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죄 없는 자들
2013년 9월 8일 본문 말씀: 로마서 8:31-34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심에 집착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죄가 섞여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인간 있음’ 그 자체로 결코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의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에 있어 뭔가 가미하거나 변화되는게 따로 생겨야 합니다. 처음 인간은 존재 자체가 에덴동산을 가동하는지 지장없을 정도로 죄가 없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죄가 발생하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그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인간은 생명나무 쪽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를 영입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방침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인간은 에덴 동산 바깥에 나가 있는 처지입니다.
사는 자리가 죄 지을 수 밖에 없는 자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향하여 의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라도 의인 아니라면 하나님과 합류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 본문을 보고서 사람들은 ‘나도 의인이다’고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의인인가를 점검하는 몫은 하나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주변에 고소하는 자들의 활동을 허락하셔서 성도의 모든 면에 대해서 고발과 고소가 계속 이어지도록 조치하십니다. 평생을 걸쳐서 CCTV를 통해서 추적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 끊임없는 고소 앞에서도 성도는 여전히 의인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사단은 말씀을 가지고 고소합니다. “재 강도입니다, 재 창녀입니다, 재 죄인입니다, 재 전과있습니다”고 고소하도록 허용하십니다. 그리고서는 하나님께서는 의인이라고 판정을 내려버리십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를 놓고서는 의인이냐 죄인이냐고 판정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어주신 분과 관련을 놓고서 의인과 죄인을 규정하십니다.
본문 3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끼지 아니하시고 자기 아들을 내어놓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아들’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아들이 되려면 아버지와의 연관성을 지녀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미 에덴동산에 추방된 신세입니다. 아들로 사는 연결선이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진정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 나름대로 내놓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버지도 모르고 따라서 아들도 아니면서 마치 사람으로 얼마든지 행세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이 사람됨을 인정해 줄 것을 찾게 됩니다. 에덴 바깥에서도 사람구실하고 사는데 지장없도록 신에게 원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쪽에서만 자기 본색을 내어놓게 됩니다.
축복받을 자격도 없으면서 마치 축복을 받아서 사람구실해 보겠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단에 의해 여지없이 고소당합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내놓은 그 어떤 변명도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한 예를 들면 누가복음 18:10-14에 보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아버지와 연결된 것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이 꽉 차 있는 것을 내어놓는데 그 결과가 바로 죄인으로 규정받았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의 죄성을 그래로 고백하면서 내어놓습니다. 그런데 최종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리를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간추려보면 이러합니다. 죄인이라고 하기에 의인입니다. 자칭 의인이라고 여기기에 저주받을 자로 취급받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가게 된 오른편 양에게 예수님께서 통보하시기를 “너는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고 배고파할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럴 때 천국간 자들이 말하기를 “제가 언제 예수님께 해드렸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죄인이다면 의인이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고 알고 있으면 평생에 예수님에게 헌신하다시피한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두 요소로 가득차야 이게 교회입니다.
이런 의인이 되는 혜택은 인간의 범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들과 함께 아들을 믿을 수 있는 은사를 주십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주어진 그 은사 없이는 예수님과 연결된 아들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은사를 과연 받았는지 아니받았는지 하는 것은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 주어져야 합니다. 은사란 마치 방바닥에 깔린 보일러 호스와 같습니다.
분면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방바닥이 뜨끈뜨끈해지는 것은 우리의 생활 자리에 뭔가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뭘해도 우리는 죄뿐이요 뭘해도 우리가 예수님에게ㅐ 한게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의 자리 위에 존재해서 계속해서 십자가에서 능력이 올라와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란과 핍박 때문에 넘어지는 자는 평소에 예수 믿는 것이 자기가 인간답게 당당하게 행세하고 싶은 본심이 작용했다는 것이 폭로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연결되어있지 못하는 자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의한 환란과 핍박이 오게 되면 도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헤어질 자들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나게 되어 있는 자들이기에 모든 면에서 있어 고소당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정당성으로 변호하지 마세요. 우리는 진작에 저주받아 죽을 그런 존재 밖에 안되는 사람입니다. 더는 기대하지 마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일이 우리에게 들이닫칠 때, 이미 우리의 것은 날아가 버린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