정사입니다. to+be, to라는 전치사 + be 동사를 붙이는 거거든요. 명사가 갖고 있는 성질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것은 해석할 때, ~되기, 또는 ~하기 이리 되는 거예요. 언제 그리 된다는 게 없어요. 지금 벌써 됐고, 앞으로 계속 그럴 것이고, 앞으로 달라질 것 없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 끝. 다 이루었다. 끝. to부정사. 인간의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어요.
따라서 너가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을 이것이 인간의 수명, 인간의 활동, 인간의 의지, 인간의 선택, 인간의 결정, 그것과 전혀 상관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인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마지막 인간.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그대로 자기 말씀으로 가져오지요.
주께서 우리 대신 죽었다.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걸 정확히 합시다. 나에게 넘어온 말씀을 예수님이 자기 말씀으로, “이건 내 말씀이야.” 하고 가져가 주시는 것. 내가 지킬 말씀이야. 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예수 너가 정녕 죽으리라. 그것도 어설프게 목숨 끊지 말고 제대로 죽음에 마지막 깊이까지 죽음 자체를 완성시킬 것이야. 그것을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그것이 바로 사라지는 매개자입니다.
어디서부터? 인간세계에 들어왔다가 사라짐으로서 인간 세계가 알고 있던 그 죽음의 세계와 전혀 공통점이 없는 죽음이지요. 인간세계가 예상하고 있는 죽음과 전혀 공통점이 없어요. 그럼 인간세계는 어떤 세계냐, 뭐든지 자연세계에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건더기라도 있으면 붙들고 자기가 생존하고 영원하고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뭐든지 그걸 붙들고 끌어 모으는데 급급하지요. 인간은.
그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것. 이거 다 누구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본인한테 이익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거죠. 아까 첫째시간에 질문 중에 그거잖아요. 스가랴가 이 예언해가지고 얻는 이익이 뭐냐, 뭐라고 했습니까.
스가랴가 이거 해서 얻은 이익은 사적인 이익은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지요. 그럼 스가랴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얻은 혜택은 뭐냐,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고 내가 여기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대로 활동하는 게 아니고 누가 활동한다? 우리 주님이 활동한다는 거예요. 이게 베드로전서1장10절에 보면 선지자 속에 예수님의 영이 미리 들어가 있어요. 미리. 미리 들어가 있다고요. 그래서 선지자를 문어발로 하듯이 주께서 미리 그 시대에 조정하고 있었던 겁니다. 꼭두각시 인형같이 잡아당기면 당기는 대로 하는 거예요. 꼭두각시 인형 되는 걸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편해요. 편하잖아요.
주님께서 잡아당기는 대로 사는 게 얼마나 편합니까. 고민이 필요합니까. 뭐 세금 낼 일이 있습니까. 어떤 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심지어 그렇게 할 수 있는 의지와 에너지와 능력조차도 주께서 이미 다 제공해 주신 거예요. 주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결과적입니다. to부정사, 이 모든 것이 상태, 지금의 어떤 실제로 이 상태가 주께서 홀로 일하는 상태인 것을 늘 확인하게 만들지요. 매일 삶이 확인하는 거예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있다. 그게 바로 선지자지요.
정녕 죽으리라, 되어있다 말이죠. 그러면 이 정녕 죽으리라, 를 위하여 이 선악체제가 대립되어있으니까 주님께서 이쪽 세상을 파견근무 해야지요. 찾아와야지요. 찾아와서 인간은 건너가지 못하는 것을 누가 건너가십니까? 주님이 이걸 건너가는 거예요. 스가랴14장을 누가 이룬다? 주님이 이루시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어렵지 않아요. 쉬워요. 첫째시간에 잠간 언급했는데, 이걸 길게 이야기하면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지금 몇 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을 지배자로 자처했어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거예요. 다스리고 통제하고 지배자로. 그러면 이 자연은 뭐냐 하면 인간의 개발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개발의 대상. 개발할 때 모든 성과는 누구한테 쏠립니까? 자연의 주는 효과는 누구한테 가요? 어디 흩어지지 않지요. 누구한테. 인간이 절대화되는 지위. 직위를 구축하는데 자연의 힘을 다 모으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지요.
그 중에 하나가 아까 그게 뭐냐 하면 국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그 죽으신 이유가 누구를 상대로 해서 죽었습니까? 뭐 귀신 쫓아내다가 죽었습니까. 아니면 오병이어하다가 죽었습니까. 아니지요. 뭘 건드렸어요. 마지막 건드린 게 뭡니까. 선지자는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서 죽는다 하는 것은 성전을 건드린 거예요. 성전.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고, 이스라엘은 그 성전에 하나님이 거기서 만남의 장소로 여기거든요. 이건 제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열왕기상에 나와요. 내가 여기서 만나자. 주의 이름이 있는 곳에서 만나자고 이미 솔로몬 성전 지을 때에 약속했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말씀을 건네받은 인간의 입장에서 기껏 해석하는 것은 그 장소에 가면 우리는 주께서 약속된 주님은 약속하시는 분이니까 약속대로 지킨다. 우리도 약속 지켜야지. 만남의 장소 그 카페에 가자. 성전이라는 카페에.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온 거예요. 그 예루살렘이 불타버리고 예루살렘이 폭파되고 전쟁이 일어나서 무너진다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은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을 안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마저 믿지 못한다면 그럼 뭘 믿어야 돼요? 아, 말씀전체가 예루살렘에 집중되어있는데 그걸 믿어야지요. 그걸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말이지요. 모든 것이 주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 말이지요.
4절에 보세요.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현재 지금 감람산이 예루살렘 바로 앞에 있어요. 500m도 안돼요. 길 따라가면 500m도 안돼요. 길 따라가도. 위치상은 더 가까워요. 예루살렘의 전조, 또는 예루살렘 앞에서 보초서는 산. 감람산에서 일어난 일이 전조가 되어서 그 뒤에 바로 예루살렘에 일이 터지게 되어있어요. 왜? 그게 서쪽도 아니고 북쪽도 아니고 남쪽도 아니고 동쪽이니까. 주께서 항상 동쪽으로 일하잖아요. 동쪽이니까.
장차 오실 메시아도 성전이 동쪽에서 와요. 에덴의 동쪽이에요. 동쪽.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방향. 그 동쪽에 감람산이 있고 감람산에서 오늘날 유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기 전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기 전에 감람산에서 기도했던 겟세마네 동산이 바로 그 동산입니다. 동산인데 별로 높지 않아요. 리무진으로 버스타고 가면 온 동네 버스타고 돌아다니는데 산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완전히 너무 개발이 잘되어가지고요. 걸어가면 약간 힘들고 하여튼 올리브 나무 있고 그게 감람산이에요. 그 감람산 자연을 이렇게 인간 위주로 해석을 했다 이 말이지요. 하고, 이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지요. 예루살렘의 만남 하니까 예루살렘은 아무 힘들지만 결국은 지켜줄 것이라는 그러한 약속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약속에 대해서도 1번 인간이 생각하는 약속, 2번 주님이 생각하는 약속 이게 대립이 돼요. 다르다는 정도가 아니에요. 대립이 됩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약속은 다방에서 만나자는 약속 이거 아닙니다. 그럼 뭐냐, 관점정리, 다 이루었다는 입장에서 주님의 관점으로 약속을 이해해야 돼요. 그 끊어진 계곡을 경유해서 주님의 관점으로 나아가야 될 가는 자야라만 주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감람산에 서시지요. 4절에. 전쟁하시면서 서십니다. 서면 이 감람산이 어떻게 됩니까? 갈라져요. 감람산이 갈라집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감람산이 애초부터 감람산은 갈라졌다고 봐야 돼요. 주님이 오셔서 갈라지게 한 게 아니고 주님이 오심으로서 애초부터 갈라졌음이 비로소 파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니까 이미 이 세상은 to부정사, 전쟁해서 망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망했었어요.
전쟁은 확인차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의사가 있는 병원에 환자들이 올 때 이건 아주 어려운 문제 아닌데 좀 쉬운 문제인데 답변해 보세요. 환자가 병원에 와서 아픕니까? 오기 전에 아파요? 오기 전에 부터 아프지요. 그럼 의사는 왜 있는 거예요? 언제부터 아팠습니까? 묻지요. 우리 병원 올 때 아팠습니까? 이렇게 안 묻잖아요. 그건 병을 고치는 곳이 아니고 병을 만들어주는 곳이지요. 그것처럼 주께서 의사로 이 땅에 왔다는 말은 우리가 어디가 아픈지를 우리가 관점정리가 안되어서 우리가 몰라요.
제가 주일날 설교에 이 표현했는데, 여러분이 놓치기 쉬운데 간단히 했는데, 이런 이야기했지요. 쉰밥. 밥해가지고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밥이 쉬잖아요. 쉰밥 이 세상을 확대시키면 이 세상은 곰팡이 배양지. 곰팡이 배양접시. 그냥 가만히 놔두면 하나님께서 자연을 앞장세워서 인간 세계에 전쟁을 벌려가지고 처벌할 때 그 처벌이 뭐냐, 그 처벌이 물질화가 되는 게 처벌이고,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물질화 된 것. 저 사람 늙었다. 흙 됐다. 이걸 사람들은 뭐냐, 죽음이라고 이해하는 거예요.
앞에 이 과정, 처벌이라는 과정을 빼버리고, 저 사람 죽었네. 어! 죽었구나. 이리되는 거예요. 선생님, 숨을 쉬지 않아요. 그것은 처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의사 선생님은 없습니다. 예, 가만히 있어봅시다. 심장? 심장박동 아이고~ 삐비빅 하다가 좍~~ 호흡기 보다가 쫙 되거든요. 간호사, 지금 몇 시? 옳지. 오늘부로 아무개는 고인이 되셨습니다. 적어.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 때, 여러분 손으로 그 날짜를 여러분들이 고인 된 수준으로 적어놓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1992년도 5월 4일에 나는 이미 죽었다. 이게 갈라디아서 2장20절 아닙니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간호사 받아 적어. 관점이 고인의 관점으로 바뀐 거예요. 살아있는 자의 관점이 아니고 더 살겠다는 관점이 아니고 최후를 넘어서 죽음의 뒷모습, 인간이 생각하는 그 엉터리 같은 죽음의 뒷모습을 진짜 죽음의 관점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 십자가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발생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주님의 영이 와야 부활의 영이 와야 그게 가능한 거예요. 처벌은 뭐냐, 이 예루살렘 인간 자체를 처벌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벌하는 겁니다. 인간이 죽는 자연 죽음은 죽음이 아니에요. 처벌로서 죽어야 그게 죽음이에요. 그 처벌을 인간은 죽으면서도 처벌인 줄을 몰라요. 그런데 같이 뛰어든 사라지는 매개자, 중보자 오셔서 인간세계에 와가지고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창으로 찔러 죽었다. 저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은 다른 이야기를 해요. 아버지여, 하나님이여,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그것이 진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처음으로 선악과 규칙이 바뀌어야 되겠지요. 저것을 먹는 날에는 니가 정녕 나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다. 버림받을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할 때, 참 이런 게 어려운 이야기에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할 때 아직 따먹기 전의 아담입니다. 그 아담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왜?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있으니까. 하나님의 의미의 자리에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걸 따먹는 날에는 버림받았다는 말은 하나님끼리 살 수 있는 그 의미의 공간에서 배척받은 거예요. 제거된 거예요. 추방된 거예요. 그래서 그 생명나무에서 쫓아내잖아요. 추방돼버린 거예요. 인간의 죽음은 뭐냐, 추방이에요. 추방. 나 니하고 안 살란다. 추방. 나가! 나가! 오늘 제목이 갑자기 바뀌려고 한다. 자꾸. “나가 이~” 같이 할 수 없다. 추방시키는 것.
주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는 것. 요한복음6장. 한 번 볼까요. 너무 충격적이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요번 겨울수련회는 하게 된다면 요한복음 하겠습니다. 6장65절,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자, 관점정리. 예수님의 관점으로 볼 때에 천국은 아무도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뭡니까? 이 땅에서 밥 먹고 사는 게 사랑이 아니고, 돈 벌게 해주는 게 사랑이 아니고, 몸 건강이 사랑이 아니라 올 수 없는 곳. 오도록 허락 맡은 자가 한 명도 없는 가운데서 아버지께서 보낸 자는 예수님과 같이 손잡고 바로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것.
에덴동산에 합류 한다 이리 보면 돼요. 나중에는 에덴동산 없어지지만. 함께 그 의미. 하나님이 천사와 함께 있는 그 의미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은 아버지께서 배후에서 빠짐없이 놓치지 않고 누락 없이, 떠밀어서 집어넣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낸 자만 오도록 관점을, 말하는 관점, 의식을 그런 것으로 그냥 던지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이미 범죄한 인간들은 못 알아듣지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가짜기 때문에 자꾸 진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학이, 교회 목사들이. 자꾸 예수 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자꾸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가짜기 때문에 먹히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그래서 수요일날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아, 나는 교회 가서 목사님 말씀 믿게 되었다.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 나는 드디어 신자 되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서 일부러 개인면담 시간에 들어갑니다. “신자입니까?” “신자입니다.” “신자라면 나를 위해서 무엇까지 잃을 수 있습니까?”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이해 못한 거예요. 예수 믿고 피 믿는다는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거예요. 자기를 안 잃어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건질 건 건지고 챙길 건 다 챙기고자 교회 나온 겁니다.
자신의 목숨 값이 주님의 목숨 값과 족히 비교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내 귀한 목숨 지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희생했다고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엄청난 오해지요. 내 거 잃기 싫고 내 거 지키기 위해서. 왜? 마지막 최후의 인간의 자존감이니까. 자존심이니까요.
14장 5절에 보면 지진이 일어납니다.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지진이라는 것이 그 당시 유다 나라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왜냐 하면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지진이 일어난다. 이건 벌써 조짐이 어떻게 됩니까? 조짐이 벌써 수상하지요. 조짐은 인간세계에 조짐이 그런 징후가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벌써 말씀이 넘겨온 부터는 처음부터 너는 조짐이고 뭐고 할 거 없이 처음부터 너는 마땅히 파괴 당했어. 라는 그런 취지로 서서히 조짐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님은 죽고자 하지만,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안 망하고자 하는데 있어요. 메시아와 주님의 백성이 같이 가야 되는데 메시아는 십자가로 가려하고, 이스라엘은 안 멸망하려고 하니까 멸망한 거예요. 예수님은 십자가로 갔는데 소위, 소위입니다. 자칭해서. 그걸 어려운 말로 해서. 참칭. 거짓으로 칭해서 신자라고 여기는 자들은 십자가 쪽으로 안 가려고 몸부림, 발 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안 가려는 대표적인 행동이 뭐냐, 기도하기, 몸부림이에요. 기도=몸부림=살려다오=살려 주세요=살려주세요. 제발. 이게 기도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들추어진 주님에 의해서 들추어진 버림받은 자의 모습이에요. 악착같아요. 이건 씨감자이니까 이것만큼은 손대지 말아요. 다음에 모종할 거니까 이거 없으면 나는 진짜 절망합니다. 이런 협박, 공갈 비슷하게 주께 하는 게 이게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부산강의 때 기도 어떻게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기도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내부에 계신 주님의 기도가 바깥으로 올라오는 것. 표면화 되는 거예요. 기도지요. 발산되는 거예요. 모든 사건들이 생산되고 이런 사건은 예수님으로부터 응축되고 수렴되고 그 예수님에 의해서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로 살아가는 발산 이게 성도의 일생. 성도의 일생을 쪼개보면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 선악과의 의식, 죽어있는 그 성깔 있잖아요. 그 성깔 주님께서 가셔가지고 주님만 통과할 수 있는 그 중간지를 지나서 생명 가는 이것을 계속해서 수난적으로 반복시키는 이 반복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여자의 일생 아니에요. 성도의 일생. 늘 반복되지요. 늘.
“주여, 이것만큼은 안 됩니다.” 어제치 또 했고, 오늘 되면 또 마찬가지에요. “주여, 이것만은 내 소원대로 해주세요. 빡시게 기도 많이했습니다. 이것만큼은 해주세요.” “놔라.” “안 됩니다. 주여. 이거 깨지면 나는 정말 죽습니다.” “엄살 부리지 말고 놔라.” 주께서는 그것을 예수님 것으로 인수인계 만들어요. 두려워하지 말고 나한테 넘겨라. 이제는 너의 소원이 아니라 나의 구원을 다 이루었음을 위하여 너의 몸을 내가 잠시 이용하고 사용할테니까 알아서 니가 그것을 용납하라. 주께서는 우리의 몸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항상 거수경례하는 헌병 같아요.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매일같이 그래요.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감람산이 깨어졌다는 것. 둘이 합치될 수 없다는 것. 주께서 감람산에 발을 섰는데 감람산이 깨어졌지요. 예수님의 내부 속성이 감람산을 닮은 거예요. 이미 깨어져서 같이 결합될 수 없는 완전히 갈라져 버린 그 갈라져 버린 거기에서 뭐가 나오는가, 8절을 봅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이 말씀을 인간이 개간해서 합니까. 아니에요. 이건 누가 합니까?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예수님만이.
그러면 우리가 실제로 목격해야 되지 않습니까. 목격 못합니다. 왜냐 하면 처벌을 할 때 자연을 통해서 물질화시켜 놓고 처벌해버리거든요. 모든 것이 하나의 물질화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뭐냐, 처벌이 없으면 물질화가 생기지 않고 물질화 생겼다 이 말은 그 물질화로 이해되는 주의 일은 물질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만나할 때, 먹을거리입니다. 드롭프스 어떤 맛있는 과자 같다. 이리 되어있어요. 그러면 만나가 과자입니까. 성경에 만나가 과자가 되어야 되는데 성경에 신명기8장에 보면 만나는 말씀이라고 되어있어요. 물질인데 불구하고 물질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물질에서는 전혀 나올 수 없는 다른 차원, 상이한 다른 세계를 만나를 통해서 나타내버려요.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안 되지요.
나는 생명의 양식이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이 살을 먹고 이 피를 마셔라. 곧 생명의 피요, 생명의 살이다. 이게 제자들에게도 먹히지를 않았어요. 이게 분명히 포도주고 이게 분명히 떡인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인격과 어떻게 일치되는 것을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건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물을 갖다 줬는데 물을 뜨는 순간 갖다 줄때도 물이었어요. 그런데 퍼는 순간 인간이 그 물을 뭔가 떠야 된다는, 떠야 될 필요가 있는, 잔치집에 포도주가 필요하다는 의도를 가지고 뜨는 순간 그건 물이 아니라 뭐가 되느냐, 포도주가 된 거예요. 인간이 개입을 함으로서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몽매하다는 그 요소가 개입될 때 비로소 주님은 자신의 성과, 자신의 취지가 나오고 안목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이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때 그게 바로 의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 점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내가 죄인이 안 되었으면 나는 의인인 것을 확인할 길이 없어요.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고요, 외부적인 안정성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것은 우리의 내부의 말씀의 안정성을 우리 안으로 꽉 채워버린 거예요. 내부의 안정성으로.
그러면 그 내부에 누가 들어왔다는 겁니까? 내부는 내가 관장한다. 아니지요. 내가 관장할 수 없는 주님이 나의 내부의 세계를 이미 장악했다. 점령했다. 전쟁에서 승리자로 계시다. 전쟁의 승리자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외부적인 옛날 살던 방식, 그러니까 장사하고 시장가서 물건 사고 애 키우고, 이런 방식은 하늘나라에서는 다 사라져버립니다. 누구와 더불어서? 새로운 영적 의미를 주셨던 예수님과 더불어서 예수님은 사라지는 매개자거든요. 이 땅에 왔다가 사라져버렸어요. 사라지면서 완성을 한 거죠.
이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남은 자 문제입니다. 방금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기초를 닦았다 생각하고, 제가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열왕기상19장18절을 한 번 찾아봅시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호렙산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계시를 받는 장면이에요. 그 때는 아직 엘리사도 없었을 때에요. 오늘 공부한 거 죽 응용시켜 봅시다. 일단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말씀을 건네지요. 말씀을 건네는데 그 말씀 건네는 그 상황에 대해서, 선지자가 미리 그 상황에 대해서 미리 안다? 모른다? 전혀 몰라요. 몰라야 돼요. 말씀을 건넨 분이 다 이룰 거예요. 이게 선지자가 갖추어야 될 자세이고 선지자가 어떤 이익이 있다면 그것뿐이에요.
나는 도무지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고 실천력도 없음을 본인이 알게 된 게 이익이에요. 나한테 말씀 주신 그 분이 이루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새로운 관점의 약속 관점입니다. 약속은 내가 이루어가는 게 아니고 약속 주신 분에 의해서 그냥 성취하는 하나의 시제가 다 빠져버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이 빠져버린, 그렇게 되리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가 이미 내 속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거기에 보면,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이건 뭐냐 하면 다메섹 아람나라에요. 이웃나라에요. 이웃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계시를 준 겁니다. 그러니까 하사엘은 이웃나라 왕이에요. 예후는 북이스라엘의 왕이고요. 그리고 엘리사는 자기의 제자지요. 엘리야 제자.)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제 묻습니다. 엘리야가 이 계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스라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당연히 바알을 섬겨야 되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세상 역사는요, 반드시 우리의 구원의 요구대로 일하는 게 아니고 반대로 가요. 우리가 구원 받지 않는 상황이 주의 의도에 의해서 필히 찾아와야 되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거기에 걱정하지 말아야 돼요.
자꾸 뭔가 일이 잘 풀린다면 이건 나의 관점이 유지가 된다는 그런 의혹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의혹이 생길 거예요. 매 순간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나는 죽어있고 주님이 살아 있어야 되고 매 순간 내가 활동하면 안 되지요. 죽은 자가 무슨 활동을 해요. 주님이 활동을 해서 오늘도 숟가락 들고 밥이나 먹고 이 자리에 온 거예요. 주님이 활동해서. 주께서는 말씀대로 하고. 우리는 자꾸 오해만 하고. 주님은 말씀대로 하고.
그러니까 무릎을 꿇어야 되겠지요. 꿇어야 되는데 칠천명이라는 것은 이건 엘리야의 아이디어에 이런 게 있습니까? 엘리야는 칠 천명 남기면 속이 안 타요. 전체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아야 돼요. 다. 칠천 명 넘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야가 이 이야기들을 때 자기의 의지, 자기의 기대, 고대, 계획, 목표,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벌써 말씀을 볼 때부터 하여튼 내 자유와 내 선택의지는 벌써 박살났구나! 맘을 이렇게 잡숴야 돼요. 우리가 처벌받아야 마땅한데, 우리가 자꾸 거기다가 잔소리해서 끼어들면 안 되지요.
예를 들면 사형수가 사형받기 전에 5분전인데 사형수한테 집행자가 곧 이제 5분되면 사형되는데 소원이 뭡니까? 따~뜻한 커피 부탁합니다. 커피 만지고 30분이나 걸리는데. 안되지요. 실제 어느 영화에 보니까 옛날 영화인데 지금 50년 전의 영화인데요. 영화를 보니까 사형수가 교수형 당하는 장면이 그대로 나오는데. 그 목사님이 물어요. 마지막 소원이 뭐냐, 마지막 소원이 뭐냐 집단으로 8명을 교수형 시킬 때 마지막 소원은 내 할 말 다 하는 겁니다. 하니까, 그래, 해라. 하고 그 다음 사람 찾아가요. 하든 말든. 다 하고 난 뒤에 스톱! 끝. 죽여버렸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할 말 다해요. 죽을 때까지. 여러분이 살아봐야 50년입니다. 너무 많이 한 거 같다. 살아봐야 백살이잖아요. 우리가 할 소리 다 하게 만들어요. 그거 안 듣습니다. 그거. 이미 모든 것은 다 이루었다에 안에서 처치되는 것이지. 환자들 병원에 가가지고 어디 아픕니까? 여기 아픕니다. 이것만 하면 되는데, 올케가 요번에 미국가가지고..., 쓸데없는 소리. 그냥 가만 듣고. 이빨이나 뽑아. 그거 다 들어주면 힘들어서 근무 못하지요.
칠천명을 남긴다는 것은 엘리야도 궁금해요. 왜 칠천명인지. 로마서 한 번 봅시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신기하지요. 로마서 11장. 11장 보기 전에 9장 봅시다. 9장 27절,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뭐만 구원받는다? 남은 자.
여기서 칠천명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없다는 뜻이 칠천명이에요. 있는 사람 6,999명 한 명 7,000명이 아니고 있는 사람 143999명이 있는 게 아니고 아예 없어요.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로마서11장에 보면 뭐냐 하면 엘리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3절에,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나만 남았다는 거예요. 나만 남았다.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린 거예요. 칠천명 남았다는 계시를 받았던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야가 호렙산에 있을 때에 생각이 뭐다? 이 세상에서 믿는 자 누구밖에 없다? 나만 남았다 할 때에 주님께서 아까 열왕기상 19장에서 칠천명과 대비시키는 거예요. 하나 남았다는 엘리야가 알고 있는 자연의 세계. 칠천명은 엘리야의 죽고 난 뒤의 세계. 이것은 숫자 철천명이 아니고 은혜로 남은 자의 숫자의 총숫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11장6절에 보면,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없는데, 은혜가 있음으로서 은혜 때문에 생겨버린 남은 자. 그 자가 새로운 관점으로 바뀌었어요. 내 관점이 아니고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뀌어버리니까 은혜가 무엇이 은혜인가를 알 게 되었어요.
‘아!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데 다 이루었다함 속에서 나온 은혜가 그 능력이 나로 하여금 선지자처럼 사용케 하시는구나!’ 그래서 5절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없어야 되는데 있을 때에 주님이 죽어서 없는데 주님이 있음을 주의 은혜를 받은 자의 있음을 통해서 암호화되어서 주께서 비밀히 지금도 작동하고 있음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이 비밀로 암호로서 오늘로서 적용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만 건지게 한 작업의 일환으로 오직 주의 성령이 찾아왔사오니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관점에서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십자가만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