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은혜로운 통곡

아빠와 함께 2022. 7. 3. 10:58

안양20220616a슥12장10절(은혜로운 통곡)-이 근호 목사

스가랴12장10절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개역한글)   내가 다윗 가문과 예루살렘 성민들에게 용서를 빌 마음을 품게 하리니 그들은 내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한 일을 외아들이나 맏아들이라도 잃은 듯이 슬퍼하며 곡하리라.(공동번역)  그러나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 곧 그들이 찔러 죽인 그를 바라보고서,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며, 맏아들을 잃고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다.(표준새번역)  내가 다윗의 백성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위에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부어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찔러서 상처를 입은 나를 보고 슬피 울 것이다. 마치 외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 것이며 맏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 것이다.(우리말성경)   And I will pour upon the house of David, and upon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the spirit of grace and of supplications: and they shall look upon me whom they have pierced, and they shall mourn for him, as one mourneth for his only son, and shall be in bitterness for him, as one that is in bitterness for his firstborn.(KJV)  "And I will pour out on the house of David and on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the Spirit of grace and of supplication, so that they will look on Me whom they have pierced; and they will mourn for Him, as one mourns for an only son, and they will weep bitterly over Him, like the bitter weeping over a first-born.(NASB)   

이상하지요. 은총인데.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줬는데 그 은총과 간구는 심령이 제시되고 있는 그 출발점, 그 출발점은 애통입니다. 슬픔이지요. 은혜가 슬픔에서 나온다 이 말이거든요. 은혜가 통곡에서 나온다. 상당히 어떻게 보면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두 개념입니다.

통곡의 특징은 상실에서 와요. 상실. 무슨 상실이냐, 나의 것의 상실이에요. 나의 것의 상실이니까 나의 것은 더 축소하면 곧 나가 되겠지요. 그런데 통곡에서 뭐가 나온다 했지요. 주님의 제대로 된 은혜가 나오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요걸 줄여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를 집중해서 공략한다? 어디를 만난다? 나. 결국 내 문제로 돌아오는 겁니다. 너는 너로 인하여 울어라. 너의 상실로 인하여 울어버려라. 너의 것이 강탈된 것에 의해서 니가 울어라. 너의 것이 모든 것이 없어졌다는 것에 울어라. 그 울음은 곧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내 것을 완전히 도려내는 그 능력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내 것에 내가 도려낼 거덜 낼 마음은 어느 누구한테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1은혜가 나를 가위표 거덜 내는 거예요. 거덜 내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그냥 일반인들의 다수 중에 그냥 다수로 흩어져버립니다. 다수들 중에 다수. 개인이라 할 것도 없어요. ★2다수들 중에 다수가 돼요.

어느 시에 보면 나와요. 박목월시에 나오지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하는 시가 생각나지요. 산산히 부서진 내 이름이여. 이름이 부서지니까 이건 어떻게 되느냐, 흩어지는 겁니다. 흩어지겠지요. 흩어져버리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건 혼돈이 되는 겁니다. 혼돈. 내가 내 자신에게 혼란스러워요. 혼란스러울 때는 사람들이 주로 오윤영 박사를 많이 찾아요. 가정에 문제가 혼란스러울 때.

그래서 혼돈에서 질서를 찾게 되는데, 지금 이 두 가지를 비교 해야 돼요. 질서를 혼돈스러워 했느냐, 아니면 혼돈을 질서스러워 했느냐,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원래 인간 자체가 주님이 보기에 혼란스러워요. 혼돈스러운 곳에서 자기 질서를 잡는데 무슨 질서를 잡느냐 하면, 나 중심으로 질서를 잡아요.

그런데 이건 내 혼자만 한 게 아니고 다수 중에 다수. 모든 다수들의 물결, 다수들의 넘쳐남들, 더 범람된 다수, 이 세상 전체가. 다수라는 것은 많다는 뜻이에요. 여러 가지라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들이 한 풀장에 이렇게 같이 모여 있다가 연세 많은 다수들은 한 쪽 구석에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96세에 죽은 사람도 있고, 송해는 송해대로 죽고, 동해는 동해대로 죽고, 남해는 남해대로 죽고 전부 다 죽지요.

그리고 그 범벅이 된 다수의 범벅이 된 그 안에서 또 응애하고 애기가 태어나고, 한쪽은 생일잔치한다고, 돌잔치한다고 하고, 한쪽은 태어나고 한쪽은 사라지고 이건 뭐 부대찌개 센 불에 하게 되면 뽀글뽀글 끓잖아요. 한쪽은 죽고, 한쪽은 살고. 이쪽은 돌잔치한다고 웃고 있는데 바로 옆집에는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울고 있고, 요새 할머니 죽었다고 울지는 않습니다만 애고, 애고 폼 잡고 하는 곳 있고, 세상이 각자 자기 나름대로 질서는 잡았지만 정돈된 게 하나도 없어요. 이게 질서가 아니고 무질서의 그 자체. 혼란이 질서를 잡으면서 혼란이 제거되는 게 아니고 혼란이 가중되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학자들은 또는 신학자들은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은 이 혼돈을 하나로 설명하고자 하는 거예요. 하나로 설명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데 설명하는 방식이 다수에요. 또. 니는 니대로 설명해라. 나는 나대로 설명할게. 니가 니 설명에 꼭 복종할 의무는 없잖아. 이런 식으로 서로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그건 니 주관이지. 나는 내 주관 따로 있어. 그래. 니는 그 식대로 살아. 나는 내 식대로 살 거야. 친구야! 그게 아니고 내 말 들어봐라. 이래야 전체가 한 바구니에 모을 수 있잖아. 한 바구니에. 과일도 여러 가지 과일이 있지만 한 바구니에 담아야 이게 정돈되고 정돈돼야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인간을 안정감 속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그러면 상대방이 “안정감을 얻는데 니 방식 말고 내 방식으로 안정감을 얻을 수도 있잖아. 니 왜 그 생각 못해.” 월요일날 소주 먹고, 화요일날 막걸리 먹고, 수요일날 딴 거 먹고. 일주일 내내 저녁에 술 먹는 식으로 나름 안정감을 찾는다. 왜? 니 방식 아니라고 해가지고 니가 나를 지금 무시하나. 그것도 내 방식이지요. 매일같이 술 먹는 방식으로 자기의 정서를 안정화시키는 그것도 평소에 하던 대로 하는 방식이다. 이말이지요.

그래서 혼돈에서 질서를 잡는다는 것은 방금 이야기 들어보면 다수를 일자(一者) 하나로 바꾸려는 시도를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가 먹힐 수 있는 하나입니까. 그 하나가 누구한테는 먹히고 타인한테는 안 먹히겠지요. 자기한테는 먹히겠지요. 왜? 처음부터 그 질서를 질서잡기를 내 편한 쪽으로 질서를 잡아넣었기 때문에 나한테는 적용이 되는데 옆 사람한테는 적용이 안돼요.

아내한테는 적용이 됐는데 적용이 남편한테는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여보, 앞으로 우리 가정 이렇게 살자.” “니나 해! 니나. 너나 잘하세요. 나는 내 방식대로 할 테니까. 왜 사람이 강요를 해. 강요를. 나를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는 게 아니야.” 티박만 대빵 듣고 있지요. 티박만.

그러면 이 다수를 하는데 또 두 종류가 생겨버립니다. 두 종류가 자꾸 분류가 돼요. 다수가 그래요. 일관성 없는 다수. 일관성 있는 다수. 이 일관성 있는 다수는 구성적 다수라고 합니다. 구성적 다수. 일관성 없는 다수는 그냥 실존하는 거예요. 일관성 없는 다수는 실존이고, 일관성 있는 다수는 존재인데요. 예를 들어서 버스 서는데 여러 사람이 아주머니하고 애들하고 할아버지하고 이렇게 서 있다. 그러면 길 건너는 사람이 저기 열 사람 서 있네. 할 때 그럼 열 명이 하나입니까? 전혀 모르는 사이지요.

그런데 버스 기다리는데 다섯명의 한 식구가 애들하고 서 있다. 그러면 그냥 다섯명이 아니고 일관성 있는 다수겠지요. 가족으로 구성된 다수가 되는 겁니다. 일관성 없는 다수는 그냥 실존하는 거예요. 돌멩이가 놓여있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교회 교인들도 그래요. 와봤자 이야기도 안 하고 끝까지 있다가 이야기도 안 하고 그냥 예배보고 쓱 가는 사람 실존입니다. 일관성 없어요.

만나가지고 오늘 복음 어땠어? 이렇게 하면 구성적 교회가 되지요. 그러나 어쨌거나 이건 하나의 구성적 다수했지만 일관성 다수의 문제는 여기서 공통점, 공통점을 임시적으로 끄집어내서 임시적으로 구성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다수 자체가 공통점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수는 공통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다수 중에 나가 있어요. 나는 안에서는 내 안에는 전부 다 동일합니다. 그런데 내가 다수 중에 다수에 섞여버리면 결국 그 다수가 내 의견에 내 뜻에 맞출 수 있는 그러한 근거는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주의 사건에 통곡하지요. 상실을 느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어디를 겨냥한다? 나를 겨냥해서 와요. 나를. 왜냐하면 내가 행해봤자 구성적 다수 그것도 그 때 그 때 다수에 해당될 뿐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형태, 색깔, 향기, 꽃다발 만드는데 형태, 색깔, 향기, 가격, 그리고 어느 농원에서 만들었느냐 이런 것들이 하나의 꽃다발을 형성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나는 뭐로 형성됩니까? 나는 동양인이냐, 서양인이냐, 나는 그 중에서도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 키가 얼마냐, 더 분석에 들어가서 나의 DNA 구조는, 내 세포수는, 내 혈액형이 얼마냐, 이러한 여러 가지의 다수의 요소가 우연하게 조립되고 결합된 게 그게 누구라는 말이죠? 나지요. 나 자체가 단일체가 안되고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겁니다.

거기다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신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그러한 성과물도 결합이 돼요. 초등학교 때 1등 했다. 초등학교 때 개근상 탔다. 전국사생대회에 나가서 내가 입상했다. 그런 것들을 조합해서 그게 나를 구성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 볼 때 상대방 여자보고 “나, 중학교 3학년 때 사생대회에서 1등했어요.” 그러면 “아, 나도 미술에 취미가 있는데” 마음 맞아가지고 둘이 결혼했다 칩시다. 결혼하고 난 뒤에 대학교3학년 때 전과가 있다는 거. 전과가 하나 있어가지고 마약해가지고 전과가 있다면 그 사실은 여자가 몰랐지요. 그걸로부터 갈라서게 됐지요.

그리되면 결국 무슨 뜻이에요? 나를 구성하는 요건이 내가 아는 것도 있고, 그리고 내가 모르게 우연적인 것들이 내가 아는 것보다 내가 챙긴 것 보다 더 많이 내 안에 조립돼 있고 결합돼 있는 거예요. 요소로서. 내가 원치 않는 다수의 요소들이 현재의 나를 구성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말대로 크게 쓸게요. ‘권력이 주체를 만든다.’ 나는 권력이 만드는 거예요. 권력이라는 말이 주체하고 너무 어려우면 쉬운 말로 하면 환경이, 내가 살아온 환경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예요.

그 환경은 뭐냐, 다수들의 다수지요. 넘치는 다수. 범람하는 다수. 그 다수 중에 나도 하나의, 아까는 다수 중에 내가 하나라고 했는데, 하나가 아니고 나 자체도 분해해 보면 다수의 요소로 산산히 부서질 요소들이거든요. 다 헤아리다가 못 다 헤아릴 이름이여. 평생을 살면서 내가 누군지 다 마스트 못하고 죽어버리는. 이거 억울해해야 되겠어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죽어버리는 거예요. 내 역량이 어느 정도이며, 나의 장점과 약점도 제대로 파악 못한 상태에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나도 모르면서 그냥 살아온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산 거나 죽은 거나 똑같아요. 살아도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은 산 것의 그냥 연장이고. 애초부터 죽었다가 그냥 때 되면 죽는 거예요.

점을 영 차원이라 하고, 선을 1차원이라 하거든요. 그렇지요. 점을 영 차원, 제로차원이라 하고, 선을 1차원, 선이 모이면 면적이 되니까 이걸 2차원이라고 합니다. 그럼 1차원 선에서 영 차원은 어디 있는가, 끝에 있지요. 선의 단면도가 점이 되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1차원과 영차원이 동일한 거예요. 차원을 따져서 굉장히 복잡성을 유지했지만 복잡성은 전부 다 단순성으로 다시 회귀되고 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라지는 거예요.

애곡한다고요? 통곡한다고요? 운다고요? 그건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의 최종점입니다. 인간은 나라는 것, 나라는 다수에서 인간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울음의 원천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내 것으로부터 탈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는 겁니다. 그럼 웃는 건 뭐냐, 그건 착각이죠. 잠시 혼돈이 온 거예요. 뭐 일이 잘된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우는 것이 기본이에요.

지금 스가랴12장10절은 바로 인간에게는 마땅히 울어야 된다는 겁니다. 망해야 되고 슬퍼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세례지요. 불세례. 불과 영원히 만나야 될. 불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존재. 그러한 대상. 불세례는 그 대상이 차지하는데 그 대상이 뭐냐, 인간이에요. 인간과 악마를 불 질러 버리는 태워버리는 소실되지 않도록 태워버려서 영원히 고통을 주는 그 저주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전에 나로부터 탈출해야지요. 마치 우주선이 캡슐 안에서, 우주선이 아니고 제트비행기가 전투기 비행사가 전투기가 엔진이 꺼져서 불붙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레바를 잡아당겨가지고 공중탈출 해야 돼요. 정들었지만 탈출해야지요. 이건 뭐냐 하면 환경으로부터 탈출해야 되는 겁니다.

내가 알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준비한 것은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 예수님이 만들었던 시간과 공간속으로 이동시키는 그 작업을 주의 영이 와서 심령, 주님의 영이 와서 해주시는 거예요.

그럼 주님의 영이 온다는, 주님의 영은 뭐냐, 주님께서 몸소 체험을 했어요. 사람의 몸으로 왔다는 것은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아픔과 어떤 모순 속에 살아있는가, 그 모순의 세계에 나오라고 외친 게 아니고 친절에 친절을 더하셔서 나오라고 외친 게 아니고 주님이 데려가는 방식을 사용해요.

불속에 있는 애 보고 “나와라. 뜨거워. 빨리 뛰어!” 애가 걷지도 못하는 애가 우애 뜁니까. 뛰고 싶지요. 아주 걸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뜁니까. 안되겠다. 내가 가야겠다. 부모가 뛰어들 듯이 주님께서 아예 우리가 걸음마 수준인 것을 아시고 우리가 스스로 불의 세례에서 불세례, 불 세계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을 아시고, 지옥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을 아시고, 직접 지옥까지 찾아와서 극한 친절을 베푸시는 겁니다.

그래야 이웃이라 할 수 있어요. 그게 선한 사마리아 비유잖아요. 이웃은 누구냐, 자비를 베푸는 자에요. “야, 강도 만난 사람아, 빨리 일어나라니까. 엄살 부리지 말고.” 이게 안 되지요. “친히 내가 돌봐줄게. 단 너는 강도 만난 자가 되어야 돼.” 스스로 자아에서 못 벗어나오고 허우적대는 그러한 장애자 그 모순 된 자 그걸 우리는 평생 살아야 됩니다. 그걸 부상강의에서인가 그걸 뭐라고 했는가 하면 의인이면서도 죄인 연기를 하는 거예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재미있겠지요.

이미 합격했는데 서울대학 합격했는데 떨어진 흉내를 내는 거예요. 아휴, 두 문제 맞췄으면 되는 건데. 이미 합격은 했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떨어진 코스프레를 하는 거예요. 이미 천국에 합격했기 때문에 지옥 갈 행위만 하는 거예요. 즐겁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지옥가지. 호호호. 이런 식으로. 주여, 어떻게 하면 지옥갈 수 있습니까. ㅎㅎㅎ 제발 ㅠㅠㅠ 좀 하지 말고요. ㅎㅎㅎ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 답이에요. 이미 답을 얻었기 때문에 이젠 충분히 망하는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통곡하는 척하시기 바랍니다. 심각한 척하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심각한 일은 없어요. 그러나 심각한 척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날 거예요. 주님! 이 타이밍이 심각해야 되지요? 타이밍이. 주님과 인간의 만남은 연이은 통곡에서만 만납니다. 그게 은혜이기 때문에.

이 심령이 이 통곡하는 심령이 누구 심령이냐, 바로 주님의 심령, 주님의 심령이 바로 우리의 심령이 돼요. 왜냐하면 이게 주님의 심령이 성령이 우리의 통곡을 미리 같이 맛본 그 맛본 통곡의 심령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때문에 탄식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울게도 하시고 때로는 웃게도 하시고 우리를 불속에서 다독거려주시고 데리고 나옵니다.

그 방향이 뭐냐, 방향이 누군가 이 자리를 탈출하신 분이 계시는 그 십자가가 그 분이 크게 느껴지는 쪽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불에 탄 거슬린 우리를 뽑아내주지요. 우리는 뭐 온 천지가 모순덩이고 지저분하고 더럽고요. 자기가 자기 완벽을 구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무릇 28가지 영양제를 복용하는 것처럼 에스더처럼. 영양제가 한달에 이백만원이 넘도록. 영양제를 그렇게 지가 지를 살려보겠다고 애쓰는 그 모습을 우리로 하여금 수시로 하게 만들어요. 그게 우리의 한계니까요.

그렇게 되게 되면 어느새 이 다수 중에 다수. 다수들의 다수에서 하나 쪽으로 뽑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다수에서는 빠져나가지를 못하지요. 그러면 다수에서 다수는 못 나온다 했지요. 왜냐하면 내 중심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내 중심이 있는 이상은 내가 아무리 “여러분, 제 말 들어보세요. 이리야 전체가 하나가 됩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니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 따로 있어.” 이러면 이야기는 끝나는 문제에요. “니 인생 니가 살고 내 인생 내가 이리 살게.” 그런데 여기 내 중심이 빈자리에 빈자리를 공백이라 합니다. 내 중심이 통곡을 통해서 그 순간 내 중심은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도려냄을 당한 거예요.

자, 통곡은 아까 처음에 했지요. 통곡은 뭐라고 했습니까? 상실입니다. 비행기 타고 가는데 갑자기 비행기 바닥에 화물도 실어 넣는데 화물칸에 갑자기 중간에 뭔가 잘못돼가지고 나사가 빠져가지고 동그랗게 떨어져 나갔다면 그 바닥 하나가 떠나갔다면 그럼 그 화물칸에 안에 뭐가 있어요? 빈자리가 있지요. 이 말 자체가 모순돼요. 빈자리가 있다가 되면 곤란하지요. 그냥 합쳐서 빈자리 있다 하지 말고, 그냥 뻥 뚫렸다. 이걸 무라고 하는 거예요. 무(無). 없음이에요.

그러니까 나에게서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내가 없는 자리가 나한테 발생되는 거예요. 내가 없는 자리가. 그리고 그동안 나를 질서 잡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놓은 그 모든 것들이 뻥 뚫린 자리에서 이렇게 쏟아지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인도함을 받으면서. ‘참, 이거 내 일 아니잖아. 주의 일이잖아. 아이구, 내 자식 아니잖아. 주의 자식이잖아. 어이구 내 남편 아니잖아. 주의 남편이잖아. 이거 내 거 아니잖아. 주의 것이잖아.’ 자꾸 내 것이 쓸려서 빠져나가버려요.

그럼 나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내 게 없어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을 여러 가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만 그 표현 중에 간단하게 표현 하는 방법 중에 이게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는 특징은 이게 바로 불신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불신자들의 특징은 ‘자기 정화 장치가 깨졌다.’ 자기 정화 장치가 깨졌어요. 자기 정화 장치. 인간은 자기가 계속해서 개선과 발전을 시도합니다. 정화하는 거예요. 왜 사람이 정화하느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이유가 뭐냐 딱 하나에요. 발전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인간 차원에서 신의 차원으로 발전을 시도하는 거예요. 그 선악과 따먹고 싶다 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간격과 결핍을 마저 채우겠다고 개선의 노력을 하는 거예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이걸 시도하는 겁니다. 시도하려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선하게 되면 내 뜻대로 발전이 가능하고 내가 만약에 악을 전하면 퇴보된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이게 꽉 원력으로 박혀버렸어요.

그래서 혼돈에서 질서가 뭐냐 하면 바로 권력이라는 겁니다. 어떤 권력? 선한 권력. 선한 능력. 그 능력이 지금의 나를 더 낫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이러한 내 희망을 포기 못한다. 그럼 뭐가 돼요? 상실이 없지요. 자기 자아 내부에 뻥 뚫
리지 않았어요. 사람이 뻥 뚫려야 바람이 들어와 시원합니다. 그런데 꽉 막히니까 더러운 냄새만 밀폐된 자아 안에 더러운 기체가 가득 차 있는 거예요.

방귀도 뀌고 트림도 하고 지저분한 가스는 다 끌어 모아 놓고 그걸 자체적으로 쓰레기통을 마련해 놓고 자체 정화를 하는데 그 쓰레기통이 쓰레기에요. 쓰레기통 자체가 쓰레기에요. 나중에는 쓰레기통 한 개 가지고는 안 되니까 두 개, 세 개, 네 개까지 다섯 계속해서 쓰레기통을 증가시키는 겁니다.

그건 뭐냐, 도대체 안 망하겠다는 거예요. 안 망하겠다고 하니까 점점 더 이게 사태가 심각해지는 거예요. 쓰레기통을 자꾸 설치하니까 중량감이 늘어나는 겁니다. 75, 78, 80, 90 막 넘어가시는 거 경험하셨지요. 지금 4Kg 뺐겠지만, 아~ 계속 쪄보세요. 심각합니다. 살 찐 사람 90넘어보세요. 여기서 무게 얘기하면 안 되겠다. 나 예상도 못했다.

다수에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방법이 없어요. 신을 믿는다 해도 나를 위한 신이에요. 전부를 한분으로 뽑는 신을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다수에서는 나가 이미 하나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신은 나의 그저 보조지요. 시다바리지요. 역시 내가 신이에요. 그리고 이 범주 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신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정화장치를 하는 거예요. 소위 종교, 교회 다니기, 내가 깨끗하게 하는데 그게 환기가 안돼요. 창문이 있어야 환기가 되는데 온 사방이 꽉 밀폐되어있는데 환기가 되겠어요? 내가 토한 걸 내가 먹고. 아이고야! 죄송합니다. 내가 회개기도 해놓고 회개했다고 지 자랑질하고. 이게 정화가 됩니까? 지가 토한 것을 지가 섭취하는데 그게 무슨 정화에요. 말이 안 되지요.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해결책이 뭐냐, 상실이라고 했는데 그걸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창조’지요. 크게 쓸게요. 창조. 이 땅에 오신 주님이 구원자만 되는 게 아니고 구원을 할 때 자신의 창조 기술을 삽입해서 구원을 해버려요. 그리고 우리한테 이야기합니다. “너를 잊어라.” 왜 잊어야 되는가, 옛것이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술은 안 잡숴도 그 정도는 알지요.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부대에 새 부대만이 새롭게 창조를 담아낼 수 있는 포대기로서 주께서 우리를 뽑아내서 차출하신 거예요.

어제 수요일 차출 이야기했잖아요. 뽑아내는 것. 뽑아내서 새로운 창조를 우리라는 포대기에 담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동적으로 내 것 있잖아요. 옛 것. 내 것은 밑에 있는 바닥난 공백, 뻥하고 뚫린 구멍으로 그것은 쏟아버려야지요. 그게 하루입니다. 그 다음날 되면 어제의 구성된 내가 또 하나의 폐기물이 돼요. 그 날 구멍에 대해서 빨리 나는 없애버리는 식으로 주께서는 우리 안에서 일을 하셔요.

그러니 주의 일은 하루치 산 나를 그날 저녁으로 소멸시키는 일이 주의 일입니다. 어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그걸 생각해볼 때 이렇게 내가 나를 위해서 매일같이 목숨이 유지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건 내가 살고 싶다는 것은 내 고집이지 나만의 고집이거든요.

다른 사람이나 앞집이나 옆집 아저씨에게 “아저씨, 혹시 저를 살리셨습니까?” 물어보면 답변 안합니다. 살고 싶다는 것은 내 뜻이지만 뭐든지 내 뜻대로 된 적이 있어요? 없지요. 그렇다면 내가 사는 것은 내 뜻이 아닌데 왜 삽니까? 이 근원적인 질문을 한 번 해보셔야 돼요.

내 뜻은 살고 싶지만, 첫째는 1번, 내 뜻은 살고 싶다. 2번, 내 뜻은 된 적이 없다. 3번, 그렇다면 내가 왜 사는가, 왜 사는가, 그게 창조주가 옛날에만 창조주가 아니라 지금도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자기 창조를 발휘하셔서 자기 창조를 옛포대기에는 우리 같은 여기에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우리 육신은 옛 부대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광야의 만나처럼 매일같이 새로운 음식을 먹게 되게 되면 그 다음 우리의 몸도 그 만나의 새로운 몸의 의미를 유지시켜 주는 하나의 술독, 포도주를 담는 독처럼 새로운 독으로 주께서는 새로운 독이 되라고 하루치를 주신 겁니다.

누가 한 번 마태복음6장34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참새라고 생각합시다. 그리고 들에 핀 꽃이라 생각합시다. 들의 백합화. 그렇다면 들의 백합화가 내일을 걱정합니까. 아니지요. 참새가 내일 걱정합니까. 아니지요. 불쏘시개 될 수밖에 없는 그 들풀도 오늘 주께서는 이게 제 말이 아니고 3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오늘은 하나님이 충실하게 지키는 이유가 하나님의 자기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의 창조물이 아니고 주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 가운데서 해당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의 아픈 심령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냥 내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이용해먹을 생각만 한 사람이 제자들이었어요.

지금 말씀은 이렇게 해도 말씀을 깨달은 성령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부활의 영이 왔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을 그제야 아는 거예요. 내 안에 주님 계셨구나! 하는. 내 안에 주님 계시는 방식으로 나를 죽을 때까지 계속 이끌고 가시는구나! 라는 사실. 내 일을 버리고, 버리는 동시에 주님의 일을 내 일에 채우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주의 일이에요.

내가 창조주고 내가 창조하는 방식으로 너를 구원했다. 그걸 증거하고 그걸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친히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사용하려면 우리는 바로 은혜를 알아야 되고 그 은혜는 내 것에, 옛 것, 내 중심, 잘난체하는 것, 이것에 대해서 은혜가 공격을 하고 공격한 그 만남의 장소에서 우리는 애곡하고 통곡할 수밖에 없어요.

그 귀한 내 것. 그 내 것이 상실하니까요. 우리는 평소에 주님의 영이 오기 전까지는 내 것을 어떻게 개선하고 키워서 내 것을 천국 집어넣으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그쪽에 집중되어있었어요. 남이 뭐고 치우고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그 것. 그 것 뿐이었는데 거기다가 러시아 미사일처럼 은혜가 날아와서 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 그게 나오지요.

그들이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해서 애통하듯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독자를 위해서 애통하듯. 자, 이제 성경의 난해한 구절에 드디어 도달했습니다. 정말 난해한 구절이에요. 이 난해한 구절 해석하기 어려운데, 다른 것도 해석하기 어렵지만, 참 불가능한 이 해석을 위해서 제가 이 창조라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신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잔혹하게 죽였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들을 죽였으니까 여기에 아버지의 아픔이 들어가 있고, 아들의 아픔도 있고, 성령의 아픔도 이 아들의 죽음에다가 다 들어있어요.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니 손으로 죽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장차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바칠 때 그 심정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전이시키는 것과 동일합니다.

어떤 강도가 와서 죽이는 게 아니고 니 손으로 내 아들을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잡는 거예요.분명히 예수님 세례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할 때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하시는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죽이신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해 본적이 없을 겁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의 생각은 이래요. 여러분, 모세가 홍해 나올 때 자기가 약속의 땅 못 들어가는 걸 미리 알았습니까? 몰랐지요. 모세가 못 들어감으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그 사실. 자기 하나님의 백성이. 참 신기하지요. 인간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못 들어가도 그분은 들어갈 만한 분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직접 하나님과 직접 만난 유일한 분이고. 그리고 그동안 꾸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대행자고. 그리고 그 분이 없는 이스라엘, 모세가 없는 이스라엘은 상상도 못하거든요. 모세 덕분에 우리가 들어갔다. 그런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은 했습니다. 바로 그 생각을 인간들이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여 버린 거예요. 하나님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았다, 라는 생각을 인간들이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구원받은 그 하나님을 죽여 버린 겁니다.

이건 뭐 하나님의 심술이 아니고요, 진리입니다. 진리. 엄마가 선반에 맛있는 케이크를 올려놓고 출타했을 때, 학교 마치고 온 애가 그 케이크가 있는 걸 발견하고 케이크 지가 키가 안 되니까 의자해서 안되니까 옆에 보면 가구가 있어가지고 가구 서랍을 열고 그 가구 서랍을 계단으로 삼아서, 가구가 높으니까 케이크를 건지기 위해서 그 가구에 발을 딛는 순간 그 이케아 가구로 넘어져 죽은 사람이 애들이 한 두명이 아니에요. 이케아 사고요. 조립식에 넘어져가지고 애들이 죽은 게 한 두 건이 아닙니다. 그 이케아 사고가 왜 났을까요. 높은데 기어올라가다가 넘어진 거예요.

그 애가 케이크 탐을 내면서 애가 자기 부인이 됩니까? 나는 안 먹어도 돼! 나는 먹을 가치도 없어. 이럽니까? 그럴 거 같으면 애초에 올라가지도 않지요. 인간의 종교라는 게 뭐예요? 누구를 위한 거예요? 멀쩡한 살아있는 자기를 위해서 더 살기 위해서 더 온전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 종교라는 걸 갖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의지하고 딛는 그 분이 딛는 순간 내 쪽으로 넘어와서 같이 죽자고 이케아 가구처럼 나를 덮쳐버리면 서럽에 얼굴을 바치고 덮쳐버리면 결국은 성공을 못했잖아요. 내 시도가 내 구원시도가 성공을 못하지요. 그래서 구원 실패하라고 교회 다니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 믿게 하신 겁니다.

우리는 그 실패를 통해서 애통해하지요. 그게 은혜에요. 어디 감이 옛 술이 옛 부대에 담아서 새 술 행세하려고. 덮쳐버린 겁니다. 뭐 금식한다. 뭐한다. 뭐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시도한 우리에게 덮쳐서 구원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역할이었습니다.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낙타가 바늘구멍에 못 들어간다. 주님이 알아서 바늘구멍 되게 하신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모든 인간을 낙타로 만들어버리기 위해서는 주님 자신이 바늘구멍 되신 거예요. 아무도 갈 수 없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습니다. 바로 그거다 말이죠. 바로 그거에요. 창세기3장24절,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그 취지를 살려줘야 그 취지를 유지해 줘야 악마가 그 뒤에 입을 다물어요. 악마는 고소하는 자이기 때문에. “제 천국가면 안됩니다. 정당하게 고소하거든요.” 악마의 입을 다무는 방법은 “그래, 니 뜻대로 죽여버렸다. 됐냐! 이제. 악마야.” 악마는 자기도 못 들어가거든요.

못 들어가는 감 찔러나 본다고 지도 못 들어가고, 인간을 유혹해가지고 인간도 못 들어가게 만들고 악마는 게임 끝났다 본 거예요. 그런데 악마가 몰랐던 게 있었습니다. 뭐냐, 하나님을 사람 만들어서 마지막 아담 만들 줄은 계산을 못한 겁니다. 나중에 마지막 아담 오니까 악마가 악을 쓰면서 유혹해서 아버지를 시험하고 아버지를 의심하도록 그렇게 광야에서 의심을 했던 거예요.

옛날 아담, 옛 부대입니다. 옛 포도주지요. 그런데 마지막 아담. 새 포도주고, 그 새 포도주가 창조를 했어요. 뭘 창조를 했는가, 새 부대를 창조했습니다. 그 창조한 거 그 교체하는 작업에서 하나님은 가차 없이 아들을 죽였고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가 죽는 거 보고 애곡하고 슬퍼하는 거 이게 바로 은혜입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20616b슥12장10절(은혜로운 통곡)-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그 분이 사라졌어요. 왜? 십자가에서 사라졌거든요. 무덤에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제자들 베드로를 입장세운 제자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황당한 겁니다. 만남과 만남이 되어야 되는데 구원하러 오신 그 중도자가 날아가 버렸으니까요.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과 똑같이 된 거예요. 허망한 거예요. 도대체 그동안 내가 누구를 따라왔는지. 누구를 따랐고, 누구의 말을 들었고, 무슨 낙을 보겠다고 일가친척 버리고 내가 인생을 이렇게 엉뚱한 길로 왔는가, 왜냐하면 당사자가 계속 살아있어야 되는데 도중에 날아가 없어졌잖아요.

그것도 어디 실종 됐으면 찾을 길이나 있지 죽어버렸어요. ‘진리란 주체 없이 등장한다.’ 이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나를 위한 진리가 없어요. 나를 위한 진리는 없어요. 진리와 우리는 너무나 비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는 비진리를 만나지 않습니다. 그 원칙이 유지되어야 돼요. 그 원칙이. 제자들이 비진리이기 때문에 진리쪽에서 사라져버린 거예요. 베드로가 따라가겠다해도 와도 소용없어요. 오지 마라. 와도 소용없어요.

만약에 베드로가 카메라를 갖고 있다면,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면 주님 가신 길 찍어드릴까요. 하면 예수님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찍지 마라.” 했을 거예요. 찍지 마라. 항상 지 언니하고 싸우다가 찍는 그 아버지가 보고 찍지 말라고 했던 그 유튜브가 유명한 게 있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뒤를 찍어봐야 찍는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어서 내 시선으로 관찰하겠다는 뜻이잖아요. 그런 이상은 진리와 만나지 않습니다. 진리는 주체 없이 등장해요. 이 주체 없이 등장하는 진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사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건이 존재에 개입하게 되면, 사건이 존재와 만나면 발생되는 시공간은 이게 뭐냐 하면 종말입니다. 세상 끝날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건을 감당 못하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사건을 뭘로 전환시키느냐 하면 역사로 전환시켜요. 역사로 전환시킵니다. 역사는 다수들의 범람이에요. 그냥 그렇고 그런 사건들이 있었다고 여러 가지 사건들 중에 한 사건으로 툭 거기다가 건져놓는 거예요. 저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습니다만 영화 같은데 보니까 은행에 비밀금고에 보면 서랍들이 있답니다.

소위 귀금속이나 그런 것들을 집에 놓으면 위험하니까 따로 은행에다가 보관료를 주고 거기에 보관하는 모양이에요. 다들 은행에 귀금속들 있잖아요. 예수님의 사건 역사라는 보관함에 그 한 구석에 있어요. 예수라는 분이 왔다가 까불다가 죽었다는. 그런데 일선에 의하면 부활했다는 일설이 있다. 뒤에는 단서가 있지만. 가로 열고 믿지는 않지만. 가로닫고. 믿지는 않지만 썰에 풍문에 그런 전설에는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지만 그건 비과학적이라서 우리에서는 삑(X)! 그건 발언해서는 안 되는 내용으로 처리해버리지요.

어느 초등학교 어느 교과서에 예수님의 부활을 가르칩니까? 안 가르쳐주지요. 그래서 이 다수들의 범람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건 “어이, 쫄병 저 구석에 있어!” 새로운 역사에 재료 하나 더 첨가된 것 뿐이지 사건은 아닌 거예요. 한때 사건이었지만 역사라는 큰 강물에 하나의 물방울로 살짝 더 추가될 뿐이지요. 그래서 인간 세계는 집단적으로 한목소리를 냅니다.

‘한목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뭐냐, “창조는 없다.” 모든 인간의 의식은 창조는 없어요. 시작이 없다는 말은 뭐도 없다? 끝이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시작이 없고, 끝이 없고, 그냥 네추럴 자연 그 자체가 신이요,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무한히 흘러가는 강물일 뿐이다. 끝. 이게 바로 인간들의 기존의 시간과 공간개념입니다.

로케트 올려가지고 달에 가든 뭘 가든 우주는 무한하다는 거예요. 시작도 무한하고 끝도 무한하니까 결국은 무한의 세계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그냥 출렁일 뿐이지요. 큰 바다에 물결 출렁이듯이 인생이라는 것은 그냥 출렁일 뿐이지요. 어제의 물결이 치면 그게 어제의 물결이 오늘이 될 수 있고 오늘의 물결이 내일이 될 수 있고 그냥 변형돼 나가게 되지면 전혀 추가될 것도 없고 보탤 것도 없고 자기들끼리 인간관계로서 새로운 현상처럼 보이는 것이 일어날 뿐이다. 이게 바로 환경입니다. 나미아미타불 관세염보살. 이게 불교에요. 인연과 인연들의 연속적인 영겁의 세계에 무한반복이에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성철은 성철이고, 영철은 영철이고, 순자는 순자고, 순자일뿐. 뿐이고.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냥 아무 의미 없다. 그냥 일부러 왔는 거 한 잔의 술로 그냥 이 술로 이 밤을 달랩시다. 서울 야곡. 쉬었다 가세요. 한 잔의 술을 하면서. 인생 뭐 있어. 그냥 술 취하면 기분 좋고, 술 깨면 더럽지만. 또 그 다음 하루, 하루 살다가 늙어 죽는 거지 뭐. 인생 뭐 있어. 그래서 돈 벌면 인생은 한방이 되고, 인생 의미 없다는 거예요. 이리 살아도 그만, 저리 살아도 그만. 지 팔 지 흔들면서 살아가는 거 기분 좋을 때는 한 잔하고, 기분 나쁠 때는 두 잔하고. 그게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왜 사냐고 묻지를 마라. 그냥 세상은 흘러 떠나는 거예요. 훨훨훨! 김용임이.

창조가 있어 버리면 종말이 있어요. 왜냐, 창조는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요. 창조주가 목적을 가지고 만든 셈이 되어버려요. 그럼 창조가 없으면 이 세상은 목적이 없어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천문학의 결론은 이거에요. 인간원리에요. 인간원리라는 게 뭐냐 하면 인간원리라는 말 자체는 뭔 뜻인지 몰라요. 좀 더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우주는 왜 있느냐, ‘우주는 왜 있는가?’ 인간이 우주라고 의미를 주기 위해 그 다음에 우주는 뭐 했느냐, 진화. 진화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화에 제일 첨단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우주가 진화해서 결국은 인간을 만들어냈다. 라는 것을 인간이 말하기 위해서 우주는 지금까지 왔다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주의입니까.

그런데 그 인간주의가 이젠 깨질 판이에요. 인간을 지나가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인공지능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못해내는 원리를 인공지능이 발달한 거예요. 3D 프린터 자체를 만들어내는 3D프린터. 이게 인간 속에 있습니다. 이게 복제가 가능하거든요. 3D프린트라 하는 것은 재료만 집어넣어주면 설계되도록 하잖아요. 외부에서 설계도 들어가고 재료 넣어주게 되면 이 3D프린트가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데 3D 자체가 설계도를 작성하고 3D 자체가 재료를 넣어버리면 뭐가 돼요? 그게 신이잖아요. 스스로 3D가 복제하는 거 그게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게 뭐냐, DNA에요.

나라는 것을 과학자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DNA의 복합체라고 이야기하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60조의 세포 하나, 하나마다 DNA가 있으니까요. 세포질 속에도 있고, 미토콘드리아 안에도 있고, DNA가 있으니까 DNA가 스스로 인간이 되도록 그렇게 진화해온 결과물이 인간이다. 지금 학생들 다 그렇게 배우잖아요. 다 그렇게 배우지 않습니까. 이건 뭐냐, 주체에서부터 주체로 복제되는 거예요. 나를 닮은 주체. 1/2, 1/2 자식이지요. 1/8 손자 되는 겁니다. 그거 말고 다른 진리는 없다. 대세지요. 이 세상의 학문의 대세입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모든 걸 설계할 때, 인간은 거기서 개입할 여지는 없고, 배제되어 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어디서 나왔습니까? 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를. 한 순간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창조는 뭐로 되어 있느냐, 사건으로 등장하거든요. 그러니 인간은 사건을 역사라는 창고에 집어넣기 바빠 가지고, 사건이 역사가 되어버리면 사건은 이제 무슨 사건이냐, 지나간 사건이 돼요. 그래서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고 주장하거든요. 천만에 말씀. 과거는 늘 새롭게 해석되는 겁니다.

오늘 생각했던 한 달 전의 이야기와 한 달 전의 의미와 내일 되어가지고 한달 전의 의미가 다른 거예요. 오늘 한 달 전의 일을 보면서 큰일 났어! 큰일 났어! 막 애통하다가 내일 되어가지고 한 달 전에 큰일날뻔했어! 그 일이 안 일어났으면 어쩔뻔 했어! 이 말은 뭐냐 하면 진리 사건이 주체를 배제하고 등장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 그랬잖아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 물으니까 답변을 안 해준 거예요. 왜냐하면 니가 나를 잡아 죽이는 것이 이미 진리에 포함돼있기 때문에 부분은 전체를 몰라요.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어요.

창고 안에 들어있는 사람보고 “창고가 뭡니까?” 묻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답변이, “어허! 답변안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목소리가 왕왕왕 울리겠지요. 그게 창고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니는 니가 원하는 것을 알 자격조차 없는 거예요. 왜? 인간은 내가 살 자격이 나한테는 구비되어있지 않습니다. 이걸 누가 알겠어요. 내가 여기 살아있지만 내가 살아있을 권한이 없이 엉뚱하게 안 살아도 되는데 살아있게 됐다는 것. 그건 창조 말고 다른 해답은 없습니다. 주께서 창조하신 거예요.

주께서 창조했기 때문에 창조주가 살아있는 한 주님의 창조행위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주님의 창조에 해당되어 있습니다. 그 창조는 주체 없이 등장하기 때문에 진리가 되어서 하나의 사건으로 주어지는 거죠. 지금까지는 아주 아주 쉬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건 뭐 그냥 가만히 앉아 계셔도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 문제에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자, 이 말씀. 마태복음2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신약과 구약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이제는 생각을 해줘야 돼요. 그러니 복잡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요. 마태복음2장에 보면, 아기 예수가 태어나서 아기 예수 가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4절에,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지요. 애굽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지금도 애굽의 남쪽에 도시에 가게 되면 아기 예수가 피신한 그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어요. 아기 예수까지 눕혔던 장소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걸어서 세계 끝까지 거기에 보면 나와요. 교회 이름은 기억 못하겠는데 이집트에 있어요. 그러면 베들레헴에서 피신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전에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가족들이 있었잖아요. 그 있는 장소가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하면 16절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지요. 다 죽였을 때에 아주 성경은 냉혹해요. 냉정하고.

이렇게 헤롯이 아기를 죽였을 때에 진리는 주체 없이 등장해요. 사건은 주체를 공격하고, 따라서 말씀 사건, 17절에,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 성경 말씀 하나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애궂은 인간들을 동원시키고 역할들을 동원시킨 거예요. 그리고 왜 동원시키는가, 전부 다 예수님과 그 창조주 구원자와 관련되어서 일어난 사건뿐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세상에 사적인 일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예수님의 고통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심하게 찔림을 당하는 사건 하나 중심이에요. 그러니 이 모든 세상의 해답은 성경 해석은 하나님의 분노, 아들에 대한 그 분노를 최종점으로 해서 해석을 다시 해야 됩니다. 모든 해석을.

아버지의 분노, 그리고 분노의 대상인 아들, 그게 십자가지요. 해석의 시작점이고 마지막점이에요. 그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위해서 인간들은 죄를 저질러야 했고, 심지어 그 분노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되고요,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 이 사실을 알고 그 다음에 성도로 하여금 또는 성령을 제공된 하나님의 여기 10절에 보면,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만 너의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이 찔렸다는 그 사실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것을 그들에게만 알려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그게 사실이에요. 아주 냉혹하지요.

자, 그래서 오늘 스가랴12장10절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이제부터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19장36,37절, 찾아보면서 성경 해석에서 성경 자체가 이 해석을 어떻게 바꾸느냐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여기 그 다른 성경, 스가랴를 말하지요. 뼈가 꺾이지 아니한다는 것은 시편을 말하고요. 37절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이건 아까 스가랴12장10절에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라는 그 성경구절이에요.

도대체 성경 해석을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성경 해석이 불가하지요. 어떻게 저기 있는 걸 뽑아서 여기 뽑아가지고 그걸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 논리적 정당성을 어떻게 인간 쪽에서 마련할 수 있습니까. 스가랴에서 한 대목 뽑고, 시편에서 한 대목 뽑고, 시편51편에서도 뽑고, 또 다른 데서도 뽑고, 뽑는 게 꼭 지 맘대로 같아요. 그러나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게에서는 손님한테 물어보고 하는 거예요. 치즈 어느 거 할까요? 물어보고 여러 가지 중에서 뽑아서 빵 속에 집어넣잖아요.

그런데 성경 해석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뽑아서 섞어버려요. 섞어버리면서 어느 쪽 무엇을 드러내느냐, 십자가를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이 분노하셨고 세상은 망했어! 끝났어! 모든 인간은 구원은 끝났다. 차단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애곡하는 것밖에 없다. 그를 위해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해 통곡한다는 것은 아까 마태복음 보셨지요. 아들을 잃어버렸잖아요. 누가요? 이스라엘이. 라헬이. 제가 어렵다는 말을 이제는 이해하시겠지요.

성경 해석에서 일관되게 뭔가 원칙이 있어야 되는데 원칙을 의도적으로 피해가 버립니다. 신학 자체를 성립을 안 시킵니다. 신학 자체를. 어떻게 논리를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해석하겠다. 이 자체를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왔는지 한 군데를 더 찾아 봐야 돼요. 요한계시록1장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리 되어있거든요. 7절에 보면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라, 이리 되어있다 말이죠.

그렇다면 요한복음19장37절에서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에서 그들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찔렀던 자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찔림을 당한 자는 누구겠어요? 예수님이지요. 그럼 찌른 자는 누굽니까? 로마 군병이죠. 일이 아주 복잡하게 돼버린 겁니다. 성경대로 한다면.

스가랴의 뜻은 이래요. 십자가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잖아요. 달렸고 로마군병이 창을 들고 예수님의 허리를 찌릅니다. 찌르지요. 한 사람, 두 사람, 그다음 여기에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보고 있는 사람들. 보고 있는 사람들 3. 어떤 자가 그를 하나님을 찌른 것을 이들이 보리라. 이들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스가랴12장10절에서는 이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주민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들에게 뭐가 주어진다고요? 은총이 주어지는 거예요. 은총이. 은총이 주어지면서 그들은 뭐한다? 통곡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일들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울었던 사람 없어요. 통곡하는 사람 없습니다. ‘참 안됐다. 역시 정치적인 힘이 실제하는 힘이었어. 예수님이 현실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을 죽인 그 힘이 유일하게 현실이야. 국가적 권력이야. 우리는 벗어나면 안 돼!’ 우리가 여기서 “저 분은 처형시키면 안 된다.” 하면 누가 처형 당합니까? 그 다음 차례는 누굽니까? 본인들이 처형 당하겠지요. 그래서 베드로부터 12제자들은 눈에 안 띄기 위해서 보리라, 가 아닙니다. 보리라가 아니고 안 띄기 위해서 전부 다 도망쳐 버렸어요.

그럼 이 현장에 있는 사람은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존재하지 않지요. 없지요. 그러니 구원될 사람은 없는 거예요. 왜? 말씀에 의하면 제3의 인물, 관찰하는 자, 그걸 쳐다보는 그 때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도 없는데 말씀은 이렇게 있다 말이죠.

그러면 말씀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여기 제3의 자리에 누군가 채워져야 되겠지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요. 하나님은 냉혹하기에 그 말씀을 채우는 자들이 뭐냐,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주민이 되는 겁니다. 천국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채우는가, 갈라디아서2장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거 뭐 워낙 많이 해서 여러분이 외울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거 구라 같잖아요. 십자가 못 박힐 때에 그 현장에 사울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략15년전의 사건인데. 존재하지 않았어요. 없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 현장에 누가 있었다? 사도바울이 있고, 있는 정도가 아니고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에 함께 죽었다고 되어있지요. 그러나 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십자가에는 예수님 십자가에는 예수님만 달렸어요. 2인용 아닙니다. 1인용이에요. 그리고 십자가가 두 개 더 있었지요. 세 개의 십자가에 3인이 달린 거예요. 거기에 사도바울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사도바울은 거기에 자기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사도 자체가 사도의 고백 자체가 주께서는 말씀이 되게 해버린 거예요.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십자가만 말씀이 아니고 십자가를 적용시키기 위해서 벌어져야 될 그 모든 것도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해석, 나의 주체 해석을 비켜가서 뭐가 주어진다? 진리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건 내가 해석해서 알아먹었다는 소리를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냥 사건이 들이닥치는 거예요. 무슨 사건? 무슨 내용? 주님의 분노하심이 나를 저격하는 거예요. 나를 저격하고 내 있는 이 현장을 종말로 만들어버려요. 나로서는 더 이상 나한테 기대할 것이 아예 삭제하도록 없도록 내가 더 이상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도록 만들어버려요. 그게 창조의 위력입니다.

새창조의 위력이에요. 새창조의 위력입니다. 영구없다! 지요. 나 여기 없다! 주님의 것으로 교체하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말씀으로 교체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틀을 만들어 놓고 빈자리를 만들어 놓고, 빈자리는 그 뒤에 성령께서 알아서 집어넣는 거예요. 갖다가 찍어 넣는 거예요. 그걸 채우는 거예요.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본 사람은 누구냐, 나중에 제자들 다 도망쳤지요. 도망쳤는데 그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여기에 여기 빈자리에 도망쳤던 12제자 다시 여기 들어오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이제 주님을 안다는 거예요. 즈그는 도망쳤으면서.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 그렇게 재현을 하신 겁니다. 어떻게? 주님의 당하는 그 아픔의 분노를 아버지의 분노를 온 몸으로 받아낸 그 아픔을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 속에 집어넣으니까 그 도망쳤던 제자들 마음속이 그 당시 십자가 사건의 현장이 되는 겁니다. 사건의 현장, 범죄의 현장, 살인 사건의 그 현장입니다.

그럼 여기서 찌른 자가 누굽니까? 본인들이지요. 로마 군병이 아니고 본인들이 찌른 자가 되지요. 내가 찔러 놓고 내게 찔림을 당하는 주님이 나를 찾아왔다는 것을 함께 구성하게 되는 거예요. 일관성 있는 일자로 혼돈에서 뭐가 잡혔습니까? 질서가 잡힌 거예요. 새 질서에요. 혼돈에서 새로운 질서에요. 말씀의 질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디를 가도 주님이 항상 같이 있다는 것을 그는 고백합니다. 로마에 가는 그 지중해 폭풍 속에서도 두려워 말라. 그 전에부터 이야기했잖아요. 그 전에도 이야기했어요. 니가 반드시 로마에 가야 하리라. 그리고 이들은 풍랑 속에서도 이들은 한 명도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 생명이 몇 명인가, 256명인가, 내가 마음대로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의성 표준말에 이런 말이 있어요. 지끼는 대로 말한다. 표준말입니다. 욕하는 거 아닙니다. 안동 의성. 자꾸 외워도 이제는 나를 못 믿어요. 틀려봐야 기억이 나지요. 실패를 해 봐야. 통곡을 해봐야.

사도행전27장37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었더라” 어쨌든 간에 그들이 예수님께서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예언했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주님이 냉정합니까. 안 잃을 것 같으면 풍랑도 안 일어나야 되게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일으킬 걸 다 일으키고 안 죽는다는 거예요.

이게 해석을 할 때 주체를 비켜서, 내 이익을 비켜서, 내 선악 체계를 비켜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 우리를 도외시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돼요. 이해 안하면 또 어떨 건데? 그래야 창조가 됩니다. 그래야 개선이 아니고 발전이 아니고 진화가 아니고 새 창조가 돼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한 번 봅시다. 아까 보셨잖아요. 요한계시록1장7절에 보면,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서 찌른 자가 누구냐 하면, 모든 세상 전부가 예수님에 대해서 본인들이 찔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그 시점이 온다는 겁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관련되어 있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에게 잃어버린 사건이 마지막 때가 되면 인간들이 기억하기 싶지 않더라도 전부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을 겨냥해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심판을 통해서 한꺼번에 알게 돼버린 겁니다. 이건 지옥 간 그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과 아들에게 분노 준 그 분노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주님의 분노가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지요. 데려감으로서 그 분이 찔림으로 사정없이 아버지로부터 찔림으로서 우리가 평화를 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평화를 누리느냐, 우리가 한 것도 없는데 왜 평화를 누리느냐, 모든 일의 시작과 마무리는 주님께서 완성 시켰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평안으로 찾아들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제공하지요. 이 말은 나에게 인생을 내가 감당하려고 하지 마라. 그럼 감당 안 하면 어떻게 되는가, 감당 안 하면 손 놓고 놀까요? 그 때, 그 때마다 주의 지시가 있습니다.

주의 지시가 있었는지, 내가 지시라고 우기고 있는지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주의 지시가 있으면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 모든 일에 감사가 된다. 감사가 돼요. 주의 지시가 아니면 그 모든 일이 불안, 불안해요. 잘돼야 될 텐데! 주님께서 잘 될 턱이 있나! 팍 치고 올라가요.

결국 생산하는 것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주민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이익은 뭐냐, 그것은 바로 내 언약대로 됐잖아. 봐! 내가 했지. 나의 말씀은 나의 열심히 하자 없이 진행된다는 걸, 진척된다는 걸 이야기했잖아! 너희들가지고 깜짝놀라게 만들어서 바로 분명히 이루어졌잖아.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말을. 그렇게 해서 정립하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입니다. 나를 도외시하고 일방적으로 다 해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에게서는요, 주님이 찾아온 거예요.

자, 그건 신약이고 구약 때는 예루살렘은 계속 예루살렘에서 애통이 있어야 돼요. 그 다음에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이것 또 무슨 말이냐. 요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역대하35장 20절에서 25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이 참에 역대하가 어디에 박혔는지 한 번 구경해 보시기 바랍니다.

역대하35장20절~25절,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아! 어렵지요. 요시야 왕에서 말씀이 나온 것이 아니고 상대편 입에서 나오는, 상대 판에서 하나님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가게 하라 그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그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그가 죽으니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 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런데 이 요시야 왕이 죽기 전에 20절에 다시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요시야가 그동안 나쁜 짓 했습니까? 착한 일 했습니까? 어느 왕도 해내지 못한 거룩하고 착한 그것을 다하고 난 뒤에 요시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해서 그 현장에서 죽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시야를 꼭 죽일 필요까지 있었는가 할 정도로 요시야가 좀 교만해가지고 너무 자기가 하나님 일을 많이 하다보니까 좀 봐줘서, 그러니까 하나님 일을 많이 했다고 너무 까불지 말란 말이야. 이번에는 살려줄게. 다음에는 잘해. 이리 될 수도 될 문제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을 정돈하고 우상을 파괴하고 율법책대로 유월절 지키고, 그야말로 어떤 왕도 못한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바르게 신앙적으로 거룩한 유다나라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놓고는 죽여버려요. 그리고 이 느고라는 인간은 뭐냐 말이지요. 그 당시에 이집트가 아래쪽 지중해에 있다면 갈그미스라 하는 것은 현재 터키에서 내려오는 티그리스, 유브라데 두 강이 있어요. 두 강줄기. 지금 이라크지역이에요. 터키, 이라크, 이란, 쿠웨이트, 아랍연합이리 있지요.

이라크 쪽에 갈그미스가 있어요. 갈그미스가 있는데 이 나라가 바벨론 나라에요. 바벨론 나라. 바벨론 나라인데 이집트가 왕년에 좀 이 동네에서 터주대감 좀 노릇했어요. 여기에 있는 팔레스타인지역이라 하는데 현재 약속의 땅이지요. 가나안 지역. 가나안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이집트를 하나의 요새 미국처럼 큰 형님으로 다 모셨던 거예요. 큰 형님으로. 형님으로 모셨다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항상 바벨론 신성국가거든요. 바벨론 신성국가인데, 여기 바벨론하고 싸웠는데, 원래 전에는 누구냐, 앗수르하고 싸웠어요.

앗수르하고 바벨론하고 싸웠는데 이집트가 앗수르하고 연합을 먹고 바벨론 신성국가가 앗수르 이기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올라온 거예요. 그런데 이 유다왕 요시야는 앗수르한테 얼마나 당했습니까. 예루살렘 빼놓고 다 빼앗겼다고 보면 돼요. 이 요단강 동쪽 다 빼앗겼어요. 전에 왕들이 우상을 장려해가지고 유대국교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나라의 국교가 바알종교에요. 국교가.

그러니까 현재 미국에 모든 사립학교에서 창조론 못 가르치게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진화론만 가르치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앞으로 남자와 여자의 화장실도 따로 하지 말고 공동으로 해야 되고, 아마 샤워실도 공동으로 할 거예요. 앞으로는. 동성애는 뭘 동성애 단어 자체가 성립되면 안돼요. 인간의 소수자의 성소수자의 의견을 보장해야 되는 게 민주주의라고. 복음은 박살내고 인권의 무한성이 오늘날 보편적 종교가 되었어요. 인권의 무한성.

그러나 인권의 무한성이라는 사실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뭐냐, 권력의 무한성 또는 투표의 투표수의 무한성이에요. 이게 전부 다 투표수와 관련되어있습니다. 그 한 표가 무한한 권력을 쥐고 있는 거예요. 정권은 만약에 그들의 수를 그들의 의견을 안 따르면 나중에 다음 차기 대통령이 못되고 정권을 못 잡기 때문에 한 거예요. 네덜란드, 스위스, 유럽 전부 다 동성애 부부를 합법적 부부를 한 거예요.

왜냐하면 부부가 됐을 때 나오는 법적인 국가의 연금의 혜택, 그것을 동성애라도 주자, 하는 그 취지로 바꾼 거예요. 그 동성애를 주자하는 나라가 우크라이나입니다. 동성애를 아주 반대하고 도저히 동성애를 용납하지 않는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 하면, 러시아에요. 체코, 폴란드, 헝가리부터 해서 유럽 전역이 온 학문과 철학과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교육이 전력을 다하여 복음을 질식시키는 쪽입니다. 복음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우리나라의 천주교의 출석율이 8.6%잖아요. 영국의 개신교 출석율이 10명당 한 명이에요. 교회. 개신교는 그래도 교회는 다니잖아요. 그것도 옛날 말이에요. 한 명. 그래서 교회는 지어놨는데 교회를 운영할 운영비가 없어서 그 영국의 천육백 군데나 교회는 천육백이 더 되지요. 천육백군데 이상으로 교회를 매물로 내놓았어요. 왜냐하면 형광등이고 뭐고 청소할 사람, 인력이 돈이 없어서. 교인들이 오지를 않으니까. 이건 독일도 마찬가지에요. 천주교도 마찬가지에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예배당이 이슬람사원으로 나이트클럽으로 바뀌고, 계속 바뀌고 있어요. 카페로 바뀌고. 다 바뀝니다. 그게 안 되면 팔아넘겼어요. 절간으로 팔아넘기고.

그래서 이 요시야 왕이 앗수르한테 너무 당해가지고 바벨론을 치기 위해서 올라오는 이집트, 앗수르 연합군을 이게 중간에서 므깃도가 여기거든요. 여기서 중간에 막아서 너희 연합하지 말라고 나가서 내가 나가서라도 막겠다고 작렬하게 나갔는데 그 느고라는 바로왕 이름이 느고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막지마라. 안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했는데 요시야 왕이 인간적인 한계로서는 적의 입에서 여호와의 말이 나온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이 될 수 없었던 거예요.

요시야가 뭘 모르는가, 유다나라는 망하는 그것이 말씀의 성취인 것을 모르는 거예요. 왜 요시야는 그걸 못 받았을까요? 본인이 자아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겨냥해서 나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인정 못하고, “잘하면 될 거 아닙니까? 말씀대로 살면 되잖아요. 복음대로 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여 내 자리를 좀 손대지 말고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예루살렘을 애통으로 바꾼 겁니다. 어떤 취지에서? 하나님 나도 이 세상에서 같이 울었다. 됐냐? 이게 정답이에요. 이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지만, 이 땅의 환경 이 시공간에서는 이게 애통하는 게 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유일한 하나님의 안목이고 은혜라는 거지요.

그 다음에 12절부터 보게 되면, 온 땅이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 그 다음 나단, 다윗과 나단은 왕족이에요. 왕족. 13절에 나오는 레위와 시몬은 제사장입니다. 왕족도 울고, 제사장도 울고, 그리고 모든 족속도 울고, 전부 다 따로 따로 다 우는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세계가 올 때에 그 접점지점에 우리 주체가 감당 못할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울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울음이 이게 구약의 한계에요. 구약은 시공간 안에서 우는 것이 마지막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울지 마라! 왜? 신랑이 함께 있는데 왜 우느냐. 그러나 신랑을 잃어버렸을 때는 그 때 울어라. 그러나 신랑이 있거든 더 이상 너의 일은 니가 개인적으로 울고 불고 할 너의 일은 신랑이 몽땅 강탈해 갔어요. 다 가져갔습니다. 인수인계 다 가져갔어요.

이제 우리는 주의 일에 합류 당한 거예요. 합류한 겁니다. 그래서 그걸 제가 부산강의에서는 그걸 뭐냐 하면 상과 상다리라고. 접는 접이식있지요. 상과 상다리. 상이 가는 곳에 상다리도 같이 가있지 상만 덜렁 있는 거 어디 있어요? 항상 우리의 일은 없고 다 주의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죽으심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갈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이 땅이 마땅히 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당연함을 저희들은 이제 깨달았사오니 이제는 오히려 그 울음이 벌써 거기서 벗어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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