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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52강-사도의 큰 근심(롬9;1-5)이근호130922

아빠와 함께 2013. 9. 22. 21:54

사도의 큰 근심(로마서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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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9-22 13:29 
사도의 큰 근심

2013년 9월 22일                            본문 말씀: 로마서 9:1-5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9: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52강-롬 9장 1-5(사도의 큰 근심)1309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9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51페이지입니다.

로마서 9:1-5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사도에게 큰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근심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사람이면서도 이스라엘이 뭔지를 모르고 있다는데서 오는 근심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그 역할과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이스라엘 되게 하십니다. 막상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도록 하나님께서 나타나고 보니까 혈육 적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라고여기는 사람들은 전부 다 탈락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의 생각은 이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구약에 나온다, 그 말은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이야기했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될 때 이스라엘백성이라고도 먼저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하나님의 그 일관성 있는 작업이 어디서 완성이 되고 마무리를 짓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것이 마무리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됨을 꾸준히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혈통적으로 우리 조상이 안동 권 씨니 경주 이 씨니, 하는 식으로 조상 적으로 나는 이스라엘이고 아브라함자손이라고 여긴 사람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제시한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끊어져서는 안 되는데 그들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면서 보니까 그리스도에서 끊어져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에서 끊어져 있으니까 이것은 백프로 이스라엘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3절에 보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라고 되어 있어요.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말만 한 것이 아니고 그 앞에 있는 말이 뭐냐 하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저주가 뭐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을 저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

보통 누가 우리한테 저주라고 한다면 그것은 집안에 불이 나거나 애가 교통사고 나서 다 죽어갈 때 이런 것을 저주의 끝이라 보지 않습니까? 하던 사업이 몽땅 부도가 나거나 하는 것들을 저주라고 보는데 사도바울은 그것을 저주로 보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보면 “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것을 저주라고 보지 않아요. 그리고 “도살할 양 같이.” 세상에서 도살할 양같이 곧 끊어질 사람, 이것도 저주로 보지 않습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이 없다, 저 집안은 저주받았다. 그것도 저주가 아니에요. 양을 키우는데 양 한 마리 남지 않고 다 죽었다, 그것도 저주가 아니에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합 3:17) 그게 저주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감람나무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자식이 망하고 집안 망한 그것을 저주라고 여겼던 그곳에서 나는 벗어나게 된 것, 벗어나게 된 것을 저주에서 풀렸다고 한 거예요.

저주라고 생각하는 그 안에서 저주 안 받아야지, 하는 그것이 저주가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육신적으로 이스라엘이라 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가를 알아요.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으면 그것이 저주야, 라고 여기는데서 어떻게 저 사람을 빼낼 수 없을까? 저것을 저주라고 오해하는 이 풍토에서 어떻게 그 사람을 빼낼 수 없을까? 그 점이 안타까워서 사도바울은 지금 큰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자식들 성적 떨어지면 큰 근심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집안이 무슨 저주를 받아서 공부를 이렇게 못하느냐, 하고 탄식하잖아요. 바로 그 저주에서 어떻게 하면 빼낼까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사도바울이에요. 왜냐? 인생은 뭐냐? 인생은 걸레거든요. 넝마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전부다 쭉쭉 찢어지는 걸레하고 똑같아요. 이 찢어진 인생을 대충 실로 꿰고 모아봐야 그게 정상이겠습니까? 그냥 넝마지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죽어봤습니까?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렇게 이야기하기에 제가 그랬어요. “사는 게 더 무섭습니다. 당신은 사는 게 곧 죽음이라는 것을 왜 그렇게 모르는가?” 이게 사는 겁니까? 죽는 것이지. 성경에 보면 산다는 명목으로 죽고 지내다가 죽고 난 뒤에는 제대로 한 번 살아보라, 하는 것이 성경이에요. 이 사람 의식해야 되고 저 사람 의식해야 되고, 이것저것 고려해야 되지, 우리의 영혼이라는 것, 마음이 갈래갈래 다 찢어졌어요. 고양이가 고무장갑 물어가서 다 찢어발기듯이 갈기갈기 다 찢어놓았어요. 이것을 어떻게 얼기설기 연결시켜 보려고 하는데 그것이 연결이 됩니까?

걸레는 그냥 걸레라고 여겨야지요. 사도바울은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런 겁니다. ‘다시 돌아갈까?’ 그런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를 몰라서 저주받았던 그 시절, 그 때를 경과해서 이제는 예수 안에 있잖아요. 예수 안에 있는데 자기친척들은 지금 예수 밖에 있거든요. 예수 밖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말은 사도바울이 구원받기 위해서 어떤 지점을 통과했는지를 말하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통과했기에 지금은 저주받지 않는 영생을 얻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그 지점을 통과하지 않았기에 지금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인데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은 생각 안하고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고 인생 망하고 제대로 안 풀린다.”는 이런 것을 저주받았다고 여기니까 ‘아, 다시 돌아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지나왔던 그 순서를 다시 밟아서 저주받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의 멱살을 쥐고 이쪽으로 옮겨올까?’ 이런 근심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영화 보면 주인공은 주로 영웅이잖아요. 힘도 세고 지혜로워서 승승장구하면서 마지막 지점에 다 왔는데 그만 사랑하는 여인이 그 위험한 지점에 그냥 있는 거예요. 관객들은 조마조마 한 거예요. 여자 애인보고 “너는 여기 그냥 있어. 내가 가서 악당을 물리치고 오겠다.” 신신당부했으면 여자가 그 말 듣고 가만 있으면 되는데 여자가 말을 안 들어요.

“난 자기 가는데 따라 갈 거야.” 괜히 가는데 따라가서 나중에 체포되어서 악당이 그 여자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주인공 보고 하는 말이 “네가 칼을 버리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분하다 하면서 총을 버리고 말지요. 일 잘 되어 가는데 위기를 맞이하게 되잖아요. 관객들이 보고 있다가 ‘저 여자 진짜 말도 안 듣는다. 저거 패버리지.’ 한다는 말이지요. 주인공이 되었으면 적어도 신사도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한 지경에 있을 때 그냥 갈 수 없잖아요.

그냥 가도 되지만 지금 위험하거든요. 지금 시한폭탄 터지는데 몇 분 안 남았어요. 그런데 신전 안에 여자는 지금 묶인 채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여자 데리고 신전을 빠져나오는 찰나에 폭탄이 터지면서 신전이 무너지는 스토리, 그래서 다 살고 영화는 끝나는 식이지요. 아슬아슬 하지요. 이 세상이 그렇게 위험하답니다. 지금 우리는 위험지역에 살고 있다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어느 정도로 위험한가, 세상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저주는 이 그리스도에서 끊어지면 다 주어진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세상을 보는 이유가 있어요. 4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어려운 말을 아주 쉽게 한 마디로 하면 이렇습니다. “저희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을 아는 자.”라고 설명하면 되고 “그들은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을 직접 체험한 자요.” 또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홍해 바닷물에 빠져야 되는데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물은 절벽이 되고 그 가운데 길이 있어서 그 마른땅으로 건넜던 경험을 했던 그들이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보기에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옛날에 있었던 그 하나님의 저주가 녹녹치 않다는 겁니다. 그게 그대로 현실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인데 그들이 정신도 못 차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 때 그 저주, 저주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저주거든요. 개인의 개성이라든지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그 상황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도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졌는데 끊어진 이유가 군대생활 같아요. 군대생활의 특징이 뭐냐, 같이 먹고 같이 잠자고 같이 훈련하고, 똑같이 살아요.

생활이 같아요. 같이 일어나고 같이 훈련하고 잠도 같이 자면서 저희끼리 진짜 사나이라고 우기고 있고 똑같이 해요. 이 세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개성, 개성, 자신만의 독창성, 주체, 이러지만 사실은 고만고만해요. 다 똑같이 살아갑니다. 도토리 키 재기 같아요. 정답이라는 것이 없어요. 망해도 같이 망하는 겁니다. 제가 화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것을 배웠거든요. 모든 물질은 다 원소로 되어 있다고 해요. 원소를 나누면 92가지의 원소들이 원자가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어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원자라는 것을 밖에서 보게 되면 거기에는 양성자도 있고 핵도 있고 전자도 있는데 전자 바깥에 껍질이 있어요. 이 껍질에 전자의 빈 칸들이 있어요. 이 빈칸들에서 어떤 경우에는 주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받아 챙기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공유하기도 합니다. 그 화학을 공부하면서 제가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빈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공유결합이라고 하거든요. 빈자리를 허락하지 않아요. 서로 단결, 결합해서 사는 겁니다. 사람의 두뇌라는 것은 그냥 두뇌가 아니고 사회적 두뇌라는 말을 써요.

사회적 두뇌라는 것은 사람 자체가 혼자 살면 병들 수밖에 없는 두뇌로 환경에 적응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개성, 개성, 하지만 개성 없어요. 전부 다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면서 흉내 내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남이 행동하면 보고 그대로 따라 해요. 남이 좋아하는 춤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남이 찬송가 부르면서 박수를 이렇게 치면 지는 해병대 박수치다가 갑자기 바꾸는 거예요. 인간은 이 분위기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갇혀 있는 상태라고 하지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없어요. 여기서 우리는 무슨 결론을 낼 수 있느냐 하면, 모든 교회라는 것이 서로가 서로를 흉내 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이단입니다. 교회가 이단이에요. 인간은 태어난 것 자체가 이단이고.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교회 밖으로 튀어나오지를 못해요. 하나님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 믿을 생각은 안하고 ‘가만 있자. 교회에서 목사가 무엇을 가르치고 먼저 온 다른 교인들이 뭘 하지?’ 이렇게 해요. 그렇게 한다고요.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흉내 내고 모방하고 서로가 서로 없이는 못살고 딱 붙어서 자야 잠이 오고, 서로가 의지를 해야 되고.

다단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나중 투자한 쪽이 먼저 투자한 사람의 손해를 보장해 주는 것이 다단계에요. 뒤에 가면 갈수록 바보 병신들이에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온 사람들이 붙느냐 하면, 자기보다 더 뒤에 졸병이 올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부도가 나 봐야 모든 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지요. 인간은 인간자체가, 본인이 사기라고 이야기할 자격이 안 되는 이유가 사기 외에는 없어요. 저는 그것을 세트장이라고 합니다. 세트장이라는 것은 뭐냐, 일종의 그림으로 그렸거든요.

하늘과 구름, 나무, 초가집, 이것은 일종의 세트장인데 그 세트장은 자기가 평생 살면서 자기만을 위해서 걸어놓은 세트장이에요. 죽고 나면 그것은 다 철거해버립니다.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어른들이 그동안 입던 옷가지나 내복, 이런 것들을 장례식 할 때 불에 다 태우잖아요. 그것은 뭐냐, “아이고, 우리 아버지(어머니).” 그 세트장을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평생의 그분의 추억과 기억이 들어 있던 것들,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일기장과 앨범사진들, 다 태워버립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만든 조작된 세트장, 그래서 자기가 누군지는 몰라요.

자기를 위한 세트장이 철거되면 철거된 그 필름과 함께 본인도 같이 사라지는 겁니다. 자식? 세트장의 일부에요. 남편? 아내? 친구? 학력? 동창들? 전부 다 내가 나를 위해서 임의적으로 만든 세트장이에요. 그 세트장도 옆 사람 것 모방한 것이거든요. 대대로, 전통적으로 내려온 겁니다. 그 자체가 다 사기인데 무슨 정답이 있어요? 우리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교회 와서 구원받겠다고? 무슨 교회가 천국과 관련이 있습니까? 교회는 동네 노인정이고 스크린 골프장이고 헬스장입니다.

평생 교회 다녔으면, 한 40년 교회 다녔으면 헬스장 한 40년 다녔다고 보시면 돼요. 그냥 노는 모임에 불과해요. 교회는 하나의 세트장이기에 노는 모임에 불과한 겁니다. 교회가 구원시켜주고 교회가 저주를 풀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옛날 천주교는 안 그랬어요. 천주교는 영세를 주고 성체성사를 하면서 하나님이 이것만 쥐면 영생 준다고 보장했다고 했고 거기에 아버지까지 있어요. 성당에는 아버지가 있다니까요. 신부를 아버지라 합니다. 신부위에 주교 있죠, 주교 위에 추기경 있고 추기경 위에 교황이 있지요.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식으로 제도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목사 있고 부목사, 장로, 전도사 있지요. 하나님께서 그런 제도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디모데전서에 장로 된 자, 집사 된 자, 그런 것을 만들어놓았다는 겁니다. 세트장입니다. 허구에요, 그거! 허구는 없애면 될 것이 아닌가? 허구라 하는 것은 진실이 없을 때 대타로 들어가는 거예요. 대체 물 로서 들어가는 거예요. 남편이 허구라고요? 남편을 없애버리면 남편 자리에 다른 것이 또 들어와요. 어차피 있어야 될 허구라면 이왕이면 남편하고 사는 것이 낫다 그 말이지요. 어차피 허구인데, 어차피 정답 없는데.

한 번 잠자면서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연결이 안 돼요. 그냥 그 때 그 때 찢어진 채로 사는 거예요. 우리가 그 느낌을 알잖아요. 이것은 이유가 뭐냐 하면,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전부 다 딱딱 끊어지기에 그렇습니다. 지난시간에 이야기했듯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 않을 경우에만 구원받아요. 교회에서 열 번 끊어져도 괜찮아요. 교회에서 이단소리 들어도 상관없어요. 교회도 이단인데, 이단이 이단보고 이단소리 하는데 그것은 괜찮아요. 사도바울이 외친 것은 교회에서 끊어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면 그것이 저주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약의 모든 약속과 율법과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겨 있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 안에는 없어요. 교회는 인간들 밖에 없고 교회는 세트장인데 거기 뭐가 있어요? 교회는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요. 모든 영광과 율법과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니까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합동 측, 통합 측, 이런 교단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목사가 뭐했다고 남을 구원해요? 십자가 지지도 못한 인간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언급한 것은 이겁니다. 이 세상은 병 걸렸고 위험한데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말씀은 약이 없다는 겁니다. 세상은 병 걸렸어요. 한평생 살면서 만든 세트장 철거되면 자기도 철거되고 없어집니다. 아는 사람들 죽게 되면 6개월 지나면 다 잊어버려요. 난 아직도 황 수관박사 살아 있다고 착각한다니까요? 죽은 지 2년이나 되었는데. 약이 없다는 것, 병 걸렸다는 것 보다 더 절망적인 말은 그걸 고칠 약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약이잖아,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큰 모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직 안 죽은 사람이 예수님을 약으로 먹는다면 사는데 사실 안 죽은 사람이 아니고 다 죽어있거든요.

죽은 자가 예수를 이용하든 삼위일체를 이용하든 뭘 이용해도 그것은 죽은 자가 죽었다고 티내는 것뿐이지 죽은 자에게 예수가 속에 들어오면 이미 변질이 되어버려요.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힘이 작동하기에 예수 믿어봐야 그 예수도 들어오자마자 가짜 예수로 변질되고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인간은 엉터리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어요. 엉터리 예수, 엉터리 성령, 엉터리 삼위일체, 엉터리기도, 엉터리헌금, 엉터리전도, 엉터리감사, 엉터리예배, 엉터리찬양, 모든 것이 다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썩어가기에 썩은 곳에 들어와 봐야 썩을 수밖에 없어요.

냉장고 고장 났는데 거기에 맛있는 것 넣어봐야 나중에 보면 곰팡이 다 피어버립니다. 우리 안은 곰팡이 핀 것 밖에 없어요. 약이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예요. 전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3절을 다시 봅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주를 받아야 되기에 저주를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저주를 받는데 누구한테 저주를 받아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저주를 받으면 그것이 유일하게 사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나는 저주받기 싫어. 나는 저주 안 받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병든 인간의 병든 모습이고 그게 사탄이 인간을 그렇게 망쳐놨어요. 그래서 저주를 아예 받는 길이 차라리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겁니다. 사도본인은 그것을 알기에 내가 다시 너희에게 간다고 한다면 저주를 받지 않고서는 다시 너희에게 합류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 내가 전에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내가 저주 받는지도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을 실컷 섬겼거든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도록 온전하게, 요새 말로는 교회 다니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헌금 다하고 주일성수 다하면서 그렇게 살면 구원받는 줄 알았어요.

그게 저주 아닌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 자체가 바로 나의 세트장이고 저주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예수를 믿게 되면 내가 교회에서 목사 되고 장로 되고 한 그 모든 짓이 저주의 짓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그 교회, 성경에서 말하는 그 이스라엘, 그것은 어떻게 생겨나는지가 궁금할 거예요. 그것은 제가 설교 처음에 언급을 했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실 몫이지 우리가 할 것이 아니라고 언급을 했습니다만 그것을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에 보면 교회에 대해서 말하기를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신학교 때에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어요.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이것을 이야기한 책도 없고 주석을 봐도 다 엉터리고.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는 말이지요. 이것은 저만 궁금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도 같이 궁금할 거예요.

우리교회가 교회입니까? 우리교회가 몇 평입니까? 대구는커녕 이 지묘동도 충만 못하는데? 이 지붕 넓혀야 됩니다. 그래야 충만 이거든요. 성경에 보니 교회라 하는 것은 만물을 충만케 한다? 대체 평수를 얼마나 늘려야 만물을 다 덮습니까? 이것은 대체 얼마나 더 커야 되는 겁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는 거예요? 도무지 여기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해 주는 사람도 없고 전부 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어요. 그것을 이 시간에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끊어지는 이스라엘이 있어야 돼요. 끊어지는 이스라엘이 먼저 생겨나고 그래야 안 끊어지는 이스라엘이 끊어지는 그 이스라엘을 딛고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처음부터 끊어지지 않는 교회가 등장하면 사람은 그것으로 설득하고 ‘나 그 교회 등록할래.’ 이렇게 나올 수가 있어요. 그 끊어지지 않는 교회는 없어요. 모든 것이 세트장이고 다 허구입니다. 천주교,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우리교회도 다 이게 교회가 아니에요. 그냥 친목모임이라니까요, 이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나라를 둘로 쪼개십니다.

그것을 어렵게 말해서 다윗언약이 쪼개졌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알았으면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욕심이고요, 남쪽 나라와 북쪽 나라가 나눠져요. 남쪽은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야……, 이런 식으로 왕들이 이어지거든요. 왕들이 이어지면서 그들은 그 유다나라를 끊어지지 않는 나라, 하나님이 진짜 원하는 나라를 만들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려고 애를 쓰는 그것이 그 나라를 멸망시키게 만드는 요인으로 등장합니다. 왕이 되었으면 나라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역대하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대하 19:2) 요새 말로 하면 “왕이여, 예수도 안 믿는 사람과 왜 친합니까?” 이 소리와 똑같은 소리에요. “예수도 안 믿는 사람과 왜 그렇게 친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저주했습니다.” 선지자가 와서 이런 말을 하면 말은 되게 간단한데요, 그 말 들어보면 ‘그러면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라고?’

“실례지만 예수 믿습니까?” “믿어요.” “교회 나가십니까?” “나가요.” “실례지만 복음은 아십니까?” “복음은 몰라요.” “에라, 저주 받았구먼.” 이렇게 되거든요. 이게 선보는 자리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렇게 선보다가 선 깨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지요. 왕이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했기에 하나님의 저주가 당신에게 임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대로 살려면 물어봐야 돼요. “저, 실례지만 총각은 혹시 악한 자십니까? 혹시 여호와에게서 미움 받은 사람 맞습니까?” 물어봐야 돼요.

그러면 어느 인간이 “그래요. 하나님이 날 미워합니다. 나는 악한 자 중에 악한 자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 그래서 하나님이 미워하지 않고 선한자구나.’ 했는데 나중에 보니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 놈은 악한자다.” 하니까 “난 몰랐는데!” “몰랐어도 이미 끝난 일이고 저주 받아야 돼.”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이 땅에서 ‘내가 살아 있기에 산다.’고 했을 때 말씀은 그 사람한테는 지켜질 수가 없습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내가 어떻게든 한 번 살아보겠다고 시도하는 이상은 우리는 다른 사람 없이는 못살고 나한테 이득이 되는 사람은 악한 자든 예수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무조건 붙어야 되고 붙지 않으면 나에게 돈은 안 생기고 그러면 나는 빌어먹고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도 우선이 아니고 말씀도 우선이 아니고 아예 그런 것은 신경 뚝 끊어버리고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는 것이 인생인데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수가 없고 이것은 전부 다 헛짓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무너질 이스라엘이에요. 그것뿐만 아니에요. 그 다음에 여호람왕은 선지자를 핍박을 했고 하나님께서 섬기지 말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를 가지고 여호람왕을 치게 했다고 되어 있어요. 죽을 때도 배가 터져서 창자가 튀어나와서 죽었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 9장 4절에 나오는 언약이고 율법이고 약속이고 영광이고 양자됨이고 예배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던 그 이스라엘을 구약의 역대기나 열왕기에서 한 번 보자는 말이지요. 보게 되면 거기에 하나님 보기에 정상적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정상적이지 않은 그 후손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아무도 이스라엘 될 수 없고 아무도 교회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구원을 못 받는 가장 큰 이유가 뭐냐 하면, 땅이 하늘로 바뀌고 하늘이 땅으로 바뀌어서, 그러니까 내가 땅에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면 그것으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일종의 세트장이고 허구고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사도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해서 저주고 뭐고 왔다 갔다 해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저주 받아도 괜찮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나는 살아야 돼, 나는 구원 받아야 돼, 이미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그런 세상에서 노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이 땅에서 고생하니 천당 가서 편하게 살겠다, 라는 생각 자체가 이것이 곧 저주받은 티를 내는 겁니다. 갈매기한테는 수평선이 없어요.

우리 인간이 뭍에 사니까 수평선 건너에 뭐가 있을까, 하지만 갈매기는 위를 날기에 수평선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 전체가 자기 바다거든요. 사도바울은 저주고 축복이고 간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저주 받아도 괜찮고 축복받아도 괜찮아요. 왜,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자기는 갈매기기 때문에. ‘나는 이러면 저주받을 것 같아, 멸망 받을 것 같아, 재산도 날라가고 우리 집은 망해.’라는 것이 없어요. 사도바울에게는 근심이 없다니까요? 환난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이스라엘, 이 교회는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께서 다 만들어진 그 안에 자기는 그냥 덤으로, 꿀을 발라놓았는지 참기름을 발라놓았는지 미끄러지듯이 빨려 들어간 거예요. 파리 잡아먹는 벌레들 보면 입에서 혀가 길게 나와서 감아 들이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성령께서 쫙 당겨서 감아 들여오니까 ‘아, 우리 친척들 생각하면 내가 저주의 세계로 다시 가서 멱살 붙잡고 데려오고 싶다.’는 말을 넉넉히, 충분하게, 느긋하게, 편안히, 걱정 없이, 안심 푹 놓고,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교회의 충만이에요. 내가 미국에 가서 사나, 독일 가서 사나, 이태리가서 사나, 월남 가서 사나, 아프리카에 가서 사나, 어딜 가서 살아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내가 40대에 죽으나 60대에 죽으나, 암에 걸려 죽으나, 감기 걸려 죽으나, 가시에 찔려 죽으나 전혀 상관없어요. 하나님을 알았다는 겁니다. 5절에 보면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 아멘, 이라는 말에서 넘치는 자신감,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서만 공감됩니다. 느낌 아니까! 아멘!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조차도, 넝마주이 같은, 걸레 같은 찢어진 인생, 엉망진창이고 도대체 연결도 안 되는 인생, 하루하루가 대책 없는 인생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축복이고 “아멘! 하나님이 일 참 잘하셨습니다.” 이게 끊어지지 않는 주의 사랑인 것을 아는 겁니다. 비둘기처럼, 수평선 없는 그 모습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17장 30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알지 못하던 시대, 사도바울이 사람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는 게 아니죠. 이렇게 사람 무시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어이, 네가 세상을 알아? 모르면 가만있어.” 그런 뜻이에요. 알지 못하던 시대, 이 세상 전체를 향해서 뭘 모른다는 거예요. 아주 무식쟁이들만 있다는 거예요.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이 무식한 인간들아! 사람이 죽든 살든 그 의미를 모르겠지? 알 리가 있어, 너희들이! 너희들이 뭘 알겠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분 모르지? 네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세트장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하루하루 죽는 식으로 살면 돼요. ‘아, 내가 이 짓 하면서 죽는구나.’ 매일 여러분이 하는 그 짓거리 하면서 늘 죽으시기 바랍니다. 왜, 죽어도 괜찮으니까,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열심히 다이어트 하시고 조깅도 하시면서 죽으시기 바랍니다. 오메가3 먹어가면서 제발 좀 죽으시기 바랍니다.

송편 먹고 전 구워 먹어가면서 재미나게 죽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이 없네요. 제발 좀 행복하게, 싸우지 말고, 재미나게 꼭 껴안고 죽으시기 바랍니다. 각방 쓰지 마시고 같이 TV 보면서 재미있게, 뭘 해도 그것이 죽는 일이니까. 그리스도의 저주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약도 없고 그냥 이미 주님주신 저주 안에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저주에 함께 참여한 사람만이 주님의 영생, 주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너희에게 생명 줄게.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안 주고 외양간의 소 안 채워주고 포도나무 과실 안주고 내가 너희에게 생명줄 게. 그러면 너희는 나와 함께 죽어야 돼.”

죽는 방법으로 한강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그냥 살아가는 이 자체가 곧 주님께서 허락하신 죽음의 자리인 것으로 받아서 이제 안식의 때가 남아 있으니까 즐겁고 기쁘게……, 더 이상 저주는 없어요. 받을 저주 다 받았으니까. 산다는 자체가 생명의 삶이니까 원 없이 죽고 마음껏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하루하루 무엇 때문에 사는지, 이것이 걸레지 사람 사는 것이 아니고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고, 남 흉내 내고 모방하면서 피곤은 느끼고 절뚝대면서 남 따라는 가는데 대책도 없고 계획도 없고 그냥 삽니다. 주여, 이것이 모든 인간의 죽어가는 모습인 것을 알게 되었사오니 이제는 약도 없고 고칠 수도 고칠 것조차 없는 우리에게 주께서 사랑을 주셨사오니 이 십자가사랑, 이거 하나 자랑하면서, 주님 고마워하면서 행복하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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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간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과연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이 성립되느냐는 것이 중대한 문제로 비칠 것입니다. 그 어떤 힘에 의해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그 ‘그리스도 사랑’이 사도 바울의 시도에 의해서 끊어질 수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개인의 구원에 관심이 없고 다른데 관심을 둡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제대로 이스라엘 답게 드러나려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것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 문제가 아니라 곧 교회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1: 22-23에 보면,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듯입니까? 교회 예배당 지붕을 도대체 얼마나 넓게 키워야 온 천지를 다 덮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이러한 규모는 곧 교회라는 것이 결코 인간의 힘으로 조성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구원이라든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것이 결코 인간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난 마당에서 과연 이스라엘은 뭐냐를 놓고 사도 바울은 ‘저주’라는 표현을 들고 나옵니다.

이는 곧 누구든지 ‘저주’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게로 들어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저주를 받기 보다는 저주를 피하는 식으로 천국에 골인하려고 합니다. 저주를 안 받게 되었다는 되는 상황을 자기 쪽에서 접선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저주는 비켜가거나 피해하지 않습니다.

저주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저주 안에서만 비로소 ‘그리스도 안’이 성립됩니다. 바로 이 사실이 너무나도 실제이기에 사도 바울은 여전히 저주 안에 놓여 있는 자기 친척을 접근하는 방식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즉 자신이 그리스도를 몰랐던 그 시기가 곧 비로소 등장된 저주 그 자체였다는 겁니다.

흔히 저주라고 여기고 있는 사례들이, 자기 신상의 일이 자기 뜻대로 잘 안되고 망하는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을 놓고서 대처하고 대응하는 태도를 통해서 제대로된 저주스러운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곧 신에게 축복받으면 이런 상황이 개선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제대로 된 저주의 진면목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도방식으로 지난 이스라엘이 꾸려왔다는 겁니다. 이스라라엘이라는 하나님의 특수한 작업의 결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지켜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가짜 이스라엘로 굳히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과 규례에 대해서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기에 그런 식으로 설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규례의 완성은 예수님이십니다. 그것뿐입니다. 사람들이 붙잡아두려고 하는 이스라엘이나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친척들이 참된 이스라엘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기에 그들은 아직도 이미 완성된 이스라엘을 믿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가짜 이스라엘 만들기에 열중하기에 참된 이스라엘로부터 끊어져버린 지경에 있습니다. 육신이 벌리는 모든 것은 세트장 만들기에 불과합니다.

인생이란 자기만을 위한 세트장 만들기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가족들은 고인의 유품을 아낌없이 화장터 소각로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그 불 소시게 들어가는 그런 것들은 평소에 고인이 애지중지하고 그리워하면서 눈물짓게 만든 추억과 기억의 흔적이요 소산물입니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소용없는 세트장입니다.

연극이 되면 사정없이 철거되어 다른 무대를 위해서 재조립되는 형편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이 육신으로 움직이는 인생들의 한계입니다. 이 상태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저주 그 자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주개념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육신의 본성상 그러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는 것’은 축복이요 ‘죽는 것’은 저주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3:17-18 에서는 달리 이야기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끊어지지 않고 영원한 교회와 이스라엘은 세트장처럼 설치된 기준의 이스라엘과 교회 배후에 훔겨져 있습니다. 그 세트장이 철거되면서 본래의 이스라엘과 교회가 나오는데 이런 교회만이 ‘만물 위에 충만한’ 그 교회입니다. 구약의 약속이었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뭔지 모르고 오해한 왕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억지로 지탱되어 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역대하 19:2에 보면, 예후 선지자가 여호사밧 왕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봐서 사람들이 더불어 살고 싶은 그런 ‘사회적 두뇌’를 지니고 그 사회성을 발휘합니다. 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자인지 누가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인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본인마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든지 악한 자에 버림받아 마땅한 자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누구든지 일단 자기 정당화를 시도하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부지한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에 자신을 위한 세트장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름다운 배경 풍경을 가져도 자신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져야 될 임시적 현실상입니다.

비둘기에게는 수평선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봅니다. 육지와 바다가 가르는 그 경계선이 철폐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땅에서 떠나 하늘로 갈 생각보다 하늘이고 땅이고 간에 참된 교회, 참된 이스라엘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온 세상에 충만합니다. 아무리 해도 끊어질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 사랑이기에 마음 놓고 세트장 같은 세상을 붙들고 죽어갈 수가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는 것이 곧 죽음인 것을 우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저주 앞에서 비로서 영생이 생겨남을 체험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