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사랑의 연약함

아빠와 함께 2022. 9. 11. 12:17

 

사랑의 연약함

 

2022년 9월 4일 이근호목사 본문 말씀: 예레미야 3:6-10

 

(3:6)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3:7)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3: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3:9)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3: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고 하면서 ‘간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냥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면 왜 안 될까요? 그렇게 되면 인간이 신을 선택하는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지금껏 우상 섬겼지만, 이제부터는 여호와 섬기기로 했다”고 한다면 이게 과연 하나님께 돌아오는 바가 될까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전에 우상 섬길 때나 여호와 섬겼다고 우길 때나 모두 자신의 이득을 고려한 본인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길 때는 자기 이익을 고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섬길 때는 인간들의 자기 이익 챙기기는 것을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부터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가 바로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2자(者) 관계입니다. 둘 사이의 관계입니다. 제 3자(者)의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2자 관계에서의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연약해지기를 즐겨 마음먹게 됩니다. 즉 “나는 당신에게 있어 강자가 안 될래”라는 의사 표시가 곧 사랑의 표시입니다.

 

만약에 여기에 제 3자가 개입해서, “내가 너희들의 사랑에 보증이 되어 줄게”가 되면 이때부터 사랑은 연약한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게 된 강한 자’가 되고 맙니다. 즉 상대를 향해 “내 사랑이 안 깨어지도록 네가 주의해야 돼”라고 은연 중에 강요하는 바가 됩니다. 즉 “너는 내가 하는 이 좋은 사랑을 지켜 줄 의미가 있어”라고 일방적으로 강자가 되어 명령하는 바가 됩니다.

 

이것은 ‘사랑의 연약성’이 아닙니다. 사랑의 권력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은 ‘원래 사랑’이 미리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만들지 않으시고 순서를 정해놓으시고, 나중의 창조된 자가 먼저 창조된 자의 보조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마지막 아담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신랑이 되고 성도는 예수님의 신부가 됩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신랑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신부는 신랑의 영광과 같은 영광으로 단장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일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끝이 좋으면 앞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좋은 겁니다. 이런 좋은 일에 성도는 ‘간음한 자’로 신랑되시는 예수님에 의해서 찾으심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즉 참된 성도의 내부성으로 작업하시는 분입니다.

 

이미 내부가 간음한 여인으로 낙인찍힌 입장에서 인간은 멀쩡하게 신랑 찾겠다고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꾸만 인간은 독자적인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의 특징은 독자적으로 홀로 살고 싶은 겁니다. 마치 “상처 받는 것보단 혼자를 택한거지. 고독이 꼭 나쁜 것만 아니야”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홀로 살고 싶다고 해서 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께서 필히 찾아오셔서 신부 만들고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성도는 본인이 간음한 여인의 경로를 밟아야 합니다. 이는 세상에 대해서 늘 결별해야 하는 경우를 맞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에스더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그녀는 바사 나라의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내뱉는 말, “죽으면 죽으리라”(에스더 4:16)의 고백은 결코 남편보고 한 말이 아닙니다. 왕은 어느날 에스더가 자기 앞에 등장하자 한 눈에 반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같이 말합니다. “나라의 반이라도 너에게 줄게”라고 나옵니다.

 

에스더는 왕의 순수한 사랑을 이용해서 권력을 사용한 여자입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한 대상은 바로 유대나라입니다. 그녀는 유대나라의 신부, 하나님의 신부였던 겁니다. 이처럼 에스더는 자신을 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연약성 관계에 에스더는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음한 자기 여인을 찾는 방법은 값을 치루는 방식입니다. 이는 간음한 여인 쪽으로 값을 치르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에 간음한 여인 쪽에서 값을 치르게 되면 이는 2자 관계의 사랑이 아니라 독자적 선택에 의해서 획득되는 사랑이라고 곧 가짜 사랑입니다. 인간들의 독자성은 스스로 고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실망스럽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유럽까지 13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는 거리로 여행하면서 어떤 사람은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끝까지 먹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혹시 항공사에서 밥을 돈받고 추가적으로 파는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에 실망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원리와 원칙에 철저합니다. 자신이 경우 바른 사람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기내 식사는 비행기표에 이미 다 포함된 겁니다.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기 색시를 받아들이면서 그 죄값을 다 치뤘습니다. 신부는 자기에게 반듯한 사람이라는 명분을 위해 자기 쪽에서 구원받을 값을 치르면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율법)은 구원받을 자가 그 말씀을 위반했음을 명백히 드러내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못 지킨 상황을 신랑되시는 주님께서 만들어 가십니다. 마태복음 19:24에 보면,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어느 누구도 부자를 마다할 위인이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마 19:26)의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 성도는 자신이 얼마나 부자되는 식으로 마음이 쏠리느냐를 평생 경험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자랑스러운 자신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늘 독자적으로 자기 잘난 맛을 고수하며 ‘사랑의 연약함’에 대해서 눈 돌립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인이라는 인식을 갖추고 만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그냥 흘러보내지 않고 그 연약한 사랑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5강-예레미야 3장 6~10절(사랑의 연약함)22090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장 6~10절입니다. 구약성경 1053페이지입니다.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 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경에서 구약 선지자 속에 하나님께서 우상 섬기는 것을 자꾸 간음에 묘사합니다. 간음의 의미에서 말할 때 일반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물론 그당시 입장도 마찬가지였지만 납득이 안 돼요. ‘네가 거짓 신을 섬겼구나’라고 하시면 ‘예, 이제는 바른 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이렇게 알기 쉽도록 이야기하면 되는데 간음했다고 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은 인간들이 부처를 섬기다가 예수를 섬겨버리면 이것을 예수님께 돌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뭘 놓쳐버리냐 하면 부처 섬길 때 나를 위해서 섬기는 그 마음가짐이 예수 섬길 때도 역시 나에게 이익이 되라고, 내가 좋고, 나중에 나에게 어떤 대가가 주어질 거라고 예상해서 예수 믿는 것은 부처 섬기는 것과 똑같고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바뀌었다고 뭔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달라지려면 확실하게 달라져야 해요. 확실하게 달라질 때 어떤 표현이 적당하냐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네가 바람을 피웠다고, 간통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 패밀리인 가정으로 돌아오는 거거든요. 이것은 처음부터 내가 어떻게 결정하기 전에 신랑 되시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색시로, 너는 나의 신부라고 확정했다는 그것을 하나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겁니다.

 

돌아온다는 것이 ‘나는 이제 부처 안 믿고, 우상 안 믿고, 하나님 여호와 믿을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그런 결정을 할 자격조차 이게 너에게는 독자적으로 없다는 겁니다. 너의 운명은 신랑에게 달려 있지, 네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운명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여성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여성의 특징이요.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거든요. 이것은 그리스도가 여성화된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동시에 여자를 만든 것이 아니에요. 아담을 일단 만들어 놓고 부속으로 또는 보조로 또는 일본말로 시다바리로 배필자로 여성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 그 여성을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여성은 남성의 내부성 이라고 했습니다.

 

남성 안에 캐내면 안에 여자 있다는 말입니다. 여자가 먼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남성은 내부성 말고 외부성이 와르르 무너진 거예요. 그러면 그 시작을 내부성부터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겁니다. 이것은 너의 중심을 보겠다는 거예요. 너의 중심. 그런데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은 전부 다 이스라엘의 남성들이죠.

 

남성들인데 하나님께서 간음했다는 표현을 하면서 이스라엘 전체를 여성화시키는 방식으로 다시 여호와의 색시로 돌리는 그 작전에 돌입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창세기 2장에 있어서 여호와에게 다시 돌아오면 되느냐. 아니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누구에게 돌아와야 하느냐 하면 “너는 나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에게 돌아오라는 겁니다.

 

네가 생각하는 여호와, 네가 생각하는 삼위일체 말고, 네가 생각하는 예수님 말고 그분이 나를 향하여 너는 뼈 중의 뼈고 살 중의 살이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을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너의 살 대신, 너의 뼈 대신, 나의 피 흘리고 나의 살점 찢어준다고 하시는 그분에게 와야 해요. 그건 십자가 사건에게 와야 해요. 예수님이라는 존재로 오면 안 돼요. 사건 속으로 들어가야 내가 십자가를 믿었다는 소리가 입에서는 나오지 않게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죽었다가 되어야지 죽은 인간이 뭘 고백합니까, 죽은 인간이. 나를 죽여서 주께 온다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이시는 분 품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나를 죽이시는 분, 나를 인간 취급 안 해주는 분이 우리 신랑입니다. 신랑 되시는 주님이 자기 내부성을 알아서 챙겨주시는 겁니다. 그걸 인간들은 모르지만, 성도만 아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연약한 겁니다. 사랑하는 순간,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진해서 연약하기로 작심한 관계가 사랑이에요. 결혼하고 6개월만 지나면 그건 다 깨집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을 구약성경 에스더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4장 16절에 보면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라고 이야기했거든요.

 

세상에 에스더가 자기 남편 되는 왕에게 이런 이야기한 적 있습니까? 없지요. 주님께서 에스더를 꽃뱀으로 만들었어요. 아내인 척하고 권력을 빼앗아버렸어요. 에스더 5장 2절에 보면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홀.지팡이)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홀.지팡이) 끝을 만진지라” And it happened when the king saw Esther the queen standing in the court, she obtained favor in his sight; and the king extended to Esther the golden scepter which was in his hand. So Esther came near and touched the top of the scepter.에스더가 심히 아름다우니까 왕이 금 지팡이를 내밀었어요.

 

대왕은 세 가지를 가지고 있어요. 금관, 금 지팡이 그리고 망토. 통일교 교주도 하고 있는 그 망토요. 어린아이들이 소꿉놀이하고 왕 놀이할 때 망토 비슷한 거 걸치고 그러죠. 그걸 정신병적으로는 유아적 퇴행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 멋있게 보이던 것으로 그대로 돌아가는 거. 천주교 교황이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망토 걸치고 홀 들고 왕관 쓰고 그래요. 무슨 아이도 아니고, 통일교 교주도 그러고 신천지도 그렇고 북한도 그렇고 나폴레옹도 그렇지요.

 

내부성은 엉망인데 그것을 외부성으로 가리려고 하니까 그게 허구가 되고 허상이 되고 망상이 되는 거예요. 저는 회장님 실에 가본 적은 없지만 회장님 실이나 검사나 판사실에 가면 자기 이름을 검사 누구누구라고만 하지 않고 옛날에는 용 그림을 그려놨어요. 왜 그 짓을 합니까. 그건 사랑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랑이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결혼식 올리는 그 결혼식부터 이미 사랑은 깨졌습니다. 왜냐 하면 결혼식은 주위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혼인이 법적으로 유효하다고 증인들을 세운 거잖아요. 이것은 2자(者) 관계가 아니라 3자 관계가 되어버려요. 3자 관계는 연약성을 단도리 하려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와 법칙입니다. 결혼식 해야 정식 부부 됩니까? 사랑하면 되잖아요.

 

사랑으로는 모자란다는 거예요. 사랑은 서로가 연약한데 한쪽이 연약함에서 이탈해서 강하고 싶은 거예요. 이때는 결혼식을 화려하게 하고 싶은 겁니다. 결혼할 때 드레스 못 입고 한복 입고 했다고 15년 뒤에 다시 드레스 입고 결혼식 하는 거 있잖아요. 결혼해 놓고 3년 뒤에 ‘너는 나에게 프러포즈 안 했잖아’라고 하면서 벌써 아이가 두 살인데 새삼스럽게 프러포즈는 왜 합니까. 서프라이즈 같은 거 왜 해요.

 

2자 관계가 갑자기 독자적 관계인 나를 챙기는 관계로 돌아서 버리는 겁니다. 이 결혼이 내 인생에 어떤 이익을 줬는지 계산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사랑은 있을 수 없지요. 그걸 바로 간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색시로 여겼습니다. 이게 율법입니다. 이 율법을 받았던 이스라엘이 율법의 정신을 주께서 우회적으로 돌아서서 진짜 사랑이 뭔가를, 사랑이 깨어진 상황을 의도적으로 몰아세워서 간음이라는 자리에 이스라엘을 세움으로써 사랑과 간음은 이렇게 대척 관계인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부부 사이라도 간음이 되는 겁니다. 어떤 관계에 있을 때? 독자적인 나의 가치를 지키겠다고 나올 때 배우자는 자기의 이용대상이 되죠. 다시 에스더로 와서 5장 2절에 왕후가 있어서 금 지팡이를 내미니까 에스더가 금 지팡이를 쥐었어요. 그 뒤에 이 순진한 아하수에로왕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무 사랑스러워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라고 지가 일방적으로 물어놓고 답변을 자기가 합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라고. 왕이 부동산 장사하는 사람인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나와요. 나라의 절반을 얻으려고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습니까? 에스더가 그렇게 말한 것은 자기 남편 아하수에로왕도 바사 제국도 아니에요. 그것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자기 민족 유대 나라를 위함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 나라의 색시이고 신부였습니다.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계층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이 이미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인 신랑이 해놓았던 모든 성과를 신부에게 전이하는 식으로 혼인 잔치를 준비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아담이라는 모형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신랑이 되고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신부가 되는 그 실체, 모형이 아닌 실체는 신약성경에서 완성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것은 신랑이 친히 신부를 위해서 단장을 해주시는 거죠. 신부는 예수님 부활의 영광을 그대로 웨딩드레스로 전환 시켜서 보석처럼 빛나는 세계, 그 세계가 성도의 미래이고, 팔자이고, 마지막 골인 지점입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아직 끝은 아니에요. 끝까지 가봐야 해요. 이 드라마의 끝을 주께서는 이미 알려줬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끝만 알고 있지 아직 중간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을 거치려면 우리가 간음한 자의 입장에서 주님을 찾아가야 해요. ‘제가 간음했습니다. 내가 세상 너무 좋아했습니다. 주님 좋아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왜 간음한 여자일 수밖에 없는가. 그거는 나는 선악과 따먹고 나서 나만 잘되고, 나만 성공하고, 나만 구원받고, 나만 복 받고, 그저 나 챙기는 것밖에 모르니까요. 그게 바로 우리가 아담 안에 몸으로 태어나서 이 죄악 된 지옥같은 세상에 살면서 몸에 체질화된 거예요. 체질화된 것을 표현하는 노래를 들어보면 또 세상을 알 수가 있어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상처받는 것보다 혼자를 택한 거지~ 고독이 꼭 나쁜 것은 아니야’

 

임재범이 불렀던 ‘비상’이라는 노래 2절 가사에 나옵니다. ‘상처받는 것보다 혼자를 택한 거지, 고독이 꼭 나쁜 것은 아니야’라고 하면서 이제는 날개를 펴고 날겠다는 그 비상이라는 노래 가사에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상처받는 것보다 그냥 혼자 있고 싶은 거죠.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인간은 결혼해도 솔로예요. 전부 다 인간은 혼자뿐이에요. 전체가 간음한 세계에서 간음한 자들끼리 살아가는 거예요.

 

또 이런 노래가 있어요. ‘그대는 나를 알아도~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라는 노래인데 제목이 ‘사랑이 지나가면’이에요. ‘그대는 나를 알아도’는 지나가다가 “아이고, 반갑다”라고 하면 바라보면서 “누구세요?”라고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라고 하는 거죠. 혼자 사는 재미에 너무 빠져서 누구와 함께 있다는 것이 큰 짐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의 세계로 들어오도록 하시는 주님의 방법 중에 하나가 마태복음 19장 24절에 보면 부자가 천국가기 어렵다고 하시고 그다음에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라고 되어있어요. 부자는 천국 못 간다는 거죠. 주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부자가 되라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불가능을 체험하라는 거예요.

 

이건 정말 아멘 나와야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부자 못 돼서 환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남에게 내세울 때 돈으로 내세우는 것을 제일 먹어주잖아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사랑은 연약한 거죠. 그러나 돈은 나를 강하게 만듭니다. 돈과 사랑, 어느 것을 택할래? 여기서 우리는 이론상은 예레미야와 같은데 우리 본성은 부자 되는 거예요. 천국 가고 지옥 가고는 나중 문제이고 지금 당장은 사람이 돈이 있어야 숨이 쉬어져요. 숨을 좀 쉬고 싶어요.

 

이 코로나 시대에 물가도 비싼데 역시 돈 있는 사람은 ‘이 참에 가난한 사람들은 고생 좀 해봐라. 돈이 얼마나 귀한지 본때를 보여줘야지. 잘됐구먼. 물가도 오르고 괴롭지 뭐’라고 하는 것은 잘난 사람의 잘남이 돈 많음이 얼마나 복인지를 돋보이게 하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아주 즐거워합니다. ‘어디서 너희들이 나랑 같이 놀라고’라고 차이를 띌 수 있고 상대적 우월감과 자긍심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한 거예요. 특히 물가 어렵다고 할 때.

 

남이 못 되어야 사는 보람이 있잖아요. 주께서 이 말씀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부자 안 되어도 부자 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잘 못 된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뒤에 나오는 말씀, 제자들이 자기가 걱정되어서 묻는 거죠,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라고 할 때 주께서 말씀하시는 대원칙이 나오죠.

 

마태복음 19장 26절에 보면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달리 말해서 신부가 신랑에게 돌아오는 일은 없어요. 간음한 여인이 신랑을 찾아오는 일은 없어요. 그러나 신랑은 값을 치르면서까지 자기 신부를 찾습니다. 찾는 방법은 값을 내놓는 거예요. “자, 여기 피다”라고 피를 내놓으시는 거예요. 호세아에 나오는 말씀인데 “네가 세상과 어떤 짓거리를 했든 간에 일체 내가 문제 삼지 않으마.”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 네가 간음이라는 자리를 경유 하지 않고서는 사랑이 이렇게 연약할 줄 몰랐고, 사랑을 네가 모르게 되어있는 것이 너의 태생이기 때문에 그것을 신랑이신 주님이 아시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신랑이신 주님이 몸소 이 땅에 와서 실습했잖아요. 인간이 겪는 거 다 겪었잖아요. 그리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인간들이 그렇게 떠나기 싫은 이 세상 자체에서 주님께서는 버림받으신 겁니다.

 

그 상황을 앞장세워서 주님께서는 우리와 만납니다. 아침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이 주께서는 “너는 나에게 올 수 없으나 내가 너를 피를 앞장세워서 모든 대가를 다 치렀다.” 모든 대가를. 사람들은 자기에게 실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게 잘못이에요. 충분히 실망하세요. 더 실망하고 매일같이 자기에게 실망해야 해요. ‘예수 믿는 꼬라지 하고는’ 아니 더 실망해야 해요.

 

자기 동네에서 똑똑한 사람이 비행기 한 번도 못 타봤는데, 누구처럼 미국도 한 번 못 가보고 그랬는데 어느 날 비행기를 탔어요.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밥을 주더란 말이죠. ‘아하, 항공사가 여기서 장사를 하네’라고 생각하면서 12시간 동안 밥을 안 먹었답니다. 밥값 내라고 할까 싶어서. 실제로 있는 일입니다. 비행기 삯에 밥값이 포함되었어요. 여러분 처음 알았지요.

 

주님의 피 안에 모든 값을 다 치렀습니다. 이 사실을, 이 용서의 피 값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필히 간음한 자가 되어있어야 해요. 신랑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찾아가면 안 됩니다. 그거는 2자 관계가 아니고 종교 힘으로, 기독교 힘으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중무장하려는 심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화론이죠. ‘교회에서 나보다 기도 많이 한 사람 나와보라고 해. 헌금 많이 한 사람 나와보라고 해’라는 이게 자기가 자기를 중무장한 거예요.

 

복음은 나를 간음한 자로 보는데 자기는 ‘주여, 나만 돌아왔습니다’라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한단 말이죠.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주께서 우리를 살려주시는 것은 살려주시는 방법으로 죽이시기 위해서입니다. 네가 죽어가면서 한 번도, 단 한 번도 죄 안 짓은 적이 없음을 기쁘게, 아주 즐겁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할 때는 영혼을 다 주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는 세상에서 꽃뱀입니다. 그들이 내가 이쁘다고 나라 부동산 반을 주겠다고 하는데 그걸 왜 안 받아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이제 예를 하나 들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처가 식구들과 전라도 쪽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요. 두륜산에 케이블카가 있었어요. 옛날 조선 시대 같으면 그거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걸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갑니다. 케이블카는 노인이든 어린이든 묻지 않고 그냥 태웁니다. 그걸 타면서 내가 느낀 것은 뭐냐 하면 항상 이것만 생각하는데 ‘만약에 케이블카가 없었으면 저 높은 지점까지 내가 걸어서 올라갔을 것이 아닌가.’ 케이블카가 올라갑니다. 산 중턱까지 갔는데 제가 또 밑을 내려다 봅니다. ‘만약 케이블카가 없었다면 내가 중턱까지 땀 뻘뻘 흘리면서 걸어서 올라갔을 것이 아닌가.’ 산 정상까지 갔는데 제가 다시 밑을 내려다보며 생각합니다. ‘케이블카가 없었다면 내가 산 정상까지 땀 뻘뻘 흘리면서 걸어서 올라갔을 것이 아닌가.’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걸어서 올라간 것을 우리는 케이블카로 태워서 가는 이유가 주님의 공로만 주장하라고 케이블카에 값없이 그냥 태워서 천국으로 가는 거예요. 주님이 친히 걸어서 올라가지 아니하면 도저히 우리 힘으로 힘 빠져서 갈 수 없고 노력해도 안 되는 그 길을 우리는 주님 생각하라고 케이블카에 태워서 같이 움직이는 이것을 평생 동안 케이블카 타듯이 이미 다 이루었다는 관계, 사랑, 그 연약한 사랑 관계를 두고서 우리로 하여금 제발 너 독자적으로 강한 사람 되려고 하지 마라.

 

나처럼 바보같이 연약한 주님의 사랑만 있으면 족하다는 강도와 거지와 창녀처럼 그렇게 해도 나는 너에게 묻지 않을 게. 연약한 사랑이 강한 세상 권력을,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긴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서 오늘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돌아와라. 이 간음한 여인아”라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 ‘제가 간음한 여인 맞습니다’라고 하시며 기쁘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보게 하옵소서. 사랑은 연약한 건데 우리는 남에게 안 지려고, 나에게 실망 안 하려고 강한 나만 자꾸 잘못되게 생각했습니다. 연약한 것이 강함을 이김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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