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2장 50절 (영생의 공놀이) 220920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2장 49절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아직 불이 붙지 않았다 이 말이죠.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불세례가 예수님한테 먼저 덮쳐지고 덮쳐진 이 불이 예수님을 인하여 전 우주로 전 세계로 파급이 된다. 이 불세례가 얼마나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예수님 본인이 답답하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등장했으면, 사람에게 있어 다음은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다음이라는 게 없어요. 그것은 그 인간은 I 와 전 우주, 우주니까 Universe. 보편성이라고 하면 universality. 이것은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성. 인간들은 자기를 나를 뭘로 이동시키느냐 하면은 특별한 나이고 싶어요. 구원을 받는다든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든지 특별한 나이고 싶어요. ‘특별한 나’.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전체에서 내가 특별한 존재로 전환될 수 있는가. 특별한 사람으로 될 수 있는가. 이 특별한 것은 peculiarity. 특수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인간이 이 전체를 다 알아야 내가 특별하다고 간주가 돼요. 전체에 비해 내가 우뚝 설 때 여기 일반성 속에 포함되어 있다가 이것을 뛰쳐나와서 전체를 바라볼 때 이걸 특별하다. 인간의 모든 소망과 욕망과 희망은 본인이 어떤 세상에 속하던 나만은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희망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쉽지를 않아요. Universe, U와 peculiarity, P 사이에서 내가 I 가 어떤 특별한 내가 될 수 있느냐. U-P-I. 이걸 기대하고 있지만 실제로서는 세상과 나 사이의 해결점은 뭐냐 하면은 peculiarity. 특수함, 특수성. U-I-P. 보편성과 나 사이에 특수성이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떤 존재인 것을 해결해주는 겁니다.
마지막에 내가 결과적으로 괜찮은 내가 되기 위해서 인간이 이해하는 보편, 인간이 이해하는 특수 이것을 이 속에서 잘 특성을 잘 해서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열망과 희망이 있거든요. 인간은 자기 문제가 제일 관심사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모든 행동과 태도는 바로 U-P-I 이 공식에서 나와요.
삼성그룹에 취업했다. 삼성그룹 중에서 어떤 것이 승진이 빠르냐? 그것이 나였으면 좋겠다. 딱 맞잖아요. 이 세상에 장사한 사람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있다.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이 땅에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나는 제일 아름다운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다. 이게 전부 다 이 공식 하나로 세상 설명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I를 특수성에서 빼고 보편성 속에 하나로 이렇게 엮어버려요. 그러면 특수성 되겠다는 게 뭐가 돼요? 욕망이, 욕심이 돼요. U-P-I 에서는 욕망이 되지만 U-I-P 에서는 뭐냐? 욕심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저질이다 이 말이죠. 그렇게 희망 갖겠다는 자체가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특수성은 이미 확정되어 있고 이거는 하나님이 지정했어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특수성은 누구만 해당됩니까? 예수님만이 해당되는 거에요. 보편을 다룰 때 너도 같이 다뤄져야 된다는 겁니다. 네가 따로 ‘나’를 뽑아내지 말라는 거에요. 뽑아내는 이 오류가 뭐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네가 신처럼 되리라는 악마의 부추김과 그 현혹에 말려들어서 우리는 자기가 보편 속에 속하는데 자기만이 특수한 자라고 오해하는 거에요.
어느 가정이나 자기애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우리 애는 노래 잘하고 뭐 잘하고 특별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지요. 주님 보시기에는 모든 것이 모든 보편성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 예가 로마서 3장 9절에 나오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도 없다. “모든 입으로 저주 아래 있고” 역시 로마서 3장에 나옵니다. 저주 아래 있고. 갈라디아서 3장에도 나오지요. “죄 아래 가두었으니” 에베소서 1장도 마찬가지에요. “세상 권세 아래 갇혀 있었다”
특수성은 인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은 세상과 더불어 망해야 된다는 그 성질이 있다는 것을 나만은 구원돼야 돼 라는 특수성을 외치는 것을 보니까 이거는 보편성이다 이 말이에요. 네가 나는 잘 돼야 돼 하는 거 보니까 입 다물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너는 너 주체파악이 안됐어. 그런 것들이 증거가 되는 거에요.
주께 기도하나이다 하면 기도하지마! 그냥 침묵해! 주는 대로 먹어 가만 있어! 이렇게 돼요. “네가 기도할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지니 이는 네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 1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니까 저 기도하지 마. 중언부언하는 저 기도 나 안 받는다. 특수성이 파급돼요. 특수성에서 여기 보편성에 더해 있는 ‘나’ 말고 특수성에서 따로 제작한 ‘나’가 따로 있어요.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제작된 ‘나’.
이 특수성과 나 사이에 자기 피조물을 새롭게 창조하는 거에요. 창조할 수 있는 그 권한이 바로 뭐냐 하면은 그게 언약의 내용입니다. 언약의 내용. 언약 안에는 다윗의 왕이 등장하고요. 순서가 이래요. 왕이 먼저 와서 왕이 누구를 모집하느냐 하면은 왕이 자기가 원하는 백성을 모집하는 식으로 언약 이스라엘이 성립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몇 명 뽑았어요? 12제자를 뽑았잖아요. 이스라엘 뽑았잖아요. 바로 그 식이에요. 12제자 뽑힌 그것을 가지고 뭐냐? 잃어버린 나의 이스라엘아. 나의 양이라. 잃어버린 나의 양이라. 양의 집단. 언약의 내용 가운데 언약의 내용이 이스라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서 언약을 이룹니다. 이스라엘 구조가 뭐냐 하면은 다윗이 왕으로 오신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혈통입니까? 다윗의 혈통. 왕가의 혈통이죠.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거에요. 그런데 백성 없는 왕은 없지요. 왕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그 현장 앞에 왕 앞에 누가 이렇게 널려있어야 돼요? 왕을 왕이라고 인정하고 또는 왕이 백성이라고 상호 인정이 가능한 백성들과 하나의 단체를 이룰 때 언약은 완성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다윗 왕과 백성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데 연결체가 있는데 매개체가 뭐냐? 피에요. 왕의 피로 먹고 마시는 자가 백성이 되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그 피 단회적인 제사가 반복됨으로서 이스라엘은 언약적 새로운 나라로 등장하는 겁니다. 기존의 나라 말고. 기존의 이스라엘 말고. 기존의 나라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
이게 제가 아까 유투브할 때 했지요. 이스라엘의 멸망이 최후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상대하고 이스라엘 망해버리면 세상은 끝이에요. 다른 이방나라의 역사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 택한 이스라엘이 망하면 그걸로 세상 끝입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람에게 다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음은 없습니다. 끝입니다.
특히 49절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불은 용도가 베드로후서 3장에 용도가 세상을 다 태우는 용도에요. 날씨가 추워서 보온 용도로 불이 온 게 아니고 세상에 있는 것은 불로 다 태워버리는 겁니다. 불로 없애버리는 거에요. 있음이 불로써 다 태워지는 겁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 가는 길을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고 있다. 그 지키는 불의 두께가 세상 끝까지 확 퍼졌다고 보시면 돼요.
그 불은 왜 불이 있느냐? 생명나무 지키기 위해서 불이 있는 거거든요. 생명나무와 생명나무 없는 사이의 경계선을 위하여 화염검, 불이 있는 것처럼 불의 폭이 늘어나버리면 오직 생명나무에 있는 천국과 그리고 그 생명나무 없다는 표시로서 불 속에 들어가야 될 나라, 지옥불이죠. 지옥은 불로써 구성되어 있습니다. 뜻뜻한 정도가 아니지요.
에비앙 생수 하나가 돈으로 치면 굉장히 비싸게 팔아요. 물가가 올라서 물 한방울도 아쉬운 데에요. 사슴이 시냇물 찾아 목을 축이는 것처럼 목을 축일만한 샘물이 없습니다. 이 땅에 있을 때 대통령하고 국무총리하고 국회의원하고 재벌 되고 잘 나갈 때 참 좋았지요. 그게 누적이 되어서 자기를 지옥불 속에 생명나무는 이쪽이 없어 라는 경계선에 도구용으로 사용된 자기 자신이 쓰여진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지요. 평생을 나 잘났다 식으로 살아왔었는데 그게 아니고 너 말고 생명나무에요. 너 우선 아니고 생명나무 우선.
생명나무가 있는 것은 너 있는 곳에는 생명나무 없어 라는 그걸 표현해주기 위한 그 불 속에 그들은 영원히 사로잡혀 갇혀있어야 되는 운명입니다. 누구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이건 사실입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럼 지옥에 불 온다는 것을 와봐야 아는 거지 누가 가봤나? 예 누가 해봤습니다. 누구? 누가해봤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 불을 저주의 불을 예수님이 받는데 흠뻑 받지요. 그걸 세례라고 해요. 그게 무슨 세례? 불세례, 곧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아버지께 저주받는 것. 생명나무 있는 쪽에서 저주받는 것. 끊어진 상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지키기를 원합니다. 그럼 생명나무에서 아담, 하와가 나왔다는 말은 너는 지킬 대상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지키고 싶은 그 항목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는 것은 생명나무에요. 선악과는 이미 훼손했으니까요. 생명나무를 지키고 싶어서 하나님께서는 불 까지 동원시켰어요. ‘불’.
그러니까 협상이나 인간과의 타협은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 아부한다 치고 이런 아부를 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리가. 그 입 다물어! 네 입으로 사랑이라는 말 하지 마! 그 입으로 감히 사랑을 말하지 마! 사랑하고 너하고 무슨 상관있어? 하지 마.” “천국은 저기 있군요!” “있는데 왜? 천국 있는걸 네가 왜 거론해? 거론하지 마. 너는 거론할 자격도 없어. 다시는 찾아오지 마.”
그것을 51절에 방금한 드라마 대사 있잖아요. 그걸 두 자로 표현했습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분쟁입니다 ‘분쟁’. “내가 온 것은 의도적으로 분쟁을 일으키기 위함이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네가 그렇게 생각하느냐? 도리어 분쟁 된 상태를 더욱 더 확실히 분쟁을 마감시키러 온 거죠. 완전히 갈라내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 일이 이스라엘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52절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이스라엘과 상대하는 거에요. 이방나라들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백성이고 자기 계시를 펼치는 하나님의 작업장이기 때문에 거기서 하나님의 마지막 뜻은 분쟁하는 겁니다. 갈라세우는 거죠. 인간들은 갈라서는 것을 싫어해요. 분쟁을 싫어해요. 평화를 좋아합니다.
우리 헤어지지 말아. 붙들고 난리도 아니지요. 여고 1학년 1반 학생들 이제는 진급해서 2학년 올라갈 때 특히 1학년 1반에 친한 친구들 있잖아요. 나중에 분반할 때 서로 껴안고 난리도 아니에요. 이산가족 헤어지는 것보다 더 서럽습니다. 우리 헤어지지 말자. 정숙아 옥희야 헤어지지 말자. 정숙이 2학년 2반 옥희 2학년 3반. 우리 편지 자주하자. 응 약속! 일주일도 안 지나서 다른 친구들이랑. 오지 마! 우리 반 오지 마! 나중에 배구할 때 죽으라고 던지고. 옛날에 1학년 때 정은 이미 다 끝났어요.
인간들은 자기가 이렇게 새로운 것에 쉽게 적응할 줄은 본인도 몰랐지요. 본인도 놀라지요.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에요. 지나간 것은 다 지나간 겁니다. 이것을 지나간 것은 지나갔다는 말은 예수님 한 분 안에 모든 세상은 지나간 것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 한 분 오심으로서. 최종적인 것이 오심으로서 그전에 있던 보편성은 전부 지나간 것으로 만들어버리지요. 이제 예수님 중심으로 재편될 세상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럼 그게 어떻게 되는가? 무섭게 일을 무섭게 벌립니다. 역사의 끝은 역사의 끝낼 분이 오셔야 역사가 끝나는 거에요. 아직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 해도 소용없어요. 끝낼 분이 오면 역사는 끝났고 역사가 끝났을 때는 화평과 분쟁 그리고 그 뒤에 무서운 지옥 불, 그걸로 조건 다 갖춰졌어요. 주님이 불세례를 받음으로서 이 세상은 끝입니다. 이 세상은 지옥으로 끝났습니다.
세례라는 것이 세례의 효과가 주어진 일이 다른데 전체까지 다 파급되는 것이 세례거든요. 물세례. 물만 적신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니고 물세례라고 하는 것은 물속에 들어갔던 모든 사람에게 물이 주는 심판의 효과와 정화의 효과를 다 그들 전체에다가 다 뒤덮어버리는 거에요. 마치 태풍같이. 태풍의 눈은 두 개 아니에요. 하나에요. 하지만 넓은 치맛자락처럼 태풍이 몰고 오게 되면 태풍 영향권 속에 있는 것들은 전부 다 폭풍과 폭우가 쏟아지게 되어있지요.
그 전체 면적이 세례의 면적이에요. 불세례의 면적은 보편성, 인류의 모두에게 예수님 때문에 전부 다 지옥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로 이야기가 끝나면 되는데 예수님께서 불세례 받으시고 십자가, 아버지께 저주 받으시고 심판 받는 불의 심판이라는 게 어느 대목에 나오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나와요.
불 심판이 왜 세례의 기능이냐? 세례 요한이 이렇게 했어요. 마태복음 3장 11절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불세례라고 하는 것은 그 불 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다 심판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 심판에서 예수님도 면제되지 않는다. 예수님도 거기 불 심판을 받는 겁니다. 그게 불 세례에요. 내가 받을 세례에요. 예수님 받을 세례에요. 예수님 구경만 하신 것이 아니고 친히 저주 속에 들어오신 거에요. 친히 저주 속에 들어와 버리면 불 세례 받으신 분의 일원이 돼요. 불세례 받은 보편성 중에 정해졌잖아요. 여기에 예수님만의 특수성이죠. 특수성이 여기서 튀어나와버리죠.
그러면 심판에서 영생이 되어버립니다. 영원한 저주에서 영원한 복, 영원한 생명이 되지요. 영원한 생명이 되어버리면 이 특수성으로 인하여 새로운 I, ‘나’가 여기 출현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나’가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 받았잖아요. 불세례 받았지만 또 뭘 받았어요? 성령세례 받았지요. 따라서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성령세례 받은 자가 남에게 성령세례를 유일하게 제공할 수 있는 자격자가 돼요. 성령 받은 자가 남들에게 성령세례를 줄 수가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알아요. 사도행전 2장에도 보면 베드로 설교에도 나와 있어요. 그분이 하나님 주의 오른편에 가셔서 위에서 성령을 세례로 주는 거에요. 물? 아니. 불? 아니.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거에요. 성령으로.
특수성의 세례를 받아버리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은 이런 현상이 나타나요. 오늘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내용인데요. 죽어도 안 죽는 개인이 등장해버립니다. 이 개인이 뭐냐 하면은 이 개인이 성도에요. 죽어도 안 죽어요. 아무리 죽여도 안 죽어요. 이 성도의 특징은.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죽여도 죽을 수가 없어요. 466번 죽으면 그 다음에 죽을까요? 아니지요. 그럼 786번은? 안 죽어요.
제목을 ‘영생의 공’. 통통 튀는 공. 성도 자체가 공이에요. 무슨 공? 영생으로 만들어진 공. 생명으로 만들어진 공이에요. 성도 자체가. 성령께서 죽음을 이긴 영이 있기 때문에 밟아도 안 죽도 코로나 걸려도 안 죽고 화장해도 안 죽어요. 그동안 인간들이 죽는다는 것은 본질 자체가 기존의 인간들의 보편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란 오류를 그게 죽음이 아닌데 인간은 죽음의 끝을 몰라요. 죽음의 끝은 누가 아느냐? 보편성은 죽음의 끝을 몰라요.
모순이라는 말은 모른다는 뜻이에요. 보편성인 그들은 어떤 개념 하나의 끝을 보지를 못했어요. 역사의 끝을 체험하기 때문에 역사 끝에 가야 모든 의미의 종결이고 모든 정의의 종결이거든요. 무엇에 대해 안다는 것은 끝에 가야 안다는 말을 할 수 있지 그 전에는 안다 할 수 없거든요. 그럼 죽음의 끝은 제대로 죽어 본 사람이 죽음의 끝을 알아요. 죽음의 끝은 누구입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개인과 인간의 모순점은 예수님의 특수성에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특수성에서.
그런데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죽음을 아시는 분 누구밖에 없지요? 예수님밖에 없지요. 아버지의 제대로 된 저주와 심판은 예수님만 받았어요. 그것도 최종적으로. 다른 사람은 최종적이 아니고 죽고 난 뒤에 대기하고 있지요. 이렇게 개념이 예수님에서 모든 게 완결되어 버리면 이 땅에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단절이 없어지고 연속성만 남아요. 왜냐하면 최종의 단절은 예수님께서만 단절되기 때문에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이 늙어 죽었다. 죽은 거 아니에요. 그건 대기 상태라니까요.
나이가 96세 됐는데 돌아가셨다. 어떤 분 최근에 돌아가신 분 있지요. 장례식 거창하게 했잖아요. 엘리자베스 2세. 지금 대기 상태에 있어요. 아직 안 죽었어요. 죽음이란 목숨이 끊어진 게 죽은 게 아니고 온전히 저주받아야 죽어요. 온전히 심판을 받아야 죽는다고요. 죽고 난 뒤에 심판 받는 대기 상태에 있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눈에 보이는 세상 있잖아요. 세상과 그리고 흔히 말하는 저 세상은 이어져있는 거에요. 이어져있는 거에요.
그러면 저 세상에 갔던 사람이 심판대에 대기하고 있다면 그러면 눈에 보이는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경계선이 사실은 경계선이 없지요. 이어져있으니까. 95세 96세 97세 죽더라고 저 세상과 계속 이어져가는 거에요. 그래서 저 세상에 가서 98세 99세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인간의 수명 계산하고 주님의 수명 계산은 다르기 때문에. 죽기 전까지는 덜 죽은 거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저 세상에 가서 심판을 대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들은 죽음의 대기 중이다. 죽음 앞에서 심판 앞에서 대기 중이다 이 말입니다. 방향이 그 쪽 방향이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세례를 줘버렸다 이 말이에요. 성령세례를 줘버리니까 여기에 뭐가 등장했습니까? 통통 튀는 영생의 공놀이, 영생의 공이 등장한 거에요.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영생 덩어리에요. 통통. 796번 죽어도 이게 또 튀네. 왜? 영생이니까.
이 세상의 어떤 죽음과 악마와 율법과 죄의 세력도 영생을 이길 수가 없어요. 왜? 이미 이겼던 완제품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이미 그런 것을 다 극복했다. 극복 벗어난 거에요. 극복 알지요? 이미 그걸 벗어나버린 그런 힘을 가진 공, 통통통 공. 공으로서 나타난 자가 누구다? 성도지요. 성도는 자살하든 뭘 하든 죽을 수가 없어요. 성도가.
왜냐하면 본인은 이미 십자가에 죽은 몸이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은 자기 생명이 아니고 누구 생명? 외부 생명. 외부 생명이 들어왔기 때문에 자기는 껍데기만 제공했을 뿐이죠. 껍데기만. 살아있을 때는 아담의 껍데기 죽었을 때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껍질. 그걸 껍질이라고 하지 말고 성경에 나옵니다. ‘그릇’. 자비의 그릇, 영광의 그릇. 해같이 빛나는 그릇으로 변했잖아요.
마태복음 17장에 모세하고 엘리야가 누구 만났습니까? 예수님 만났지요. 그때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이 어땠었어요? 초라했어요? 기미 주근깨 연세들은 티 났습니까? 없어요. 베드로가 어떻게 했는줄 압니까?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눈부셔! 해 같이 빛나니까 그 영광이. 모세가 시내산 내려올 때 밑에 백성들이 모세 얼굴을 어떻게 봤습니까? 그냥 정면으로 볼 수 있겠어요? 못 봤어요. 그래서 모세가 신광 타월로 수건을 가려가지고 됐냐?! 이제 말할까? 이제 말하시옵소서. 수건 가리고 율법 이야기했잖아요.
그 영광을 감당을 못해가지고. 밑에 있는 백성들이. 기껏 40일 갔다 왔어. 40일. 한 달 반 동안 시내산에 갔다 왔는데 얼굴이 해 같이 빛났습니다. 한 달 10일도 그 정도인데. 거기서 영원히 사는 것은 엄청나지요.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 올라갈 때 엘리사는 감히 쳐다보지를 못했어요. 그냥 소리만 쳤지요. 하늘의 마병이여. 세상에 자기 스승이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그만큼 대단한 게 아니고 엘리야의 모든 기능이 지상적이 아니고 초월적이다. 영적이었고 하나님이 하는 기능이었다는 것을 같은 육체 모세 엘리야 만날 때는 그걸 몰랐는데 심지어 엘리야 본인도 본인이 내가 그 정도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인간에게 성도에게 제일 무서운 건 누굴까요? 본인입니다. 본인이 제일 무서워요. 성도한테. 내가 가장 무서워요. 내 안에 영생 들었으니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여러분들이에요.
그걸 약간 풀이하자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주의 일이 가장 무서워요. 주의 일이. 따라서 그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무섭고 주의 일이 어느 정도 무서운지 알려면 가을철에 나오는 괴기 영화 다 보시기 바랍니다. 외국 괴기 영화. 한국 것 말고. 무서운 외국 괴기 영화 그 무시무시한 영화 보면서 그래 저게 무섭단 말이야? 저것 보다 내가 더 무서워. 본인이 더 무서워야 돼요. 본인이.
저런 것 무서울 때는 무서울 이유가 있어요. 뭐 축축하다든지 나쁜 짓을 했다든지 음습한 집을 갔다든지 이유가 있는데 내가 성도된 것은요 내가 내 손에서 어떻게 어찌 할 수 없는 내 손을 떠나버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무서운 거에요. 이게 뭐냐? 내 속에 있는 영생을 내가 관리 대상이 안 된다는 뜻이에요.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처럼 영생이 어디로 튈지를 사도 바울 본인도 본인이 어디로 튈지 몰라요.
그래서 영생이 들어올 때는 어떻게 들어온다? 무섭게 들어온다. 우리 안에. 아주 무섭게. 세상에 어떤 무서움도 시시하게 보일 정도로. 이게 무서운 거야? 코미디지. 이 정도로 진짜 무서운 것은 내가 영생의 사람으로 돌변했다는 그 사실에 있어요. 그 이야기가 58절 한번 봅시다.
12장 58절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게 뭐냐 하면은 이거는 빚쟁이가 아주 한 푼이라도 자기 돈 받아 낼 때까지는 절대로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율법으로 되어있어요. 율법으로.
보편성 이야기 잠깐 해봅시다. 이 보편성 안에 주님께서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이 안에 인간의 죄, 인간의 욕망이 분산되어 있다고 보는 거에요. 분산. 다 퍼져있다고 보는 거에요. 그래서 개인 행동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개인 행동이라는 게 없습니다. 인간의 개인 의미는 없어요. 인간의 의미는 외부에서 다 먼저 눈에 들어왔고 봤고 탐나고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했던 그것이 어느새 내 인생 내 몸으로 스며들은 것이거든요. 홀로 나만 아는 의미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남들의 합작품이에요. 남들의 합작품.
제가 20대에 서울에 한번 올라간 적이 있어요. 구로구죠. 안양천? 비슷한 거 개천가 있는데 그때 일본식으로 할 것 같으면 하꼬방 알지요? 하꼬방. 정말 조잡하게 임시로 천막으로 된 후진 하꼬방. 지방에서 올라와서 서울에 본진에는 들지 못하고 개천가에 이렇게 줄지어 있어요. 왜냐하면 여기는 생활하수 그냥 갖다 부으면 되거든요. 옛날 청계천 비슷하게.
개천가에 집들이 있고 옆에 또 뭐가 있느냐 하면은 가내수공업 하는데. 그 당시 인형, 가발 가내수공업 하는 작은 중소기업 있어 가지고 공장들이 있는데 이런 공장들은 환경 대책 같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몇 년 일하면 속에 폐병들 정도로. 그러한 험악한 조그만 봉제공장이라든지 하천에 작은 소규모들. 그 소규모 공장들이 있어 가지고 여기 공장에서 일하고 건너와서 하꼬방에 있는데 여기 풍경은 을씨년스러워요.
전봇대만 높아요. 전봇대만 높고 다른 건 다 전봇대 밑에 있어요. 저녁에 노을이 운치 있게 개천가 냄새나는 오물덩어리 있는 잡초 붉게 물들어버려요. 오후 7시 됐다 합시다. 서서히 여기서부터 공장에서 일했던 여공들이 하나둘 퇴근하면서 가지요. 이때 여러분이 20대 청년이라고 생각하고 이 청년이 뭘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 생각하겠습니까? 복음 생각하겠습니까? 통통 튀는 영생 공 생각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생각 안나요.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해? 내가 여기 있어야 하는 그 문제. 내가 여기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어디 가서 또 돈을 벌어야 되는지 그것만 생각해요. 그것만. 또 하나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교수로 발령 되가지고 시골에 교수로 내려갔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철딱서니 없는 학생들 까불고 뛰어다니는 그 학생들 그리고 같은 교직원들. 같은 교직원들끼리 말 안합니다. 직장동료들 말 안 해요. 왜? 업무량이 말 할 시간을 주지 않아요.
직장 교사들, 행정요원들 딱딱해요. 사무적인 것. 그리고 아침에 코빼기 보이고 놀러가는 교장, 교장 놀러 가면 눈치 봐서 뒤따라 놀러가는 교감. 학생들 뒤쪽에서 담배 피는 말썽꾸러기 애들. 그럴 때 여러분들이 교사로 취직했을 때 도대체 왜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돼. 왜? 내가 왜? 자기한테 질문하는 거에요. 왜 나는 이 자리에 있어야 되느냐. 지금. 그리고 이 자리에서 10년을 더 하게 될까? 5년까지 할까? 도대체 내가 몇 년까지 이 자리에 있어야 돼? 이거 아니면 내가 할 거 없어 이렇게 되겠지요. 20대 청년이. 이거 아니면 할 거 없어?
그러면 딴 거 뭐하는데? 김해에 가서 양식장할까? 아니면 무안 가서 소금밭에 가서 할까요. 도대체 인간은 자기가 어떤 생계문제에 생기면 하나님이고 뭐고 복음이고 아무것도 생각 안 나고요 나 어떻게 하루하루 살지. 그때 그냥 라면 먹고 살아요. 촌에서 어머니가 싸준 김치 쪼가리하고 라면하고 단무지하고 먹고 거의 영양실조 걸리다 시피 해서 아침에 또 공장가면 사장님 눈치 줘서 오늘 두 시간 더해라 해서 아침 8시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작업비도 주지도 않아.
하여튼 하루하루 매일 생각하는 게 이 노을 보면서 내가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되나. 언제까지 내가 있어야 되나. 인간이 그러고 살아요. 인간이. 그게 나중에 20년 30년 되가지고 좋은 회사 가도 또 마찬가지에요. 내가 언제까지 이 회사에서 과장 노릇이나 하고 이러고 있거든요. 또 사장되면 언제까지 내가 사장 노릇이나. ‘이나~’ 가 들어가야 돼요. 내가 이 나이에 유럽에 놀러가야 되는 군번에 내가 언제까지 돈벌이나 하고 남편은 놀고. 누구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짓해야 되나. 오직 자기 생각뿐이에요.
그래서 김민기라는 사람이 했던 ‘강변에서’라는 가사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왠지 맘이 설레인다 강 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펴오르고 별들은 춤추는데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오는 걸까 아이야 불 밝혀라 뱃전에 불 밝혀라 저 강 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열여섯 살 순이가 돌아온다. 저 강 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강변에서’라는 김민기 노래 가사에 이게 나와요.
그때 그 시절을 높은 건물도 없고 개천가에 낮은 강둑으로 걸어오는 거에요. 강둑 밑에는 낮잖아요. 강둑 밑은 공장들이에요. 소규모 공장들. 먼지투성이. 하루 종일 먼지투성이로 가득한 공장들. 그럴 때 인간은 영생을 생각 못합니다. 그저 하루하루 사는데 하루 살고 그 다음 또 살 생각하고 그 다음 생각하지요. 그게 얼마나 암울하고 무서운 일입니까.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그냥 세상에 땅에 주저앉고 싶지요. 어쨌든 간에 내 집 갖추고 결혼 해가지고 애 낳고 그걸로 족하다 하고 그냥 땅에 주저앉길 원하지요.
그런데 보세요. 이 개천가 이걸 누가 설계한 겁니까? 개천가. 우리는 자연스럽다 하지요. 맞아요. 자연스러워요. 그 자연스럽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그걸 사회. 인간사회. 남에 의해서 타인에 의해서 같이 섞여 있는 사회에요. 개인을 거기서 뽑아낼 수가 없어요. 개인의 목적, 개인의 스케줄, 개인의 성향 전부 다 이미 남들이 다 거친 거에요. 다 거친 거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12장 58절에서 뭐냐 하면은 고소한다 되어있어요. “고소한다” 고소가 뭐냐 하면은 율법으로 고소하는 거에요. 율법. 그럼 이 세상은 예수님의 세상은 뭐냐? 법의 직물. 직물 알지요? 짜는 거. 천 조각. 촘촘한 법의 직물이에요. 전부 다 고소해요. 인간을 고소한다고요. 16살 순이는 지금 월급 받아서 반은 촌에 보내고 반은 겨우 밥 먹고 사는 게 급한데 하나님은 그 16살 애를 향하여 법적으로 고소하고 있어요.
고소하는 근거가 뭐냐? 이 세상에 인간의 욕망이 전부 다 분산되었다. 퍼져있다. 그 퍼져있는 욕망 중에서 내가 하나 건져서 나는 오늘 월급 받았으니까 오늘 옷 하나 사 입어야지. 이게 인간의 욕망 중에 하나 그물망 속에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그 기준과 인간이 서로 공존해서 살기 위한 그 기준이 같다? 다르다? 이게 다른 거에요.
말씀 지킬 테니까 복 주세요 이게 왜 안 되느냐 하면은 이게 기준이 달라요. 말씀은 우리를 고소하는 거에요. ‘고소하는 것’. 우리는 기본적으로 내가 밥 먹고 사는 게 기본이에요. 기준이 달라요. 다르니까 어떻게 됩니까? 만날 수가 없지요.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켜가지고 너무 생존을 세속적으로 하지 말고 율법 지켜서 영광 돌리면 구원 받는다. 바리새인들이 천국 가기 위해서 시도하지요.
그런데 지금 진짜 하나님 나라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보내서 화살표가 인간에게 찾아오잖아요. 이 두 화살표가 만날까요 안 만날까요? 만나지지 않습니다. 만나지지 않아요. 오히려 이 노선을 율법으로 고소해버려요.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 보낸다. 고소하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 끝에 누가 있습니까? 불세례 받은 예수님이 계시지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그들이 시도하는 천국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은 없습니다. 없어요.
미리 땡겨서 성령세례 받아서 영생 얻은 사람만 이미 천국에 들어온 사람이지 그 외에는 천국에 못 갑니다. 화살표 때문에 그래요. 교회에 가서 열심히 시도하는 것 그거 없는데 가는 거에요. 있지도 않은 곳에 가는 거에요. 주께서는 고소하면서 마중 나오는 거에요. 고소하면서. 율법으로. 하나라도 다 지키지 않으면.
그래서 철없는 젊은 애들이 부모한테 와가지고 나이 서른 넘어서 왔어요. “어머니 아버님 우리 결혼식 없이 그냥 살겠습니다. 우리끼리 사랑하면 되지 결혼식 왜 해야 됩니까? 결혼식 하면 돈 드는데” 이렇게 할 때 부모가 기가 차지요. 왜냐하면 결혼식이 자기만의 결혼식입니까? 온 집안의 결혼식이에요? 온 집안의 결혼식 아닙니까. 키우고 이만큼 성장해서 취직할 때까지 누가 도와줬어요? 부모가 도와줬잖아요. 부모의 수고스러움을 누가 모독한다? 자식들이 지금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힘으로 큰 줄 알고. 부모의 수고를 모독할 때 부모는 얼마나 섭섭하고 서럽겠어요. 진짜 서럽지요.
요즘은 주례도 없다. 잔소리 안 들을려고. 어른들 해봐야 별 수 있나. 우리가 더 잘 아는데. 주례도 없애고 자기가 자기한테 셀프 주례하고. 참내 기가 차서. 뭐 안다고 지가. 부모의 수고스러움에 모독을 하고 있다고요. 인간사회 전체가 주님의 하신 일에 이 세상 전체가 주님의 수고스러움이에요. 주님의 희생으로 만든 세상입니다. 인간들이 지가 노력해서 한 거 아니에요.
인간 기준은 뭐냐? 내가 수고했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기준은 뭐냐? 주님이 수고해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없애도 주님이 없앤다는 거에요. 지가 열심히 해서 가는 나라 그 나라는 천국 아니고 지옥이죠. 주님께서는 주님을 모독한 것을 고소할 때 끝까지 책임을 물어요. 끝까지 책임 묻고 끝까지 처벌해버립니다. 예수님의 수고를 모독하는 자, 세상 끝까지 따라가서 반드시 처벌합니다. 어떻게 처벌하는지 10분 쉬고 봅시다.
강남-누가복음 12장 50절 (영생의 공놀이) 220920b-이근호 목사
54절 보겠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여기 외식하는 자여 그 당시의 바리새인 유대 나라 사상의 지도자급이고 그들의 사상은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권위를 갖고 있어요. 개인적 의견이 아니고 역사적 전통적으로 사람들에게 진리로 여겨졌던 것을 그대로 적용시키고 실천하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이거든요. 그래서 그들이 그 시대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표자에게 뭐라고 하느냐? “외식하는 자여, 위선자여” 라고 이야기했다는 말은 이미 사람들이 예수님 말고 다른 기준에 확고하게 잠식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야기할 때 “구름이 이는 것을 보고 소나기 온다”
이게 지금 틀렸다는 말입니까? 맞다는 말입니까? 과연 그러하고 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아. 구름 일어나면 소나기 오지요. 구름 없는데 무슨 소나기가 오겠습니까. 남풍이 불면 덥다. 남쪽에서 더운 바람이 불면 덥지요. 천지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여기서 기상과 시대가 구분되지요. 기상을 보는 것이 시대 구분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 이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한마디로 생각하면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규정은 ‘아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실제로 인간 언어 세계도 그래요. 빨갛다는 말은 빨갛다는 말이 아니라 저거는 노란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부정적으로 말한 거에요. 녹색이 아니다. 횡단보도에 빨간불은 파란불이 아니다 라는 뜻이고 파란불은 빨간불이 아니다. 남자는 여자가 아니라는 뜻이고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항상 언어의 의미는 아닌 것을 배경으로 했을 때 의미가 따로 새롭게 등장하는 거에요. 의미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아닌 것을 갖다 붙여서 이것은 이것에 해당되니까 이것 해당 안 되는 것이니까 이것이라고 일단 분류하자.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분류 방법에서 뭐가 문제냐 하면은 자기가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그러한 대안은 전혀 없어요. 그렇게 분별하고 분류하면서 본인이 문제 있다 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는 어느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어요. 이게 문제인 거에요. 이게 딜레마인 거에요. 존재의 질. 오늘 제목을 ‘존재의 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의 성질 자체가 다른 부정적인 다른 존재의 경우를 맞닥뜨린 적이 없습니다.
다른 어떤 분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그 분이 이렇게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인생이 마감되고 이렇게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을 그들은 들어본 적이 없는 거에요. 세상 모든 인간은 살다가 그냥 숨 끊어지면 죽는다 이것만 알고 이게 존재의 전부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예수님은 죽고 그 다음에 어떻게 돼요? 죽으셨는데 안 죽으시는 분으로 살아났지요. 안 죽으시는 분으로.
첫째 시간에 제가 영생이라고 이야기했지요. 안 죽으시는 분으로 살아난 거에요. 죽으셨는데 안 죽은 게 아니고 분명히 죽으셨는데 안 죽은 분으로 살아나버리면 예수님이 죽어야 될 이 세상은 예수님 입장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부정이 돼요. 그리고 통째로 전체로 전부 다 부정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인간도 예외 없이. 예수님 빼놓고 다 부정이 되어버려요.
이것을 너희들이 분간할 수 있느냐? 부정시키는 이 과정이 아까 보았던 58절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지금 58절에 말씀에 끝에 보게 되면 어떤 인간이 재판관에게 재판받고 결국 어디에 가둔다? 옥에 가두어지는 비극적인 결말을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것은 59절에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인간의 그 최후의 모습.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거기서” 이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말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보내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거기라고 하는 거기에 다 가두어 두시는 것을 목표로 율법을 주셨다 이 말입니다. “가거라 거기에!” “어딘데?” 지옥이지요. 하나라도 다 지킨 사람만 빼내주겠지요.
모든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을 빼내주는데 그렇지 않고 여기 일단 가둬놓고 율법을 줘가지고 다 지킨 사람 손 들어 봐라. 단 한명도 없습니다. 단 한명도 없어요. 예수님만 다 지켰지요. 그러나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지요. 거기에 가두어 둔다는 말은 예수님이 경험했던 안 죽는 분이라는 이 체험을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할 권한도 자격도 없다는 뜻이에요. 이게 역사 끝입니다. 인간은 백날 역사 질질 끌어봐야 소용없어요. 모든 규정은 부정입니다. 인간에게 부정이에요. 부정적으로 인간을 보고 있는 거에요. 죄인이라고.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 시대 분별 또는 영적 분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그들이 율법을 보면서 영적이 세계를 자꾸 상상을 해요. 영적인 세계를. 여분으로. 잉여. 남아도는 것으로.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하나님 계시는 하늘나라, 여호와의 나라 있다라고 여분의 것을 이렇게 자꾸 따로 설정을 해요.
그런데 그렇게 설정해버리면 예수님이 설정한 것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이쪽 전면적으로 전부 부정하잖아요. 부정을 하는데 바리새인은 부정한 게 아니고 이 세상과 저쪽 세상의 어떤 연결선이 형성되어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 본질과 우리 본질이 동일하다는 뜻이에요.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아까 첫째 시간 끝날 때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살 때에 자기 혼자 애쓰고 자기 혼자 수고해서 자기 인생을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나는 교사가 되고 싶어 그래서 열심히 나 노력해서 교사가 되어서 직장에 근무하게 되었다 할 때 여러분 왜 많은 직업 가운데 교사가 되고자 합니까 물으면 교사가 안정적이고 60세 될 때까지 계속 한다.
벌써 이미 자기가 본 게 있어요. 들은 게 있고. 타인이 남들이 갖고 있는 것을 자기가 흠모해서 그걸 사모해서 내 것으로 한쪽으로 뚝 떼어낸 거에요. 남들이 갖고 있는 괜찮은 것을 일부러 나도 거기에 같이 유사하게 갖고 싶어 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본질이 동일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교사 된 사람보고 교사가 하는 말이 네가 나하고 본질이 같은 줄 알아?! 하고 이렇게 부정적으로 나오면 교대 간 사람들은 쌩뚱 맞지요. 너하고 나하고 차이점이 뭔데? 똑같은데 선배님 왜이러십니까? 지금 자리 보존할려고 그러십니까? 왜 본인은 교사되고 나는 안 된다는 그런 무지막지한 횡포가 어디 있습니까? 나가세요. 우리가 차지할게요 이럴 수 있단 말이죠. 선배님이 우리보고 교사하지 말라고 할 때 부정적 근거를 제시해 보라면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지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무슨 근거가 있어요. 없지요.
지금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것은 그거에요. 천국 갔던 먼저 선배들하고 자기들이 동일한 본질, 동일한 아브라함의 혈통을 입어 똑같다는 거에요. 차이 나는 게 없다는 겁니다. 그들이 율법 지켜서 구원받았듯이 우리도 율법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율법 지켜서 구원받았냐?” 라고 되묻고 있어요.
아브라함은 율법 지켜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이렇게 되어있지요. “네가 어떻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야 참 사도바울이 배신을 때려도 보통 때린 게 아닙니다. 전에 그렇게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 율법 율법 율법 선생,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그렇게 자처해놓고 어떻게 한순간에 배신을 합니까. 시작을 율법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갈라디아서 3장 3절. 누가 한번 찾아 읽어 볼까요?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어떻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는 이야기를 구약 성경을 100독 1000독 한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구약에서 그 당시 구약이 유일한 율법인데 구약에서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으로 구원받을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인들과 똑같아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 헌금, 예배드리기, 성경공부, 찬송, 전도, 예배 이것가지고 얼추 구원된 냥 여기고 싶은 거에요. 시작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을 한 거에요. start 한 거에요.
그것은 뭐냐? 시작하는 나의 본질과 구원에 이르는 나의 본질과 연속적으로 동일한 연속을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중간에 끊어진다든지 단절되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불필요하다. 나의 모든 수고가 다 헛수고네. 그런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에요. 열심히 하게 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거 있잖아요. 지성이면 감천이고 뭐 그런 문자가 있어요.
뭐든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해봐라! 돼! 율법은 무거운 게 아니야” 성경에 그런 말이 있다고 무거운 게 아니라. 그런데 사도 바울은 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어디에 있다? 저주 아래 있다. 이거는 뭐냐? 처음부터 너는 저주였었어. 조상이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이미 저주였었어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에요. 보통 문제 아니지요.
시작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히 해보지요. 이 버릇을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나쁘다고 평을 하고 그걸 고칠 생각을 하겠어요. 고칠 생각을 안 하지요.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런 말하면서 시작하는 거죠. 뭐. 성공 한 걸음 두 걸음 가다보면 가는 거죠. 정신이 하나 되면 못할게 없다 이 말입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그런데 그 정신이 지옥 가는 정신인데요.
자기 고생만 자꾸 늘어나. 자기 고생만. 자기 고생만 늘어나니까 누구한테 연민을 하고 동정을 해요? 천하에 고생 많은 자기한테 연민을 주는 거에요. 16세 순이가 돌아온다. 세상에 촌에 그 어린것들이 중학교도 못가고 공장에 가가지고 월급 반을 또 엄마 약값 하라고 주고 얼마나 착하노. 착해서 지옥 가는데. 그렇게 착해서 지옥 가는데.
지금 바리새인들의 근본 문제는 뭐냐 하면은 인간의 세계의 자기 세계에 하나님이 협조한다는 거에요. 이 의식. 이걸 요새 버전으로 한번 옮겨 볼까요? 우리 교회 주님 도와주신다 이거하고 똑같은 거에요. 우리 교회에 주님이 도와주신다는 거에요. 이 우리 교회를 대구에 있는 우리교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 주님 도와주신다 이게 말이 됩니까? 여기에 무슨 부정적인 요소가 있어요. 여기 무슨. 십자가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또 달리하면 우리 가정에 주님이 도와주신다. 주님이 주인으로서 밥할 때 밥 하나 더 만들어 가지고 주님 겁니다 이렇게. 이집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우리 가정 주님이 도와준다는 거에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이 말도 안 되는 게. 주님은 주님이 도와주는 것은 주님 안에서 나온 사람만 도와줘요. 주님 안에서. 주님 안에서 나온 사람은 일단 인간세계에서는 없어요. 인간세계는요 이게 저주 받아야 되고 불심판 받아야 돼요.
왜? 율법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준 게 없기 때문에. 맞춰준 게 없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10개 지키고 한 개 틀리고 그게 아니고 하나라도 못 지켜요. 왜 못 지키느냐. 왜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키느냐 하면은 역사의 최종 확인자가 못되기 때문에 그 율법 출제의 취지를 마지막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자기 딴에는 지켰다 하는데 율법 완성자가 보니까 안 지킨 거에요.
“너 왜 출제 의도를 모르냐? 출제자의 의도도 모르고 주관식 네 맘대로 해놓고 네가 지켰다고? 그 의도가 아니잖아 율법이 그 의도가 아니야.”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할려고요?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 그 의도가 율법에 간음 의미가 아니에요. 나는 살인하지 않았다. 사람 안 죽였다 그게 의도가 아니라 남을 미워해도 이미 살인죄에요. 음란한 마음이 있어도 이미 간음죄고. 심지어 탐내는 것도 탐내버리면 저주에요. 탐내는 것도.
탐내는 것 보니까 돌 되기 4일전 애도 탐을 내요. 누나 것 탐을 내요. 잘 먹고 있다가 자기 건포도 5개 먹으면 자기 5개 먹으면 되는데 딱 보니까 7개야. 자기 것 먹는 거 갑자기 멈추고 저쪽 가서 누나한테 두 개 뺏어가지고 자기 것 마저 채우는 것. 이거 꼭 실험해야 됩니까? 이거는 뭐 애 키우는 엄마는 다 아는 이야기에요.
아 가인과 아벨이 여기서 발생되는 구나. 집안 원수가 형제간이 원수사이구나. 내가 죽을 때 1/n로 해야지 유언했다가는 작살나겠구나. 유언장 조작 들어갑니다. 유언장 조작 들어가고 아버지 아프면 약 집어넣어서 죽여버리고 유언장 조작하고요. 어떤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빅마우스라는 드라마.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부정 못하는 이유가 여기 54절 55절 있는 것처럼 천지를 분별할 줄 안다고 자부하거든요. 과학적으로 규칙적인 현상을 파악해내니까 자신감을 얻은 거에요. 과학만 내가 이렇게 지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도 우리가 지키면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지키는 가운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바로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똑같다고 여겼던 겁니다. 같이 의를 추구하고 하나님도 사랑을 추구하고 우리도 사랑을 추구하고 우리도 정의를 원하고 주님도 정의를 원하니까 생각하는 바가 일치한다고 생각한 거에요. 여기 어떤 부정적인 요소가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정적인 요소를 이야기하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보편성들이 보편성 속에 있는 I 들이 나, 나 자아들이 특수성 예수님을 죽였어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특수성이 죽임을 당함으로서 거기서 새로운 보편성이 발생되기 시작한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왜 태어났느냐? 메시아 하나님 죽이라고 인간이 만들어진 거에요. 너무 비약적 논리로 들립니까?
인간이 스스로 부정을 못 만들어내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자극해서 악마를 자극해서 스스로 부정을 만들어낸 거에요. 그 부정된 요소,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 “너 아니야!” 그걸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너 아니야’를 의도적으로 만든 그 현장을 그런 공간을 따로 만들어버려요. ‘너 아니야’가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뭐를 해낼 수 있느냐 하면은 처음 창조의 취지와 원리를 비로소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은혜로 구원되는 것. 은혜. 값없이. 값없이 구원이 비로소 개시가 되는 거에요. 바리새인들은 구약을 그렇게 보면서도 거기에 부정적 요소를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서 구원받은 걸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율법을 아브라함 이후에 430년 후에 온 것이고 그전에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율법을 지켜서 법을 지켜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거에요. 믿음으로.
뭘 믿는데? 이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본인이 본인을 믿으면 이건 믿음 아니거든요. 왜? 부정적인 요소가 없으니까. 그럼 아브라함은 뭘 믿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부정적인 사건을 멀리서 내다보면서 그걸 믿었다는 거에요. 나의 부정적 요소를 믿은 거에요. 나의 죄인됨을 믿은 거에요. 내 안에는 내가 구원될 어떤 요소도 없다는 사실을 앞당겨서 믿은 거에요. 어떻게 알았느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바쳐라 할 때. 그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정된 것은 자기 아들 바칠 때에요. “비로소 네가 나를 믿는지를 내가 아노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이제부터 그 대목을 설명해야지요. 보통 중요한 대목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부정적인 요소를 아브라함 시대는 어떻게 만들어냈는가? 그리고 만들어낸 것이 어떻게 율법요소가 되었는가. 율법 안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부정적 요소를 담고 보내셨다. 율법을 보내신 거에요. 율법 안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율법을 보낸 거에요. 그래서 모세가 내려오면서 돌판 깨버렸잖아요. 율법 깨버렸잖아요. 이게 너희들에게 합당하는 거에요. 너희들은 하나님과 동질성을 갖고 있는 게 결코 아니다 라는 거에요.
이 말은 네가 하나님 나와 동일하지 않다는 말은 너희가 생각하는 신은 모조리 다 우상일 수밖에 없는 그런 본질을 갖고 있다는 거에요. 네가 믿는 신 여호와 하나님 예수 성령 삼위일체 어떤 말을 해도 그게 전부 우상일 수밖에 없는 거에요. 왜? 그 하나님이 내가 부르는 하나님이 나를 부정적으로 간주하는 요소를 스스로 그걸 밝혀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버린다는 사실을 본인은 인정 안 하고 싶은 거에요. 내가 믿는다는 그 수고, 내가 열심히 믿는다는 그 노력 그 노력에 합당한 가치를 내가 얻고자 하는 거에요. 내 믿음으로 내 성과 얻고자 하는 거에요. 그런 식으로 바리새인들이 구약을 보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다는 말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역시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있자. 그래서 복 받자. 지금 이렇게 나와서 이스라엘이 망한 거에요.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에요. 예배시간에 보세요. 예배시간에 벌써 비싼 오르간 쫘악 비싼 데는 파이프 오르간, 보통 교회는 전자 오르간 유학 갔다 온 연주자가 부웅~ 하게 되면 목사가 엔터테이너 아닙니까. 쇼맨십 있잖아요. 성전에서 잠잠할지어다. 하박국 본문하고. 성전에서는 잠잠할지어다. 휴대폰 꺼라 이 말이죠. 음악 쫙 들어가죠. 분위기 무르익어가잖아요.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면서 저기서 벌써 터지기 시작하면서 주여 주여 주여.
그럼 가운 입은 성가대한테 눈빛 딱 보내면 성가대가 합창으로 묵도송 촤악 하거든요. 목사 가운 입고. 인간이 가운을 걸쳤다 하는 것은 유아적 퇴행입니다. 애들 딱지놀이 보면 그때 동화 속 세계를 퇴행하는 거에요. 교황 가운 입는 거나 전부 다 이게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요. 정신적 성숙이 하나도 안 되어있어요. 거꾸로 가고 있어요 지금. 잠잠할지어다 해가지고 남자들 강단에 올라서가지고 지성소니까. 남자들이 설치는 거에요. 그걸 보고 또 밑에 있는 여자 전도사들은 우리에게 목사권을 달라! 도대체 아휴.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뭐냐? 상한 심령이에요. 부정적인 거에요. 시편 51편에. 나는 제사도 원치 않고 예배도 원치 않아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썩어빠졌다는 것 쓰레기라는 것 그것만 원해요. 시시하다는 것만 원한다고 주께서는요. 이런 이야기가 참 중요한데요.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먼저 던져줘요. 약속을 먼저 던져주니까 일종의 그 당시의 율법 아닙니까.
네가 많은 자손의 조상이 될 것이다. 이름도 미리 바꿔줘요. 아버지라는 뜻. 종족의 대장이라는 이름에서 많은 사람의 아버지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준다고요. 이름도 바꿔줬는데 자식이 있어야지.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꾸역꾸역 아브라함은 자기 수고가 나옵니다. 왜 수고하느냐? 이 약속에 대해서 자기가 부정적인 존재가 되기 싫은 거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은 하갈에게 가서 동침해서 애를 낳아서 자기의 상속자로 삼아버립니다. 그게 뭐냐 이스마엘이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뭘 낳게 하느냐. 종의 자식을 낳게 해요. 종의 자식. 종의 자식이 로마서 8장에 보면 이게 종의 자식이 뭐냐 하면은 마귀 자식이에요. 마귀 자식. 인간의 본질은 아무리 해봐야 종의 자식 낳는 것이 이게 다에요. 종의 자식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약이 하나인데 두 개로 만들었어요. 약속의 언약과 종의 언약으로 갈라디아서 장에서 일부러 둘로 나눴어요. 두 개는 결국 겹치지 않는다. 둘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 한쪽이 저주 받는데 왜 저주 받는가? 종의 자식이 곱게 지옥에 가는 게 아니에요. 아주 발악을 해서 약속의 자식한테 핍박을 하고 공격을 하는 그것을 지반으로 삼아가지고 그러 빌미로 삼아가지고 그들은 지옥갈 수밖에 없는 함구할 수밖에 없는 할 말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요.
네가 왜 하나님의 천국 갈 사람을 왜 건드렸어? 이런 빌미를 의도적으로 유도적으로 만들어 버려요. 하나님께서. 종의 자식을 만들어 놓으니까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이 자기 자식 생겼으니까 누구를 멸시하느냐 하면은 사라, 본처 사라를 멸시를 하는 거에요. 그 대목을 한번 보겠습니다. 창세기 16장 4절에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보세요 이게 뭐냐 하면은 뭔가 수고하고 뭔가 업적이 나오게 되면 인간은 가만있지를 않고 본인을 긍정하고 내 쪽에 긍정적이 없는 것을 멸시하는 그 본성이 감추어진 본성이 튀어나오게 되어있어요. 얼레리 꼴레리 멸시하게 되어있어요. 이게 아담의 후손들 다 그래요. 인간은 뭔가 일 터지기 전에 내가 이정도로 부정적인 요소인 것을 몰라요 인간은. 그런데 주께서 자꾸 그런 일을 일으켜가지고 네 주제에 어디 천국을 넘봐 라는 사태를 계속 유발시킵니다.
그러면 아 나 지옥 가야겠구나 이러면 되는데 인간이 그렇지를 않아요. 너는 왜 천국 가는데? 이렇게 되가지고 그 다음부터 핍박이 가하는 겁니다. 나의 수고하고 애씀에 대해서 본인이 잊을 수가 없어요. 본인의 기억 가운데 잊을 수가 없어요. 자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면은 자아는 뭐로 되어 있다? 자아는 기억+기억+기억+기억+로 되어있어요. 기억을 못하는 사람은 자아가 없는 거에요. 나중에 치매 걸리면 자아도 없어요 그냥 본능만 남아요.
사람이 슬프고 아프고 하는 것은 전부 다 기억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기억 중에서도 자기가 잘나갔던 기억. 좋았던 기억. 절대로 인간은 자기를 끝까지 부정적으로 볼 재주가 없어요. 그런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분명히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한 명도 없고 모든 인간은 반드시 종의 자식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종의 자식. 그 시작은 그렇게 하는 거에요.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시작입니다 그냥. 시작 그렇게 하는 거에요.
시작을 그렇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천사 세 명 보내가지고 약속을 던져요. 약속을 던져놓고 약속에 대해서 아브라함이나 사라 부인이 안 믿었어요. 믿지를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은 아브라함이 믿어버리면 아브라함 안에, 사라가 믿어버리면 사라 안에 아담에서부터 내려오는 어떤 긍정적인 요소가 있는 게 돼요. 아담 안에서 어떤 것도 긍정적 요소가 되면 안돼요. 그래서 절대로 믿으면 안돼요. 주의 약속은 인간은 못 믿게 차단되어 있어요. 절단되어 있어요. 두루 도는 화염검처럼. 천사가 하는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이름이 이삭이 됐어요. 그때는 안 믿었다는 뜻. 내가 저 자식이 태어날 줄은 존재할 줄은 못 믿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 낳을 때 기여한 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보태준 게 없어요. 이미 그 자체가 이삭이라는 존재 두고 존재가 이미 차단되어 있어요. 끊어져있어요. 끊어졌는데 없는데서 뭐냐? 로마서 4장 말씀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그 다음에 그 이삭을 어떻게 하느냐? 죽이라 했습니다. “죽은데서 살아나고”
이 일은 없는데서 부정적인데서 있게 하고 죽었다는 부정적에서 살아났다는 긍정. 그럼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아브라함을 택해서 일 한 것은 아브라함, 사라 자체가 부정적이라는 뜻이에요. 부정적인데 그게 시작이 되는 거에요.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 뭐가 나온다? 긍정적인 것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도 된다는 것은 인간의 아담에서 내려오는 모든 그러한 부정적인 것이 차단된 채 성도가 되기 때문에 성도는 통통 튀는 영생 덩어리에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무슨 짓거리 하든지 전부 다 주의 은혜고 주의 사랑이니까 뭐든지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모든 일에. 아브라함한테 바쳐라. 아브라함은 끝까지 자기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아버지 불쏘시개는 있는데 재물은 어디 있습니까?” “재물은 주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뭐에요? ‘여호와 이레’. 준비하실 것이다.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역시 또 단절이죠. 끝까지 단절짔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디서 왔는가? 로마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브라함의 행함을 행함으로 보지 않습니다. 뭘로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부터 내려온 은혜가 거꾸로 주사 놨다고 본거에요. 주님의 역사의 최후 마지막 때 있었던 주님의 주 되심의 긍정성을 위하여 미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했다고 봅니다. 택했을 때 주사를 놓지요. 무슨 주사? 영생의 주사를 놔버린 거에요. 영생주사를 놔버리니까 거기서 나온 게 뭐냐? 자식 이삭, 약속의 자식이 나오지요. 그럼 그건 아브라함 자식입니까? 약속의 자식입니까? 약속의 자녀지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에요. 육의 자녀가 아니고 종의 자녀가 아니고 약속의 자녀가 되는 거에요.
종의 자녀의 반대말은 육의 자녀가 아니고 종의 자녀의 반대말이 약속의 자녀에요. 약속. 약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뭐냐? 영생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약속으로 출발한 모든 것은 통통 튀는 그 자체가 서울 대전 찍고 부산 목포 가도 영생의 공이에요. 통통. 영생입니다. 945번 죽어도 안 죽어요. 영생이기 때문에. 죽어도 안 죽어요. 왜? 주님이 죽어도 안 죽으시잖아요. 죽어도 안 죽으시는 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왔으니까 우리는 죽어도 죽지를 않아요.
죽음이 뭐에요? 죽음이 뭐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요한1서에 나옵니다. 공 안에 영생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요한1서 5장 11절에 나옵니다.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무엇이 없습니까? 생명이 없지요. 하나님의 인간 보는 관점은 딱 이것뿐입니다.
“생명 있냐?”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은 대통령인거 치우고 생명 있냐?” “종교가 기독교인데요.” “기독교는 치우고.” “저 교회 나갑니다.” “교회 나가는 거 치우고.” 생명 있냐고 묻습니다. “생명 있나?” “있습니다.” “그럼 안 죽겠네?” “안 죽습니다.” “그러면 안 죽으면 이 세상에 무서운 거 없네?!” “이번에 사고 났는데 무서웠어요.” 이러면 또.
진짜 무서운 것은 내가 돌변했다는 게 제일 무서워요. 내가 무서워요. 내가. 내가 생각하지 않는 나 라는 게 제일 무서운 이야기에요. 죽는 것이 무섭고 사고 무섭고 돈 없는 게 무섭고 애 아픈 게 내가 코로나 걸린 게 무서워야 돼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이게 율법 안에는 뭐냐? 남아있는 게 아니고 율법은 하나님과 우리와 같이 만들어진 거거든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그러니까 생명도 주님이 우리를 겨냥해서 만들어진 게 생명이잖아요. 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이 생명이 내 것 같으면 내 마음대로 이렇게 손상할 수 있고 망칠수도 있는데 문제는 이 생명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이라서 내가 어떻게 해도 이게 망가지지를 않네요. 이 생명이. 이 영생이 취소가 안 되네. 사람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제일 무서워요. 제일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내 영생 받았다고 천국 간다는 이 사실이 내 뜻대로 되지를 않아요. 무슨 나쁜 짓을 해봐요.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생명이 취소되지를 않습니다.
나한테 해코지한 애 나중에 엎어져라! 이게 얼마나 나쁜 짓입니까. 이게 얼마나 나쁜 짓이에요. 나한테 욕 한 사람 손톱 갈라져라! 이게 얼마나 심한 욕입니까. 그런데 그래도 생명이 이게 취소 안 될 때 우리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래야 됩니다. 이게 뭐야? 괴물이야 뭐야? 본인보고 본인이 놀래야 돼요. 거울 앞에서 두발자국 물러서야 됩니다. 뒤로 훅 넘어가야 돼요. 지하철 들어오는 것하고 마찬가지에요. 노란 선에서 한발자국 물러서야 되듯이 화들짝 뒤로 물러서야 돼요. 왜?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겨버렸으니까. 이게 우리 존재의 질입니다. 존재의 성질이에요.
자, 그런데 지금 기분은 좋지만 그렇게 되는 이유가 요한1서 5장 5절에서 8절까지 나오는데 이게 성경에서 본문 가운데서 어렵기로 만만치 않은 부분이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무서운 거에요. “임하셨다.” 임하셨다 를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물과 피로 임하셨다” 되어있지요. 이걸 두 자로 하겠습니다.
노크. 밤중에 제일 무서운 게 뭐냐 하면은 아빠 분명히 자고 엄마 같이 자는 거 아는데 동생들 다 자는데 갑자기 새벽 2시 42분에 똑똑 두드려보세요. 그것도 쾅쾅 이 아니고 똑.똑. 갑자기 소름이 막 확. 분명히 아빠 엄마 아이들 다 자는데 더 추가될 인물이 없어요. 그런데 똑똑. 누구십니까? 임했다. 주께서 물과 피로 임하시니 곧 누구다? 예수 그리스도가 노크하고 오신 거에요. 물로만 아니고? 물과 피로서 물세례뿐만 아니고 바로 피, 십자가 피로서 최종 물로 시작해서 피로 마감되지요.
물세례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퍼지는 거고 그 퍼지는 것의 마감이 개인의 영향력이 예수님의 물세례가 자기 백성에게 확대되는 것이고 확대의 마감은 비로소 모든 업무가 완료가 됩니다. 종료가 돼요. 종료. 완료보다 종료라는 말이 더 기분 좋지요. 모든 게 끝났어요. 피입니다. 피로 끝났어요. 피로 임하셨으니.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는 것은 추가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료된 피를 증거하시는 분이 성령이에요. 성령이 추가적인 자기 도움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구원은 예수님으로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셨어요.
다 이루었음을 다 증거하는 것이 뭐냐? 성령이 바로 진리다. 성령이 바로 예수님의 영이다 라는 뜻이에요. 피로 증거하는 노크하고 들어오신 거에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사도 바울은 요한1서는 사도 바울이 쓴 게 아니고 사도 요한이 쓴 거고요. 사도 바울은 달리 표현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라” 십자가만. 또는 “예수의 피로 너희가 사하심을 얻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너희가 창세전에 예비하사 예수님의 피로 그 피로 용서를 받았으니” 이것은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피를 뿌림으로 네가 거룩함을 입었도다” 피 뿌림으로. 택함을 받음. 피를 뿌림으로. 히브리서 13장에서는 ‘피 언약’이라고 되어있고.
그러니까 한결 같이 지금 사도들이 이야기하는 현실은 어떤 현실입니까? 이 세상의 특수성이 등장했고요. 그 특수성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을려고 하는 이 모든 것을 이 세상 부정성 속에 같이 쓰레기로 밀어넣어버리고 어떤 인간도 가로막고 구원받지 못하게 밀어버리고 오직 특수적인 그 피만 앞장세워 피 소식만 이야기해서 다 이루었다. 피로 다 이루었다 그걸 새 언약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언약, 이게 새 언약이고 새 언약이 마지막 언약이고 더는 다른 계약은 없어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예수님의 피죠. 우리 피가 아니고 예수님의 수고하심이에요. 그 수고하심을 모독하지 않고 그걸 수용하는 사람은 주님의 수고로움이 그 안까지 들어와서 영생을 줘버려요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와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증거용으로 이렇게 하신 거에요. 그게 성령께서 함께 있으면 성령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우리도 피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죠.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
여기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오직 증거할 때 어떤 인간의 증거도 거부하고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맞춰야 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피가 모든 인간을 부정적으로 봤다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인간의 행함과 수고와 희생은 일체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고 받아주지 않습니다.
자, 끝으로 갈라디아서 5장 10절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여러분 이게 무섭지 않습니까? 주님이여 제가 그 정도 가치 있습니까? 본인이 본인에게 놀래야 돼요. 누구든지 성도를 건드린 자는 내가 지옥불이 보낸다 그 뜻이거든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에요.
세상에 무서운 일은요 우리가 안 해야 될 짓을 할 때는 무섭지요. 그럴 때 무서움을 예상하면서 무서워하는 거에요. 안 해야 될 짓을 했을 때.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나는 가만히 있는데 누가 나를 건드리니까 그게 지옥 간다. 갈 때 그거 고소하다 이렇게 이야기할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게 합니까? 내가 뭔데? 내가 뭔데 저 사람이 나로 인하여 지옥가지? 도대체 내가 그정도였었었었었었어??
그러니까 이거는 뭔가 노력하자 지키자 가 아닙니다. 왜냐면 내 노력과 내 수고가 섞이면 안돼요. 그냥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가 이렇게 무서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건드릴 때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죠. 어느 유명한 영화의 대사입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그럼 저쪽에서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주님의 증인된다는 것은 우리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주의 영이 생명이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나쁜 짓하지 말고 이게 아니고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주신 이건 내 뜻이 아니거든요. 주의 뜻으로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왜 우리를 안 알아주느냐? 세상 사람들은 천기는 알아줘요. 태풍의 진로 계산하면서 태풍이 1번 해안으로 갑니다. 천기는 잘 알아요 지금. 천기는. 기상예보는 기차게 알아. 지금 금리인상이 울트라스텝으로 밟아가지고 따라서 내일 우리 주식은 2400 무너질 겁니다. 환율은 1495원까지 오릅니다. 그거는 예측을 잘해요.
잘하는데 네 옆에 누가 있는 것을 모르는 거에요. 네 옆에. 네 옆에 아브라함이 있는걸 모르는 거에요. 모세가 있는걸 모르고 엘리야가 있는 것을 모르고. 베드로가 몰랐어요. 우리 곁에 예수님만 있었지 예수님 옆에 모세 있고 엘리야 있는지 몰랐습니다. 세상 분별할 줄 몰랐지요. 그저 주님 따라다닌다고 우리는 너무 긍정적이지 그렇지?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나 모세, 엘리야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얼마나 부정적입니까?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언제 별세하십니까? 지금 그 이야기했다고요. 주님이 가만 기다려봐. 제자들이 날 팔아먹어야 돼. 조금만 기다려봐. 변화산에서 그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의 이야기를 들어야죠.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십자가에요.
우리 구원이 아니고. 나 긍정하라는 게 아니고 십자가고. 십자가 앞에서는 예수님 긍정만 나오고 우리 긍정은 안 나와요. 예수님의 긍정이 나오니까 우리는 죄인중의 괴수라는 그런 사도 바울의 고백이 아주 웃으면서 나오는 거에요. 아주 즐겁게 나오는 거에요. 충분하게 부정당하고 마땅하고 그 이유가 뭐냐? 주님의 생명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생명이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고 주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영생의 나라에 들어온 티를 팍팍 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말씀 중심으로 다시 보게 하옵소서. 들었던 풍월로 보지 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성령 주시면서 세상의 현실이 어떻게 정확하게 바뀌었는지를 이제는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