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무게
2022년 7월 3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19-25
(2:20)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2:2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2:23)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2:24)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2:25)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오늘 분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고 질책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자신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았노라고 변명할 여지까지 하나님께서 미리 단죄하십니다. 이는 인간들이 자생적으로 섬기고 싶어하는 신은 오직 우상뿐임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해두시는 겁니다.
우상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참된 하나님을 믿을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즉 인간에게 신앙이라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미 믿는 대상이 태어나면서 점점 구체화됩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믿고 지키는 그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라고 거론한 것은 모조리 우상입니다. 예수가 되었든 성령이 되었든 삼위일체 하나님이 되었든간에 인간은 우상입니다. 우상 외에는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참된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숨어서 뭘 하시지요? 숨어서 인간이 믿는 우상을 키우도록 자극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계속 인생을 더 살게 하시면서 죄를 짓고 우상을 믿는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일체 인간쪽으로 참된 하나님으로 넘어오는 일이 없게 하십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지켜야 될 자아’가 형성되는 것은 어릴적부터 가정 속에서 키워져 온 겁니다.
여기서 인간은 어른이 되어서도 ‘가족 이야기’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릴 적부터 내가 속한 가정과 가족을 지키고 키우는 그 책임과 책무를 갖게 됩니다. 인간의 정신의 바탕은 이런 자세로 깔려 있습니다. 문제는 대자연이 이런 인간의 여망에 호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그 행복은 가장 내부적으로 자기 가족이 멀쩡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인간 세계를 둘러싸서 작용하는 이 대자연은 모든 게 덧없고 허망합니다. 무의미합니다. 여기서 부조리함, 즉 논리에 맞지 않는 혼돈과 무질서이 발생합니다. 이 덧없음과 마주하면서 인생은 늘 긴장하고 지쳐버리기 마련입니다.
갖가지 무질서하고 무의미한 대자연의 변화에 마주하면서 인간들은 자신의 작은 행복이라고 챙기려는 요령같은 것을 고안해 냅니다. 예를 들면, 인생이 무거운 돌덩이를 산 정상까지 올려놓아봤자 운명이 시기하면 도로 제 자리로 굴러떨어지는 이 낭패를 예상하면서, 그러면 산 정상까지 올라가지 말고 산 중턱까지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을 그것마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환경으로 자극하고 욕망을 현재 욕망으로 멈추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스스로 평하기를 욕심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고 해도 예측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면 어김없이 앞뒤 돌아보지 않고 순간적으로 자기 원칙을 배신합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사이라도 법정에서 범죄 혐의자로 만나게 되면, 자기에게 범죄의 책임이 돌아오지 않도록 친구 배신하는 것은 허다한 일입니다. 귀하디 귀한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지키는 것으로 시작한 인간이 자기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자기의 자리에는 그동안 모아놓은 자기 의로움과 자기 가치와 자기 올바름이 제대로 된 평가를 기다리면서 고이 모셔져 있습니다. 곧 자기를 신봉하는 ‘자기 신전’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세로 인하여 존재는 무게는 갈수록 늘어나게 됩니다. 분노가 짜증이 계속 증가하게 됩니다. “제발 날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외침으로 자기 의사를 드러냅니다.
이 피해는 주변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렘 2:22)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 일이 참으로 합당한 일로 여깁니다. 결코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그마한 실수나 후회될 일이 있으면 그 죄를 지우기 위해 온갖 거룩스럽고 경건한 일을 다합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 보시기에 평소에 이 사람은 자기를 일단 우선적으로 지키고 싶어하는 ‘우상숭배자’인 겁니다. 반성을 하던 회개를 하던 무엇을 하던 그동안 유지시켜온 존재의 무게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의도로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즉 이 세상 그 어떤 일더라도 나를 지키는 일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늘 명심하고 살아온 겁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하나님 믿는다, 예수 믿는다’고 한다면 참 신기하게 봐야 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자기 지킴’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가가 참으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죄 용서함을 마가복음 2:10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즉 중풍병자가 자신의 병을 고쳐오는 것 자체가 이미 죄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중풍병에게 있어, 중풍병 걸린 것 말고는 별로 문제될 게 없는 인생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 사함’은 일방적이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자기를 지키는 것조차 죄가 됨을 말입니다. 즉 내가 지금보다 더 잘된 케이스가 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는 것은 평소에 내가 믿는 신이 제대로 된 신이 아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는 경우라도 ‘내가 무너짐’을 양보 안 합니다.
내가 무너지면서까지 하나님을 섬길 마음은 추호도 없는 겁니다. 이런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의 죄사함 방식은 하나님쪽으로 무너져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쪽에서 망가져 버리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무도 해도 자기라는 굴레에서 빠져 나올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방식이 십자가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은 이런 방식의 죄사함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3-5)
즉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지켜보려는 것이 곧 참된 하나님을 핍박하는 결과로 이어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스스로를 우리가 혼낼 것이 아니라 남은 여생을 통해서 더욱 더 죄에 대해서 알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예레미야 2장 20~25절(말씀의 무게)22073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장 20~25절입니다. 구약성경 1052페이지입니다.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가겠노라 하도다”
오늘 본문이 길지만 간단한 것은 어떤 점이 간단하냐면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막혀있고 인간에게는 신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이 참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느냐 하면 본인이 이미 우상을 섬기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참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태생이 우상을 좋아하지 진짜 하나님은 안 좋아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숨어계시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살아가게 되면 우상부터 먼저 만나지 하나님부터 먼저 만나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우상이라는 것은 성경에서는 우상이라고 하지만 이방 민족에게는 어차피 자연스러운 것이 신입니다.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기면서도 하나님의 위치를 체크하고 싶고 하나님의 나라를 장악하고 싶은 본성이 인간에게 우선적으로 인간이 발휘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우상밖에 다른 것은 섬기지 않습니다. 오직 우상만 섬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주변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게 되면 이상스럽게 여기시면 됩니다. ‘고뢔~~?(정말이야?) 세상에 하나님 믿는 사람도 다 있어요?’라고. ‘나는 예수를 믿어’라고 하면 ‘그래? 그것은 참 신기한 일인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지? 이건 참 신기한 일인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평소에 인간이 자아(자기)를 지켜왔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기도 지키고 하나님도 지키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지킬 자아가 없어질 때 그때 화를 내면서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내가 그렇게 소중하고 사랑하는 나를 없애느냐고 그렇게 달려들 때, 그래서 손톱 가지고 예수님 가슴팍에 상처를 낼 때, 그 상처를 보고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내가 웬수였구나. 내가 우상 숭배자고 내가 주님의 원수였구나’라고 들통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맛보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내용은 이렇게 되어있어요. 성경 전체 내용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쪽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자는 쪽으로.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이 자기 안에 잠복 되어있다는 죄를 계속 끄집어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속 자극을 줘요.
그러니까 신앙생활 잘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흔들기 들어가 버립니다. 제대로 하고 싶어도 세상 살아가게 되면 성질나게 되어있어요. 제발 곱게 나를 놔주면 되는데 절대로 세상은, 하나님은 나를 곱게 놔주지를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뜻은 네가 고대하고 기대하는 이 세상 자체가 함께 더불어서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 세상인 것을 네가 혹독하게 그것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을 차버리고 바깥으로 뛰어나올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예수 믿고 싶어도 환경이 우리를 놔주질 않습니다. 꽁꽁 묶어버립니다. 20세기 초반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 그림이 도난당한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 도난사건에서 누가 휘말렸느냐 하면 피카소가 휘말렸어요. 경찰은 피카소가 용의자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어요. 피카소 아시죠? 스페인 화가이지만 프랑스에 와서 활동했습니다.
그 피카소를 조사하기 전에 먼저 기욤이라는 시인이자 잡지사에 투고하는 작가를 먼저 체포해서 그다음 피카소를 참고인으로 불렀습니다. 둘은 죽고 못 사는 친구였습니다. 정말 친한 친구였어요. 그런데 거기 판사가 있고 경찰이 있는데 그곳에 피카소를 참고인으로 불러 가지고 묻습니다. “옆에 있는 기욤이라는 사람을 피카소 당신은 아십니까?” 가운데 판사가 있고 양측에 서로 마주 보며 피카소와 기욤이 앉아 있는데 판사가 물은 거예요.
수십 년 친구였는데 피카소가 이렇게 말해요. “나는 본적이 없습니다”라고. 왜냐하면 친구가 모나리자를 훔친 자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피카소 있고 경찰 있고 이렇게 배치된 상황에서 친구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모가지를 쏙 빼고 피카소를 쳐다보며 ‘나 몰라?’라고 표정을 보내는 거예요. 그러나 피카소는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단호히 “저 사람 모릅니다”라고 하죠.
둘은 친한 친구 사이에요. 하지만 모나리자 도난사건 때문에, 그 새로운 사건이 난입하니까 본성이 드러난 거예요. 지켜야 한다. 이 자아를 지켜야 한다. 가치 있게 지켜야 한다.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나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그게 바로 종교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심이에요. 챙길 대상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나 자신’
그걸 어디서 그렇게 배웠느냐 하면 크면서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배웠어요. 그래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정신분석학에서는 ‘가족 이야기’라고 하는 겁니다. 또는 프로이트는 ‘가족소설’이라고 그렇게 명칭을 붙였어요. 가족 이야기. 뭐냐 하면 여러분들의 꿈속에 90퍼센트 이상은 여러분 꿈속에 가족 이야기뿐입니다. 왜 가족 이야기와 꿈이 그렇게 정신병이 되었는가. 그것은 나는 세상에 어릴 때부터 가족에서 태어났고 가족 중심인데 세상은 냉정하게도 가족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지켜야 하거든요. 나를 지켜야 해요.
지켜야 하고 챙겨야 하는데, 평소에 늘 지켜야 한다는 그것이 밤에 꿈속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단련시킵니다. 자기가 본능이 되는 거예요. 꿈에라도 나는 지킬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나와 내 가족이다. 그런데 세상에 어떤 낯선 환경이 왔을 때 그 낯선 환경에서 나의 가족 이야기를 저해하고 비난하고 공격할 때 대항할 힘이 없다면, ‘너, 모나리자 훔쳤지?’라고 공격할 때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뭘 하느냐 하면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라고 하죠.
저 사람을 아는데 모른다고 할 때 그게 바로 정신병입니다. 정신병이 살짝 드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진리가 뭐냐 하면 인간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말이 인간을 갖고 논 거예요. 신이, 보이지 않는 우상이 나를 갖고 논 겁니다. 그게 가족 중심으로 시작해서 그걸 확대해 나갑니다. 이번에 스리랑카에 부도가 났는데 그 나라 대통령부터 내무부장관 모두 가족이었습니다. 부도나서 모두 도망가고 그랬죠.
내 가족이 어느 정도 클 수 있는가. 완전히 국가 전체를 우리 가족 중심으로 만들 정도로 키운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상황을 보면서 이렇게 평했어요. 세상은 부조리한데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행복을 원하고 있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은 허망하고, 아무 의미 없고, 부질없고, 나는 행복을 원하는데 세상은 전혀 행복스럽지 않고 무의미하고 허망하게 돌아가는 것에서 생기는 마찰 때문에 세상은 부조리한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해답이 없어요.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평가하긴 하지만 전혀 해답은 못 내놔요. 그러니까 성경적 해답이 뭐냐 하면 ‘네가 뭔데 너의 행복을 원하느냐?’라고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 세상 철학자들과 세상 사람들은 강력하게 거부하는 거예요. 네가 뭔데 행복해야 해? 네가 행복해야 할 정당성을 내놔봐.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 아무도 못 내놓습니다.
자이언티가 ‘행복 하자. 아프지 말고. 우리 아버지는 운전사’ 뭐 이런 거 다 좋은데 네가 행복해야 할 이유를 대봐. 당연히 이유를 못 대죠.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 중심, 내 가족 중심으로 키워왔기 때문에 그게 하나의 폐쇄적인 신이 된 거예요. 내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신은 참 좋으신 신, 그게 이미 신으로 확정되어 버렸어요. 그러니 그런 마음 가지고 교회 나와서 기도를 해보고, 헌금하고 전도를 하고, 선교하고 해봤자 항상 기본 원칙은 있어요. 이 모든 것이 ‘행복 하자. 아프지 말고’라는 그쪽으로 전부 다 내려가는 거예요.
믿음이요? 없습니다. 신앙? 없습니다. 주님 사랑? 거짓말이에요. 이미 자기의 믿을 것이 확정되었는데 무슨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또 어떤 고대에서 내려오는 교훈 같은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힘들게 돌덩이를 굴려서 정상까지 올려놓으면 신이 질투해서, 그때는 운명이라고 하지요, 운명이 나를 질투해서 내가 정상까지 올려놓은 돌덩이를 다시 밑으로 내려버리면 늘 매일같이 반복되는 것이 올려놓았던 그 욕망을 이루지 못해서 결핍을 느끼면서 또 힘들게 무거운 돌을 올리고 신은 또 그것을 버리고 그것을 되풀이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시지프스의 신화라고 해서 그리스의 교훈입니다. 그런 이야기 하니까 어떤 사람이 아이디어를 냈어요. 돌을 정상까지 올리지 말고 중간까지만 올리고 나서 거기서 쉼을 얻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했어요. 이런 아이디어가 일리 있는 것 같지만 이건 너무나 자기를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자극해서 중간쯤에서 토끼처럼 앉아서 쉬도록 그렇게 하지 않고 밑에서 거북이가 따라오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서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남들에게 휘둘리면서 내 뜻대로, 내 원대로 되지 못하고 세상 흐름대로 탁류에 휩쓸려 갈 수 있는 게, 이게 인생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내 맘대로 스톱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을 조정하죠. 그런 게 아닙니다. 세상은 나를 밀어내는데 그렇게 밀어내는 세상에 그 동기가 아무 의미가 없어요. 허망함이 나의 행복을 늘 조롱하고, 늘 와해시키고, 무산시키고, 해체해 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의 마지막은 뭐냐 하면 절망입니다. 왜 절망인가.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인간 사회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저주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다 해놓은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는 건데 여러분이 딱 봐도 이스라엘 욕하는 이야기죠.
그 이스라엘을 욕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욕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함으로써 세상은 원래 망하기로 확정했음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유가 있어야 하겠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우상 섬겼다는 명목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해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23절에 보면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라고 되어있거든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자기변호에 나섭니다. 절대로 저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올 때 ‘너도 일리가 있구나’라고 나오시는 것이 아니고 “그래? 네가 아직도 너의 주제를 모르는구나. 네가 하나님을 안 섬기고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내가 인생을 계속 살게 해주면서 죄짓는 기회와 우상 섬기는 기회로 내가 너를 몰아넣을 게”라는 것이 하나님의 조치예요.
참 친절하신 하나님이에요. ‘제가 언제 나쁜 짓 했습니까? 내가 언제 예수 안 믿고 부처 믿었습니까?’라는 말들을 수학여행 때 절에 가는 그런 모습을 다 보이게 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불교라는 것을 공부해 본 적이 없는데 행동은 하나하나가 불교적 행동이라고 평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본색을 다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떤 해답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지금 하나님께서 계속 죄로 몰아넣는 이유는 이겁니다. 자기 가족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여기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해요. 노력하다 보면 인생의 무게, 중량이 많이 나갑니다. 이게 인생의 무게예요.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남들이 나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본인의 중량이 너무 많이 나갔어요. 80, 90, 100, 120킬로. 너무 비만이에요. 존재의 무게가. 육체의 무게 말고. 존재의 무게가 너무 비만입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채우고 또 채우는 거예요. 그 채우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정당성, 자기 의로움, 나는 바르게 살았다는, 우상 섬긴 적이 없다는, 나는 이웃을 해롭게 한 적이 없다는, 나는 주께서 심어준 선한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 부지런히 했다는 이런 거, 오늘 본문에 21절에 나오는 포도나무가 이런 거죠. 나는 꾸준히 노력해 왔다는 그런 이야기를, 내가 어디를 봐서 죄인이냐는 그런 쪽으로 반발이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게 바로 지킬 네가 너무 귀한 것들이 많이 모여있고 자기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와 가치가 지금 와서 버리기에는 그동안 노력한 것이 아까워도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인간 존재의 무게가 아니고 말씀의 무게입니다. 존재의 무게에서 말씀의 무게로 바뀌는 방식이 있습니다. 22절에 나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이 말씀이 좀 어려운 말씀인데 뭐냐 하면 손에 때가 묻어있을 때 사람은 가볍게 여겨요. 그러니까 자기 존재의 무게가 ‘내가 뭐가 무거워. 난 항상 가벼워’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막상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래서 자기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면 이 가벼운 먼지 같은 것은 후딱 털어내고 씻으면 된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자기 잘못과 과오를 반성하는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기존에 자기 존재 무게를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회개하며 씻어내요.
씻어내는데 비누를 한 10개는 동원해요. 하이타이, 유한락스 동원해도 동원하면 할수록 죄 씻고 난 뒤에 그 죄를 반복하지 않아야 하는데 반성한다고 눈물 콧물 쏟아가면서 ‘내 죄를 잘못되어서 반성합니다. 주님이여,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반성합니다’라고 그렇게 반성할 때 그 반성의 대상이 되는 그 십자가 예수가 우상이에요. 주께서는 그런 반성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은 멀뚱한 거예요. 주님이 언제 반성하라고 했느냔 말이죠. 반성이 안된다고만 했지 반성하면 죄를 씻어준다고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하시는 거죠. 네가 평소에 어릴 때부터 다른 신을 섬긴 것이 아니냐는 거죠.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그런 신? 이런 말도 안 되는 개그가 다 나오네요. 네가 지금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섬겼으니까 자꾸 반성하고 회개하고 하는 그런 목적이 뭐냐. 너의 존재 무게에서 지금보다 손실되지 않기 위해서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기도원에 가서 철야 하고, 그것 때문에 수련회 참석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뭔가를 만회해 보려고 하는 거죠. 도대체 뭘 만회하려고 하는데요? 자존심, 내 명예, 남들이 얼마나 나쁘게 볼 것인가 하는 평가를 이참에 화끈하게 반전에 반전을 기하고 완전히 뒤집어엎어서 나는 당신 보는 것처럼 그렇게 무시당할 대상이 아니라고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일부러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줘요. 갑자기 일이 안 풀립니다. 그때는 막 엎드려서 기도도 해요. ‘주여,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면 회개하겠습니다’라고. 그러면 주께서는 “그렇지, 그렇지, 봐라~네가 우상 섬겼잖아. 내가 요구한 적도 없는데 씻었잖아. 네가 반성해서 너의 존재 무게를 지키려고 하는 것 좀 봐”라고 하시면 ‘저는 우상이 아니고 여호와를 섬겼습니다’라고 하면 “그래, 그 여호와가 우상이라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뭐냐. 하나님은 진짜 죄 씻는 방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게 마가복음 2장 10절에 나와요.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끝났죠. 주님께서는 중풍 병 고치러 오는 사람에게 죄 사함을 주었어요. 인간이 요구한 것 말고 다른 것을 줘버렸어요. 중풍 병을 낫게 기도하러 온 사람은 다른 것을 계산한 겁니다.
‘내가 여기 다른 것은 문제가 없는데 중풍 병만 나으면 나는 얼추 괜찮은 사람으로 존재의 무게 유지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중풍 병 고치러 온 그 자체를 죄로 봤어요. 중풍 병, 암 고치러 온 자체를 죄로 본 겁니다. 암 낫는 것은 죄가 아닌데 그것을 낫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그 자체를 죄로 본 거예요. 그 죄는 아무리 회개한다고 해도 병은 나을지 모르지만 죄는 씻어지지 않습니다.
죄는 주님 자신이 허물어지셔야 해요. 우리는 허물어지지 않으려고 고집부리고 있습니다. ‘더 망가지면 안 돼. 여기서 더 밀리면 안 돼. 여기서 더 무너지면 안 돼’라고.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진짜 하나님은 자신이 ‘내가 무너질게’라고 하시며 와장창 무너지셨습니다. 이게 바로 사울에서 바울 된 순간입니다. ‘내가 잘난 나를 지키려고 주님을 핍박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여러분 죽는 순간 전에 이런 순간 왔으면 정말 기적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진짜 죄용서 받으면 주께서 남은 인생 주시거든 죄가 뭐냐는 것을 아는 죄를 짓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거는 내가 내 힘으로 씻을 수 없는 죄들이 나오도록 주께서 자극해줄 때 우리 존재의 무게는 날아가 버리고 주님 십자가의 무게 안에 가볍게 합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으면, 주여, 성령으로 바꿔주시길 원합니다. 회개하는 내 모습 보고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이게 나를 지키고 나의 가치를 지키는 우상이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