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성도의 뿌리
2022년 9월 11일 이근호목사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1-13
(3: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3:12)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안 돌아옵니다. 돌아올 것같으면 진즉에 돌아왔을 겁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돌아오라”를 유효하게 사용하십니다. 안 돌아올 것을 뻔히 아시고도 “돌아오라”는 것 아니라 아예 ‘돌아오지 말아야 될 자’를 향하여 돌아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뿌리를 신약에 나타나실 예수님에게서 두기 위함입니다. 즉 ‘율법으로 돌아오라’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 돌아오라’를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우선 인간이 뭔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위치가 돌아가야만 하는 비정상적 위치가 되어야 합니다. 이 비정상적 위치를 적시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예레미야 3: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이 말씀과 연관해서 신명기 24:1-4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바람난 여인은 절대로 남편이 받아주지 말라는 언명을 하나님깨서 친히 선언하신 겁니다. 여기에는 결코 ‘돌아오라’가 성사될 수 없습니다. 즉 율법의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까? 선지자가 내다보고 있는 그 세계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그것은 율법을 위반한 채로 말입니다. 율법을 위반했으면 저주받고 멸망당하는 것이 마땅한데 또 따로 구원의 여지를 주신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원칙을 철회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람난 아내는 받아주지 말라는 원칙은 그대로 고수됩니다. 그러면 율법의 완성 속으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의해서 범죄한 인간 자체를 제거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뿌리를 이스라엘 내부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바깥에 두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자체는 제거될 대상이 됩니다. 즉 내가 행한 것을 내가 믿음으로서 내가 구원되는 식은 끝난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처신해야 하는 인류를 대표합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긴 것도 이미 모든 인류가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으로 돌아올 수 없다면 다른 종족들도 하나님에게도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능력에 하소연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는 인간의 능력을 인간이 버릴 수밖에 없는 그 한계에 처해있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계속 유지시키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그 현장까지 끌고 가시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인간들이 율법을 예수님처럼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가 자기를 믿는 믿음 바깥으로 못 벗어남’이 밝혀질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 생각해두신 바는, ‘우리 인간은 우리네 인생에 있어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에 관여해서 달라질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돌아오라”고 선지자를 보내어 외치시는 이유는 그들의 뿌리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했지만 여전히 그들이 존재해야 하는 기능은 살아 있습니다. 그 기능이란 다름 아닌, ‘시작된 영원’ 혹은 ‘영원한 한 자락’입니다. 즉 신약에 비로소 나타난 영생, 혹은 영원의 긴 치맛자락이 구약 이스라엘에까지 뻗어져 내려온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돌출된 영원’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생명의 촉수’, 혹은 ‘생명의 문어발’ 같은 겁니다. 말씀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은 구약에서 선지자가 외치고 있지만 실은 메시야께서 미리 선지자 속에 들어와 계셔서 외치시는 겁니다. 히브리서 6:20에 보면,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가신 분’이 계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기 앞에 앞서가면 자존심이 확 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기 존재나 운명에 주도적이 안기 때문에 기분 나쁜 겁니다. 자기 앞에 아무도 없이 본인이 맨 앞장 선 인생이고 싶어합니다. 만약에 뒤따라 가면 앞선 가신 분에 철저하게 종속될 뿐임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나님과 협상에 나섭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다 실천할 테니, 자신이 앞장 서고 하나님께서 뒤에 힘껏 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잘못이 오늘날 신약 시대에도 예외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 믿어서 구원받아야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도라면 이렇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만 믿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예수님 소관임을 압니다. 즉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어려움이!”라는 태도가 아니라 “왜 저에게 저를 잃게 합니까?”라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 인간의 뜻이 일치하지 않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율법으로는 저주받아 마땅함을 인정합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조치가 참으로 정당함을 또한 압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참으로 이유가 합당함을 압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성도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는 그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성도는 즐겁게 자기 인생의 구경꾼이 됩니다. 자기 인생의 뿌리를 자기에게 두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가 스스로 이스라엘의 뿌리가 되기 위해서 ‘돌아오라’는 능력까지 주님께서 발휘하고 그 발휘의 결과로 성도는 더는 자신이 뿌리가 아님을 아는 결과를 낳게 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의 완성 속에 우리의 진짜 뿌리가 있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16강-예레미야 3장 11~13절(성도의 뿌리)22091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장 11~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54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패역한 유다보다 오히려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이방신에게 절하고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방금 한 이 말을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습니다. 남쪽 유다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게 선지자의 가야 할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선지자가 경험해야 할 것은 세상은 죽으라고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선지자 몸에 새겨야 하고 베껴내야 해요. 그럴 때 선지자가 있는 세계와 선지자가 외쳐야 할 세계가 점점 더 균열이 일어나고 딴 세계로 방향이 서로 다른 곳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해요.
그렇게 해줘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심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신 것이 얼마나 적절한 조치인지 선지자나 우리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미 지옥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는 복음을 전하고 욕은 바가지로 얻어먹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성도 본인이 일말의 미련이나 희망을 안 갖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쪽에서 뭔가 좋은 반응을 보이게 되면 갑자기 ‘내가 더 살아야 하나’라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요. 그래서 누구와 여러분들이 만날 때 전해줄 것이 있을 때만 만나세요. 쓸데없이 노닥거리지 말고. 이 말씀은 도대체 내가 참을 수가 없어서 정말 폭발할 지경이다 싶을 때, 이건 나에게도 새롭고 분명히 그에게도 새로울 것이라고 느낄 때만 복음의 택배기사 노릇을 하시면 되는 겁니다. 전달하는 거죠. 전달하고 빨리 후딱 빠져야지 오래 앉아 있으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습니다. 물론 이런 일을 성도도 육신이 있는지라 하는 것을 싫어해요. 그런데 성도의 특징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자꾸 주님이 따라와요. 내빼도 찾아오고 가는 곳마다 쫓아오십니다. 다들 그런 경험 하며 살아가고 있죠? 그 이유는 주님에게 대화하라고 주께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시는 겁니다. “왜 따라오십니까? 뭐 볼 거 있다고 따라오십니까?”
그럴 때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네가 지금 내 치맛자락을 밟고 있잖아” 주님의 치맛자락은 영원한 치맛자락이에요. 그리고 벌써 시작된 영생입니다. 이미 시작된 영원이고, 지금은 영원의 한 자락이고,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 자신이 돌출된 영원, 생명의 촉수, 더 노골적으로 생명의 문어발이죠. “왜 자꾸 따라오십니까?”라고 물으면 주님은 “너와 내가 지금 한 덩어리이고 한 몸이기 때문에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와 한 몸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주님의 한 촉수, 문어발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오늘 본문에서 보시면 어떤 것이 딱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느냐 하면 “돌아오라” 입니다. 이건 남의 자식에게 그렇게 이야기 안 합니다. 너는 나와 떨어져서 살 입장이 못 된다는 거죠. “돌아오라. 지금 너의 가는 방향이 엉뚱한 방향이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유다와 합쳐서 이스라엘이라 해봅시다.
“이스라엘아, 네 뿌리는 너 자신이 아니다”라는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해요. 왜냐 하면 세상에서 모든 인간의 뿌리는 각자 본인입니다. 본인을 위해서 세상 사람은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중심부, 센터가 더이상 우리가 아니고 주님께 넘겨져 있는 인생입니다. 이러한 차이점, 진짜 우리의 뿌리가 내 쪽에 있지 않고 주님 쪽에 넘겨 있는 그런 경우가 신약에서 굉장히 많이 나와요. 골로새서 3장 2~3절에 보면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라고 이런 말씀들이 성경에 많이 나와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실감이 나야지. 이걸 실감 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라는 말은 ‘땡! 틀렸습니다’이고 이제 오후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에 도달했어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땡이고 그걸로 끝났어요. 우리는 끝난 그다음 지점에 구원이 있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이 하는 예수님의 일만 믿는 거예요. 왜? 우리 핵심과 우리 뿌리가 예수님에게 넘어가 있기 때문에 예수 믿고 내가 얻을 것이나 돌아오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예수 믿고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예수 믿기만 하면 돼요. 구원은 주님 쪽에서 결정할 일이지 내 쪽에서 내가 예수 믿는다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잘 이해가 안 되면 쉬운 예를 들게요. 미국에 끝도 없어 보이는 허허벌판만 있는 한 사막에 차도 고장 나고 해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차가 하나 옵니다. 그래서 “여기서 LA로 가는 길이 어디입니까?”라고 물으니까 그 운전사가 얼마나 친절한지 “ 이쩍으로 똑바로 가시면 LA가 나옵니다”라고 하고 그냥 떠나버렸어요. 얼마나 친절한지 정확하게 몸짓까지 하면서 정확히 알려주었어요. “ 얼마나 가면 됩니까?” 물으니 “한 400킬로만 가시면 됩니다”라고 하고 그냥 가버렸어요. 그러나 묻는 사람은 나름의 노림수가 있었어요. 좀 태워주면 좋겠다는.지금 허허벌판에서 굶어 죽게 생겼는데 “여기서 LA로 가는 길이 어디입니까?”라고 그렇게 묻는 마음의 태도가 자기 좀 태워달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그 친절한 운전사는 시키는 대로 “이쪽입니다. 차분하게 걸어오세요. 한 400킬로예요”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주님에게 묻습니다. “주님, 천국에 어떻게 갑니까?”라고. 주님은 “이쪽이다”라고 하시고 그냥 가버려요.
왜냐 하면 우리 속에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 중심을 포기 못 해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포기 못 합니다. “나에게 돌아오라. 너에게 가지 말고 나에게 돌아와”라고. 사람들이 이 말씀을 지킬 수도 없고, 지킬 능력도 없고,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내 인생에 구경꾼이다’ 우리가 내 인생에 어떤 손을 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도는 내가 내 인생에 구경꾼이라는 것을 슬퍼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신나게 생각하고 너무 좋아 죽어요. 왜? 시작을 주님 쪽에서 했기 때문에 나는 구경꾼으로 사는 것이 하루하루가 너무 편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나를 절대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잘했다거나 못했다를 내가 규정하지 않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 평을 내리지 않는 겁니다. 왜냐 하면 나는 영원이 아니고 주님이 영원이고 나는 영생이 아니고 주님이 영생이기 때문에 이미 시작한 일을 주께서 마감시킬 겁니다. 그것이 빌립보서 1장 6절에 나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착한 일인데 이 착한 일이 내가 기억하고 염두에 둔 착한 일이 아니에요. 나는 차를 태워주기를 바라지만 주님은 차 안 태워줍니다. 그냥 가는 방향만 이야기해줘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조차도, 나를 놔두고 주님 혼자서 내빼시는 주님, 그 주님을 우리는 믿어야 해요. 그것도 감사함으로. ‘나를 놔두고 그냥 혼자 가신 주님께 너무 감사해’라는 식이 되어야 해요. 성경에 보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 보기에는 너무 섭섭하죠. 내 소원대로 안 되니까. 그러니까 항상 우리를 주님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내가 항상 네 뜻대로 안 해줄게”라는 그 이야기 하시려고 우리 곁을 안 떠나요. 약을 올려도 보통 올리시는 것이 아니죠. 그런데 히브리서 6장 20절에 보면 참 귀한 말씀 나옵니다.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여기서 “앞서가신”이라는 귀한 말씀이 나와요. “너는 차 타고 가고 싶었지? 그런데 걸어와라. 왜? 나도 걸어왔다”
그러니까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우리 생각에 있는 구원의 길이 엉터리예요. 우리는 차 타고 천국 가고 싶어요.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은 내 자존심이 상해서 안 됩니다. 우리는 차타고 가고 싶고 나 편한 것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천국을 가긴 하는 데 편하게 가자’ 그러나 내 뜻대로 안 되죠. 주님 가신 길은 좁은 길입니다. 좋게 말해서 좁은 길이고요, 실제로 이야기해서는 길이 없어요. 그런데 없는 것보다 더 없는 것이 뭐냐 하면 새로 생긴 거예요. 없으면 포기하겠는데, 없는 것을 포기를 못 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에요. 없음보다 더 낮은 것이 뭐냐 하면 새로 생긴 건데, 없음은 포기하면 되지만 새로 생긴 것은 안 가고 싶어요. 안 가고 싶은데 주께서는 앞서가셨고 그렇게 가게 하십니다. 왜 우리가 안 가고 싶으냐면 주님의 세계는 우리가 예상한 천국과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찾아간다면 못 찾아갑니다. 찾아가면 갈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돌아오라는 말씀이 얼마나 끈질긴지 옛날에 여러분이 그런 심부름을 부모에게 당한 적이 많이 있을 거예요. 형이 공부 안 하고 친구랑 놀러 다니고 화투 치고 술 마시러 다니고 할 때 엄마가 동생에게 “야, 형에게 빨리 집에 오라고 해라”라고 하면 아무 죄도 없는 동생은 형이 놀고 있는 판에 갑니다. 가서 경상도 말로 “희야(형아야), 엄마가 오란다”라고 하면 “저리 안 가!!”라고 형이 소리치죠. 그러나 “희야, 엄마가 빨리 오래” 대꾸하며 못 갑니다. 형이 엄마 시키는 대로 할 때까지 갈 수가 없어요. “희야, 엄마가 화나서 빨리 오래” “좀 있다가 간다고 해라” “안 돼. 형아, 빨리 가자. 희야 안 가면 나도 같이 안 간다” 우리는 천국 가고 싶어요. 하지만 이 땅에 재미있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이, 성령이 우리에게 ‘형아’라고 할 일은 없지만, “빨리 가자. 주께서 앞서가신 길을 가자”라고 계속 촉구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천국의 길,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때려 죽여도 안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우리 본모습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안 갑니다. 교회 집사 되었으면 장로 되고 가야 하고, 지금은 주님이랑 가기 싫어요. 딸 시집가는 거 보고 가고, 우리 딸이 손자 낳는 거 보고 가고, 인간이 이래요. 앞서간 분 따라서? 아니 내가 앞서가고 싶어요. 누가 내 앞에 앞서가는 것을 자아에 대한 모독으로 여깁니다. 내가 앞서가야 하고 주님보고 내 뒤를 따라오라고 합니다. 나를 응원하고 호응해주고 그러기를 바라요.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잖아요. 지가 앞서가니까 기도하는 거예요. 이건 엉망이 보통 엉망이 아니죠,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실망시킵니다. 그만큼 주님이 끈질겨요. 여기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오늘 본문 3장 11~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라고 하는데, 예레미야 3장 10절도 보면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나오고요, 신명기 24장 1~3절을 보시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이 말씀이 뭐냐 하면 자기 부인이 어디서 바람났거든 그 여자가 다시 “내가 잘못했어요. 받아주세요”라고 했을 때 절대로 받아주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왜 하나님께서 자꾸 돌아오라고 하느냐면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과 유다는 행음을 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이방 신을 섬겼기 때문에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게 예레미야 3장 8절에 나옵니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본인 스스로 지은 율법에 의하면 절대로 그들은 돌아와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자신이 정해놓은 율법을 스스로 위반까지 하시면서 돌아오지 않아야 할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시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지금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지금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니에요. 하나님께로 갈 것 같으면 이 이스라엘은 지옥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디로 인도하느냐면 메시아가 이 땅에 오는 그 만남의 자리까지 이스라엘을 데리고 가요. 메시아까지.
그러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뭘 알려주느냐 하면 메시아가 율법을 어떻게 완성 시키고 어떻게 처리했는가, 그게 메시아의 고유 권한이고 고유 업무예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더러운 것이 드러난 이상, 주께서는 받아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니까 먼저 앞서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는 자들을 주께서는 그냥 버리지 아니하시고 활용하시는 거예요. 어디까지 가느냐. 예수님, 메시아가 오시는 그 십자가 지점까지 주께서 이끄시는 거예요. 언약을 어기면 언약이 파기된다는 것이 구약 때 의식이었습니다. 언약이 위배 되면 이제는 너와 빠이빠이고 계약 다 깨졌고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위배한 이스라엘을 언약을 깨뜨렸다는 그 결과가 되는 그 지점까지, 끝까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데려갑니다.
데려가게 되면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율법 위반한 것에 대해서 그것을 대신 지고 처리해주는 분이 율법의 이름으로 따로 와 계신 분이 계세요. 그러니까 이게 십자가로 다가서는 이스라엘의 라인이라면 오늘날 우리도 그 선을 따라서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야 해요. ‘위반했다. 안 된다. 율법 못 지킨다. 저주받아 마땅하다’라고 계속 그렇게 가야 해요. 지금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내가 십자가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악한 생각인 것을 우리가 가는 십자가 말고, 친히 주께서 가신 성령이 친히 데려가는 십자가는 우리 생각과는 너무나 판이하고 다르거든요.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용서받아야지 하는 이 생각이 진짜 십자가와 너무나도 다른 거예요. ‘하필이면 납니까’가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은 왜 저를 잃어버리게 하십니까’를 십자가 앞에서 발견해야 해요.
나는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믿으라는 것 다 믿고 구원받고 싶은데 그 나를 잃어버리게 하시는 거예요. 너는 나만 믿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참 간단한데,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만 믿어. 구원 챙기지 말고”라는 말씀은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수능 문제입니다. 너는 나만 믿고 뒤에서 아무것도 챙기지 말아라. 내가 챙기려고 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 뜻대로 안 해주십니다.
마치 이런 사람과 같은데 식당에서 식당 앞에 차 세우고 맛있게 음식 먹고 이 쑤시면서 “맛있게 잘 먹었다”라고 하고 있는데 견인차가 어떤 차를 견인해가고 있는 거예요. 보면서 ‘누구인지 차 좀 똑바로 주차해야지. 저 인간 벌금 한 10만 원 나오겠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내 차네”라고 하는 경우요.교회 와서 누구는 신천지이고 이단이고 누구는 지옥 가고 이러고 있는데 ‘어~~내 차네’ 그리고 식당 주인에게 가서 내 차 어떻게 하냐고 하소연하니 주인이 ‘나만 믿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내 것을 잃을 판인데 ‘나만 믿으세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만약에 거기서 드라마를 더 쓴다면 ‘실은 그 차에 시한폭탄이 들어있어서 내가 알아서 치웠어요’라고 이런 것과 같아요.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시한폭탄 들어있는 것도 모르고 교회에서 이야기한 데로 고분고분하게 하고 천당 갈 생각한 거예요.
내 자체가 시한폭탄이고 내 자체가 나를 지옥으로 보내고 있는데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 믿는 것을 그저 율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믿어라’ 하면 ‘예, 믿겠습니다’처럼 자꾸 율법 지키는 식으로 자꾸 지키는데 그게 누구 좋으려고 합니까? 나 좋으려고 하죠.
바로 나 좋으려고 하는 그것을 잃어버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 십자가에서 나오는 성령이에요. 네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인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인 줄 알라는 거죠. 예레미야가 주의 천상회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바로 이스라엘의 뿌리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아니고 장차 오실 그분이 이스라엘 뿌리인데 너희들은 너희가 뿌리라고 생각해서 자꾸 너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스스로 율법을 위반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히 처리했죠. 완전처리하신 분이 대신 죽으심으로 새로운 자기 이스라엘에서 주님의 죽으심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그 공로를 성령을 통해 주심으로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데 그 인간이 뭐냐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는 것과 예수 믿고 얻을 수 있는 것의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차이점을 저희들이 모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이 했던, 여호와를 위해 열심히 했던, 여호와께 충성했던 사울이 결국은 하나님을 힘들게 했던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새롭게 알게 된 사울처럼 저희들도 십자가를 날마다 새롭게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