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된 마음
에스겔 11장 19절 한번 찾아봅시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백성은 율법을 받아서 수행해야 될 의무를 가진 백성이에요. 율법을 받아서 그걸 그대로 수행해야 될 사람들. 이럴 때 새 신(神)을 주는 거죠. 이스라엘이 뭐 중간에 하나 건너뛰고, 인자 건너뛰고 이스라엘로 하나님이 만족스러운 거룩한 이스라엘 될 때에 인자 건너뛰고 바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인자 자리에 ‘새 신을 넣어서’라는 것을 집어넣습니다. 에스겔 11장 19절이라 했죠.그런데 이 새 신, 새 영이 어디서 오는가? 바로 인자가 올 때 새 영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장에 나와요. “보아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갈 때에, 이 ‘세상’이 세상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 있는 자기 백성이에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음부의 권세’, 요한계시록 1장 18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인간은 갇혀있다는 겁니다. 사망과 음부에 갇혀있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갇혀있게 했는가? 그것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이 모든 인간들을 사망 속에 가두어둔 겁니다. 사망 속에 가두어뒀는데 이 사망 속에 가두어둔 자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는 것을 시범조로 보여준 나라가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분명히 사망해야 되고 저주받아야 되는데 이상하게 적들을 이기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진입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서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이름과 계속 동행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주님이 구약에 머물러 있지 않고 구약은 모형이니까 언제까지 모형으로 머물지 않고 실체로 드러나는 시기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활동을 계속 하시거든요. 활동을 하시면서 떨어낼 것은 떨어내야 되죠. 이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과 참된 이스라엘 사이에서, 참된 이스라엘을 위해서 모형 이스라엘은 떨어내는 거예요, 먼지 떨듯이 떨어내야 됩니다. 깁스할 때 석고했잖아요. 이게 나았을 때는 깁스를 계속 하면 안돼요. 모형은 떨어내줘야 옛 것은 사라져줘야 진짜 새롭게 치료된 완전한 팔다리가 나온다 이 말입니다. 앞서 있던 것은 보호하기 위한 것이니까 떨어져 나간 거예요. 떨어져 나가면서 새로운 이스라엘 되는데 그 작용을 인자되신 분이 하면서 여기는 새 신을 주는 게 아니에요. 모형적 세계에서는 새 신을 줘요.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세례로 주는 겁니다. 성령을 세례로 주는데 성령세례의 특징이 뭐냐? 세례의 특징은 뭐냐 하면 둘 이상을 연합하는 기능이 세례에요, 세례. 연합되는 기능. 둘 이상이 하나가 되는 기능.
그래서 이 세례라는 말을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올 때 그들은 홍해바다에서 한꺼번에 단체로 세례 받은 거예요, 단체로. 세례 받았다는 말은 다수가 일자가 된 겁니다. 비로소 다수가 일자, 하나로 되는 거예요. token이 type이 되는 거예요. 개별이 유형이 되는 거예요, 유형이. 새로운 유형이 되어버렸단 말이죠. 한꺼번에 동일한 상황에서 그들 개인은 같이 동행하시는 그 구심점에 의해서 재정렬, 재배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은사라 하죠, 은사. 재배치가 되는 거예요.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여기서 신을 주는 게 아니고 성령을 받는데 성령을 주는 것을 가지고 새 언약이라 하고 그것을 미리 보여주는 에스겔에서는 “새로운 언약을 주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스겔 37장 14절,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했다, 이것은 그냥 하나님의 신을 주신다, 하나님의 영을 주신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준 약속이 있잖아요. 방금 에스겔 11장 19절과 37장 14절 이 말씀을 이스라엘이 받는 것이 아니고 대표가 되는 인자가 받아버려요. 인자가 받아서 인자되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요한복음 1장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는 세례 받을 때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이 고백하기를 저분은 자기가 받았던 세례를 남들에게도 주게 함으로써 결국 아버지와 아들이 연합되어 있던 이 세례방식에 누굴 넣습니까? 자기 백성도 하나로 넣어요. 그러면 하나님과 아들과 백성이 강강술래처럼 하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일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죠. 내가 처소를 마련하러 가오니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안에 내 처소가 마련되게 된다. 하나가 되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 “그러면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내가 어떻게 확인됩니까?” 이건 뭐 필연적으로 나오죠. 그것은 바로 이전 시간에 시간이 급해서 빨리 넘어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예상한 것 그리고 이건 내가 했다, 나에게 의미 있는 행동을 했다, 이것을 아주 작살내고 그걸 정죄하고 고발하는 기능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야 돼요, 내부에서. 예수님만이 일자가 되어야지, 우리가 여기 끼어들었다고 우리도 같이 일자로 쳐달라고 하면 안 되거든요. 여기는 주 예수님의 세계이기 때문에 주님만 증거하는 세계에요. 아버지도 아들만 증거해요. 놀랍지 않습니까. 성령도 아들만 증거해요. 성령께서 자기를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에이, 아들도 했지만 나 성령도 무시하지 마.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께서 하는 일은 아들이 하시는 것만 나타내게 하셨다. 이것은 뭐냐 하면 더는 연합할 분, 세례할 분을 주께서는 더 이상 남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성령의 특징은 반드시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다’ 이것이 성령의 특징이지, ‘성령께서 하셨다’가 성령의 특징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셨다’가 성령의 특징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셨다’가 하나님 아버지도 원하는 바이고 성령도 원하는 바에요. 성령은 그리스도만 증거하는데 인간들은 삼위일체 증거하고 있다고요. 여기서 성신 또는 성령의 특징은 일치된 마음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죠, 일치된 마음. 일치된 마음은 주께서 세상을 심판하신 그 마음에 동의합니다, 하는 거예요. 주께서 율법 못 지킨 자를 저주하시고 지옥 보내는 것에 대해서 이건 뭐 군말 없이 “잘 하셨습니다.” 동의하는 것이 일치된 마음이에요. 죽어 마땅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 마땅합니다. 이게 일치된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일치된 마음을 가졌죠. 그럼 다시 어려운 것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창을 내겠소, 하늘을 일자로 뚫어버릴 때 뭡니까? 안식일이죠, 안식일. 안식일은 제사하는 날이에요.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일이, 제사장이 제사하는 날이에요. 이것이 에스겔 44장에 보면 바뀝니다. 제사장이 제사하는 날이 아니고 왕이 제사하는 날이에요. 매월 초와 안식일에 왕이 들어와서 제사하는 공간, 이게 바로 새 성전의 건축구조물이 되었을 때 왕이 들어오시는 거예요. 이 안식일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once and for all이라 했죠. 단 한번으로 전체를 다 커버하는 거예요. 창조를 향하여 모든 피조물이 안식일에 모여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범죄하고 난 뒤에 이것이 실패하죠. 실패하는데 인자, 사람이 아니고 사람의 아들은 돼요. 사람은 아니고 사람의 아들은 된다고요.
사람의 아들은 특수한 존재에요. 하나님께서 새롭게 박아넣은 사람 라인입니다. 이 사람 라인은 인간의 육에 따라 나온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에 따라 사람이 되신 분이에요. 그게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님입니다. 사람인데 인간 라인은 아니에요. 새로운 족보를 갖습니다. 남자의 족보를 따라 나온 게 아니라 여자의 족보죠. 아까 강의했던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성의 특징은 늘 비어있고, 비어있으니까 뭔가 채울 것을 요구하죠. 뭐로 채우느냐? 남성의 것이 옴으로써 여기서 자식을 낳죠. 호세아 5장 7절에 보면 사생아를 낳았다고 되어있어요. 여성은 채워지는 거죠. 그런데 마리아라는 여성은 뭐로 채웠습니까? 이 여성에게 누가 왔습니까? 성령으로 인하여 어떤 인자를 낳아요, 인자를. 그러면 이것은 여자 마리아가 낳은 거예요, 성령이 낳은 거예요? 이건 성령이 낳은 거죠. 마리아라는 사람이 아니죠. 마리아는 예상도 못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마리아에게 “네가 복되도다. 복되구나.” 이 복이 뭐냐? 내가 예상 못한 외부적인 요소가 내 안에 주입되는 것이 복이에요. 시편 1편에 보면 복은 뭐냐 하면 말씀을 율법을 다 지켜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잘 자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인이 되거든요. 그것이 우리 외부에 있어요. 우리 내부에서는 그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온다고요. 이 마리아에게 외부의 것이 왔을 때 이것은 마리아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늘 쪽에서 예수님을 만들었잖아요. 이걸 여자의 후손이라 해요. 여자의 후손이에요. 육으로 된 것은 모조리 전부다 여자가 아기를 백 명 낳더라도 그건 전부 남자의 후손이에요. 여자의 비워있는 곳에 남자의 것이 채워졌기 때문에 남자의 후손인데, 이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하늘나라가 왔기 때문에 ‘여자’라는 여자의 후손 자체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양태를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땅에 드러내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이. 인간하고 상관없다는 뜻이죠. 인간을 배제한 가운데 일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이 우리 안에 케이블로 박혀버리면 우리가, 너는 백날 뭐라 해도 남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책망하고 지적하겠습니까. “하여튼 하는 꼬라지 하나하나가 전부다 육의 본성이야.” 이렇게 나무라주는 기쁨, 즐거움이요. 이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육은 세상에 남아서 육적인 요소가 있으면서도 그렇게 나무라주시니까 나의 육적인 요소와 이질적인 요소가 이 몸 안에서 하나로 만났다는 사실, 그것도 그냥 만난 게 아니고 세례 받아서 하나로 연합되어있고 주께서 다루신다는 사실. 이걸 어떻게 수천 억 준다고, 은행 대출 받는다고 이게 될 일입니까. 로또연금 받는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왕이 오시죠. 성전의 동쪽 문으로 왕이 오십니다. 솔로몬 성전과 유사합니다. 성막에는 제사장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옷 갈아입는 곳 그런 게 없어요. 그러나 솔로몬 성전은 3층으로 되어 있어서, 30개×3층으로 총 90개의 방이 있습니다, 1층부터 3층. 3층에 창고 같은 게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성소 벽이 그만큼 두꺼워요. 새 성전의 크기가 총 24,849평이에요, 제가 계산해보니까. 역시 한국 사람은 평수가 나아, 평수가. 엄청납니다. 가로 260m, 세로 260m 곱해서 3.3으로 나누면 되잖아요. 500척이니까 260m에요. 그 새 성전의 동쪽에서부터 왕이 들어옵니다, 에스겔 44장에 보면. 동쪽에서 왕이 들어오면서 그동안 동쪽의 문을 닫아뒀어요. 이 성전의 주인공이 입장하기 전까지는 이 성전에 어떤 주인공도 왕 이외에는 없습니다. 왕이 제사 드려요. 왕, 다윗 왕이 제사 드리면서 다윗 왕에 의해서 지정받은, 유일하게 제사장으로 지목받은 제사장이 사독 제사장이에요. 에스겔 44장에 다 나옵니다. 사독 제사장이 등장해요. 그 사독 제사장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레위인들이 했던 제사를 다 추방시켜버립니다. 레위인들은 나가라고 해요. 이것은 제사장 계열만 한다. 그러면 성전은 결국 뭐냐 하면 왕이 대표로 제사하는 곳이 성전이 돼요, 왕이 대표로. 동쪽 문을 닫아놔요. 만들어놓고 닫아놔요. 이것은 한분을 위한 성전이 되는 거예요. 왕이 와서 월초와 안식일마다 제사 드리는데 그건 왕만이 드릴 자격이 있습니다. 왕 자신의 활동공간이에요. 왕 없이 그동안 평소에 제사장이 드리는 것은 아무 소용없어요. 왕이 드려야 성전이 유효하게 됩니다. 그걸 왕의 자기 집이라 할 수 있죠. 왕의 활동영역이에요.
새 성전에 보면 에스겔 후반부 같은 데에,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찹니다. 에스겔 46장 1절에 보면 군주가 안식일과 매월 초에 예배드리게 되어 있다. 일반 백성들은 동쪽으로 못 오고요. 일반 백성들은 남쪽 문으로 오고 나갈 때는 남쪽 문으로 못 나가요. 남쪽 문으로 들어오고 북쪽 문으로 나가고. 또 북쪽 문으로 들어오면 남쪽 문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왔다갔다 하면서 무엇을 의식하는가? 저 동쪽 문은 우리가 범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동하면서 깨닫게 돼요. 동쪽 문은 임금이 들어오는 곳이거든요. 동쪽이라는 것이 에덴동쪽이죠. 천국의 그 취지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군주가 와서 들어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모든 제사가 왕의 등극을 축하하는 제사로 바뀝니다. 그전까지의 율법 제사법은 들이대야 될 이유가 없어요. 율법대로만 드리는데 이 율법이 추구하는 바가 감추어진 채 그냥 기계적으로 제사 드리는 거예요. 율법대로 제사 드리라 하니까 제사 드린 거예요. 제사 드리면 네가 율법대로 용서받고 네가 약속의 땅에서 잘 살게 해주겠다, 그것 보고 자기한테 제사 드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드린 거예요. 그러나 율법의 방향성, 율법이 무엇을 지향하고 율법이 목표로 하고 있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는 신약에 올 때까지 그 정체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죠. 율법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게 율법이에요. 그래서 그동안 인간들이 율법을 못 지킨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율법을 만드신 분이 율법을 제대로 지켰다 하는 경우는 율법을 지켜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향할 때 비로소 율법은 완성이 되고 율법의 취지를 아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신약 성도가 왜 율법을 지킨 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성령,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된 마음이 율법을 경유해서 그 성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율법을 다 이루었다 함으로 인정하니까 이건 자동적으로 율법 완성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거룩한 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적질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이웃을 사랑하라 그 모든 것은 어디서 이루어진다고요? 그것은 사랑에서 이루어져요, 사랑에서. 사랑에서 이루어지거든요. 고린도전서 13장 잘 아시죠?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 제일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원형 출처가 어디냐? 소망 아니고 믿음 아니고, 사랑에서 나온 믿음이어야 믿음이 사랑을 겨냥하게 되고 사랑에서 나온 소망이어야 그 소망이 사랑을 향해서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사랑에 이끌림 당하는 소망일 때 그게 소망인 거예요.
내가 천당 가는 게 소망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께로 가는 그것이 사랑이다 이 말이죠. 누구에게로 가는 거예요, 누구에게로. 내가 천당 가는 게 아니고, 골프장 푸른 잔디, green grass of home 거기 가는 게 아니고 주님께 가는 거예요, 주님께! 여호와의 증인처럼 맨날 골프장 분수 만들고 그게 천국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는 것이 천국이에요, 천국.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모신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정의할 때 얼마나 살기 좋으냐가 아니라 하늘나라 정의하는 방법은 로마서 14장에 보면 나오죠.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먹는 것, 마시는 것은 어디에 속합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죠. 육에 속하죠. 먹는 것 왜 못 먹어요? 마실 수 있죠. 그런데 인간이 못 하는 것이 뭡니까?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네가 이것 이것 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로 하여금 갑자기 성령의 간섭을 받는 조건을 집어넣고 그게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그러면 육으로 하게 되면 인간은 불만이 있고 결핍이 있고 ‘내가 그거밖에 안되나’ 스스로 자괴감을 갖는데, 성령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야 주시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다 끝냈어. 끝냈어. 네가 더 보탤 것 없어.” 그걸 통보해주는 것이 성령이에요. “네가 앞으로 더 해야 구원받는 그 남은 것 없어. 말끔하게 주님 혼자 다 처리했어.” 그걸 통보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희락과 평강과 기쁨이 없을 수가 없죠.
14장의 말씀처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의롭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뻐하고 평안하고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란 말이죠. 네가 죽는 것은, 희미하게 보다가 이제는 제대로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주님과의 면담 시간이 돼요. 주님과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봤지만 그 때에는 얼굴을 볼 것이요, 라고 되어 있어요(고전 13:12). 옛날 청동거울이에요. 거울이 발달되지 않아서 서리 끼고 옆에 녹이 끼면 중간은 좀 보이는데 바깥은 희미해서 비취지도 않아요. 희미하게 보이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보는 것은 전부다 희미해요. 희미하니까 나머지 부분을 우리의 상상으로 채우는 겁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실제로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온 것처럼 그 영광에 놀라서 엎드릴 수밖에 없고 자기의 받은 면류관을 후딱 그대로 내놔버립니다. 이것은 제가 쓸 잽이 못됩니다. 주님이 쓰셔야 되지, 내가 미쳤나봐, 내가 왜 이걸 쓰고 있어. 모든 것이 만사 주께서 하셨습니다. 후다닥 내려놓는단 말이죠. 그 내려놓는 일을 지금 이 시간부터 성령께서 하게 하시는 거예요. 항상 수련회 끝날 때면 이 대목 나와요. 여러분 한두 번 들은 거 아니죠. 주께서 일하실 때에 우리를 배제하는 거예요. “군주 입장~” 하면 우리는 성전에서 일하다가, 아니면 문지방에서 일하다가 왕이 오는 광경을 우리는 그냥 쳐다보면서 감격할 뿐이에요. 이 성전 안으로 주님이 왕래하셨어. 주님이 왕 되신 분이 제사 드려야 그다음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단일 건축구조물인 동시에 주인님이 한분밖에 없어요. 왕이에요. 제사장은 그냥 심부름꾼이에요, 사독 제사장은. 이게 왕국입니다.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거예요. 영원토록 왕 노릇하는 그 이야기가 이미 새 성전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 성전에서 드디어 물이 나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취지가 그대로 살게 만들어요. 생명이 있으니까 물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으니까 거룩하니까 거룩한 물이 흘러나오는 겁니다. 520m마다 4번씩 측량해요. 2.1km에 가서 물이 얼마나 깊이 들어가는지 이젠 건너갈 수 없는 강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에스겔 47장에 나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까 제가 설명해드렸죠. 물이 나온다. 물이 나오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아셔야 될 것은 물이 나오면 진짜 성전이고 물이 안 나오면 가짜 성전이죠. 여러분 혹시 교회 다닌다면 예배당 가보세요. 거기에서 물이 나옵니까? 구정물 나와요. 사찰집사 집에서 나오는 물은 생활오수 나오겠죠. 그것은 살리지를 못합니다. 그럼 물이 나와야 새 성전이고 신약이 새 성전의 완성이라면 그 물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게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나옵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즉, 나에게 위치추적 케이블 꽂힌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위에서 머리 부분에서 물이 흘러나오니까, 바깥 쪽에 있는 같은 성전 안에 있는 우리 쪽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성령이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39절에 나와요.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성령이 나온다는 말은 이 성령이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이 나오죠. 그럼 예수님의 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취지를 살리면서 나오죠.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뭐냐?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그 일이 나오는 거예요. 그 일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온다면 “나는 죄인이고 이 죄인을 주께서 의되게 하셨다.” 그 고백이 나올 때 그 사람에게서 바로 성령이 흘러나오고 있는 그 순간입니다.
또 그걸 옆에서 베끼려고 녹음해놨다가 나도 저렇게 이야기해야지. 그렇게 할 때 가짜로 그런 고백하는 사람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어요. “나는 내 입에서 성령이 시도 때도 없이 나와가지고 잠도 못 잘 정도야. 성령이 자꾸 나와.” 그럴 때는 같은 방에서 옆에 있던 분이 “그게 바로 죄야!” 할 때, 성질내면 그건 가짭니다. 100프로 가짜에요. 그건 흉내 낸 거예요. “그래, 내가 죄인이니까 흘러나왔지. 이렇게 흘러나온 것도 죄야.” 이건 진짜입니다. 그런데 이 진짜라는 이걸 또 흉내 내는 사람이 있어요. 아, 그거까지는 모르겠어요. 그거 뭐 흉내 내겠다는데 말릴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보통 성낼 때는요. 네가 그것도 죄라 할 때, “이게 왜 죄야?”라는 말로 대꾸하면 그거는 좀 약한 불신자인데 아주 노골적인 불신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만 성도가?” 이건 완전히 들통 다 난 거예요. 이건 완전히 가짜에요. 승부욕이 작동했어요, 승부욕이. 남한테 안 지려고 성령 받은 티를 내버린 거예요. 주께서 죄인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철저하게. 그래서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주께로 돌아가잖아요. 철저하게 사용하고 이용할 때 이용당함에 대해서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주께서 사용해주시니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하죠.
그래서 이 사도들은 성령을 받게 되는데요.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게 되는데 이 성령의 특징이 뭐냐. 이 보좌에 의하면 궁창 위에 있는 인자가, 사람이 직접 이 땅 위에 내려왔기 때문에 이미 사각형 세상을, 성령이 모든 것을 커버했습니다. 커버했기 때문에 네게 성령이 임하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되라 했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네가 있는 그 현장이 이미 사각형 안에 들어있는 현장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교라 하는 것은 남의 나라 가는 것이 선교가 아니고, 그 있는 현장이 바로 선교지가 되는 겁니다. 굳이 비행기타고 멀리 갈 필요 없다니까요. 삶의 현장은 내가 지정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할당하고 배정한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은 왜 그렇게 돌아다녔습니까? 뭐 여행 겸사겸사, <걸어서 세상속으로> 촬영하려고 돌아다닌 거예요? 그것은 사도행전에 보면, 주께서 지시하고 그 성도들이 불렀어요. 자기는 터키 북쪽으로 가려 했는데 마케도니아, 현재 그리스에서 오라 해가지고 갔어요. 가니까 거기서 뭐가 기다리는가. 환영이 기다리는 게 아니고 환난이 기다렸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왜 오라 했어?’ 그런 후회가 나올 법한데 사도한테는 이미 빌립보서 3장 20절 말씀처럼 자기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그 현장에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주께서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까지 가뿐하게 갑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는 것을 본인이 알았어요.
모든 성경은 그때까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도로 택정하사 사도로 하여금 교회 성전의 기초를 마련한 거예요. 성전의 기초인데 그 성전은 성령으로써 한 구역으로 만들어버린 그러한 것이 에베소서 2장에 나오거든요. 중간에는 십자가가 꽂혀있고 십자가로 화목케 하고 성령께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한 구역, 구획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뭐가 유동되고 있는가? 성령이 에너지로서 계속 거기서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의 장으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목사님, 제 몸이 성전입니까?”라고 한다면 “당신 몸은 성전이 아니죠. 당신 몸은 성전의 일부가 되죠.” 성전의 몸은 두 개, 세 개 되는 것이 아니고 성전은 단일구조물로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인데 그중 일부 기능을 담당하는 겁니다.
이제 사독 계열의 제사장직을 언급합니다. 에스겔 44장 15절에 나옵니다, 사독 계열. 사독 계열의 제사장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이 점을 다시 한번 정리해야 됩니다. 다윗 언약의 내막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모세 언약에 있어서, 모세는 제사장 계열이죠. 제사장은 모세 형 아론부터 시작한 거예요. 이 때 모세는 선지자로 빠지고 제사장이 시작되는데 그럼 왕은 어디 있는가? 주의 이름이 왕으로써 합니다. 주의 이름이 왕이 되는 이유는 전쟁하기 때문에. 전쟁하는 용사가 되기 때문에 왕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제사장밖에 없죠. 그런데 이 제사장이 제사를 지낸다는 말은, 세상민족으로 봤을 때 세상나라에서 봤을 때는 왕 자리가 빠져있죠. 왕 자리가 빠져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싫어한다는 티가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할 때에요. 지도자와 왕은 다릅니다. 지도자는 성신을 받아서 성신의 카리스마,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이게 일시적이에요. 구약의 일시적인 은사를 가지고,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그 사람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밖에 안돼요. 주께서 왕으로 계시기 때문에 여기에 왕이 생기면 안 됩니다. 왕이 둘이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왕이라면 인간의 왕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왕 됨을 못 믿게 되면, 남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서 지시에 따르는 식으로 하겠다고 하면 율법 체계 전체가 모독 받게 됩니다. 왕이 지시만 하면 되지, 그럼 제사는 왜 드립니까? 소용없잖아요. 제사를 왕이 지시하는 게 아니잖아요. 제사는 하나님이 지시한 거란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종교는 제사장이, 전투는 인간의 왕, 이런 식으로 둘이 갈라져버리면 이스라엘 자체가 붕괴됩니다. 그 붕괴된 흔적이 사사기에 보면 베냐민 지파가 날라가버려요. 아주 위기에 빠졌습니다. 12가 11이 되면 전체 하나의 이스라엘이 존재하지 않게 돼요. 왜냐하면 동일한 야곱의 언약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야곱 언약은 열둘이 다 갖춰져야 야곱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쪽이 빠져버리면, 피자야 한쪽이 빠져도 나머지를 뜯어먹을 수 있지만 이게 피자판이 아니에요, 온전하게 열둘이 다 갖춰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야곱 언약 때의 축복이 주어지지 않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버렸다는 증거가 돼버려요.
그래서 사람들은, 제사장들은 제사를 유지해서 열두 지파가 제사에 참여할 테니까 전쟁하는 것은 따로이 괜찮은 큰 지파에서 투표해서 대표로 누구를 뽑읍시다, 이렇게 된 거예요. 왕을.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우리에게 왕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왕직과 제사장직은 여기서 갈등을 빚게 됩니다. 갈등을 빚게 되면 사람들은 왕의 말을 듣고 제사장 말을 안 들어요. 제사장 말을 안 듣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십일조를 내지를 않습니다. 십일조 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보다도 영웅적인 왕이 전쟁에 승리해서 복을 받는 것이 훨씬 단출하잖아요. 단출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십일조 했는데 하나님이 줄지 안 줄지 모호한 것보다도 왕이 전쟁에 승리해서 많은 포로를 잡아오고 전리품을 많이 가져오게 되면 국력에 기여가 되고 보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승리 안했어요?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승리했는데 이게 단회적이거든요. 늘 승리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백성들은 사울을 왕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왕이 되게 되면 네가 전에 했던 대단한 기적을 왕이 되면 주께서 너를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공급할 것이라고 예상해버리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그동안 하나님과의 모호한 관계를 얼마나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했는지 그 본색을 다 드러내고 말았어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왕이 있음으로써 권력이 왕 쪽으로 다 가버렸어요. 그래서 제사장은 십일조가 없으니까 밥 못 먹고 삽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그 당시에 왕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사적인 복을 빌어주는 사람만 그때마다 간편하게 원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다는 이 잔소리, 그 잔소리는 그만-. 그만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 싫어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정말 제사직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거예요. 어린 양을 죽인 희생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거예요. 왕은? 왕이 영웅과 더불어 한패가 되어서 내가 마치 영웅이나 된 것처럼 승리자가 된 것처럼 으시댈 수 있는 기회를 영웅적인 왕이 제공합니다. 제발 당신은 우리의 호응에 부응하는 위대한 왕이 되어 달라. 그건 교회도 마찬 가지에요. 교인들이 주님을 섬길 생각하지 않고 목사를 섬길 생각합니다. 기도? 네가 해라. 그럼 목사는, 천국 갑시다. 하와이 니가 가라, 이런 식으로. 왜 자기가 죄인 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냐 이 말이죠. 멀쩡하고 싶고 또는 멀쩡하지 않으면 그걸 숨기고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 죽여버리고 새로운 이스라엘에서는 왕, 그분만으로 자족하고 만족하는 거예요. 그리고 왕이 하신 일은 어떤 형편이든지 간에 전부다 동의하고 잘했다 하는 일치된 마음,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고, 우리의 육을 날마다 지적하면서 다 이루었다함이 미진하고 결핍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 그것을 도리어 죄로 늘 규정해주시는 그런 사랑이 오늘 밤에도 넉넉하게 충만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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