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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35-37
(2:35)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2:36)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 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
(2:37)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신경쓰십니다. 그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들 안에 하나님의 자신의 보물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그들이 범죄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을 징계해서라도 그들의 손에 잘못 이해된 그 귀중한 보물의 취지를 기어이 완성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알아서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있는 걸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나는 무죄하다” 즉 “나는 죄가 없다”를 주장합니다. 많이 건방져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진심믈 말하고 솔직하게 주장하는 겁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주장으로 모든 것이 귀착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의식에서 벗어날 처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식은 기억에 의해서 순서대로 서열화되어 있습니다. 즉 원인에 준해서 결과를 내다보고 예상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35절) 이런 하나님의 주장은 인간들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기억은 과거 기억의 바탕 위에서 항상 자신의 옳고 바른 것들만 골라서 집대성하기 때문입니다. 즉 과거에 그 어떤 잘못을 했다하더라도 미래는 항상 그것을 옳게 정리정돈되어 있기를 고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고대한 것을 자신이 믿고 소망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고 싶다”라고 기대하기에 이 기대에 준해서 좋은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전면적으로 모두 다 거부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날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겁니다. 사랑하기에 믿어지는 겁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나란히 놓고서는 그 중에서도 사랑이 제일이다고 단정짓는 이유가 뭘까요?(고전 13:13) 그것은 사랑의 구체화는 인간들이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의식 밖에서 주어지는 사랑에서 소망이 나오고, 인간의 의식 밖에서 주어지는 사랑에서 믿음이 나오는 겁니다.
사랑이란 인간쪽에서 요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특별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귀한 것을 집어넣으신 겁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 3:13-15)
그렇다면 이 지혜가 신약에 와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그것이 ‘값없는 의’로 나타납니다. (롬 3:24)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Being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is in Christ Jesus: ‘의’를 지혜의 핵심으로 언급해야 될 이유는, 이 ‘값없는 의’로 인하여 비로소 죄가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즉 죄라는 것은 인간들이 이해하는 윤리적, 도덕적 죄가 아니라 ‘값없음’을 가리는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값이 없어야 하는데 인간 쪽에서 어떤 식으로도 값을 치르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보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점을 이해못한 경우가 오늘 본문에 나온 겁니다. 즉 “무죄하다고 하기에 죄가 되어 진노하겠다”는 겁니다. ‘무죄함=의’를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인간의 의식은 어떤 목표goal를 정해놓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합니다. 이것이 aim, 곧 목적성향입니다. 인간은 목표를 쥐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목적성향으로 이어나갑니다. 마치 꿈 속에서 앞서 가는 사람을 아무리 애쓰고 뒤 사람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항상 간격과 거리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값없이’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달성할 목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목적성향을 자극하게 됩니다. ‘값없이’는 인간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자신의 목표가 되어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진노해 버리십니다.
그 예가 로마서 3:8에 나옵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즉 사도 바울의 말은 그 근원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두고 말하는 것인데, 어떤 이들은 이점을 모르고 자신의 살아있는 의식으로 하나님께 선을 이루어 드리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는 이미 인간의 의식도 주님께서는 죽은 것으로 간주해서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관점을 하나님에 두지를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의식에다 관점을 둡니다. 이것은 ‘의식의 병목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과 의식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그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따로 뽑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는 ‘값없이’의 가치가 훼손됩니다. ‘값없음’이 ‘값있음’이 되는 겁니다. 또다른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떤 회사 사장이 사장실에 건방진 자세를 취하면서 부하 직원을 불러스 지시를 내립니다. 집에서 한가로이 할 손톱 손질을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쯕 뻗어서 꼬고 앉아서 지시를 내립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누가 봐도 건방지고 무례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정작 부하직원은 전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것은 가까운 가족이나 혈육도 제공하지 않았던 신장이 그 사장이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존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 자체가 ‘자기를 위한’ 의식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항상 충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그것은, ‘값없는 의’를 가리는 죄가 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제공하신 우리 주님의 가치를 자기 의식 차원에서 훼방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주변 강대국인 앗수르 제국에 아부는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이사야 37:36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 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진작에 말씀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의식의 병목현상에서 비켜나기 위함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존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신약의 새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바탕을 두고 주님으로부터 현재 위치를 배정받고 지정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 있든지 성도는 이미 ‘값없는 의’ 속에 사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다시 태어나도 주님의 지정해주신 의(義)의 자리는 변함을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예레미야 2장 35~37절(지정받은 위치)22082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장 35~37절입니다. 구약성경 1052페이지입니다.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치 아니하였다 함을 인하여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뇨 네가 앗수르로 인하여 수치를 당함같이 애굽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을 인하여 형통치 못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는 여전히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이 관심 있으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랑으로써의 관심입니다. 사랑이 어느 정도로 좋으냐 하면 믿음, 소망, 사랑을 이렇게 나열시켜 놓고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믿음 따로 챙기고, 소망 따로 챙기고, 사랑 따로 챙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건 그 안에 다 담겨서 온다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지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택한 백성을 사랑한다는 그 마지막 절정이 신약에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모든 게 종결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이스라엘이에요. 구약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신약에는 혈통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단군의 자손이든지, 미국 사람이든지, 필리핀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누구든지 이스라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어요. 갈라디아서 3장 6~7절에 보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혈통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뻐기고 있는데 갈라디아서에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한 거예요.
그 믿음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사랑으로 나온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요, 주님이 나를 안다는 것이 믿음이에요. 바로 이런 사실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거든요. 인간은 자기가 의식이 있고 모든 출발을 자기의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우에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그렇게 단정을 지어요.
이거는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은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너를 사랑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이 뭐가 믿음이냐. 내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알고 계시고 이미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내가 믿는 거예요. 그래서 이 믿음 자체가 시작이 아니고 결과로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의 결과가 아니라 주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데 그 결과, 은사, 선물로 나에게 믿음, 소망, 사랑이 다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 날 사랑하고, 하나님이 날 믿게 하시고, 나를 알고 계시면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느냐 하면 왜 내 쪽에서는 하나님을 못 믿고, 내 쪽에서는 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왜 내 쪽에서는 하나님을 소망하지 못하는 존재인가를 즐겁게 계속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알아가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 교회에서 말하기를 ‘왜 기도를 강조하지 않느냐’라고 하고 특히 우리교회에 우야다가(어쩌다가) 온 사람들이 평가하기를 ‘왜 이 교회는 기도를 강조하지 않느냐’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하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감사하는 겁니다. 사람이 얼마나 감사가 안 되면 기도를 하겠어요. 얼마나 속이 타고, 불평불만이 있고, 짜증이 났으면 기도를 하겠어요. 저는 그래서 우리교회 교인들이 겉으로, 속으로는 다 기도하겠지만 겉으로는 기도를 강조하지 않는 이유는 감사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제가 일방적으로 단정 짓고 싶어요. 일방적으로. 그냥 일방적으로 그러고 싶어요.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느냐면 속에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데 ‘아이고, 뭐 기도해서 되겠어? 안 될 거 쓸데없이 뭐 하려고 하겠노? 모든 것이 주의 뜻인데 뭐 어떻게 되겠지’라고 이렇게 주의 뜻을 말하면서 감사가 얼굴에 확 퍼지는 것이 아니고, 안면 근육의 힘이 풀리고 얼굴이 환해지면서 저절로 감사가 막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짜증이 확 퍼지면서 ‘주의 뜻대로 되겠지. 뭐 나는 참기만 하면 되지. 나는 그냥 어쩔 수 없이 감사하다고 억지로 한마디 하면 되겠지’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교회에 없을 것이라고 이것도 일방적으로, 터무니없이 말하고 싶어요.
이게 참는다고 참을 문제가 아니에요. 감사는 사랑하게 되면 저절로 나오는 게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걸 정리하면 뭐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왜 사랑하느냐면 이스라엘이 이뻐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본질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본질을 찾는 거예요. 보석을 찾듯이요. 지혜가 보석보다 귀하다고 잠언서에 나오잖아요.
생명 나무가 지혜인데 이건 보석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보기에는 말씀이 잠 오고 잔소리처럼 들리지만, 세상은 우리 속에 집어넣은 말씀대로만 움직이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이스라엘을 파헤칩니다. 파헤쳐서 자신의 본질은 이스라엘이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다치지 않았고, 손상이 없고, 정상적으로 제대로 안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그 지혜가 뭐고, 생명이 뭐고, 그 보물이 무엇인가. 그것은 신약에 로마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로마서 3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신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냥 의롭다 함을 받는데 앞에 조건이 있어요. 반드시 값이 없어야 해요. 값없이 의롭게 되어야 해요. 모든 종교를 다 박살 내는 겁니다. 값없이. 금식기도 없이, 철야 없이, 헌금 없이, 선교나 헌금이나 봉사 없이, 그냥 값없이 의가 되어야 해요. 그런 것들이 먼지처럼 선교, 헌금, 봉사, 전도, 목사 섬김, 이런 것들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러면 ‘값없이’가 훼손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의롭게 되는 그 의를 주신 거예요. 의를 주셨는데 그게 값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 거기에 값을 얹어 버립니다. 얹으니까 주님께서 이 값을 하나하나 제켜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신 하나님의 값없는 의가 있는데 우리 자신이 자기가 잘나 보이고 싶어서, 교회 와서 신앙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우리가 만약에 손으로 우리를 꽉 움켜쥔다면 주님께서 손가락 하나하나를 다 제켜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아야야야야’라고 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 하나하나 제켜 버리는 겁니다. 값없는 의를 우리는 어떤 노력의 열매로 또는 대가로 얻은 것처럼 여기는 그 본성을 제켜 버려요. 이렇게 제키실 때 우리를 뭐라고 부르시느냐면 ‘네가 죄인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윤리 도덕을 가지고 죄라고 하지 않고요. 하나님이 주신 귀한 보석을, 값없는 것을 값있는 것으로 내 힘으로 치르고 싶을 때 그게 바로 죄라고 하는 겁니다.
값이 없을 지경 같으면, 우리 힘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 그런 존재를 주께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 아주 지독하게 파고들어 갑니다. 인간은 의식이 있거든요. 여러분 실력들이 되시니 좀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의식이 있다는 말을 기억에 준해서 그다음 의미를 챙기고 그다음에 의미를 기억하고 또 의미를 챙기고 이렇게 계속해요. 그걸 의식으로 계속 나가는데 이것을 의식의 병목현상이라고 합니다.
병목현상이라는 것은 차들이 정체되어서 가다가 서고, 가다가 서고, 이렇게 인간들이 평생에 생각하는 것이 의식의 흐름이에요. 계속 의식의 흐름인데 의식이 자기 생각뿐이에요. 그걸 자기의식이라고 하는데 자기의식으로 계속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의식으로 나가면서 하나님의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이 있는데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말씀도 있으면 집어넣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도 집어넣고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다 집어넣어요.
그것을 기억해서 기억된 그 의식으로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분명히 자기는 값을 뺐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본인 관리하는 거예요. 손가락 제키는 어떤 외부의 일들이 안 일어난 거예요. 그냥 곱게 곱게 자기 단도리하고 자기 관리만 했을 뿐이에요. 이렇게 해서는 절대 값없는 의가 안 되고요, 결국 자기가 노력해서 의롭다는 이 소리밖에 안 나오니까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네가 그런 식으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성경 말씀대로 다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어디까지 나가야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 35절에 나옵니다.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라고 나옵니다. 정말 너무하죠.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라는 이 말은 주님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인간은 이 말을 이해 못 합니다.
이 비슷한 말이 로마서 3장 8절에 나옵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고 죄인밖에 없다고 했거든요. 죄인밖에 없는데 그 죄인을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아실 텐데 값이 없다는 말은 진짜 값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그 값을 예수님 쪽에서, 외부 쪽에서 다 치렀기 때문에 너에게 더이상 값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선교하라, 전도하라, 기도하라, 헌금하라, 예배 참석하라’라는 이런 것들을 일체 요구하지 않아요. 바르게 살라는 말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랑으로 이미 모든 율법을 이뤘는데 사랑에 뭘 더 보탭니까?
사랑한다는 것으로 모자랍니까? 그러면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라고 이렇게 세 번, 네 번 할까요? 그게 사랑이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외부에서 오는 그런 작동, 능력이 없이 방금 이름 들은 것을 내부적으로 처리하려고 하니까 뭐가 발목을 잡느냐 하면 인간의 의식이 발목을 잡는 거예요. 의식하니까 또 어렵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쉽게 해야 할 의무를 느끼는데요.
예를 들면 의식이 어떤 종류냐 하면, 꿈같은 것을 보면 앞서가는 사람을 뒤따라가는 내가 절대로 잡을 수가 없어요. 그게 꿈입니다. 꿈속에 아름다운 광경, 멋진 것들 있는데 그걸 잡으려고 하면 꿈이 깨버립니다. 꿈은 항상 간격을 유지해요. 결핍을 만들어 내요. 내가 의식에서 벗어난 어떤 무의식이라고 할까요. 어떤 환상같은 것을 의식 쪽에서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심지어 꿈속에서 고함지르지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못 만나는 거예요. “거기 좀 서세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기다리세요!”라고 소리지르며 잡다가 잡았다고 보면 꿈에서 깨서 자기 아내 팔목을 잡고 있는 거예요. 잡으려고 애쓰다 보면 나중에 꿈 깬다니까요. 아깝다고 아쉬워하며 내일 그다음 편 꿈꿔야지 하지요. 이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목표와 목적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목표라는 것은 어떤 도달점입니다. 축구 할 때 골인이라고 하는 그 골(Goal)을 목표라고 하고 그 골인 지점을 향해서 노력하는 것을 목적성 또는 목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어로 ‘Aim’이라고 하죠. 인간은 아무리 목표를 정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목표를 잡는 것이 아니고 목적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 그걸 잡아봤자 목적이 멈추질 않아요.
목표가 새로 설정됩니다. 이건 아니지. 이건 내가 찾는 파랑새가 아니야. 하늘에 파랑새가 아름답게 보이죠. 손에 쥐면 똥 냄새나요. 더럽다고요. 그리고 다른 파랑새를 다시 찾죠. 인간은 끊임없이 자꾸 간격을 줄이려고 시도하느냐. 이게 인간의 의식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의식에 발목 잡혀서 그런 겁니다. 벗어날 길이 없어요. 인간의 의식에서 오는 오해 중의 하나가 쉽게 이해하도록 제가 한번 이야기를 지어낼 테니 들어보세요.
어떤 사람이 사장인데 밖에 있는 김 과장을 들어오라고 지시해요. 들어왔는데 사장실에서 자기가 사장이라고 책상 위에 두 다리를 포개서 올리고 시간도 많은 사람이 집에서 해도 되는 손톱 손질을 하면서 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손만 쳐다보면서 ‘김 과장 들어왔어?’라고 말을 던질 때, 그 부하직원 보기에 사장이 굉장히 건방지게 보이죠. 왜 건방지냐 하면 우리의 지난 과거의 모든 행세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예의를 갖춰서 정중하게 지시해야 하는데 이건 너무 건방을 떠는 모습이라는 거죠.
물론 다리를 포갤 수 있어요. 그러나 이건 상대를 하찮게 보고 하대할 때 하는 모션이라는 거죠. 그리고 하필 손톱 손질은 거기서 하고 있느냔 말이죠. 그건 ‘네까짓 것 나는 관심도 없다’라는 표를 내는 대표적인 표상이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부하직원은 ‘예~예~’라고 고분고분하고 사장에게 굉장히 감사하고 있단 말이죠. 그걸 제3 자가 볼 때 굉장히 이상하게 본단 말이죠.
‘화 안 나나?’라고 물으니까 직원이 ‘응, 화 안 나. 그 사장이 나를 위해서 자기 신장을 하나 떼줬거든’이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신장까지 떼줬는데 손톱 손질 좀 해도 괜찮죠. 이게 뭐냐 하면 ‘네가 인간이면서 왜 예수님에게 고분고분 하느냐?’라고 할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신장 떼줬거든요. 생명을 줬다고요. 거기서 자진해서 사랑을 아는 거예요. 주님 앞에서.
이게 바로 의식에서 나오는 우리 의식의 오류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기는 다리 꼬고 앉아 있으면 건방지다는 의식에 의해서 제3 자가 저 사장이 건방지다고 하는 그 자체가 내가 갖고 있는 이 기억에 있는 것들은 ‘절대로 나는 죄가 없다. 무죄하다’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 무죄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너를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외국에서 어떤 사람이 신문광고를 냈는데 ‘우리 마을에서 빨강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제가 다 취직을 시켜 드리겠습니다’라고 광고하니까 예상외로 많은 사람이 몰려왔어요. 빨강머리 한 사람 중에 놀고 있던 백수가 많았던 모양이죠. 그런데 광고에 ‘빨강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제가 다 취직을 시켜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니 모였는데 취직해서 하는 일이 전화번호부 베끼기, 백과사전 베끼기, 이런 아무 의미 없는 일들을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탐정 셜록홈즈가 ‘이 사람이 좀 이상하다. 취직하고 싶은 사람 관점으로는 이 사건은 풀리지 않는다. 그러면 광고를 낸 사람 입장에서 이걸 풀어보자. 무슨 의미가 있는지’라고 하며 광고 낸 사람을 조사해보니 도둑놈이에요. 그런데 왜 도둑놈이 빨강머리를 가진 사람들을 왜 취직시켜줬느냐 하면 대낮에 집을 비우게 하려고 취직을 시킨 거예요. 지는 빈집에 들어가서 도둑질 한 겁니다.
탐정이 그걸 밝혀낸 거예요. 도둑놈 입장에서 그걸 생각해 낸 거예요. 지금 여기 예레미야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입장만 생각해요. 나는 내 기억에 의하면 내가 그렇게 진노 받을 나쁜 짓은 안 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 네가 나쁜 짓을 안 했다고 하니까 그게 바로 진노 받을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3장 8절에서 사도바울을 공격하기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서 죄를 더 지어야 하겠네”라는 자들이 등장했다는 거예요.
지금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지옥 갈 인간이 어디에서 뺑뺑이 도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믿음이 되고 사랑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거, 그것으로 뺑뺑이 도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값없이’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값있음이 돼요. 이게 여러분에게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불신자에게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발언이긴 하지만.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앗수르로 인해 수치를 당한다고 나오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바깥으로 발현시키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앗수르라는 멋지고 잘 먹고 잘사는 대국을 옆에 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가서 빌고 조공 바치고 살려달라고 그러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제키고.
앗수르에 갔을 때 앗수르를 이스라엘 옆에 장치해 두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 앗수르를 장치했는가. 그것은 이사야 37장 36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 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아침에 나가보니 십팔만 오천 명이 다 죽었어요. 이것을 이스라엘의 의식에서는 이런 내용을 미리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들은 잘사는 데 가서 빌고 그래서 보호받는 거, 이게 인간의 기억 속에 있는 의식이 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을 다 전멸시킨다는 것은 좀 미리 이야기하시면 좋은데 절대로 미리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미리 이야기하면 십팔만 오천 명을 전멸한다는 것을 내 믿음으로 믿고 구원받은 게 돼요. 지금 주님께서는 내 믿음을 작살 내려고 하십니다.
나의 믿음, 소망, 사랑을 다 작살 내려고 하세요. 만약에 그걸 작살 내지 않으면 우리는 죄 없다가 되어버려요. 무조건 하나님은 죄 있다로 출발하자고 하십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십자가를 통해서 죄 있다가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대신 저주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은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 오기 전부터 이미 저주받을 대상이었던 겁니다.
한평생 살면서 이런 이야기 처음 듣습니까? 학교에서 안 가르쳐 주지요? 선생님 저 어느 대학 갈까요? ‘너는 대학이고 뭐고 이미 저주받았어’라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면 학부모들이 들고일어날 겁니다. 학교 다니나 안 다니나, 퇴학 되나 안 되나, 저주받은 자예요. 이건 복음으로서만 성령으로서만 우리에게 이걸 알려준 겁니다.
그냥 죄 있는 거예요. 그냥 죄인으로 갑시다. 그냥~쫌~. 군소리하지 말고. 그래서 오늘 본문에 설치고 나대지 말라는 말 나오죠. 36절에 보면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부지런히 나대는 거예요. 뭐 개코도 모르면서 부지런히 다녀요. 네가 너를 알아?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무엇 때문에 오느냐. 무조건 오는 거예요. 무조건. 의롭게 되는 것도 무조건 의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값없이 무조건.
아무 행한 것도 없고 일한 것도 없이 얻는 복을 다윗이 고백하잖아요. 로마서 4장 6~8절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면 우리가 산다는 것이 뭐냐. 주께서 무조건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위해서 우리는 자리를 배정받은 거예요. 너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님의 위치가 뭐냐. 열두 제자이고 주님의 위치가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그저 구약의 이스라엘은 자기 존재가 중요하지만 신약의 이스라엘은 위치가 중요한 거예요. 주께서 은사로 주신 위치. 그 위치는 네가 아무리 도로 태어나도 그 위치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흔히 세상에서 묻지요.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내와 당신의 남편과 살겠습니까? 정답은 뭐냐. ‘살 수밖에 없다’라는 이게 정답이에요.
뭘 우리가 선택해. 주께서 주신 위치인데, 지정된 자리인데, 지난 과거 기억하거나 후회하거나 하지 마세요. 기억하더라도 후회하지 마세요. 열 번을 태어나도 열 번 똑같이 반복될 일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그 수밖에 없어요. 평택항에 가면 현대자동차 선적하는 것이 있어요. 선적할 때 거기서 일하는 사람은 자동차를 몰고 배까지 들어가서 주차하고 또 나와서 다른 차 주차하고 또 나와서 주차하고 하루종일 근무시간 내내 육지에 있는 자동차를 화물칸에 주차하고 나오고 주차하고 나오는 주차의 달인이에요.
그일 뿐이에요. 우리의 인생은 이러한 인생 말고 구원에 적합한 인생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정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강도로 태어났다. 또다시 태어나도 강도입니다. 그게 바로 나는 주님을 몰랐는데 주님이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 그게 바로 성령으로 거저 받은, 값없이 받은 의로움이고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조건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고, 뭐가 잘못되었고 뭐가 오류가 생겨서 이렇게 힘드냐고 따지고 있는 저희들, 주여, 우리의 의식이 문제였고 발목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다는 이 사실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보물이고 지혜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