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영적 체험

아빠와 함께 2022. 8. 14. 22:58

영적 체험  

2022년 8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9-34


(2:29) 너희가 나에게 대항함은 어찌 됨이냐 너희가 다 내게 잘못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30) 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린 것이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2:31)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

(2:32)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2:33)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2:34) 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든다는 것인 인간으로서는 상상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무시하는 것’과 ‘대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본인의 생존과 삶에 정신이 다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개죽음하기 싫은 겁니다.

무의미해지기도 싫은 겁니다. “내가 왜?” 이 투지로 평생을 버티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본인이 생존에 유리함과 불리함을 가장 근원적으로 따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유가 있고 형편이 돌아갈 때, 혹은 생활 면에서 숨 돌아간다고 여겨질 때나 고려해 볼 사항입니다.

살기 빡빡한데 무슨 신을 찾습니까? 따라서 오늘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을 건네게 되면 상대방은 도리어 의아할 겁니다. “뭐?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다들 그래 사는 것 아니야?” 맞습니다. 다들 자기 편한 대로 삽니다. 쉽게 인간은 자기 멋대로 삽니다. 자기 마음먹은 대로 삽니다.

문제는 그 어떤 존재든 자기 마음먹은 대로 산 적이 없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주님 마음먹은대로 사는 겁니다.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것이 인간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이것을 지적한다는 것은 생뚱맞는 공격이라고 여길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예레미야는 애매한 비난을 자처합니다. 왜 그래야하며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영이 미리 예레미야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원된 자들의 라인line입니다. 마태복음 5:11-12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본인의 삶이 얼마나 편하고 행복하냐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갖 욕설을 받아내는 그 현장에 서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7-9)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대신해서 욕 얻어먹는 자로 그 시대에 보내졌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가 미워서 선지자를 욕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계획하고 몰두하는 일이 따로 있는데, 관심도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만 언급하고 거론하니 짜증이 확 올라오기에 배격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백성들을 비난하는 바는 이러합니다. ‘왜 자꾸만 세상 쪽으로 나아가면서 홀로 살려고 하느냐’입니다. 이 지적을 받는 자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 아니야?”라는 겁니다. 사사기 2: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즉 인간이 하나님에 관심없는 바로 그 모습 자체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성에 합당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경험하는 바가 이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 참으로 낯설고 기이합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진실을 찾고 싶어도 이 세상은 편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전혀 해결책이나 해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은  인간 세계에 가진 편견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우상론으로 펼쳤습니다.  

첫째, 종족의 우상:인간이기에 갖는 편견. 한 번 믿은 것은 계속 믿으려고 한다.
둘째, 동굴의 우상: 개인의 직업이나 직장, 특수한 경험에서 나오는 편견
셋째, 시장의 우상: 언어와 실재를 구분못하는 편견. 말에 대해서 나름대로 다들 각자 상상하게 된다.
넷째, 극장의 우상: 전통과 권위와 여론에서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주장에 현혹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인간 세계에서의 이런 우상론은 어디까지나 개인이 개인으로 사는데 오류가 최소화하기 위한 논리를 펼치는 것뿐입니다.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하는 계기와는 다릅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렘 23:18)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방식은, 계시 전달자로 하여금 온갖 비난을 받는 그 자리에 서 있게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오류를 선지자의 고난 앞에서 발견토록 하는데 있습니다. 선지자가 내뱉은 모든 이야기는 요지는, 구원받아야 될 자들이 결코 자신들의 노력과 지혜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몰아세우기 위해 유발시킨 일인 겁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경우의 수가 실은 주님이 쳐놓은 율법적 그물망에 걸리기 위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우를 보면, 대낮에 도둑이 들어왔는데 그 도둑을 죽여버린 일 같은 겁니다.

율법에 보면, 낮에 도둑을 집에서 만나거든 죽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출 22:2-3)

그리고 자신의 장점으로 자신을 예쁘게 단장하고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되게 하겠다는 태도도 또한 그러한 형편을 제공하신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한 시도 하나님없이 지금의 우리가 된 적이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지적으로 우리가 잊어버린 말씀을 우리 마음의 쓰레기통 속에서 다시 집어야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한 시로 우리 마음대로 된 적이 없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강-예레미야 2장 29~34절(영적 체험)22081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장 26~28절입니다. 구약성경 1052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나와 다툼은 어찜이뇨 너희가 다 내게 범과하였느니라, 내가 너희 자녀를 때림도 무익함은 그들도 징책을 받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흑암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연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않겠다 하느냐,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계수할 수 없거늘,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또 네 옷단에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음을 인함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로 너를 책망함을 인함이니라”

이 내용 안에 갖가지 일들이 섞여 있어서 복잡합니다. 그런데 그 흐름은 이렇습니다. 일단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면 나는 내 식대로 살겠다. 내 식대로 내가 산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겁니다. 어떻게? 내가 좋은 것을 내가 하긴 하되, 남들이 나를 공격하면 나도 공격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하다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오늘 본문을 우리가 못 봤다고 치고 안 들었다고 친다면 우리는 하등에 하자가 없는 인간이 됩니다. 왜냐 하면 세상이 다 그렇게 사니까. 그래서 지금 예레미야가 세상을 책망하고 있지만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고 이방인이라면 선지자가 그런 식으로 책망한 것에 대해서 굉장히 당황스럽고 생뚱맞고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책망하고 소위 아무런 대안도 없이 윽박지르는 것으로 여겨서 굉장히 불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아닌 사람들도 이러한 지적은 굉장히 불쾌하게 느껴지겠지만 예레미야의 이 말씀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불쾌하게 느꼈던 겁니다. ‘어디서 지적질이야? 내가 편하다는데 니가 왜? 내가 이렇게 살겠다는데 니가 왜? 하나님의 선지자면 다야?’라는 식으로 반격을 할 겁니다. 우리가 선지자에게 이렇게 오지랖 떨지 말고 너나 잘하시라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들 텐데 선지자도 지금 답답해요.

예레미야 20장 7~9절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선지자가 안 하고 싶어요. 안 하고 싶은데 안 하면 선지자가 하나님에게 쥐어박힙니다. 그런데 이 말은 뭐냐 하면 선지자란 장차 오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수모받을 그 환란을 네가 네 시대에서 앞당겨서 많이 당하라고 그것 때문에 선지자가 된 거예요. 오늘날 성도가 선지자거든요. 왕같은 제사장이고 선지자들이에요.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오늘날 성도가 ‘나는 구원받았다’라는 그거 자랑질하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예수님이 당했고 예레미야가 당했던 그 억울한 비난을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너희들이 내 복음과 말씀으로 핍박받거든 다행인 줄 알고 기뻐하라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있었던 천국 가는 라인(줄)이 있는데 그 라인에 있는 사람은 똑같은 경우를 당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있는 말씀은 정말 무서운 말씀이에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선지자가 당했던 똑같은 환란을 안 당했다면 자기를 성도라고 말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어디서 가짜가 흉내 내기를 해. 예수님이 당했던 똑같은 환란과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는 왜 그런 비난을 안 받습니까?’라고 하면 본인이 그 비난을 추방했거든요. ‘고만해라. 고만. 아~~~~~. 안 들린다. 안 들린다’라고 귀를 막으며 많이 들었으니 그만하라고 우리가 복음의 귀를 스스로 다 막아버렸잖아요. ‘나도 남들처럼 살아보자’라고 스스로 바쁘다 핑계 대고 하면서 다 막아버렸어요.

주님과 함께 동일한 환란 받을 기회를 본인이 불편해하면서 다 치워버린 겁니다. 그것을 고상한 세 글자 말로 ‘뺀질이’라고 합니다. 뺀질이 또는 싸가지. 수요 말씀에 그런 소리 했는데 서울에 비가 500 미리 왔거든요. 오면 뭐합니까. 돌은 더 뺀질뺀질 해졌지 물이 돌 안에 하나도 스며들지 않았어요. 말씀을 백날 주니 뭐 합니까? 뺀질이처럼 다 빠져버리는데.

전혀 변화된 것 없죠. 불편한 것 다 피해버리고 좋다는 것은 다 주변으로 빠져버리고 그러니 무슨 주님 주신 환란에 참여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안 되죠.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주님이 보통 주님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를, 새로운 경우의 수를 계속 만들어버려요. 우리는 뺀질이 되어서 불편하고 남에게 욕 얻어먹는 것은 되게 싫어해서 도망칩니다.

도망쳐도 결국은 걸리게 되어 있어요. 못 빠져나오는 환경, 환란이고 고난이고 주님과 함께 핍박받는 그 상황을 빠져나오고 싶어도 못 빠져나오는 상황을 계속해서 체험하게 하는데 그것을 네 자로 ‘영적 체험’이라고 합니다. 영적 체험이라고 하니까 기도원 생각나는데요. 기도원에서 악쓰면서 기도해서 뜨겁게 되었다고 하는데, 뜨거워지고 싶으면 코로나 걸리면 몸이 뜨거워집니다.

그런 식은 영적 체험이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 보세요. 여러분들이 주의 이름으로 수난과 비난을 받게 되는 경우가 이상하게 찾아와요. 자꾸 찾아와요. 그럴 때 예레미야 2장의 본문이 여러분에게 그냥 소나기처럼, 500 미리 비처럼 바가지로 부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떠났는데 말씀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예레미야에게 당했던 그 말씀, 그 수모를 그대로 우리에게 덮쳐주는 겁니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노력과 애씀으로 구원되는 경우가 없음을 그 순간에 또다시 확인합니다. ‘야, 내가 천당 가기 위해 애쓴 것들이 위선이고 실은 주께서 그런 환경을 조성해주셨구나’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기쁨이 확 올라오죠.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그다음 문제는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환란에 참여하게 하느냐. 그 문제가 역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문제의 방법은 우리가 수시로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누구를 잊어버리는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잊어버려요.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잊어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과 이것이 우리 내부에 어떤 휴지통이 있다면 그 휴지통에 자동으로 버려지는 거죠.

그러면 주님께서 어떤 상황을 보여준다는 것은 우리가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쓰레기통에 갖다버린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말씀을 다시 돌아봐서 그것을 쓰레기통에서 끄집어내는 경우를 만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쓸데없다고 여겼는데 이것이 내가 가진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집에 있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소중하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다 집에 다이아몬든 5캐럿 정도는 다 있으시죠.

집에 있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소중한 것을 내가 무심코 그냥 본질적으로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 번 예를 들었습니다만 이탈리아의 무역 상인을 남편으로 둔 정말 잘 사는 집안의 사모님이 얼마나 남편이 돈을 갖다 부어줬으면 정말 사치스럽게 살았습니다. 남편이 무역하는 사람이에요. 인도, 네델란드, 영국 아니면 동인도회사에서 무역하면서 올 때마다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어느 날 창고에 밀가루가 가득 있으니까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서 창고 비좁다고 밀가루를 갖다가 다 버렸어요. 돈이 많으니까. 어느 날 남편이 쫄딱 망했습니다. 완전히 몇 년 새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남편이 장사하며 쌓인 부채와 대출받은 것들 때문에 은행에서 담보 잡힌 것들을 다 가져갔습니다. 남편도 망했고 여자도 망했습니다.

여자는 그때부터 배가 고팠습니다. 아직까지 하인은 옆에 버티고 있었는지 함께 들에 갔는데 들에 밀이 가득해요. 저기에 왜 저렇게 밀이 많이 났느냐고 물으니까, 그건 사모님이 갖다버린 밀이 자라서 저렇게 많이 자랐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하나님의 환란은 다른 게 아니고, 우리 마음을 제일 처음 자리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그 처음 자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일체 관심 없고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본성이 작렬하는 그 자리가 우리의 본 자리예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배가 불러서 여유 있을 때 하는 짓이고 정말 생활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 믿겠습니까? 안 믿죠.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중이고 목숨이 귀해요. 내 살기 위한 하나님이 하나님이지 내 목숨 버리고 찾는 하나님은 우리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너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너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며 살라는 이게 분명히 고린도후서 5장의 말씀이거든요.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5:15)

그 말씀을 혹시 여러분들 집에 쓰레기통에서 찾아보세요. 그 말씀을 이미 갖다 버렸습니다. 나 우선이지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밥 먹고 살 동안에 여유 있을 때, 상급 준다고 하니까 진짜 상급 있을지 모르니까 나중에 보너스 한 번 타볼까 해서 하는 식이지 지금 당장 급할 때는 하나님은 뒷전입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그 자리에 세웁니다. 선지자에게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게 진리이고.

그것은 집에 있는 다이아몬드보다 귀하고 집에 있는 밀가루보다 더 귀합니다. 이게 선지자의 삶이에요. 이게 오늘날 우리의 삶이고. 우리는 까마득하게 그 자리가 내 자리인 줄을 모르고 독립해서 살고 싶어요. 내가 혼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선지자를 찾아 예레미야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아주 엉망인 곳으로 보냈습니다.

보냈다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지금껏 너는 네 맘대로 사는데 그 하나도 너의 맘대로 산 적이 없다는 사실을 통보해줍니다. 내 맘대로 산 적이 없어요. 어디 가서 커피를 마시는데 그 커피가 그냥 커피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 보니 소금 커피예요. 마셔보니 소금 커피가 아주 새로운 맛이었어요. 그것이 주의 뜻이었습니다. 어떤 것 하나, 한 시간 뒤, 두 시간 뒤, 어떤 일도 내 맘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한 시간 전, 두 시간 전의 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해서 발생 된 일이지 내 맘대로 된 일이 없어요.

하나님을 내 뜻대로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게 하셨다는 그 뜻도 주님 마음대로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주님 마음대로. 그런데 인간이 자기 맘대로 하는 겁니다. 그것이 또 성경에 나와요. 사사기 2장 10절에 보면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는 이 말씀이 되게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의 기억력으로 하나님 알아서 내 기억력에 준해서 그걸 바탕으로 계속 하나님을 잘 믿겠다는 그것이 거짓말입니다. 이건 성립되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에 관해서는 매일같이 우리는 잊어버리는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예요. 하나님이 안 잊어버리신 거예요. 항상 소급해서 되새김해주는 겁니다. 우리는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좀 돌아서지 말지.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이것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인데 인간 세계에 가진 편견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우상론으로 펼쳤습니다. 이것은 좀 빨리 지나가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우상같은 것이 있는데 첫째는 종족의 우상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이기에 갖는 편견, 한 번 믿는 것은 계속 진리인 줄 착각하는 그 편견, 그게 인간이라는 종족의 우상입니다.

또 인간에게는 동굴의 우상이 있는데 개인적인 기술이나 재능, 자신이 있는 직장, 자기가 선택한 어떤 직업과 업무, 자기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 옳고 중요하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그러한 편견, 이것을 동굴의 우상이라고 합니다. 동굴에 갇힌 상태란 말이죠.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고생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시장의 우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언어와 실재를 구분 못 하는 편견입니다. 시장에 가면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여론을 주고받잖아요. ‘윤승렬 지지율 떨어지는 이유’ 같은 이런 거요. 온갖 여론과 이슈, 이런 것들을 어디서 듣습니까? 옛날에는 시장에서 들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들었습니다. 거기서 오는 것들을 조합한 나름대로 그것을 정리한 편견을 시장의 우상이라고 합니다.

네 번째가 인위적으로 국민을, 백성들을 권위자나 통치자가 조작하기 위해서 이슈화해요. 어떤 권위라든지 전통 또는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라고 그 가장이나 성씨를 가진 윗대의 할아버지가 자기 자손들을 모아놓고 훈시하면서 ‘우리 집안은 보통 뼈대 있는 집안이 아니다’라고 가르치는 거예요. 그게 연출된 건데 그것을 가지고 극장의 우상이라고 합니다.

요즘 극장의 우상 가운데 하나가 텔레비전 예능프로가 극장의 우상이에요. 옛날에는 코미디를 조작해서 보여줬는데 요새는 개개인의 사생활을 깊숙이 다 보여줍니다. 사생활 보여주는 개인적 욕망, 거기에 사자머리 아줌마(오은영 박사)가 해주는 상담, 모든 게 그것이 진실이 아니고 그저 개인적 경험이거든요. 동굴의 우상이고 종족의 우상이거든요. 그런데 저렇게 해야 정답인 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자폐증 가진 사람, 어떤 차트화일 들고 있을 때, 손가락을 특정 모양으로 하고 있고, 항상 주의하려고 회전문 앞에서 하나, 둘, 셋을 하면서 문을 들어가는 이상한 변호사, 거꾸로 말해도 우영우, 토마토, 역삼역, 기러기처럼. 그리고 아이디어 떠오를 때 고래 영상 위에 막 띄우고 하는 드라마 속 변호사가 우영우예요. 자폐증 가진 사람 중에 똑똑한 정도가 아니라 재능있는 사람이 0.1 퍼센트밖에 안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 극장의 우상입니다.

이게 다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 홀로 살 때 남들 보기에 내가 괜찮은 인생이 되면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모방하면 홀로 사는데 지장이 없을까 생각하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악마의 지옥같은 세계를 우리에게 허용한 이유입니다. 원래의 자리, 그것은 바로 네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그냥 혼자 살고 싶은 것이 원래 너의 본모습이라는 겁니다.

그 모습을 우리는 매일같이 새롭게 시작해야 해요. 우리가 바로 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내세운 모토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우상숭배를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겁니다. 우상숭배 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주님이 보인다. 이게 바로 예레미야 자리가 뭐냐 하면, 자기 목숨이고 뭐고, 네가 어떻게 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천상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에 위에서 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나를 어떻게 쓰시고 사용하느냐로 오케이입니다. 끝났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 남들이 가는 불신자들이 있는 그 처음 자리에 예레미야를 합류시켜버려요. 그게 십자가 앞이잖아요.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내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그냥 차트 들고 자폐증처럼 이렇게 살아가는 거, 그게 원래 내 모습이에요. 그러면 주님 주신 은혜와 햇빛과 공기와 은혜는 어디 갔느냐.

그건 쓰레기통으로 다 들어가 있죠. 내 위주로 살기 때문에. 살게 하시는 것을 고마운 줄도 모르고 내 목숨 뛰게 하시는 것도 고마운 줄 모르고 그냥 다 쓰레기통으로 버리고 내가 가진 편견으로 내가 대단한 존재인 것을 증명하는데 우리는 평생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예능프로 중의 하나에서 보면 여론이, 그러니까 친구들이 그렇게 하게 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어느 중학교 야구팀이에요.

모두 70명인데 그중에 포경수술 한 아이가 한 명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왜 안 했느냐면 그 아이가 수술하고 ‘되~~게 아파요’라고 하니까 나머지는 아무도 안 한 거예요. 그래서 의사가 불러서 ‘에이즈 걸린다. 해라’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할까?’라고 바뀌는 거예요. 그러니까 포경수술 하는 것도 문제예요. 그게 구원받는 거랑 하나님이랑 아무 상관 없는 거예요.

예능프로가 그런 거예요. 네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네가 나를 멋있게 하고 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만 와락 쏟아내는 그 지옥에다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곳이 진리라고 앉혀놓은 지옥에다가 우리를 아예 퍼뜨려 버린 거예요. 왜?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소원대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끝까지 참으심으로써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계속 잔소리해주죠. 성령께서 십자가 가지고 계속 잔소리해주죠.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매 우리가 영적 체험 속에 그동안 우리가 내 식대로 내 맘대로 살았다는, 자기 맘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그런데 내 맘대로 살았다고 우기는 그것이 세상에 놀라운 성령의 체험이고 영적 체험에 해당하는 사실을 십자가 아는 순간 일거에 깔끔하게 정리되는 거예요.

‘주께서 버리지 않았구나. 내가 주님을 버리는 순간에도 주님은 잊지 않았구나’라는 이 근거가 아까 읽어드렸던 사사기 2장 10절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말은 그들이 율법을 버렸다는 겁니다. 율법을 버린 예시가 여기 34절에 나옵니다. “또 네 옷단에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음을 인함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로 너를 책망함을 인함이니라” 이 말이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도둑으로 들어왔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도둑놈을 훔쳤다고 죽여버렸어요.

도둑질했으면 경찰에 넘기든지 해야 하는데 그냥 죽여버렸어요. 왜? 자기가 율법이고 자기가 법이기 때문에. 그런데 출애굽기 22장 2~3절에 보면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밤중에 모르고 그 사람이 물건을 훔치는지 나를 공격하고 죽이려고 하는지 모르고 할 때는 죄가 없지만 해가 돋은 후에는 그 도둑을 죽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 사람은 가난해서 도둑질 한 거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의 촘촘한 망으로 다 덮여 있는데 인간은 나 편한 대로 살기 때문에 하는 것마다 율법을 다 위반하게 되는 겁니다.

또 여기 32절에 보면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계수할 수 없거늘”이라고 나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리따운 처녀로 만들어줬는데 그 아름다운 옷과 패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찾지 않고 세상 남정을 찾아가는 겁니다. 그것을 또 33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짝짜꿍이 되어서 그들처럼 재미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이것은 수련회에서 언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매일 삶 속에서 어느 정도로 율법을 위반하는지를 모르는데 다만 중요한 것은 이거 하나만 아세요.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다 이루어진다는 거. 기다리는 사랑, 찾아오시는 사랑, 대신 피 흘려서 용서하시는 사랑, 그 사랑만은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성질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내 편한 대로 사는 것에 중무장 되어서 조금이라도 뭔가 불편하면 다 쓰레기통에 던져넣는 우리의 속성, 하지만 그 속성마저 아시고 꾸준히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그 십자가 사랑, 그 사랑을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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