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3장 1절 (예상 못함) 221004a-이근호 목사
오늘 누가복음 13장 1절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현대인들은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쉽게 다가오지 않지요. 빌라도, 여호와 믿는 나라의 총독 또는 통치자 또는 세금 받는 담당관. 로마제국 본국을 대표해서 남의 나라에 파견해서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로서 행세해서 계속해서 로마 제국에 기여하기 위해 행정하는 사람 빌라도지요.
빌라도는 그 나라의 일종의 뭐가 되느냐 하면은 초법 존재, 법을 초월한 존재. 초법 존재를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스스로 법을 만드는 자’. 스스로 법을 만드는 자. 스스로 만든 법 안에 너희들도 법을 스스로 만드세요 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학교에 담임선생님이 애들에게 수학문제를 출제할 때 그 출제하는 선생님은 학생에게 초법 상태에요.
그런데 선생님은 법을 초월하는 수학문제를 내면서 이런 수학문제는 내지 않아요. 너희들이 문제내서 너희들이 풀어라 하는 그 문제는 내지 않지요. 학생의 한도를 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야 계층이 성립돼요. 계층이. 이 계층을 뭐로 표현하느냐? Veil. 막. 베일에 쌓였다 뭐 신비에 쌓였다 그런 말 있잖아요. 막으로 이렇게 둘러 가름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도 법을 누가 만들어요? 하나님이 법을 만들었잖아요. 하나님이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그 자부심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의 휘장으로 또는 더 알기 쉽게 율법의 모기장으로 이스라엘을 공간적으로 확 둘러쌌다고 봅시다. 몽골 유목민들이 집이 동그랗게 공간을 동그랗게 덮어버렸지요.
율법으로 와가지고 율법이 이스라엘 전체를 덮어버리면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하면은 율법 안과 율법 밖이 생겨버립니다. 율법 안과 율법 밖. 이 안에 율법 안에 이스라엘 들어있죠. 이스라엘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안이라고 하고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은 율법 밖이 됩니다. ‘율법 밖’. 이거는 율법 때문에 자동적으로 이거는 뭐냐 하면은 저주의 세계가 되고 이 안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복의 세계가 되요. 복의 세계. ‘율법 안’.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는다 라는 그 계시 자체가 축복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제가 율법으로 표현했지만 이걸 달리 생각하게 되면 왜 율법 받은 것 자체가 복이냐. 이 율법이 언약입니다. ‘언약 안’. 그리고 이방 나라는 뭡니까? 하나님의 언약 바깥이 되는 겁니다. 언약 밖은 저주라고 하는데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내어버려두사’. 이건 뭐냐? 버려진 존재. 버려진 존재에요. 뭘 빼놓고 버려진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율법 언약에 의하면 모세 언약에 의하면 이스라엘 빼놓고 다 버려진 존재에요. 이스라엘 빼놓고.
그래서 언약적 사고방식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는 언약적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세계가 두 동강 나요. 두 동강. 하나의 베일, 하나의 휘장처럼 차단되는 겁니다. 이쪽은 뭐냐 하면은 율법 안이기 때문에 이걸 아까 복이라고 했지요. 다른 말로 합시다. 본문과 관련해서 이걸 거룩이라고 하고 그러면 거룩의 반대말 율법 밖은 뭐가 되겠습니까? 저주의 세계가 뭐가 되느냐 세속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스라엘에 줘 놓고 이 세속, 세속이 나중에 신약에 가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세상이 되는데 세상이 돼요.
이 세속에 대해서 유혹받지 마라. 다른 말로 하면 현혹되지 말라. 이걸 광야에 쭉 오면서 이스라엘에게 늘 반복의 당부의 당부하는 것은 애굽을 본받지 말라. 자, 율법의 내용이 뭐냐? 애굽 본받지 않기가 율법의 내용입니다. 율법에서 하지마라 하는 것은 이미 400년 동안 430년 또는 400년 동안 히브리인들이 율법에서 몸에 베이도록 습관화된 것들이에요.
하지 마라 하니까 그걸 고칠 수 있어요? 없어요? 하나의 이건 문화인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없는데서 이렇게 새로운 백성을 만들었으면 하지 말라가 의미가 없어요. 갓난아이한테 뭐뭐 하지말라가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애가 자아가 생기고 뭔가 뭐 이렇게 좀 익힌 게 있으면 그 다음부터 무엇이 의미가 있느냐 하면은 “이러지 마!” 가 의미가 생긴다니까요.
어린이집에 보내야 “집에 오면 손 씻어야지!” 가 성립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어린이집이고 뭐고 갓난애가 어디 간 적도 없는데 “손 씻어야지!” 그럼 애가 “응? 이게 무슨 말이야.” 뭘 하라, 하지마라가 의미가 생길려면 이미 하지 말라에 해당되는 그 상황 속에 푹 젖어있었던 자들에게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죄 짓지 말라는 말은 시편 51편에 나오지만 이미 인간은 죄 안에서 이미 태어났기 때문에 죄 짓지 말라가 성립이 되는 거에요. 의미 있게 성립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성도에게 성경에 사도 바울의 뭐 하지 마라 하는 것은 우리 출신이 죄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내가 율법에 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누가 관할하느냐? 본인이 초법 상태에요. 내가 하고 안 하고는 내 의사, 내 의지에 달렸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율법이 딱 오니까 율법은 외부성이에요. 주어진 계시니까. 율법이 딱 오니까 아니 내가 평소에 무심코 했던 것조차도 하나둘씩 그게 뭐로 들통 나느냐 하면은 죄로 들통 나는 것. 그래서 우리로 할 말을 잃어버리고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거에요. 우리의 본성을 주께서 너무 잘 아시니까 우리의 본성대로 한다는 것은 나올 게 죄 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율법을 주신 거에요.
그렇게 될 때에 더 근원적으로 더 들어가면 이스라엘에게 애굽을 본받지 말라 라는 말을 애굽에 있을 때는 이야기 안 하고 거기서 나와서 하나님의 그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의해서 포획된다, 포획된다는 말 아시죠. 옴팡 이렇게 잡혀있는 것. 포획. 사로잡히는 것. 율법에 사로잡힐 때 요새 말로 하면 성령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할 수 있지요. 율법에 사로잡힐 때에 비로소 애굽을 본받지 말라는 말이 아까 그게 의미 성립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애굽에 있을 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을 때는 그들이 왜 자기들의 모든 것이 죄인 줄 왜 몰랐을까요? 지금 오늘 누가복음 13장 1절에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대들었지요. 세금을 가져가도 너무 가져가니까 빌라도는 로마 사람이잖아요. “네가 왜 우리 동네 와서 돈 내놔라 이렇게 횡포하고 군대 동원해서 네가 뭔데 치안을 장악 해가지고 우리의 자립성을 빼앗는가. 네가 뭔데” 하고 반란하니까 갈릴리 사람들 데모하는 걸 가지고 총으로 쏴서 죽여버렸다 이 말이죠.
그래놓고 자기는 제우스 신에 제사드릴 때 그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어서 드린 거죠. 그거는 그들이 제우스 신이 누굴 이겼다? 여호와를 이겼다. 따라서 제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러이러한 신을 이겼습니다 라는 그 증거로서 제물이 바쳐지니까 여호와 믿던 사람들을 제우스 믿는 우리들이 이겼습니다. 제우스 신이여 영광 받으소서. 충분히 할 만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여호와를 모독하는 게 되는 거에요.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봅시다. 애굽에서 있을 때 왜 히브리인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몰랐습니까?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율법이 없을 때 왜 죄인인줄 몰랐었느냐? 이게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있어요. 그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초법적 존재로 활동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것이 죄다 의라는 것을 누가 결정하고 싶으냐 하면은 인간의 이성으로서 결정한 거에요.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히브리인들도 그러했고 애굽 사람들도 그러했어요.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했다 결정을 내가 내린다. 왜? 내가 내리겠다는데 다른 사람이 뭐 할 말 있나? 내가 잘했으면 잘한 거고 내가 못했으면 못한 거야. 그리고 그걸 우렁차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렇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다 그렇게 해 다들. 다들 그렇게 살거든요. 애굽에 있을 때에.
지금 애굽에 있는 그 히브리인들 하나님의 율법으로 포획해서 따로 두 동강내서 짤라내니까 게 죄다, 아니다를 내가 내릴 수 없고 하늘에서 주어진 그 율법, 모세를 통해서 율법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알았고 이스라엘은 이제 알게 되었죠. 내가 법을 만들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된다는 사실을. 이 말은 내가 내 운명을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에요. 여호와 하나님께 달렸지 나한테 달린 게 아니다. 내 미래와 과거가. 그래서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만 벌렸잖아요.
유월절도 그렇고 특히 열 번씩이나 재앙이 주어지는데 그건 애굽의 술객들이 고백했어요. “바로 왕이여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고집부리지 마세요. 이것은 신이 하늘에 있는 신이 일이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합니다.” 어떻게 같은 애굽에 있으면서 파리 재앙부터는 애굽 사람들만 재앙을 내리고 같은 지역에 있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재앙이 안 떨어졌어요. 4,5,6,7,8,9,10. 희한한 일이죠.
뭔가 재앙을 내리시는 그 신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둔다는 거에요. 차별을 두는 거에요. 사람과 사람을 차별을 둔다는 말은 하나님의 그 법의 핵심이 뭐냐 하면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를 두겠다가 율법을 두신 핵심이 돼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 그럼 이 사람들은 누구고 이 사람들은 누구냐? 궁금하지요? 궁금할 수밖에 없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는 대구강의에서 제가 언급했어요. 하나님께서 법에 의해서 악한 존재라고 한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그냥 사람들이에요. 그냥 사람들. 그냥 사람들이고 이쪽에 있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법에 의해서 새로 지음 받은 사람. 이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차이를 두는 거에요.
한쪽은 하나님의 언약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 이걸 신약으로 하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네가 누구의? 예수의 증인되리라. 예수님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과 그냥 털레털레 자기 혼자 가는 사람과 이게 차이가 나는 거에요. 그 차이의 시초는 뭐냐 하면은 바로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으로 구분되는 겁니다. 첫 번째 아담은 사람이고 두 번째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한 사람이죠. 그럼 성도는 어디에 속하는가? 성도는 보통 사람에 속한 죄인이죠. 죄인인데 언약에 의해서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사람이 되요. 사람인데 예수님의 사람. 이걸 로마서 6장에서는 의의 종이라 하는데 본인을 내세울 것은 일체 허락받지 못한 존재. 그게 성도입니다.
자기 행한 것, 자기 수고한 것, 애쓴 것 일체 그거 내세울 수 없도록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이 알아서 죽여버린 자, 이게 성도에요. 성도. 성도는 자기 팔자, 자기 인생이란 없습니다. 팔자가 있더라도 주님의 팔자지요. 주님의 팔자, 주님의 운명.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의 운명이 그대로 복제가 된 사람이 성도지요. 예수님의 팔자. 그래서 예수님의 결과만 흠뻑 먹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침투하고 이 땅에 오시면서 있었던 경험했던 그 체험까지도 성도한테는 복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사람이 아니고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버지께 속했다 또는 하늘에 속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와요. 요한복음 8장 나는 하늘에 속했다.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다. 그래서 너희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예수님께서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오늘날 교회 목사들은 왜 알아듣게 설명한다고 그렇게 애를 쓰는지.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에요. 알아들으면 안돼요. 주께서 못 알아들으면 못 알아들어야 돼요.
그런데 못 알아듣는다는 자체가 교인들을 분노케 합니다. 왜? 본인 구원을 받기 위해서 왔는데 못 알아듣는 말만 하게 되면 그들이 교회 찾아온 보람이 없잖아요. 돈 들고 온 보람이 없잖아요. 봉사한 보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분노하지요. 분노한 이유가 사람들이 예수님께 분노한 이유는 뭐냐?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지혜와 이런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분노해서 예수님을 죽여버린 겁니다. “내가 어때서! 내가 어때서” 라고 막 화내는 거에요.
그럼 주님께서 네가 너를 판정하는 기준을 한번 제시해봐라. 그게 선악 기준이거든요. 그러면 율법적 기준으로 해볼래? 내 산상수훈 듣고 한번 해볼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볼래? 자, 오른손한테 오백원 줄게.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궁금해? 궁금하면 오백원. 오백원 줄게. 오백원 받았어요.
자, 오백원 받았다고 치고 여기에다가 오른손에다가 마취 주사를 놔요. 왼손이 이걸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알지요. 서로 뇌에 정보망이 연결 다 되가지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다 알게 되어있어요. 진짜 오른손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되면 이거는 부부생활도 못합니다. 남편 왼쪽만 보고 누구세요? 이런다니까요. 오른쪽 보여주면 아 그렇구나.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준 것은 인간의 현재 기존의 인간이라는 것 말고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함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창조하는데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단어를 하나 끄집어낼게요. 예상 못함입니다. ‘예상 못함’. 오늘 누가복음 13장 계속 나오면서 1절 2절 3절 4절 계속 나오면서 항상 이걸 먼저 염두해둬요. 예수님이 하는 일은 예상 못한 일.
예상 못해야 새로운 인간이 나올게 아니겠습니까. 뻔히 기존 인간 다 알아버리면 그게 뭐 무슨 새로운 게 있겠어요. “기존의 인간이냐? 그럼 네가 도저히 예상 못 할 일을 내가 일으키리라.” 그래야 예상 못함을 경유해서 새로운 인간상이 등장하는 거에요. 그러면 예상 못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여기 예상 못함을 보여줄 그러한 역할을 할 그런 배우들이 필요하겠지요.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유대민족이에요. 이스라엘.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있는 그들이 예상을 하게 만들어놓고 그들이 예상한 예상 못함을 예수님께서 집어넣어서 여기서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내는 그 작업으로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나서신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율법에 의하면 그 율법에 의해서 거룩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율법에 의해서. 율법 자체가 이미 거룩이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보면 율법 자체에서 거룩을 만들어지는 그 경로에는 항상 예상 못함, 예상 못함이 계속해서 연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감안할 수 있지요. 성도의 삶은 항상 예상 못해야 돼요. 이쯤해서 디스크 나아야 하는데 이런 거 없어요. 항상 내가 신경 쓰는 것은 주께서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신경 쓰지 않는 일이 터지게 만들고.
그리고 내가 신경 쓰지 않는 그 일이 터져버릴 때에 주님의 해결책은 신경 쓰는 일이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것을 제공함으로서 네가 신경 쓰는 것이 신경 쓸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방식으로 자기 성도를 이끌어가요. 항상 예수님을 내 소유로 소유화 못 시키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애굽 생활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나의 인생에 충실한다는 것이 이게 우상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바른 인간 만들어서 경건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이 어떻게 그게 우상적 행위입니까? 어떻게 죄가 됩니까?” 라고 묻고 따진다면 그건 이미 당신이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답변이에요.
“율법대로 살고 성경대로 살면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것은 바리새인이나 해라.” 바리새인이나 해라. 바리새인은 인간이 예상한 대로 코스 밟아서 신학 체계 세운 자들이에요. 그러면 바리새인, 율법대로 살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겠다는 정 반대편에 정 극단적인 반대편에 뭐가 있는가?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도적이 있지요. 살인자. 그리고 절룩발이, 간음한 자, 문둥병자 이런 사람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인간들은 달리기를 하면서 저쪽 산 위에 골인지점을 산 위에 꽂아 놨어요. 그러니까 토끼도 까분다고 가고 거북이도 땀 뻘뻘 흘려가면서 같이 가고 토끼도 가끔 뒤돌아보면서 “거북아 빨리 와! 너 언제 올래?” 나중에 졸다가 추월당한 경우도 있겠지만. 땀 뻘뻘 흘리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 목표점이 인간들이 설정한 예상한 그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반대쪽에 십자가 쪽에 이미 거기서 “이리와~ 여기가 천국이야” 하고 있단 말이죠. 거기에 뭐가 있는가? 사람들은 그 자리를 왜 못 봤는가? 휘장이 있기 때문에. 막이 있기 때문에.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차단 막. 실루엣만 보일뿐이지 거기 들어갈 방법이 없어요. 막이 있기 때문에. 율법은 막이에요. 어느 누구도 뚫을 수 없어요. 인간은 할 수 있는 것만 최선을 다할 뿐이지 자기가 뚫을 수 없는 것은 손도 못 대지요.
율법이라는 실루엣, 그림자 보면서 ‘아! 우리가 양심껏 바르게 착하게 살면 얼추 율법을 이루겠구나’ 라고 내놓은 그 대안들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신학. 개혁주의 신학. 칼빈, 루터 신학이 그거에요. 칼빈, 루터 신학 아니어도 신천지도 다 포함되죠. 삼위일체도 포함되고 정통신학.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 인간의 이러한 선악체계가 율법을 만나가지고 더욱더 선악체계를 공고히 하는 그 죄악을 유감없이 드러냈거든요. 그 취지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중요한 단어 뭐라고 했습니까. 항상 예상한 것을 우리가 해내겠다는 겁니다. 예상한 것을. 아프가니스탄 있잖아요. 그걸 장악한 그 종파가 텔레반입니다. 텔레반은 이슬람 코란을 공부했던 신학생들 그룹이 텔레반이에요.
그 텔레반들이 총 들고 이제는 가시적인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왕국을 율법적 이스라엘 코란적 왕국을 세우겠다고 내놓은 법이 예를 들면 두 가지 예를 들겠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하늘에는 알라신이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연을 못 날리게 만들었어요. 이건 바보도 아니고. 바보 아니고 실제에요. 연을 날리면 알라신이 사는 하늘나라가 뭐가 왔다 갔다 하면 짜증나잖아요. 짜증나면 어떻게 됩니까? 하늘에서 노해가지고 벌 내리니까 하지 말라는 거에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해요? 거의 미치광이 수준이죠.
그러나 그 징크스가 우리에겐 없습니까? 한국교회는 없어요? 그리고 여자들이 매니큐어 발랐다고 손가락 잘라버렸어요. 텔레반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상당히 미개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그 미개함을 갖고 있는 것을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인간입니다. 그게 애굽이에요. 애굽. 인간. 그리고 애굽에 살던 자들이 율법에 의해서 포획되어서 광야에서 율법을 받지요. 그러면 율법을 받은 그들의 본성은 애굽 사람하고 똑같지요.
그래서 율법에서는 하지 말라가 그렇게 많아요. 남자가 여자 옷 입지 말고 여자가 남자 옷 입지 말고 부터 해가지고 뭐 동성애부터 뭐 애굽에서 다 했던 거에요. 뭐 먹지 말라는 것도 애굽에서 다 먹고 있던 거고. 어쨌든 간에 몸에 밴 애굽 사람들 그 사람은 출애굽에 의해서 유월절 날에 의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으로 내가 간주한 적이 없다.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뭐가 됩니까? 쓰레기죠. 쓰레기. 쓰레기가 되는 거에요.
이걸 율법대로 표현할게요. 이걸 율법대로 표현하면 부정의 더미. 부정이라는 것은 더럽다는 뜻이에요. 더러움의 더미. 더러운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거에요. 그러면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율법으로 가두고 데려왔다는 말은 부정적인 존재를 없는 존재가 아니고 애초부터 부정적이고 쓰레기 같은 존재를 거룩한 내 백성으로 만들겠다고 주께서 끄집어낸 거에요.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본인의 예상 밖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리고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율법의 기본 원칙을 받아들이기가 곤란한 거에요. 바르게 살면 먹을 건 주겠죠. 땅은 주겠죠 이런 식이에요. 내가 누구냐 라는 것은 관심이 없고 주께서 더러운 것 하지 말라 하면 그건 안 하는 거에요.
정작 더러운 것은 누구냐 하면은 그 일을 하고 안 하고 결정하는 본인이 더러운데 본인 더러운 것은 싹 그것은 모르고 나는 안 더럽고 개구리 저런 건 더럽다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 더럽다의 결과를 통해서 모조리 다 더럽다로 주께서는 율법으로 이끌어냅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어떤 동물의 피든지 사람의 피든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게 오늘 13장 1절에 관련되어 있어요. 1절하는데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 더 설명할 게 많이 남았어요. 레위기 17장에 보면 거기 잘 나와 있어요. 인간의 피를 먹거나 마시거나 그리고 인간의 시체와 접촉하게 되면 더럽다. 더러운 존재가 된다. 이것만 생각하면 여러분 이해하실 거에요. 인간에게 수련이 소용없는 이유는 내 안에 내 것이 아닌 것으로 꽉 차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 내 안에 내가 아닌 타인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어요. 내 안에 집단이 들어와 있어요. 내 안에. 백날 수련해도 소용없는 이유가 내가 수련해도 남들이 어떤 비싸고 좋은 옷을 입고 가게 되면 수련한 것, 도 닦은 것 헛방입니다. 그래야 옷 장사가 또 돼요. 신상 나와야 돼요. 신상 나와서 약을 올려야 돼요. 이벤트 벌리고 해야 돼요. 이번 기회 아니면 같은 값에 두 개 못 삽니다. 벌써 다 팔렸습니다 이런 거 해야 돼요. 약을 올려야 돼. 그래야 안달이 나가지고 다음을 기다리지.
나는 지금껏 내가 생각한 나만 정결하게 순화시키고 정화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준비된 어떤 일들은 지금의 내가 정화된 그 모든 것을 한방에 엎어버리고 거기에 현혹될 만한 요소가 또 새롭게 발생해버려요. 내가 알았던 나를 지금껏 제대로 몰랐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예상 못해요. 어디로 튈지를 모릅니다. 어디로.
그래서 이스라엘 율법에서 부정이란 내가 잘못해서 내가 하나님께 벌 받는 게 아니고 그 공동체에서 추방되는 것을 의미해요. 그 공동체에서. 공동체에서 추방한다는 말은 네가 있는 것 내가 있고 내가 있는 것 네가 있는 그런 율법적 취지를 같이 공유하는 그러한 집단이 되었다는 것을 율법으로 완전히 규정을 시켜놓은 거에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한다. 안식일에. 율법에 의하면 돌로 치라고 되어있어요. 돌로 치라 할 때 안식일 어긴 자기가 돌로 칩니까? 아니지요. 남들이 와서 돌을 치도록 되어있어요. 남들이. 남이 뭐냐 하면은 기존에 있던 이스라엘, 같은 율법을 받은 같은 이스라엘 종족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종족이라는 공동적 요소에서 개인이 과연 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못합니다. 빠져나갈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만약에 아이성 칠 때 아간이 범죄했잖아요. 그러면 돌로 칠 때 누가 칩니까? 아간이 자기가 자기를 칩니까? 아간 빼놓고 다 치지요. 그 말은 뭐냐? 어떤 인간도 자기를 돌로 칠 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은 새 사람 아니기 때문에. 새 사람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럼 새 사람은 돌로 칠 수 있습니까? 있지요. 예수님.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 요한복음10장에 나와요. 그래서 목자다. 그럼 양들은? 양은 없어요. 목자가 죽어야 양이 생겨요. 목자가 죽고 난 뒤에 그 피로 말미암아 그 새 언약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그 공동체가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이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은 있다? 없다?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내가 예상한대로 주님께서는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 피라고 하는 것은 예상 밖의 일입니다. 우리한테 이해하라고 납득되라고 흘린 사건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기 위해서 십자가 죽으신 거에요.
왜냐 하면은 내 안에는 나 말고 남들이 궁시렁 소리가 너무 많아.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살 수밖에 없어요. 이건 대구강의 때 이야기했지요. 내 안에 타인의 욕망이 들어있다고. 그런데 그 타인의 욕망이 뭐냐? 종족이에요. 종족. 그래서 인간은 인간 세계에서 율법이 없는 계시가 없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그런 종족들은 전쟁을 벌일 때 어떻게 벌이는가? 종족 대 종족으로 싸움을 벌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5:4로 5개의 종족들이 4개의 종족이 싸움을 하는데 어느 땅을 점유하느냐? 소돔과 고모라 땅을 접수하기 위해서 싸움을 벌이죠. 그런데 거기에 애꿎은 누가 포로 잡혀 있느냐 하면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잡혀있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318명 사병을 데리고 갔어요. 물론 혼자 간 게 아니고 연합군을 조성해서 가가지고 거기서 자기 조카를 데리고 옵니다. 그게 창세기 14장이에요.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됩니까?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져서 그 제일 좋다는 그 비옥한 땅이 잿더미가 되지요. 이것도 예상 못했습니다. 심지어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 내린다고 약속은 했지만 본인 롯과 롯의 처도 거기 사위들도 딸들도 아무도 예상 못했어요. 약속은 했는데 예상 못했어요. 얼마나 이게 롯이 더디 가기에 급하기는 급했던 모양이에요. 천사가 강제로 질질 끌고 나왔어요. 롯의 가정을.
꼭 오늘날 우리 같아요. 우리 같애. 말씀 안 듣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강제로 듣게 만들어버리지요. 사건을 일으켜서. 항상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시 설명 드리면 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느냐? 우리는 자신을 가치 있다고 늘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너는 더럽다고 부정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느낌이 없는데. 우리가 그런 감각이 없어요. “이 나이가 어때서?!” 맨날 이래요. “내가 뭐 어때서” 이런 식이에요. “내가.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산다고 노력했는데.”
주께서 율법으로 부정하다고 이렇게 규정하는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항상 대단한 존재로 조작해요. 자꾸 구차한 변명들을 하면서 억지를 부리는 거에요. 잘 될 거야. 맨날 잘 될 거야 노래 불러. 쨍 하고 해뜰 날. 해하고 자기하고 무슨 관계있다고. 맨날 잘 될 거야.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그런 이야기.
전부 다 율법을 뚫지 못하고 율법을 보면서도 율법을 자기 긍정으로 오인해서 잘못 해석들을 하면서 그것을 율법 안에 저주 안에 있는 이 세계에 기독교란 이름으로 천주교란 이름으로 유포를 시킨 거에요. 교회를 세워놓고. 인간 긍정하는 그 이야기를 유포를 시켜놨습니다. 유포를 시키면서 거기 성경에 있는 개념들을 다 동원해서 유포를 시켜요. 개념 하나하나에 긍정을 담는 거에요. 삼위일체, 천국, 성령, 십자가, 성령의 열매. 전부 다 이거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러한 긍정적 의미를 담아서 유포를 시키는 거에요.
아까 텔레반은 매니큐어 바른 손가락 자른다 했지요. 주님은 더 심합니다. 오른 팔 잘라버려요. 오른 눈이 범죄하면 그건 빼버리라고 했어요. 초법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주께서 인간에게 허용 안 합니다. 왜? 더럽기 때문에. 그래서 베일, 그 장막 바깥에서 초법적 존재가 율법을 따라와요. 그걸 가지고 저는 슈퍼보드. 슈퍼보드 알지요? 슈퍼보드. 하늘을 나는 슈퍼보드. 안 그러면 해변가에 보트 타는 거 있잖아요. 보드 잘 타면 보드를 이렇게 엎드려서 탑니까? 서서 탑니까? 잘 타는 사람은? 서서 타죠.
율법을 주님이 서서 보드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에요. 그게 보드 중에 보드 슈퍼보드. 율법을 이루면서 율법을 따라서 타고 오는 거에요. 동요에 그런 거 있잖아요. 은하수를 타고 내려오는 천사 처럼요. 율법을 타고 주님께서 오는 거에요. 모세 언약을 타고 오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다 이 땅에서 이루시는 거에요. 이루면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부정이 하나님의 거룩이 되어버리죠. 더러운 게 아니고 깨끗함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율법을 다 이룬 거에요. 그게 뭐냐? 로마서 3장의 화목제물이고 바로 이 13장 1절에 나오는 유대인들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최종적인 제사가 화목제, 화목제물을 모독한 걸로 화가 나서 예수님께 지금 원통함을 지금 고발한 거에요. 저 빌라도가 우리의 율법을 모방해서 우리 이 거룩한 약속의 땅, 율법의 재물을 드려야 될 땅에 그들은 성전에서 제우스 신전이 아니고 이 성전에서 갈릴리 사람들 피 섞인 제물을 드리면서 노골적으로 여호와의 화목제물을 모독한 거에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누구 편을 듭니까? ‘그래 빌라도 잘못되었어. 아이고 너희들은 그렇게 율법 열심히 지켰구나’ 칭찬한 게 아니고 ‘너희들은 과연 화목제물이 어떤 제사인줄 아느냐? 너희들은 화목제물을 모독하지 않았느냐?’ 라고 되묻는 장면이 2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거에요. 그런데 망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말을 이걸 복으로 듣고 율법을 다시 보기, 율법을 다시 생각하기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들은 전혀 그게 아니에요. “우리가 뭐?! 우리가 뭐가 잘못됐는데?” 흔히 복음 듣고 사람들이 대드는 이유가 “교회 가는 게 뭐가 잘못됐는데? 헌금 하는 게 뭐가 잘못인데? 헌금 할 때 뭐 돈 사랑해서 하나?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헌금을 했는데 이건 성령의 역사인데 성령의 역사도 죄냐!!” 이렇게 따지거든요.
성령 뒤에 누가 숨었는데? 성령을 빌미로 해서 그 뒤에 누구도 같이 겉절이로 같이 끼어들라고. 나도 괜찮은 존재잖아 끼어들려고 하는 그 심보는 어떻게 하고? 성령이 뭡니까? 십자가 영이잖아요. 십자가는 뭡니까? 모든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원수였다를 드러내는 것이 십자가다 이 말이죠. 심지어 제자들마저.
오직 십자가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여럿이 아니였어요. 오직 예수의 피잖아요. 예수님 개인의 한분의 피라고요. 한 분의 피. 두 번째 시간에 이걸 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게 한 분의 피라고요. 인간의 피를 왜 안 받는가? 아까 했지요. 인간 속에 뭐가 많다? 타인이 너무 많아요. 같은 죄인의 종족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그들은 화목제 두 번째 시간 되기 전에 먼저 이거 말씀드리고 10분 쉽시다. 화목제의 제물은 누구만 먹을 수 있느냐? 제사장만 먹을 수 있고요 제사장. 차이 납니다. 일반인은 안돼요. 그것도 왼쪽 다리? 아니요. 오른쪽 다리. 그것만 먹을 수 있어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3장 1절 (예상 못함) 221004b-이근호 목사
빌라도가 제우스 신에게 무슨 제물 드렸던 그거는 상관없는데 갈릴리 사람들 피를 섞어서 한 것은 바로 노골적으로 빌라도가 의도한 거라고 보는 거에요. 율법에 나와 있는 신에게 드리는 제물을 하지 말라 하는 식대로 그대로 한 겁니다. 그 식이 뭐냐? 레위기 17장에 보면 나와요. 레위기 17장에 보면 제물에 절대로 피를 접촉하거나 피를 섞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레위기 17장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레위기 11장 32절에서 35절에 보면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주검이 나무 그릇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자루에든지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부정이 뭐라고 했습니까? 더러운 것. 율법이 있음으로서 없던 부정들이 확산되고 확대되기 시작하는 거에요. 없던 부정들이. 이렇게 하면 더러워진다는 말은 애초부터 너희들은 이미 더러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 더러움의 실체를 내가 드러내마. 그런 취지로 율법을 주신 거에요.
33절에 보면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34절 “먹을 만한 축축한 식물이 거기 담겼으면 부정하여질 것이요” 이게 원인이 뭐냐? 시체와 접촉됐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래요. 시체와. 35절에 “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화로이든지 깨뜨려버리라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뭐로 전제로 합니까? ‘너희들은 거룩하다’ 라고 전제하면서 너희들이 거룩한 너희가 시체 만지면 더러워진다 라는 자체를 율법화시킨 거에요. 이걸 하나의 베일로 베일, 하나의 장막을 해서 포획해서 둘러쳐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백성들 입장에서는 ‘아 우리가 거룩하구나’ 가 아니라 이 거룩을 유지하는데 급급하게 만들어버렸죠.
새로운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점점 더 거룩을 유지하는데 힘들어져버려요. 아버지가 로또 해가지고 만약에 10억을 집에 뒀다. 그런데 아버지는 출타 중인데 빚쟁이들 와가지고 “너희 집에 돈 많으면서 잔소리 하지 말고 3억 내놔.” “우리 집 돈 없다니까요.” “저기 3억 있네. 있잖아! 있으면서 왜 없다고 해! 가져간다.” 아들이 의아해하는 거에요. 이 3억이 언제 생겼지?
그 다음에 또 다른 빚쟁이가 와서 “5억 내놔!” “5억? 우리는 5억 구경도 못했는데.” “저기 있네 5억 있네.” 아버지가 언제 5억 뒀지? 그러니까 아들은 예상 못한 일이 벌어진 거에요. 언제 우리가 10억이나 있는 부자가 되었지? 마지막 남은 2억까지 다 긁어갈 때 아 역시 우리는 거룩해서는 안 되는 가정이구나.
끝까지 거룩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고 그 거룩을 율법이 와가지고 거룩이 나한테 해당사항이 없음, 네가 거룩 받을 그런 쨉도 안돼 그것을 들추어내는 것도 율법적 기능이에요.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인간은 처음부터 부정하다는 것을 율법을 준 이스라엘에게는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율법 중에 하나가 뭐냐? 화목제물. 화목제물이고 모든 제물이고 그래요.
자, 그럼 여기서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왜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느냐? 왜? 왜 인간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느냐? 창세기 9장 4절에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난히 피에 대해서 인간이 살인을 하거나 남을 죽여서 피를 흘려서는 안 되고 또는 짐승의 피나 사람의 피나 피를 마셔서도 안 된다 라고 언급하는 그 이유가 뭐냐? 창세기 4장에서 땅이 나와요. 땅이. 땅이 대사를 해요. 드라마 같으면 땅이 대사가 있어요. 그냥 폼만 잡는 게 아니고. 대사가 있어요 땅이. 땅이 하늘을 보고 호소합니다. 고자질을 해요.
그 말은 땅과 하나님 사이에 이미 계약이 성립되어 있어요. 어떤 계약이 있는데 그 계약은 뭘 하느냐 하면은 어떻게 하면 땅이 더러운 땅이 저주 받은 땅이 정화되는 땅, 깨끗해지는 땅, 거룩한 땅이 되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어떻게 땅이 정화될 수 있는가. 그 땅이 정화되는 것을 점차적으로 들추어내면서 뭐부터 언급하느냐 하면은 이런 식으로서는 땅이 정화되지 않는다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이런 식으로서는 땅이 정화되지 않는다.
자, 땅이 처음부터 더러웠습니까? 아니면 땅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러웠습니까? 어느쪽이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 땅이 저주 받았어요? 저주 안 받았어요? 저주 안 받았지요. 그땐 저주 안 받았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더럽다는 것, 부정 탄다, 저주받을만하다, 심판받아야 돼. 그 더럽다는 것 그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원래 없어야 될 게 발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뭐냐? 죽음이에요. 죽음은 죽음이라는 것은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죽음은 애초부터 죽음 계획이 없는 게 아니고 죽음 자체가 현실화돼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선악과 따먹지 않을 경우에는 네가 죽지 않고 추가적으로 주는 보너스가 있어요. 죽지 않고 그 다음에 생명나무를 마음껏 따먹을 수가 있어요. 만약에 선악과 따먹는 날에 뭐부터 후딱 치워버리느냐 하면은 생명나무부터 따먹을까 해서 후딱 이렇게 격리시키는 조치가 주어집니다.
그 추방시킨 곳이 어디냐? 그게 땅이에요. 대지에요. 대지. 범죄 한 인간이 땅에 떨어짐으로서 땅은 그때부터 엉겅퀴와 그 저주받은 양상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또는 땅의 입장에서 뭐를 증명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빈틈이 없이 착착 추진되고 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지요.
그래서 인간들 보기에 땅은 그냥 땅이지만 땅에 cctv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에 아벨에 나왔던 그 피가 죽었잖아요. 죽으니까 피가 나왔단 말이죠. 그 피가 나왔다는 것은 누가 죽음을 유발했다는 뜻이거든요. 그 죽음을 유발한 그 범죄로 인하여 죽음을 유발한 그것이 땅에 도달되니까 그것이 뭐냐? 땅을 저주케 하는 요인이 되는 거에요.
땅이 더러워지겠지요. 땅이 더러워진다면 지금 무엇을 모독한 것이 되냐면 땅의 정화, 땅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한 하나님에게 대해서 도발적인 행위가 되는 겁니다. 마귀가 가인을 부추겨서 그런 짓을 한 거에요. 땅을 개판으로 만든 거에요. 땅을 개판으로. 그러면 대구강의에서 했지만 그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 언급을 했거든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게 결국 뭐였던가요? 뭐를 점유했던 건가요?
우리가 살 땅을 내가 점유하는 게 그들의 구원 개념이에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내가 점유 하는 거에요. 이 말은 인간은 무엇이 없이는 못 산다? 인간은 땅 없이는 못 산다. 오늘날에도 성도는 땅 없이는 못 살아요. 오늘날 성도의 땅이 하늘나라입니다. 우리 주님의 땅이 성도의 땅이 되었어요. 그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 이 땅 말고 저 땅이다.
그래서 대구강의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 이유는 떨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엘리야로 하여금 맛있는 짜장면, 짬뽕 많이 주는 게 아니라 까마귀로 음식 주는 이유가 엘리야가 갈 그 땅은 불수레 타고 가야 될 그곳이에요. 그 엘리야가 나중에 변화산에서 누굴 만나서 이야기합니까?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누구 만납니까? 예수님 만나지요.
모세가 약속의 땅 봤습니까? 못 봤습니까? 자기 살아 있을 때. 못 봤지요. 약속의 땅은 보다 발전된 진전된 언약에 의하면 그 땅은 땅이 아닙니다. 율법의 땅이라는 것은 새로운 땅을 다시 완성을 시킬 때 예수님의 세계가 아들의 나라가 곧 새로운 땅으로 등극해서 그 땅에 자기 백성들 다 끌어모으는 거에요. 새로운 이스라엘 다 끌어모으는 거에요. 그게 성령 안이에요.
그래서 제물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들이 저질러놓은 이 더러움을 정화시키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제사법을 준거에요. 여기서 중요하지요. 제물은 목적이 인간 정화가 아니고 뭐냐 하면은 땅의 정화에요. ‘땅의 정화’. 인간 거룩이 아니고 땅의 거룩이에요. 땅을 정화하고 그 다음에 땅을 먼저 정화하고 이게 순서입니다. 땅이 먼저 정화되고 그 정화된 땅에 과연 살 만한 인간이냐? 정화된 인간을 여기에다가 두게 만드는 거에요.
어떻습니까? 개인 구원 없지요. 개인 구원 날라갔습니다. 인간 구원 없습니다. 땅의 구원이죠. 땅. 땅부터 먼저 깨끗하게 하고 그 땅에 살 만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해서 거기에다가 인형 만들어서 심어놓는 거에요. 인형처럼.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뭐냐? 인형이죠. 거룩한 땅에 살 만한 거룩한 인형. 작은 아씨들. 뭐 드라마를 봐야.
그 땅을 정화하는 방법이 뭐냐? 그거는 인간을 재껴버려요. 인간을 재끼고 따로 다른 인간을 세웠어요. 그 다른 인간을 기존의 인간과 차별화시키는 새로운 인간, 그게 제사장입니다. 그게 제사장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왕이 있는 나라가 아니고 누가 있는 나라냐? 제사장이 있는 나라. 그래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 제사장의 나라에요.
그 제사장 중심으로 한 분으로 집약된 분이 누굽니까? 대제사장. 제사장도 마찬가지로 보통 인간이잖아요. 아까 제가 첫째시간에 인간과 이스라엘을 구분했지 않습니까. 언약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체. 율법이 완성되면 사람의 인격이 나오는데 거룩한 율법으로 완전히 형상화시킨 대상이 누구냐 하면은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은 전체가 모자부터 해가지고 발끝까지 심지어 속옷까지 전부 다 거룩이에요. 거룩. 전부 다 거룩이에요. 그런데 그 제사장 안에 들어 있는 몸은 누구의 몸이냐? 범죄 한 아담의 몸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인간은 이미 아담으로 범죄했기 때문에 더러운 거에요. 더러운 인간을 깨끗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적용되는 율법과 땅에 적용되는 율법과 같은 율법으로 양쪽 다 발라버려야 되지요. 양쪽 다. 양쪽 다 발라버려야 되는 거에요.
그럼 땅에는 짐승이 있을게 아니에요. 양, 소, 염소. 거룩한 것을 흠 없는 것들을 택하여서 인간 재끼고 그 제단에 사람이 죽는 게 아니에요. 누가 죽습니까? 땅의 짐승이 죽는 거에요. 땅의 짐승이. 땅의 짐승이 죽는 거에요. 땅의 짐승이 죽을 때 그걸 대신해서 죽는 겁니다. 그러면 그 본질 부위를 누가 차지하느냐? 짐승이 차지하겠지요. 인간을 재껴버립니다.
인간을 재끼고 인간을 대변해서 다른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을 대신하여 짐승이 등장하지요. 그러면 거룩한 짐승이 주가 되고 종속되는 것은 인간이 종속되겠지요. 그러면 인간의 피는 안돼요. 더러워서 안돼요. 짐승의 피는 돼요. 짐승의 피를 가지고 제사장 오른 귓부리부터 오른팔, 오른 발가락까지 전부 다 그 짐승의 기름과 짐승의 피를 거기에다가 적셔야 돼요.
속죄제할 때 또는 제사장 임명식할 때 합니다. 그것뿐만 아니에요. 속죄제, 번제제 모든 제사에는 짐승의 피를 제단에 사방에다가 바르고 성막 입구에다가 그 피를 뿌립니다. 제단에도 뿌리고 성막에도 뿌리고 온 천지 피로 도배를 하듯이 뿌려대는 거에요. 피가 뭐겠어요? 피가 거룩과 더러움을 가름하는 하나의 베일이 되는 거죠. 막이 되죠. 막.
인간의 피는 안 된다고 했지요. 이 말은 뭡니까? 인간의 피는 안 된다는 말은 더러운 것을 옹호하는 식의 믿음은 허용되지 못한다. 더러운 것을 옹호하는 식의 믿음. 이게 뭡니까? 인간의 행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간주한 적이 없다. 믿음으로 간주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계는 양을 잡을 때 양 바치는 사람이 잡거든요. 제사장이 잡는 게 아니에요. 양 바치는 사람이 양 잡고 제사장은 피만 뿌리고 안수하고 하는데 안수하는 것도 그 사람들이 안수하고 제사장이 처리하는데.
그러니까 양의 피를 바른다는 말은 항상 무슨 뜻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계는 양을 잡을 때 그들이 잡았잖아요. 제사장들이 피 뿌렸잖아요. 그 선을 이스라엘은 못 넘어가는 거에요. 양 잡아도 우리가 잡았는데. 우리 제사장이 제사 드렸는데. 그게 뭡니까? 제사장도 더럽고 양 바친 사람도 더럽잖아요. 더러운 것을 옹호하는 식의 믿음은 허용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율법에 양 잡으라고 해 놓고 양 잡았는데 양 잡은 그게 죄가 되는 거에요. 그러면 어쩌라고?! 그게 주의 뜻이에요.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그냥 율법 시키는 대로 저주 받아야지 뭐 어쩌긴 어쩌겠어요. 율법으로 구원될 수 없어요. 그럼 복은 언제 받습니까? 주제에 복을 넘보기는. 네가 율법을 알어? 내가 추가적 율법 줘볼까? 네가 과연 복이 언제 저한테 옵니까 이런 소리 나오는지 율법을 한 번 줘봐?!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디모데전서 6장 한번 볼까요?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이 왔으니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라” 한번 해볼까? 우크라이나 난민 한번 만들어봐?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로 아는 것. 통장이고 펀드고 없어요.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고마운 줄 알아 이것들아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것도 율법이잖아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거든요.
그러면 그 나라 의를 구할려면 그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게 그 나라 의를 구하는 게 아니에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않아야 그게 그 나라 의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눈만 뜨면 염려하는 게 그건데. 이게 체질화됐는데 무슨 수로 그걸 끊어요. 손목가지 끊는다고 끊어질 거 같으면 끊지요. 안돼요. 손모가지 끊고 모가지 다 끊어도 안돼요. 나머지가 퍼떡거리면서.
이걸 보고 제가 인간은 예상한 것만 예상해요. 인간은 예상 못합니다. 주님의 구원을 예상할 수가 없어요. 제발 양 되지 말고 염소 되지 말고 희생 소 되지 말라는 거에요. 왜? 그럴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왜 자꾸 인간을 재끼고 재끼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빈자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만 한 일.
그 일은 우리가 못하는걸 예수님이 해내신 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뭘 못하는지를 예상 못해요. 주님이 일을 다 이루었다 해야 아! 저걸 예상 못했구나 비로소 예상 못한 것을 소급해서 뒤늦게 발견하는 걸 이걸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내가 저걸 몰라서 죄인이고 저걸 몰라서 우리 보고 행하지 말라는 이유가 저기 있었구나. 이 말은 이미 완료된 이야기에요. 주께서 못한 것을 우리가 예상 못한, 못한 것을 다 이뤘기 때문에 뒤늦게 우리는 아는 거에요.
아버지가 로또 됐구나. 그래서 빚쟁이가 5억 달라 3억 달라 이게 되는 구나. 나는 아버지 한 푼도 없는 줄 알았지. 10억이나 있었구나. 이미 다 이뤘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것만 원합니다. 원하는데 그것도 우리 보고 원하지 않고 원해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미 주께서 다 이루고 받을 거 다 받았다는 것을 그냥 통보해주는 거죠. 늘 통보해주는 거에요. 너는 너 수고한 것과 네 예상한 것 가지고 미혹되지 말라. 그게 교만이라고. 그게 세상에서 종교적으로 생각해서 잘못된 거룩과 부정의 개념이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이런 이야기가 레위기 7장 32절 보겠습니다. “또 너희는 그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화목제물은 하나님께 바치는 거에요. 제물은 하나님이 먹으시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먹고 하나님 맛있게 먹었다는 그 후담 뒤에 주어지는 ‘내가 네 제물 받았어’ 라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표가 뭐냐? 그것이 제사장에게 화목제물의 일부를 제사장 몫으로 주는 거에요.
그러면 제사장의 집안이 먹을 게 생기지요. 그럼 제사장은 목숨이 부지가 돼요. 누구 덕분에? 하나님이 기쁘게 제사를 흠향하는 조건하에 제사장은 생계가 목숨이 보존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연결고리가 되느냐 하면은 이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은 누구한테 매여 사는 사람이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율법에 전적으로 매여 사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이게 제사장이에요. 율법이 없었으면 제사장이라는 그 직책 자체가 없고요 거룩이라는 것도 성립되지를 않아요.
자, 제사장이 거룩한 이유는 외부에서 주어진 뭐가 왔다? 피. 짐승의 희생제물의 피가 몸에 오는 거에요. 몸. 자, 보통 인간들은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어디로 표시가 되느냐? 표징으로 나타나는가? 이게 육체로 나타나거든요. 마음속에 있는 것이 육체로 나타나요 인간은. 이걸 징표라고 또는 징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육체의 징표로 나타나는 것, 이게 뭐냐 하면은 제사장의 신체입니다. 제사장의 신체고 생활모습이고 활동모습이고. 제사장은 과부하고 재혼하면 안돼고요 제사장은 처녀하고만 결혼해야하고 조항들이 계속 있어요. 제사장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었느냐 하면은 제사장에 종속된 나로 만들기 위해서 제사장 하나를 율법화된 인물로 만드는 겁니다. 율법화된 인물.
그러면 율법이 없었으면 제사장은 더러운 인간이죠. 더러운 인간인데 보라 저 제사장이 거룩한 인물이 되었잖아.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제사장이 역시 주께서 우리를 알아주는구나 이러면 안돼요. 왜냐 하면은 제사장의 속을 채우는 것은 본인의 마음이 아니고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꽉 채워진 자가 제사장이에요.
그러면 아까 뭐냐? 땅의 정화가 우선이라고 했지요. 땅의 정화. 그럼 땅은 어떻게 되는가? 다시 말해서 레위지파, 제사장.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는 조건하에 땅은 약속의 땅은 생산물을 내게 되어있어요. 생산물을 내었다는 땅의 징표도 또 내야 돼요. 땅의 징표가 씨앗을 뿌리니까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 그걸 1년 단위로 세 차례 절기를 만들어서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갖고 와야 돼요. 그게 유월절, 맥추절, 추수하는 수장절. 초막절 또는 칠칠절. 그렇게 해서 세 개의 절차가 거룩한 땅에서 인간이 살 인간이 새롭게 등장한 거에요.
자, 그렇다면 거룩한 땅을 왜 거룩케 하느냐? 하나님께서 왜 거룩케 하느냐? 그 땅에 하나님 자신이 거기서 살려고 해요. 이게 임마누엘이거든요. 그러니까 너희를 살려줄게 가 아니라 너 구원해줄게 가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 오면 돼 이게 하나님의 구원이에요. 내가 있는 곳에 오면 돼. 나와 합류하면 돼. 신명기 12장 한번 봅시다.
12장 5절에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동해서 어떤 특정 지점을 찾아가요. 그 특정 지점이 뭐냐 하면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땅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이 자기 거주지를 장만할려고 그 약속의 땅을 정복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건이 있어요. 12장 12절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18절도 마찬가지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왜 레위인을 자꾸 두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름이 여기에 현존, 여기 실존이죠. 하나님 여기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안 보이잖아요. 율법으로 꽉 찬 레위인, 제사장. 그 레위지파가 자꾸 증표를 보여주는 거에요. 주님 여기 계시다고. 주님이 여기 계시고 그 가운데서 레위인이 주님 계신 것을 빙 둘러서 있으면서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레위인이 계속 보여주는 거에요.
보여주는데 일반 백성들은 그 보여주는 증표를 증표라고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은 예상 못할 일들이 일어날 때 아! 예상만 하는 인간들 말고 초법적인 존재,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와 함께 있구나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레위지파 또는 제사장을 통해서 매일같이 받는 거에요. 매일같이 받는 방법은 뭐냐? 십일조 드리는 거죠. 십일조.
십일조 방향이 이렇거든요. 십일조를 드릴 때 자체순환구조를 갖고 있어요. 십일조가. 왜냐하면 십일조 드리는 그 곡물이 누가 생산한 겁니까? 죄인인 인간이 생산한 겁니까? 더러운 인간이 생산한 거에요? 아니면 하나님이 생산한 겁니까? 하나님이 생산한 거에요. 그러면 땅은 누구 땅인데? 하나님 땅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이거는 임대차 계약인이죠. 품꾼이에요. 품꾼. 레위기 마지막에 나옵니다. 28장에. “너희는 내 종들이다” 이 땅에서 농사는 짓되 세금은 바쳐라 하는 거에요. 임대차 계약.
하나님의 곡식 나올 때 적당한 햇빛과 그리고 비와 태풍 가뭄 다 없게 해주시는 것이 누굽니까? 하나님 본인이 거주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기 수고죠. 자기가 수고해서 곡식 얻었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그 중에서 몇 분의 일을 가져온다? 1/10을 레위지파한테 바치고 제사장은 누구한테 바치고?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바친 것은 화목제물로 도로 제사장에게 주어지고 레위인에게 주어지게 되면 레위인과 제사장은 누구 덕분에 삽니까? 백성 덕분에 사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분 덕분에 사는 거에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하고 자기 백성하고 너희들 나랑 같이 살자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 땅에서 나랑 같이 살자. 그러면 십일조를 드리는데 10분의 9는 노동하는 자기 몫인가? 아닙니다. 왜 아니냐 하면은 이게 안식일 날 6일 동안 노동했잖아요. 하루 쉬었잖아요. 그 6일 동안 노동한 게 하루 쉬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10분의 9는 10분의 9를 가져가기 위함이 아니라 십분의 일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10분의 9를 가져가게 남겨두는 거에요.
10분의 9는 10분의 1이 없었으면 발생되지 않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10분의 1을 자기 소유하지 않는 거에요. 그럼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10분의 9를 가진 사람이 자기 외부에 두겠지요. 하나님께 두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뭐냐? 십일조에 종속되겠지요. 그 십일조가 히브리서에 7장에 멜기세덱 예수님입니다.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는 그 존재, 실존하는 존재의 내가 여기 현존하는 존재가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운명, 그게 성도의 운명.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보이는 내가 그분의 증표로서만 존재하는 그런 처지. 그게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걸 성령을 받으면 네가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멜기세덱에서 온 10분의 1에서 주어진 10분의 9. 다시 말해서 선물이죠. 뭐든지 배우자든 결혼이든 결혼 안 하든지 자식이든 직장이든 뭐든 재산이든 부동산이든 전부 다 선물입니다. 모든 게 선물이에요.
그러면 그 10분의 1에 해당되는 자가 결국은 레위인한테 드리고 레위인은 또 누구한테? 제사장 드리죠. 그 제사장이 하나님과 제일 근접한 위치의 제사장이 있어요. 레위지파의 땅은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있기 때문에 레위지파 땅의 특징은 인간 소유의 땅은 레위지파는 없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이렇게 되어있어요. 하나님 자체가 레위인의 기업이다. 하나님 자체가.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제사장의 특징은 내 것 없어도 괜찮아요. 내 소유 없어도 괜찮아. 나는 왜냐하면 내 것이란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내 것 자체가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의 것으로 그 자체로 종결되기 때문에 주님의 것에서 내 것 따로 뽑아낼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부산에 시장 가면 오뎅 어묵 있잖아요. 질문해볼게요.
여러분 오뎅이 똑같습니까? 다릅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오뎅 꼬치 똑같아요? 달라요? 이 세상에 같은 어묵은 없어요. 다 다르지요. 볼록볼록 튀어나온 게.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합니까? 다른 어묵 주세요 하지 않아요. 그냥 어묵 달라하면 막대에 꽂은 거 그거 주잖아요. 어묵은 똑같지요. 제 말은 다양성 속에서 하나다 이 말이죠. 제가 말한 건 다양성 속에 하나에요.
그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다 다른데 오어묵 박오뎅 홍오뎅 최오뎅 이오뎅. 오뎅이 거기서 거기지 뭐 그 맛이 그 맛이지 뭐. 뭐가 달라요 똑같죠 뭐. 인간은 바로 같다는 것부터 자기가 알아야 돼요. 다같이 더러워요. 성도만 깨끗한 게 아니고 다같이 더럽고 부정해요. 다같이 부정하고 다같이 쓰레기에요.
서울대 나온 쓰레기하고 고대 연대 나온 쓰레기하고 다른 쓰레기 아닙니다. 어묵은 서울대학교 앞에서 파는 어묵이나 고,연대 앞에서 파는 어묵이나 똑같은 어묵이에요. 한번 먹으러 가볼까요? 똑같잖아요. 우크라이나 어묵이나 미국 캐나다 어묵이나 똑같아요. 오뎅은. 부산오뎅이나. 인간은 똑같습니다. 다 부정해요. 더러워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들어와봅시다. 왜 피를 먹지 말라는지 알겠지요. 더러운 건 안 받기 때문에 그래요. 더러운 것. 이 땅이 하나님이 계신 땅이기 때문에 감히 인간이 네가 감히! How dare you! 네가 감히! 하나님 계시는 땅이에요. 인간들 땅이라고 우리끼리 아닙니다. 우리끼리 민족은 북한에서 하는 거고요. 우리끼리 민족. 우리끼리가 아니에요. 오뎅끼리 뭐하겠다고.
주님이 함께 있어요. 그게 임마누엘이에요. 그 주님이 누군데? 인간은 매개로 하지 않는 신은 신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사람으로 오신 그 분 중심으로 뭉쳐져요. 그분이 영원한 제사장이에요. 그분이. 그분의 피로 그 외부적인 피로 우리가 깨끗함을 얻습니다. 피 말고 다른 거 없어요. 믿음은 피를 경유해요. 진짜 믿음은 피만 남기고 나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에요. 오뎅을 없애고 주님만 보이는 거에요. 그게 믿음이에요. 오뎅인 줄 다 아는데 쓰레기인 줄 다 아는데 뭐 그걸 새삼스럽게 이쁜 쓰레기 좋은 대학 나온 쓰레기 그거 뭐할라고 신경 씁니까.
누가복음 본문 한번 봅시다. 13장 4절 “실로암에서 망대” 무너졌지요. 이제 여러분 해석하셔야 돼요. 실로암의 망대 왜 무너졌는가? 무너지라고 있는 거에요 그거는. 그러면 여기서 깔려죽지요. 왜 깔려죽습니까? 깔려죽으라고 있는 거에요. 이게 주의 일입니다 이게. 원래 안 깔려죽어도 깔려죽었어요 이거는.
오뎅이 깔려서 묵사발 되는 경우도 있고 연탄가스 새는 오뎅도 있을 것이고 교통사고 난 오뎅도 있어요. 마포대교 뛰어내린 오뎅도 있고요 그것도 살려낸 오뎅도 있는데 살려내봤자 그 살려낸 그 인간도 오뎅이에요. 노벨상 타도 오뎅이고 수학 필즈상 받은 사람도 오뎅이고요. 수학 잘하는 것은 수학 잘한다는 것을 예상했다는 거잖아요. 예상한 것은 안 받아줍니다.
보세요. How dare you! 어떻게 감히 나에게.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네가 감히 가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걸 왜 그런 거 네가 왜 신경쓰느냐? 어딜 나한테 감히! How dare you! 어딜 감히 나한테. 죽은 자가 죽은 것뿐인데 그걸 섭섭하다느니 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느니 이렇게 나오면 안되지요 뭐 이런 식으로 시비조로. 죽은 자가 죽었다고 그런데 살아있는 너는 안 죽은 줄 알아? 죽은 자만 오뎅이냐? 산 자도 오뎅이야 이런 뜻이에요. 이해 쉽지요 이제. 이해 팍 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이 사람들은 율법을 제사를 자기가 지키고 있다는 거에요. 그들은 자기가 제사 지킨 것으로 부정하지 않다고 우기는 자들이에요. 제사 지내면서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었던 거에요. 제사 지내는 본인을 부인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보면 제사 지내는 그들도 죽었잖아. 죽음을 가지고 그들의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제사의 한계를. 죽었잖아. 그러나 예수님은 살았잖아.
제사 지내고 죽었다는 말은 제사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고 제사를 지내고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말은 제대로 된 제사를 지내신 분은 바로 누구? 주의 이름밖에 없어요. 주의 이름이 어디 가있느냐? 오른손에 가있어요. 오른손. 그러니까 율법 안에 오른쪽, 오른 손이 계속해서 하나의 암호로서 들어가 있는 거에요.
왜냐? 주의 이름은 하나님 오른편에서 일하는 곳이 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곳이 하나님의 오른편이기 때문에. 그 오른편의 증표가 제사장의 육체로 증표로 남기는 거에요. 오른쪽 다리 그걸 먹으라 함으로서 율법을 먹으라 함으로서 율법이 인물과 만나서 제사장을 통해서 증표로 가시화되는 거에요. 증표로.
그러면 오늘날 증표는 뭡니까? 내가 십자가 죽었으니 그 다음에 그 증표, 십자가 죽었다는 다 이루었다는 증표가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의 신체화되어서 나타나면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식으로 증표가 나타나지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는 식으로 나타나지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요.
오뎅 먹으라면 오뎅 먹고 도시락 먹고 도시락 먹고 숨 쉬라면 숨 쉬고 이거 누가 한 거에요? 주님이 하신 거죠. 주님이 하신 걸로 우리는 하루하루 채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끝으로 복음 안 할 수가 없어요. 유미리가 이야기 했던 복음. 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채우려 하겠습니까? 주의 십자가 은혜로 주님의 살아계심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은 율법 지켜서 거룩하다고 자부했던 그 시대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죽은 결과로서 오늘날 저희들이 성령 받아 성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를 주장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있음을 우리 몸에서 만끽하며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