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악
2022년 7월 1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9- 13
(2:9)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2: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2: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전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쟁을 해야 무슨 성과라도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고요하게 모든 일을 처리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싸우더라도 자신을 건드리지 말고 끌어당기지 말고 구원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을 그렇게 처리하시지 않습니다.
‘죄에서 구원’이 되려면 반드시 소위 잘난 존재를 죄인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수적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타인에게 책잡히지 않고 살기를 학수고대합니다. 돈 없는 것도 괴롭지만 남에게 욕얻어 먹는 것도 참으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겁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인간들은 하나님께 부탁하기를 “제발 남들로부터 칭찬이나 관심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욕얻어먹는 일은 생기도록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두 가지 악’에 해당됩니다. 즉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을 본인들이 결정짓겠다는 겁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골라 잡아보겠다는 겁니다. 자신들의 가치가 안 다치는 쪽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답니다. 이렇게 되면 본래의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는 바가 됩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악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점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신약 때에 비로소 나타난 정답에 의할 것같으면, 그 누구도 예수님 같은 분 아무도 없습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이스라엘의 뜻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골라잡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그 어떤 주도권을 부여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전쟁이란 이처럼 주도권 싸움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싸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홀로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이스라엘은 이방나라 품속에서 하나님께서 획득한 전리품이 되고 그 전리품으로서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즉 구원이 되려면 필히 전쟁이 일어나야하고 그 전쟁은 인간들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 차원에서의 전쟁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하나님 전쟁에 말려든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자기 주도권을 쥐고 벌리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도리어 자기 주도권을 버린 자입니다. 마치 구약 때 아브라함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지시 받고 자기로서는 엉뚱한 땅으로 이주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자기를 반길 줄 자도 없고 환영해줄 자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나그네요 객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생존에 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의 주체를 능가하는 힘의 통제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신약에 오면 ‘예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은 ‘땅에서 움직이는 약속’입니다. 하늘나라에게 확정된 스케줄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 확정된 스케줄은 아브라함이나 누구든 지켜내거나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인간의 본성대로 위반과 위반을 연속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반을 통해서 약속의 진수가 펼쳐집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0장과 21장에 걸쳐 아브라함은 블레셋 족속에 속하는 아비멜렉이라는 추장과 만나 관련성을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재산, 곧 가축들의 물을 먹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우물이 필요합니다. 이 우물은 생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살아계신 약속의 하나님께서 타인의 땅에 아브라함에게 생수를 마련해주므로서 ‘생수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우물 확보에 있어 아브라함이 한 것은 기껏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자신의 살 길을 마련하려는 인간적인 시도뿐이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하나님과 싸운 바 되지만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생수를 근원을 제공해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신이 자신의 것으로 자부해서 자기 식으로 이끌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과 다투시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라 ‘자기 전쟁’을 시도한 겁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두 번째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필수적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진짜 하나님을 버리고 가짜 신을 도입하는 겁니다. 그 생수의 우물에는 생수가 고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생수의 근원을 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구조에 말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한계를 발견할 마음이 없었던 겁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한계를 발견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파괴하고 멸망하려 한다는 점을 이스라엘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손해보는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도움되는 신을 수입했던 겁니다. ‘하나님 바꾸기’ 바로 행동은 구브로(깃딤) 사람이나 아라비아(게달) 사람들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우상보다 못한 신으로 취급했던 겁니다. 이 말은 그만큼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다급했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이 다급하면 본색을 더는 감출 수 없는 법입니다. 평소에 자신이 무엇을 노리면서 살았느냐가 들통나기 마련입니다. 신약에 와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약에 와서 그 어느 누구도 멸망당하지 않을 수 없음이 십자가를 통해서 분명해졌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나오는 선물은 이런 겁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4-5) 이런 성품은 인간의 한계 밖에서 주어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생수의 근원’입니다. 아브라함의 우물입니다. 약속에서 비롯된 겁니다. 참으로 약속된 아브라함 자손이라면 이 약속 말고 다른 신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한 하나님이 악마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예레미야 2장 9~13절(두 가지 악)22071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장 9~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52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전히 너희와 다투고 너희 후손과도 다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 이 같은 일의 유무를 자세히 살펴보라,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 찌어다 심히 떨 찌어다 두려워할 찌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예레미야는 선지자예요. 선지자에게 말씀이 주어집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하는 이유가 선지자의 모든 말씀, 곧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우리 자신의 형편을 지적질하지 않고 찾아오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내가 어떤 점에서 덜 죄인 노릇을 하는지를 주의 말씀이 파고들어 오시도록 해서 이 말씀이 우리를 죄의 더 깊숙한 곳으로 인도하시도록 그렇게 성경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내가 더욱더 죄인 됨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에 괴물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밀어내는 경향이 있어요. 쉽게 말해서 ‘나는 말씀 안 듣고 스스로 의젓하게 살아갈래’라고 하는 이게 괴물이에요. ‘나는 말씀 안 듣고 나를 위로하면서 나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품고 세상 사는 보람을 가질래’라고 하며 버티니까 말씀이 와서 튕겨 나가죠.
그러다 보니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자아를 더욱 딱딱하게 만들어요. 딱딱해지니 말씀이 왔다가 팅~~하고 튕겨 나갑니다. 자아가 말씀이 더욱 깊숙이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이 되어야 하는데 튕길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 결과, 자기 마음이 완악하다 또는 견고하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완악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 여호와하고 그만 놀래. 난 다른 신과 놀래’라고 한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지자 주장이고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내 마음에 드는 신을 내가 고른다는데 무슨 말이 많습니까?’라는 식이죠. 요즘 같으면 ‘내 마음에 드는 예수를 내가 알아서 믿겠다는데 왜 그러십니까? 내가 믿는 예수를 왜 지적질하십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드는 예수가 뭐냐 하면 십자가 뺀 예수죠. 왜? 내가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선택만큼은 나에게 칭찬을 해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싶은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이 새롭게 나의 가치를 더 높이는 선택적 기회를 부여하는 신을 우리가 원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선택하지 않더라도 이미 구원받았는데 그런 하나님이 싫은 거예요. 내 구원이니까 내가 선택을 잘해서 구원받는 그런 결과가 주어질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참 잘했다. 참 훌륭하다’라는 그런 칭찬을 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바로 가짜입니다. 나의 선택에 의해서 구원받으면 구원이라는 것이 내 선택 이전에는 없는 샘이 되거든요. 그러나 신약에 와서 구원은 사후적 결과입니다. 사후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난데없이 주어진 것이 바로 구원이고요, 그걸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구원될 수 없었는데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따라서 이것은 내 선택의 결과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교회는 자꾸 교인들에게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옛날 이스라엘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방법인 것을 알리기 위해 구약성경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아 계시를 보면서 튕길 생각하지 마시고 내 선택을 따로 남기려고도 하지 마시고 그냥 하나님의 계획대로 우리는 당하기만 한다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지 마시고 오히려 반기면서 받아줘야 해요.
하나님이 뭐라고 평했냐 하면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라고 이렇게 딱 나오면 ‘저는 악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부정하지 말고 ‘나 이제 하나님이랑 안 놀아’라고 삐지지 마시고,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라고 하면 ‘아이고, 주님이 안 가르쳐 주면 우리가 알 수가 있어야지요. 뭔데요? 뭘까요?’라고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악이 어디 두 가지뿐이겠습니까? 백 가지도 천 가지도 넘는데 주님께서 두 가지 악을 말 하시는 것은 우리 지은 많은 죄는 우리가 하는 우리 식 분류이고 그거 중지하고 주님의 분류를 따르면 ‘너는 두 가지 악을 행했다’라는 이 두 가지 분류에 너 자신을 두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예’하고 두 가지 악을 저지른 사람으로서 나서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세상에 악을 안 저질러서 구원받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아시고 구원하셨거든요. 그러면 이 두 가지 악에서 한 가지가 뭐냐 하면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이 첫 번째 악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거. ‘저는 안 그랬습니다’라고 그러지 마시고, 방금 이야기했는데 또 잊어버렸죠? 나는 안 그랬다고 그러지 마시고 “너는 버리게 되어있어”라는 뜻으로 반갑게 맞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9장 12~13절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시거든요. 그러면 의사가 왔을 때 병자는 자기 자신의 병을 모르고 의사 앞에 앉아야 병을 알 수 있습니다. 의사가 조목조목 병을 지적할 때 ‘아, 이래서 내가 환자 맞군요’라고 나오면 그 의사와 환자와 죽이 잘 맞아요.
의사의 첫 번째 질문이 뭐냐 하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생수의 근원이 무슨 뜻이냐, 이것은 창제기 21장에 우물과 관련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겁니다. 가나안 땅에 온 것은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다수가 어떤 사람은 250만이라고 하는데 장정만 60만이 와서 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미리 점검하는 선발대로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미리 보내신 거예요.
약속에 땅에 오니까 아브라함은 ‘이것은 내 땅이다’라고 주장할 수 없어요. 약속의 땅이라는 말은 그것은 남의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나의 땅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자기 것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로 여겼기 때문에 망해버린 겁니다. 이스라엘을 내 것으로 여긴 거예요.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여긴 거예요.
이래서 망한 거예요. 약속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 약속이 아니에요. 약속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따로 계십니다. 내가 예수님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예수님이 아니기에 내가 예수님의 것이 되는 거지, 예수님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게 예수님의 성령을 받은 거예요.
그것을 포괄적으로 피조물이라 하고 그것을 주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왕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나는 왕이 아닙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 인생에 주관자는 내가 아닙니다. 이걸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주체를 능가하고 압도하고 지배하는 힘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라는 주체를 능가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주님의 힘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내 것이고 하나님이 내 소유라면 이것은 내 힘으로 타협한다 이 말이죠. ‘교회 가고 안 가고는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는 이런 말을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자체가 내 인생에 대해서는 아직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를 한 거예요. ‘내 자식은 내가 알아서 키웁니다. 하나님은 간섭하지 마세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가 어려울 때나 하나님이 도와주세요. 하지만 평소에는 내가 잘하고 있는데 굳이 귀찮게 기도해서 하나님 도움받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하는 자체가 수상할 수밖에 없는 게 주도권을 양도해야 하는데 기도하면서도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있어요. 기도했으니까 내놓으라는 뜻이에요. 칼든 강도랑 똑같은 거예요. ‘기도했는데 왜 응답을 안 해주십니까?’라는 식이에요. 맡겨놨습니까? 그래서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기도와 넋두리의 차이가 없다고.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어떤 때는 욕도 막 나오고 하는 그것을 고대로 ‘예수 이름으로’만 붙이면 다 기도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에게 한탄스럽고 서글픈 인생이나 아쉬운 것을 그냥 중얼거리는 거예요. 자기가 혼잣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혼잣말이라고 분간할 수 없어요. 타인을 의식해서 혼잣말해요. 남편이 집에서 혼잣말하죠. 그것은 아내가 아직 집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혼잣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 무슨 소리 했는데?’라고 하면 ‘아니, 내 혼잣말이다’라는 것은 내 혼잣말을 아내나 들을 수 있는 어떤 존재가 같이 있다는 말이지 만약에 집에 아내가 없으면 혼잣말도 뚝 떨어져요.
집에 개라도 있어야 혼잣말하지 아무것도 없으면 혼잣말 못 합니다. 정 없으면 거울 보고 하고, 티비 보고 하고 그래요. 그 정도로 인간은 타인을 의식하는 존재입니다. 기도라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식하면서도 주도권은 내가 쥐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냐면 바로 네가 나를 버린 주제에 나를 버려놓고 기도한 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너는 나를 버린 존재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인간들은 ‘내가 언제 버렸습니까’라고 반박하죠. “거봐, 거봐, 말 지독하게 안 듣는 것 봐. 내가 그렇다 하면 그런 거야. 너는 두 가지 악을 행했어. 행한 거면 그냥 행한 거야. 군소리하지 말고. 잘살아 보려고 하지 말고 너는 그냥 내가 규정한 대로 살아가” ‘나는 하나님을 버린 자구나’라고. 뭐 성품이라도 곱든지 해야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갈 때 자기 땅이 아닙니다. 자기 땅이 아니라면 자기 우물도 없어요. 양을 키우고 소를 키우려면 우물이 있어야 하는데 우물이 없는 거예요. 우물이 없는데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어슬렁거리면서 약속의 땅으로 쓱~들어가니까 아브라함의 부인이 이쁘다고 거기 사는 아비멜렉 추장이 반기네요. “저 여인과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물으니 “내 여동생입니다”라고 아브라함이 답한 거죠. 잘 되었다고 사돈 맺자고 한 거죠.
사람이 대화하더라도 공통점이 있어야 해요. 저쪽에서 노리는 바가 이쪽에 있을 때 사람들은 우호적 관계가 되는 겁니다. “동생을 나에게 마누라로 주세요. 당신이 양도 많고 소도 많은데 이 우물을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허용하겠습니다”라고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우물은 우물대로 차지하고 나중에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합니다. “건들지 마라. 그 사람은 아브라함이라는 선지자의 아내다. 어디 건들 것이 없어서 선지자의 아내를 건드리느냐. 선지자 건드리면 나 하나님이 가만히 있지 않고 벌을 내리지”라고 하시면서 벌 내렸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벌벌 떨면서 왜 진작 이야기 안 했느냐고 그러는데 진작 이야기했으면 우물 허용했겠습니까? 안 하죠. 그러니까 이건 당연한 거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 구원은 주님께서 빼앗아서 주신 거예요. 이걸 전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전쟁이 없으면 우리는 영생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악마와의 전쟁에 승리의 대가로 우리가 전리품으로 건짐을 받은 겁니다.
따라서 우리 힘으로 천국 갈 수 있는 거 아닙니다.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주님이 전쟁을 다 치웠고 해결했습니다. ‘건들지 마. 이건 내가 찜했으니까 건들지 마’라고 해서 나온 것이 우물이고 그 우물에서 맹세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브엘세바예요. 창세기 21장 31절에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하나님이 개입했습니다. 더이상 아비멜렉과 블레셋 족속은 아브라함을 건들면 안 돼요.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건드렸다가 아비멜렉이 혼났죠. 그 집안이 전부 다 임신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 대 인간의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보기에는 보통 아저씨나 아니면 할아버지쯤 되겠죠. 하지만 선지자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아바타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신약에 갈라디아서 5장에도 나옵니다. 성도를 건드리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 5:10) 성도 주변에 천사 깔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천사 깔리고 성령 함께 계시고. 이 말은 성도가 아이 신난다는 말이 아니고 성도가 성도답게 똑바로 하라는 겁니다.
네 주도권 주장하고 네 잘남을 주장하게 되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오히려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다 이루심, 복음 위주로 움직이도록 하나님께서 천사 보내고 성령 보내신 거예요. 우리 욕망을 이루라고, 우리 것 지키라고 천사가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 이루심을 훼손하지 말라고 그렇게 관여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걸 몰랐던 거예요.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를 자기가 지키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내 것도, 우리 것도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항상 성도의 삶이 사달이 나는 것은 꼭 자기 것 주장하다가 사달이 나요. 그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입니다. 얼마나 반갑습니까. 평소에 아무리 꿈꿔도 하나님 안 계시는 거, 내 하는 일이 박살 나면서 계시잖아요. ‘반갑습니다. 주님’
사적인 내 욕심부리다가 작살날 때, 내 위신 챙기다가 작살날 때, 하나님의 일은 빈틈이 없어요. 그때그때 재깍재깍 천사 보내서 성령 보내서 조치를 해주니까. 이건 뭐,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자꾸 사후적으로 일 터지고 난 뒤에 계속 깨닫게 되는 거예요. 안 떠나셨구나. 떠나신 적이 없구나.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이 맞구나.
이것이 복음을 드러내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복음을 드러낼 때. 교회 붙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업이니까 교회가 깨지든 말든 안 도와줘요. 복음을 위해 일할 때, 복음으로 핍박받을 때 주의 백성이에요. 교회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가정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를 위함이죠. 그런데 실제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이들이 꼭 일을 저질러요.
내 자식 위하고 내 가정 위하고 할 때, 자기도 얻어터지고 남도 얻어터지고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기어이 약속의 백성답도록 사태를 정리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이라는 말씀도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기가 이스라엘을 유지해서 건사해왔다는 그 고집 때문에 주님의 전쟁에 결과물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애쓰고 노력한 결과물로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단 말이죠.
이게 오늘날도 빈번해요. ‘한평생 어떻게 살았습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6.25 전쟁 때 내가 인민군 2명 죽이고 흥남부두에서 탈출한다고 애먹었습니다’라고 시작해서 줄줄이 간증이 막 나오죠. 간증할 때 6.25 전쟁이 꼭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4.16, 5.16, 이런 것들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그냥 평범한 것이 최고의 간증입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 속에서 ‘나는 나밖에 몰랐습니다’라는 그것보다 더 큰 간증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나만 편하고 나만 잘되고 우리 가정 잘되면 나는 그걸로 족했다는 그런 고백이 바로 하나님 생수의 근원을 버린 거예요. 인간은 주님의 전쟁에 전리품이 되어야 하는데 내 전쟁에 전리품으로 의젓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거, 그거 악입니다. 두 번째 악은 뭐냐 하면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거, 이게 사실은 같은 종류에 파생된 거예요. 첫 번째에 하나님을 버렸으니까 이제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은 나를,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예수, 인정해주는 성령, 인정해주는 삼위일체를 내가 정하고 그걸 진리로 믿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자부하고 믿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우상은 흔해 빠졌습니다. 아마 일상 전체가 우상적인 삶일 수가 있어요. 그 근거가 고린도 전서 13장 4~5절에 보면 나옵니다. 더 읽으면 고만하라고 튕겨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딱 이만큼만 보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막 튕기려는 조짐이 올라오지 않으십니까?
그다음에 보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그다음에 결정적으로 튕겨 나올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와~~~이건 정말.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다는 이거. 그리고 “성내지 아니하며” 여러분은 하루종일 성 안내지요?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도대체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사랑의 하나님 아닙니까? 우리에게 사랑을 선물로 주는 하나님 아닙니까? 사랑이 선물로 왔으면 이 말씀들이 우리 안에 택배로 이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스스로 정한 신, 우상이죠, 우상 신에게 어떻게 하느냐면 ‘제발 우리에게 말썽만 안 생기게 해주고 조용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면 성도 안 내고, 무례히 행치도 아니하고, 온유에 절제까지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맨날 우리는 내가 사는 환경이 내가 만족스럽게 될 거 같으면 그때야 온유하고 투기 하는 자 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않을 자신이 있겠다는 거예요.
이건 자기 전쟁입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세상이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흔들기에 들어가죠. 하나님의 시험은요 이미 우리를 죽여놓고 하는 시험이에요. 죽여놓고 ‘너 죽은 자 맞잖아’를 증명하는 시험입니다. 네가 이 테스트 통과하면 살려준다는 그런 시험 아닙니다. 이미 죽여놓고 하는 시험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그 시험을 통해서 내가 이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이 말씀 어느 하나도 지킬 수 없는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린 자예요. 내 마음에 맞는 그 신을 맨날 붙잡고 있다는 그 두 가지 악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자라는 것을 이 시험을 통해서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사인을 받을까요? 손들고 선언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왜? 환경 자체가 우리를 그렇게 몰아세우기 때문에. 주님 가신 길이 그 길이였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길을 주께서 앞서가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백날 해도 우리는 주님 가신 길은 삐져서 가지 않고 편안한 길로 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님 가신 길로 들어서야 비로소 우리 자신의 본색이 보인다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자기가 잘해서 구원받은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 보면서 분명히 그 생각 해야 해요. 아브라함이 자기가 훌륭해서 구원받은 적이 없어요.
아브라함은 이삭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이삭의 대리죽음으로 구원받은 겁니다. 그걸 대리계약이라고 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계약상대자로 하신 적이 없어요. 괜히 나를 계약상대자로 으스대며 나서지 마세요. 계약자 따로 있습니다. 십자가 살과 피로 이미 그 새 언약을 다 이루었습니다. 왜 새 언약을 잊어버리려고 하십니까? 왜 그 피를 우리가 나서서 모독하려고 하세요?
예레미야는 구약선지자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해 들어가고 더 깊이 파고들어서 신약 때를 향해서 그 죄 된 이스라엘을, 너덜너덜한 이스라엘을 질질 끌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까지 끌고 가는 그 말씀을 예레미야가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너덜너덜한 육신으로 우리는 숨을 쉬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다 이루신 그 계약을 찬미하는 뜻으로 이 말씀을 봐야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약속,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약속 주시고 얼마나 우리가 약속과 상관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면서 오직 주님만 약속인 것을 드러내는 그런 삶이 되도록 인도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