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자녀
2013년 9월 29일 본문 말씀: 로마서 9:6-12
(9: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9: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 아니요’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역정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신이라면 인간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냥 눈 감고 모른척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늘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하나님은 인기없는 하나님이요 외면당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이런 하나님을 소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본문은 분명히 언급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이러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는 말과 같고 “이러한 신자는 신자가 아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참된 것, 진실된 것이 궁금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고 계속해서 쉬지 않고 분류하고 또 분류하시기만 합니다. 왜 “이런 교회가 참된 교회요 이런 이스라엘이 참된 이스라엘이요 이런 신자가 참된 신자다”라는 말씀을 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것은 곧 창세기 3:24의 취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즉 인간 쪽에서 올라오는 그 어떤 시도도 인해 생명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애초에 굳게 차단시키십니다.
인간들은 모두 자기 위주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어떤 말씀을 주셔도 일단 자신의 구원을 마땅하다는 인식 하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창세기를 봐도 자기를 위한 창세기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약속을 위한 창세기’입니다. 우리는 ‘나 여기 있음’을 출발점으로 해서 신을 발견하고 싶어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기 싫어하는 것들을 내가 분류해서 그 최종 분류항에 신이 담겨있기를 원하면서 나아갑니다.
하지만 신은 그 바구나마저 버리십니다. 인정치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위주에서 하나님 위지로 바꿀 수 있는 입구가 없습니다.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그 이삭만이 약속의 자식이다’고 단정짓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아무리 아브라함이 처를 많이 두고 많은 자식을 낳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약속의 자식이 아닙니다.
이삭을 가지게 된 것도 아브라함 본인의 의사가 반영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쪽에서 다가오심으로 발생된 결과일 뿐입니다. 이 결과를 가지고 아무리 근원을 추적해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즉 나 자신이 구원받은 자라고 간주한다 할지라도 내가 그 어떤 노력해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없는 분’으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우리는 선택론이나 예정론에 있어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에게 가지고 있는 사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세 전의 계획에 의해서 오직 우리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고 나머지 모든 민족들은 저주받기로 작정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으로서 십자가를 수용될 수는 없습니다. 말씀이나 십자가는 나 자신을 위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1절 말씀을 보게 됩니다.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달리 말씀 드려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어떤 이는 구원받기로, 어떤 이는 저주받기로 작정되었고 그 작정된대로 일이 진행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는 모든 이들은. 자신이 이미 구원자로 창제 전부터 지정되었다는 있다는 일방적 지지를 바탕으로 성경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말씀 곧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이 대목이 이르면, 왜 이 말씀이 여기 나오는지 그 이유를 모르게 됩니다. 바로 뭔가 자리바꿈이 선행되어야 함을 나타내어줍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 위주인지를 성경을 통해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9:1-2에 보면,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경에게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상황까지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죄까지 거론하면서 상황개선에 있어 자신의 노력 개입을 시도하는 것은 현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매일같이 분노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상은 실은 분노의 일상입니다.
바로 이점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25:21-23에 보면,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되어있습니다.
내가 있기 전의 일을 내가 안다고 해서 예정론의 내막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미리 구원받기로, 혹은 저주받기로 정해졌다’는 그 소식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예정론의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야곱은 이 계시 앞에서 누가봐도 자신이 곧 형으로부터 섬김받을 팔자인 것을 확신합니다.
차자이면서 장자로 살아가야 하기는 그는 형의 장자권을 노리는 작업에 나서게 됩니다. 이는 마치 자신이 당연히 그 계시된 장자라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팥죽으로 구도 악속을 받아내고 아버지 이삭의 유언시에는 아버지께서 선물마저 위장해서 축복을 받아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구체화된다고 여긴 그 발상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서 야곱에게 담겨 있는 이스라엘을 끄집어냅니다. 그분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신약의 예수님입니다. 장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55에 보면,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된 성도라면 자신은 사탕처럼 늘 하나님에 의해서 깨물려서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쏟아내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 몸에 같이 붙어있어 같이 죽고 같이 부활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인생 말기에 요셉의 두 아들를 축복하되 어긋맞게 축복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자신이 장자라고 자처하지만 정작 장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음을 늘 나타난 십자가 안에서 고백토록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로마서 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성경만 안보면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인데 성경만 보면 어떤 글이 나오는가 하면, ‘아니다, 아니요’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니 사람들은 환장할 지경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질색이에요. 뭘 해도 “그래, 그래.” 해야 좋으신 하나님 같은데 “그것은 아니거든? 그것은 틀렸어. 그러면 그것은 지옥 간다.” 이렇게 자꾸 토를 다시니 이것 피하고 저것 피하려니 나중에 신앙자체가 피곤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가 굉장히 좋은 교회고 말씀대로 전하지 않는 목사가 아주 훌륭하고 인자하신 목사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한다면 그 목사 본인이 죽어나가니까 할 수 없는 것이고 이 ‘아니오.’라는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아닙니다.’라는 것,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교회라고 다 교회가 아니라는 말을 해야 된다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은 아니요’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니까 그 말은 그만하고 ‘딱 이겁니다.’라는 말을 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니오.’라고 결정하는 그 기준, 우리 인간으로서는 그 입구를 찾을 수가 없어요. 이것은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추적해서 찾아갈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밑에 있는 결과를 조사해보면 원인으로 뚫리는 길이 나올 것이다, 라고들 많이들 이야기해 왔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천주교 대부에요. 모든 천주교 신학은 그것을 기초로 하고 있고 그 위에 성당이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의 주장이 뭐냐 하면, 현재 우리가 있는 이 생명을 추적해 보면 신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 아닙니다. 아니거든요!
내가 현재 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그래서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찾아낸 그 하나님은 아닙니다. 만약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맞다면, 천주교의 주장이 맞다면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라는 말을 할 리가 없어요. “아이고, 귀여운 이스라엘, 내 새끼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다 이스라엘이고 다 구원받는다.” 이렇게 했으면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서 저항하지 않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야. 교회는 세우면 다 교회고 다 구원받아.” 이렇게 되는데 교회라고 다 교회는 아니야, 라고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궁금한 게 뭐냐, ‘교회다, 교회 아니다.’를 구분시키는 그 기준이 굉장히 궁금한 겁니다.
그게 왜 궁금한가 하면, 그 기준을 알아채면 내가 구원될 수 있고 내가 참 교회가 되고 참 이스라엘 된다는 희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기준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모릅니다. 그 기준을 몰라요. 왜 결과물을 가지고 원인을 추적할 수 없게 하신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창세기 3장에 생명나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강제로 차단했기에 그 취지가 계속 살아나야 되는 겁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에 대해서 여러분이 들은 기억이 있을 거예요. 오늘 본문 이것을 세자로 줄이면 ‘예정론’이라는 겁니다.
11절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그 다음에 보면 “택하심을 따라.” 하나님이 미리 선택해서 한 사람은 사랑받고 한 사람은 저주받아 지옥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예정론이라고 장로교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다른 데는 아예 이것을 이야기하지도 않아요. 이 예정론이 놀랍게도 우리 장로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 핍박했던 바리새인과 유대인과 서기관에게도 예정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택하심을 따라’니까 우리는 태어나기도전에,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이스라엘로 택함을 받았기에 우리민족만 구원받고 선택되지 않은 다른 민족은 저주받게 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을 했던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정론 붙들고 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얼마나 멋있습니까? 우리가 행하기도 전에 선택해서 구원받았다,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입니까? 인간으로서는 나올 수 있는데 그 인간에게서 나온 아이디어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를 못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되어서 그들이 예정론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저주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은 나를 위한 예정이 아니고 약속을 위한 예정입니다. 이 세상에 약속은 두 가지가 있어요. 모든 말씀과 약속이 나를 위한 약속, 나 잘되기 위한 약속이 있는 반면에 숨어 있는 그 분을 드러내기 위한 약속이 있어요.
창세기가 있다면 사람들은 창세기를 볼 때 나를 위한 창세기로 이해하잖아요. 그것은 틀렸습니다. 그것은 ‘아니오.’입니다. 약속을 위한 창세기입니다. 약속을 위해서 창세기가 쓰였는데 이것을 우리가 성질 급하고 건방지게 나를 위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 창세기를 읽다보니 어떤 사람을 창세기를 천 독 했니, 만 독 했니, 하는데 천 독이면 뭐하고 만 독이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런 뜻이 아닌데요. 그런 사람은 ‘아니오.’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오.’에 해당되는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를 ‘그러면 날 위한 창세기, 날 위한 말씀에서 약속을 위한 말씀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서 노선 변경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데 그 입구가 없어요.
그리고 입구가 찾을 길도 없습니다. 자기 첩을 한 백 명을 두고 자식을 계속해서 낳았다 할지라도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육신에서 나온 자녀기에 그것은 ‘아니오.’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그래도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천국에 갔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녀를 잉태했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이르리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일체 아브라함의 육신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찾아와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만이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약속의 씨, 약속의 자녀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입구를 찾을 수 없고 그 입구를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어요. 그것은 생명나무에 오지 못하게 하는 취지가 계속 살아 있게 만드는 그 취지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구원받은 사람이 있잖아. 그리고 약속의 자녀라는 것이 분명히 생겼잖아. 생겼으면 그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약속의 자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니 하나님이 찾아왔다면, 찾아와서 약속의 자녀를 만들어냈다면 그 만들어내는 모습과 과정 혹은 절차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신다면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이스마엘을 낳아도 그것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세 천사가 찾아와서 ‘내년에 이삭이 있을 것이다.’ 해서 임신하지 못한 여인이 임신을 했고 그래서 낳은 자식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것을 오늘날로 한다면 우리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과 결혼을 해야 돼요. 임신 못한다고 해서 시험관아기 이런 것은 하면 절대로 안돼요. 그렇게 임신 못하고 있다가 12시쯤에 천사가 꿈에 오든지 해서 “내년 2014년도 10월에, 그것도 한글날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아니면 국군의 날로 하든지 해서 임신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되지요. 성경대로 한다면, 전혀 임신 안 되는 여인을. 그러려면 임신 안 되는 여인을 찾아야 돼요. 결혼정보회사에 가서 혹시 임신이 안 되는 여자가 있는지를.
어느 코미디에 보니 이런 것이 있어요. 추석날 왔다고 꿀 송편을 먹이겠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게 꿀 송편인지 콩 송편인지는 뜯어봐야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안에 할 일 없는 할아버지가 그것을 입으로 깨물어 보는데 이미 깨 물은 것을 먹을 수가 있나요? 지금 교회에서 천국 가는 꿀 송편인지 지옥 가는 콩 송편인지를 뭘 로 알아보는가, 그 방법이 옛날에 있었는데 세 가지가 있었어요. 세례와 성만찬과 견진성사로 했습니다. 성만찬 참석해서 한 일주일 내에 배탈도 안 나고 건강하게 잘 살면 성만찬 제대로 했다고 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되고 성만찬 먹었는데 아프다든지 뭔 일이 생기면 그것은 하나님의 살과 피를 먹기에 부합되지 않기에 회개하든지 아니면 구원 받은 사람 아니라는 식의 방법을 취했어요.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참 웃기지요.
웃기지만 달리 꿀 송편과 콩 송편을 가려낼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 방법을 하나님이 허락을 안 해줬습니다. 누가 천국 갈 야곱족속인지 누가 지옥 갈 에서족속인지, 누가 창세전부터 사랑받을 사람인지 누가 저주받을 사람인지를 교회에서도 판정을 내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판정을 내리고 싶은 이유가 있어요. 남들이 궁금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궁금해서 그래요. 진짜 내가 꿀 송편인지 콩 송편인지, 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본인이 궁금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본인이 믿음 없는 것 본인이 아는데 그러면 누가 압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방법을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 정말 잘 오셨습니다. 송편 일일이 안 깨물어 봐도 되는 그 방법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대전에 가는데 가다 보니까 양말에 구멍이 났어요. 안 들키게 하려고 발가락으로 어떻게 해 봤지만 대전 교인들은 벌써 다 알아요.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고 다 보니까 구멍 난 것 다 알거든요. 집에 와서 한쪽 양말 구멍 났으면 양쪽을 다 버립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무조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정하고 그것을 변명하기 위해서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을 지옥 가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음으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나는 천국 가는 사람으로 스스로 확신을 주고자 애를 쓰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게 문제에요. 누가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의 기준에 인간 각자가 개입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냐? 선과 악, 양쪽 양말짝을 다 버리는 거예요. 나는 선하다, 나는 구원받았다, 너는 지옥 간다, 양쪽을 다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생각하기를 ‘하나님, 저는 창세전부터 예정되었으니까 구원 받았지요? 그리고 형 에서는 지옥 갈 사람으로 저주 받지요?’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도 버리고 에서도 버리고 몽땅 다 버리는 거예요.
로마서 9장 오늘 본문에서 그 기준이 있잖아요. 누가 구원받기로 예정되었는지, 누가 저주받기로 예정되었는지의 기준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2절에 보면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12절을 여러분이 저와 같이 지금 보고 있으면서 이 구절이 왜 여기에 꼭 들어가야 하는지 납득이 안돼요. 전혀 관계없는 것 같이 느껴지거든요. 차라리 그 앞에 있는 11절이 와 닿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것은 이해되거든요. 그래서 이해되는 11절을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9장 1절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어요. “예수님, 저 소경이 소경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물었어요. 그 당시 예정론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들도 예정론을 믿고 있으면서 굉장히 골치 아팠던 문제에요. 소경의 죄를 정하는데 자기 죄 때문인가, 부모 죄 때문인가, 이렇게 묻는 것은 죄가 있으면 소경된다는 자기 인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거든요.
요즘 말로 쉽게 하면, 못생긴 여고생이 가는데 “얘야, 잠간 나 좀 보자.” “아저씨, 왜요?” “네가 그렇게 못생긴 것은 네 죄 때문인가, 네 부모 죄 때문인가?” 이렇게 묻는 것과 똑같은 질문이에요. “와, 이 못생긴 것 좀 봐라. 너는 왜 그리 저주받았냐?” 그럴 때 그것 듣고 기분이 안 나빠야 하는데 그런 소리 듣고 기분 안 나쁠 여고생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그것 듣고 기분 나쁘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우리가 분노할 자격이 있느냐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내가 지금 분노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는 형이 있어요. 나보다 나이 많은 형이 있는데 내가 태어나기 5년 전에 형이 사고를 쳤다 칩시다. 그럴 때 5년 후에 태어난 내가 그 형이 하는 짓에 대해서 내가 분노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거든요. 내가 없었던 시절의 일에 대해서 내가 뒤늦게 분노한다는 말은, 사람이 분노한다는 말은 내가 있었으면 그 상황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분노하거든요.
사람이 분노한다는 것은 뭐냐, 지금 돌아가는 모든 상황은 내 마음에 딱 맞아야 되는데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내가 두 번 다시 어떻게 할 기회가 없다는 그 점이 나로 하여금 스멀스멀 화가 나게 만드는 거예요. 보세요, 인간이 얼마나 모든 상황과 말씀조차도 자기중심입니까? 지금 이 상황이 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만일 내가 그 때 좀 일찍 태어났으면, 미리 태어나서 거기 있었으면 내가 손 봐서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으로 바뀔 것인데 그 때 태어나지도 않았기에 손 쓸 수는 없는데 하지만 지금의 이 난처한 상황은 웬 말인가, 나는 너무 억울하다, 이런 생각이 없는 사람이 없어요. 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엄마! 나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닌 것 같아. 산부인과에서 엄마가 바뀐 것 같아. 혹시 쌍둥이 언니가 있는 것 아냐?” 이렇게 막장 드라마처럼 화내면서 그럴 때가 있거든요. 사람이 알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하는 이것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내가 신이라면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내가 신이 아닌 것에 대해서 화가 난다, 라는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네가 뭔데? “저 소경이 소경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묻는 거예요.
주님께서 “제자들아! 네가 뭔데 죄와 소경된 것을 연관시키는가? 저것은 죄 때문에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저렇게 된 것이다. 너는 거기서 죄 언급을 할 입장이 못 된다.” 제자들은 이런 생각이죠. ‘내가 소경될 만큼의 죄는 짓지 않았다.’ 그걸 자꾸 제자들이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 6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이 말에 대해서 우리는 죄악 된 본성을 이렇게 발휘합니다.
‘창세전에 내가 그 회의할 때 있었으면 나는 무조건 천국이다. 그리고 지금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무조건 지옥 보내기로 의견을 집어넣었을 거야.’라는 생각을 우리 인간이 안 가질 라야 안 가질 수가 없어요. ‘너 같은 인간이 천국 간다면 나는 천국가기 싫을 텐데. 너 같은 인간 지옥가면 난 속이 다 시원하겠다.’라는 생각을 우리가 안가질수가 없는 거예요. 왜,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마음에 맞지 안다는 것 때문에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라고 했으면 예정론이 되었든 삼위일체가 되었든 그런 것은 다 갖다 버려야 돼요.
왜,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예정론 공부하고 삼위일체 공부하고 십자가 연구해도 예수님한테 갈수가 없는 게 맞거든요. 그런데 왜 자꾸 미련을 갖습니까? 왜 자꾸 미련을 갖지요? “그러면 목사님, 미련을 안 가지면 구원을 받습니까?” 미련을 안 가져도 구원 못 받아요.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있는 대로 털어놓으면 돼요. 제가 역사를 공부해보니 동양이 서양보다 과학의 발전이 늦어요. 늦는 이유가 동양철학의 특징은 뭐든지 숨기는 철학이에요. 저 사람에게 제사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죄는 숨기고 형제에게 우애 있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죄는 숨기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십자가가 등장하고 복음이 등장해서 모든 죄를 까발리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까발려요. 살아가면서 성경과 십자가와 비교해보니까 도대체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솔직하게 자기의 속내를 까발리고 위선을 아주 싫어했는데 동양은 맨 날 입만 열면 “어험, 이리 오너라.”이런 소리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은 교회가 동양철학 다 되었지만 실제로 복음을 전하면 우리는 착해지세요, 가 아니라 애초부터 착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아무리 서양교회가 썩었다 해도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 구절을 다 보고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그걸 다 알고 있거든요. 눈이 있으면 다 본다 이 말이지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가 우리에게 쳐들어오게 됩니다. 쳐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에 그 말씀을 받은 우리의 대처는 하나밖에 없어요. “왜 내가 천국 가는 입구를 발견할 수 없는 겁니까? 왜 우리인간세계에서는 그 입구가 보이지 않는 겁니까?” 그러한 반응을 나타내면 되는 겁니다.
아까 입구 찾는 방법을 이야기한다고 큰 소리 쳤는데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않아요. 그렇기에 항상 ‘내가 거기에 있었으면 이 상황을 뒤집어 놓는다.’ 맨 날 주어진 상황 뒤집어 놓는다는 생각을 하루 24시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런 생각이 있기에 무조건 나는 천국 가야만 하고 무조건 내가 지옥가라고 찍어놓은 인간은 무조건 나와 합류하면 안돼요. 내가 천국가면 너는 지옥가야 되고 네가 천국 가면 나는 지옥으로 가고 싶어요. 그 정도로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저주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은 지옥 가는데 우리는 그런 생각이 일체 들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천국에 같이 가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무조건 나하고 붙으면 안 되니까 지옥가야 된다는 식으로 모든 성경말씀을 나를 위한 창세기, 나를 위한 레위기, 나를 위한 출애굽기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본다는 그것을 그냥 인정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의 설교 내용이 그거예요. 그것을 그냥 그대로 인정하자는 이야기에요. 이게 어렵습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으면 ‘저 인간은 무슨 죄를 지어서 저렇게 인생 꼴아 박는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꿀떡을 손에 잔뜩 쥐는 거예요. 왜, 그래야 나는 정당하고 나는 착한 사람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분명히 그것은 잘못이거든요. 하지만 그것이 잘못인줄 알면서도 동양철학처럼 잘못이라고 해서 감추지 말자는 이야기에요. 잘못인줄 알면서 그 행세를 합시다. 막 삽시다, 그 간단한 이야기를 가지고. 이게 잘못인줄 알고 그 행세를 그대로 드러냅시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세요.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하나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않으면 저는 절대로 주님에게 갈 수 없었군요.” 마지막 멘트가 그 멘트에요. 죽기 전에 마지막 멘트가 뭐냐 하면, “한 평생 굽이굽이 돌아가면서 살아왔는데 아, 나 같은 인간도 구원됩니까? 아버지께서 오라고 했기에 예수님 알았지 이것은 내 방법으로 예수님 알 길이 없습니다. 왜, 난 나밖에 모르기에, 나는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살았기 때문에. 성경을 백독 했어도 전부 다 내 잘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했고 모든 성경을 그 따위 식으로 지금도 해 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양에서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선비가 되어야 되고 점잖은 사람이 되어야 돼요. 점잖을 때 남에게 피해를 안 주게 되거든요. 어제 커피숍에서 누굴 만났는데, 좋은 자리인데, 아이고 그만 성경이야기 교회 이야기가 나오니 그 이야기가 막 오고 갔어요. 내가 잘못했나, 생각해 보니 내가 좋은 자리라고 여긴 그 자체가 나를 위한 좋은 자리고 주님 위한 좋은 자리가 아니었구나, 했습니다. 차라리 주께서는 내가 생각한 그 좋은 자리를 어떤 계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내가 좋아하는 그 좋은 것보다 말씀이 더 귀하고 좋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런 기회를 허락했다는 것을 알고는 굉장히 감사했습니다.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에 대해서 우리는 해당사항 없습니다. 일체 우리는 아닙니다. 예, 예, 하면 안 됩니다. 왜, 우리는 그 자체가 엉터리이기에. 그러면 우린 희망 없네요. 12절이 있습니다. 12절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은 창세기 25장 23절의 대목입니다.
이 설명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당부합니다. 이 창세기 25장 23절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씀이 로마서 9장의 예정론에 들어갈 하등의 이유가 없어 보이고 11절로 충분해 보입니다. 11절로 충분해서 “하나님, 그것으로 그만 구원 받으면 족합니다.” 했는데 따지고 보니까 그것마저도 내 위주로 해석한다는 오류가 발견되었어요. 그래서 ‘아하, 12절이 필요하구나.’ 12절이 뭐냐 하면, 창세기 25장 23절에서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라는 사람이 애를 못 낳았는데 아기를 낳았어요. 아기를 낳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주어진 계시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이 계시를 나중에 야곱도 알고 있고 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니까 큰 자는 에서가 되고 어린 자는 야곱 본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야곱 본인이었습니다. 이 야곱, 하나님이 죽여 버립니다. 잘못 생각했다고. 이것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누가 봐도 큰 자는 맏아들이고 맏이는 에서니까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 에서가 어린 자 동생 야곱을 섬긴다, 누가 봐도, 천 명의 신학자가 봐도 이 말이 맞는 이야기에요.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그 야곱을 하나님께서 죽여 버렸습니다. 왜, 죽여야, 야곱을 깨버려야 거기서 젤리가 나오니까, 사탕을 깨물어야 거기서 진짜 야곱인 이스라엘이 톡 튀어나오니까. 처음부터 젤리는 주지 않아요. 아프게 깨물림을 당해야 될 사탕인 우리를 주고 사탕을 마음껏 오해하게 만들고 그 오해 속에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난 선택된 사람’이라고 여길 때 그 자체를 깨 물을 때 비로소 누가 선택되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선택된 거예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우리는 예정된 것이고 우리는 선택된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실 때,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난 뒤 부활할 때 누가 봐도 혼자 부활되었어요. 동영상 찍었다 해도 누가 봐도 그래요. 빈 무덤에 예수님 혼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하는 말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주님 부활할 때 누가 봐도 혼자 부활했는데 사도바울은 성령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이 혼자 부활한 것이 아니고 자기 새끼들 다 같이 동일하게 부활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고. 누가 살아났는지는 그 다음부터 로마서 9장가지고 성령 안에서 해석을 해 줄 때 그 해석이 와 닿는 사람은 그리스도 몸에 붙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 몸과 붙어 있지 않기에 천국 가지 못하고 지옥 갈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지옥 가면서도 이 로마서 9장 11절 보면서 ‘나는 예정론 믿으니 구원 받을 거야.’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 사람에 해당되는 거예요. 창세기 25장에서 리브가가 임신하과 난 뒤에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할 때 누가 봐도 큰 자는 에서고 어린 자는 야곱이라고 되어 있어요. 나중에 어린 자가 장자 되고 큰 자가 지옥가지요. 그런데 신약 적으로 해석을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기서 큰 자는 모든 인간, 모든 아담에 속한 자를 말하고 어린 자는 누구를 말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말합니다.
리브가는 예수님을 잉태한 거예요. 마리아 같아요. 안에 예수님을 잉태했는데 그 잉태된 예수님은 눈에 안보이게 되어 있어요. 안에서는 물컹한 액체로 되어 있고 밖에 나오니 딱딱한 야곱이라는 사탕덩어리로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오해를 한 겁니다. ‘야, 이 계시에 의하면 나는 둘째로 태어났지만 분명히 둘째가 첫째를 꺾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했기에 나는 축복받았다. 축복 받았기에 예정대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저 저주받은 형의 모든 것을 뺏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형의 장자 권을 뺏을 수 있을까? 아, 스스로 포기하게 하면 된다. 그러면 스스로 포기하게 하는 상황을 어떻게 하면 만들지?’ 하고 조사를 했어요.
언제 형이 앞 뒤 안 가리고 함부로 이야기하는지 보니까 사냥을 좋아하는 형이 사냥터에서 돌아오면서 배고플 때 정신도 안 차리고 막 함부로 지껄인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 때를 기다렸다가 야곱이 제일 좋아하는 팥죽을 미리 준비해놓았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번데기인데 “배고프지? 번데기 줄까?” 그런 식으로 “배고프지? 팥죽 줄까?” 한 거예요. 그래서 에서가 “팥죽 줘.” 했지요. 야곱이 “주는데 조건 있다. 앞으로 네가 동생하고 내가 형 될게.” 형이 들어보니 이게 될 말입니까? 한 번 형으로 태어났으면 영원한 형,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인데 그게 바뀔 리가 있습니까?
집에 가서 한 번 시험해 보세요. “네가 동생해라. 내가 형 할 게.” 잠시 게임에 져서 야자타임 하는 식은 있을 수 있는데 그게 될 일도 아니잖아요. 되지도 않을 일을 이야기하니까 “그래? 네가 형해라. 내가 동생 할 게.” 그렇게 팥죽 먹고 난 뒤에 입 쓱 문지르고 끝나면 그만이지요. 야곱은 축복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속여 나가야 되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 같아요. 이미 구원받았기에 구원받은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미쳤어요, 미쳤어. 꼭 야곱 같아요.
깨물려야 돼요. 십자가로 정수를 치든지, 진짜 나 보지 말고 내 속에 무슨 피가……, “그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허물이 쏟아져 나와야 돼요. “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는 십자가의 피가 흘러나와야 돼요. 십자가 피가 바깥으로 나와야 되는데 자기가 예수 믿고 착해졌다는 그것이 흘러나오니 그것은 야곱이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매일같이, 매일이 너무 심하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어쨌든 매일 같이 우리는 그러한 정황,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위해서 적어놓은 성경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역사한 것인데 우리는 그리스도 몸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서 몸은 따로 있고 따로 있는 몸 가지고 예수를 새삼스럽게 믿으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한테 믿어지도록 합니까? 이미 성령이 믿어졌기에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함인 것을 알고 그리스도의 증인되지 혼자서 자기 몸 따로 챙기면서 주님 증거 백 날 해 봐야 그것은 주님 증인 아닙니다. 옛날에는 아브라함에게 천사가 찾아왔거든요. 지금은 십자가의 영,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더 이상 너에게 어떤 일말의 행함도 기대치 아니한다는 것을 이미 통보해 줬어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은 우리한테 적용시키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다 적용시키면 12절의 문제해결 되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야곱과 에서는 결과물이고 원인은 예수님 자신이 유일한 맏아들 장자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11절을 다시 보세요. 비로소 11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로 말미암아 서리라.’ 우리 행위가 아니고 주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의 예정론이 우리한테 적용되는 식으로 실현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실현되는 하나의 발열 판이에요. 발판이에요. 밑에서 열이 올라와서 프라이팬이 열을 안 받을 수가 없거든요.
내 안에서 십자가가 작열하고 작동하니까 우리는 내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당신 죄가 뭔데? 전과 몇 범인데?” 그렇게 물으면 안 되지요. 내 죄는 나만 생각하는 것이 평생 짊어질 죄인 거예요. 나만 생각한다는 것, 내 구원만 생각한다는 것. 그런데 이런 인간, 나만 생각하기에 도저히 구원받을 수가 없는데 웬 은혜인지……, 아버지의 뜻이죠, 아버지께서 오게 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그 뜻에 의해서 우리는 새록새록 그 말씀이, ‘아 아버지의 뜻이 내 행위보다 우선되는구나.’라는 것을 행동에 나서면서 그것을 늘 깨닫게 하는 작용이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서 일어납니다.
들어도 소용없어요. 문 열도 나가면 ‘에이, 가스불이 왜 이래?’ 이런 식으로 다시 한 번 이 상황 속에서 ‘내가 그 때 있었으면 완전히 이 상황을 뒤 바꿀 건데. 가스 불 점검할 것인데 내가 없어가지고…….’ 이런 식으로 불만이 넘쳐나요. 그래야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래야 돼요. 지나가는 사람이 나보고 “당신이 왜 그렇게 못생겼어? 당신 죄 때문이냐, 아니면 부모 죄 때문이야?” 할 때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참 이런 말하기 힘들지만 혹시 성령이 임하시면 “내가 이렇게 못 생긴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여기서 못생겼다 잘생겼다, 하는 것은 일체 주님 몸 안에서는 그리스도 몸이 예쁘기에 그 지체도 다 예뻐요. 요한계시록에서 오죽했으면 보석같이 빛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신부인데요. 예쁘다고 안하겠어요? 누가 뭐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심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이야기할 때 그 말씀 한 마디가 ‘이것은 내가 착한 일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언제부터? 창세전부터 예정된 아버지의 뜻을 나를 그냥 사탕알갱이로 다루어서 내 안에 젤리 주셨구나.’ 이렇게 믿어지는 거예요.
야곱이 잘난 체하고 축복 받았다고 하다가 그 얍복강에서 다 빼앗기고 하나님한테 죽을 뻔 했어요.
그런데 비로소 복을 알아요.
나를 죽이고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끄집어내는 것이 복이라는 것,
진짜 계시가 겨냥하는 것은
나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고,
내 팔자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담겨있는 그분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그렇게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덩달아 우리가 그리스도 몸으로서 한 지체로서 다루어진다는
이것이 천국의 삶이고 천국의 백성의 특징, 놀라운 특징이고 특이한 특징이라는 것을 야곱은 알았지요.
그래서 큰 자가 어린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막에 요셉을 축복할 때 어긋맞게, 자리를 바꾸는 것은 아니고 자리는 그대로 있고 그 자리에서 팔을 어긋맞게 함으로써 내가 이것 없었으면 나는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을 요셉에게 대대로 전달해주는 언약적기능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 새 언약의 기능으로서 지금도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화가 하루라도 안 생기는 날이 없고 분노가 없어질 날이 없는 우리의 삶,
생각 같아서는 일찍 죽고 싶지만
주님께서 사탕으로서 계속해서 우리를 다루어주시기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건지는지 증거 하라고 살려내시니
이 은혜에 그저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