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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09-15 13: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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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할 때 이것이 끊어진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 되겠습니다. 만약에 오전에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오후에 내가 화를 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아,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것이 아닌가?’ 3년 전에 잘 믿었는데 지금은 교회도 안 나온다, ‘아,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졌구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할 때 그 답은 간단합니다. 내가 끊어요, 내가. 내가 주님의 사랑을 끊는다니까요.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딱딱 끊어지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유명한 말을 했어요. 사실은 어거스틴의 말을 베낀 거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어요. 못 들으신 분은 그런 말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 없으면 하나님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본문에 적용시키면 내가 없으면 하나님도 소용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환란 받으면 하나님도 싫다는 이야기에요. 내가 배고프면 하나님도 귀찮다는 겁니다. 내가 핍박 받으면 하나님도 짜증스럽다는 거예요. 누가 주님의 사랑을 끊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나, 여기 만져지는 내가 주님의 사랑을 탁탁, 엿가락 끊듯이 끊어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참 답답하지요. 너 때문에 끊어질 사랑이 사랑은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네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너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네가 지금 병들어 죽는다 할지라도 너에 대한 사랑은 꾸준하니까 네가 환란이나 혹은 병이 들었다고 해서 짜증내지 말라는 거예요. 심지어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왜, 내가 죽으면 내가 끊어지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당연히 끊어져야 되고 우리가 끊어져도 내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목숨은 일정기간 살다가 끊어지고 사라져야 돼요.
우리가 증거 할 것은요, 나 잘났다, 나 잘 믿었다, 나는 사랑 많이 했다, 내가 주께 봉사했다, 이걸 증거 하지 말고 나 못났어도 이 못난 인간을 주의 사랑은 꾸준히 연결됨을 나로 하여금 믿어지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끊어지는 나를 그래도 애지중지 하고 붙들고 사는 이게 인생입네, 하고 살았는데 성경 펼치니까 38절에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내가 단언하노니, 내가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그런 뜻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라고 되어 있어요. 살아도 죽어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그동안 붙들었다고 했는데 착각이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붙든 것이 아니고 주께서 붙드셨습니다. 주께서 붙드셨는데 우리는 눈만 뜨면 착각합니다. 내가 주님을 붙들 때만 비로소 내가 천국 가는 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맨 날 교회 목사들이 하는 말이 “붙드세요. 붙드세요.” 다른 소리 아니에요. 돈 내라는 이야기에요. “붙드세요, 붙드세요. 성의표시 하세요, 봉사하세요, 교회 키우세요, 선교사 보내세요.” 맨 날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주의 사랑은 아는 것이 없고 자기가 좀 멋있게 행동한 거기에 그만 몰입해버려요. 우리교회는 꽃꽂이 하는 사람 없잖아요. 그런데 누가 그거 해놓으면 설교 귀에 안 들어옵니다. ‘저게 며칠 가겠나? 물을 줄까, 말까?’ 맨 날 이런 생각하다가 다 보내요.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자기 이름으로 했기에 자기 이름에 자존심을 챙기는 식으로 몰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그것을 꺾어버립니다. 태민이가 와서 장난친다고 꽃꽂이 해놓은 것 꺾어버리게 만들어요. ‘내 꽃꽂이!’ 주께서 그렇게 호작질을 해 버리지요. 끊어질 것에 몰두하니까, 거기에 집착하니까, 어차피 인생 죽을 거, 거기에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죽어도 살리는 것에 신경 써야 될 텐데 백날 쥐고 있어도 흘려버리는 거기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이번에 책이 한 한달 뒤에 나올지 싶어요. 『전도서속의 그리스도』라는 책입니다.
그 책 첫머리에 그런 글을 썼습니다. 무의 중심이 어딘가 싶어서 칼로 깎아보면 나중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왜, 전체가 무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무로 취급해서 전부 깎아버립니다. 깎아버리면 ‘아하, 무라는 것은 끊어질 뿐이구나. 잘라내면 잘라질 거리뿐이구나.’ 남 죽을 때 자기는 안 죽을 줄 알았지요. 남 늙을 때 자기는 안 늙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르고 또 잘라보니까 처음부터 알맹이도 하나도 없어요. 양파껍질 벗겨보면 나중에 남는 것도 껍질만 남아요. 최후에 남은 양파도 껍질의 일종이었습니다.
끝부분에 남아 있는 무도 중심이 아니에요. 애초부터 우리에게는 중심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원인이라고 여겼는데 원인이 아니고 결과물인데 그 결과물에 대해서 원인이 어디인지를 몰라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이 육신적인 본성이 뭐냐 하면, 내 이름이 불리는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들 했지요. 중심을 찾아가고 이 세상의 모든 핵심을 이루는 그곳이 어디냐, 해서 찾아가지만 누가 내 이름을 호명해주면 그 자리가 너무 좋아서 눌러 앉으면서 거기가 중심인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잘라내는데 죽어서도 잘라내는 것은 나중에 이루어지겠지만 지금부터 우리를 잘라내는 방법은 우리 이름을 없는 이름으로 제거하는 겁니다. “이름, 그 자리 비워놓아라. 내가 그 자리 찾고 들어가겠다.” 그래서 그렇게 된 사람을 간단하게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은 내 이름에 추가해서 부르는 이름이 아니에요. ‘저는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간주하고 불러야 그게 주의 이름이에요. 내 운명, 내 팔자, 그것은 주의 이름의 손에 달려 있지 내 이름, 내 손에 달려 있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우리 이름을 항상 빈자리로 만들어내 버려야 돼요. 그런데 문제는요, 우리는 말씀보고 그러고 싶은데 우리 육신이 맨 날 밥 달라고 하고 돈 벌라고 하고 잘난 체 하면서 살라고 하고, 이 육신이 우리를 힘들게 하네요. 세상에서 제일 서글프고 안타까운 것은 만나지도 못할 사람을 기다린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 볼 때 저는 안타까워요. 예수 이름은 부르지만 그래가지고는 예수 못 만납니다. 부르다 지쳐버릴 이름이에요. 만나지도 못할 사람을 지금 부르고 있는 거예요. 만나지도 못할 사람을.
정말 예수를 만날 사람은 끊어지지 않는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지금부터, 이미, 사랑에 의해서 살아감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나중에 예수를 만날 사람입니다. 맨 날 예수 이름 부르면서 사실은 자기 야심과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하면 안돼요. 제가 토요일마다 대전 시민대학에서 강의 개설해서 하는데 주제가 ‘80인의 신학자들’입니다. 사실은 눈치 안채게, 사실은 눈치 다 챘는데 거기에 복음을 집어넣어서 전합니다. 거기서 제가 이야기한 것은,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람이 사는 것이 자기 행복을 위해서, 여기서 ‘행’자 떼버리면 남는 것은 ‘복’이 남는데 결국 복 받기 위해서 살아간다. 그러면 교회 왜 가는가? 복 받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소위 ‘행복’이라는 것은 세상 학문하는 사람들은 다 이야기해요.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행복해서 뭐하려고 행복합니까? 행복한 것도요, 내가 사는 데까지만 행복하지 이것이 끊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그동안 행복을 위해서 예수를 찾았다면 그 사람은 예수 못 만납니다. 예수님은 끊어질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 분이 아닌데 본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일방적으로 오해를 했는지 예수님은 나 복주기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오해를 해놓고는 누구를 만나요? 예수를 만난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제가 이렇게 하면 따질 거예요. “사람이 사는 것이 행복하려고 살지 행복 말고 다른 목적이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 성경이 있는 거예요. “사람은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당신이 딱 깨놓고 말해라. 인간이 왜 있는데?” 인간은 주님이 주신 사랑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을 위해서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좀 꺼져줘야 돼요. 우리는 이 땅에서 소멸돼야 됩니다. 무슨 이야긴가, 물리학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양전자와 전자가 만나게 되면 양쪽 다 소멸되면서 감마선이 나온다는 겁니다.
또 감마선이 만나면 거기에 양전자입자가 나와요. 쉽게 하면 물질과 눈에 보이는 반물질이 우주를 장식하고 있는데, 반물질이 한 75퍼센트이고 물질이 한 25퍼센트 되는데 그것이 만나고 소멸되면 거기서 없던 새로운 것이 나와요. 약간의 잉여적인 요소가 되는데 어떤 입자가 나온다고요. 과학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해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랑을 남기기 위해서 선과 악이 만나서 양쪽 다 소멸시켜 버려요. 양쪽 다 소멸시켜 버리면 그 소멸되고 없는 현장에 사랑이 등장합니다. 끊어지지 않는 사랑.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오해하기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사랑을 끄집어 당기니까 자기는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버티고 있는 거예요. 이거 가짜입니다. 이건 가짜에요. 우리는 은퇴해야 돼요. 주님 만나고 소멸돼야 됩니다. 주님도 소멸되고 우리도 소멸되고, 나는 악으로 소멸되고 주님은 선으로 소멸되고 선과 악의 원리원칙, 선악과지식, 그것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비로소 생명이 거기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간단히 말해서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간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야속할 것도 없어요. 사랑만 등장하면 되는 거예요. 그 대목이 8장 32절에 나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아끼지 아니했다는 것은 아깝지만 아끼지 아니했다는 뜻이거든요. 아끼지 아니했다는 뜻은 함부로 처분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감히 못하는 말, 인간으로 태어나서 감히 할 수 없는 고백을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우리말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 저를 버리시는군요. 버림받기 위해서 살아온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군요.’ 예수님은 기도하신 장로님 말씀대로 의인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입니다. 우리는 쓰레기에요. 살 이유가 없어요. 악이지요. 선과 악이 만나서 주님은 사랑만 남겨놓고 떠났습니다. 물론 부활로 다시 찾아오지만. 그 사랑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아들마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줬다, 그냥 던져버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몰랐던, 우리가 알 수 없었던, 도저히 알고자 해도 몰랐던, ‘왜 죄인이 구원되고 왜 죄인이 구원받느냐.’ 하는 비밀이 나옵니다.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6절에 나와 있습니다만,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왜 우리가 도살될 양 취급을 받느냐 하는 이 이야기, 우리는 일방적인 나의 행복을 추구한다면 이 생각이 스며들 수가 없어요. 아끼지 아니하시고 버려둔다는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예수님만 아시는, 이것은 전혀 일반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비밀입니다. 그 비밀이 우리를 살려요. 이사야 53장 4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이것은 충격입니다. “하나님에게 맞으며” 이 말을 더 충격되게 말을 바꾸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때리며’ 그렇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아버지가 아들을 찔러주시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아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잘못한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우리를 찌르지 않고 아들을 찔러주시는 겁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사랑을 위하여.
그 다음에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에게 벌이 없어지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아버지께서 친히 채찍으로, 폭력으로 아들을 때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병든 모든 것들이 깨끗이 나음을 입었다고 되어 있어요. 이 무슨 행패이고 이 무슨 폭력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좋은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때리는 분, 심지어 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때리는 분이라고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남의 자식은 때려도 자기자식은 못 때리는 법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나는 내 자식 못 때리니 부자지간에는 서로 때리기 없기, 이게 바로 내 상식중심이고 내 경험중심인 겁니다. 이게 주님 앞에서 소멸되어야 되고 철거되어야 될 세상관이고 인생관이에요. 끊어져야 돼요. 그런데 주님 입장에서는 끊어져야 될 그것을 우리는 안 끊고 이어보려고 애를 쓰고 또 쓰지만 제가 보기에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저 노래 한 가락뿐이에요. 3, 4분이면 끝나는 거예요. 노래 들으면 좋잖아요. 끊나버리면 사라져 버려요.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노래 한 귀절, 그저 3, 4분하는 그 노래에 지나지 않습니다.
<네 박자>
누구나 부르는 노래
내려보는 사람도 위를보는 사람도
어차피 쿵짝이라네
쿵짝쿵짝 쿵짜자 쿵짝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한구절 한고비 꺽어 넘을때
우리네 사연을 담는
울고웃는 인생사 연극같은 세상사
세상사 모두가 네박자 쿵짝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짠짠 짜리라라 짠짠짠 짜자 짜리리라라 짜라라
나 그리울 때 너 외로울 떄
혼자서 부르는 노래
내가 잘난 사람도 지가 못난 사람도
어차피 쿵짝이라네
쿵짝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한구절 한고비 꺽어 넘을때
우리네 사연을 담는
울고웃는 인생사 소설같은 세상사
세상사 모두가 네 박자 쿵짝
인생이 뭐 있어요? 네 박자죠 뭐. 변곡점이죠. 웃을 때 있고 울 때도 있고, 꺾일 때 있고 펼 때가 있고, 펼 때는 좋다고 살고 싶고 꺾일 때는 죽고 싶고, 그러면서도 계속 진행하는 것은 우리네 인생, 송 대관이 한 곡 부르고 나면 3, 4분 지나면 끝나버리잖아요. 나에게 폭력을 가하는 하나님 같으면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밖에 모르고 자기가 영원하다고 생각하기에 여기서 싹트는 것이 바로 복수심이에요. 현대정신분석학자들은 이것을 추적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복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참을 수 없는 복수심에서 나왔다.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전부 다 그 내부를 파고 들어가면 복수심이에요. 다 죽여 버리겠다는 거예요. 그게 복수심이에요. 그래서 밥 먹을 때 숟가락 들고 벌벌 떨잖아요. 우리는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을 발굴하는 시간들을 보냅니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는데 이상스럽게 특징이 뭐냐, 누가 죽지 아니하면 내가 사는 재미가 없어요. 그게 인간의 보통 평범한 행복으로 나옵니다. 길을 걸을 때도 그냥 걷는 것이 아니고 길을 걷는 행동, 밥 먹는 행동, 빙수 먹는 행동, 예배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 그 하나하나가 다 복수심의 발로입니다.
“하여튼 나 빼놓고 때려죽여 버리세요.” 그런 것입니다. 누가 노래 부르잖아요.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도 있잖아요. 그러나 가수들은 그것을 보고 복수심이 일어나요. ‘나만 가수다.’ 하고 싶어요. ‘니들은 가수 아냐. 나만 가수야.’ 누가 무슨 말을 해서 웃기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웃잖아요. ‘다른 사람은 웃게 만들고 내가 말할 때 너 때문에 못 웃게 만든 너는 제발 가다가 발병이나 나라.’라는 것은 표현 안했다 뿐 우리가 주체할 수 없는 이상한 복수심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성경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창세기 4장의 이야기를 한 거예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한 응답은 달랑 하나였습니다. “너는 네 동생 죽여라.” 그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드릴 생각 말고 네 본색이나 까발려라.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응답하기를 “제사드릴 생각 말고 네 마음이 상한 심령, 썩어진 심령인 것을 까발리면 너는 구원받았다.”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이왕 있는 나라는 존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에 몰두하는데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 말고 다른 것은 다 끊어져야 되고 나만 영원해야 되거든요.
그런 심보를 가지고 성경책 들고 교회 나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에 다 있으니까 그냥 가져가서 보면 되고요. 그래서 예수를 부르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듣든지 설교를 보든지 결국 남는 것은 문 열고 나갈 때는 ‘나만은 살아야 돼.’라는 이 더러운 심보만 남겨가니 자기는 때려죽어도 안 끊어지겠다는 거예요. 제발 좀 끊어지세요, 제발 좀! 엿가락처럼 좀 뚝뚝 끊어지세요. 사는 것이 다 헛방이라는 것을 좀 고백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 비밀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하나님께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누구에게? 자기 아들에게. 아들은 의롭지만 그 아들에게 우리 죄가 담겨있기에 죄에 대한 복수, 아주 처절한 복수를 감행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걸 빼놓고 가시는 분이 아니에요. “잠시 빼놓고 가실게요.” 그런 것은 없어요. 주님께서는 죄에 대한 복수심, 이것은 봐주는 법이 없어요.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대체 어디서 찾습니까? 달보고 찾습니까? 별보고 찾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어디서 찾아요?
일요일 날 되면 정동진 찾아가서 뜨는 해 보고 ‘올 한 해도 남편 하는 일 잘되고 자식들 몸 건강하게 해 주옵소서.’ 열심히 빌잖아요. 우리 동네 근처에도 명당이 있어서 거기도 해 뜰 때 사람들이 빕니다. 그게 자기 행복을 위해서 비는 거예요. 우리 가족 행복을 위해서. 왜, 그 가족에 내 이름이 있기에, 내가 그 집에 시집을 갔기 때문에. 그걸 끊어야 되는데, 그게 소멸되어야 되는데, 그게 돼야 사랑이 나오는데 우리는 사랑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내가 나 사랑하는 그 사랑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해준다는 조건하에서만 그 사람을 사랑해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 어색합니다. 이거 대단히 부자연스러워요. 이런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포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새벽 세시 네 시가 되어도 잠 못 이루고 심야영화까지 다 봐도 잠 못 이루는 것은 그 알 수 없는 공포, 두려움. 하나님의 뜻은 소멸되는 것인데 내 육신은 끝까지 ‘너를 불들 수 있는 것은 너뿐이니 너를 붙들라.’고 하고 자꾸 우리보고 살라고 하는 거예요.
어떤 처녀소경이 불가마 앞에서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눈치 채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요. 기도를 하는데 “제발 눈뜨게 하옵소서. 제발 눈 떠서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드라마 한 대목입니다. 제가 달려가고 말하고 싶어요. “눈 떠서 뭐할 건데?” 제가 그렇게 물으면 귀싸대기 맞을 거예요. “네가 소경되어 봐라. 너는 눈 안 뜨고 싶나?” “나도 눈 뜨고 싶어.” “너만 눈뜨고 살고 싶고 나는 소경으로 살라고?” “아니, 내가 묻는 것은 소경되었다고 해서 왜 눈뜨고 싶다고 하는지 그것을 물은 겁니다.”
그러면 정답은 뭐냐, “내 육신이 그냥 눈 뜨고 싶대요. 그저 눈뜨고 싶어 하잖아요.” 소경이 눈뜨고 싶어 하는 것은 이사야 53장이 아닙니다. 도살할 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밀 아니에요. 우리의 본능이고 본성입니다. 우리의 삶은 내가 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강요당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참 얄미워요.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우리를 집어넣고 우리 육신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살아야 해. 살아야 해.’라고 집어넣으니까 괴롭기는 누가 괴로운가 하면 우리 육신만 괴로울 뿐이에요.
살기위한 환경, 에덴동산 만들어놓고 거기서 살라고 하면 누가 못삽니까? 추방을 시켜놓고 저주가 있는, 죽이는 힘만 가득한 그 속에 우리를 집어넣고 “한번 살아봐라.” 하니까 “살아보겠습니다. 살아서 큰소리치겠습니다. 나는 이만큼 살았습니다.” 하니까 불안과 공포와 짜증이 가실 날이 없네요. 죽었다고 울고 살았다고 좋다고 해봐야 그거 몇 시간 못가고 내일 되면 또 살아야 될 것인데 걱정거리 또 오거든요.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는 이 지옥, 이 죽음을 강요하는 지옥에서 역으로 살아야 될 판이니 이게 지금 방향이 안 맞는 거예요. 협조해주는 것이 전혀 없어요.
마치 실험실의 쥐 같아요. 실험실의 연구원이 암세포를 하얀 쥐에다 집어넣고 관찰합니다. 이 하얀 쥐가 며칠 가겠는가, 하고 관찰하듯이. 아주 차가운 푸른 빛 같아요. 가운 색깔도 아주 냉혹한 귀신의 느낌을 줍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차트에 체크하면서 ‘아직도 쥐는 버티고 있다. 30분밖에 더 못 버틸 것 같다. 드디어 죽었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공식은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 실험실의 쥐가 우리입니다. ‘저 인간이 언제 사랑을 알지? 언제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제 알지?’
이에 목탁 두드린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 쓴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어떤 혜택을 주느냐 하면, 그 밑바닥에 죽음을 깔아주십니다. 언약적인 죽음, 예수님의 죽음을 깔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폭력을 당한 분의 죽음을 깔아주는데 그 분이 도살할 양같이 깔아주십니다. 제가 이탈리아를 가본 적이 있습니다. 로마의 피자집에 갔습니다. 그 식당 안에 흙으로 만든 오븐이 있어요. 피자를 집어넣고 다 된 피자는 끌어내요. 그것을 보고 느낀 점이 있습니다. ‘아하, 피자는 자기가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아이고 뜨겁다, 하고 스스로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환난, 곤고, 핍박, 기근이 있어도 ‘이젠 힘들어서 안 되겠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그동안 하나님도 안 믿고 교회도 안 나갔는데 이젠 교회 나가야지.’ 이거 가짜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 나온 사람이고, 자기 형편 바꾸기 위해서 나온 것이고, 자기만 살기위해서 나온 것이고, 죽어서 또 사는 천당 가기 위한 짓거리에요. 이것은 전혀 가짜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피자 판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 피자 판을 로마서 8장 11절에서 했습니다. 우리가 머리가 이상해요. 지나가면 다 잊어버려요.
11절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예수님을 피자로 봅시다. 예수님은 죽고 난 뒤에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어요. 스스로 무덤에서 기어 나오지 못하니까 그냥 피자 판이에요. 어쨌든 무덤에서 그냥 계십니다. 그런데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하나님의 영, 성령이죠. 성령은 피자를 끄집어내는 피자 판입니다. 그 피자 판이 죽은 예수님을 살려내는 능력인데 그 능력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낸 방식으로 너희를 살려 낼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해요. 저 쓰레기입니다. “제 힘으로는 교회 백날 나오고 기도 백 날 하고 헌금 백 날 해도 그것 가지고는 구원 못 받습니다. 십일조 하고 주일성수 해도 그런 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교회에서 계속 해야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나 밖에 나가서나 계속 해야 되는 겁니다. 원래 처음부터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자입니다, 라는 것을 계속 알아야 돼요. “죽은 자가 죽는 것은 당연한 조치이며 그것을 내가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까지 포함을 시켜야 돼요.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하는가? 안 오면 성령을 오라고 요구할 권리가 우리한테 없기에 ‘안 오면?’ 하는 그 입을 쳐야 돼요. 우리가 성령을 언급할 자격도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든 예수가 오든 우리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나만 가수고 나만 살면 되고 남은 다 죽어야 돼요. 사람이 나만 살고 다 죽을 때 비로소 마음의 쉼을 얻습니다. 그 정도로 못돼 처먹었어요, 우리는. 그러면서도 남은 잘되고 자기는 못되니까 화가 치미네요. 그러니까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알 수 없는 복수심이에요. 우리는 복수심에 맨 날 손 떨고 있습니다. 물론 손 떨다가 나중에는 머리까지 떨지만, 그러다가 나중에는 모든 것이 다 망가지지만.
같은 업종의 가게가 있는데 손님이 그냥 들어오면 되는데 여길 갈까, 저길 갈까, 이러고 있어요. 우리가게로 쑥 들어오면 다행스럽게 엔돌핀이 확 도는데 저쪽으로 가자, 해서 가게 되면 하루 종일 스트레스 받아서 머리 빠지기 시작합니다. 진짜 약 오릅니다. 내가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니까요? 이것은 애들도 말은 못하지만 느껴요.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에요. 내가 있는 교회 부흥되고 나머지는 다 무너져야 돼요. 내가 응원하는 축구팀이 이겨야 되고 나머지는 다 져야 돼요. 내가 원하는 팀이 1등해야 되고 내가 싫어하는 팀은 늘 져야 돼요. 우리는 그것에 강요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나쁘다, 좋다, 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는 어차피 그렇게 굴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전 굽듯이.
애가 뒹굴고 있으니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전 굽듯이 뒹군다.”고 했어요. 전 구울 때 그렇게 하잖아요. 우리는 어딜 가도 여기 있을 때는 이쪽 좋아한다고 하다가 자리를 옮기면 저쪽에 충성하죠. 이것은 강요받는 겁니다. 우리가 성질이 나쁘고 못돼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육신이 그렇게 생겨먹었어요. 왜, 그 사랑만 남기고 우리는 사라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라지라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어떻게 사라지라고? 예쁘게 사라지라고? 아니에요. 있는 죄 없는 죄 다 짓고 사라지라고.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복음을 방해하고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님을 모독하는지 알 수 없어요. 너무너무, 봉사와 헌신이 완전히 십자가를 가로막습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폭력, 하나님이 복수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말합니다. “복수는 내가 할게. 너는 복수 할 자격도 안 돼.”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에요. “나는 나만 살고 남 다 죽이고 싶다. 안 죽으니까 복수를 하고 싶다.” 할 때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그럴 자격이 못되니 복수는 나에게 맡기고 네가 나한테 복수당할 처지야. 복수를 당해야 될 네가 어딜 남을 복수해?”
그것은 우리 육신이 그렇게 생겨먹었으니 어쩔 수 없는 거고요, 그걸 우리가 뜯어고치자는 것도 아니고 뜯어고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피자는 피자 판이 와야 구원받지 자기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고 기도한다고 피자가 알아서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결국에는 환난이나 기근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이런 것을 주시는 것은 “네 정체를 밝혀라.” 그 이야기에요. “네 본체, 실체를 밝혀, 교회 오기 싫으면 오지 마. 네가 그동안 예수 믿은 것은 네 행복을 위해서, 나만 살고 남은 다 죽이고 싶은 네 복수심에서 나온 거니까 이젠 네 본색을, 환난이나 기근이나 핍 박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을 통해서 네 본색을 드러내라.” 하는 이야기에요.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지? 원래 너는 모르게 되어 있어.” 이사야 53장에서 주께서 아버지가 채찍을 가지고 자기 아들을 때립니다. 그것이 폭력이에요. 그 폭력은 우리가 맞을 폭력입니다. 폭력을 행사하시고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심판당해야 마땅하다고 한 그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뜻을 나타냈는가? 십자가입니다. 자기 아들을 그냥 내어주신 것이 아니고, 곱게 내주신 것이 아니고 아끼지 아니하시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내어주신 그 죽음을 우리 발판에 깔아버리십니다.
성령이 오십니다. 죽음을 우리 인생에 깔아버리면 우리 보고 소멸하라고, 은퇴하라고, 이젠 무대에서 퇴장하라고 우리에게 주실 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 도살할 양같이 새롭게 세상을 해석할 안목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월급을 한 700만원에 보너스 합쳐서 천만 원 받았습니까? 그거 환난입니다. 해석 똑바로 하세요. 제가 지금 알려드립니다. 그 다음에 차장으로 있다가 부장으로 승진하셨습니까? 그거 핍박입니다. 그러니까 “부장되게 하옵소서.” 하지 말고 “핍박받게 하옵소서.” 그렇게 해야 돼요.
그리고 성적도 별로 좋지도 않은데 의대에 갔어요. 그거 위험한 짓입니다. 아주 위험한 짓이고 교인수가 20명인데 한 50명으로 불어났습니까? 그것이 곤고입니다. 아주 괴롭습니다. 아들 낳고 싶었는데 아들을 낳았습니까? 그것이 핍박입니다. 행복도 아니고 축복도 아니고 핍박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매진하기 때문에. 목사가 칭찬했습니까? 그것은 아주 위험한 시험입니다. 왜, ‘난 칭찬받았으니 오래 살아야 해. 칭찬 안 받는 너나 일찍 죽어라.’ 이렇게 되는데 이것이 아주 위험한 짓이에요.
끊어지지 않는 것은 환난, 핍박, 월급이 오르고 성적이 오르더라도 “주여, 그것이 나를 피자 판으로 끄집어내는, 나를 지옥에서 건져 내는 그 피자 판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오직 주님의 폭력뿐이고 오직 주께서 도살할 양같이 다 받았습니다.”라는 것이 우리 밑에 깔려 있을 때 우리는 세상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자기행복을 포기합니까? 소멸, 예수님도 사라지고 나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런데 그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사랑!
요한1서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사랑을 안다고 되어 있어요. 성령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사랑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랑 말입니까?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살고자 하지 않기에 두려움이 있을 리가 없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1 4:16-10)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가 아들 때리는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고 잊었습니다. 나 안 맞는다고 좋다고 했는데 그게 시험이었고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주여,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산다는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기적인 것을 깨닫고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 넘치는 나라에서 모든 공로가 주의 공로라는 것을 마음껏 노래하고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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