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폭탄 제거

아빠와 함께 2022. 9. 18. 22:12

폭탄 제거 

2022년 9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4-18

(3: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3: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3: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3:17)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열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팍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

(3:18)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함께 이르리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 인간들과 사전에 의논한 적이 없는 스케줄을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따라서 인간들로서는 이 계획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본인이 생각해놓은 일이라야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부분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관심없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본인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디까지나 인간들 입장에서 남의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천국이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한 천국’은 그 어디에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 천국 건설도 주님께서 인간에게 묻지 않고 주도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작업에 필히 인간과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이 말썽의 소지는 주님께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스케줄이 마태복음 9:16-17에 나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즉 인간과 안과 밖 전부를 다 교체하시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바라는 바는 전면 교체가 아니라 개선하고 향상시키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의견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께서 악마를 통해서 인간을 고소하게 만듭니다. 고소인은 악마가 되고 피고는 인간이 됩니다.

악마를 통해서 인간을 고소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율법대로 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인간이 율법에 의해서 몽땅 다 죄인들이 되므로서 인간들의 이 세상 삶이란 그저 지옥 대기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호출하는대로 지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로서 운명이 확정된 겁니다.

그 누구도 율법의 전부를 지킬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하나님 말씀을 개선적으로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십니다. 오직 전면 교체뿐입니다. 이 전면 교체의 방식으로 이스라엘에 주입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만지면 저주받는 폭탄같은 겁니다. 주변 나라들이 모르는 점은, 이스라엘 내부에 이스라엘 자체를 저주하는 폭탄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런 나라들이 이스라엘이 살던 땅이 탐이나서 쳐들어오게 되면 이는 곧 폭탄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 그런 나라들이 이스라엘 주변에서 작살났습니다.

언약궤가 어떤 상자인지는 그 상자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말해줍니다. 첫째는 만나입니다.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출 16:33-34)

만나가 하늘에게 내려온 것은, 백성들이 양식없다고 하나님께 대놓고 원망한 일의 결과로 벌어진 일입니다. 즉 “백성들이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원망하게 된 내부 심정을 이 증거품으로 증명하노라”라는 취지에서 언약궤 안에 넣어놓아야 하는 겁니다. 원망이 일어나도록 유도해놓고서, 그 원망한 사실을 인간 내부의 대표로 삼는 겁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전면 교체, 즉 전면 바꿔치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일절 인간의 마음 내부에서 선한 일이 나오지 않음을 역사적으로 증거물을 취득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언약에 들어가는 것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매 그 족장들이 각기 종족대로 지팡이 하나씩 그에게 주었으니 그 지팡이 합이 열둘이라 그 중에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더라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민 17:6-7)

즉 다 같은 지팡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론의 지팡이만큼은 생명의 증거가 피어난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내부에 집단적으로 모세를 공격하므로서 하나님에게도 공격한 바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언약궤 안에 깨진 돌판의 모형이 들어가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백성이었다는 겁니다. 언약과 끊어지면 저주요 언약과 연결되면 축복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귀하게 들고 온 언약 돌판은 산 밑에서 올라오는 우상 축제로 인하여 언약 대상이 아님을 알고 모세가 산에 던져 깨어버린 겁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저주받는 민족임을 말해줍니다. 이 저주성을 언약 상자안에 집어넣고 이스라엘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그래서 솔로몬이 지은 솔로몬 성전 안에는 언약궤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그 어느 민족이나 인간의 소지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저주를 퍼붓는 증거물로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계속 이스라엘 내부에 남아 있는 이상, 이스라엘도 언젠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 이후에 등장하는 에스겔 성전에는 이 언약궤가 있어야 할 지성소에 언약계가 없습니다.

“그가 내전을 척량하니 장이 이십 척이요 광이 이십 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겔 41:4) 새성전에 더는 저주의 표상이 언약궤가 없어졌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모든 면에 있어 화목되어 더는 저주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전면 교체가 이루어진 겁니다.

언약궤가 있을 자리에 주님이 들어서신 겁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이제 성도의 죄를 지적한 것은 없습니다. 성도 자체를 포함시켜서 드린 제사가 온전하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성도는 십자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성도를 가져서 온전한 천국 백성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체적인 가치를 지니면 안되는 이유를 늘 충분히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예레미야 3장 14~18절(폭탄 제거)22091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장 14~18절입니다. 구약성경 1054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열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치 아니 할것이며,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함께 이르리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 머리에서 나온 계획 아니죠. 따라서 우리는 관심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계획한 것에 관심 있습니다. 남의 일은 신경 안 쓰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계획을 제시해도 돌아올 생각이 나질 않는 거예요. 왜냐 하면 사전에 협의한 적이 없잖아요. 일방적으로 다 갖춰놓고 그냥 강제로 돌아오라고 한다면 일단 돌아오는 방법도 모르고 돌아올 의사도 없고 돌아가 봤자 우리들의 계획이 거기에 반영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부정해야 해요. 부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름대로 생각했던 꿈과 계획은 엉터리였다고 자인하고 인정하는 경우에만 돌아오는 것이 성립됩니다. 하나님이 이 점을 잘 아셔서 어떻게 하느냐면 우리를 고발해요. 우리를 고발해서 법정에 세웁니다. 그러면 고발당한 자가 우리들입니다. 이걸 법원에서는 피고라고 하죠. 그러면 원고가 누구냐. 주님께서 원고가 되십니다.

우리는 죄수인 처지로 졸지에 죄수가 되어서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하늘나라 법정에 설 그러한 존재입니다. 원고가 하는 말이 “율법에 준해서 철저하게 저지른 죄에 대해서 처벌을 부탁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역할은 마귀가 잘하죠. 우리는 일단 피고이기 때문에 우리의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바쁘고 계획이 있었습니다. 아이 낳고 키운다고 신경을 못 썼습니다...’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법을 생계가 바쁘다 보니 하나님의 법이 어떤 것이 있는 것조차 우리가 몰랐습니다. 그냥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하는데 안 됩니다. 왜 안 되냐면 주께 돌아오는 과정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봐주게 되면 우리는 전처럼 안 돌아온 채 내 자리를 그냥 굳히면서 살게 됩니다. ‘나는 한때 피고였지만 지금은 본래 내 모습으로 돌아왔어’라고 되어버리면 하나님 앞에 변명 적당히 둘러대서 다시 원래 내 자리로 되돌아온 샘이 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있는데 50년 동안 고시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봤습니다. 문제를 출제 한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어떻게 출제했길래 50년간 고시 공부를 해도 아직도 합격을 못 했어요. 그러니까 스무 살부터 공부해서 70세 될 때까지 아직도 합격 못 했습니다. 누가 봐도 이건 문제를 잘못 낸 것이 아니에요. 본인이 고시 공부할 쨉이 안 된다는 것을 본인이 절대 양보 안 합니다.

왜냐 하면 이건 내 계획이니까. 이건 내 계획이거든요. 이 계획이 없으면 나다운 내가 안 됩니다. 그러면 본래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날아가 버리니까 그건 죽는 것보다 더 못하죠. 그러니까 이 고시라는 제도가 진짜 나다움을 지탱해주는 하나의 빌미가 된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그 소리 하려고 엉뚱한 고시 공부한다는 식으로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겠지요. 자기 밥벌이도 안 하면서 계속 복음 핑계 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금 주님께서는 지옥을 준비해놓고 대기 중이십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지옥 가는 그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이. 저 사람 가고 그다음 우리가고 하는 거예요. 지옥을 만들어놓았다는 말은 기준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그 기준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는 거예요. 그게 돌아오는 겁니다. 내가 아는 나로 돌아오면 안 돼요. 내가 정녕 몰랐던, 내가 예상도 못 했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나를 복제해요. 나와 닮았는데 전에 나는 죄인인 나, 그런데 복제된 나는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된 나로 복제를 해요. 쌍둥이죠.

그런데 내 겉모습은 동일해요. 별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 작업을 하시는 그 계획에 대해서 고맙게도 주님께서는 친절하게 어떤 식으로 바뀐다는 것이 마태복음 9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 16~17절에 보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이게 신약시대 방식으로 ‘돌아오라’ 입니다. 안에 들어있는 우리가 우리 식으로 돌아오라고 해도 못 돌아와요. 우리는 옛 부대이고 옛 술이기 때문에. 따라서 새 부대를 준비하시고 거기에 새 술을 부어 넣고 새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와 쌍둥이가 되어야 해요. 우리 아담의 복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이 다 이루어내신 거,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처럼 그 생명을 더러운 우리 안에다가 집어넣으면, 새로운 것을 집어넣으면 그로 인하여 옛 육신은 화장터로 날아가 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할 때 영광스러운 몸으로, 내부와 조화되어 내부의 사정을 고스란히 건져낼 수 있는 새로운 육신, 부활 될 영광된 육신을 물려받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은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게 뭐가 있습니다. 우리가 할 게 별로 없네. 맞습니다. 할 게 없는데 좀 힘들기는 해요. 왜냐 하면 우리의 옛 육신이 자꾸 성공을 기대하거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나이가 많아서 죽었을 때 관에 넣잖아요. 관에 넣고 내일 새벽에 장례를 치르는데 그 관을 누가 지켜야 하는데 머리 허연 70세 넘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여왕님을 지킨다고 복장을 갖추고 차렷 자세로 있다가 밤중에 쓰러지면서 꽝하고 넘어졌어요.

죽은 사람 지킨다고 혼신의 힘을 쓰다가 자기가 쓰러졌어요. 이미 죽은 우리를 우리가 지킬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 자신이 이미 죽었으니까 지킬 것은 우리를 지키지 말고 여기에 새로움을 네가 사수하고 지키라는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돌아오는 절차에 참여시킵니다. 새로운 절차이죠. 그건 뭐냐 하면 우리 계획과 우리 예상이 망해버리는 겁니다.

곱게 우리를 데려가지 않습니다. 일단은 우리 모든 계획이 쓸데없고 망해야 마땅함을 알려주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카카오뱅크에 우리사주라는 제도가 있어서 직원들에게 일 인당 12500주를 나눠줬어요. 이 주는 막 올라온 주라서 이건 외부인이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어요. 공모주 그대로 제일 싼 그대로 사기 때문에 사놓기만 하면 자동으로 돈을 버는 거예요.

그런데 회사 차원에서, 사원들 복지 차원에서 사라고 한 거죠. 인당 일만 이천 오백 주인데 가격이 얼마냐면 한 사람당 몇억씩 돈을 들여서 샀어요. 사놓으면 무조건 오르니까. 사면서 조건이 뭐냐 하면 1년간은 팔지 못하는 게 우리사주의 규칙입니다. 그렇게 1년이 거의 다 되었어요. 중간에 1억이 무려 7억까지 올라갔어요. 9억 가까이 오르니 무려 7억 이상을 벌었어요.

회사직원들은 1년이 지나기를 너무나 기다렸지요. 그냥 공돈 벌게 생겼으니까. 이제 며칠 있으면 일 년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주가가 폭락해서 7억으로 돌아갔어요. 인당 얼마씩 손해 봤느냐 하면 1억 8천씩 손해 봤습니다. 은행 대출받아서 샀는데 산 가격의 반값이 되어서 이제는 이자를 갚아주어야 해요. 예상 못 했습니다. 상상도 못 했어요. 똑같은 경우가 우리나라 역사에도 나와요.

우리나라가 일본에 먹힐 때 왜 잡아먹혔느냐면 뭔 ‘고종황제가 무능해서, 세도가들 때문에...’라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우리나라가 일본에 먹힌 것은 독일, 프랑스, 영국, 그리고 러시아 때문이에요. 그 당시 한국은 존재 가치도 없는 거예요. 그쪽에서 러시아가 밀고 온다고 하면 영국은 어떻게 조치하고, 전부 다 자기 나라 이야기지 우리나라는 가만히 있어도 망하고 열심히 싸대도 망하고 그냥 망하게 되어있어요.

우리 것이 없어요. 일본에게 먹히는 것은 반드시 먹히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친일주의적 발언입니까. 갑자기 신나지네요. 이게 바로 강제로 우리를 못 지키게 하는 겁니다. 외부세력이 우리를 강제로 앗아가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스라엘이에요. 우리나라 조선의 운명과 똑같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스스로 지키지 못하게 만듭니다.

솔로몬 때 나라가 커졌거든요.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가 많이 지루하실 거예요. 그래서 후딱 지나가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솔로몬 때 제일 커졌습니다. 커지니까 여기저기서 탐을 내면서도 부러워하면서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은 완전히 업(up)되어서 붕붕 떠가지고 주변 나라의 표면적인 큰 힘으로부터 계속해서 후손까지 물려주기 위해서는 주변의 큰 나라가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도록 솔로몬이 낸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혼인정책이었습니다.

서로의 아들과 딸을 교환함으로써 집안을 만들어서 우리나라 쳐들어오려고 하면 자기 딸이 있는 나라를 공격하기 때문에 그쪽 장인 나라가 공격을 못 하겠지요. 솔로몬의 아이디어가 기껏 그거였어요. 오면서 왕후들과 왕비가 자기 종교와 우상들을 다 가지고 왔지요. 고향에서 믿던 종교들을 함께 가져와서 믿었고 나라가 그때부터 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가 자기를 지키려고 할 때 이미 그 나라는 망하게 되는 거예요. 나를 지킬 때 나를 망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필수적인 절차라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발을 뺄 수 없도록 했습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에서 주께로부터 끊어진 것이 저주고요, 주께로 이어진 것이 축복이거든요. 이 축복은 끊어짐이 없으면 축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치는 겁니다. 끊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 작전을 위해 이스라엘에 투입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언약궤입니다. 언약궤가 어려우면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쉽습니다. 언약궤는 만지면 터지는 폭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만지면 폭탄이 터지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언약궤예요. 언약궤가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이미 망해버린 나라예요. 주변 나라가 이스라엘 공격할 때 주변 나라가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안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 못 하고 ‘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했네. 저 땅은 우리 주면 좋겠네’라고 하며 손을 댄 거예요. 손을 대니까 이건 폭탄을 댄 거예요. 누가 터지는가. 손을 댄 나라가 다 터지는 거예요. 당연히 이스라엘도 망하고 주변 나라도 망하는 겁니다. 왜? 망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망해야 하니까 망하는 거예요.

우리 성도님들이 망하는 것은 안 망하려고 교회 오는 것이 아니고 진작 망해야 하는데 왜 아직도 버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교회를 나오셔야 합니다. 멀리 포항에서도 오셔야 하고요. 왜? 도대체 왜 안 죽어요? 주여, 왜 안 죽이십니까? 왜 안 망하게 하시는 겁니까? 주님이 그러시죠. “새 술을 부대에 꽂아서 연결했는데 아직 덜 차서 그렇다”

새 술이 더 차려면 옛 술이 뽑혀 나와야 해요. 한쪽은 뽑고 한쪽은 집어넣고. 주님은 지금 무척 바빠요. 태풍 불어서 사과가 우르르 다 떨어졌잖아요. 보험 들어놨으니 보험금 맛을 보게 되는 겁니다. 뭔가 내 뜻대로 안 돼요. ‘이게 잘 되는 것은 내가 잘 되는 것이다’라는 내가 잘되는 꼴을 주님은 못 봐주십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은 봐줄 수가 없어요.

이유가 뭐냐. 딱 하나입니다. 천국은 나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남의 나라예요. 남의 나라이지 내 나라 아니에요.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네가 왜 천국에서 나와?’라고 하시면서 이것을 주께서는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거부하고 내 사람으로 만들어서 내 사람 속에 배양액을 집어넣어서 주님의 사람 만들어서 아들의 나라에 집어넣기 때문에 그 교체되는 작업 없이는 천국에 못 갑니다.

당연히 망해야 하죠. 이 언약궤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 어려운 부분이 뭐냐 하면 너희들을 다시 언약궤가 있는 시온으로 끌어모으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나오죠.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왜? 시온성에 뭐가 있느냐 하면 성전이 있고 성전 안에 언약궤가 있거든요. “언약궤 있지?” “예,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궤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으시면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어서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언약궤가 있어서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라는 것이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함께 있으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물으시죠. “그래서?” 우리가 망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가신 코스를 밟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이제는 교체 시기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고 배터리 바꿀 시기가 가까이 왔다고 느끼면서 기뻐해야 하지, 주님이 함께 있으니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면 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이십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려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언약궤가 있는 곳은 시온,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이제 성전이 파괴됩니다. 자체 파괴됩니다. 그리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느냐면 16절에 보면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폭탄 제거 반이 와서 폭탄을 제거하니까 언약궤가 없으니까 폭발할 지경, 망할 지경은 이제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궤가 있을 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서 언약궤 자체가 주님이 누구시냐를 앞서 보이기 위해서 위험한 물건으로 이스라엘에 들어앉았던 거예요. 언약궤가 얼마나 위험한 물건이지 이스라엘과 블레셋 전쟁할 때 블레셋이 언약궤 사로잡아놓고 포로 잡힌 언약궤에 그들이 당했습니다.

트로이목마같은 거예요. 트로이목마 잡으니까 그 안에 있던 군대가 쏟아져 나와서 그 나라가 망했잖아요. 뭔가 비밀로 들어왔는데 그것이 나라 구석구석을 파괴하는 식으로 쑥 우리 안에 들어온 거예요. 그게 바로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말은 이제는 내 손으로 파괴되지 않는 나의 세계가 ‘십자가여, 나를 파괴시켜 주옵소서. 이제는 내가 없어지는 기쁨을 만끽하게 하옵소서. 내 계획과 내 꿈에 더이상 목적 두지 않게 하옵소서’

내 자식, 내 미래, 내 연금, 내 펀드, 내 부동산, 이런 것들은 나중에 나에게 상처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아파요. 주께서는 내가 해결 못 한 거 대신 마음 안 아프게 해주시려고 주께서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언약궤의 기능이 어떻게 파괴를 하느냐.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언약궤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아론의 싹난 지팡이 들어있고, 광야에서의 만나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언약궤는 깨진 돌판이, 너희들 때문에 계약이 와장창 깨어졌다는 모형판이 거기 들어있어요. 어린 소녀들이 소꿉놀이할 때 보면 옆에 바구니가 있거든요. 어른들이 가다가 바구니 안에 뭐가 있는가 보면 소꿉놀이에 필요한 살림살이들이 거기 있어요. 모형그릇, 모형 오이, 모형 소시지, 이런 것들이 있지요. 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있지요. 언약궤가 뭐냐 하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설명하는 거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벌써 망했다’가 들어있습니다. 벌써. 계약이 깨어졌으니, 이건 언약궤가 깨지면 관계 자체가 깨진 거예요.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이건 그야말로 저주예요. 저주가 가득한 거예요. 저주가 가득한 언약궤.

그러니까 사무엘하 6장 6~7절에 보면 웃사같은 사람이 언약궤 흔들린다고 만지니까 자기가 저주받아 죽어버린 거예요.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저주가 있는데 마치 저주를 소유용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주가 나를 소지하지 내가 저주의 언약궤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겁니다. 십자가가 나를 소지하고 십자가 자체적인 구원에 처하기 위해서 있는 거지 내가 십자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모가지에 십자가 덜렁덜렁하고 다니고 차에 달고 다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 언약궤가 나중에 없어집니다. 언약궤가 마지막 있었던 곳이 어디냐면 열왕기상 8장 6절에 언약궤가 마지막으로 있어요.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라고 나오거든요. 그런데 다음 성전, 그러니까 솔로몬 성전 이후에 에스겔 성전에 가보면 에스겔 41장 4절에 보면 지성소를 설명하면서 거기에 언약궤가 없습니다. “그가 내전을 척량하니 장이 이십 척이요 광이 이십 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

‘그러면 언약궤가 없으면 나를 누가 지켜주는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언약궤 없다면 이미 벌써 주께서 친히 지켜주시는 정도가 아니고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사시는 거예요. 소유권이 바뀐 상태이기 때문에 더는 불편한 관계가 아닌 거예요. 그걸 화목이라고 하고 로마서 3장 25~26절에서는 화평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너와 너 사이에 께름칙하고 거리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바르게 살겠습니다’라는 이것은 거리끼는 거예요. 이건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예요. ‘제가 이런 짓을 했습니다’라고 할 때 ‘괜찮아. 괜찮아’라고 하는 이게 거리끼는 것이 없는 거예요. “너의 죄에 대해서 다시는 묻지 않겠다”라고 하시는 거죠. 너의 죄를 위한 제사는 더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시는 우리의 죄를 씻을 제사가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에 언약궤가 없어진 겁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없으니 신난다고 그러지 마시고 이건 과정이니까, 우리의 몸이 과정이니까, 언약궤가 필요했던 시절과 없던 시절을 과정을 현재 우리 인생을 통해서 보여주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가짜인 것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진짜가 하늘에 쌍둥이로 따로 만들어져 있고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가짜 모형인 마네킹인 나는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어떤 철없는 아이가 극장에서 간판을 걸고 다니까, 그런 아이는 없지만, 사람들이 극장 간판에 그림 그리고 달면 그 사람들이 봉준호 감독이 되는 건 아니죠. 우리는 영화관이거든요. 간판 달 수 있습니다. 십자가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간판쟁이고 영화관 소유주지 거기서 상영되는 그 영화 스토리, 내러티브(narrative)인 서사구조의 실질적 감독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 몸을 빌려주었을 뿐이에요.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간판이고 기생충 영화 상영합니다. 다 하세요. 하되 진짜 영화를 만드신 분은 주님이지 우리 인생의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궤가 있다가 없어졌습니다. 우리 안에서 지뢰가 제거되었습니다. 폭탄이 제거되었습니다. 후패한 우리 몸도 덩달아 그 효과로 늙어가고 있고 부서지고 있는 것을 더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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