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측량
천사가 정말 참을성 있게 계속 측량, 측량, 또 측량하고 측량합니다. 꼭 기계 같아요. 로봇 같아요. 시키는 대로만 측량합니다. 새 성전은 누가 만들었는가. 구약 에스겔의 성전입니다. 새 성전은 누구인가. 이것은 신약에 나오는 성전 개념이에요. ‘새 성전은 누가 만들었는가’ 할 때 이것은 사물성입니다. 사물적인 요소에요. ‘새 성전은 누구인가’ 이것은 인격적 요소가 있습니다. 새 성전을 누가 사물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물에서 인격으로 전환되는 논리적 절차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사물 성전이 인물 성전으로 바뀐다면 새 성전을 만드신 어떤 인격적인 분이 있을 거예요. 인격적인 분이 사물 성전을 만드는 그 원칙을 역으로 되돌려보면 사물에서 인격이 되는 거예요.
인격적인 분이 사물 성전 되게 하는 여기에서 에스겔 9장 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아까도 강의시간에 봤는데요.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그동안 솔로몬 성전을 유지해왔었는데 이제 솔로몬 성전과 작별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작별할 때 성전을 그냥 불로 태우는 것이 아니고 태울만한 이유를 성전 안에 가득 집어넣습니다. 가득 집어넣게 되면 성전이 우상숭배의 장이 되었거든요.
그럼 성전의 고유한 특징을 설명하는 길은 성전에서 우상숭배하는 모든 것들을 시체로 만들면 돼요. 시체로 만들면 인간은 죽되 하나님의 거룩은 살아있게 되고 거룩이 살아있으면 성전 본래의 취지는 여전하죠. 율법이 율법답게 되는 것은 율법으로 살리는 것도 율법이 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저주함으로써 율법의 율법 된 가치가 보존되는 겁니다.
성전의 취지가 거룩한 취지로써 성전을 불태워버리면 여기서 성전을 불태웠던 쪽, 인격적인 분,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알고 있던 성전과 지상의 인간들이 알고 있던 성전과는 여기서 차이가 났으며 그래서 솔로몬 성전을 보고 성전이라고 했던 그 인간들을 시체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성전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이동해버려요. 성전이 이동하면서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솔로몬 성전 자체가 물체이지 않습니까. 건축물이죠. 건축 구조물이 맞죠. 이 땅에 있었던 건축 구조물을 그대로 반영해버립니다. 기능적 활동을 하는 천사가 그대로 반영해버려요. 반영해버리고 기존의 인간들이 이건 성전 맞다고 우겼던 것을 불태움으로써 그걸 반영했던 심판했던 천사 내부에서 새로운 진짜 성전의 가치가 보존되게 되는 겁니다. 거룩의 가치가 보존되는 거예요.
성전이 있어야 하나님의 다윗 언약이 유지되거든요. 내가 너와 성전에 함께 있으리라 약속했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의 가치를 보존하면서 잃어버린 성전을 다시 세울 때, 성전이라는 사물적 형상은 날라가버리고,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원형 형상에 의한 사물을 거기 파괴된 성전 현장에 새로 세우는 겁니다. 새로 세우게 되면 그 성전이 새 성전이 되는 거예요.
문제는 새 성전이 하나님 쪽에서 인간의 이미지를 복사해서 심판했다는 그러한 활동으로 내뱉어버린 새 성전이기 때문에, 새 성전의 사물성은 지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성전이 되는 거예요. 이 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눈으로 봤던 성전은 이미 죄로 말미암아 불타버렸기 때문에. 불타버리고 그걸 대체하는 새로운 사물적인 성전은 하나님 쪽에서 천사를 통해서 측량하듯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통보하면서 천사를 보내서 나타낼 때 그 성전은 백날 측량해봐야 그 성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허깨비 같아요.
없는데 마치 꼭 이 세상에 건축구조물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그걸 강조하면서 천사를 보내가지고,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요, 치수를 다 대요. 담벼락은 길이가 얼마? 3.12m, 적어, 적어. 옆에 천사 적어.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 지금 허공에다 뭐 하십니까? 허공에다가. 아무것도 없는데 뭘 측량해요?” 하는데 “네 눈에는 안 보이지? 내 눈에는 보인다.” “뭐가요?” “내 눈에는 성전이 보이는데.” “이상하네. 왜 우리 눈에는 안 보이죠?” “네 눈에 보이는 성전은 벌써 물 건너갔잖아.” “왜 우리 눈에 보이는 형상은 아닙니까?” 물으면 “네가 생각하는 네 존재에서 나오는 형상개념은 환상이기 때문에.” 그건 죄로 말미암아 무산됐기 때문에 네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은 이미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형상이에요.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형상이 드디어 나타났어요. 신약 때에. 구약에서는 ‘누가 만들었는가’ 사물성을 이야기하는데, 신약에서의 새 성전은 ‘누구인가’로 이야기해요, 누구인가. 그러면 구약에 나타난 새 성전을 측량하는 천사는 신약에서 측량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람을 보고 숫자로 헤아리면서 새 성전이라는 사물적 건축구조물을 측량했던 그 측량과 동일하게 사람을 측량하는 방법으로 새 성전이 여기에 완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옵니다. 봐야 되겠죠. 21장 17절, 22절, 24절. 요한계시록 21장 17절,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And he measured the wall thereof, an hundred and forty and four cubits, according to the measure of a man, that is, of the angel. 사람의 척량이 곧 천사의 척량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 22절,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드디어 사물적인 성전은 없습니다. 24절에 보면,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여기서 영광이라는 말이 나오죠. 26절에,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영광이 또 여기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고 요한계시록 21장 15절에도 마찬가지에요.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리고 14절에는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사도가 졸지에 새 성전 되고 말았어요, 열두 사도가. 새 성전의 기초가 되고 말았어요. 이것은 사물을 측량하는 게 아니고 사람을 측량하는 거예요. 에스겔의 사물성으로 알려졌던 그 측량을 같은 천사가 하나님의 성도도 측량해버려요.
그 천사가 어떤 천사냐 하면 에스겔 9장 2절에 나오는 천사입니다. 에스겔 9장 2절에 보면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좇아오는데” 6명의 천사입니다. “각 사람의 손에 살육하는 기계를 잡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기계, 천사자체가 기계에요. 인공지능 같아요. 로봇 같아요. 아무 감각도 없습니다. 죽이라면 죽이고 살리라면 살리고. 꼭 CCTV같이 그 자체에 어떤 감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기 때문에. 선과 악이라는 그 자체에서 선악을 넘어버렸어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선이고 거기에 대들면 악이 되는 거예요. 자체적으로 선악을 판정 안 한다 이 말입니다. 그건 천사가 편하죠. 우리는 괜히 알아가지고 혼자 스트레스 받고 평생을 고민하고 있는데 천사한테는 그런 게 없어요. 무정한 존재에요, 아주 무정한 존재. 인정도 사정도 없는 존재. 천사가 “그래서 뭐?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그래, 인정사정 알아가지고 꼴좋다.” 인정사정 알아서 사울 왕이 그렇게 망했잖아요, 인정사정 본다고.
“각 사람의 손에 살육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모시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여섯 모두 살육하는 기계를 잡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살육하는 기계 말고 먹 그릇을 찼어요. 4절부터 보면 그 먹을 가지고 이마에다가 표시를 합니다. 이마에 표시하고 표시 안 된 나머지는 다 죽여요. 살육합니다. 이마에 표시를 하는데, 죽일 때 어떻게 죽이는가. 6절에 보면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그러면 이마에 표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나와요. 22장 4절에 보면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되어 있어요. 주의 이름이 이마에 있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에스겔 천사한테 표시를 받았던 이마에 표 있는 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성은 영광성대로 챙겨야 되거든요. 죽이는 것도 영광이지만 죽여야 마땅한 자를 살리는 그것이 더 큰, 완성된 성전의 취지를 살려주는 더 영광스러움이에요.
예수님이 만약에 이 땅에 오지 아니하면 거룩하지 않은 자를 다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왔다면 예수님이 오신 만큼의 더 월등한 영광성은 예수님과 더불어서 새롭게 발생되어야 되거든요. 그 발생된 영광성이 오늘날 성도의 몫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더 추가된 영광으로 가득 찬 그 몸이 성도의 몸이에요.
사람은 배제된 상태에요. 모든 인간은 배제되고 이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여할 수 없어요. 사람은 그냥 하나의 대상으로 다루어질 뿐인데 사람은 없지만 에스겔에 인자(人子)는 있잖아요. 제가 얼마 전에 강의했죠. ★이스라엘이 인자로 응축돼요. 인자로 응축되면서 인자가 죽죠. ★인자의 아내가 죽어버립니다. 죽고 ★인자가 바통 터치를 하죠. 새로운 왕, 다윗이라고 되어 있는데 다윗에게 바통 터치를 해버려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다윗 언약을 완성하면서 오는 그 영광을 새 성전 안에 가득 채우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보다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이참에 구약 성경의 중요 흐름을 같이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출애굽기 19장은 시내산 이야기인데 12절에 보면,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찌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왜 시내산에 오르지 말라고 하느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올라오면 죽습니다.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이 세상에 이스라엘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가는 도중에 2천 미터가 넘는 시내산이 있었고 시내산 앞을 지나가는데 하나님께서 이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겠다는 거예요. 이 꼭대기에 강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 인도자인 지팡이 든 모세한테 이 시내산 꼭대기에서 만나자는 거예요. 밑에서 만나지 말고 꼭대기에서 만나자는 거예요. 꼭대기에서 40일 간 만날 동안에 어떤 누구도 여기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성이 땅에 내려와서 이 시내산 꼭대기까지의 이 공간이 영광 구역이에요, 영광 구역. 영광적인 zone이 돼요. 거룩한 zone. 거기 가면 무조건 죽는다. 이 영광의 zone이 거룩한 zone이 돼요. 거룩한 구역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요.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지 오기는 왜 오셨는가, 귀찮게. 뭐 볼 거 있다고, 왜 오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하면서 출애굽 때 유월절날 어린 양을 대신 잡았잖아요. 공짜 점심은 없거든요. 그 어린 양이 왜 죽었습니까? 죽었던 이유의 의미와 가치를 주님께서는 그냥 허비하지 않습니다. 그걸 살려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시가 이거였거든요. “내 어린 양을 잡고 문설주에 피를 발라라.”라고 모세한테 지시를 했단 말이죠. 그러면 그 지시가 도중에 소실되거나 소멸되고 허비되거나 날라가지 않고 주님의 지시를 중심으로 새롭게 새로운 영역이 확대되는 거예요, 확대. 조그만 풍선이었는데 주님께서는 확 그걸 불어버립니다. 율법으로 불어버리면 어린 양의 취지가 그 안에서 확 살아나면서 어린 양의 취지인 거룩이라는 새로운 기조가 발생되죠. 원칙이 생겨납니다, 어린 양의 피.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장부터 벌써 시작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움직임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취지를 짊어지고 그것을 이동하는 중이다 이 말입니다. 마치 거북이처럼. 거북 등짝에 뭐가 얹어졌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는 새로운 하나님의 영광의 zone, 새로운 이름의 거룩을 그 안에 짊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하늘나라가 거룩이에요. 지상은 무조건 저주에요, 창세기 3장에 의해서. 그런데 이 거룩이 너무 근접했습니다. 가까이 왔습니다. 오라 했습니까? 오라 하지 않았죠. 그런데 가까이 온 거예요. 왜 가까이 오셨습니까? 그 거룩한 분이 그냥 조용하게 계시지, 왜 갑자기 가까이 오는 거예요? 시골에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농사짓고 잘 사시면 되는데 서울에 아파트 바로 옆 동에 이사를 왜 오느냐 이 말이죠. 부담되게. 또 김치해주실려구요? 먹지도 않는데. “야야, 너 문 앞에 김치 해놨다.” 그 다음부터는 김치 먹어야 될 숙제를 듬뿍 받아가지고…… “우리는 마트에서 사 먹어요.” “앞으로 내 거 먹어라.” 새로운 지시가 주어지는 거예요. “왜요?” “그 김치 속에는 나의 희생이 들어있거든.”
누가 희생하래, 누가 희생하래? 미치겠어, 정말. 우리는 그냥 제발 우리 인간들끼리 살게 해주세요! 하나님 여기서 개입하지 마시고. 이게 오늘날 모든 불신자들의 소원이에요. 하늘에 그냥 조용하게 계시고 힘들지만 우리는 그냥 살다 죽을래. 죽고 난 뒤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난 모르겠고, 살 동안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제발 좀 우리를 가만 놔두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그냥 하늘에 계시고 이 땅에서 우리끼리 산다, 이렇게 할 때 인간은 놓친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그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느니라. 인간은 이렇게 되기를 원했던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창조한다, 우리는 그걸 믿씁니다! 하고 기뻐요. 막 성질 급해가지고.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누구? 갑자기 하나님 곁에 다른 분이 또 왜 계시는데? 그분이 이 땅에 오셨느니라. 왜 오셨는데? 왜, 왜? 왜 오셨는데, 왜? 그냥 계시지. 이 세상은요, 주 예수님 중심이에요.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에요. 나사렛 청년 그분 중심이라고요, 세상 모든 것이. 그분이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0절에 나왔잖아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어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또는 어린아이들에게 “너희 교회 나와서 예수 믿어라.” 하면 “왜 믿어야 돼, 왜? 나 지금 숙제해야 되고 바쁜데 왜 믿어야 돼?” 이렇게 하면 “너는 이미 그리스도의 혜택을 입었고 그분이 주시는 햇빛과 공기와 혜택과 목숨과 밤에 잘 때도 작동하는 자율신경, 의식하지 않더라도 심장을 뛰게 하는 자율 감각계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연장책으로 너에게 준 거야. 네 속에 심장 호흡기를 네 허락도 없이 이미 박아 넣어버렸어. 쿵탁 쿵탁 쿵탁, 이게 네 귀에는 네 심장소리로 들리냐?” 주님께서 심장박동 시키는 소리에요, 그게. 인공 호흡하는 소리와 같다 이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네가 뭔가 반응을 나타내고 보답을 해야 될 게 아니냐 이 말이죠. 주의 은혜로 햇빛과 공기를 줬으면, 심지어 선인과 악인에게도 관계없이. 지금 여기에 태풍 올라와서 비 오는데 비구름이 “보자, (지나가다가) 저 나쁜 사람. 이건 비켜가자.” 이런 건 없어요. 똑같이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이유는 그 은혜의 값을 받아내기 위해서 그래요.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 벌써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그 값을 받아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원수이지만 햇빛 줬잖아. 김 정은 아랫배도 크게 했다니까요, 주께서. 북한의 김 정은한테도.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상이 될 수밖에 없는 건, 그냥 하나님 하늘에 계시고 여기에 우리밖에 없는데 그 사이에 천지창조를 할 때 원형, 누구를 베껴서 창조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형상을 베껴서 인간을 만들었거든요. 이게 원형 형상이에요.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골 1:15). 그럼 우리는 가짜라는 뜻이죠. 진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이십니다. 형상이 인격화가 돼서 등장하는 거예요. 형상이 인격화되어 등장하면서 그 과정에서 가짜 형상을 한 인간이 어떤 사물, 성전이라는 것, 성막이라는 것, 돌판이라는 것, 눈에 보이는 사물성, 물체성 그것을 보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알 길이 없어서 인간이 알고 있는 그 한계를 경유하면서 나타나는 거예요.
인격 되시는 분이 사물을 인용했고 나중에 사물이 심판받아 깨지니까, 비로소 그 배후에 있던 인격성이 그대로 노출되니까 기존에 형상을 가지고 ‘이건 나입니다.’ 라고 우기는 인간 눈에는 안 보이고, 내가 그 형상에 대해서 죽고 난 뒤에는 비로소 이건 중간에 사물 대 성전구조물이라는 나의 관계가 아니라 이것은 주님 자신의 성전 자체 안에 자체적인 확장으로 우리가 그 안에 이미 들어와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배당은 뭐에요? 예배당은 건축구조물이죠. 그럼 예배당이 성전이냐? 당연히 아니죠. 옛날에 예배당 지어놓고 이걸 성전으로 여겨서 구약대로 한다고 여전도사는 강단에 올라오지도 못했어요. 청소할 때도 남자 관리집사가 올라오지, 여자집사는 강단에 못 올라온다고요. 부정 탄다고. 심지어 어떤 분은 성경대로 한다고 자기 죽고 난 뒤에 화장시키지 말라고 해요. 재림할 때 무덤을 열고 나오는데 화장해버리면 흩어진 연기 어디서 다 찾아요? 천사 힘들겠어요. 연기 낚아채느라 휙, 휙. 그 사람에게서 다 흩어진 열에너지 있잖아요. 확산된 열에너지를 다 뽑아내려고 하면 천사가 씩씩거릴 거예요. 그 요소 요소를 다시 조립하려하면 힘들잖아요. 천사들 불편하게 하지 말고 그냥 화장해라. 누가 불편합니까? 후손들이 불편해요. 그 핑계로 싸워가지고 누가 벌초하느냐 하는 것 때문에 싸움하고 며느리 싸움해서 나중에 이혼하고. 아이고, 좋다. 선조들 잘 만나가지고. 이게 후손들 돈 문제인 걸 모르고…… 그게 시간문제입니까, 돈 문제이지.
영광을 시내산에서 딱 멈춥니다. 멈추고 조건을 걸어요. 이 시내산에서 “모세야, 내가 내려간다.” 할 때 조건이 있어요. “거룩함을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 내가 그 영광과 함께 있을게.” 라는 조건을 걸고, 시내산에서 거룩한 조건을 걸고 돌판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돌판 안에 지시와 명령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걸 율법이라고 하는데 그 외에 율법들이 많이 있죠. 나머지는 40일 동안 모세가 다 외워서 나가야 돼요. 모세 아이큐가 얼만데 그걸 다 외웁니까? 하는데 모세가 사실상 여기서 할 일이 뭐가 있어요, 이것만 외우지. 손 흥민 축구를 볼 겁니까, 아니면 뭐할 거예요? 너무나 쇼킹한 체험인데 잊을 리가 없죠. 그대로 다 기억해서 내려옵니다. 내려오는데 조건이 있어요. 이게 어려운데,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너무 접근, 접촉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저주받습니다. 하늘나라는 못 가는 거예요. 속된 인간, 이미 범죄 한 인간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에덴동산에 다시 못 들어가는 것처럼 갈 수 없습니다. 갈 수 없는데, ‘네가 율법대로 살아서 거룩하면 내가 넣어줄게.’ 이게 조건인 겁니다. 거룩하면 넣어줄게. 거룩하면 넣어준다는 것은 인간을 살리려는 의도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기어이 고집한다는 뜻이에요. 고집하고 이 일관성 있는 일에 대해서 내가 추호도 양보할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하나님의 천명이에요. 이 율법을 줄 테니까 율법대로 내가 원하는 레벨만큼 완벽하게 거룩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다 죽는다. 그러면 우리는 괜히 율법 받고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울한 것 없죠. 율법 줘도 죽고 안 받아도 죽는데,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이미 죽을 자가 율법 받은 것을 복으로 여겨라, 인간아! 이거에요. 어차피 늙어죽잖아요. 늙어죽는데 율법 줘가지고 이렇게 살 길도 있네, 이게 얼마나 큰 혜택이냐 이 말입니다. 조건이 있어요, 거룩해야 된다.
율법 와서 가르치기 이전에 사달 났어요. 이미 인간은 자기의 내부성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모세가 40일 올라가 있었잖아요. 이건 죽은 자에요. 올라갈 때 한 60일분 넉넉한 비상식량 들고 갔습니까? 건빵이라든지 컵라면 들고 갔습니까? 없어요. 아무리 들고 가도 물 한 컵 정도 가지고 올라갔으니까 이건 분명히 내려올 시간이 되었는데…… 한 3시간 뒤면 내려올 줄 알았어요, 물 한 컵 가지고. 이건 뭐 벌써 4시간도 아니고 40일 동안…… 짐승에 물렸거나 죽었다. 아, 사람 저래 가네. 저렇게 가는 수도 있구나. 자, 그다음 후보. 차기 지도자 뽑자. 아론 뽑혔습니다. 족벌체제니까 모세 형 당신이 해라. 아론 당신은 어떻게 할래? 율법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여호와를 섬기는 방식을 산 밑에서 그대로 다 보여준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를 건지신 여호와는 자비롭다. 따라서 여호와의 자비로움을 그대로 형상화하는 거예요. 인간이 형상화한다는 것은 자기 형상에 자신감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소의 형상에다가 새기면 우리 형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준해줄 것이다, 허가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 쪽에서 갖고 있는 겁니다.
형상화할 때 하나님은 사물화 되죠. 나를 위해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십계명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듣도 보지도 못했죠. 내려오다가 사달 났으니까. 돌판 오다가 다 부숴버렸어요.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른다니까요. USB가 부서졌는데 어떻게 범인을 잡아요. USB가 없는데 어떻게 전달이 됩니까. USB에서 지시가 와야 되는데 도중에 성질나서 USB를 박살내고 없잖아요. 주의 지시가 뭔지를 모른다고요. 주의 지시가 뭔지를 모르는 것으로 인하여 거기서 우상 섬겼거든요. 송아지 형상은 곧 신의 형상이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보좌에서 소의 형상이에요. 인간들은 짐승의 형상을 곧 신의 형상으로 그것을 우상화시킬 수밖에 없는 하나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소의 형상이 에스겔 10장의 보좌 형상이고 소의 형상을 노골적으로 뭐로 바꾸느냐 하면 스랍(그룹), 천사의 형상으로 바꿔버리고 소의 형상은 날라가버려요. 본격적으로 천사가 조지는 심판을 맛 좀 봐라. 이스라엘에게서의 우상은 소입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열왕기상 12장에 북쪽 나라 여로보암이 남쪽에 성전이 있다고 사람들이 우르르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차단시키기 위해 유사한 성전을 아래쪽 벧엘과 위쪽 단에 만들었는데 그 형상이 소 형상이었습니다. 송아지 형상이었어요, 소 형상. 그럼 소 말고 뭐 바퀴벌레로 해도 되는데 왜 소냐? 만든 사람에게 물어보죠. “아론아, 바퀴벌레로 하지, 왜 소냐?”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바퀴벌레보다는 소가 더 어질고 멋있잖아요. 인간의 형상 중에서 괜찮은 형상을 찾아볼 때 소가 어진 하나님의 품성을 그대로 다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다른 형상을 만들지 마라는 이 말은 부처 안 믿고 제사 안 드리고 예수 믿는다고 그게 우상숭배가 안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갖고 있던 자기의 속내로, 자기가 뭔가 보고 싶고 하나님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형상화되지 아니하면 인간은 이게 믿음직하지가 못한 거예요. 인간이 외모에 약하거든요. 이새가 자기 아들을 쭉 세워놓고 사무엘이 가서 뽑을 때 제일 맏이가 제일 잘 생겼어요. 딱 찍으려고 하니까, 스톱! 사무엘아, 사람의 외모를 보지 마라. 잘 생겨서 손해 본 거예요. 역차별인가? 역차별이에요. 별로 여러분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고요. 아, 잘 생겨서 너무 손해 봤어, 이런 거요. 그럼 누구를 선택하느냐? 사무엘아, 네가 선택하지 마라. 왜? 사무엘은 인간으로서의 어떤 형상을 보고 자기의 선택성이 그 왕을 고르는데 개입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따라서 없는 자를 선택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일부러 그 시간에 다윗이 들에 양 치고 있었던 거예요. 없는 자를 데려옴으로써 이 선택이 사무엘 본인의 선택이 아님을 보여주는 그런 상황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 거룩함은 현재 있는 자의 율법 지킴을 거부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 없는 자에게 거룩이 전달되게 하는 하나님의 일관된 조치가 율법으로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땅속을 파듯이 파고 들어가는데, 있는 자는 없고 없는 자를 어디서 찾는가? 있는 자를 죽여버리면 되죠. 그 있는 자를 죽여버리는 데에 참여한 지파가 레위지파에요. 그래서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되어 있어요.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일치된 마음으로 죽여버렸다는 거예요. 일치된 마음. 이거 중요합니다, 일치된 마음. 이 일치된 마음이 에스겔 11장 19절과 에스겔 31장 14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무슨 말씀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 신을 너희의 마음에 심지로 심어버린 거예요. 심지로 딱 꽂아버린 거예요, 마치 위치추적기처럼. 하나님과 연결이 가능한 그런 연결 케이블을 딱 꽂아버린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 마음속에 뭐가 우세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마음이 그 사람 속에까지 파고들어오거든요. 파고들어오면 하나님이 계획한 새 성전을 측량하죠. 측량했던 그 대상이, 케이블 심어놓은 대상이 주님의 측량작업의 연장으로서 너도 하나님의 새로운 예루살렘이라고 지정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천사가 측량하다 보니까 사람측량이 되어버린 거예요. 사람측량.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잘 들으세요, “네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구원이 되었단다.” 이거에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구원 못 받는 존재이어야 마땅한 네가 하나님의 새 언약에 의해서, 성령이죠, 성령을 심어버리니까 그 들어온 케이블 때문에 위치추적기 때문에 너도 새 성전의 구체화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게 된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 된 사람입니다.
천사는 기계처럼 또 측량하고 있어요. 건물 측량하다가 이제는 사람을 측량하는 겁니다. 그 측량된 구조는 너, 나가 없어요. 이게 성전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측량한 전체 건축구조물이 단일 건물이라는 거예요, 단일 건물. 측량할 때 숫자가 144,000이 되든 12가 되든 얼마가 되든 간에 그것은 1로 쳐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일자(一子)가 되는 거예요. 없었던 일자가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천사의 작업을 통해서 일자 형상의 확산, 확대로서 그 하나님의 예루살렘은 여러 명이라도 단일 신부가 되는 겁니다. 색시가 되는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데 1절에 보게 되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기 신부가 몇 명입니까? 단일, 한 명이에요, 한 명. 그래서 어떤 신앙서적에 그림을 그려놨는데 면사포 쓴 신부를 크게 한 명 그려놓고 자세히 보니까 그 신부그림 하나에 사람이 좁쌀처럼 가득 들어있어요. 약간 징그러워요. 점묘법이라고 서양 미술사에 보면 점을 하나하나 찍어서 전체 형상을 만드는 게 있어요. 인간들이 하나의 점이 되면서 전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색시가 되는, 신부가 되는 모습, 이것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인간은 인간이 모여서 하나의 인간이 될 수 없는데, 건축구조물로 계산하게 되면 이게 돼요. 하나라고 치고 전체에서 너는 어떤 분량의 위치를 차지하는가, 측량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문지기 위치, 어떤 사람은 성소 위치, 성막 위치, 어떤 사람은 담벼락 위치.
그게 고린도전서(12장)에 보면 어떤 사람은 눈이요, 어떤 사람은 코요 입이라도 다 그리스도 안에서 귀하고 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발인데 뭐 좀 존대 받는 눈을 보고 할 일이 많으니까 “하나님, 저 눈이 탐나는데 제가 눈이 되게 해주시고 더러워서 발은 안 되겠어요. 무좀도 나고......” 이런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눈 되니까 너무 할 일이 많아서 “한적한 직위를 받아 발 되가지고 무좀이 나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그거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꾸 그렇게 탐내지 마세요. 그 하나하나가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건 우리가 함부로 바꿀 수가 없어요. 전부다 하나의 은사라는 기능으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그래서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특히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라 하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머리가 하나라는 것. 머리에서 몸체가 확장되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확장된다. 점점 더 구체화된다. 점점 더 구체화되는 거예요. 이 구체화되는 배경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시체가 되어야 될, 그 거룩이 작렬하고 있는 공간인 것을 이들은 알죠. 이들은 압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될까, 이렇게 질문하는데 이것은 주일 설교에서 제가 다 설명을 했어요. 다시 설명하게 되면 로마서 8장 3절(“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 그 뜻이 뭐냐 하면 육신으로써 하나님의 거룩을 감당할 재주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 없음을 명확히 하시면서 오신 거예요. 네 육신 말고 내 육신으로 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 보면 그 영광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거룩이 있는 곳에는 영광이 오게 되어있어요. 거룩이 사라지면 영광도 떠나버려요. 아까 시내산의 영광 있죠. 시내산의 영광이 나중에 출애굽에 보면 성막에 영광이 와요. 이 성막의 영광이 또 어디로 가느냐.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처럼 가득 찼다 했어요.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이 만족스러우면, 만족된 조건에 맞춰지면 늘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게 되면 13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이렇게 빛나는 모습으로 영광스럽게 오잖아요. 오는데 거기 18절에 보면 중요한 말씀 나와요. 17절에서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 때 예수님이 자기소개를 해요.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거 얼른 보면 예수님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아닙니다. 18절에 보면 “나는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죽었던 적이 있는 분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시작이요 끝이요 알파요 오메가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도마가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의 창 자국을 만지고 하는 말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하나님.
인간을 배제시키고 인간을 탈락시키고 홀로 일을 이루신 그 하나님.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를 의도적으로 탈락시켜서 그 결과를 적용시키는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죽었다는 겁니다. 죽으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죽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죽지 아니하면 그 죽었다는 십자가 상표, 죽은 흔적을 갖고 있지 아니하면 그분은 하나님 아니에요. 나머지 하나님은 전부다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자기소개를 존중해야지, 우리가 먼저 설정한 하나님 구조에 끼워 맞추려고 억지 부리지마세요. 그 죽으신 하나님이 죽었었다는 것을 나타내야 될 이유가 사실은 우리가 거룩의 수준에 미치지 못해서 이미 우리가 죽은 자였는데 그 죽은 자에게 케이블로 자기 유월절 양의 공로를 거기다가 삽입을 한 거예요, 이 안에다가. 피부에다가. 삽입을 해서 우리가 어디 가든지 위치추적이 다 되게 되어있어요.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할 일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이동하고 있는 moving temple, 움직이는 성전이에요. 우리가 만약 운다면 crying chapel,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에요. 그런 노래 있어요. 번역하면 성당에서 울기. 우리가 울든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이것이 성전의 성전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감정이 있는 우리로 하여금 온갖 사태를 만나게 해줍니다.
주님이 거룩하지 않은 속된 세상인 이 땅에 의도적으로 온 것처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거룩과 거리가 먼 이 세상에 우리를 거룩한 성전으로서 주님처럼 이 땅에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도록 만든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환경을 그런 환경으로 조성해주는 겁니다. 거룩은 이렇게 세속 속에 들어온 거룩이 되는 거예요. 접근해온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거룩치 못해서 시체 되어야 되는데 주로 인하여 감사하리로다. 찬양하리로다. 주와 함께 동행하는 주님의 색시, 신부이기 때문에 신랑이 우리의 미래와 운명을 보장해주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합니까? 내가 예상한 것, 내가 가능한 것,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속속들이 파내서 다 부정해버려요. 내가 예상한 것, 할 수 있는 것, 나의 계획, 가능한 것을 다 부정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뭐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이고 주께선 맡겨놓고 자기는 떠나면서 이 일에 대해서 우리는 “당신을 모르는 척 할 겁니다.” 톰 크루즈가 초반부터 나와서 녹음테이프 사라지는 것 있죠. 인상은 별로 톰 크루즈 아닌데 하여튼 톰 크루즈. 미션 임파서블.
그러니까 예수님이 당했던 수모 있잖아요. 너 그건 너무 엉뚱하다. 그 엉뚱하다는 소리를 이제는 우리가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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