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6/15수요설교보충-파수꾼

아빠와 함께 2022. 7. 3. 10:56

수요설교 요약 : 파수꾼(미가 7: 1-4),20220615

어제 수요일에 한 거 늘 하던 대로 잠시만 요약해 보겠습니다. 수요설교에서 핵심 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어요. 그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의 파수꾼이 지키려고 한 것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파수꾼이 선지자가, 파수꾼이 선지자거든요. 무엇을 지키려고 했는가, 그것은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성 이것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가 있느냐 하면 불가능성이 있습니다. 불가능성이 들어와요. 그러면 차이가 나야 되면 이스라엘은 불가능성에 의해서 이루어진 나라라면 자동적으로 이방나라는 무엇으로 구성되었느냐 하면 인간의 가능성을 토대로 해서 성립되는 나라가 이방나라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이 없다. 이게 이방나라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홍해가 갈라져 버렸잖아요. 요단강이 갈라졌지요. 그것도 참 불가능성입니다만 그것보다 더 센 불가능성이 뭐냐, 죄인을 자기 백성으로 받아준다는 게 그게 굉장한 최고의 불가능성입니다. 받아줄 때는 어떻게 받아 주느냐 양푼이를 반으로 나눠요. 피를 양푼에 담아서 반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쪽에 자기 쪽에 부어버리고 반은 백성 중에 부어버리면 하나님과 백성이 공통적으로 같이 덮쳐진 게 있어요. 같이.

그러면 그 피 안에서는 불연속성이 아니고, 연속성이 돼요. 요거 어렵지요. 불연속성이 아니고 연속성인데 이 연속성이 뭐다? 불가능성이 되는 거예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같이 만날 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못 만나요. 만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성이지요. 불가능성인데 하나님의 가능성이 덮쳐버리니까 이것이 연속성이 이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가능성에서 연속성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피 안에서 하나님과 백성은 하나가 된다. 또는 만난다. 이게 성립이 되는 겁니다. 피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구약에서는 피 안이에요. 피 안에서 같이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 내 쪽에서 피 제시했는데 니 쪽에서도 너의 가능성 말고 니 불가능성을 제시해 보라, 하면 뭘 제시하느냐, “주께서 피 흘려줬잖아요. 주께서 주신 피 여기 있어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가 되는 겁니다.

피는 가능성이 아니고 불가능성이면서도 연속성을 유지시키기 때문에 이 피 안에서는 인간의 가능성,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함. 인간의 행함은 일체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뭐냐 하면 자기 행함으로 사는 게 성도가 아니라 주님의 행함의 결과물이 성도에요.

성도란 주님의 행함의 결과물. 그러니까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계속 살아계셔서 움직이니까 활동하시니까 성도는 매일 새롭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수요일날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게 되면 추잡고 더러워서 안돼요. 애들 백지 내놓고 시험치게 되면 막 지우개로 썼다가 지우개로 없애고 다시 쓰고 없애면 지저분해져요. 고치고 또 바꿔보고 개선해보고 본인도 더러워요.

그런데 항상 주님은 성도한테 새것을 요구하는데 주께서 새것을 준비해놨기 때문에 성도는 매일이 새로운 거예요. 내가 나를 안 고치니까. 내가 나를 반성을 안 하니까요. 손대면 또 더러워져요. 반성하자, 회개하자. 더러워서 못 받아요. 자꾸 반성하고 회개하면, 니도 알겠지. 반성 12번째 라는 거 알겠지. 음식 뎁히고, 뎁히고, 뎁혀버리면 그 요리사 음식 다 날아갑니다. 그날 음식 계속해서 그날 제공 받을 때 계속해서 은혜 제공 받을 때, 신선하지요.

그래서 성도는 늘 신선합니다. 주님께서 이 인간의 행하지 못한 걸 내놔라고 하는 거예요. 행하지 못한 것을 내놔야 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이스라엘이 주변나라하고 섞여서. 주님의 불가능성은 주님의 요소가 됩니다. 이게 주님이 함께 있다는 요소거든요. 그 대표적인 것이 레위기에서 제가 이야기한 할례. 과수원 가서 살면서 3년 동안 하는 거 먹지 마라. 이건 니가 먹을 과수원이 아니다. 내가 먹을 과수원이다. 과수원해가지고 과일 따먹고 그거 해가지고 먹고 살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니 생명은 더러워서 안 받는다. 할례행한 과일을 먹어라. 할례 행한 과일. “내가 과수원 농사를 한다고 애썼습니다.” 를 그걸 3년 동안 다 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과일 열매를 준 과일을 먹어라. 3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요소가 불가능성으로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항상 불가능성을 요구하는 겁니다. 가능한 거 말고.

그런데 이방민족과 섞이면서 하나님 언약이 빠진 인간의 행함으로 나라를 한 번 해보려고 이스라엘이 변조되기 시작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인간의 본성이 속이 다 들통 나기 시작하는데, 주님의 불가능성을 믿을 때도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오래가지를 않는 거예요.

주님의 불가능성은 주의 은혜로, 은혜로 하지만, 역시 돌아서면 내가 뭔가 행해야 결과가 있지. 내가 행하지 않았는데 무슨 결과가 주어지겠느냐는 생각으로 후딱 되돌아와요. 후딱. 속히 되돌아와요. 그러니까 다른 이방 민족들은 인간의 행함으로도 좋은 큰 나라 되는데 자기는 주님의 행함으로 해놓고 나라가 별로 믿음직하지를 못해요. 나라가 숫자도 많지 않고.

그걸 에스겔에 보면 나와요. 이스라엘 가지고 약소국가라고 해요. 약소국가는 알지요. 숫자가 얼마 안 되는 약한 나라. 주께서 의도적으로 약한 나라한 거예요. 마구 무시해서 덤비라고. 내가 제 때 제 때 심판해 줄게. 그 방침이 주의 방침인데 이스라엘 본인이 그만 약소국가된 게 본인이 불안, 불안한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자기 행함을 점점 더 첨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행함을 첨가하니까 누가 말리겠어요. 파수꾼 역할하는 선지자가 말리겠지요. 말리니까 공동체 자체가 이게 아예 축구공처럼 원형이 돼가지고 이게 뭔가 잘못된 그 안에 짜그러진 거예요. 완전히 블랙홀처럼 내부 중력에 의해서 스스로 붕괴돼 버린 거예요. 천장이 내려앉듯이. 버티다 버티다 그냥 무너져 버리는 겁니다. 무너질 때 850:1, 400:1 대다수가 다 가버렸어요. 엘리야와 미가선지자는 그야말로 소수였습니다.

400명인데 혼자, 850명인데 혼자. 사람들이 파수꾼을 죽이고 핍박하지요. 그 때부터 파수꾼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지키는 파수꾼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 넘어오지 말라고 하나님이 파수꾼 선지자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는 전하는데 그들이 스스로 붕괴되라고 들을 귀가 없네요. 들을 귀가 없는 거예요.

들을 귀가 없어가지고, “저 선지자나 파수꾼은 저거 뭐라고 하는 거야? 저 인간 저거. 도대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지.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왜 하는 거야?”라는 것으로 말하게 유도해서 이스라엘 말고 선지자를 파수꾼으로 세우게 돼있는 파수꾼부터 먼저 있고 후에 새 이스라엘 파수꾼 뒤쪽 편에 주께서 주님의 불가능성으로 주님의 행함으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나라를 준비해 놓은 겁니다. 그게 신약 성경이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세상 망했다. 세상 망했다는 게 전도입니다. 망할 거니까 회개하세요. 가 아니고 “망했어. 이제 세상 미련 두지 마!” 이게 전도에요. 어제 안 해줬던 이야기 하게 되면 또 추가하게 됩니다. 전도라는 말은 뭐냐 하면 “세상 더 시간 끌어봤자 소용없어. 다 알아.” 이게 전도에요.

뭐 발전, 발달, 개선, 추잡고 더러워서 그건 손길이 가면 점점 더 더러워지는 거예요. 전도라 하는 것은 배풀랑 가운데 해야 돼요. “끝났어! 안 돼!” 개그에 있지요. 안 돼! 끝나버렸어. 신나지 않아? 안 살아보고 해답을 다 알아버린 거예요. 그게 세례요한입니다.

이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 시대에 파수꾼이 되는 거죠. 나는 망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원래 주께서 다른 세계를 마련했기 때문에 내 인생 망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원래 하나님이 구상했던 원래 이스라엘이 구상했던거요. 그 연속성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고린도전서10장에 보면 광야에서 동일한 음식을 먹고, 동일한 음료수 물을 마시면 그건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불가능성이지요.

왜냐하면 개성들이 있기 때문에 절대 하나가 될 수 없거든요. 하나 될 수 없는데 하나 되었으니까 그것을 파수꾼은 그 차이를 지키는 것이 이 시대의 파수꾼 성도입니다. 주님의 피, 그래서 사도행전20장28절에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연속성이지요.

그 연속성은 하나님의 불가능성을 통해서 연속성이 주어지지요. 그래서 지금도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수시로 우리 사태 속에서 묻습니다. “너, 내가 준 거 있어?” “있습니다.” 하고 피 내놓으면 되지요. “주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제가 연속성 주께서 저를 예수님의 피 만이 있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피로 넘어왔기 때문에 그 피와 피 사이에 하나로 연결되어있지 않습니까.” 그 피에 대한 고백.

그게 바로 연속성이고 그게 바로 인간의 행함 속에서 나올 수 없는 불가능성입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수요예배의 요지였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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