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식구
2022년 7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14-19
(2:14)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2:15) 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
(2:16)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2:17)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2:18)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나라는 온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을 통해서 지옥 갈 인간들을 어떻게 천국으로 돌리는지 그 방식이 나옵니다. 우선 인간들은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상대해 보려고 합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겠다는 마음이 선행적입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마저 상대하려고 하다보니 하나님에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를 모릅니다. 누구하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이기고 싶고 지니는 싫고 라는 습관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식으로 교정되어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별적으로 다루시지 않습니다.
즉 “너희들 전체는 결코 애굽이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이스라엘은 비록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애굽의 삶이 여전합니다. 그것은 몸은 비록 애굽에서 떠나 있으나 마음으로는 여전히 애굽적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인들이 이런 면까지 스스로 고려하면서 자기 딴에 거룩하게 정비해서 하나님 앞에 나서려고 합니다.
하지만 늘 마음 속으로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될 지를 모르겠다. 내가 어떤 행동과 태도를 보여주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실련지 그것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애굽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이 공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전체적이고 일관적으로 다루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애굽 나라에서는 개인적인 역량에 의해서 목숨이 부지되던 세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이 세상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해서 주변 환경은 우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목숨마저 판돈으로 걸도록 유도합니다. 이 세상은 각자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해야 하는 도박판입니다. 승자가 다 먹는 겁니다. 패배자는 비겁하고 치졸하게 승자에게 구걸해야 하고 얻어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종속관계에 놓이는 것을 뜻합니다.
다 바치지 아니하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대충 걸면 상대가 이미 눈치를 챕니다. “당신은 아직 배부른 모양이지. 이 판에서 당신은 승자가 될 자격이 없소”라고 판정받게 됩니다. 몸을 바치고 성의를 바치고 정성을 바쳐야 조금 이 바닥에서 인정해줍니다. 하지만 이 조직이 화해되는 순간, 목숨이 위태롭게 됩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위험한 세상입니다. 누구나 고생을 줄이려합니다. 패자에게 돌아올 몫은 적다는 것은 누구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빼내어주시고자 합니다. 이때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안목입니다. 죄인을 대하시는 안목입니다. 죄인에게 책임을 새삼 묻지 않는 안목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막 시집와서 시집에 잠시 살게 된 새댁은 나름 진지하게 시부모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제가 어떻게하면 이 가문에게서 사랑받고 이쁨받는 며느리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시부모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미 우리 집안은 너를 며느리로 여기지 않고 딸로 삼기를 정했다”고 말입니다.
즉 딸같은 자기 엄마나 아빠에게 “아버님, 어머님 어떻게 하면 제가 부모님에게 사랑받는 딸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를 않는 겁니다. 그냥 제멋대로지요. 활발하고 자유롭게 말입니다. 집안 식구가 자기 마음에 짐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즉 집안에서 그 딸을 키우는 것이지 결코 딸이 그 집안을 새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는 바가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달됩니다. 전체 예레미야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하나님과 더불어 고생하는 것이 복인 것을 아느냐?”라고 말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삶이 고통스럽고 고생스럽지만 불안하거나 공포스러운 생활이 아니게 하십니다.
즉 개별적으로 자신의 그동안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똑바로 행동할 의사를 지니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 어째서 나같은 죄인을 받아주었는지, 그리고 일체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 이미 하나님의 한 식구로 인정해주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로 바꾸어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십니다.
성도는 자신의 죄를 자신이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된 환경 속에서 주님께서 알아서 죄를 들추어주시고 현실화시켜 주십니다. 참으로 친절하시게도 말입니다. 개별적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해 있는 환경이 결정적입니다. 용서의 주시는 환경 속에서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체험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나와 너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또 다른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뭐라고 하더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생각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적절하게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파악하면서 성도는, 자신도 남과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자신의 개별적 의미를 포기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약속의 땅까지 넘어오면서 있었던 절대적 단절성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목숨조차도 안 받으심을 모릅니다. 귀한 목숨이라서 건져주신 것이 아니라, ‘건져주신다’는 자신의 약속이 귀한 겁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성도는 예수님처럼 무진 고생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불안과 공포는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성도의 목숨을 잡고 세상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건너올 수 없는 곳에 속했음을 매일 확인시켜 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성도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마태복음 21:42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성도가 고백하게 되고 말할 수 있는 바는, 예수님은 우리 같은 인간에게 바쳐서 버림받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나의 우수함이나 나의 성의나 열심을 말하는 자가 성도가 아니라 우리들 때문에 희생하신 그 주님의 희생만을 말하는 것이 새로운 구원공간에 들어온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고생은 되지만 불안과 두려움은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예레미야 2장 14~19절(같은 식구)22072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장 14~19절입니다. 구약성경 1052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어린 사자들이 너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날려 네 땅을 황무케 하였으며 네 성읍들은 불타서 거민이 없게 되었으며,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나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며 또 그 하수를 마시려고 앗수르 길에 있음은 어찜이뇨,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하신 이 말씀의 내용은 너희들이 의도적으로 악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그런 쪽으로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이냐, 악이냐, 의냐 하는 것은 인간들이 정한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바가 있습니다. 그 정해놓은 것에 대해서 인간은 어디에 들어오느냐, 아니면 들어오지 못하고 그냥 밖에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같이 있으면 그게 의가 되고 하나님이 없는 곳에 있으면 그게 악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묻고 같이 이야기하게 되면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내가 성도로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며, 내가 성도로서 산다는 것,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살아야 이게 신앙인으로 사는 것인지 어쩔 줄을 몰라요. 그것은 어떤 특정 공간에 놓여있는 자체가 의롭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든지, 전에 알았는데 잊어버렸든지 그런 거죠.
이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어떤 젊은 사람이 막 결혼해서 따로 살지 못하고 시집 생활을 한 달, 한 달은 죽음과 같으니 일주일로 줄이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시집을 잠깐 들렀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새댁이 하는 말이 ‘어머님, 어떻게 해요? 뭘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데 시어머니가 요구하는 것은 네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지금 누구 집에, 누구의 혜택을 입고, 누구와 동거하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거죠.
‘나는 너를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고 딸같이 여긴다’라는 이 말은 정말 무서운 이야기죠. 이건 정말 잔인한 이야기예요. 제발 그런 말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평소에 우리 딸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엄마, 나 어떻게 하면 돼?’라고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없는데 너는 자꾸 손님처럼 여기고 타인처럼 여겨서 내가 어떻게 하면 어머님을 기쁘게 해서 어머님에게 사랑받는 며느리가 될까 하는 그런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기존에 삶의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살던 방식이 어떤 거냐면 바로 하나님이 없는 공간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걸 하나님이 한꺼번에 죄라고 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걸 애굽 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 16절에 놉과 다바네스 그리고 시홀 전부 다 애굽에 있는 지명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야기하는데 ‘네가 애굽에 살다가 이제는 하나님 약속의 땅에 시집왔잖아’라는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집을 왔으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보살핌과 사랑하고 이뻐해 주시고 시집왔으면 무조건 참한 며느리로 인정해주는 거죠. 참한 며느리도 아니고 성질도 더러운데 우리 집에 왔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 집에 사람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참하고 무조건 용납해주는 마음가짐을 그 새댁은 전혀 납득을 못하고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 속성을 계속 파헤쳐서 그 안에 애굽 생활이 그대로 들어있음을 노출 시키십니다. 그러면 몸은 약속의 땅에 살고 있으나 마음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뭔가 차이가 나야 하는데 차이가 안 나요. 본문 18절에 보면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며 또 그 하수”, 애굽의 물을 말하죠, 그리고 “그 하수를 마시려고 앗수르 길에 있음은 어찜이뇨”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 엑스레이 찍는 거예요. “네 마음 안에 껍데기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실은 네 안에 애굽 있다. 애굽 들어있어”라고 그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고칩니까. 이게 우리는 궁금하잖아요. ‘시집왔는데 내가 옛날 친정 생활 그대로 갖고 있다면 어떻게 고칩니까’라고 묻잖아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런 겁니다.
그거 네가 ‘나는 이렇게 애굽 생활했습니다. 옛날 처녀 때 친정에서 했던 행세 그대로 있습니다’라고 네가 고백하지 말고 하나님 내가 끄집어내 줄게. 시집에 와서 뭐든지 판단을 해도 ‘내가 처녀 때 우리 집에 있을 때는 이게 잘못이 아닌데’라고 자꾸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네가 너를 평가하지 말고 이 시집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차이 남, 옛날에 엄마 아빠 집에서 살았던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이제는 내가 다 끄집어내 줄게. 네가 스스로 너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 말란 말이죠.
우리 자신이 우리를 고치려고 하니까 맨날 하는 이야기가 ‘뭐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라는 그러한 제안을 자꾸 하게 되는 거예요. 누가 들으면 굉장히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느 곳에 있는지, 어느 공간에 있는지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계속 언급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 처리한다’ 이게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이건 어른에게 맡겨야 할 일이지 네가 어른도 아닌 것이 시집에 와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너 위주로 판정하지 마라. 그래서 예레미야 전체 이야기를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미리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 것이 좋아요. ‘망가져도 행복하냐’라는 것을 묻는 겁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묻는 것은 내가 이스라엘을 망가뜨릴 테니까 그때도 너는 행복해야 해.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보내신 이유는 ‘너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망하는 네 안에 내가 동거하고 동행하면 되잖아’라는 겁니다. 그 시집온 며느리는 자기가 옛날에 살던 시절 그대로 내가 구축한 그 모습에서 내가 이탈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시아버지는 내가 너와 동거할 테니까 비록 지금 모습이 전에 살던 것과 달리 망가지고 패가망신하는 일이 있더라도 새로운 아버지, 어머니 그러니까 시아버지, 시어머니만 있으면 저는 그걸로 족하고 행복하다고 말로 고백이 나오게 하는 것이 예레미야를 보낸 취지입니다.
근원적으로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라는 그 질문을 철회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말해요. ‘목사님 어떻게 그게 믿어집니까’라고. 솔직한 건 좋은데 솔직한 것은 진심이지만 진리는 아니에요. 안 믿어지면 지옥 가시면 됩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어떻게 믿어집니까.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시는군요. 믿는 척 안 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불안하지 않은 거예요. 고통스럽지만 불안하지 않은 거예요. 살기 힘든 건 맞아요. 거지꼴로 살면서 힘든 건 맞지만 불안하지 않은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뭘 뛰어넘어야 하느냐면 내 목숨이 주는 볼모 잡힘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 애굽 생활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일종의 도박장인데 거기서 자기 목숨을 판돈으로 걸고 뛰어드는 곳이 애굽 세상이에요.
직장생활을 하든 개인 사업체를 갖고 있든지 모든 이 세상은 상대방이 결국 우리에게 마지막 갖고 있던 우리 목숨까지 판돈으로 걸라고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걸 열정페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충 한쪽 다리 걸치고 내 것 챙기고 하는 거, 이거 소비자들이 다 압니다. 사람들이 다 알아요. 직장에 있으면 직장에서 알고 가게를 하면 가게에서 알고, 손님을 왕으로 취급하는 그러한 가게에 사람들이 오죠. 그들의 진심을 아니까요.
생전 집에서 청소 한번 안 하다가 편의점 하나 만들어 놓으면 아침에 일찍 나와서 주변 쓸고, 중간에 담배도 좀 피우고, 그렇게 생전 청소 안 하다가 자기 가게에 유리하니까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청소하는 거예요. 청소하다가 자기 목숨 잃을 수도 있는데 자기 목숨 판돈으로 내놓고 자기 목숨보다 귀한 것이 이 사업을 통해서 내 가치를 높일 것인가 아니면 인생 실패자로 낙오할 것인가 이 문제니까, 그 도박판에 ‘에라 모르겠다’라고 하면서 자기 목숨 걸고 내 가치 건지겠다고 하는 거죠.
이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 모든 것에 종사할 때 그 일이 다 개입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요. 그래서 열두 제자도 예수님을 따를 때 비장한 각오로 따랐습니다. 베드로가 대표로 이야기했어요. “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는 너의 모든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네가 모든 것이라고 했지만 그 모든 밑에 네가 모르는 다른 것이 있음을 내가 너에게 그것을 끄집어내고 들통나게 해주마.
인간은 모든 것에 모든 것을 버려도 천국 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내가 너에게 확인시켜 줄게. 헌신했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순종했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회개했다는 소리하지 마라. 너희들이 어떤 것을 제공해도 나는 그것 받고 구원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모든 뜻은 예수님에게 일임되어있지 잃어버린 양이나 잃어버린 동전이나 잃어버린 탕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아요.
그러면 또 물어요. ‘목사님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결국 나오는 답변은 제자들의 실패 그 이후에 사도 된 제자들의 차이점은 오직 하나, 성령이 오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관점이 오고 예수님의 시선이 온 거예요. 예수님의 마음이 온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오니까 전에는 내 안에서 살다가 친정만 알다가 시가집 시선에서 나를 다시 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새댁에게 시가집에서는 받지도 않고 책임도 묻지 않고 오직 딸같이, 애초부터 너는 우리 집안에서 출생한 여인처럼, 내 딸처럼 그렇게 시작하리라.
그러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인간들을 바꿔치기하는데 주님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은 너희를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세상이 너에 대해서 또 나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나는 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라고 하시면서 관점 바꾸기에 주께서 나서십니다. 그래서 먼저 교회 와서 주님 하신 말씀을 자꾸 배울 생각하지 마시고요, 세상에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여러분들이 빠뜨리지 말고 먼저 정립해야 해요.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봅니까. 잘 보지요.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을 알고 있어야 뭐가 그 끊어짐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성령께서 애굽같은 세상을 뛰어넘어서 진짜 주님의 나라에 시집왔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날 거잖아요. 세상이 어떠한지를 모르고 또는 세상이 어떠한지를 알아도 거기에 성화론을 집어넣어서 이건 단절이 아니라 이어가고 있어요.
‘내가 이런 못된 습관이 있고 이런 나쁜 짓을 했는데 교회에 와서 술 끊고 담배 끊고 착한 사람 되고 개과천선해서...’ 뭔가 계속 연속되어 있어요. 아무리 살펴봐도 끊어진 자리가 없어요. ‘성경공부 열심히 하니까 내가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가 정답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봅니까.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립니까?’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 안 버리죠. 그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다를 바가 없잖아요. 똑같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 덕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세상 그 자리에 있네요? 그 자리에 있어요. ‘모든 것이 망가져도 나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냐?’라는 질문에 우리가 답변할 수 없어요.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하게 되면 도망가기 바쁘죠. 그래서 우리는 이 예레미야를 옛날 말씀으로 보면 안 됩니다. 매일같이 주께서 이 예레미야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묻고, 내일 되면 또 묻고, 모레 되면 또 묻고, 매일 같이 묻는 질문으로 여겨야 합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그 답변을 하면서 내가 예수님이 생각한 만큼 내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이 발각되어야 합니다. 이게 즐거운 일이어야 해요. 섭섭한 일이 아니고. ‘아이고 나는 지옥 가네’라고 되면 이건 공포스러운 거예요. 이걸 불안이라고 하는데, 불안이라는 것은 대상이 없을 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말하고 공포라 하는 것은 어떤 특정 대상이 있을 때 무서워하는 것을 공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안과 공포를 면제해 주신 대신 고통을 면제해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세상이 예수님을 고통으로 몰아넣듯이 세상은 진짜 우리가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왔고 하나님 나라에 시집을 왔다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주님이 당하는 고통을 흔쾌히 감사함으로 그 고통을 참여해야 하고 환란에 참여해야 합니다.
벌써 세 번째 언급하는데 예레미야는 이겁니다. ‘너희들 나와 함께 환란 당할 준비 되었냐?’ 그리고 로마서 5장의 말씀처럼 환란 중에 네가 기뻐할 마음 자세가 되었느냐? 네가 고생하는 것은 좋은데 불안하거나 세상에 대해서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자신이 그렇거든요. 예레미야 자신은 땅에서 보는 시선을 받은 것이 아니고 천상회의에 참석했어요.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해서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거예요.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전개된다는 사실을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목숨을 담보로 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목숨을 담보로 세상에서 승리자냐 실패자냐 그런 모험이나 도박에 나설 이유가 없단 말이죠. 그러면 제가 아까 첫 번째 이야기한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거기에 대해 세상은 예수님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부담스러워하죠.
그런 예가 있어요. 아파트 문을 ‘딩동~’하면 아파트 안쪽에서 들리는 말이 ‘안 믿어요~우리 절에 다녀요’라고 하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절에서 가끔 와서 ‘절에서 왔습니다~’라고 하면 ‘우리 예수 믿어요’라고 하죠. 벌써 단절이 있어 줘야 해요. 단절을 기뻐해야 하고 단절을 반겨야 합니다. 이건 웬 떡이냐고 반겨야 해요. 세상과 궁극적으로 목숨에 관해서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웬 떡이냐는 그런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노래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제목을 아주 좋아하는 노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밤의 끝을 잡고’라는 노래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룰 때 죽음의 끝을 잡고 우리를 이 세상에서 담금질하듯이 줬다 뺐다 하시면서 조종합니다. 이미 죽은 자 입장에서, 세상과 끊어진 입장에서, 더 살 이유도 없는 입장에서, 마음껏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어떻게 살까요?’라고 묻지 말고, ‘어쩌면 좋습니까?’라고 묻지 말고, 죽음을 이겼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어떤 경우라도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않음을 실질적으로 체험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 체험을 하면서 뭐가 들려와야 하는가. 세상은 너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걸 체험하는 거예요. 이제 남은 문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21장 33~42절에 포도원 비유에서 나옵니다. 42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노니 너 자신이 ‘예수님 저는 이렇게 했습니다. 저렇게 했습니다’라는 말은 입 다물어라. 있다 보면 참 그런 말을 많이 듣게 되어요. ‘제가 예수님을 위해서 이렇게 했고 저렇게 했습니다’라는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어떤 수모를 당하고 어떻게 버림받았는가 하는 그 이야기만 하라고 예수님이 우리 성도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이렇게 착실하게 바르게 살았다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말고,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생했다는 이야기하지 말고,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어떻게 사람에게 저주스러운 그런 대우를 받았는지 그 이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 증거 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21장 33절에서부터 보면 땅에 관한 문제예요.
그 땅을 포도원이라고 이야기했고 포도원에서 하나님께서 농부를 고용했는데 농부가 자꾸 농사짓다 보니까 이 땅이 자꾸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그 주인이 와서 농부에게 세를 받으려고 하니까 그 보낸 종들을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돌로 치고 하는 거예요. 33~36절까지 살펴보면,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여기에서 자기 아들을 보냈다는 이 사실이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을 사는 유일한 의미입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강남강의)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의미는 충돌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과 주님이 찾아오시는 현실이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모든 의미는 거기에서 다 드러나요. 인간의 세계에서 인간은 내가 행한 의미는 뭐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예수님이 행한 것과 충돌되니까 내 의미와 내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의 의미를 무시하는 거예요.
포도원의 농부가 일을 했습니다. 일하다 보니까 이 포도원이 내 노력이 있고, 내 공로가 있고,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그 의미를 포도원을 통해서 찾고 싶은 거예요. 이게 우리가 애굽같은 현실을 사는 우리의 본모습이에요. 이 만큼 고생했으면 뭔가 대가가 있어야 하고, 그만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고, 만족해야 하고, 행복해야 하지 않느냐.
독자적입니다. 자기 쪽으로 행복을 원하는 거예요. 자립적으로 행복을 원하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농부에 대해서 부딪히면서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아, 나라는 존재가 주님 앞에 주님을 머리로 들이박는 그런 태생으로 왔구나’ 그래서 뭘 잘했다고 할 것도 없고 우리에게 들이박히고 튕겨 나가신 버림받으신 그 예수님이 우리의 진짜 의미라는 그 사실이 신약에 이렇게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이렇게 주신 이유가, 광야 길을 가게 하신 이유가 우리의 마음을 낮춰서 말씀대로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나오거든요. 사사기 2장 10절에 보면 “그 세대 사람도 다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오늘 설교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하기 바빠서 예수님이 들이받혀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직까지 친정에 그냥 있는 거예요.
자꾸 착한 며느리 행사하려고 하지 마시고요, 아무것도 책임 묻지 않으시고, 너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묻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줬다는 거, 그거 하나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평생에 어떤 불안이나 공포를 느끼지 말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을 다시 정립하게 하옵소서. 잘나 보이려고 주님에게 멋있게 보이려고 주님에게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사는 건지 묻기를 일삼았던 저희들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