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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49강-아들의 형상(롬8;28-30)이근호130901

아빠와 함께 2013. 9. 1. 17:46

 

아들의 형상(로마서 8: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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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9-01 13:22 
                             아들의 형상

2013년 9월 1일                          본문 말씀: 로마서 8:28-30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다른 철로가 놓여 있습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던 신께로 가는 노선이 무궁화라면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아시는 성령님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뜻은 KTX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에게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상에 관심 있습니다. 우리 형상이 아닙니다. 우리 형상은 성경에 의하면 그냥 아담의 형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에게 원하시는 바는 예수님께서 맏아들이 되시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모든 제안과 아이디어는 기각됩니다. 이 성령의 작업을 위해 인간들이 생각하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모두 뜯어 가십니다. 이 뜯겨짐으로 인해 형상의 자리는 비워집니다. 그 빈 자리는 아담의 형상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골로새서 1:15에 나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특히 이 대목에서 ‘보이지 아니하는’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대해서 매력을 갖는데 이는 늘 자신의 존재가 보인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세상 모든 변화를 체크하기 때문입니다.

즉 "보이는 나를 지켜야 돼. 내가 지켜야 돼. 암. 이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야“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변화를 말하면서도 자아만큼은 늘 그대로라고 우깁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자신을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간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을 보게 되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1-2절) 창세기 5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거론한 것은 죄 짓고 난 이후의 인간세계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고 아담의 형상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3절) 인간의 형상과 더불어서 이 지상에 나타난 현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약속그것을 공격하는 인간 나름대로의 구원책이 대결하게 됩니다. 희랍 문화권에서 이해하는 육신과 영혼의 상호관계는 그동안 교회의 인간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소마(육신)은 푸케(영혼)가 버려둔 시체를 의미한다는 생각이 희랍 문화권의 인간학에서는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생각은 영혼을 과대 평가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즉 육체는 '영혼의 무덤'으로, 죽음은 육체의 해방으로 보는 사고가 생겨나게 하였다. 또한 그들은 육체를 오류와 죄악의 원천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보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 가는 육체는 변함없는 참된 지식의 원리로서 작용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플라톤은 육체를 영혼의 도구로 영혼보다 못한 하급 원리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영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을 잠깐 담아두는 그릇이지만 영혼은 신적인 동시에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실수로 하늘에서 떨어져 육체 속에 들어가면서 인간은 자체의 힘으로 움직이지만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죽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영혼은 여러 신들의 도움으로 영원한 복지를 찾아 행진을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발상은 플라톤 뿐만 모든 인간들의 갖고 있는 견해며 이 견해를 그냥 플라톤이 대변해주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성경에서는 아담의 형상에 대해서 장차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실 분이 미리 ‘주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관여한다는 점을 밝혀주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나타나셔서 모든 것을 언약중심으로 일을 진행시키십니다. 출애굽기 13: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출애굽 이후에 애굽의 장자는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장자들은 살아남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의 각 집안의 장자들은 그들의 장자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로 도로 데려가도록 조치하신다는 겁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장자없는 가정이 되면, 따라서 각 가정에서 자신의 장자들이 소속되어 있는 그 하늘 나라에 소속되지 아니하면 구원이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언약궤 중심으로 모셔야 했는데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도 언약궤 때문이요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도 언약궤 때문이었습니다. 즉 머리 없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자신의 머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형상,  맏아들로서의 형상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이로서 늘 아담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인간들의 시간 의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지 전혀 보탬이 되지를 못합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나오는, ‘미리 정하심 →부르심→의롭다하심→영광스럽게 하심’은 시간적인 순서를 유발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적인 시간의식을 박탈시키는 식으로 작업이 주어집니다. 그 방법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하는 방식입니다. 고린도후서 1:19-20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 구원 성과 여부를 따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지가 다 짤려버면 곤충처럼 하나의 점이 되어 하나님의 언약의 머리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맏아들되시는 분이 이미 언약을 이루셨기에 우리는 그 혜택을 입는 겁니다. 우리의 시간 의식이 아니라 언약적 관점에서 이미 정해졌고 이미 부르셨고 이미 의롭다함을 입고 이미 영광스럽게 된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떡이 없는 죽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몰라서 죽는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9강-롬8장 28-30(아들의 형상)13099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50페이지입니다. 



로마서 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지난 시간에 성령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고 성령의 생각은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제공하는 겁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로마서 8장 27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성령님이 독점해 있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신학을 해도 하나님의 뜻을 몰라요. 하나님의 뜻은 성령님만이 아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이유는 인간이 매일같이 변하기에 그렇습니다. 



아침 다르고 오후 달라요.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갑자기 성질이 달라집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더럽게 달라져요.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어린아이에게는 음란죄가 없다고 했지요. 어린아이에게는 벌거벗은 것조차 아무런 흥분을 유발시키지 않습니다. 마치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 같아요. 점차 그 어린아이가 달라지고 변합니다.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거지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게 되면 그 때부터 창세기 3장이 시작되고 4장, 5장, 6장, 요한계시록 마지막 심판 때까지 가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 때 그들이 망하라고 만들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설마 하나님이 만든……, 자기들이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고자 해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이 책임질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창조의 뒷면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상상도 못했어요. 신약에 교회 만듭니다. 교회 만들 때 교회 부순다고 만든다는 것을 교인들은 상상도 못했지요. 목사들은 상상도 못했어요. 



참, 이것을 누가 알까요? 교회의 가장 큰 방해자가 뭐냐, 교회입니다. 교회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가려지고 성령의 뜻이 가려져요. 모든 판단기준이 교회 이익과 발전과 성장을 위한 것이고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나갑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 가장 원수된 것이 뭐냐 하면, 가정자체에요. 예수님은 이것을 아십니다. ‘ 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는 것, 우리는 그것을 옳다고 봤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양 여겼습니다. 



그것은 정월 대보름날 산위에 올라가서 비는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신년 초에 정동진에 가서 해 뜨는 것 보고 비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령님만이 아시고 독점해 있습니다. 인간들은 몰라요. 인간들은 왜 모르는가, 인간들은 이미 자기의 존재성을 느끼기에 자기 존재성을 갖고 들어가기에 하나님의 뜻에 자기존재가 위반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존재를 강탈하고 뺏는 방법으로 나가는 거예요. 이것을 제가 간단하게 이야기했지요. 창조 뒤에는 심판이 있다고. 



손바닥 가지고 게임하는 것 있지요. 곰발바닥 말발바닥, 하고 내밀 때 바닥이 다르잖아요. 창조바닥 뒤에 심판이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는 너를 만들었다. 왜?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를 만들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언약인데 하나님의 그러한 계획 속에 누구도 끼어들었는가 하면 예수님도 같이 합류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될 이유는 마리아에서 태어나서 그래요. 인간의 육신을 입고 왔기에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 3절에서는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 땅에 오셨다.’라고 했어요. 



육신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육신 다들 갖고 있지요? 죄인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7장 강해하면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죄인은 자체적으로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했어요. 죄인이 자기 스스로 죄를 해결해서 스스로 의인되는 방법은 육신 속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행위로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는 교회 다녀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천주교는 일곱 가지의 성례가 있어요. 대표적인 것 세 가지고 있는데 세례성사, 성체성사,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나중에 네 가지(고해성사, 신품성사, 혼배성사, 병자성사)가 덧붙여졌지만 기본적인 것은 이 세 가지였습니다. 천주교회에서는 그 세 가지를 행위로서 학습과 반복으로 쇠뇌 시키는 식으로 가르쳤던 거예요. 그러니까 천주교교인들은 신부가 시키는 대로 행하기만 하게 되면 성령이 딱 들러붙어서 안 떠나는 줄 알고 있는 겁니다. 세례 받으면 성령이 안 떠나는 줄 알고 있고 성찬식 하면 성찬식 한 그것 때문에 성령이 ‘떠나려고 했는데 못 떠나겠네.’ 하는 식으로 되는 줄로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런 식의 예식을 허락하신 것은 인간이 얼마나 못돼 처먹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고 있고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성당과 교회를 통해서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노선이 다른 노선입니다. 무궁화하고 KTX는 노선이 달라요. 같이 밀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 성령의 노선은 어떤 노선이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하고요,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독점적으로 알고 있는 성령님만이 할 수 있는 재주, 능력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이것을 지탱하거나 유지하거나 지속시킬 수 없어요. 이것을 가지고 28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하는데 여기서 ‘선’이라는 것이 육신의 뜻대로 하는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 잘되기 위한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계획하고 있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는 이 계획에 차질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이 선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장 19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대담한 말을 했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우리가 착해서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맨 날 실패하지만 우리가 맨 날 실패해야 될 이유는 우리 예수님이 맨 날 성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그 약속을 계속 우리가 아멘 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한테는 모든 것이 ‘예’가 되는 거예요. ‘아니오’가 없다는 말이거든요. 실패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아이, 안되겠네.’ 예수님한테는 이게 없다 이 말이지요. ‘마귀 때문에 일이 잘 안되네.’ 이게 없다는 말입니다. 누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누구는 아니고? 나는 아니고. 우리교회는 아니고, 여러분 가정은 아니고, 이 대한민국은 아니에요. 그래서 그리스도 앞에서 교회 없애고, 가정 없애고, 나 없애고, 다 없애버려야 돼요. 만약에 내 뜻을 따로 노린다면 이것은 KTX노선에 무궁화 노선이 끼어들어서 충돌을 야기 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내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네 뜻대로 해? ‘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끝난 문제인데 왜 거기에 네가 따로 나름대로의 ‘예’가 있어야 되고 너를 위한 약속이 따로 있어야 되는데?” 말이 안 되지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우리교회 부흥시켜 주옵소서.” 네가 뭔데 왜 부흥이 되어야 돼요? 우리교회 없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 건져내는 숫자에 전혀 변동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주님 소관이지 우리들 소관이 아니에요. 



한국 기독교 소관이 아닙니다. 목사 소관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일을 하시는데 그 방해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마귀’ 하겠지만 마귀까지 갈 것도 없어요. 바로 ‘우리자신’ 하면 돼요. 하나님, 성령의 일에 우리 자신이 방해를 놓습니다. 방해를 놓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름대로 좀 안다는 거예요. 포부도 있고 생각이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가 있기 전 4, 500백 년 전에 헬라의 철학자들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지, 정, 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 지정의는 인간을 분석할 때 육과 영과 혼으로 나누었던 삼분설에 입각해서 지정의가 나온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대해서 다 같이 동감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것만큼은 진리라고 주장한 겁니다. 지는 지식이고 정은 감정이고 의는 의지라는 겁니다. 그것을 기독교 신앙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느냐? 지식은 성경지식을 말하고 감정은 기도하는 뜨거운 심정을 말하고 의지는 전도해서 사람 끌어 모으는 실천적인 행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성령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마귀의 일입니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그래요. 



그러면 이 무궁화노선이 끼어들기 하는 이것을 어떻게 치워버리고 KTX,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유일하게 독점적으로 아는 성령의 뜻,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이 노선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인간을 점으로 만들면 돼요. 잔인하게 노는 애들 보면 벌레를 잡아서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다리란 다리는 다 떼버려요. 인간을 잡아서 다 떼버리세요. 머리도 때고 손 발 다 떼고 심장도 다 떼버리면 남는 것은 점으로 남아요. 



두뇌 속에 있는 물컹한 뇌세포도 다 떼 내 버리면 하나의 점이 돼요. 물리학에서 말하는 질점이 돼요. 점은 이리 굴러도 점이고 저리 굴러도 점이고 점에게는 동서남북도 없어요. 다 떼야 되는 이유가 인간은 지정의가 있으면, 소위 육과 혼과 영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거기서 뭐가 나와서 문제가 되는가, 시간이 나와서 문제가 돼요. 시간은 사람들 생각하기에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안 떼고 놔둬버리면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오해하게 돼요. 



나의 자아는 변하지 않는데 시간 따라서 약간의 변신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쯤 해서 좀 어렵다는 표정들을 지어줘야 되는데? 나는 이렇게 늙어가도 내 자아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얼마나 큰 오해입니까? 여기 30절에 보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는 이러한 순서를 가지고 인간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면, 여기에 자기의 시간론을 집어넣어버려요. 



뭐냐 하면, 창세전에는 미리 정했고 불러줄 때는 교회 나올 그 때 한 15년 전에 불러줬고 믿는 것은 세례 받을 때 믿었고 의롭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한두 달 뒤에 부흥사가 와서 은혜 받을 때 의롭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서서히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죽게 되면 영화롭게 된다, 이런 아이디어가 인간치고 안 나오는 인간이 없어요. 아주 손모가지를 다 떼 내 버려야 돼요. 성령님만이 하나님 뜻을 아는데 성령께서는 시간이 없어요. 없는데 인간들이 성령을 보면서 자기한테 적용을 시키는 거예요.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살아야 돼?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만들 때 멸망하라고 만든 겁니다. 멸망한 이유를 알아야 돼요. 멸망한 이유가 뭐냐, ‘다른 민족은 다 망해도 우리나라는 안 망한다.’ 그것 때문에 멸망한 거예요. 멸망하라고, 심판받으라고 지어놓은 인간인데 지어놓고 나니 인간은 안 죽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거예요. 그 자체가 치명적인 오류였고 그 자체가 범죄였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요. 성당이나 교회나 선악과 먹은 티를 낸다고요. 



‘너는 죽어도 나는 살아야 되겠다.’ 그거거든요. 그런 구절이 성경에 없어요. 너는 죽고 나는 산다는 구절이 없어요. 다른 교회는 망해도 우리교회는 부흥된다는 이런 것이 성경구절에 없습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그런 구절이 안 나와요. 로마서에도 그런 구절이 안 나옵니다. 모든 성경을 봐도 다 자기 중심이에요. 자기가 여기 존재한다는 그것으로 무조건 하나님은 자기편을 들어줘야 좋은 하나님이라고 그렇게들 생각하는 겁니다. 보름달 뜨면 비는 것, 보름달 쳐다보면서 그저 집안 잘되고 애 공부 잘하는 그 내용으로 비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요. 자기의 야심과 야망을 정당화하는 그것. 



지난 시간에 성령께서 오신 루트, 통로가 십자가라 했지요. 십자가를 통하지 않은 성령은 성령이 아닙니다. 이만희를 통한 성령은 성령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나온 십자가의 영이 성령이에요. 그냥 하나님이 주신 영이 성령이 아니고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온 성령이 성령이에요.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이젠 십자가의 뜻을 제대로 이 땅에 적용시키겠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취지, 십자가의 의의, 십자가복음만을 하나님의 뜻으로 전하겠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너는 죽어야 된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내가 죽은 것이 사실은 너의 죽음이야.”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자살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에 죽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지 그냥 태어나서 백번을 죽어도 십자가를 거치지 않으면 성령의 뜻을 모르고 성령의 뜻을 모르면 하나님은 어림도 없어요. 그것은 아예 다른 노선이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KTX노선처럼 성령의 노선은 이미 정해져 있고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은 독점되어 있습니다.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를 못해요. 



“성령을 받으면 알게 아니겠습니까?” 하는데 성령을 받게 되면 이미 자신의 손모가지 발모가지, 머리고 뭐고 다 끊어진 상태에요. 하나의 점이 된다니까요? 내가 품고 있던 나의 시간론, 과거 현재 미래가 야기하는 소망, 과거에 내가 착한 일 했다는 그 사랑, 과거에 했던 나의 행함에 대한 나의 애착, 집념, 그게 사랑이거든요. 여러분,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 노동에 대한 가치부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제가 어렵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려운 것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것은 남이 아니고 내가 했기에 예뻐지는 그것이 사랑이에요. 



애인보고 “당신 사랑합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당신한테 퍼준 가치를 도로 회수하겠다는 뜻이에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네가 명품만 챙기고 도망치느냐, 그렇게 하는 거지요. 전부 다 인간은 믿음 소망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가, 다 자기에서 나와요. 자기긍정이고 자기 의로움입니다. 이게 바로 육신이라니까요? 이것을 성질 별난 인간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겁니다. 십자가에서 너 대신 죽었다는 거예요, 너 대신, 너 대신 죽었다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대신이라는 말이. 너 대신 죽었다는 거예요. 대신 죽은 것이 없으면 너는 그냥 골로 간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자꾸 끄집어내는 그것들에 왜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습니까? 대신 죽었다는데. 왜 그 대신의 가치를 우리가 훼손합니까? 무슨 자격으로 훼손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애쓰고 노동한 것을 다시 회수해서 자기영광으로 집착하는 것이 사랑이죠. 그러니 교회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곳입니까? 우리교회는 봉사도 안하고 가만있으니 교회 날라 가도 잘 날라 갔다 하겠지만 다른 교회 가 보세요. 





꽃꽂이 하고 피아노반주하고 난리 죽입니다. 하나하나 행할 때마다 자기가 교회 봉사한 것, 헌금한 것, 십일조 낸 것, 잊을 수가 없어요. 그게 집착이라니까요. 그게 바로 성령의 일을 훼방하는 악령의 일입니다. 목사가 되었으면 목사직을 버리면 되는데 그놈의 목사직이 뭔지, 그 놈의 라이센스가 뭔지, 그걸 쥐고 나는 주의 사자랍시고 버티고 있으니 ……. 장로 안수 받았습니까? 버리면 되는 거예요. 또 스스로 버리면 안 되고……. 성경말씀, 주의 뜻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곡해하는 주범은 본인인 인간인데 어떤 식으로 이것을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해석하는 방법은 딱 하나 있습니다. 2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맏아들, 이 대목으로 무궁화 노선에서 KTX노선으로 바꿔 타 봅시다. 맏아들이 뭐냐 하면, 출애굽기 13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출애굽 유월절 사건이 끝나고 나오는 말씀인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 13:1,2) 



애굽의 맏아들이 죽었을 때 자기 맏아들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아들 했는데 출애굽기 13장 1절에 “네 아들 살았나?” “살았습니다.” “내 놔. 그 살았다는 네 아들 내놓아라. 네 것이 아니야. 이제는 내 것, 이 여호와의 것이다.” 맏아들의 자리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맏아들의 형상이라는 것이. 맏아들의 형상은 소위 아담의 형상과 연결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그것은 아담의 형상이에요. 



아담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을 구분해야 돼요. 구분하고 아담의 형상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건너뛰는 방법은 없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성경에 분명히 나오거든요. 창세기 5장 1절에 보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지만 그 다음에 3절을 보면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 이렇게 아담의 형상만 죽죽 내려갑니다. 이게 육신의 형상이거든요. 



하나님의 형상은 끝났어요. 없습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것은 플라톤 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이것은 철학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은 신이 만들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으니 그 신의 속성이 인간 속에 있을 것이다. 그것을 신의 형상이라고 하자.’ 이것은 플라톤과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나온 형상론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 속에는 신의 요소가 있는데 신의 요소가 뭐냐, 거룩한 것과 겸손한 것과 신을 아는 것과 도덕적인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죄나 짓는 것은 짐승의 형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짐승의 형상을 줄이고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날로 더 그 형상의 양을 보태고 또 보태서 키워나가면 나중에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된다.’ 



그런 이야기는 철학가들이 하는 이야기에요. 그걸 총신에서 다 가르친다니까요, 총회신학교에서. 목사들이 그것을 다 배워서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은 골로새서 1장에 분명히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분명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는 누구인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뭐냐, 아담의 형상이에요. 아담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광과 연결되는 방법은 맏아들의 형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맏아들의 형상을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시는가? 여러분이 명승지나 유적지 같은 데 가보면 사진 찍는 행사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안 가봤는데요, 미국의 할리우드 같은 곳에 가게 되면 유명한 배우들의 옷차림을 해 놓고 어느 부분만 없는가 하면 목 부분만 비워놓는 거예요. 그러면 관광객들이 와서 사진 찍을 때 이 목 부분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고 치즈, 하면서 찍으면 유명한 배우 같은 옷차림이 되는 거예요. 맏아들의 형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출애굽기 13장에서 본 것처럼 맏아들을 도려내는 겁니다. 



이것을 비워두는 거예요. 박탈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의 형상은 뭐냐, 목 없는 존재가 돼요. 인간은 연결고리가 없어요. 머리 부분, 형상부분이 없다는 말이지요. 에베소서에서 예수님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교회의 머리”라고 했어요. 누구도 머리가 될 수 없다는 말이거든요. 누구도 누구에게 명령하고 지시할 권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요한1서 2:27)는 그것이 바로 교회다 그 말이지요. 목 부위가 없는 거예요. 



목 부위가 없는데 뭘 로 채우는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의 형상과 결합을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결합을 시도할 때 ……,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흐름이 어떻고 연결이 안 된다고들 하는데 참 걱정이 됩니다. 지금 아담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이 연결이 안돼요. 비워놓습니다. 출애굽기 13장처럼 ‘맏아들 내놔라.’ 맏아들이 없는 것은 머리가 끊긴 거예요. 맏아들이 죽어버렸는데. 애굽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니고 매한가지로 다 죽고 없는 거예요. 맏아들이 없는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가, 그 문제는 하나님의 언약이 와서 그것을 채워주는데 그 언약이 올 때 언약만 홀로 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오는가 하면 주의 이름이 같이 동행해서 와요. 



한 번 정리합시다. 인간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아담의 형상이다. 아담의 형상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령의 뜻에 의해서 맏아들의 형상이 오시기 위해서는 장차 맏아들 되실 분이 주의 이름으로 구약 때 미리 오시는데 그 분이 그냥 맨손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은 누구 몫인가 하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몫이 아니고 언약과 함께 오신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이 동행해야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와 함께 있다고 여긴 사람이 모세인데 그 사람은 지팡이가 중요해요. 



이 지팡이 가지고 전쟁에 이기고 지고 하는 거예요. 모세는 그 지팡이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을 모실 뿐이지 실제로 지팡이가 움직일 때 주의 능력이 임하는 겁니다. 주의 능력과 인간의 능력이 싸움 해봐야 게임도 안 되지요. 애굽 군대가 나타나고 아말렉 군대가 나타나도 주의 이름이 나서서 전쟁하니 사람은 질 수밖에 없지요. 여호수아가 칼싸움 하는 것은 ‘네가 칼로 싸워봐야 네 칼로 아말렉이 물러가는 것이 아닌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배우처럼 역할을 한 겁니다. 주의 이름이 일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언약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언약궤와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전체 숫자로 보면 줄지 않았습니다만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어쨌든 다 죽었어요. 왜 죽었습니까? 1) 양식이 없었다. 2) 물이 없었다. 3) 하나님을 원망했다. 같은 말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왜 죽었어요? 양식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인간들이 걱정한 거예요. “양식이 없어서 교회 못가겠습니다. 바빠서 하나님 못 섬기겠습니다.” 하는데 그것은 핑계고 정작 광야에서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믿음이 없어서 다 죽은 거예요. 



이것은 낯선 노선이에요. 이것은 무궁화가 아니고 KTX입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있고 마실 것이 있어야 산다고, 아직도 이 육신은 지금도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역시 돈이 최고다.’ 아직도 육신은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궁화노선, 우리가 알고 있는 노선이고 낯선 KTX노선은 뭐냐, “차라리 죽어라” 그 말입니다. “네가 살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데 차라리 죽어버려라. 네가 차라리 죽는다고 할 때 너의 진짜 본색, ‘나는 죽어 마땅함’을 알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되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잖아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신 6:5) 



어차피 인간은 사나 죽으나 이미 죽어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고요. 이와 죽어가는 것, 죽어가는 나한테 내 몸을 맡기지 마시고 약속에다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 약속에다 우리의 몸을 맡겨주시면 나의 이익은 없어요. 깨놓고 이야기해서 우리한테 돌아오는 푼돈 같은 것은 없습니다. 명예, 인기, 없어요. 스데반집사가 무슨 인기가 있었겠어요? 강도가 무슨 인기가 있었고 창녀가 무슨 인기가 있었겠어요?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인이 무슨 인기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다 구원받고 천국가지 않았습니까? 노선이 달라요, 노선이. 우리가 생각한 그런 노선이 아니라니까요. 하나님의 뜻은 성령께서 독점해서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오’가 전혀 없어요. 실패가 없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받은 약속이 뭐냐 하면, 언약궤 중심으로 움직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라 하는 것은 나무상자거든요. 아카시아나무로 만든 나무상자에 금박 입힌 겁니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거기서 별스런 능력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 그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요단강에 발을 딛는 순간 요단강 물이 차단되었습니다. 마침 장마철이라 홍수가 났는데 언약궤를 메고 들어가니까 물이 차단되고 말았어요. 여리고성에 들어갈 때 무기는 전혀 없었어요. 여리고성에 들어가는데 그냥 언약궤만 가지고 하루에 한 바퀴씩,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그냥 돌았을 뿐이고 나팔을 불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난공불락의 그 여리고성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낯선 것입니다. 정말 믿음이 없는 사람 같으면 성령을 네가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를 결정짓는 어떤 기준 같아요. 



성령 받았으면 언약에다 네 몸을 맡길 것이고 성령을 안 받았으면 교회 다니기, 헌금하기, 기도하기, 전도하기, 네 몸이 하는 행위에다 네 몸을 맡길 것이고, 그렇게 결정짓는 기준 같은 겁니다. 언약궤 중심에서 옆에 누가 있는가? 언약궤 옆에는 왕도 안돼요. 그 잘난 권력자도 안 됩니다. 언약궤 옆에 가면 죽어요. 평민들이 가면 죽습니다. 언약궤 옆에는 이미 하나님의 피를 바른 제사장만이 언약궤 주변에 포진해서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버티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언제 망하는가? 



그 언약궤 주변에 있던 제사장들이 돈 밝힐 때, ‘나도 제사장 해서 한 번 밥 먹고 살아보자. 남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도 이 짓해서 한번 살아보자.’라고 나올 때 그 언약궤의 가치가 없어지고 이스라엘은 폭삭 망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언약궤는 어디 가 있느냐 하면, 언약궤는 지상에 있지 않고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어린양의 보좌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 남아 있는 이 세상은 뭐냐?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눈에 보이는 자동차, 공장, 원전, 야구장, 축구장, 예배당, 이 모든 것이 다 뭐냐? 



그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창녀라고 하는 거예요. 창녀는 미혹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 우리를 이끄는 것, 푹 빠지게 만드는 것, 끌리게 만드는 것,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그것, 그겁니다. 이 세상은 그냥 아름다운 창녀라고 보면 돼요. 그런데 창녀라는 기준은 하나님이 내린 것이고, 언약이 내린 것이고 우리가 보기에는 창녀가 아니고 그냥 아름다운, 내가 마음속에 그리워했던 이상향이죠. 



누가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누가 나를 유인하지 않나.’ 지금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누가 와서 나로 죄지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의 죄를 유혹 좀 해 달라고 환장을 했어요. 세상이 날 좀 유혹해 달라고.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합니다. 이젠 TV도 재미없다고. 이러한 세상 유혹은 특징이 있어요. 쉬지 않고 변한다는 겁니다. 왜 세상이 변해야 되는가? 내 만족감이, 내 행복감이 변하기에 그런 거예요. 나는 날마다 변하면서 이 변하는 나를 바깥세상이 다 채워달라고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의 점인데 다리가 너무 많아요. 꼭 지네 같아요. 성령께서는 지네같이 오늘도 세상에서 내가 죄 지을 것을 찾아다니고 있고 헤매는 시라소니처럼,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오늘도 굶주린 채 그러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다리몽둥이를 다 부러뜨려놓아요. “이거 있으니 네가 세상 찾지?” 하고 전부 다 부러뜨려요. 그래서 하나의 점으로 만들어요. 시간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하나의 점으로 만드는 거예요.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한테 허용된 적이 없는 거예요. 



따라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고, 살아 있는 내가 할 일이 아니고 맏아들의 형상, 주님의 언약이 나머지 부분을 철컥, 하고 채울 때 거기에서 한꺼번에 몽땅 다 같이 쏟아지는 겁니다. 이미 정해졌고 이미 부르셨고 이미 의롭고 이미 영화롭게 되었고. 그래서 “영화롭게 되었느니라.” 플라톤 철학에서는 인간을 셋으로 나눴습니다. 육적인 것을 혼과 영이 이끌어줘야 좋은 나라에 이데아의 나라, 천국에 간다고 본 거예요. 



원래 육밖에 없었는데 영혼이 실수해서 뛰어내려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육은 변하는데 영혼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변하지 않는 영혼 쪽에서 매진하게 되면 쓰레기 같은 우리를 변하지 않는 쪽으로 데려가서 우리를 살려낼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이게 플라톤이라고 말을 했지만 모든 인간의 육신이 갖고 있던 본래적인 아이디어를 플라톤이 대변해준 것밖에 안돼요. 그래서 아무리 신학을 하고 아무리 목사를 하고 아무리 성경을 봐도 우리는 플라톤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아자체를 신으로 등극시키기 위해서 그저 신봉하는 자도 나고 신봉 받는 분도 나고, 내가 숭배하고 싶은 것은 나고 숭배하는 자도 나고, 내가 종교의 교주가 되고 또 신자가 되고, 24시간 생각하는 것이 자기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것을 지난 시간에 자기에게로 회수한다고 했지요. 



플라톤은 말합니다. 모든 거룩한 것은 지속되고 변화되지만 회수된다는 겁니다. 지속, 변화, 회수, 지속, 변화, 회수. 자아는 한결같고 세상은 달라져도 내가 원하는 대로 나에게 다시 회수할 수 있다, 이 과정, 이 무궁화 노선, 이런 인간노선에 성경 모든 구절을 다 쏟아 부어서 자기는 기독교 신자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자고 우기고 있어요. 실제로는 아담의 형상을 극대화시킨 겁니다. 



여러분을 대체하고 여러분을 대신 한 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 오셨지만 그 분은 이 땅을 은퇴할 때에 피 죽음으로 은퇴했고 우리는 멋지게 은퇴하려고 지금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막 8:34) 그 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왜 그 십자가를 자꾸 던져버리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에요. 나의 시간론을 지네다리 끊어놓듯이 혹은 메뚜기 다리를 끊듯이 다 부수는 거예요. 나를 하나의 점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리 굴러도 감사하고 저리 굴러도 감사하고, 점이니까! 서울 가도 감사하고 대전가도 감사하고 목포에 가도 감사하고, 어딜 가도 하나의 점으로만 존재할 뿐이에요. 그런데 그 점에다가 뭘 붙인다? 성령을 통해서 맏아들이 접합이 되어버리면,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맏아들, 장자에 접합이 되어버리면 언약궤가 장자 그 쪽에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성령의 뜻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이미 약속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애들 운동회 할 때 박 터지면 안에 색종이가 확 쏟아지는 것처럼 언약궤가 팍 깨지면 그 안에 들어 있던 미리 정하신 사랑, 창세전부터 정하신 사랑, 이미 영화롭게 하신 그 사랑이 한꺼번에 우리에게 쏟아지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사는 것은 뭐냐, 주의 증인으로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게 되는 거지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잖아요. 



이것은 우리가 싫다고 해도 ‘노(no)’가 아니고 ‘예’가 되는 거예요. 우리 머리를 잘라 내버리고, 우리 머리는 시간론 때문에 골치 아파요, ‘이미 다 이루었다.’를 딱 장착해 버리면 이것을 가지고 고린도후서 1장에서 도장 찍는다고 이야기해요. 22절에 보면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도장 찍는다는 말이지요. 도장 날인의 특징이 뭐냐, 도장을 찍게 되면 그 찍힌 자국은 수백 수천 개가 되고 도장 찍힌 그 모양새는 다 하나에서 나오지요. 집사니 권사니 할 것 없이 성령의 도장을 찍어버리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머리인 것을 고백하는 하나의 도장에서 나온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두 자로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라고 되어 있단 말이지요. 서울 대전 부산 찍고 목포 찍고, 이렇게 다 다르게 찍더라도, 미국이든 독일이든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성령께서 “오직 그리스도, 맏아들 되시는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게 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는 남아야 될, 다른 교회 다 지옥가도 하나는 남아야 될 오직 하나의 교회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 4:4-6) 



그런 식으로 우리는 주님 앞에 활용당할 때 그것을 27절에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도는 내가 성도가 아니고 성도라 하는 것은 만들어지기 나름입니다. 네가 성도가 아니고 매일 같이 성도로 만들어지는 그 사람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그저 나는 내 이익만 챙기고자 교회 나왔지만 그 교회마저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단체인 것을 우리가 왜 진작 몰랐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니오’가 없고 ‘예’가 성취되어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 바라보게 되었사오니 그 언약으로 인하여 구원받았음을 증거 하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