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배제
에스겔에 의하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 배제, 같은 말로 인간 퇴출, 인간 배제하고 인간 퇴출하고, 인간 빼놓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인간입장에서는 정말 감사할 일이에요. 인간을 지배하는 이 악의 세력에 대해서 인간 네가 감당 못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봐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율법 줬지, 성전 줬지, 은혜 다 줬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뭐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한 게 아무것도 없지요. 그냥 이방 나라 닮아가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인간 내부에 자리 잡은 선악과 따먹은 그 성깔, 본성이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계속해서 외부로 들춰질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 들춰지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 하지 말고 그래서 이 나의 구원에서, 나의 구원과정에서 고맙게도 하나님이 나를 배제 시켜준 것에 대해서 할렐루야! 감사해야 돼요. “나서지 마, 너! 나서지 마.”
그런데 거짓 선지자가 바로 그 짓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알아서 반성하고, 우리가 알아서 회개하고,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해서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은혜를 우리 힘으로 지켜내겠습니다.” “하지 마! 하지 마, 그것 하지 마.” 그것이 이미 많이 했다, 그만하라는 거지요. ‘그래, 이건 하나님께서 나한테 징계 내린 거야. 반성하라는 뜻이야.’ “하나님, 다시는 내가 딴 길로 가지 않고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주께서는 세자로 뭐라고요? “하지 마! 그 짓 하지 마”
십자가로 다 이뤘다는데 십자가는 몰라요. 십자가는 모르고 만회할 생각, 자기 망가진 인생 만회할 생각, 거기에 몰입해서 막 때리면 더욱더 열심히, 더 열심히, 새벽기도 빠져서 이런 사달이 났기 때문에 안 나오던 새벽기도 빈 노트에 성경 막 쓰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모든 존재의 의미가 자기 존재로 막혀 있는 것. 더 뚫지 못하고, 아래로도 뚫지 못하고 위로도 뚫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서 이미 죄목은 우상숭배로 정해놓고 선지자를 현장을 조사하라고 보냅니다. 그게 에스겔 8장에 나옵니다.
■에스겔이 성전에 가보니까 10절에,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 이들은 바벨론 신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집트 신들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누가요? 누가 그 짓 하고 있습니까? 70명의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어떻게? 향로를 들고. 에스겔 8장 11절. 왕이 빠진 상태에서, 왕이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상태에서 “안 되겠다. 민주주의로 우리 대표자가 나서자.” 그 장로들이 나서서 의견을 모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상 신들에게, 강력한 파워가 있는 나라의 그 신들에게 기도하는 거예요. 왜? 그들은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들의 신에서 효과를 봤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거기에서 선지자도, 제사장도, 왕들도 같이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의 담론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소통되는 그 개념들이 곧 인간이 느끼는 자연 질서요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체제기 때문에 그래요. 그 체제 안에서 인간은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취하면서 이 땅에서 살 맛을 느끼면서 이 땅에서 그런 안정적인 체제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겁니다. 다들 수긍하고 다들 동의하는 그 체제를 의도적으로 부정할 리 없다. 이것이 대세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대세이기도 하고요. 십자가를 말하는 자들은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를 말한다고 무작정 쫓겨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외치면서 따로 목회 한 번 성공해볼까, 이런 사람은 안 쫓겨나요. 귀신같이 알아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의 배후에 귀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교회냐 십자가냐’ 교회가 아니고 십자가다, 이런 사람은 쫓겨납니다.
■그 다음에 8장 14절에 보면 “거기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담무스라는 신은요, 수메르 바벨론 사람들이 숭배하는 식물의 신이었습니다. 잘 자라지요. 그러니 담무스라는 그 명칭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남산 위의 노루 새끼처럼 잘 자라게 해달라고 빌면 그건 교회 가서 비나 부처에게 가서 비나 아무 상관이 없어요. 무엇을 향하여 비느냐가 중요합니다. 그저 내 자식 쑥쑥, 쑥쑥, 잘 자라게 해 달라고……. 세상에 어느 부모가 “내 자식 십자가 지고 죽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제정신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정신에.
■그다음에 8장 16절에 보면 이번에는 태양신입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태양신을 섬기는 거예요. 이 태양신의 현대판이 뭐냐? 천문학자입니다. 천문학자들, 태양신, 빛을 찾는 자들, 그것도 수조원이나 하는 그런 렌즈를 우주에 띄워서, ‘제임스 웹’이라는 그런 망원경을 띄워서 기존의 허블 망원경보다 백배나 더 정확한 것을 가지고 135억 년 전에 있었던 태초의 빅뱅 시대의 빛을 찾았다고 좋~아들 하는 사람들. 천문학자, 물리학자들이 그거 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걸 희망 삼아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게 최고의 자리거든요, 최고. 일자, 궁극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는 자가 승자가 되는 시대거든요. 경쟁적으로. 인기가 있으면 돈도 들어오고요. 자본주의 시대니까 돈도 들어올 수가 있고요. 에스겔 8장 16절에 그게 나와 있지요. 이걸 보고 예루살렘, 이미 멸망해버린 예루살렘, 멸망하고 난 뒤의 성전에 가서 안쪽을 보니까 그 짓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것도 누가요?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원들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놀면서 친목으로써 국가의 권력을 탐하는 자, 일하기는 싫고 놀면서 권력까지 맛볼 수 있는 그게 없을까, 그걸 탐하는 자에요.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라는 정치학자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민주주의를 국회의원들이 가로막고 있다고 했어요. 의회중심주의가 막고 있다는 거예요.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는 게 아니고 국민들의 뜻을 오히려 발길로 되받아치는 것이 국회의원들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국회의원들이 돈 없으면 안 되거든요. 더 가진 부르주아들이 더 권력을 쥐기 위해서 국민들의 하소연을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차버리는 그것이 바로 국회의원들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그 칼 슈미트라는 사람은 히틀러를 옹호했습니다. 그 독일의 법학자가. 역시 대통령중심제가 되어야지, 통치는 총통이 해야지 국회의원들에게 맡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류 역사에서 백날 묘수를 당겨봐야 최고의 자리를 놓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그 투쟁의 장입니다. 그걸 가지고 촌에 있는 촌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출세 했다. 내 자식 출세했다.” 그렇게 말하지요. 자기 아들 출세한다고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는 생각 안 하고 내 아들 출세했다는 거예요. 이 국회의원들이 그런 짓 했거든요.
-그걸 보고 바벨론에 포로 잡혀왔던, 에스라와 함께 있던 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역시 그 본토에 있던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다 거짓선지자들이다. 하지만 진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 쪽이야. 우리는 우상숭배를 안 하고 있어.’ 이렇게 주장했거든요. 그러니까 에스겔을 그쪽 동네에 또 보냅니다. 바벨론에 보내요. 포로 가운데. 그게 12장에 나옵니다. 이쪽은 이제 예루살렘 아닙니다. 포로 잡힌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공동체 게토에요. 자기들끼리의 공동체입니다. LA에 있는 한인공동체와 마찬가지고 뉴질랜드도 마찬가지고, 저희 동네 이야기하는 거예요.
■에스겔 13장 18절에 보니까 여자 거짓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여 찾아오는 사람의 팔목에 신통력이 있는 부적과 장식물을 달아주고, 길이가 다른 각종 너울과 수건을 씌워주면서 하나님의 신탁을 액땜용 부적으로 대체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찐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하느냐.”
그러니까 이것은 본토나 여기 포로 잡혀 와서나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었어요. 전혀 달라질 게 없습니다. 똑같아요. 자,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다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이들을 전부 다 멸망시키고 그리고 징벌을 내립니다. 그런 구절들은 정말 줄 그어놔야 돼요.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보세요. 에스겔 5장 13절 누가 한번 찾아서 읽어보세요. 거기 하나님의 본심이 나와요.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내 마음이 시원하다. 하나님의 감상평입니다. 내 마음이 시원하다. 그러니 그동안 주님이 뭔가 허전했던 거예요. 허전했는데 맹렬한 심판을 하고 난 뒤에는 너무나 속이 시원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장 10-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는데 어떻게 심판하느냐 하면, 솥 안에서 고기를 태우듯이 심판합니다. “나무를 많이 쌓고 불을 피워 그 고기를 삶아 녹이고 국물을 졸이고 그 뼈를 태우고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면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되게 하라.” 솥 안에서 고기를 태워요. 삶아 죽이는 게 아니고 태워 죽인다고요. 물기 다 빠지고 그 안에서 완전히 다 탈 때까지 뚜껑 바깥으로 못 벗어나도록 그렇게 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저주받게 하기위해서 용역을 쓰는데, 회사에게 부탁을 하는데 그게 뭐냐? 이방 민족이에요. 이방 민족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치는 용역으로 사용하는 것. 에스겔 21장 28절에서 32절까지 나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배제합니다. 이스라엘을 배제하는 거지요. “인자야 너는 주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과 그의 능욕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다고 예언하라 너는 이르기를 칼이 뽑히도다 칼이 뽑히도다 죽이며 멸절하며 번개같이 되기 위하여 빛났도다 네게 대하여 허무한 것을 보며 네게 대하여 거짓 복술을 하는 자가 너를 중상 당한 악인의 목위에 두리니 이는 그의 날 곧 죄악의 마지막 때가 이름이로다 그러나 칼을 그 칼집에 꽂을지어다 네가 지음을 받은 곳에서, 네가 출생한 땅에서 내가 너를 심판하리로다 내가 내 분노를 네게 쏟으며 내 진노의 불을 네게 내뿜고 너를 짐승 같은 자 곧 멸하기에 익숙한 자의 손에 넘기리로다 네가 불에 섶과 같이 될 것이며 네 피가 나라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네가 다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라 하라.”(겔 21:28-32)
그러면 아직도 자기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이 성전이라는 것, 성전이라는 것은 솔로몬의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라고 명령했고 그 안에 계셨거든요. 그러면 이 성전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 성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숯불을 뿌립니다. 성전에다 숯불을 뿌려요. 에스겔 10장 2절,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거기에 숯불을 뿌립니다. 하나님의 성전 철수작전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전이냐? 9장 7절에 보니까 인간의 성전은 주님이 죽인 시체가 모인 곳이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그리고 9장 6절에 보면, 성전 앞에 서 있던 장로부터 죽입니다.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죽이면서 9장 10절에서 그리고 5장 13절에도 나오는데 9장 10절에서 뭐냐?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 절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죽일 때 인간적인 연정, 연민, 동정심, 그런 것 작용하지 말라. 내 일에 나는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한다, 퇴출시킨다. 인간을 배제하고 퇴출시키는 것을 고마워하라. 너희의 구원에서 네가 주인공이 아님을 도리어 감사하라.”
구원은 너의 일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일입니다. 개인이 빠져나가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되는 세계가 완벽한 왕과 완벽한 제사장이 손을 잡아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거룩이 사니까 그것이 구원의 세계거든요. 그 일을 어떻게 인간이 합니까? 인간이 할 수 없는데 자꾸 인간보고 실천하라, 말씀대로 살아라, 왜 자꾸 그렇게 닦달 내고 윽박질러요? 그러면 안 되거든요. 왜 그렇게 합니까? 목사님들에게 “왜 그런 짓 합니까?” 물어보면 “그래야 손님이 올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차라리 물어 보살, 보살집을 채우든지 점집을 채우든지 그렇게 하지 어떻게 거룩한 성경 말씀을 도용해서 점집을 그렇게 만들어요? 그것은 고객들이 그걸 원하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게 되면 고객들이 원하는 것 때문에 망했거든요.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20장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왕들을 끝까지 다 죽여 버립니다. 아까 이야기한 요시아왕이, 그 착한 왕이 죽었던 이유는 우상을 더 짓게 만들어요. 짓게 만드는 방법은 뭐냐? 바로 요시아 아들들로 왕을 세우는데 첫 번째 왕이 여호아하스, 큰 아들이지요. 두 번째 왕이 여호야김, 셋째가, 요시아의 세 번째 아들은 있는데도 왕위를 안 주고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세 번째 왕, 마지막에 네 번째 왕이 여호야긴의 삼촌이 되는 요시아의 셋째아들 시드기야가 왕으로 됩니다. 이들은 요시아가 죽는 취지, 요시아가 왜 죽는다 했습니까? 더 확실하게 멸망되어야 될 이유를 마감, 확실하게 그 증거들을 남기는 역할을 이들 요시아의 아들 세 명의 왕과 한 명의 손자가 그걸 확실히 보여줘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 무슨 이유로 왜 망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이렇게 요시아가 유다 마지막 때 성전 불타버리고 마지막 왕까지 다 불타버릴 때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없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없어져요.
왕 죽고, 성전 죽고, 다 날라 갔어요. 백성도 없고. 그 약속의 땅에는 어중이떠중이만 남았어요. 아무 의미도 없는 남은 숫자가 대략 2만 명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이것은 거의 희박한 겁니다.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선지자가 이미 예언했거든요. 이 땅이 황폐하게 할 것이다. 텅텅 비어있어요. 텅텅 비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걸 레위기에서 이렇게 했어요. 내 땅이 안식하리라.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레 26:34,35)
그러니까 하나님의 안식일은 뭐냐 하면, 인간의 흔적이 하나도 없을 때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때입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하지 마. 너, 하지 마.” 네 손때가 묻지 않은 것, 그게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거예요. “내가 배제되었구나.” “그래 바로 그거야.” “배제될만해서 배제되었구나.” “바로 그거야. 그 고백이야.” 그 고백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 나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멋진 고백이잖아요. “나는 당신에게 했는데 당신은 내게 뭐 해줬습니까?” 이런 것 말고요, 이런 것 말고. “제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 고백이 나타날 때까지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께서 우리가 한 것을 다 비워내고 걷어내고, 난리도 아니지요. 다 걷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새성전의 특징은, 텅텅 비어 있다. 안이 텅텅 비어 있어요. 이 말은, 여기에 들어갈 사람만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가거든요. 여기는 제사장들 들어가고요. 그다음에 왕이 정월 초하루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못 들어갑니다. 텅텅 비어 있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 바깥에 있지요, 바깥에. 바깥에 있어요. 그러면 새성전이 하는 역할은, 새성전이 숨을 쉬려면 어떻게 숨을 쉬느냐? 보통 우리가 심장이 멎는다든지 문제가 생기면 다리미 비슷한 것 가지고, 심장 충격기죠, 그거 가지고 활성화하잖아요. 죽은 심장을 되살리잖아요. 심장박동기 가지고. 어떻게 하면 그 죽은 심장이 살아나는가? 그것은 다윗 왕이 동쪽 문으로 들어오면 돼요. 들어오게 되면 심장은 다시 활성화됩니다. 성전이 인간의 심장을 닮았어요. 심장에 깨끗한 피가 들어오듯이 왕이, 모든 것을 항상 이기게 하는, 온 우주의, 온 지구의 우상을 다 쳐부순 그분의 공로가 성전 안에 들어오게 되면 성전 안이 활성화되면서 그 성전의 동쪽으로 개울가가 나와요. 그 개울가가 어디까지 나오느냐? 성전 바깥에 있는 그 동네를 에덴동산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 네 개의 강이 흐르듯이. 그 이야기가 에스겔의 끝 장면을 장식합니다. 물고기가 살아요. 물고기도 살아요. 사는데 갯벌은 소금기가 그대로 남겨집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겔 47:11)
그게 의미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죽 살지 못할 것을 집어넣음으로써 “살았다!”를 크게 부각시키는 작용이 새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부활해서 영광스럽지요. 따라서 이 땅의 성도는 요한계시록 11장처럼 지독한 환란과 고난 속에 놓여 있을 때 오히려 예수님의 영광은 더 빛이 나는 거예요. ‘하나님은 뭐하시노? 내가 이렇게 어려운걸!’ 이거 아니에요.
‘나는 살지 못해야 합당한 죄인’이라는 것을 더욱더 강조할 때 살려주신 주님에게는 오직 평생토록 감사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어떤 원룸 이름이 “고맙소.”에요. 그것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고 주께서 부리시는 악마까지 총동원시켜서 그렇게 만들어 버려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에게, 그 거룩한 성령 받은 사도바울에게 속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악마의 가시가 들어옵니다. 당연히 사도는 사적인 의미에서 빼달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힘들어서. ‘이거 빼주면 더 일 할 건데.’ 그래서 자꾸 빼달라고 이야기해요. 한번 해서 안 되니까 두 번, 두 번 해서 안 되니까 에이 삼세판이다, 세 번씩 기도를 합니다. 주께서 응답합니다. “됐다. 네가 약한 데서 내가 온전함이다. 너는 약하지만 나는 온전하면 그걸로 됐지 않느냐? 너는 약하다고 한다만 그것은 모르겠고 나만 온전하면, 내 은혜가 온전하면 되잖아. 네가 몸이 아파서 빌빌대더라도 그래도 구원에 상관없다.” 이게 주님의 온전함 아닙니까? “목사님, 너무 심하십니다.” 지금 저보고 심하다 하면 안 되지요. 주님 가신 길이 그 길이거든요. 십자가의 길이라는 말이지요. 주님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
요시아 그 착한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여호아하스가 본격적으로 소멸되어야 될 왕이기 때문에 요시아의 큰아들인 이 사람은 3개월 동안 왕 하다가 끝났어요. 그다음에 여호야김이 있는데 이 사람은 3년 동안은 바벨론 섬기다가 그 후에는 바벨론이 잠시 애굽에게 졌다 싶으니까 그 참에 갈아타기 해서요, 애굽 섬기다가 오히려 바벨론한테 배반당하고 애굽한테 밉상 받아가지고 애굽에서 죽었어요. 그다음에 여호야긴, 더욱더 우상숭배하고 악정을 했어요. 특히 여호야긴 이 사람이 유명한 것은 예레미아가 계시를 하니까 화롯불 피워놓고 계시 책, 두루마리를 찢으면서 “알았어” 불에 집어넣고 “또 이야기해, 또 이야기해.” 하고 또 찢어서 불에 넣고, 그렇게 한 거예요.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렘 36:22, 23) 마치 동생이 예수 안 믿는 형에게 전도한다고 전도지 주니까 “알았어” 하면서 불 속에 집어넣고, 성경 주니까 성경책도 “알았어” 하면서 집어넣고요, 그것도 보는 앞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발악을 한 거지요. 그다음에 여호야긴, 그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그 왕은 3개월 10일 동안 하고 에스겔하고 같이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그다음에 시드기야가 애굽 믿고 바벨론한테 대들다가 완전히 두 눈 다 뽑히고 보는 데서 아들들도 다 죽고 자기도 바벨론으로 가서 죽고 처참하게 그렇게 된 겁니다.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왕하 25:7)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의해서 이렇게 처형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증거가 뭐냐? 원래 바벨론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어느 나라를 정복할꼬, 하면서 갈림길에서 점을 쳤거든요. 점치는 것이 21장 21-23절에 나옵니다.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베풀며 입을 벌리고 살륙하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베풀고 토성을 쌓고 운제를 세우게 되었나니 전에 그들에게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헛점으로 여길 것이나 바벨론 왕은 그 죄악을 기억하고 그 무리를 잡으리라.” 두 개의 점을 쳤어요. 화살 가지고 점치고 그다음에 간 가지고 점을 쳤는데 그 점괘가 둘 다 예루살렘 쪽으로 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둘 다. 그러니 예루살렘입장에서는 빼도 박도 못한 거예요. 누가 그렇게 했는가? 왜 왕을 없애는가? 하나님께서 왕을 없애는 이유는 단 한 가지에요. 왕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항상 이기게 하시더라.”가 되시는 분이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없어졌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이 없어져도 괜찮아요. 왕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이점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지금 인간은 완전히 퇴출 되었지요. 인간이 배제되었지요. 여기 인간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과 하나님 두 분만 나오지요. 2절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이 구절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여기 있어야 될 이유가 필요 없다는 거예요. 나보다 앞선 분만 있어도 우리는 오케이, 해야 되고 우리가 감사해야 될 분이라는 말이지요. ‘만들어진 나에게 감사하지 말고 나를 만드신 분에게 감사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하다.’ 이게 요한복음 1장 3절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 하는 것은 ‘너는 하나님이 만들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만들었다’는 뜻이에요. 그거나 이거나 똑같은 뜻 아닙니까? 그게 똑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완전히 대비되는 이야기에요. 강조점이 어디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말은, 굳이 내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나를, 이 귀한 나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나를 무조건 책임져야 된다고 하나님께 억압을 하는 거예요. 억압을 하는 그런 건방진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없앤다 할지라도 없애시는 분이 없애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찬양해야 된다.’는 그 뜻이에요. 그게 로마서 9장 3절에 나오지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내가 백성을 위해서 저주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오케이, 내가 원하는 바로다.
그동안 내 라인 고수했잖아요. 그런데 그 우상숭배성이 그 말 한마디에 완전히 바닥나고 들통 나 버린 거예요. 은근히 이용했던 것이 그만 들통 나고 만 겁니다. 그다음 24장부터 죽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이방민족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자, 계속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왕을 제거하면서 왕 노릇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왕 노릇. 자, 왕은 어떤 왕이냐? 다윗 왕이다. ㉮다윗왕은 어떻게 한다? 다윗언약대로 한다. ㉯다윗언약이 뭐다? 항상 이기게 하시는 것. 항상 이기는 거예요. 그 이기는 결과가 이스라엘의 멸망이에요. 그래도 우리는, 이스라엘은 상관하면 안 돼요. 왜? 이기는 분만 계시면 그걸로 족해야 되기 때문에. 이기는 분만 있으면. “주님, 내 사랑하는 조건하에 주님 믿겠습니다.” 이것은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우리가 피조물 입장에서는 순서가 나중순서에요. 우리는 주택청약통장 영순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밀려요. 순위가 밀린다고요. 앞선 쪽에서 하는 행위의 결과가 우리 쪽에 오는 거예요. 올 때 앞서서 하시는 그 행위의 내용이 그대로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반복을 어떤 첫 번째 것이 출현한 이후에 그와 유사한 두 번째 것이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반복이 뭐냐? 첫 번째 것과 비슷한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반복했다고 우리는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이런 첫 번째 것과 유사한 두 번째, 세 번째, … n 번째 것들이 계속 생겨난다. 만약 이 첫 번째 항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면 반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즉 여기에서 반복은 첫 번째 항에 종속되어 있으며, 반복되는 것 자체 내부에서부터 그것을 규제하는 법칙이 아니라 반복되는 것에 대한 외적 규정일 뿐이다. 이런 반복은 법칙으로 정초(기초) 될 수가 없다. 이것은 반복되는 것에 반복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게 뭐냐 하면, 만약에 유사한 것이 뒤에 반복이 되어버리면 최후, 마지막 나온 그것으로 앞엣것을 무의미하게 퇴출해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십자가 믿고 이미 구원을 받았고, 내가 구원의 새생명에 들어갔다면 “십자가야, 안녕, 바이바이!”가 된다니까요? 그러면 십자가의 반복이 아니고 나의 반복이 되어버려요. 그게 우상숭배잖아요.
주님께서 그 첫 번째 것의 반복이라 하는 것은, 주도권이 계속 반복되는데 두지 않고 맨 처음 것으로 확정짓는 것, 첫 번째의 그 취지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나는 반복만 주께서는 인정하십니다. 그게 n번째, 수 천, 수만 번 반복되더라도 항상 그 반복의 핵심은 첫 번째 것을 잊지를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그게 바로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부활을 자랑하지 않고 뭡니까? 십자가를 자랑한다 했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만 “이 근호 목사는 아주 십자가에서 떠나지를 않네.” 이런 식으로 해요. “부활이 있는데 왜 부활 쪽으로 안가고 자꾸 십자가 거기에 매여 있느냐?”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요. 그런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본색이 들통 나 버렸어요, 자기본색이. 나는 내구원만 챙기고 입 닦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내 구원만 챙기면. 구원은 내가 살아 있으면 구원이 아니에요. 내가 독특한 죽음에 참여 못한 나를 독특한 죽음에 심판에 참여시킨 그것이 주님의 구원에 우리가 함몰되는 겁니다. 덮쳐지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행함이 아니라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으나 로마서 4장 말씀처럼 값없음을 받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로마서 4장에서 복이라고 하고 같은 말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은혜라고 한 겁니다.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쉬운 말로 하면 이걸 가지고 선물이라는 거예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으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5-8)
그래서 6페이지 계속 읽어보면 【‘반복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첫 번’으로서 기원이다. ‘한 번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 단 한 번만 등장한 채 되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은 십자가 사건의 단회성의 반복이다.】 십자가 믿고, 부활 믿고, 재림 믿어야 되지 십자가 믿고 부활 믿다가 재림 안 믿으면 탈락, 이렇게 되면 안 되지요. 십자가 믿고 지나가 버리고 됐고, 부활 믿고 새생명 믿고 지나가 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한복 단체로 맞춰 입고 재림 기다리는 거예요. 이게 자기 구원에 미쳐 있는, 자기 성공에 미쳐 있는 정신병자들의 집단이지요.
6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따로 거두어내시면서 그 영광성이 떠나는 코스를 보좌의 이동과 더불어 보여주신다.】 보좌 이야기가 1장에도 나왔지만 10장에도 다시 두 번째 나옵니다. 왜 두 번째 나오는가? 보좌 이야기가 1장에만 나오면 되는데 왜 두 번째 나오는가? 그것은 첫 번째 보좌의 천사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냈는데 그 성과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성전을 불태우는 그 작업을 하나님의 천사들의 작품으로, 업적으로 남기기 위해서 두 번째 등장한 겁니다. 보좌가, 형상이 그냥 놀고 있는 형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 속에 역사적인 산물을 남기는 데, 실제적인 역사적인 산물을 남기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성전이 불타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손으로 하나님 자기 집을 태운 겁니다. 더럽다고, 우상덩어리라고 집 태우고 사람 태우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뭐냐? 바로 이스라엘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 없어지니 걱정되지요?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또 반복인데, 이스라엘 없어져도 괜찮아요. 하나님께서 준비한 왕이 등장합니다. 그 준비된 다윗 왕이 뭘 했는가? 내가 이스라엘을 불태워버렸다는 그 왕이 이제는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 인자하고 바통 터치에 들어가지요. “됐다. 수고했다. 이젠 내가 할게.” “뭐 하시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새로 만들게.” “어디에서요?” “골짜기에서” “골짜기에 뭐가 있는데요?” 거기 폐기물, 인간폐기물, 바짝 마른 인간폐기물, 뭐지요? 그것이 바로 해골이에요. 해골 뼈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어요. 거기에 인자를 데려갑니다. 바통터치하기 위해서. 드디어 인간적인 요소가 다 떨어져 나가요. 인간퇴출, 인간배제, 인자도 “고생했다” 하고 빼냅니다. “너 할 도리는 다 했어.” 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나한테 맡겨둬.” 그렇게 하면서 에스겔에서 인자라는 호칭을 하나님 자기 쪽으로 당겨버립니다. 당겨버리면 천사와 인자의 만남이 새로운 언약에 의해서만 주어집니다. 그 언약이 뭐냐? 에스겔에 나오는 그 언약이 뭐냐? 바로 새언약입니다, 새언약. 새언약의 특징은 그 안의 내용이, “사람하고는 일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내 영을 부어주겠다.” 새 영이에요, 새 영, 새 신, 또는 신약에서 뭡니까? 성령, 성령이 오시면 누구든지 인자가 되고, 선지자가 되고,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에스겔 37장 봅시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에스겔, 하니까 이 대목만 생각난다는 거예요. 이 대목이 신나려면 본인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구경하는 인자는 안돼요. 인자는 이미 주님 쪽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인자, 관람자가 되면 안 되고 그러면 우리의 위치는 어디냐? 37장의 그 골짜기에 같이 섞여 있으면 돼요. 어떻게 실눈 뜨고? 아니요. 실눈 뜨지 마세요. 실 눈 뜨지 마세요. 그냥 뼈로 분해되어서 조각조각 난 채로 엉치뼈, 다리뼈, 갈비뼈, 해가지고 그냥 던져 지세요. 혹시 또 살 수 있도록 단백질, 아미노산 이런 것, 축축한 습기 같은 것, 물 같은 것 묻히고, 아니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바짝 말라야 돼요. 일체의 살 여망이 없어야 돼요.
나는 일체의 살 여망이 없는 골짜기의 바짝 마른, 특히 이스라엘의 골짜기는 얼마나 온도가 높은지요. 섭씨 40도를 초과합니다. 2월에도 섭씨 35도가 나갔어요. 갑자기 또 이스라엘 갔다는 이야기 끄집어내는 데요. 무지무지 더워요. 증발되어 버려요. 하나님이 에스겔 보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보고, 또는 예수님이 성령보고, 성령이 예수님보고 이야기하는, 대화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을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바짝 마른 뼈는 하나님의 신을 안 받았거든요. 그래서 질문을 합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그 때 답변하는 그것을 한번 보세요. 에스겔이 어떻게 답변합니까? 에스겔 37장 3절에,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런 답변, 회피하는 답변, 회피인 듯 회피 아닌 회피 같은 답변, 이 답변이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하고 대화할 때 또 나오지요.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왜 이렇게 회피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자기가 퇴출된 자고 배제된 자인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내 쪽에서 쓸데없이 말을 “이렇게 됩니다.”라고 내 의견을 제시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성도의 삶은 날마다 배제된 삶이어야 돼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께서 아침에 된장국 끓여줬습니다.” 식당 주방장 바뀐 것 같아요. “주께서 바꿔주신 것 같습니다.” 전과 맛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전보다 조미료가 좀 덜 들어간 것 같아요. “이게 전부 다 주께서 하신거지요?” 그래서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말은 “어떤 결과가 되든 제가 거기서 평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먹겠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4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인자라는 분이 말씀을 대언합니다. 신약에 와서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왜? 살자는 살리기 위해서.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인간들은 살 것이요, 그렇지 않은 인간들은 못 알아들을 것이다.” 이게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에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거예요.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26, 27)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그 말은 너희들 가운데 영생 받기로 작정된 자,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은 자가 누구냐를 찾는 방식이 사도를 통해서 주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는 방식이에요. 그러면 이 땅에 대언자가 누구냐? 여러분! 여러분들이에요, 여러분! 어떤 목사님이 말씀을 대언하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그 때까지 했겠고 다음 주일날 또 대언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30년 동안 강단에 서서 복음 전했잖아요. 그런데 그다음 주일날, 8월 7일 날 복음 안 나오면 땡, 탈락이지요. 말씀이 나와야 대언자지 옛날에 30년 해먹었다, 많이 해먹었다, 이것은 소용없습니다. 건전지 밧데리 나가면 어떻게 할까요? 갈아치우면 되는 거지요. 갈아치우면 되지요. 그게 요한일서 2장 27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곧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님께서 친히 너희를 가르치실 것이다. 네가 바로 똑같은 원칙으로 세상에 나서라. 네가 잘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주께서 그게 하신 일이라면 “그동안 감사합니다!” 하고 은퇴하면 되지요. 은퇴했는데 은퇴한지 2주 만에 또 나오더라. 그러면 또 서면되고. 꼭 천사 같아요. 유동적이라. 고정적이 아니에요. 플럭스(flux)니까, 흐름이니까, 어디로 튈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살아난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10절에 보면 “큰 군대” 그 군대가 뭐냐? 이게 바로 옛날 이스라엘의 전쟁하는 왕에게 종속된,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큰 군대,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이기게 했던 그 군대, 다윗의 군대, 다윗의 군대는 다윗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왕이 있기에 왕에게 철저하게 종속되는 그 군대, 그 왕을 신약에서 사도행전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바로 주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고 그 주가 뭐냐? 우리의 왕이시라는 뜻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국적이 하늘나라 국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어요. 빌립보서 3장 20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하늘에 있지 대한민국 국적이 아닙니다. 잠시 걸쳐놓은 거니까 이 사회라는 여기에 구애받지 말고, 종속되지 말고 마음대로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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