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자연과 언약

아빠와 함께 2022. 7. 19. 14:59

[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10 - 자연과 언약

22,07,11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이방나라가 된 이스라엘 !!

오늘은 교재 63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 제목이 '이방나라가 된 이스라엘' 이라는 말이죠.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은 서로 반대인데,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 안에 언약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이 있으면 이스라엘이고, 언약이 없으면 이방나라라는 말이죠.

이것을 칠판에 한번 적어보겠는데,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고, 그 외의 모든 나라는 이방나라다" 라는 겁니다. 이방나라는 언약이 없다는 말이죠. 언약은 하늘의 요소인데, 이 하늘의 요소가 지상까지 내려온 것이 언약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방나라는 이런 하늘의 요소가 없고, 전부가 다 땅의 요소라는 겁니다.

이 땅의 요소에서 생기는 것이 바로 종교라는 것인데, 그래서 이방나라는 종교를 만들고, 그런 종교 안에 신을 넣어서 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입장에선, 이 신을 우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들은 신을 섬기는데, 불교신자도 신을 섬긴다는 것이죠.

*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 !!

그러면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늘의 요소가 되려고 하면 무엇을 뚫어야 되는고 하니, 신을 찢고 튀어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언약에 도달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이방나라의 신은 땅의 요소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절대자인데, 이게 신이고 종교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방나라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인데, 이 땅을 요소를 말이죠. 반면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어떻다는 겁니까? 그 이스라엘 속에 들어있는 하늘의 요소를 지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존재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방금 땅의 요소를 지켜주고 보호해준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게 이방나라의 신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런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이 과연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없는데, 그래서 싸운다는 겁니다.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은 하나가 될 수 없는데, 서로 싸우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 복음인가? 직장인가?

지금 여러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그렇지요? 그래서 그 다음 질문에 들어가는데, "복음과 나의 직장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라는 겁니다. 제가 좀 잔인한가요? 다들 직장이 없어서 제가 마음놓고 이런 질문을 하는데 말이죠(ㅋㅋ). 둘이 결합이 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직장, 즉 '나의 직장' 이란 것은 땅의 요소를 보호하는 것인데, 직장생활을 왜 합니까? 자기가 살기 위해서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가 살기 위해서 신을 만들고, 그 신이 이 땅에 나를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데, 그런 절대자로서의 신을 섬기는 것, 그것은 어디까지나 땅의 요소를 섬긴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내가 이 땅에 태어났다" 라는 것은 땅의 요소가 출생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늘의 요소가 이 땅에 출생했는데, 그분이 누구라는 겁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분은 성령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곧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즉 하늘의 요소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언약대로 오시기 때문에, 하늘의 요소라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은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언약의 최종완성을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복음 안에만 하늘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직장은 땅의 요소인데, 그래서 같이 결합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가 결합할 수 없다고 하면, 여기서 어느 것을 지켜야 할까요? 복음입니까? 직장입니까?

* 피조물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달리 하면, "주님을 지키는 것인가? 나를 지키는 것인가?" 라고 할 수 있는데, 어느 쪽이 피조물의 역할이냐는 것이죠. 즉 "피조물의 역할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갑자기 침묵모드로 들어가는데(ㅋㅋ), 피조물은 피조물인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지켜드려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피조물이니까 그러한데,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은 그 하나님을 지켜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라고 하면서 염려하는 것이 우리 피조물의 할 일이 아니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 그것이 피조물의 역할이라는 말이죠.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다면 여기에 기도를 집어넣게 되면, 이 기도의 내용은 과연 무엇이야 할까요? 제가 친절하게도 보기를 드리겠는데, "(1) 내 직장, (2) 내 가정, (3) 내 교회 (4) 내 국가, (5) 그 나라와 그 의" 라고 한다면, 여기서 몇 번입니까? 5번인데, 하지만 이렇게 5번이 되기 위해서는 앞의 것들을 모두 제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1번에서 5번까지는 기도내용이 들어갈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안에 '나' 라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 '나' 라는 것은 땅의 요소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논리적으로 전혀 어렵지가 않은데, 그렇지요?

* 종교를 찢어버려라 !!

그런데 사람들은 기도라는 말만 듣게 되면 어떻게 나옵니까? 여기 5번은 어디론가 다 날아가 버리고, 1번에서 4번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는 말이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이 땅의 종교가 그만 인간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종교를 찢어버려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구원을 받는데 교회가 필요합니까? 교회, 즉 종교라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 선배들이 다 해봤다는 겁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율법대로도 살아봤는데, 또한 제사도 거기에 필요한 기구들도 만들고 하면서 다 해봤다는 겁니다. 그리고 특정한 지점에 성전을 짓고, 예배도 드리고 다 해봤다는 말이죠. 물론 십일조도 드리고, 그것도 다 해봤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해서 구원이 될 것 같으면, 굳이 메시야가 이 땅에 오지도 않았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이 행한 것에 마치 숟가락을 하나 얹듯이, 그렇게 보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게 아니면 기존의 땅의 요소를 부수려고 오셨습니까? 어느 쪽이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선 이 땅의 요소를 부수려고 오셨는데, 그러니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교회는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교회에 오시면 안 되고, 교회로서 와야한다는 겁니다. 성전에 가면 안 되고,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여러분이 집에 있다가 교회로 가게 되면, 그러면 그것은 "교회 + 가정 지키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가정에 있어도 교회인데, 그런데 가정이 따로 있고 교회도 따로 있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마치 복음과 자기 직장이 따로 노는 것처럼 말이죠.

아무튼 이 두 개는 결합이 될 수가 없는데, 즉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냥 사시면 된다는 말이죠. 왜 우리는 그냥 살면 되는고 하니까,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려주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 내 목숨은 나의 것이 아니다 !!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다 지우고, 한 문장으로 적으면 "내 목숨은 나의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기본적으로 되지 않으면 성경자체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복음을 말이죠. 왜냐하면 복음을 방해하는 것은 자기의 것이 따로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자기 목숨이고 가정이고 직장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 목숨은 나의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 목숨이 누구의 것이라는 겁니까? 자기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이미 자기 걱정과 고민에서 벗어났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지금 제가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걱정과 근심이 왜 생깁니까? "내 목숨은 나의 것이다" 라는 것인데, 즉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붙들고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니까, 그래서 걱정과 근심이 도저히 떠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이것은 비단 어느 누구만의 문제가 아니고, 아담의 후손들이라면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목숨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살게 해주던 더 연장을 해주던 간에, 그런 것은 우리 자신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의 것인데, 왜 자기가 걱정을 사서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님을 깨끗하고 쿨하게 인정하게 되면, 그렇게 방해를 받던 복음이라는 것이 드디어 보이게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목숨이 아니니까 자기를 위한 기도는 성립이 되지 않는데, 물론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신앙도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위한 믿음, 자기를 위한 소망, 자기를 위한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걱정과 고민을 할 건더기가 모두 사라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런 고민거리를 제공해주던 바탕자체가 그만 날아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 내 인생은 매일 주님에게 빼앗긴 인생이다 !!

이것을 다른 문장으로 간단히 하면, "네가 살아온 인생을 복음으로 설명해봐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복음으로 설명하면 여기서 무엇이 나올까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니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나의 인생'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방금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복음으로 설명하면, "내 인생은 매일 매일 주님에게 빼앗긴 인생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가져가시고, 또 가져가고, 또 가져가시는데, 즉 "이것은 네 것이 아니다. 노타치!" 라고 하시면서, 매일같이 가지고 가신다는 겁니다.

* 내가 제일모직과 김우중과 박정희를 좀 아는데 !!

오늘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80대의 부부가 앞에서 가고 있었다는 말이죠. 거의 매일 보지만 인사도 잘 하지 않는데(ㅋㅋ), 그렇게 가면서 남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제가 듣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고 오늘따라 앞에 가면서 큰소리로 이야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대구의 제일모직을 김우중이 먹으려고 했는데 박정희가 먹지 못하게 해서, 그래서 제일모직은 망하지 않고 잘 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제일모직과 김우중과 박정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그러니 그런 것이 자기가 살아온 인생 가운데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제일모직과 김우중과 박정희를, 그런 게 들어있는 자기 인생을 복음으로 설명하고 있는 모습입니까? 과연 자기의 살아온 인생을 복음으로 이야기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전혀 그게 아닌데, 오히려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은 말을 할 때, 그냥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은 내 것이다. 그러니 건드리지 마라.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당당하게 살아왔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바깥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죠. 남의 이야기를 말이죠.

이 노인네가 정말로 복음을 안다고 하면, "내가 제일모직도 알고 김우중과 박정희도 아는데, 하지만 내가 진짜로 아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빼앗겨야 마땅하다" 라고 하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감추지 않는 인생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 것은 감추고 남의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를 위장하고 있다는 말이죠. 저는 뒤를 따라가면서 그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다 들었는데, 물론 그 내용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정희가 개입하지 않는 곳이 없는데, 아무튼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평소에 내뱉는 단어들은, 자기를 교묘하게 감추는 용도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와 '복음' 이라는 것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데, 결합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말하는 복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종교로서의 복음이라는 말이죠.

* 십자가의 현실성 !!

그런데 그게 아니고, "죄인 + 복음" 이라고 하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나는 믿음이 좋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는 무엇이 나오는고 하면,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현실성' 이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가 지금 나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했다" 라는 것인데, 그런 고백을 하면 그게 주의 증인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이스라엘이 맞습니까?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그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냥 애굽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히브리인들이, 그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들이, 그들이 이스라엘이 되려고 하면 여기에 무엇이 개입이 되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의 어린양인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애굽인이고 그냥 이방인이라는 겁니다. 전혀 언약이 아니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언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 방주가 곧 언약 !!

이 '언약'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난 이유가 방주인데, 그 방주가 곧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애굽 당시에는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방주역할을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방주가 큽니까? 노아의 가족이 큽니까? 방주가 큰데, 그래서 방주 안에 노아의 여덟 식구가 옹기종기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으로 표현하면, "십자가가 큽니까? 인간이 큽니까?"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십자가가 크다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했다는 겁니다. 즉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 라는 것이죠.

같은 말로 '성령 안' 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성령 안이라고 할 때는 방주를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도 역시나 마찬가지이고, 방주 안에서의 노아 가족을 생각하면 된다는 말이죠. 방주 안에서 노아의 식구들이 다투기도 했을 텐데, 그래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방주가 더 크기 때문인데, 거기에 실려간다는 말이죠.

* 물은, 심판의 용도 !!

그렇다면 방주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물이 있다는 겁니다. 그 물은 마시라고 준 것이 아니고 심판용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방주 바깥에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노아가 착하다고 해도, 죽는다는 겁니다. 즉 착하고 착한 인간이 십자가 바깥에 나가면, 그러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유월절 어린양의 바깥으로 나가면 저주를 받는데, 그런데 히브리인들이라는 이방인들이 유월절 언약을 만나서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이스라엘이 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자기를 지켜야 합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취지를 지켜야 합니까? 언약이라는 겁니다.

* 너희가 언약을 지켰느냐?

그래서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언약을 지켰느냐?" 라고 하는데, 잔소리도 그런 잔소리가 없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 언약은 율법과 제사법으로 되어있는데, 율법을 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율법은 칼이라는 말이죠. 율법을 가지고 소위 잘났다고 하는 인간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부모를 공경한다고 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닌데,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6계명이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이죠. 부모를 공경해도 살인을 하면 다 무효가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살인이란 것이 남을 미워하는 것인데, 그러니 부모를 공경해도 남을 미워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 다음의 7계명이 "간음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하고, 그리고 남을 미워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이 간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생식본능인데, 즉 짝짓기를 해야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죠.

* 당신은 성추행범이야 !!

예를 들어서, 젊은 남녀가 카페에서 선을 보는데, 남자가 무엇이라고 하면서 프로포즈를 해야합니까? "수입이 얼마나 됩니까?" 라고 하면 안 되고, 물론 속마음은 그러해도 말이죠(ㅋㅋ). 그러면 안 되고, "제 아내가 되어주시겠습니까?" 라고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게 간음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왜 간음인고 하니, 여자가 "O.K" 라고 하면, 이게 간음으로 출발했지만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자가 "나는 당신이 싫어요" 라고 하면, 이것은 남자가 그만 스토커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여자가 "당신은 내 마음도 모르고 나에게 일방적으로 프로포즈를 했는데, 그러면 그게 저에게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여자가 실례를 범하고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의사를 타진해보는 것인데, 그런데 여자는 남자가 자기에게 성추행을 한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여자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추행이고 아니고 하는 것은 여자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이죠.

만약에 마음에 들면, 평소에 너무 좋아하던 남자가 와서 "나와 결혼해주세요" 라고 하면, 어느 여자가 그것을 성추행으로 이해하겠느냐는 겁니다. "좋아요. 결혼합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남자의 입장에서는 모험인데, 잘못되면 성추행범이 되고, 잘되면 결혼을 하는 것이고, 그러니 남자는 어차피 도박이라는 겁니다. 즉 "간음인가? 혼인인가?" 라고 하는, 그 기로에 서 있다는 말이죠.

* 탐심, 그것이 문제로다 !!

그리고 9계명에 보면 "거짓말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앞에 있는 1계명에서 8계명을 모두 다 지켜도 거짓말을 한 번이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것으로 그냥 끝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10계명은 부처님도 지킬 수 없는 계명으로, 그것이 바로 '탐심' 이라는 것인데, 즉 "탐내지 말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출 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출 20:10)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3)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4) 간음하지 말지니라
(출 20:15) 도적질하지말지니라
(출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 불교의 딜레마 !!

이 계명을 지킬 수 없는고 하니, 석가모니는 해탈을 하려고 하는 탐심을 가졌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불교의 딜레마인데, 그래서 불교에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그만 없애버렸다는 말이죠. 자기가 없는 것, 그게 해탈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데, 자기 자신이 없으면 굳이 해탈을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니 이것은 불교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 8계명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욕심 때문에 힘이 드니까 이 욕심을 없애고 싶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욕심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은 탐심일까요? 탐심이 아닐까요? 그것도 역시 탐심이라는 말이죠.

*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어 !!

거기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보겠는데, 우리 인간은 자연을 전혀 이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 신자들은 이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인간은 육체로 되어있는데, 그러면 이 육체는 자연입니까? 자연이 아닙니까? 육체는 자연인데,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관계를 맺음으로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에 잉태되지 못한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연에서 인간은 그것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겁니다. 이미 태어난 육적인 본성, 그 요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인간이 자연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항상 자연은 인간을 이긴다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을 벗어날 수가 없는데, 인간을 포함해서 자연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연과학에는 생물학도 포함이 되어있고, 이 생물학에서 인간도 다룬다는 겁니다. 세포가 어떻고 하는 것은 다 생물학인데, 그러한 생물학은 자연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가 없는데, 그래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기에, 그래서 하루 하루를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자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로마서 8장에 보면, 피조물은 '썩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냉장고가 고장이 나면 냄새가 나는데, 썩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연이 썩으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 인간도 역시 같이 썩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방주 안에서 노아는 늙어 가는가? 젊어 가는가?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방주 안에 노아가 있는데, 그렇다면 "방주 안에서 노아는 늙어갑니까? 젊어갑니까? 그게 아니면 그대로입니까?" 라고 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죠. 문제가 너무 쉬운가요? 노아와 그 식구들은 방주 안에서 늙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방주는 물에서는 구원을 시켜줘도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 후패함, 즉 썩어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노아언약은 보다 더 완전한 언약까지 진척이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완전한 언약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고, 그리고 사흘만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심,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곧 완전한 언약이고 오늘날의 방주라는 말이죠. 그러니 생명이라는 언약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썩어가는 죄인의 이 더러운 목숨을 주님을 직접 찾아오셔서 빼앗아 가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제가 두 가지 보기를 제시해드리겠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맞춰보시라는 말이죠. "1번, 내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2번, 복음이 나를 찾아왔다" 라는 것인데, 이것 중에서 어느 것이 맞습니까? 이것도 어렵지 않은데, 2번이라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9장 15절에 나오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마 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주인공인 신랑만 있으면 '굿' !!

하나님 쪽에서 찾아오셨는데, 혼인잔치의 주인공은 신랑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인공인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우리가 전혀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나의 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신랑의 있음' 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면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과 신랑에게 일어난 사건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이라는 겁니까? 신랑에게 일어난 사건이 우선인데, 그러니 자기에 일어난 일들로 인해서 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언제 울어야 합니까? 그게 뒤에 나오는데, 신랑이 함께 있다가 빼앗기는 순간이 오는데, 그때 울 수 있는 자가 성도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예수님이 떠나도 "그래, 이유가 다 있어서 떠났겠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함께 있던 순간에도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이용한 것인데, 그러니 주인공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은 것인데, 예수님은 믿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오히려 철저히 이용한 것인데, 자기가 보다 더 잘 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 경우에는, 예수님이 사라지고 없으면 아쉬운 정도이지, 굳이 울고불고 할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여기 있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주님의 여기 있음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런 주님이 자기를 찾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나의 있음'이 아닌 '주님의 있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빼앗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을 빼앗기고 없어지는 것이 제일 통탄할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 복음이 덜렁 나를 찾아왔습니다 !!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새로운 말씀이 없다고 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는 것이죠. 그러니 제일모직이나 김우중 이야기를 하지 말고, 박정희 이야기를 하고 말고, 예수님 이야기를 해달라는 겁니다. 자기는 그분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그야말로 방주 안의 노아와도 같은 입장이라는 말이죠. 주님에게 다 빼앗기고 주님 안에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그러면 그것은 자기 자랑이 되고 마는데, 행함이 된다는 말이죠. 물론 믿음이라고 우기지만 전혀 믿음이 아니고, 자기가 어떤 권모술수를 부렸다는 겁니다. 즉 "내가 간절히 기도해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복음은 그게 아니고, "복음이 덜렁 나를 찾아왔습니다" 라는 것인데, 예고도 없이 복음이 그렇게 찾아오니, "아하,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복음이 '쑥' 들어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복음이 예고도 없이 들어오니 무엇이 다 깨지고 말았습니까? 자기가 믿던 종교가 다 깨지고 말았는데, 기독교가 다 깨어졌다는 겁니다. 자기를 지켜주던 종교가 말이죠.

* 주의 이름 앞에 길을 여는 자연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진 적이 없는데, 그러면 인간은 자연에 갇혀있고, 그 자연과 함께 썩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자연이 썩어가고 있는데, 그런데 거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고 하면, 그러면 구원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유월절의 어린양과 함께 가니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홍해가 가로놓여 있는데, 이 홍해는 자연이라는 겁니다. 자연은 인간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장차 이 자연을 이기는 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는데, 그게 '주의 이름' 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연을 이기신 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니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자연을 이길 필요가 없어도,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는 분을 위해서는, 자연이 그분의 길을 가로막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홍해라는 자연이 길을 내주었다는 겁니다.

* 바닷가에 떠밀려온 무기와 갑옷들 !!

그런데 뒤따라오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애굽 군사들인데, 이들에게는 유월절 어린양, 즉 하나님의 언약이 빠져있다는 것이죠. 언약과 주의 이름이 같이 있으니 말이죠.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데, 그런데 이것들이 건방지게 홍해에 난 길을 급하게 뒤쫓아서 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연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길을 내줘도,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그만 원위치를 해버린다는 말이죠. 있었던 길을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열렸던 바닷길이 닫히니, 수많은 애굽의 군사들이 그만 홍해에 빠져 죽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홍해를 무사히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발견했는고 하니, 애굽 군사들의 무기와 갑옷이 바닷가에 떠밀려온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았지 싶은데, 오직 언약이라는 겁니다. 즉 하늘의 요소라는 말이죠. 그 하늘의 요소가 찾아오게 되면, 하나님은 하늘의 요소 안에 계획된 대로,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를 구분하신다는 겁니다.

* 언약의 맞춤백성으로 새롭게 교체를 !!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그렇다면 만약에 이스라엘이 이 하늘의 요소, 즉 언약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조치하시겠느냐는 말이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언약이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무시한다면, 요즘 말로 표현하면, 교인들이 복음을 하찮게 여긴다고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언약의 맞춤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교체를 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제 오후시간에 잠시 언급했는데, 여기서 시간이 좀 가더라도 성경을 한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인데, 25절에서 28절을 제가 빨리 읽겠습니다.

(출 32: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출 32: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출 32: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출 32: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 저놈들을 다 도륙하라 !!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고 하니, 여기 28절에 3,000명 가량 죽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온 3,000명이라는 말이죠.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짓을 했는고 하니,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서 섬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긴 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위배가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모세의 편에 서도록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우상이 아니고,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모세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겁니다. 언약은 잘 모르겠고, 여호와만, 그런 신만 섬기면 된다고 여기는 자들, 율법이 없어도 된다고, 언약이 없어도 된다고 여기는 자들은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만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모세 편에 서지 않은 자들은 언약과 자기 생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까? 언약이라는 말이죠. 이미 그들은 홍해를 건너오면서 죽은 자들인데, 그런데 언약 때문에 무사리 홍해를 건너왔다는 것이죠. 그러니 언약이 아니라면 진작에 다 죽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 너무나 자연스러워 !!

우리가 십자가가 없으면 살아도 그것은 전혀 산 것이 아닌데, 그것은 지옥이라는 말이죠. 지금의 우리 목숨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썩어지고 후패해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루가 다르게 몸이 허물어져 가는 것에 대해서, 전혀 미련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죠.

오늘 이렇게 앉아있지만, 30년 후에도 앉아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30년이면 기간을 많이 잡은 것인데(ㅋㅋ), 송해가 96세에 갔으니 넉넉하다는 말이죠.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 안 되는데, 그게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의 이 육신의 목숨을 가지고 가기 전에 단디, 대구은행에서 '단디 카드' 라고 나왔는데 말이죠(ㅋㅋ). 그러니 우리가 최종언약을, 방주가 아니고, 교회가 아니고. 그게 자연을 이긴 안, 즉 최종언약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안' 이라는 것이죠. 그 능력이 자연도 이겼는데, 그러니 죽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 저는 죄인입니다 !!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꼭 "목사님, 제가 십자가 안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라고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것은 제가 아까 답변을 해드렸다는 말이죠.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복음으로, 십자가로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일모직이나 김우중을 찾지 말고, 자기가 어떻게 살았던 간에 "저는 죄인입니다. 오직 십자가 피로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당신은 성도도 아니야" 라고 해도, 그것은 신앙도 맞고 성도도 맞다는 겁니다. 오직 십자가만 나와야 하는데, 자기 종교가 아니고 말이죠. 종교는 우상이라는 겁니다.

* 제물사건, 희생사건, 심판사건 !!

아무튼 그렇게 해서 3,000명이 죽었는데, 지금부터는 좀 어려운데 말이죠. 그 죽은 3,000명이 제물이 된다는 말이죠. 제물이라고 하면 좀 어폐가 있고, 그게 제물 사건이 되고, 희생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죽여나가는데, 다른 말로 하면 심판 사건이라는 말이죠.

주님께서 함께 있으면서, "아닌 것은 아니야" 라고 하시면서 심판하실 때, 그런데 그 심판을 통해서 쫓아내는 것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그 심판 사건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심판이 없으면 구원도 없는데, 바로 그것을 새삼스럽게 광야생활을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조금 전에 "율법 + 제사법" 이라고 했는데, 이 두 가지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았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율법 + 제사법" 이라는 말이죠. 율법이라는 것은 "너희들은 이렇게 지켜야 한다" 라는 것이고, 제사법은 "지키지 못하는 자는 이렇게 심판을 받는다" 라는 겁니다.

* 심판 속으로 !!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오케이, 이제 됐어?" 라고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 라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또한 그것을 제사법을 통해서 심판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심판 속으로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심판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율법과 제사법을 통과하게 되면, 거기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생명이 나오는데, 즉 구원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제사법에서 어린양만 죽는 것이 아닌데, 그 양의 죽음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우리도 같이 동참해서 죽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합세해서 같이 죽어라" 라고 하는 조건 아래에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끄신다는 말이죠. 양만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같이 죽는다는 겁니다.

제사법을 보면 속죄제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면 양을 잡을 때, 그 양을 누가 잡습니까? 그게 제사장입니까? 죄를 지은 당사자입니까? 죄를 지어서 양을 가지고 온 당사자가 양을 잡는데, 제사장이 그것까지 하게 되면 힘들어서 몸이 남아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죄를 지은 당사자가 뜰에서 양을 잡고, 그러면 제사장은 그 잡은 피를 받아서 뿌리는데, 또한 제물은 부위 별로 잘라서, 이것을 각을 뜬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제단 위에서 홀라당 다 태운다는 말이죠. 그런 하나님의 불 앞에서 어느 누구도 버틸 수가 없는데,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맛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의 목숨을 소재로 사용해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이 된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우리의 인생이 필요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성도라는 겁니다. 그렇게 보니 우리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데, 돼지를 잡으면 그렇다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우리의 지은 죄도 주님께서 필요로 하신다는 겁니다.

* 잠시 정리하면 !!

이제 정리를 해보면, 이스라엘은 시내산에도 율법도 받고 제시법도 받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반드시 피가 나오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율법과 제사법,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엔진부위라는 말이죠. 제일 중요하다는 겁니다. 만약 이스라엘에 바퀴가 달려있다고 하면, 어디에 굴뚝이라고 했으면 완전히 증기기관차라는 말이죠.

그래서 '칙칙폭폭' 소리를 내면서 달려가는데, 그러면 이 이스라엘이 어디로 달려가겠습니까? 율법과 제사법이라는 엔진부위가 작동하고 있는데, 여기는 홍해가 있고, 또한 광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게 되는데, 이 이스라엘을 증기기관차, 즉 방주라고 여기고, 여기 안에는 율법과 제사법이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주변의 환경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이방나라라는 겁니다. 이 이방나라는 우상을 섬기는데, 물론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우상이고, 그들은 그냥 자기들의 신을 섬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신과 언약을 준 신 가운에서, 어느 쪽이 진짜 신이지, 그것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쳐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 이 환경이 결코 진공상태가 아닌데,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우리가 천국에 가면서 진공상태에서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꾸만 부딪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비복음적인 세상관이고 아이디어들이라는 말이죠. 마치 운전을 할 때 눈보라가 몰아치면 유리창에 눈보라가 부딪치듯이, 그런 일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 행함이 아닌, 은혜 !!

그것을 사도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한 단어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바로 '행함' 이라는 말이죠. 로마서 9장에도 나오고 말이죠. 거기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 )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행위, 즉 행함이라는 겁니다. 그게 걸림돌이 되어서 십자가 앞에서 넘어졌다고 한다는 말이죠.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까? 인간의 행함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서 계속해서 남은 자를 남기면서, 그 남은 자만 구원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로 남기신 남은 자라는 것이죠.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방금 제가 두 가지 단어를 이야기했는데, 그게 바로 '행함'과 '은혜' 라는 겁니다. 행함이 아닌 은혜로 구원이 된다는 말이죠. 인간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서 남은 자가 되어서, 즉 행함이 필요치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구원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은혜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율법 + 제사법", 이것을 온전케 하는 것이 십자가인데,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홀로 행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행하심인, 그 행하심의 완성이 은혜로서 주어지게 되면, 그게 인간들의 개인적인 행함으로 이긴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주변에는 이방나라들이 깔려있는데, 하나님은 이런 이방나라를 '더럽다' 라고 하시고, 이스라엘을 '거룩하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율법 + 제사법", 이것이 제대로 가동이 되면 바깥에는 거룩함이 나온다는 겁니다. 반면에 이방나라는 인간의 행함으로 신을 섬기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러움이 나온다는 것이죠. 선악체제에서는 더러움이 나온다는 겁니다.

* 발락 왕, 발람 선지자 !!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이게 출애굽기부터 신명까지 모두 다 설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이 두꺼운 성경의 전체그림을 다 본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신명기 앞에 있는 민수기의 경우에는, 이방나라가 이스라엘에게 덤벼들려고 나름대로의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특히 모압의 왕인 발락의 경우에는, 돈을 주고 발람이라는 이방나리의 선지자를 고용해서 진격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발람의 입을 조종해서, 저주가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축복이 나오게 하셨다는 겁니다.

(민 23:18)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나를 자세히 들으라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민 23:20)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민 23: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민 23:22)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민 23:23)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민 23:24)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했을 때,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늘강의에 의하면, 그게 '자연으로부터의 탈출' 이라는 말이죠. 이 자연 속에는 우리의 몸도 포함이 되어있는데, 그런 자연에서의 탈출이라는 겁니다.

* 자연의 순종 !!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를 배를 타고 가는데, 그만 풍랑이 일어났다는 말이죠. 그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왜 주무셨을까요? 잠꾸러기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 인간들이 자연을 대처하는 방법을 마음껏 보여주기 위해서 주무셨다는 겁니다.

그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1번) 기도했다, 2번) 물을 퍼냈다" 라는 것인데, 몇 번입니까? 기도해도 소용이 없고 물을 퍼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인간의 자기 믿음을 가지고 자연을 돌파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결국 마지막에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들로서는 도저히 안 되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다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다를 꾸짖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먼저 꾸짖었다는 겁니다.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주님과 동행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는데, 그러자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겁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하는 말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도 순종을 하는가?" 라고 했다는 말이죠. 바꾸어서 말하면,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기에, 이 자연이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는가?" 라는 겁니다. 어떻게 대자연이 엎드려서 순종을 하느냐는 말이죠. 이렇게 대자연은 순종을 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막 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막 4: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막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막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막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막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막 4: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하지만 인간은 엎드릴 줄을 모르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다는 겁니다. 악마는 굴복할 줄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설교를 할 때는 사람을 바라보고 하면 안 되는데, 배후에 있는 악마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악마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악마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악마는 자기가 도저히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인간들에게 자기처럼 구원되지 않도록 하는 방식을 가지고, 계속해서 인간들을 윽박지른다는 겁니다. 자기와 같이 지옥에 가자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곧 행함이라는 것이죠.

분명하게 주님의 행함이 있는데, 그것은 뒷전이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행함이 아니라 자기 행함을 가지고, "제가 이렇게 착하지 않습니까? 훌륭하지 않지 않습니까? 선교를 했잖아요? 순교를 했잖아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런 인간이 행함, 이것은 아까 했는데, 인간이 행함을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 다시, 복음인가? 직장인가?

다시 해보면 "복음인가? 직장인가?" 라는 것 중에서, 이게 결합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왜 행함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자기 직장에서 행함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냥 졸고 있으면 누가 월급을 주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자꾸만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버릇 때문에 복음도 행해야 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복음은 행함을 부정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행함으로 더하고 더하면, 그러면 복음이 더욱 더 복음답게 된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평소에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일이 따로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러한 버릇이 남아서 복음도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 사무엘에 의해서 교체가 되는 엘리 제사장 !!

여기 교재 63페이지에 보면, 어떤 제사장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엘리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엘리 제사장은 그만 잘리게 되는데, 누구를 통해서 잘리게 됩니까? 그게 바로 사무엘이라는 말이죠. 사무엘에 의해서 엘리는 그만 교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에 부합이 되지 않는 자는, 아무리 제사장이라고 해도 교체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율법 + 제사법" 이라는 엔진이 계속해서 가동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자들은 그때그때 제거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고, 반면에 엘리는 버려진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교재 64페이지에 보면, "이러한 불신앙을 그대로 담아낸 자가 바로 사울 왕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이 사울 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도 잘렸다는 겁니다. 다윗으로 교체가 되었다는 말이죠. 왜 이런 일이 생기는고 하니까, 언약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누가 구원을 받고 받지 않고 하는, 그런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 라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게 휠씬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 '잃어버린 우산' 비유 !!

이제 낮 시간에 설교한 것을 잠시 언급해드리면, 예로 든 것인데, 제가 아내와 함께 수목원에 갔다가 그만 우산을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두 개인데, 하나는 아주 좋은 빨간 우산이고, 다른 하나는 작고 그냥 평범한 우산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아주 좋은 우산은 손잡이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산을 잊어버린 장소로 가보았는데, 가면서 저는 두 개가 다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반면에 제 아내는 둘 다 없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 틀렸는데, 좋은 우산은 그만 사라졌고, 작고 평범하고 별로 좋지 않은 우산은 그대로 있더라는 말이죠.

그러면 저의 입장에서 보면 좋은 우산이 버림을 받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좋지 않은 우산을 가지고 왔으니 말이죠. 사실은 작은 우산이 더 좋은데, 그것은 손잡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좋은 우산은 버림을 받았는데,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가지고 갔다는 말이죠. 좋은 우산은 저에게선 버림을 받았지만,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자는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 앞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오는데, 그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말이죠.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 나로 인해서 누가 피해를 입고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이 불의한 청지기는 누가 봐도 나쁜 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가 주님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청지기 맞은편에 누가 있는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지만 주님에게는 버림을 받는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사람들로부터 선택을 받을 정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버림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사울 왕이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존경을 받는 왕이 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했는데, 그런데 그 피해가 누구에게 갔습니까? 지금부터 키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소년 다윗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어떤 공식이 발생하는고 하니, 인간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는 것만큼 남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죠. 자기에게 피해를 입은 자들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니고 다들 참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 우리 오은영 박사에게 상담을 받아보자 !!

부부상담을 해주는 오은영 박사라고 있는데, 요즘 대세인데 말이죠. 어떤 부부가 있는데, 아내는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은 가만히 참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둘이 상담을 받아보니, 여자의 입장에서는 남편에게 문제가 있다고 단정을 하고, "그래, 우리 오은영 박사에게 상담을 받아보자"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비용이 엄청난데,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상담을 받아보니 여자 쪽에서의 문제가 더 심각하더라는 겁니다. 남자는 기정의 평화를 위해서 계속해서 참고 또 참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자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잘못한 것이 뭔데?"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남자들은 대부분이 다 참고 지나가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남자 편을 드는데(ㅋㅋ), "약한 자가 여자인데, 오죽 했으면 그런 소리를 했을까? 내가 이 집안의 기둥인데, 내가 참아야지. 여자와 어떻게 싸우겠노?" 라고 하면서 말이죠. 사회적인 평판이 있어서 참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는 속이 다 썩어서 내려앉고, 여자는 촐랑거리면서 까분다는 것이죠.

이것을 평소에는 모르고 지냈는데, 자식을 장가를 보내 보니까, 그 아들이 시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닮아서 그대로 한다는 말이죠. 그래도 아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잘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잘 있는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 인간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몰라 !!

비단 이것은 여자의 문제가 아니고 사실은 남자도 다 똑같은데,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가 화난 것만 생각하지, 그런 자기로 인해서 남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의 화난 문제로 인해서 남들이 아프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복음보다도 자기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그게 마귀가 심어준 본성이나 습관처럼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는데, 또한 그게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고민과 염려와 걱정을 자기 혼자서 다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남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자기 혼자서 그렇게 하는 줄 여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들의 아픔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니, 그게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아픔도 역시 모른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성령께서 알려주신 것은 "그 어떤 것도 복음의 가치에 비할 바가 못된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경우에도 네가 구원이 되는 것은, 네가 착하게 살아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발악을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십자가에서 죄를 다 용서하신 그 값어치가, 네가 잘 되려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귀하고 중요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자기를 섬기는데 최적화가 된 인간 !!

사울은 왕인데, 그렇지요? 그 사울 왕은 자기를 섬기는 것에 최적화가 되어서, 자기가 아닌 다른 분을 섬길 재주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울 왕이 여호와를 언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를 섬기기 위함이 아닌데, 이미 자기를 섬기는 것에 최적화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여호와가 되던 누가 되던 간에, 자기 외에 다른 것은 섬길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인데, 인간은 자기를 섬기는데 있어서 독종이라는 말이죠. 오늘강의 제목은 '독종'으로 하고 싶은데, 그렇게 인간은 주구장창 자기만을 섬긴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뭐라고 합니까? 자기는 예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는데, 그러니 구라도 그런 구라가 없다는 말이죠. 인간의 종교라는 것은, 신을 섬기는 척을 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긴다는 겁니다. 그것이 종교라는 것이죠. 인간은 자기 외에 남을 섬긴 적이 없다는 겁니다.

* 제가 그렇게 나빠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번에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는데 말이죠. 작품상을 받아도 충분하다고 했던 영화라는 겁니다. 그 평을 제가 친절하게 십자가 마을에 올려놓았는데, 거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는 말이죠.

여자가 형사를 이용해서 자기가 살인한 것을 모면하려고 하자, 그것을 형사가 나중에 다 알고서 여자에게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라고 묻는다는 겁니다. 그러자 여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역을 중국출신 여배우 탕웨이가 맡아서 발음이 좀 어눌한데, "제가 그렇게 나빠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천국과 관련지어서 응용을 해보게 되면, "천국이 그렇게 만만합니까?" 라고 하면, 그러면 교인들은 "제가 그렇게 죄인입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영화를 봐야 같이 웃던지 말던지 하는데, 지금 전혀 반응이 없어서 좀 그러한데 말이죠(ㅋㅋ).

* 교회는 위험천만한 곳 !!

아무튼 우리는 세상을 선택하고 세상은 우리를 선택했는데, 그러면 세상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내가 너를 좋아하니 세상으로 들어와" 라고 한다는 말이죠. 바로 그런 세상 중의 하나가 교회인데, 교회가 천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를 빛낼 수 있는 곳, 즉 자기 행함의 가치를 누가 알아주기를 원한다는 것이죠.

자기의 믿음, 자기의 용기, 자기의 열성, 그런 것들로 인해서 주위에서 자기에게 박수를 쳐주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남들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신앙인인지, 그것을 자랑질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위험성을 모르고 신나게 다니고 있는데, 일요일만 되면 평소보다 더 분주하게 아침부터 단장해서 교회에 출근을 하는데, 그렇게 해서 하루종일 교회에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거기서 자기의 존재 의미가 발생하기 때문인데, 즉 자기의 가치, 그것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의 소중함이 일깨워지는 곳이 곧 교회라는 말이죠,

* 천국이 그렇게 만만해?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천국이 그렇게 만만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인데, 그 가치 앞에서 우리는 왕창 다 망해도 전혀 괜찮다는 말이죠. 언약 안에, 즉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고 하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 예수님을 내부적으로 찌그러지게 하시는데, 뭉개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죄를 지은 것까지 하나같이 쓸모가 있다는 말이죠. 이스라엘을 택해놓고 이스라엘을 뭉개버림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뭉개지면서 나왔던 것이 선지자의 피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 때문에 당하는 사무엘의 고난이고, 그리고 사울로 인해서 당하는 다윗의 고난이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쫓겨다니는 다윗의 아픔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인간세계에 들어온 예수님의 고난이고 아픔이라는 말이죠.

*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그것을 이방민족과 같은 우리를 통과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이 되셨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이 십자가 안에서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다시 사는 능력은 이 십자가 안에만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데, "주여, 십자가 앞에서 제가 어떤 인생이 되어도 괜찮습니다.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이 우리보다 더욱 더 소중하고 선행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구원시켜주는 하나님으로 오해를 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만을 살리시고, 그들은 거기에 재료가 된 줄로 압니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7,16 오전 10시에 마침.

하나님의 잔소리인가? 마누라의 잔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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