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의 손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준비한 게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모든 왕을 다 죽입니다. 심지어 남쪽 왕, ‘요시아’라고 해서 전무후무한, 신앙적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하나님의 정통성, 다윗언약의 정통성,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던 요시아왕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을 하고자 했던 그 왕도 하나님께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우상숭배는 계속 죽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왜 이 순신 장군이 죽었는가? 조선이 망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조선이 망해서 일본한테 기어이 잡혀먹는 것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가 되는 겁니다. 아, 정의로운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선한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악이 설쳐대고 의인이 죽어가는 이런 하나님, “정의로운 하나님 어디 있나이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가 왕이 없어져야 진짜 다윗 같은 왕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하나님의 취지에요.
사무엘하 8장 6절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고 사무엘하 8장 14절에도,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그게 이스라엘에 등장해야 될 왕의 왕 다운 모습입니다. 다윗이 항상 승리해서 모든 이스라엘을 장악했지요. 그즈음에는 남쪽과 북쪽 나라가 갈라짐이 없었습니다. 이게 통일된 나라입니다. 통일된 나라가 유지되었어요. 이스라엘이 처음 될 때 다윗이나 솔로몬 때도 어떤 사람도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을 못 했습니다. 갈라지면 일단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 아니에요. 그러면 갈아치우기를 해야지요. 나라가 갈라지면 안 되거든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 개의 나라, 북쪽 나라 남쪽 나라 갈라지게 해놓고 그다음에 인자의 손, 에스겔의 손에 의해서, 에스겔의 손안에서 두 개의 나라가 합쳐집니다. 인자의 손안에서 남쪽 북쪽 나라가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좌에 있던 취지가 인자 속에 들어와서 인자의 역할이 그걸로 끝납니다. 인자의 역할은 끝나고 인자의 역할은 뭐로 빠지느냐 하면, 선지자로 빠져버려요. 선지자로 빠져버리고, 인자의 손에서 남북통일 되면서 선지자로 빠져버리면, 이게 통합이 되게 되면 통합된 왕이 새로 세워지는데 그 통합된 왕이 누구냐 하면, 다윗입니다. 이게 37장 24절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윗이 이미 죽은 자거든요. 다윗이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보면서 노아가 죽더라도 노아 언약은 살아 있고요,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가더라도 모세 언약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살아 있습니다. 다윗은 죽더라도 다윗언약은 살아 있고, 예수님 돌아가시더라도 십자가 새언약은,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해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바타에 지나지 않고 인간 배후에 하나님의 약속, 약속의 하나님에 의해서 계속 적용되고 있는 거예요.
노아언약 같은 경우에 노아언약을 무슨 언약이라 할 수 있느냐 하면, 무지개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평화롭게 심판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기분 썩 좋다. 내가 기분 매우 유쾌하다.” 그것으로 무지개, 평화의 무지개로 했다 그 말이지요. 그 무지개가 어디에 나타나느냐?
에스겔 1장에 보면 궁창, 덮개같이 생긴 그 궁창 위에 또 하나의 사람 같은 분이 보좌에 앉아 있는데 아주 고요한 지역이지요, 그 고요한 지역에는 뭐가 펼쳐졌는가? 무지개가 펼쳐져 있습니다. 아래쪽에서는 번개가 치고. 인자는 인간의 요소가 계속 개입되어 있어요. 인간의 요소로서 에스겔이 움직입니다. 에스겔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님의 요소, 보좌의 심판요소로서 죄악 된 인간의 요소와 같이 결합되어 있는데 인자로서 인자의 손안에서 쪼개진 두 나라가 결합이 됨으로써 그다음부터 인자가 선지자 요소로 빠지면서 인자를 통해서 새로운 왕이 등장하고 그다음에 새로운 왕, 다윗이 등장하고 다윗과 죽이 맞았던 다윗 대와 그다음 솔로몬 대까지 다윗과 죽이 맞았던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이 제사장 이름이 뭐냐? 사독 제사장이에요. 이 왕, 이걸 왕 직이라 하고요, 제사장은 이걸 제사장 직이라 하거든요. 왕 직과 제사장 직이 다윗언약 안에서 결합이 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언약의 완성이 된다. 이것이 에스겔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전은 기념관이거든요. 전쟁에 승리한 기념관이 성전이 되는 겁니다. 누구 아이디어냐? 다윗의 아이디어에요.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이 전쟁을 다 해서 이제 평정을 했으니까 “이 전쟁의 모든 공로자는 유일하게 하나님 이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뿐입니다. 나는 백향목 좋은 집에 사는데 주님은 그런 좋은 집이 없기 때문에 제가 주님을 이 예루살렘에, 이 시온성에 모시겠습니다.” 왜? ‘전쟁의 공로자가 주님이고, 주님이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해서 얻은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면 마땅히 이스라엘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어야 되지 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라는 그런 취지로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했고요,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성전이 필요하다면 내가 너보고 먼저 지으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필요한 성전은 내가 짓지 인간이 짓는 게 아니다.” 이렇게 했어요.
첫 번째 다윗의 약점은 뭐냐? 다윗이 인간이었다는 게 약점이 돼요. 왜냐? 인간에 의해서 성전을 짓겠다는 것을 주님께서 완곡하게 거절했거든요. 그러면 그다음 다윗 같은 똑같은 다윗이 등장한다면 그 다윗은 인간이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새로운 다윗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다윗왕은 다윗언약을 이루지만 사람은 아니에요. 사람은 아니라면 사람은 아닌 입장에서 주님께서 인간세계 전체를 향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지요. 어디를 가든지 항상 이기니까. 어디를 가든지 항상 이기는데 여기에 패배를 하는 대상이 전에는 다윗 중심의 이방 민족이라면, 암몬, 모압, 블레셋, 아람, 이런 나라라면 여기서 새로운 다윗의 적들은 뭐냐 하면, 놀랍게도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적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자체. 그리고 이제는 그냥 적지에 있는 이방 나라뿐 아니고 전체 모든 인류,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의 적으로 등장하고 거기에 대해서 다 이겨버리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방 민족들은 놀랍게도 아직도 등장하지 않았던 에스겔 시대에 아직 등장하지 않는 그런, 앞으로 등장할 나라까지 벌써 이긴 것으로, 그들은 여호와 앞에, 다윗 앞에 패배한 것으로 이미 간주한 채로 그 나라는 이 세상에 기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기어 나온다는 말을 왜 사용하느냐 하면, 다니엘에 보면 그게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거든요.(단 7장) 바벨론, 메데와 바사, 헬라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그다음에 로마, 모든 민족이 패배하기 위해서 기어 올라와요. 패배해서 기어 올라오는 그 나라, 그 나라가 에스겔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곡, 같은 말 곡이라고 되어 있어요. 마곡, 곡. 그 마곡, 곡을 지금 사람들은 어디로 보고 있느냐? 러시아 푸틴으로 보고 있는 거예요. 러시아 푸틴과 이란과 손잡고 드디어 세계 3차 대전이 벌어지게 되면 스가랴 예언대로 주께서 마징가-Z처럼 감람산에 딛고 온다는 거예요. 저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승부근성이라 보는 거예요. 내 존재가 살아 있는 한 내 쪽이 이기는 꼴을 한번 보고 죽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나의 편으로 끌어당겨서 내 쪽이 세상을 정복할 때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악마가 원하는 바이지요.
그러면 교인들은 왜 교회 가느냐? 하나님이 자기의 유일한 최후의 라이벌이에요. 하나님마저 내 손으로 다룰 수 있다면, 나의 철야와 중보기도로 다룰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나님과 상대함으로써 타인들이 상대하는 시시껄렁한 다른 가치를 내가 지니게 된다는 이 우월감이 마약 못지않게 인간을 흥분상태에 빠지게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할 때 자기는 순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한다고 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정복욕, 우월감, 세상에서 풀지 못한 한풀이를 내가 지금 매진하는 일로 인하여 내가 영웅시되는 그 유혹을 인간이 어떻게 떨쳐버립니까? ‘날 무시하지 마라.’ 그 소리가 내부에서 외치고 있어요. 날 무시하지 마라, 날 무시하지 말라, 하는 그 내부의 욕망의 분출이 혀를 통해서 입으로 나오게 되면 그걸 문자로 통성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통성기도. 이 마곡이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마곡은 바로 에스겔에 나오는 최후의 정복되어야 될 나라가 아니고 이미 정복되어야 하기 위해서 출현시킨 하나님이에요. 드라마에서 최후의 적은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주로 권력층에서 많이 나타나지요. 요새는 감옥, 교도소에서 그런 사람, 신성한 감방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요즘 드라마에서는.
그러나 성경에서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미 승리를 확정 짓고, 왜 이분이 승리해야 되는가를 후차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가장 두렵고 겁내는 막강한 적들을 자꾸 출몰시켜요. 그렇게 출몰시키는 이유는, 가짜들은 제발 하나님의 천국 문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 빨리 너희 자식들 갖고 가라고 주께서 그런 적들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 사람 저쪽 사람이야. 가져가, 가져가, 가져가!” 적그리스도가 등장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제발 좀 가져가라고. 천국 문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마귀가 열심히 해야 될 이유가 바로 그런데 있어요. 마귀는 지금도 열심히 일합니다. 자기 사람 데려가기 위해서, 생명책에 기록 안 된 사람들, “어딜 엉뚱하게 거기 가서 붙나? 이쪽이야, 이쪽. 너는 내 사람이야.” 그게 요한계시록에 666, 그런 숫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분류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해석해버립니다. 1차, 2차, 3차로 구분 지어서 해석을 해요. 1차, 애굽에 있을 때에. 2차, 광야에 있을 때에. 3차, 가나안 땅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너희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했다고 아예 규정을 해버려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에스겔 20장에 나옵니다. 에스겔 20장 5절에서 9절에 보게 되면, 제 말 잘 들으셔야 됩니다,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이 우상 섬겼다는 이야기가 출애굽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그래서 재해석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20장 7절에 보면,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여기에 애굽에서 너희들이 우상 섬겨서 내가 다 죽이려고 했는데 내 이름이 더럽힐까 싶어서 애굽에서 죽이지 않았다는 쪽으로 재해석해버려요. 출애굽기에는 전혀 이 내용이 없어요. 주님이 이런 식이에요. 이스라엘 역사가 지나갔어요. 한참 지나갔거든요. 애굽에서. 그런데 “너희들이 애굽에 있을 때부터 성질 자체가 우상 섬기는 것을 알았어. 알았기 때문에 아무리 너희들이 나라가 되더라도 너희들은 온전한 나라가 될 수 없어. 심지어 다윗이라도 안 되는 거야. 그 이유가 뭐냐? 다 우상숭배 때문에 그렇다. 천성이 너희들은 우상 숭배할 수밖에 없어.”
그렇게 했고 그다음에 20장 10절에서 26절까지는 뭐냐? 두 번째 시대, 광야시대입니다. 광야시대에 또 여기서 주님께서 터무니없는 핑계, 빌미를 끄집어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뭐가 안 나타나느냐? 13절에 보면, “네가 광야때 안식일을 어겼잖아.” 13절에,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또)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이름이 너희 때문에 더러워질까 해서 내가 너희들을 안식의 땅으로 이끌었다는 거예요. “언제요?” 듣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굉장히 뭔가 허황된 거예요. 그때, 안식일 어겼을 때 그때 “네가 안식일 어기지 말라. 네가 어겼다. 다음에 잘해라. 내가 한번 봐준다.” 그때 이렇게 지적하지 이제 와서 나라가 망해놓고 망한 이유를 찾는데 지나간, 벌써 수백 년이나 지나간 그것까지 다 끄집어내서 이제 와서 그때 말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네가 안식을 어겼다.” 이미 지나간 것인데, “그 안식일 어긴 천성이 어디 가겠느냐?” 지금 뭐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이미 다 지나가고 끝난 조상들 이야기인데! 왜!
세 번째가 뭐냐? 가나안에 있을 때 우상 숭배했다는 거예요. 한결같이 뭔가, 검사가 기소내용이 없으니까 뭔가 짜 맞추는 수사, 그런 느낌이 확 들지 않습니까? 억지스러운 수사, 망하기는 망하는데 우상숭배로 몰아넣기 위해서 조서를 조작하는 그런 느낌처럼 들지요. 전부 다 우상숭배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거예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한 거예요. “우상숭배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하나님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선택은 우상을 싫어하고, 부처를 싫어하고 오직 주 예수만 믿기를 원해요. 그러나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사실을, 출발점을 나의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의 존재로부터, 나의 존재로부터 시작하면 항상 내가 의롭다는 그런 자료만 나에게 수집되게 되고 전체를 모르는, 내가 챙긴 것만 의롭게 지켰다는 그걸로 내가 옳다고 우길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광야에 있을 때의 안식일을 하나님께서 언급하면서 우상과 참된 하나님의 차이점을, 참된 하나님은 안식일이 있지만 우상에는 안식일이 없다는 이 차이점을 들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성전을 지었을 때에 또는 새로운 백성 이스라엘, 통합된 이스라엘, 구분되지 않고 통합된 이스라엘, 다윗이 왕이 되는 그 시대에는 에스겔45장, 46장에 보면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쪽으로, 안식일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기 위해서 우상과는 차이 나는,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그러한 성전, 그러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취지가 드러났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우상과 안식일 있는 것의 차이점이 뭐냐? 우상은 제가 강의한 대로 이것은 일자(一者)입니다. 하나에요, 하나. 인간이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을……, 벌써 첫 번째 시간 강의한 것인데 다 잊어버렸겠지요? 다시 설명해 보면, 인간의 모든 생각들은 보편적인 하나로 모아지기 위해서, 모든 개념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을 목표로 모든 생각이 거기로 나아가는 겁니다. 어떤 생각도 하나를 목표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생각은 어디서 나오느냐? 나의 존재에서 나와요. 내 존재가 왜 있느냐, 왜 사느냐, 죽으면 어디 가느냐, 죽어서 천국 가겠느냐, 내 존재를 저 위에 있는 상위에까지 끌어당기기 위해서 계속해서 성경을 생각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사모하고, 성경뿐만 아니고 모든 지식도 철학도 과학도 하나를 추구합니다. 가장 단순한 원리가 가장 진리에 부합되고 아름답고 조화롭다. 이것은 오직 하나를 추구하는 거예요. 그 하나를 왜 추구하느냐? 그 하나를 날름 먹는 거예요. 하나, 최고의 지식을 날름 먹어버리면 나는 최고의 지식을 품은 사람이 되어서 완벽에 완벽을 기할 수 있는, 내 존재가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이 욕망을 인간은 포기할 수가 없어요. 이 욕망, 물리학자도 그렇고, 철학자도 그렇고, 의사도 마찬가지고, 해독주스, ‘한 개만 먹으면 모든 병마다 만병통치가 되는 단 하나 경옥고’ 이런 것,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것, 그것만 되면 돈 벌 수 있는 그 하나를 치열하게 연구하지요.모든 것을 그냥 주사 한 방에 깨끗이 해결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연구하고 또 연구에 매진하는 거예요. 오직 하나를 찾기 위해서. 그걸 사람들은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해요. 지혜를 사랑하는 게 철학이라, 필로소피아(philosophia), 철학이라는 것은 최고를 찾는 거예요, 최고를. 인간의 이성을 추구해서 가장 최고를 찾는 거예요. 회사도 마찬가지고요. 이 욕망의 트레인, 기차는 멈추지 않아요. “그러니까 집사님들 많이 기도해주세요.” 자기 엄마부터 시작해서 아는 사람들 전부 다, 검사된 것이 주의 뜻이니까 앞으로, 앞으로, 칙칙폭폭, 기차가 되어서 마지막 대통령까지. 그러면 대통령 되면 뭐하는데요? 잘됐다고 소고기 사 먹겠지. 뭐 그걸로 끝나요. 대통령 안 되어도 소고기는 사먹을 수 있는데. 대통령 되면 뭐하는데요? 휴가나 가고 그게 뭔데요? 이 하나가 하나에 막힙니다. 이게 가짜거든요. 이게 우상이라는 말이지요.
우상과의 차이점은 뭐냐? 위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는 게 아니에요. 위로 창을 내겠소. 그러면 안식일은 뻥 뚫린 거예요. 뻥 뚫려 있습니다. 성전 중앙이 뻥 뚫려 있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새성전에는 언약궤 없습니다. 진설병도 없어요. 촛대도 없습니다. 새성전에는, 거기는 천사가 마중 나와요. 아무것도 없이 천사가 마중 나와요. 그냥 “인간은 여기까지. 됐어.”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인자, 에스겔이 그걸 인도해줍니다. ‘이것까지, 우리가 심판에서 망하는 것까지만 우리 역할’ 그다음 역할은 뭐냐 하면, 바통 이어받아서, 릴레이 뛰는데 그다음에 다윗언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다윗이 그다음부터는 바통을 이을 겁니다. 로마서 1장 3절에서는 그걸 가지고 뭐냐? 복음이라고 했어요. 복음은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 오십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래서 “그것이 바로 내가 전한 복음이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거기서 인간의 요소, 다윗의 혈통, 이것은 혈통 안에 뭐가 흐른다? 다윗언약이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다윗언약이. 다윗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속하지요. 두 개의 나라가, 북쪽 남쪽 두 개의 나라가 인자의 손안에서……, 아까 인자의 손이 어디에 있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에스겔 37장에 인자의 손안에서 결합이 되면서 인자가 통일되는 인간적인 요소의 인자, 에스겔은 손으로 하나님께서 막대기 둘을 잡게 하지만 그 인자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의 요소는 진짜 거기서 스스로 인자에게 인수받았던 그 언약을 하나님 쪽에서 그걸 완성을 해버리면 그분이 바로 다윗 왕이 되는 겁니다. 다윗왕의 특징이 뭐냐? 모든 세상, 마곡이고 곡이고 뭐고, 로마고, 다 항상 이기게 해버렸다, ‘이기게 해줄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과거완료, 이미 이기게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기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이기게 해주세요, 가 아니라 “도대체 주님께서 어떠어떠한 것을 이기셨습니까? 저로 하여금 어떻게 구경 좀 해보게 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 네 육신이 살아 있을 동안 내가 너한테 붙여줄게. 주님이 이긴 자들을 내가 붙여줄게.”
그래서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이 서글픈 인생을 계속 사는 이유가, 주께서 이긴 것들을 “구경 한번 잘했네!” 그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보세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은 “그 이겼다는 결과물, 부산물이 바로 너희다. 너희들이 아무것도 내세울 것도 없고 너희들이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잖아. 하지만 너희들은 나를 받았잖아.” 그래서 ‘내가 이긴 게 아니고 주님이 이겼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가 세상을 이겨서 세상 가운데 있는 너희들을 내 이름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뽑아냈기 때문에 ‘너희’라는, 그런 고백을 하는 존재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바로 옆에 있는 요한복음 17장 바로 보겠습니다. 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조건이 붙어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 이런 조건이 붙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버지가 보내지 않으면 예수님께 올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 6장에도 나오지요.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자기의, 하나님의 천국 갈 사람들을, 몇몇 되지도 않는 천국 가는 사람을 뽑아내기 위해서 모든 지옥 갈 사람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전부 다 통제하는 권세를 예수님이 받은 거예요. 천국 가지도 못하는, 지옥 갈 자들까지의 그 통제하는 목적이 오직 자기 아들에게, 자기 아는 백성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을 뽑아내기 위해서 모든 권세를 준 거예요. 17장 9절에,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다른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게 아니고 택한 백성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다음에 중요한 말씀이에요,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주님의 기도는 세상을 위함이 아니에요. 세상과 무엇을 따로 떼놓느냐 하면,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세상 속에 있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성도는 세상 전부라도 바꾸지 않는다. 29조의 투자를 해도 바꾸지 않아요. 그 정도로 귀한 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제가 주일날 설교한 것처럼 “우리는 보배를 담는 하나의 빈 그릇이라도 좋소.” 이렇게 돼요.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하나, 일자라는 것이 우리의 욕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멍 뚫렸으니까요. 구멍이 뚫렸어요. 그러면 그 안식일, 안식일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은 뻥, 하고 뚫려버린 거예요. 그 안식일을 봐야 거기서 구멍이 뚫렸으니까 일자가 구멍이 뚫린 거예요. 마치 루프가 있는, 지붕이 열린 자동차처럼 뭔가 시원하다 보니까 비가 와요. 보니까 구멍이 뚫렸어요. 구멍 뚫려서 보게 되면 뭐가 오느냐? 그 구멍을 통해서 비로소 이 지상, 이 육적 세상에서 영적 세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가 안식일이 되고 그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냐? 바로 마태복음 12장 했지요, 8절이지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의 주인이 된다면 그러면 하나님의 새성전을 왜 천사가 측량을 하느냐? 왜 천사가 측량을 하고 인자 되는 에스겔은 어디서 기다리느냐 하면, 9번 장소에서 기다리지요. 9번 장소가 여러분 부교재에 보면 그게 성전입구입니다. 성전 입구에서 인자가 천사와 만나게 되지요. 천사는 측량하는 순서가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이렇게 나와 있지요. 부교재에.
그래서 억지스럽기까지 하면서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우상숭배 쪽으로 몰아세웁니다. 그리고 인자가 되는 에스겔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그 증거를 쌓고자 하는 거지요. 수사관이 수사하기 전에 미리 죄목을 정해놓고 그 죄목에 합당한 증거만 일방적으로 계속 찾는 방식을 에스겔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사용할 때 자, 여러분이 인자, 선지자지요, 에스겔이 이렇게 활동할 때 에스겔이 상당히 칭찬받았겠습니까, 비난받았겠습니까? 비난받았지요. 그 비난하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인자가 가면서 잘못된 신학체계를 갖고 있는 자들이 자기의 본색을, 에스겔이 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그 빈 공간에서 그들이 출몰해요.
복음을 외치지 아니하면 거짓 선지자가 거짓 선지자로 들통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을 통해서, 인자를 통해서 드러난 거짓 선지자의 신학은 무엇인가? 주님 오시기 전에 BC 605년과 BC 597년, BC 605년은 다니엘 1장 1절에 보면 1차로 포로 잡혀가는 날, 2차로 BC 597년 포로 잡혀가고, BC 586년에 3차로 또 포로 잡혀가고, 그다음에 BC 581년에 4차로, 1차, 2차, 3차, 4차로 다 포로 잡혀가요. 제일 마지막에 잡혀가는 포로는 숫자가 얼마 되지도 않아요. 왜? 앞쪽에서 너무 많이 잡아가서 두 번째 BC 597년에 포로 잡혀갈 때, 그때 에스겔이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갑니다. BC 605년에는 다니엘이 포로 잡혀가고요. 죄목은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우상숭배 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는요, 이스라엘이 상당히 금시초문이에요. 여호와를 바라보면서 훌륭한 우리나라의 많은 신학자들이 있고 많은 목회자들이 있는데 왜 우리가 우상숭배자냐, 난색을 표하는 거예요. 지금 매사가 잘돼가고 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에스겔 시대의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605년에 포로 잡혀가고, 597년에 유다 나라가 고난 받고 바벨론한테 공격을 당할 때 그들의 주장은 뭐냐 하면,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가 벌을 받는다. 1차와 2차, 이렇게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은 경고용이다. 우리보고 정신 차리라고, 제대로 여호와 섬기라고, 우상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경고용이다. 따라서 이런 환란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처벌은 다 이미 해결되었다.” 이게 거짓 선지자의 신학입니다. 백성들이 안 속아 넘어갈 수 없어요.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고 하나님은 너무나 율법대로 살기를 요구했는데 우리가 미처 하나님의 취지를 몰라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방 민족을 통해서 우리를 치게 했다. 우리는 이참에 다시 한 번 회개하고 반성하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욱더 하나님의 제대로 된 말씀에 입각해서 살자.”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신학자들, 거짓 목회자들의 주장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안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이러한 “우리가 받을 벌을 받았기에 이제는 바르게 하자.” 이것을 두 자로 하면 뭐 게요? 두자, 이 전체 신학을 두 자로 이야기하면 뭐가 됩니까? 제가 나도 모르게 여기에 써버렸어요. 이게 뭡니까? 개혁, 이 개혁 뒤에 붙는 게, 이걸 주장한다고 해서 뭐냐, 개혁주의입니다. 개혁주의의 특징은,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노력만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늘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바르게 하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잘해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입니다. 그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것을 극구 반대하느냐 하면, 우리가 믿던 여호와가 그게 우리의 존재에서 나온 우상이라는 것을 그 어떤 경우라도 그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든 성전이 있는데 이 성전이 하나님께서 1차, 2차, 그때도 성전은 끄떡없었거든요. “거봐! 그게 하나님 뜻이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우상숭배의 끝을 보여주는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건드려 보는 거예요. 건드려 보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는 잘못됐습니다. 회개하겠습니다. 앞으로 잘할게요. 하지만 이 성전만큼은, 하지만 하나님의 이 약속에 의한 하나님의 택한 나라 이스라엘만큼은 주께서 지켜 주옵소서. 우리에게 일말의 희망은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 우리가 기도할 맛이 나고 우리의 미래, 우리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 간절히 마지막 끈을 붙잡게 만드는, 희망을 붙잡게 만드는 그 짓, 지금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 그 짓 하고 있고 이 개혁신학에서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에게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 미리 이미 끝났다는 것, 모든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절대로 믿지를 않아요. “자, 이제 십자가 믿고 차근차근하게 바르게 한번 살아보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
뭐 십자가에 죽는 게 복이에요. 다른 복은 없어요. 왜 자기 존재를 거기다 자꾸 집어넣으려고 합니까? 십자가 믿고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그것은 죽는 게 아니고 생명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 26)라고 했지요. 그냥 사는 거예요. 살아서도 그냥 살고 죽어서도 그냥 살고, 드디어 생명 안에 있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것은 이미 해결 다 본 거예요. 더 해결할 것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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