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상처
2022년 8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5
(3:1)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3:4)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3:5)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람이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과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과 세 가지 점에서 차이남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관계를 맺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관계에 대해서 대자연이 같이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사람의 편리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색시로서 선택당했다는 겁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자신의 처지와 하나님의 일방적 관계 사이의 괴리 현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마치 사람이 혼인을 해서 각자 남편으로서, 혹은 아내로서 살지만 결국 상대방을 위해 살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는 않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담 안의 자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 본인이 증명하고 싶어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과연 일이 잘 풀렸는지를 본인이 나서서 평가하겠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내가 과연 전보다 더 행복하냐로 정하겠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서 왜 일을 벌리시느냐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도 없고 알 수 싶지도 않고 관심조차 없습니다. 내가 행복하냐가 모든 것이 마감됩니다.
즉 행복을 향한 욕망 때문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주변 나라에 인간의 행복 본능을 자극할 만한 종교들로 둘러싸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정상적 관계가 틀어져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이러한 변화에 주변 나라들 뿐만 아니라 기후까지 동원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자연의 변화가 이스라엘의 태도와 무관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대자연까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징후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과의 혼인관계에 돌입되어 있기에 이스라엘은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거주하고 있는 약속의 땅의 형편을 제시하십니다. 1절에 보면,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어느 가정에 불화가 생기면 누가뭐라도 그 가정의 가족까지 상호 원만하게 해결하게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길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생각은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살던 거주지(예를 들어, 서울 같으면 마포구)가 온통 더러웠으니 여기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차원이 율법이 주어진 차원입니다. 인간들의 사적인 이익과 행복을 말하기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 안에 담겨 있는 그 사실로 채워지는 현실을 따로 마음두신 겁니다.
땅에 대한 율법적 차원은 이렇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레 25:3-5)
즉 땅도 휴식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하나님께서도 같이 계시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야망을 그 땅에 적용하게 되면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율법대로 나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안식’을 위해서 나서시는 조치는 역대하 36:20-21에 나와 있습니다.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드느냐가 중요한 점이 아니라 땅이 강제로 안식했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다는 겁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같이 계신 하나님을 참으로 힘들게하셨다는 겁니다. ‘아담 안의 인간’은 자기 야심을 스스로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아담 안의 인간’이 ‘주님 안의 인간’으로 바뀌게 된 자들이 등장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 안의 인간형을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무슨 의미인 줄로 모르고 홀로 사는 마냥 본인의 야망을 하늘을 향해 쏘아올립니다.
즉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과 통하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저 높은 곳의 하나님’은 실상은 악마입니다. 아담 안의 속성을 그 악마가 충실하게 활용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저 낮은 곳에 계십니다. 인간이 높은 곳을 향하여 자기 야심을 달성하려고 한다면 이는 십자가와 점점 멀어지는 양상입니다.
반면에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는 엉뚱한데로 질수하고 있는 자기 백성을 막아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상처를 내면서 그들을 예수님 쪽으로 이끄십니다. 갈라디아서 6:17에 보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만든 환상을 현실이라고 우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그 약속의 땅에서 몰아세우십니다. 전쟁은 인간의 손실이나 노력이 들어가야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곡의 전쟁에서 그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승리해 버립니다.(겔 39:9) 이스라엘은 그저 무기를 모아서 7년 간 땔감으로 사용하는 신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남편되시는 주님이 노고와 희생으로만 남겨져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방식입니다. 아내는 그 남편의 하신 일에 찬양하고 신뢰하면 됩니다. 자신만의 행복을 따로 노리고 들어갈 것이 아니라 남편과 더불어 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그 사랑의 선택의 결과물입니다. 다시는 이 세상에서 다른 식의 행복을 찾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그럴려면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의 증표는 십자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환상이 아닌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흘리심 밖에 없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예레미야 3장 1~5절(주님의 상처)22082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1053페이지입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 노를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두시겠나이까 하지 않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의 차이점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일단 사람을 상대할 경우는 상대방의 마음만 누그러뜨리면 대충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상대하게 되면 무엇이 떨어져 나가야 하느냐 하면 첫째는 나에게 유리하냐는 그 사실이 떨어져 나가고 두 번째로는 이 대 자연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관심사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맺어주신 하나님과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너무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면 잘 이해가 안 되겠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단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라고 나와요. 기상청에 근무하는 사람 같으면 이 말이 황당할 거예요. 메탄가스의 증가, 탄소의 증가로 지구 온난화가 어떠니 하며 그런 식으로 자연기후를 설명하는 것이 마땅한데, 여기 보게 되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고 다른 신을 찾는 것 때문에 날씨가 바뀌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과 상대할 때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입니다. 그리고 여기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1절에 나옵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가정문제로 시작했는데, 마치 가정문제 상담하는 것처럼 시작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라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예를 들어서 서울에 마포구에 한 가정에서 불화가 있어서 남자가 바람피우고 여자는 애를 먹여서 돈 저지레 해서 남편이 삐지고 하는 사랑과 전쟁에 나오는 그런 내용이 되었는데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 정리할 시간을 갖도록 2주간의 냉각 기간을 갖자는 식으로 정리를 해야 하는데 ‘당신들 때문에 마포구가 더러워진 것을 당신들이 어떻게 책임질 거냐?’라고 마포구를 왜 걸고넘어지냔 말이죠. 우리끼리 사적인 우리 가정문제인데 ‘당신 때문에 서울특별시가 더러워졌느니라’라는 이게 지금 사람이랑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상대할 때는 그것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거예요.
유럽에 날씨 덥고 비 안 온 것과 극동에 어떤 사람이 우상을 섬긴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개인 문제가 아니라 네가 거주하는 땅의 문제가 너의 사적인 행복에 관해서 푸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과 너의 관계는 네가 요청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해버린 거예요. “너는 나의 신부다. 너는 나의 색시다”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선택을 해버렸습니다.
이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님 본인만 알고 우리나 이스라엘 사람은 몰라요. 모르는데 인간들이 이해 못 하는 그쪽 차원을 가지고 주께서 들이미시는 겁니다. 들이밀고, 날씨도 비가 와야 할 때 비가 안 오고, 땅 더러워졌다고 이방나라 보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점차 점차 이스라엘을 어디로 몰아가느냐 하면 지금 이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동안 우리가 잊힌 관계, 하나님과 우리는 혼인한 관계라는 그 관계를 뚜렷이 윤곽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외부로부터 쑤시고 들어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감을 잡아야 해요.
그렇게 해야 내가 착실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관계성, 이미 하나님이 설정해놓은 관계성의 유효함, 그런 효과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많은 거죠. 특히 오늘 본문 3장 1절에 보면 혼인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의 생각은 이런 겁니다.
‘네가 나와 결혼을 했잖아. 그런데 네가 왜 딴짓을 하느냐?’라고 할 때 이게 인간들이 감추고 있는 바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은 결혼해도 상대방을 믿지 않아요. 결혼은 결혼이고 내 삶은 내 삶으로 그냥 폭주하는 거예요. 폭주하는 기차처럼 그냥 가는 거예요. 그게 사람입니다. 어떤 누구와 관계있다고 해서 나를 포기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이걸 확장 시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요. 이게 정확한 거예요. 나는 당신과 혼인했지만 내가 당신에게 신경 쓸 마음은 없다. 내 일을 도와주면 도와줬지 시답지 않게 내 일에 간섭하려고 한다면 오늘이라도 갈라서자는 거죠. 이건 뭐 변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의 나 됨은 내가 증명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것을 신약에서 어려운 말로 아담 안에 나라고 합니다. 아담 안에 나. 아담은 인류에게 DNA를 줬던 조상인 아담, 그 아담 안에 나가 그런 거예요. 우리 조상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따먹은 성질을 계속 뿌렸어요. 계속 이 땅에서 후손을 통해서 확장 시켜 나갔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렇게 하도록 하느냐. 땅을 더럽히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땅을 더럽힌다는 생각을 못 하고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를 기준으로 삼아서 살아갑니다. 내가 지금껏 살아가는데 지금껏 살아가고 노력하는 이유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누가요? 내가. 남이? 아니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한 것을 싫어합니다. 왜냐 하면 그 사건이 나의 행복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래요. 기름값이 너무 올랐고, 식용유, 참기름값까지 올랐어요.
러시아 네가 뭔데 내 행복을 가로막아? 어떤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내가 그만큼 내 행복이 올라가겠는가, 낮아지겠는가에 관련되고 행복을 높아지기를 원하죠. 이게 아담 안에 나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 안에 나는 원래 악마가 원했던 나의 모습이고요. 하나님의 모습은 뭐냐 하면 예수님 안에 ‘나’예요. 아담 안에 나와 예수님 안에 나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아담 안에 나는 저 높은 곳에 나의 절대성이 있고 나의 모든 것은 저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계속 올라가요. 저 높은 곳에 하나님 계시고 저 하나님 만나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하나님이 가진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니 나는 대만족을 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뭐냐 하면 바로 악마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악마예요. 쉽게 합시다. 아담 안에 내가 아담 안에 속성을 물려받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하나님을 성경에서는 악마라고 하고 사탄이라고 합니다. 마귀라고 합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십자가와 멀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저 낮은 곳에 가신 주님과 점점 더 멀어져요.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십자가가 보이고 내가 생각한 하나님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 지금 혼인을 했는데 이스라엘이라는 색시가 다른 남자를 원하고 있어요. 관계가 틀어진 거예요.
관계가 틀어졌다는 흔적을 하나님께서 강제로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으면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이 너 때문에 너와 하나님이 같이 살아야 할 땅이 더럽혀졌다는 겁니다. 제가 아까 두 번째 이야기한 거죠. 자연훼손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아담 안에 인간은 자기만 행복하면 그만이에요.
길거리에는 담배꽁초 버려도 자기 집안에는 담배꽁초 버려서 불나고 그런 거 없잖아요. 자기 집에서는 재떨이에 넣지만, 밖에 나오면 그냥 길거리에 던져버립니다. 왜? 내 집이 아니니까.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던 그 나라는 사실상 그걸로 인해 천국이 방해되고 훼손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땅입니다. 너 때문에 땅이 더러워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함께 해야할 땅이 더러워졌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 너 때문에 더러워졌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더러워졌으니까 깨끗하게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기에 적용하는 겁니다. 율법이 뭐냐 하면 땅이 더러워졌을 때는 땅을 안식해야 해요.
레위기 25장 4~5절에 보면 “제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그러니까 땅에다 너의 노동력을 부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점을 생각해 보세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모자를 쓴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데 모자를 쓴다는 것이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모자를 왜 쓰십니까?” “머리카락이 없어서 씁니다” 그러면 모자를 쓴다는 뜻은 나의 머리카락은 지금 하나도 없다는 뜻이죠. 지금 이스라엘이 율법이 없어요. 율법이 없을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가.
모자를 씌워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본인이 행복해야 그게 현실이고 행복하지 않으면 이건 뭔가 잘못되고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현실이 아니고 그건 가상이고 픽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세계를 줘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 보기에는 가상 너머에 가상이 된다고 여기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이나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그게 문제예요. 하나님께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그게 본인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사력을 다해 그것을 거부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사람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인간들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방법은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그 사람 속에 있는 그 광기,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그 광기를 자극해서 바깥으로 이게 터져 나오게 만들어요.
그러면 문제가 어떻게 되느냐. 감추어져 버려요.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문제가 감춰져 버리는 겁니다. 인간은 문제가 자기로부터 달아난다는 생각은 못 하고 그저 열심을 다해서 교회 나와서 기도하고 열심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그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가 나는 내 행복을 놓치고는 못산다는 말이고 내가 불행하고는 못산다는 말이거든요.
왜 본인이 불행하면 안 되죠? 내 인생에 팔자가 꼬이면 왜 안 되는 겁니까? 그게 바로 문제 아닙니까. 나는 평탄해야 하고, 나는 남들처럼 버젓해야 한다는 그런 사고방식, 이건 자기밖에 모르는 사고방식이잖아요.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그런 것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나는 내 욕망이 원하는 대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면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용의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장된 세계관을 시도하시는데 거기에다 모자를 씌워버리죠. 아무것도 없는데 모자를 씌우는 방법은 바로 주님께서 저 높은 곳이 아니고 저 낮은 곳에서 주님께서 기다리는 겁니다. 그 낮은 곳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땅을 안식해야 하는데 말을 안 들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에 이방나라를 동원해서 그 약속에 땅에서, 하나님과 산다고 우기는 약속의 땅에서 자기 백성들을 강제로 다 죽여버리고 포로 잡혀가게 하셨습니다.
그게 역대하 36장 20~21절에 나옵니다.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본 백성들이 바벨론 국가에 다 포로 잡혀가게 해서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강제조치해서 땅에 더러운 인간들의 수작이나 욕망이나 욕심이 없도록 70년 동안 놀려버려요. 아무것도 안 하게, 빈 땅을 황무하게 만들었는데 인간 보기에 황무한데 하나님 보시기에 주께서 살만한 땅이 이러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황무한 땅에 인간들이 살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죽어요. 그 말은 인간이 원래 죽어요. 인간은 원래 죽어야 해요.
인간은 원래 자기 행복을 찾을 것이 아니고 죽어 마땅함을 경유해야 해요. 그래야 아담 안에 인간에서 주 안에 인간이 되는 겁니다. 정신병자가 손등에다가 자기가 스스로 자해해서 칼로 상처를 내서 피를 흘리며 비명처럼 고함지르는 이유는 그게 일반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의식세계에 필사적으로 뛰어들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나도 사람이다. 나 여기 존재하는 거야. 나 좀 봐줘. 내가 이렇게 아파하는 것을 좀 봐줘. 안 봐? 이래도 안 봐?’라고 하며 자기를 자해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왜 너희들끼리의 의식세계를 구성해? 나만 왜 왕따시키는 거야? 나 이상하다고 내몰아치지 말고 나 여기 있음에 너희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나를 받아줘. 너희들 세계에 나를 받아주란 말이야.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아픔이 있는 거죠. 칼로 자해를 했으니 상처가 나겠죠.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 안에 주님의 강제상처가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 상처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주님이 “네가 이래도 정신을 안 차리냐?”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로 사도바울의 인생에 상처를 내버린 거예요. 확 그어버렸어요. “이래도 네가 너의 행복을 찾을래? 네가 이래도 목숨 더 유지하고 살려고 하느냐?” 살아보았자 그게 바로 언약 관계가 깨어진 상태에서 더욱 너의 죄밖에 나오지 않는 건데. 이미 하나님과 혼인 관계에 있다면 남편 되신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는데 결혼해놓고 본인을 더 신뢰하는 거예요. 왜? 그게 인간이고 아담 안에 성질이 그 성질이에요. 자기밖에 몰라요.
여러분들 다 결혼을 해봤죠. 해보니 알죠. 한 20년 살았으니 안 싸울 것이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30년 동안 돈 벌어줬으니 아내가 이제는 남편 말을 들을 거라고요? 들어주기는 뭘 들어줘요. 하나님의 원하는 방식은 에스겔 39장 9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39장 9절은 곡, 마곡이라는 왕이 다스리는 곡, 그 곡이라는 나라가 최후의 전쟁으로 등장해요.
그 곡이라는 나라는 특정 나라가 아니고 적그리스도가 마지막 힘을 다해서 예수님의 재림을 막기 위해서 하는 그 마지막 전쟁, 요한계시록 20장에도 나오는 곡의 전쟁, 곡의 전쟁을 할 때 그 전쟁 방식이 어떠냐 하면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요. 한 번 보면 “이스라엘 성읍들에 거한 자가 나가서 그 병기를 불 피워 사르되 큰 방패와 작은 방패와 활과 살과 몽둥이와 창을 취하여 칠 년 동안 불 피우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하는데 본인이 나가서 무기 들고 전쟁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 전쟁을 다 승리해놓고 이스라엘에게 뭘 주느냐 하면 그 곡이라는 나라가 주님을 대적해서 싸우기 위해 마련했던 그 무기, 여기서는 창, 큰 방패와 작은 방패, 활과 살, 칼, 이런 것들이 정작 적들은 써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주님에게 당해서 패배했으니 남겨진 거예요. 그 무기가 얼마나 많던지 7년 동안 불쏘시개를 할 정도로 많았다는 겁니다.
이 내용이 에스겔서 39장 9절에서 나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에스겔 할 때 마곡 전쟁을 다뤘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과 남편 되신 여호와와 색시 사이에 맺은 연관성이에요. 그냥 말로만 결혼했다고 하지 말고 신뢰하란 말입니다. 자기 색시가 행복해야 한다는 그런 식으로 세상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남편 되시는 여호와께서 다 계획이 있었어요.
그 계획대로 밀어붙이고 너는 뭘 경유하느냐 하면 ‘왜 나는 내가 바라는 하나님이 우상일 수밖에 없는가?’를 경유하는 겁니다. 그건 아담에 속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에 속한 인간을 주님 속한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 십자가를 경유해야 해요. 우리의 죄를 죄로 지적받아야 해요. 그 죄에 대해서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했던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엉터리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레미야를 보내서 황무하게 만들어버리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왜 이렇게 우리를 힘들게 하느냐는 자기의 본심이 나오도록 만들었어요. 거기에 대해 차두리(축구선수)가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간 때문이야” 이게 무슨 말이냐면 바로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하나님마저 십자가의 상처를 져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이 아닌 유일한 신랑, 십자가 지시고 살과 피를 흘린 그분이 우리의 신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이 달랐습니다. 우리의 태생이 악마의 속성이었음을 우리는 왜 자꾸 잊어버리는지요. 자기를 정상으로 여기지 말고 비정상으로 여기고 거기에서 치렀던 주님의 상처를 늘 마주하면서 주목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