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과 언급
2022년 8월 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26-28
(2:26) 도둑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 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들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느니라
(2:27)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은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2:28)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이스라엘에 우상들이 어지간히도 많습니다. 모든 성읍들만큼 넘쳐납니다. 왜 이스라엘은 그 나쁜 우상을 집단적으로 섬기는 걸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렘 2:27) 즉 특정 우상이 하나님보다 더 낫다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등 돌려버리면 그것이 어떤 신이든 우상이 됩니다.
방향히 하나님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쪽에서 율법이 쏟아져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옳고 바른 소리라도 자꾸 쏟아지면 잔소리가 됩니다. 사람이 어일 때에 부모와 같이 시장이나 백화점에 물건 사려가면 마냥 즐겁습니다.
하지만 청소년이 되면서 부모와 같이 물건 사려가면 자꾸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어른들의 취향과 본인의 취향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강요가 잔소리로 들려오고 거기에 대한 아이들은 반격을 가하게 됩니다. 자기 결정권과 자기 존엄성이 지켜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선택이 공격처럼 여겨지게 마련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으로 넘어오면서 일어나는 변화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악마는 인간의 존엄성을 자극했습니다. 피조물로 살지 말고 하나님으로 살아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신이 독점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인간 자기 안으로 가져오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더는 신의 지시를 받는 자리에서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인간의 독자성 자체가 문제성 있다고 지적하는 겁니다. 인간의 선택과 결정은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런 지적에 대해서 순순히 하나님쪽으로 돌아걸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더 하나님과 멀리합니다. 즉 인간에게 우상섬김을 필연적 속성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쪽으로 오지 않으려는 인간의 태도는 애초부터 확정적입니다. 인간들이 나무를 섬기든 돌을 섬기든 그런 것을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만 하면 숨 쉴만하다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이 본심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인간은 더욱더 우상쪽에 마음두게 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통째로 우상숭배를 하는 걸까요? 개인 문제는 개인의 의지적으로 결정지으면 그만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스라엘은 떼로 다 우상숭배라고 단정될 만한 자들이 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은 본인의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붕어빵이 만들기 위해서는 붕어빵틀이 있어야 하듯이 환경이 사람을 만듭니다. 즉 세상이 마음을 만들지 결코 세계가 사람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붕어빵틀이 있을 때, 붕어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러나 붕어빵틀 안에 빈 공간에서 재료가 들어가면 비로소 붕어빵이 생겨납니다.
그러니 붕어빵은 붕어틀과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만약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되면 이것은 일종의 왕따며 죽음입니다. 이것을 ‘소외’라고 합니다. 인간은 소외되면 안 되기에 대세따라 움직입니다. 어떻게하든 세상을 따라잡을려고 합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이 소외를 체계화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르크스(Marx, K., 1818 ~ 1883)라는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면서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소외, 즉 배제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본을 누적해서 지니고 있는 부자들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계, 즉 생산수단을 그들만 갖고 있기에,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들은 그저 노동력만 제공할 뿐입니다.
이러다보니 단결해야 될 노동자들은 서로가 경쟁상대가 되고 적이 되어 단합될 수 없는 형편에 있습니다. 어떻게든 자본가에게 잘 보여서 계속 자신의 노동의 값을 받아내고 싶어, 자진해서 노동 단가를 낮추기까지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추가적인 이익을 그대로 자본가의 수입이 되며 날이갈수록 자본가는 더많은 생산수단을 소유할 기회가 늘어날 뿐입니다.
이것이 노동자라는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다같이 경제계로부터 소외당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내놓은 대책은 이런 겁니다. 아예 사유재산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격입니다. 어차피 내 것이 못되는 것 다같이 못갖게 하자는 겁니다.
문제는 여전히 인간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에서 스스로 힘으로 못 빠져나온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쪽으로 등 돌리지 않는 한 모두 우상숭배로서 한통속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바는, 율법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사적인 이익으로 파악한다는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개인적인 의를 따로 갖기 위해 율법을 이용하려는 생각을 지녔다는 겁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결정지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즉 이미 전체적으로 인간은 죄와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사적으로 준수해서 그것으로 사적으로 이익을 볼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여기에 ‘의’가 나옵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개별적으로 율법을 지켜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용’과 ‘언급’이 상호 다릅니다. 예를 들면, “ ‘미닫이’를 소리나는 대로 적으세요”라는 문제가 나왔다면 답은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미다지’, 또 다른 답은 “드르륵”입니다. ‘미다지’는 (개별적)사용이요 ‘드르륵’은 업급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사용차원이라면, 나의 죄에 대해서 십자가 피를 적셔 용서받는 이익을 얻고자 할 겁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전체 언급은, 십자가에 내 자신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언급하는 바가 바로 일체 인간의 율법준수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빛과 같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빛이 되는 동시에 세상은 동시에 어두움이 됩니다. 마치 해가 지면 모든 세상이 밤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해가 어디있는가를 묻지 네가 어떻게 행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를 안다면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그것은 주님의 의임을 알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태양이 아니라 태양의 혜택을 입고 살고 있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예레미야 2장 26~28절(사용과 언급)22080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장 26~28절입니다. 구약성경 1052페이지입니다.
“ 도적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 왕들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느니라,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은 내게로 향치 아니하다가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뇨 그들이 너의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너의 신들” 너의 우상의 숫자가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라고 했어요. 이건 이스라엘의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 섬기는 지역으로 그렇게 일괄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원하는 섬김의 기준에 그들이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그러한 참뜻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여호와를 어떤 식으로 섬긴다고 해도 하나님에게는 그저 우상에 해당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 듣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상이라고 단정 짓는 이유가 27절에 보면 나옵니다. 방향성을 보고 우상이냐 아니냐는 판단하셨는데 그 방향성을 보면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라고 나오는데 나무와 돌에게 빈다고 단지 그게 우상이 아니고 그다음에 나온 말이 중요합니다.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라고 나옵니다. 등을 돌린 겁니다.
하나님 쪽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쪽을 향하여 그들이 바라보면서 신을 찾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는 이유가 있겠죠. 그 이유는 하나님 쪽으로 향해서 빌고 싶어도 영 내키지를 않는 거예요. 그것을 신명기 4장 16절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그들이 부패했다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쪽으로 돌리지 않고 반대로 가는 것을 부패한 마음을 가져서 하나님 쪽으로 향하기를 거부하는 그런 본성같은 것이 인간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대충 결론이 났을 거예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딱 하나님 뜻에 부합 합니다. 우리는 우상밖에 섬길 신이 없다. 왜? 그것은 우리 본성 자체가 우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 쪽으로 돌려버리면 거기서 뭐가 쏟아지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쏟아지죠. 그런데 하나님 쪽으로 돌리지 않으면 뭐가 쏟아지느냐 하면 아무런 말씀도 쏟아지지 않고 인간들이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고 선호하고 편리한 거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이 고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지만 자녀를 데리고 백화점에 갈 때, 어린아이의 물건 구매하는 모습과 어른이 되어서 물건 구매하는 모습이 어떤 차이가 나냐면 어릴 때는 부모가 ‘이걸로 해. 저거 입어. 이거 사’라고 하면 아이들은 그냥 부모가 사준다는 그 자체만으로 감사해서 ‘예~’라고 하면서 고분고분 받아들입니다. 요새 아이들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요.
그런데 좀 컸다 싶으면 ‘이걸로 해. 저거 입어’라고 하면 ‘내가 엄마와 백화점 안 온다고 작심한 이유를 알겠죠?’라고 나오죠. 무조건 엄마가 하는 것은 구세대이기 때문에 신세대의 감을 못 잡아요. 그래서 엄마가 제공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무조건 거부대상입니다. 그 물건에 대해서 단호하게 ‘노!’라고 대답하죠.
하나님 쪽에서는 말씀이 쏟아져요. 일종의 잔소리같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오는 잔소리는 나다움에 결정권과 자기 선택권이 개무시당하는 겁니다. 뭐, 로봇도 아니고 사람이라면 자기 결정권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자꾸 불꽃이 튀고 차이가 나니까 하나님 말씀에 언제까지 질질 끌려갈 이유가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한 마음가짐은 바로 창세기 3장에서 악마가 인간을 회유하고 접근할 때 썼던 방법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너는 언제까지 하나님에게 끌려다닐 피조물이 되겠느냐? 차라리 이참에 독립해버려라. 방법을 알려줘? 먹지 말라고 하는 거 있지? 그 먹지 말라고 하는 거, 그것 안에 네가 신이 될 수 있는 지식이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거야. 따라서 그 먹지 말라는 것을 네가 도리어 취득해 버리면 너는 하나님 지시 필요 없이 독자적으로 신이 될 수 있는 거야.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창세기 3장 이야기로만 국한되는 것으로 보이죠? 우리 일상입니다. 그들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을 안 섬긴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려울 때 나를 섬긴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들이 어려울 때 나를 섬긴다고 되어있어요. 예레미야도 그렇고 역대하 33장 6절에서도 선지자들이 우상을 섬기는 사례들을 계속해서 언급하는 이유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들을 마음 자세가 아예 안 되어있어요.
예레미야 32장에 33절에도 보면 “그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고 얼굴을 내게로 향치 아니하며 내가 그들을 가르치되 부지런히 가르칠찌라도 그들이 교훈을 듣지 아니하며 받지 아니하고”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이게 우상이라 하는 것은 우상이 좋아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싫어서 하나님 쪽으로 등을 돌리다 보니까 그들이 선택할 것은 오직 우상밖에 없었던 겁니다.
마음가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마음을 가진 이상은 필연적으로 우상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우상의 종류가 가지가지라도, 뭐, 나무, 돌, 이런 우상 신들이 한두 종류가 아니잖아요, 그 많은 다수의 우상 중에 어떤 특정 우상이 좋아서가 아니라 딱 한 가지, 어쨌든 간에 하나님 쪽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선악 체계를 알고 있는 나의 취향으로 봐서는 하나님 쪽만 아니라면 나는 뭐든지 섬길 마음이 있다는 그게 바로 우상 섬기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 우상 언급하면서 제일 이해가 안 가고 답답해하는 것이 있어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은 여호와 믿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 이사야, 예레미야, 이런 말씀들에 보게 되면 단체로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되어있어요. 어떻게 인간이 자기 선택권 있고 자기 결정권 있다면 ‘그래, 너는 뭐 우상 섬겨라. 나는 하나님 여호와 섬길래’라고 이렇게 따로 놀 수도 있는데 인간세계에서는 결코 그런 게 성립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인간은 우상 섬기는데 따로 자기가 빠져 나와서 ‘나는 우상 안 섬길래’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을 좀 어려운 용어로 가져가겠습니다. 달리 사용할 말이 없어서 용어를 어렵게 쓸 수밖에 없는데 그게 뭐냐 하면 ‘소외’라는 단어를 제가 사용하겠습니다. 소외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인간이 어떤 결정을 할 때 눈치를 본다는 거예요.
주변 환경 돌아가는 것을 눈치 보게 되어있고 그 환경과 합세하지 못하고 그들이 밀리는 것을 ‘소외’라고 합니다. 왕따 비슷하기도 하고요. 소외당하고 배척당하면 되지 그것을 왜 기분 나빠하느냐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그거는 인간 자체가 그 마음이 세상이 만들어준 마음이지 자기 마음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붕어빵을 만들 때 붕어빵 틀이 있고 그다음 붕어빵 나오게 되어있어요. 붕어빵 틀 속에는 빈공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공간은 장차 붕어빵이 생성될 공간입니다. 이 말은 붕어빵 틀이 있을 때는 붕어빵은 없는 겁니다. 붕어빵에 밀가루 넣고 팥앙꼬 넣어서 불 때면 붕어빵이 비로소 나오죠. 인간은 붕어빵이고 환경은 붕어빵 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홀로 산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별로 원하지 않아요. 주변의 눈치를 보고 타인들의 시선을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그쪽에서 나를 소외시키지 않아요. ‘나가!’라는 이런 이야기는 안 한단 말이죠. 아이들도 그렇지만 놀이할 때 아이들이 놀기 싫으면 때리고 그러지 않더라도 그것 못지않게 마음 서럽게 만드는 것이 ‘나는 너와 안 놀아. 너희 집에 가. 우리 제는 끼워주지 말자’라는 말입니다.
요새도 그런 거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 소녀들이 고무줄놀이하잖아요. ‘금강산~찾아가자~일만 이천 봉~’ 이렇게 노래하면서 하는데 갑자기 줄을 놔버리면서 ‘나는 너랑 하면 안 해’라고 자기들끼리 한패 먹고 그러죠. 그러다가 뭐 하나 사주면 ‘그래, 넣어줄게’라고 하죠. 이게 소외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개인적으로 아무리 선택하고 결정해도 대세 따라가야 마음에 안정성을 얻고 삶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게 소외라는 거예요.
소외라는 말이 다소 어려운 용어지만 세상에서 유명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마르크스(Marx, K., 1818 ~ 1883)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논리의 시작을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이 뭐냐’라는 것부터 시작한 거예요.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서 동물은 아무 생각 없이 따로 놀지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유적존재(類的存在)로 부류를 지어 활동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본능적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부류를 만들어서 살아가는 유적존재라는 거예요.
그 유적존재가 하나가 되어야 행복한데 마르크스의 이론에 의하면 소위 자본가들이 자기의 축적된 자본을 가지고 물건이나 상품이나 경제활동에 필요한 생산수단, 쉽게 말하면 기계죠. 그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야 살 수 있는 기계, 그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획득할 수 없고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획득해서 이 세상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눈다는 거예요.
생산수단을 가진 것과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들, 이 두 계급으로 나뉘고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제공해서 제품 생산에 참여한다는 거예요. 참여하면 되지 그게 뭐가 문제냐. 문제는 노동력은 한계가 있지만 생산수단은 쇠로 만들어서 오래 가거든요. 오래 가게 되면 생산을 하는데 있어서 노동자끼리도 생산하는데 자기는 취직을 안 시켜 줄까 해서 서로 적이 되고 그들 안에 경쟁 관계가 형성되는 거죠.
경쟁 관계가 형성되어버리면 소위 생산에 있어서 그들은 노동력만 제공하고 생산 주류에서 그들은 배제된 상태예요. 그것을 소외라고 합니다. 노동자들이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고 경쟁해서 자본가에게 아부하고 헤헤거리고 웃으면서 잘 보여야 계속해서 자기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먹는 그런 시대가 자본주의라는 거죠. 거기서 노동자들은 계속 소외되죠.
한 10년 써먹었는데 생산 효율이 떨어지게 되면 ‘나가세요’라고 내보내면 끝나죠. ‘나이 많고 몸 아픈데 왜 공장에 나옵니까. 나가주세요’라고 하면 끝나는 거죠. 이 시대 자체가 근원적으로 바뀌어야 하지 그냥 놔두면 노동자들끼리 경쟁하다 보니까 단가가 떨어지고 떨어진 단가만큼 이득은 자본가가 가져간다는 거예요. 집단에서 노동자가 어떻게 배제당하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꾸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단가를 낮추겠습니다. 월급은 옛날 그대로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이러면서 노동자들끼리 경쟁하니까 임금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자본가들의 수익은 상대적으로 높아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뭐냐? 그 생산수단을 사는 돈, 그 자본, 그 사유재산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 마르크스의 제안입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너도 못 먹고 나도 못 먹고 다 같이 못 먹으면 그만 아니냐는 거죠. 어쨌든 간에 소외라는 것은 대세이기 때문에 한 개인이 역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싫어해서 그 싫다고 내놓은 대책이 결국 하나님 쪽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율법이 없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고 예언이 없는 내가 원하는 신을 내가 빌어서 복이나 받겠다고 섬기는 쪽이 전부 다 이방 민족이 섬기는 우상 쪽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으로 싫어하고 내가 원하는 신을 이야기할 때 그들의 마음 자세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그냥 잘못되었다고 하지 말고 그들이 무엇을 구분하지 못해서 이러한 오류를 범했는지를 알아야 하겠죠.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미닫이라는 말이 있어요. 문을 열 때 옆으로 밀어서 열고 닫는 문. ‘미’+‘다’ +받침 ‘ㄷ’+ 이 = ‘미닫이’ 이렇게 쓰거든요. 그 미닫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으세요. 그러면 미 +다 +지 = ‘미다지’ 이렇게 쓰면 되거든요. 이걸 사용이라 합니다. 어떤 학생이 미닫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으라 했는데 이렇게 적었어요. ‘드르륵’
‘미다지’가 맞나, ‘드르륵’이 맞나? ‘미다지’는 곧이곧대로 사용할 때 ‘미다지’가 되고 ‘드르륵’은 전체를 다 생각하면서 쓴 거예요. 이걸 언급이라 합니다. 사용과 언급의 차이점이죠. 이걸 신약에 와서 십자가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십자가를 사용하게 되면 ‘나는 죄인이다. 십자가는 피를 흘렸다. 속죄의 피를 찍어 바르면 나는 죄가 없어지고 나는 구원받는다’
이건 십자가를 그냥 개인 용도로 사용하는 거죠. 그런데 십자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전체를 생각하게 되면 ‘드르륵’이죠. 전체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됩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나는 죽은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 십자가는 십자가를 이용해서 구원받겠다는 나를 도리어 죽이는 십자가이고 그게 전체예요. ‘드르륵’하는. 주님의 십자가가 작용하는 소리만 들리는 거죠. 내가 뭘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고 알아맞히려는 나를 아예 죽이는 십자가. 따라서 이 우상에 대해 신약은 어떻게 언급하느냐면 이렇게 정리되면 됩니다. 지금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잔소리로 여겨 듣기 싫어하는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인간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언급하실 때 이렇게 언급하셨어요.
로마서 3장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건 인간은 율법을 사용할 자격도 권한도 없다는 거죠. 백날 해봐야 이미 인간의 마음 자체가 죄기 때문에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구약 사람들은 자기 복 받기 위해서 의로워야 하고 율법을 지켜서 의로우면 율법 지킨 의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내가 원하는 복을 따낼 수 있다는 것은 ‘사용’을 말하는데 신약에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그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하신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어버려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개인적인 의가 아니라 네가 어떤 지경에 있든지 상관없이 적용되는 의,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의가 된다는 거, 심지어 물리적으로 어떤 벌레나 구더기가 나의 육체를 파먹고 있더라도 그게 의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못 믿는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되죠. 사는 것이 불편해서 나는 분노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성립되지 않아요.
사는 것이 불편하든 옷이 불편하든 몸이 아프든 간에 그게 의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의 언급입니다. 십자가에서 준비하신 의가 돼요. 이걸 빛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6절에 보게 되면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네가 행동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보면 됩니다.
해가 지면 밤이 오죠. 사람들은 해지면 밤이 온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없으면 그게 밤이라는 것을 몰라요. 해지는 것이 밤이 된다는 것은 아는데 예수님이 없는 상태 자체가 빛이 없는 밤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그래서 주님은 주님 자신이 어둠 속에 빛으로 오신 겁니다. 그 사실은 너의 환경 자체가 너를 새로운 붕어빵으로 제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도 같은 말씀인데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주님께서는 빛과 어두움을 이야기함으로써 마치 인간이 있는데 주께서 “너는 어떻게 할래?”라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취지입니다. ‘너는 어젯밤에 무슨 짓 했어?’라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율법을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 한 달 전에 무슨 짓 했어?’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태양은 어디 있지?”라고 하시는데 “태양은 하늘에 있잖아요”라고 답하면 “그래, 내가 하늘에 있잖아”라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우상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이야”라고 이야기하고 “내가 하나님의 의야”라고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우상 섬길 수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 이미 범죄 했으니까. 신약에서 해결점은 똑바로 하고 우상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이고 내가 의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게 바로 네가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되고 네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 형편조차도 하나님의 의니까 감사하라”라는 것이 예레미야의 예언입니다.
‘우상 섬겨라’의 예수님 안에서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얼마나 큰일이고 대단한 일인 것을 구약적 안목에 머물러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하나님의 큰일을 십자가 안에서 발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